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출진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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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큰일이 났습니다.》

큰키에 이목구비가 굵직굵직하게 생긴 마동열이 갔다온 이야기를 하고나서 한마디 덧붙이는것이였다.

《큰일이 나다니?》

《지금 동북지방의 교포들이 말이 아닙니다.

귀향길에 오른 사람들이 무리로 죽어가고있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어째서 귀향길에 오른 사람들이 무리로 죽어간단 말이요. 누구한테 말이요?》

정시명은 마동열의 어정쩡한 이야기에 대번에 기가 뻗쳐 올라 말꼬리가 높아졌다.

《누구겠습니까. 일본놈 패잔병들과 마적놈들이지요. 제가 밀양간다는 사람과 기차를 함께 타고왔는데 처와 두자식이 마적패에 걸려죽고 고향간다고 꿍져온 약간의 재물마저 다 털리웠다고 합니다. 그 오라질눔새끼들이…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광복이 된 오늘에까지도 우리 교포들이 이역땅에서 죽어가는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사람이 어질면서도 대가 곧고 의협심이 강한 마동열이 큰 주먹을 부르르 떨며 울화를 터뜨렸다.

정시명도 주먹이 떨렸다. 스쳐보낼 일이 아니라고 단정하였다.

오늘에 와서 이역땅에서 생죽음을 당하다니. 너무도 분통한 일이다.

자기 아들딸들을 품에 안아줄 참다운 조국이 없을 때엔 그런대로 살이 떨려도 참는수밖에 없었다. 당당한 주권행사를 하게 된 조국을 두고있는 지금에야 또다시 이방의 무리들에게 짓밟히고 수모받는것을 용납할수 있는가.

이걸 모르고있었다면 떠날수 있어도 일단 알게 된이상 정시명은 훌떡 떠나갈수는 없었다.

서울에 가기 전에 우선 동포들에게 닥쳐든 이 재난부터 막아주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장개석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동북 3성은 일본놈들이 패망한 후 장개석이 통치하고있었다.

그러므로 관권을 업은 공개적인 무장조직을 꾸려가지고 판을 크게 벌리자면 장개석을 내세워야 동북지역의 마적패들과 일본패잔병들의 횡포를 막을수 있었다.

정시명은 곧 난징으로 갔다. 장개석군대의 유일한 조선인장성이던 훈련국장 김송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정시명이 새로운 조직체를 내올것을 구상하면서 김송일과의 사업을 먼저 생각한것은 그의 영향력을 리용하자는데 있었다.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있을 당시 2기 졸업생으로서 장개석과도 가까이 상종하였던 김송일은 국민당이 관할한 륙군대학까지 졸업하고 장개석의 특별한 신임을 받고있었다.

김송일은 완고한 민족주의자로서 김구 《림정》에 동조하면서도 반일을 제창하는 좌익세력도 우호적으로 대하고있었다. 그는 중경에 있을 때 정시명과 몇번 상종하였는데 대번에 그의 인간됨에 반하여 정시명의 말이라면 무겁게 받아들이군 하였다.

정시명이 방에 들어서자 안락의자에 앉아 부하장교의 보고를 듣고있던 김송일은 뚱뚱한 몸을 일쿼세워가지고 《아, 정향선생이 오셨소이다.》 하고 뚱기적거리며 반갑게 마주 나왔다. 그는 부하장교에게 보고는 한시간후에 청취하겠다고 내보내고 담배부터 권하였다.

《양담배인데 맛이 괜찮소다. 정선생이야 담배부터 내놓아야 좋아하시지.》

정시명이 김송일이 권하는 쏘파에 앉자 그도 재털이를 들고와서 그 옆에 나란히 앉는다.

《그새 소식이 없더니 웬일이시오? 혹시 조국으로 떠나시지 않았는가 해서 궁금했소이다.》

《아니, 그런 인사불성이야 있겠습니까. 떠난다면야 김형께 하직인사야 올려야지요. 오늘은 긴히 상론할게 있어 왔소이다.》

정시명은 부관이 들고온 차잔을 받으며 신중하게 인사말을 건네였다.

김송일은 어서 말을 꺼내라는듯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다른게 아니고 전일에 친구에게서 들은 소식인데 동북지방의 조선사람들의 처지가 입에 올릴바가 못됩디다. 나라는 광복되여 한해가 가까와오는데 동북오지에서는 일본놈패잔병들이 무시로 출몰하고 게다가 치안이 문란한 틈을 타서 마적놈들의 행패가 극성입니다.》

《음… 그래서요?》

김송일이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이마를 찌프리며 말을 받는다.

