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장막을 헤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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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후 정시명은 한강변의 오리나무숲에서 길철이부터 만났다. 길철이도 며칠밤을 밝히고왔는지 꺼칠해보였다.
물오리가 유유히 감돌고 뭇새들이 신비한 가락을 뽑는 강반의 운치가 장관이였으나 지금 그들은 시정에 취해있을 시간이 없었다.
길철이 먼저 그사이 쏘미협상과 관련하여 입수한 자료들을 보고하고 연구해온 방안을 내놓았다.
《정향동지의 통보를 받고 군정청 공보여론조사과장인 연장성을 통하여 재확인하였습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무성이 연막속에 두고있다는 셋째방안에 대해서는 연장성동무도 아직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모든 동무들에게 지시를 떨구었습니다. 특히 정보모략기관들에 있는 동무들에게 특별히 강조하여 임무를 떨구도록 하였습니다. 입수된 자료에 의하면 지금 미군정청은 쏘미협상과 관련한 립장을 바꾸도록 우익정당들에 리면공작을 벌려놓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2차쏘미협상을 지지하도록 한다는겁니다. 지금까지 리승만이나 김구세력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은 물론 1차쏘미협상에 대해서도 얼마나 악담을 퍼부어왔습니까. 헌데 이번에 미국이 립장변화를 유도하는데는 꿍꿍이가 있는게 틀림없습니다. 가령 상대측에서 미국과 우익세력들의 주동적인 회담재개설을 오판하도록 하자는것이 아닐가요?
원래 쏘련측은 1차회담때 리승만과 김구를 비롯한 〈반탁〉제창자들을 회담참가대상에서 배격하지 않았습니까.》
《흥미있소. 계속하오.》
《저는 놈들의 이러한 전략적의도에 대처하여 그놈들의 힘을 역리용하여 배지기를 떠보자는것입니다.》하며 길철은 어깨너머로 상대방을 둘러메치는 흉내를 내며 빙긋이 웃었다.
《배지기를? 어떤 방법으로?》
정시명은 그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함께 따라 웃었다.
《연장성동무가 군정청 공보여론조사과장이니 한번 수를 써볼만 합니다. 배지기전술은 그 동무가 내놓은것입니다. 경험있는 씨름군은 상대방에게 먼저 수를 쓰고 기운을 쓰도록 하고는 상대방의 수와 함께 힘을 역리용하여 배지기로 넘어뜨린다는것인데 알고보니 그 동무가 옛날 경성대학의 상씨름군이였다고 합니다.》
《배지기수라… 좋은 묘안이요… 그래서?》
《지금 미군정청은 제놈들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여론조성에 열을 올리고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더욱 키질을 한 후에 그 여론의 힘으로 미국놈들의 막후흉계를 짓눌러버리자는것입니다.
미군정청의 실무진에 상대측이 쏘미회담의 재개를 더는 원치 않는다는 가정보를 슬쩍 흘러들어가게 합시다. 연장성동무와 좀 상론해보았습니다. 기술적으로 잘 가공만 하면 위험이 없이 여론전을 통하여 미국측의 정책실무진을 혼란에 빠지게 할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미국측이 안심을 하고 쏘미협상재개를 상대측에 공식적으로 통고할 때까지 이 공작이 기술적으로 잘만 위장되면 효과를 거둘것입니다.》
《좋소!… 그런데… 바로 그렇게 되여 회담전에 회담재개를 봉쇄하려던 미국놈들은 두번째방안으로 넘어가게 되오. 어떻게 할 셈이요?》
《그에 대해서는 아직… 좀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길철이 우물쭈물하다가 천성그대로 솔직히 대답하였다.
《좋소. 착상이 좋고 기발하오. 아주 그럴듯 해. 다음 문제는 함께 궁리해봅시다. 사실 두번째 대책안은 김명호동무의 몫이요.》
정시명은 길철의 제안이 자기의 생각과 근사한것이 매우 희한하게 생각되였다. 오히려 그는 한수 더 떠서 배지기라는 통속적이면서도 쉽게 뜻이 통하는 이름까지 붙여놓았다.
