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출진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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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기 방에 들어서자 마동열이 기다리고있다가 손님이 찾아와 대기하고있노라고 전했다. 정시명의 묻는듯 한 눈길에 접한 마동열이 간단히 설명했다.
《매우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정시명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마동열이 되돌아가서 장개석군의 대위견장을 단 한 중년사나이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옳구만! 왼쪽날개!》
사나이가 먼저 알아보고 탄성을 지르며 뛰여와 다짜고짜 정시명을 얼싸안는다.
길쑥한 얼굴에 관자노리가 조금 나오고 푹 꺼져든 눈확우로 이마가 두드러져나온 모색이 어데선가 보아두었던 모습이다.
상대방의 순해보이는 얼굴을 세세히 뜯어보며 희미해진 옛 기억을 더듬던 정시명이 문득 생각이 나서 부르짖었다.
《아니, 이게 누구요?! 배재고등의 문지기 김정필!》
서로 얼싸 안고 돌아가는 두 사람의 얼굴에 상봉의 기쁨과 환희가 밝게 피여났다.
김정필은 서울 배재고등학교 축구팀의 문지기, 정시명은 왼쪽공격수였다.
독서회에도 같이 다녔고 6. 10만세투쟁에도 선두대렬에서 어깨겯고 나란히 행진해갔다. 조선공산당 역원으로도 함께 활동한바가 있다. 스무해전에 일제의 지명수배도 함께 받고 압록강도 함께 건넌 막역한 옛 친구였다. 김정필이 부둥켜안은채 말을 잇는다.
《이보게 생각나나?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정시명이 김정필의 흐느끼듯 갈린 소리에 목소리를 합쳤다.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떠밀어서
나를 떠나가게 하니
간다한들 영 갈소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다 읊고나자 그들은 호탕하게 웃는데 둘다 눈부리가 벌깃해진다.
이는 민족주의운동의 거물인 도산 안창호가 1910년경에 반일애국단체였던 신민회의 결정으로 미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를 때 마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조국산천과 하직하면서 읊조렸던 거국가였다. 그후에 《망명자의 노래》로 널리 애창되던 노래였다. 그들도 압록강을 건넌후 중국땅에 올라서서 조국산천을 피눈물속에 바라보며 목청을 돋구어 이 노래를 불렀던것이다.
그들이 노래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다음에야 그때까지 어지간히 긴장해서 새로 나타난 손님을 살피던 마동열의 얼굴도 벙글써해졌다.
그는 이내 마음이 놓여 밖으로 나갔다.
《어제 교민대회에 우연히 참가했지. 자네 얼굴을 봤네. 그런데 정향이라고 소개하기에 혹시나 했는데.》
《중국관내에 들어와서 이름을 고쳤네. 자네도 앞으로 그렇게 불러주게.》
《음… 그렇게 하지. 참 이게 몇해만인가!》
그들은 서로 두손을 맞잡은채 깊은 감회에 잠겨들었다.
압록강을 건는후 김정필은 큰아버지가 먼저 솔가하여 자리를 잡고 산다는 허이룽강쪽으로 함께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정시명은 자기까지 페를 끼칠수 없다고 굳이 고개를 저었다. 보다는 상해에 본거지를 둔 민족주의운동에 뛰여들고싶은 열망이 간절해서였다. 그렇게 헤여진 후로는 서로 소식을 모르고 지내왔다.
《흥룡강성에 갔다가 독립군에 들어갔네. 한두해 일본놈들과 불질을 해봤지. 에… 안되겠더라구. 뿔뿔이 흩어졌지. 떠돌다가 장개석군에 들어갔네. 얼마전에 이국살이를 마치고 조국에 돌아갈 승인을 받았지. 그래 돌아가는 수속절차를 알아보려고 심양에 왔다가 자넬 이렇게…》
김정필이 이렇게 20년 곡절많은 인생을 간추려서 단숨에 엮어댄다.
《아직 홀몸인가?》
《웬걸, 잘 생긴 딸이 있지. 난징서 색시 구했지. 신통히도 고향이 나와 같은 경상도태생이였네. 내겐 과남하게도 미녀였지. 절색단명이라고 구름처럼 떠도는 나를 기다리다가 딸 하나 남겨놓고 광복을 두달 앞두고 저세상에 갔네. 왜놈들이 도망치면서 학살했더구만.… 수속이 끝나면 난징 가서 딸을 찾아가지고 인차 고향에 가려네. 집떠나 20년, 생긴건 주름살이고 얻은건 이 누런 장교복 한벌밖에 없네만 그래도 어미닮아 고운 딸 하나 앞세우고 고향집뜨락에 들어서게 됐으니 참 다행일세구려. 허허… 며칠전에 그 애 편지를 받았는데 고향에 간다니 그 애도 요즈음은 붕 떠서 살아간다네. 허허…》
김정필이 연신 창자가 텅빈듯싶은 웃음을 터치는데 헐끔한 얼굴에 한없는 비애와 슬픔이 가닥가닥 어려있다.
그 눈길을 슬며시 외면하며 고개를 돌린 정시명의 마음도 처량해졌다.
20년 고행끝에 그래도 저 량반은 딸이라도 하나 얻어가지고 고향집에 들어선다. 어떻게들 지내고있는지?… 안해와 자식들의 얼굴이 우렷이 떠오른다.