《무슨 방책이 없을가 해서 김형한테 왔습니다.》

《하, 나야 무슨 방책이 따로 있겠소이까. 정선생이 고견을 내놓으면 나도 기꺼이 따르리다.》

김송일의 말은 진심이였다.

우직한 성미를 타고난 김송일은 창조적인 사고력을 가진 인간은 아니였다.

그런데 그 타고난 성미가 사람들간에 변덕이 없는것으로 하여 때로는 사랑과 존경을 받기도 하는데 그 무지에 가까운 충직성이 장개석의 눈에 들어 조선인으로서 첫 장성별을 따내게 했던것이다.

로회한 정치적수완가로 자처하는 장개석에게는 사고하는 두뇌보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두뇌가 더 쓸모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북에 〈한교사무처〉라는 조선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돌봐주는 거류민단체를 꾸렸으면 합니다. 그래서 중국 여러 지방에 산재하여있는 조선인조직들과 련계를 가지면서 그들이 귀국할 때까지만이라도 우리가 나서서 동포들의 편의를 도모했으면 좋을듯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조선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주자면 어차피 무장을 잡은 사람들의 행정조직이 있어야지 민간단체로서는 어림이 없습니다.》

정시명이 취지를 저저히 설명하자 김송일은 대뜸 무릎을 치며 동감을 표시하였다.

《옳소. 그게 좋겠소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도 중요하지만 그 책임자를 어떤 분을 내세우는가 하는것인데 내 생각에는 수고스러운대로 김형이 직접…》

《내가? 난 그런 일은 못하오. 나야 무인이 아니요.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라면 거야 벌써 정사지요. 난 누구하고 말싱갱이를 하고 연설을 하고 수를 내서 백성을 다스리는건 아예 질색이요. 그리고 내 모르는 소견에도 무관이란 정사에 관여해서는 안될 법인줄 아오.》

김송일은 자기 식의 주장을 펴며 정시명의 호의를 조심히 그러면서도 완고하게 사절하였다. 정시명은 그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어느해 김송일이 정시명과 같이 중경에서 김구가 주관하는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조선독립을 운운하면서 차분하게 흐르던 모임이 자아수양과 실력배양을 부르짖는 안창호와 무력항쟁을 주장하는 리동휘의 연설이 엇바뀌면서 열이 올라 미구하여 연단을 저마끔 차지하느라고 주먹싸움까지 벌어졌다.

원래 《림정》의 소란스러운 집안꼴에 환멸을 가지고있던 김송일이 오만상을 해가지고 그네들이 하는 짓거리를 쏘아보다가 권총을 뽑아들고 벌떡 일어났다.

《에잇, 잰내비같은것들!》

김송일은 연단에서 추태를 벌리고있는자들의 머리우로 권총을 마구 쏘아댔다.

벌둥지처럼 소란하던 회의장이 삽시에 조용해지고 연단에서 주먹질을 하던자들도 혼비백산해서 매 본 까투리처럼 연탁뒤에 고개를 틀어박았다.

《림정의 정사라는게 이런건가? 구린내가 난다! 정향선생, 선생은 뭣하러 저런 어지러운 놈팽이들과 어울리는거요. 갑시다.》

김송일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일후 김송일은 다시는 《림정》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김송일이 두말을 못하게 돌아앉자 정시명은 난처해졌다. 김송일을 놓친다면 《한교사무처》의 조직이 불가능하며 설사 조직한다 해도 큰 의의가 없을것이다. 그를 끌어당기는것은 장차 남조선사업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벌써 정시명의 머리에는 남조선에서 그가 차지하게 될 위치가 선명히 그려져있었으며 그와의 사업목표와 방법이 일목료연하게 세워져있다. 물러설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든지 김송일을 가까이 끌어당길것을 결심한 정시명은 말을 잠시 멈추고 김송일의 유들유들한 얼굴을 엄숙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숱이 많은 눈섭밑에 유별히도 광채가 번뜩이는 부리부리한 눈망울에 위엄이 어릴 때면 누구나 등골에 찬바람을 느끼게 한다. 김송일이 정시명의 그 랭담하고 무게있는 눈길에 질려 슬그머니 외면을 하자 정시명은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김형, 난 이렇게 하는것이 김형을 위해서도 의로운 일로 생각하고 기꺼이 찾아왔소이다. 까놓고 말해서 내나 김형이 이국의 하늘아래서 반생을 전란에 바쳐왔다지만 내 나라, 내 동포를 위해 돌팔매 한번 해본적이 있소? 그런데 어찌하여 김형은 백의동포를 위한 이 자그마한 봉사마저 마다하시오? 이제 조국으로 돌아갈 때 삼천만겨레를 위해 무슨 장한 일을 했노라 하시겠소?》