이렇게 하는것이 바로 적들속에 깊숙이 촉수를 박은 우리의 투쟁성격이고 전술적특성이 아니겠는가. 길철이 스스로 싸움속에서 이를 찾아내고 활용하고있는것이다. 정시명은 신뢰의 정이 함뿍 어린 눈길로 길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해졌다는것은 다른 사람도 류사한 생각을 내놓을수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적들도 이에 대해 생각하고 그에 대처할 수비책을 세워나갈수 있다.
정시명은 이것을 강조해주고 그의 제안을 다시금 높이 평가하였다.
길철은 정시명의 치하에 얼굴이 붉어졌다가 연장성동무의 말을 옮겨놓은데 불과하다고 하면서 열적게 웃었다.
길철이 조직이 처한 환경과 조건에 상응하게 사색을 심도있게 한데는 그의 남다른 노력과 고충이 있었다.
원래 길철은 광복전부터 지하조직사업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이였지만 이처럼 특수한 임무를 담당해보기는 처음이였다.
그러므로 길철은 사업을 분담받자 필요한 책들부터 많이 읽었다. 경험과 교훈들을 배우자는것이였다. 그것이 어느 나라의 어떤 인물의 이야기든지 가리지 않았다. 닥치는대로 책을 읽고 사업에 참고할것이 없겠는가 고심을 해왔다.
틈이 날세라 기울인 노력이 은을 내기 시작한것이다. 투쟁은 투사를 키워내는 학교이다.
길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가만, 길동무.》하고 정시명이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어 은근한 소리로 주저앉혔다.
…민순임이 얼마전에 느닷없이 하던 말이 생각났던것이다.
《이보세요, 혜숙이네 문제를 어떻게 하실랍니까?》
민순임의 묻는 소리였다.
《혜숙이네 문제라니?… 왜, 무슨 일이 있었소?》
정시명은 아닌밤중에 홍두깨같은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서 되물었다.
《남정네들이란 다 저러신다니깐요.… 8. 15전부터 친해왔다는데 광복을 맞고도 지금 몇해째입니까? 그리워하는것도 한두해이지 가까이 지내면서 노상 부처님 보살보듯이 지내게 할수야 없지 않습니까?》
《부처님 보살 보듯?… 하하하.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거요?》
정시명이 소리내여 웃다가 민순임의 말뜻이 헤아려져 넌지시 물었다.
《길선생님도 혼기를 서너번도 더 놓쳐버린 로총각이니 어서 결혼을 시켜 살림을 차려줘야지요. 당신 옛날에 서울체네 본다구 동네방네 소문놓았던 생각이 안나세요?》
《엉? 하하… 옳소. 제꺽 마련을 봐야겠군.》
정시명이 이 말이 있은 후 길철이와 조용히 마주앉을 기회를 기다려왔는데 하루이틀 미루다나니 오늘에 이르렀다.
정시명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 같았지만 생각난김에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길선생, 다름이 아니라 혜숙동무와의 문제말이요. 어떻게 하겠소?》
《어떻게 하다니요?》
길철이 반문하였다.
《이젠 살림을 차려야 하지 않을가?》
《원, 선생님두, 내남없이 콩볶듯 뛰고있는데 어느 하가에 그런 일을 벌려놓고있겠습니까.》
길철이 펄쩍 뛰며 더 말을 꺼내지 말라는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사업에 언제 한가할 때가 있겠소. 이번 싸움이나 벌리고는 제꺽 결혼식을 차립시다.》
그러나 길철은 씩 웃어버리고는 건성 대답하였다.