세월이 하도 흘러 깊은 밤 꿈자리에 들면 쉽게 떠오르는 모습들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표상이 명료하지 않아 어떤 때는 처자식앞에서 심심히 속죄하기도 하는 그였다. 하기는 그 세월에 향학열에 들뜨고 시대사조에 잠겨들어가지고 애당초 처자식에게 정을 두고 살아본적도 없었던것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부부간의 살뜰한 정을 바라는껏 안겨주지 못하고 무정한 세월을 속절없이 기다리게 하는것이 죄스럽기만 하다.
《참. 내 말만 말이라고… 그래 정형의 춘향이는 어떻게 지내는가?》
김정필이 자기의 사말사만 엮어댄것이 미안쩍어 화제를 옮겨놓는다. 배재학교시절 그들의 학급에는 신랑쟁이가 여러명 있었다. 고향 떠날 때 정시명이 두 아이 아버지였다는것을 그도 잊지 않고있었다.
《잘 있겠지.》
《소식은 모르나?》
《모르네.》
《그쪽에서도 정형의 소식을 모르는가?》
《모르겠지.》
정시명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다. 하긴 그가 어떻게 해마다 학생복차림을 한 작은 수첩만 한 크기의 그의 사진을 놓고 제사를 지내고있는 고향집의 기막힌 사실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정시명은 구슬픈 추억에서 벗어나고싶어 우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날 밤 그들은 함께 잠자리에 들었어도 오래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무렵에야 잠에 들었던 김정필은 아침을 치른 뒤에 《이보게 정형.》 하고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김정필은 가명을 불러달라는 정시명의 부탁을 뜻있게 받아들인지라 아침부터 부름말을 달리했다.
《난 이런 생각을 했네. 정향형은 무엇인가 뚜렷한 자기의 지향점을 안고 여전히 살아간다고. 학창시절에도 우리들의 길잡이였지.… 오늘 우리 시대에 똑똑히 사는 인생이란 무엇이겠는가. 그건 우리가 청춘시절에 찾아 헤매였던 그 진리의 길에서 보람을 찾는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확신이 맞는다면 나를 예전처럼 가까이 해주게.》
순해보이는 그의 눈에 진지한 빛이 어리였다.
《그러면?… 자네가 입은 이 대위군복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나?》
《그렇다면 정향형의 이 대령옷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필요해서…》
《피차에 그렇게 생각해주게. 난 이젠 이 땅에서 결산을 치른 사람이니 구태여 감출것도 없는 사람일세.》
뜨거운 우정이 넘치는 눈길이 마주쳤다. 정시명은 열렬하게 그의 두손을 잡아흔들었다.
김정필은 자신이 10년동안 국민당군대에서 혁명조직의 임무를 수행하였다는것과 장차 새로운 투쟁에 참가할 포부를 안고 고향에 간다는것을 실토하였다.
김정필의 고향은 경상도 경주였다.
학생시절의 김정필은 우정에 충실하고 벗들과의 교제가 넓고 어질면서도 활동적인 열혈청년이였다.
세월의 년륜은 그에게 주름살만 깊이 새겨준것이 아니라 투사다운 굳세고 세련된 미와 향취를 풍기게 해주었다.
정시명은 새로운 투쟁무대에 오르면서 너무도 쉽게 믿음이 가는 동지를 얻게 되여 여간 흡족하지 않았다.
김정필은 함께 움직이겠으니 자기를 《한교사무처》에 받아달라고 하였다.
그 소리에는 정시명이 심중해졌다.
《이보게, 이왕 떠나는 길이니 곧바로 조국으로 가게. 집에 소식을 전했다니 얼마나 기다리겠나. 난징에 있는 딸도 귀향길이 미루어졌다면 섭섭해할게 아닌가. 먼저 가는것도 필요하거든. 우린 아직 여기서 몇달은 더 일을 해야겠네.》
그러나 김정필은 한사코 자기를 수하에 받아달라고 떼질을 하였다. 타향에서 겨레를 위한 마지막봉사인데 꼭 참가시켜달라는것이였다.
하는수 없어 정시명은 내키지 않는 마음에서 반승낙을 하고 김송일한테로 그를 데리고갔다. 그라도 인원이 찼다는 핑게로 도리질을 했으면 했는데 정시명의 소개말을 듣더니 두말없이 그에게 손부터 내민다.
《부처장의 의향이신데 내게 가부를 물으실게 있소.》
이리하여 김정필이도 《한교사무처》사업에 인입되였다.
《한교사무처》가 심양시 복판에 커다란 현판을 걸고 사업을 시작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귀국민들도 찾아오고 강도들에게 략탈을 당한 중국사람들도 송사를 하려고 찾아왔다.
당시 이곳은 조선인뿐아니라 미처 귀국하지 못한 일본인들과 중국내륙에서 온 피난민들까지 겹쳐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이 틈을 타서 나쁜 놈들이 작당하여 인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재물을 략탈하였으며 부녀자들을 백주에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서 공공연히 릉욕하였다.
극도의 사회적불안이 조성되여 그야말로 심양일대는 범죄의 마굴로 전락되여갔다.
그러던 심양에 현판까지 버젓이 내붙인 《한교사무처》는 이 일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동북의 민심이 《한교사무처》에 쏠리게 되자 기세를 얻은 김송일은 심양의 질서를 바로 잡으며 조중인민의 생명재산을 지키는 사업을 걸싸게 벌려나갔다.
《한교사무처》는 무장부대까지 인입하여 시안의 질서를 교란시키며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로략질하는 수많은 떼강도배들과 비적들을 숙청하였다. 어떤 때는 시내와 린근농촌지역들에서 격렬한 총격전도 벌렸다. 심양시를 비롯한 동북지역의 장개석의 관할밑에 있는 주요 조선인거주지역의 치안은 점차 안정되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