《아, 아니 그런게 아니웨다. 내 아까 말했지만 정향선생도 내라는 위인을 잘 아시지 않소.》

김송일은 더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몰아대는 정시명의 말에 맥락이 없이 대답을 했다.

《그러면 좋습니다. 김형이 허락하신다면 내가 김형을 받들어 그 사업을 보겠습니다.》

《정향선생이 직접?…》

《결심을 내리시오.》

목표가 설정된 이상 정시명은 물러서거나 동요할줄을 모른다. 끝까지 검질기게, 완강하게 내밀어 시도했던바를 성사시키고야 물러서는게 정시명의 기질이였다.

마침내 김송일이 요구에 응해나섰다.

그들은 이날 중국동북의 3성중에서 조선인들이 제일 많이 모여사는 랴오닝성소재지 상해에 《한교사무처》를 두기로 실무적인 합의를 보고 차후행동계획까지 토론하고 헤여졌다.

그 다음날 김송일은 정시명과 함께 장개석을 직접 찾아갔다.

김송일은 정시명을 소개하고나서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동북지방의 실태에 대하여 말하고는 그곳에 가서 얼마동안 일하게 해달라고 제기하였다.

장개석은 동북의 조선사람들에게 자기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불어넣을수 있다는 정치적타산이 서자 그들의 요구대로 《한교사무처》설립에 관한 명령서를 즉시에 작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김송일을 처장으로 임명하였다. 동시에 김송일이 현지에 가서 주둔군과의 사업도 해야 한다고 선심을 쓰면서 동북보안장관부 고급참모로 임명하였다.

장개석은 김송일의 제의에 따라 정시명을 한교사무처의 부처장으로, 륙군대령으로 임명한다는것도 즉석에서 발표하였다.

김송일은 《한교사무처》의 조직운영과 관련한 사업은 전적으로 정시명에게 밀어놓았다.

정시명은 김송일의 이름으로 마동열과 안지생을 비롯한 여러명의 전우들을 장개석군대의 별을 달아 《한교사무처》에 받아들이였다.

김송일이도 어느날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눈밑에 마마자국이 남아있는 리창순이라는 사람을 데리고왔다. 로어에 능한데 동북지방에 가면 로씨야사람들과 자주 맞다들수 있으므로 쓸모가 있을것이라는것이였다.

김송일은 국민당중앙의 지시라면서 두명의 중국사람도 데리고왔다.

정시명이 《한교사무처》에 구태여 중국사람을 두는것이 재미없다고 말했으나 김송일은 장개석비서실의 전화부탁까지 있었다고 하면서 난처해하였다.

그래 정시명은 그 어느 연줄을 탄 밀정들일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이였다.

《한교사무처》의 역원이 다 꾸려지자 그들은 군용비행기편으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정시명은 상해에 몰려와있는 조선인거류민들과 피난민들을 모여놓고 《한인교민대회》를 크게 열었다. 《한교사무처》의 현판식도 그들이 지켜보는데서 벌려놓았다.

당시 상해에는 정착되여있는 조선사람이 3만명을 헤아렸다. 여기에 조국으로 귀국하기 위하여 동북 3성과 중국관내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을 합치면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대체로 남조선으로 갈 사람들이였다.

다음날 정시명은 김송일을 앞세우고 장개석의 동북보안장관부에 가서 《한교사무처》가 활동을 시작하므로 지원해주며 동북지방의 유일한 조선인교민권익옹호조직으로 인정해줄것을 요구하였다.

이미 장개석의 비서실로부터 통보를 받은 장관부에서는 그들이 요구하면 병력지원도 주겠다는것을 약속하였다.

돌아올 때 김송일이 장관부의 사령관을 만나 지체하자 정시명이 혼자 사무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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