제 2 장 출진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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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은 새벽무렵에야 김정필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김정필은 쇠침대에 눕고 정시명은 노전우에 누웠다.
아침에 김정필은 떠나간다. 난징에 가서 딸을 찾아가지고 정시명일행에 한발앞서 서울로 들어간다. 그래 저녁상을 물린 후에는 지금까지 사업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자기 침실로 돌아가겠다는것을 굳이 붙잡았다. 김정필에게는 이 밤이 이국의 하늘밑에서 보내는 마지막밤이 아닌가.
정시명은 어쩐지 그 마지막밤을 자기 잠자리에서 보내게 하고싶은 감상에 젖어있었다. 김정필이 자꾸만 궁싯거리고 그럴 때마다 쇠침대가 삐그덕거리는것으로 보아 확실히 김정필에게서는 생각이 많은 저녁이다.
《정향형, 자나?》
김정필이 노전에 허리를 붙인 정시명이 쥐죽은듯 잠잠하자 이렇게 불렀다.
정시명은 입가에 미소를 담으면서도 일부러 데면데면한 어조로 응수하였다.
《음… 난 좀 피곤해.》
몇시간 지나면 먼길에 오를 김정필이 얼마간이라도 눈을 붙여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도 김정필이 무슨 이야기라도 다시 꺼내주었으면 싶다.
정시명은 김정필과 더불어 지낸 나날들이 몇달 되지 않았어도 참으로 마음이 편안하였다. 학창시절에 있었던 가지가지 이야기들이 둘의 사이에 떠오를 때면 정시명의 마음에도 젊음이 돋쳐 끝없이 펼쳐지는 추억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수리개마냥 훨훨 나래치군 하였다. 한바탕 신이 나는 이야기에 묻혔다가나면 내게도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막역한 친구가 있었던가싶어 얼마나 다행스러웠던가.
지금까지 그가 상종해온 사람들은 공작상 필요로부터 이어진 벗들이거나 아니면 적들이였다.
그는 벌써 20년 방랑생활에서 자기를 잊어버린지 오랬다.
멀리로 아득히 멀어져갔던 생활, 비껴갔던 생활의 향기와 정감을 김정필이 안아온것이다. 세월없이 흐르던 시내물의 조잘거림도, 방학이면 신이 나서 달려가던 고향의 동뚝길도, 서울 궤도전차의 딸랑거리는 종소리도, 티각거리다가도 얼싸안고 돌아가던 학우들의 따스한 입김도, 재미나게 옮겨지던 벗들의 련애담도 김정필이 안아온것이다. 순간의 실수로 목숨도 잃을수 있는 하루를 보내고 몰려든 피로를 그러한 이야기속에 가뭇없이 씻어갈 때면 정시명은 《아, 삶이란 얼마나 귀중한것이냐.》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으로 때없이 흐뭇해지군 하였다.
김정필의 숨소리가 커졌다.
(저 친구, 벌써 잠든게 아니야?)
정시명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상반신을 일으켜 친구의 잠든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에잇, 벌써 곯아떨어지다니…)
김정필의 앞에서는 허물됨이 없었다. 아무런 이야기도 간격을 버리고 할수 있다. 몸가짐도 마음가짐도 구태여 가꾸느라 왼심을 쓸 필요가 없다. 너무도 서로를 잘 아는 터이라 생겨먹은 그대로 통하면 된다. 그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정시명은 비로소 깨달은것 같다. 참으로 마음을 터놓을수 있는 혈육도, 친구도 없이 헤염쳐온 20년간의 망명살이에 처음으로 찾아든 행복이였다.
이래서 옷은 새옷이 좋고 친구는 오랜 친구가 좋다는걸가.
코고는 소리가 났다. 고지식한 김정필이 무슨 말을 할듯 싶었는데 정말로 자기 말을 곧이 듣고 생각을 지워버린 모양이다.
정시명은 자리에서 살그머니 일어나 벽장에 감추어두었던 빼주 한병을 꺼냈다. 그리고 마른 명태 몇짝을 꺼내 잘게 찢었다. 며칠전에 마동열이 가져온것이였다. 정시명이 저녁마다 한잔씩 하고 잠들라고 마련해오군 하지만 실은 마동열이 정시명이 몰래 마셔버리는 술병이 더 많다.
정시명이 놋잔까지 꺼내놓고는 김정필을 조용히 흔들었다.
김정필이 벌떡 일어났다. 늘 신경을 곤두세워가지고 살아온 탓으로 이 무던하기 그지 없는 사람도 예민한 감각이 굳어진 모양이다. 김정필이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등잔불밑에 차려진 술판을 보더니 대번에 입귀가 가로 째졌다. 그래도 침대에서 내릴 차비가 아니다. 선잠에서 깨여나기가 아수한 모양이다.
《에잇, 못난이. 잠은 서울 가서 실컷 자라구. 작별주야 들고 떠나야지.》
정시명이 그가 아직도 걸치고있는 담요를 훌렁 벗기며 유쾌하게 말했다.
그제서야 김정필은 씨무룩이 웃으며 《작별주는 무슨 작별주. 이제 인차 서울에서 만나겠는데. 서울에 가면 인차 우리 고향에 함께 가자구.》 하며 침대에서 내렸다.
《경주법주를 동이채 내놓으리다.》
《하하하.》
그들은 사뭇 즐겁게 웃다가 정시명이 《쉿!》하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서야 둘은 동시에 뚝 그쳤다. 나무로 지은 건물인데다가 간벽이라는것도 목삭판이여서 옆방에서 울리는 기침소리마저 들리군 한다.
《정말, 김형이 가져오는 법주가 일품이였소.》
정시명이 목구멍이 화끈 달아오는 빼주 한잔을 마셔버리고는 감회에 젖어 중얼거리였다.
예로부터 경주법주라면 령남이 자랑하는 3대명산의 하나이다. 청주빛갈처럼 술 빛갈이 노르므레하게 곱고 향기 또한 그윽한데다가 감칠맛이 좋아 리조시기에는 왕실에 가야 맛보았다고 한다. 배재고등학교시절에 김정필이 방학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의례히 열홉들이 오지항아리에 목까지 채워와서는 신포친구가 메고온 북어를 씹으며 마시군 하였다.
김정필이 명태쪽을 씹으며 느닷없이 《여보게 정향형, 맏이가 이젠 몇이 되더라?》 하고 물었다.
《우리 맏이가?… 음, 스물하고도 여섯이 됐지. 갑자기 그건 왜?》
김정필의 눈이 의뭉스럽게 쭝깃거린다. 정시명이 이내 김정필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하하…》
정시명이 그만에 속이 텅 빈듯 한 웃음을 터뜨려놓았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그치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흉중에서 알찌근한것이 매달려 가슴을 후비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정필이 상대방의 속셈은 생각못하고 나무라운 소리를 한다.
《왜?…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아라… 이건가?》
《아, 아니.》
정시명이 김정필의 엄청난 곡해에 당황해서 고개를 들고 빙그레 웃기부터 하며 그의 잔등을 쿡 찔렀다.
《우리 딸은 안팎으로 절색일세. 자랑같네만 거기다가 면무식은 했거던…》
김정필이 일부러 화가 돋친 어조로 말했다.
《이보게, 김형. 난 지금 우리 맏이가 살아있는지도 몰라.》
《원, 끔찍한 소리. 설마…》
김정필이 가슴이 선뜩해서 정시명의 어기가 질린 말을 대바람에 막아버린다.
《설마가 아닐세. 왜놈들이 내가 서울서 수배령을 받고 숨어다닐 때에도 우리 부친과 처를 붙잡아다가 곤장질을 마구 해댔다고 하더군. 살아있더라도 그앤 산골에서 무지렁이로 살고있을걸세.… 그러루한걸 생각하느라면… 자네 딸이야 도회지에서 자라나 공부까지 한 이를테면 신녀성이지.》
정시명의 비감이 서린 이야기가 뜻밖으로 번져가자 김정필이 비워둔 잔들에 술을 부었다.
《정향형, 너무 상심말게… 좋네. 좋아. 그 문젠 우리 서울 가서 아퀴를 지읍세. 무지렁이면 어떤가. 팥 심은데서 팥이 나겠지. 그 애들이 행복하게 지내는걸 보느라면 우리 지나온 험한 인생도 보람이 더 클게 아닐가. 자, 잔을 내라구.》
《난 딱 한잔이 주량인데.》
《원, 친구의 단잠을 앗아내고는 저는 수염 뻑 씻고 샌님구실 하겠다는건가? 에, 이제 석잔을 더 들어야 하네. 첫잔은 조국의 광복을 축하해서, 둘째 잔은 새로운 투쟁의 승리를 축원해서, 셋째 잔은… 셋째 잔은 뭘 위해서 든다?… 그렇지, 자네 춘향이가 제발 젊어있기를 바래서…》
《허허, 좋네. 좋아.… 까짓거 한잔은 더 듭세. 자네 부인의 명복을 위하여…》
정시명이 김정필이 내미는 잔을 받아드는데 별안간 되알진 총성과 함께 유리쪼각이 산산쪼각이 되여 날아들었다. 정시명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정필의 어깨를 눌러놓고는 등잔불을 꺼버렸다. 련이어 벼락치듯 총성이 울리고 유리창이 뎅강뎅강 깨져서 날렸다. 김정필이 날쌔게 기여가서 권총을 잡고 벽에 붙어선다.
《조선놈들 나오라!》
사이사이 고함소리가 들렸다. 서툰 억양으로 보아 중국사람들의 소리다.
《강도단이요. 우리가 제놈들의 돈줄을 끊어놓으니 분풀이하러 온거요.》
정시명이 재빨리 정황을 판단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판단은 정확하였다. 《한교사무처》의 활동으로 심양, 천진, 대련일대에서 일확천금의 기회를 놓치게 된 중국인무장강도단들이 무리지어 달려든것이였다.
총성이 점점 몰방으로 터지고 고함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달빛에 얼른거리는 놈들을 어림짐작으로 내다보니 스무나문명 잘될것 같다. 놈들은 총을 마구 란사하고 수류탄까지 던지면서 얼마 크지 않은 2층건물을 단숨에 요정내려고 날뛰였다.
《정향형, 이건 정향형을 노리는거요. 현관에 나가주오.》
김정필이 놈들에게 대응사격을 하다가 소리질렀다.
《김형, 창문에 너무 나서지 마오. 허리는 낮추고.》
정시명은 그의 걱정에는 개의치 않고 김정필의 사격자세가 위태로와 명령조로 소리쳤다.
강도배들은 수적우세를 믿고 계속 덤벼들었다. 총격전이 치렬해지는데 갑자기 그놈들의 배후에서 기관단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따르륵! 따르륵!》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교사무처》에 소속된 중국사람들이 강도배들의 등뒤에 나타나 기관단총으로 련발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던것이다.
정시명과 김정필이 바깥형편을 보려고 사격을 멈추는데 남아있던 창문이 쨍가당-하고 깨지면서 시꺼먼 물체가 날아들었다. 수류탄이였다. 정시명도 김정필도 묵사발이 되고 말 위기일발의 순간이였다.
《엎디라!》
정시명은 그쪽으로 나서며 구령을 쳤다.
그찰나 김정필이 홱 돌아서서 정시명을 옆으로 힘껏 밀어던지며 수류탄을 들었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비호같이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창밖으로 던지면 되겠는데 너무 급해 맞은 나머지 정시명을 살려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에 떠밀려 몸을 던졌던것이다. 김정필이 틀어쥔 수류탄은 그가 마당에 떨어지기전에 허공에서 폭발하였다.
이 모든 일은 순간에 벌어졌다.
정시명이 창문에서 뛰여내리고 전우들이 마당으로 쓸어나왔다. 정시명은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채 숨이 진 전우를 끌어안자 너무도 억이 막혀 눈물도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것이 순간에 정지되여버린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광복된 조국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무참히도 숨지다니… 서울에 가서 나라 위해 공을 세워보겠노라 그리도 큰 꿈을 속삭이던 귀중한 친구였다.
홀로 집을 지키며 아버지를 기다리고있을 딸이름을 조용히 불러보며 때로는 두눈에 이슬을 담던 다감한 동지였다. 이럴줄 알았으면 지난 여름에 고향으로 기어이 등을 떠밀어보내야 했다는 후회가 가슴을 저며내는듯 했다.
자기의 우유부단한 처사가 미더운 옛 친우를 이 지경으로 만든것만 같다. 방금전에 술잔을 권하며 작별주라고 했던것까지 크게 후회가 되였다.
(정말 이렇게 작별하자고 깨웠던가. 그 잔이 고별주가 되고 말았구나.)
지난 시기 숱한 전우들이 대륙의 전장터와 백색테로의 피비린 도살대에서 흔연히 웃으며 쓰러졌지만 이렇게도 절통해보기는 처음이였다. 수십년세월 모진 고생 다 겪으며 소원했던 그것이 마침내 성취된 오늘에 와서 그리도 밟고싶던 고향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비명에 쓰러진 김정필의 가슴에서는 정시명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피에 젖은 사진 한장이 나왔다. 안해의 사진인듯 싶었다. 아련히 웃고있는 그 모습이 사무처의 전우들을 더 크게 울렸다.
정시명은 이틀동안 식음을 전페하고 말한마디 없이 지나다가 그 허우대 큰사나이가 한줌의 재가 되여 사기단지안에 자리를 잡았을 때에야 비분의 눈물을 뿌리며 통곡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