《아, 정향동지, 그때에 가서 다시 봅시다. 늙은 총각 장가 못들가봐 걱정입니까?》
《하하… 하긴 그런 걱정이 바이 없는것도 아니요. 꽃도 한철이란 말이 있지 않소. 혜숙이도 곁에서 속태우게 할거야 없지 않소.》
정시명은 말꼭지를 뗀김에 끝을 보고싶어 그냥 붙잡고있는데 김명호가 나타났다.
《에잇, 살아났다.》
길철은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움쩍 일어나 달아났다.
정시명은 웃음속에 그를 바래주고는 김명호와 마주앉았다.
김명호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미군정청은 벌써 공작에 진입하여 상당하게 실적을 올린것 같은데 우리가 좀 늦었습니다.
저도 이번 싸움을 벌린것이 매우 적절하고 정당하다고 인정합니다.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의 말에 의하면 벌써 닷새전에 김성수와 함께 쏘미회담미국측수석대표 브라운에게 불리워가서 2차쏘미회담에 초기에는 협력적인 자세로 나오라는 밀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며칠후에 자기 당의 지지성명이 나갈것이며 우익계의 언론들도 지지깜빠니야를 벌릴것이라 합니다.》
《가만, 장덕수의 말에서 초기라는 말이 의미가 있지 않을가?》
《옳습니다. 협상지지는 시한부적이라고 합니다. 협상이 재개되는 경우에는 회의과정을 보아가면서 태도변화가 다시 있을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김승원동무의 보고입니다. 그런데 류사한 움직임이 신익회의 〈반공련맹〉이나 리승만의 〈독촉〉, 김구의 〈한독당〉을 비롯하여 쏘미회담장에 참가하게 될 다른 우익단체들에서도 벌어지고있습니다.
〈반공련맹〉에서 좀 색갈이 이상한것은 지지성명과 함께 반대성명도 준비하고있다는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지지성명이 미국무성의 첫번째 방안에 따르는것이고 반대성명은 두번째 방안에 따르는 대책일것이라고 짐작이 갑니다.》
《그럴듯 하오. 그러면 김선생은 어떤 계획을 세웠소?》
《저는 놈들의 방안항목들에 꺼꾸로 되는 제안들을 맞세우면 바로 우리의 방안이 될것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가령 놈들의 총적목표가 회담의 결렬이라면 우리는 회담재개로 대처하면 될것이고 놈들이 회담결렬을 분렬고정화의 돌파구로 삼는다면 우린 회담결렬을 놈들의 정책적의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계기로 만들어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국놈들이 우익집단을 회담재개에로 추동세력을 몰아가는 광대놀음을 지켜봅시다.
회담재개후에는 반드시 장애물을 세워놓을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코코에 걸고들어 사전에 세상에 소리쳐보자는겁니다. 놈들이 자기 모순에 빠져 회담장에서 꽁무니를 빼지 못하게 사처의 대문을 막아놓고 빗장을 단단히 쳐놓읍시다.》
김명호는 이렇게 보고를 끝내고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흥건히 내밴 땀기를 꾹꾹 지워버렸다.
정시명은 김명호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써 동의를 표시하였다. 정시명의 마음은 사뭇 가벼워졌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미국무성의 방안을 타고누를 전술적문제들이 다 나온셈이였다. 그러나 김명호도 셋째방안에 대해서는 찍지 못하고있다. 그렇다고 더이상 지체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김명호도 우리가 늦었다고 언급하지 않았는가. 서둘러야 한다.
김명호까지 돌려보낸 정시명은 그들의 보고를 종합하여 더욱 심화시켰다.
그러나 전술안을 완성하여 가면서도 자꾸만 셋째방안이 명치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문득 길철이 아까 피끗 스쳐지나간 말이 떠올랐다. 길철은 그에 대한 자료수집임무를 적들의 정보모략기관에 있는 조직성원들에게 특별히 강조했노라고 말했다. 그러니 길철도 바로 놈들의 세번째 타격이 그쪽으로부터 가해질수 있다고 생각한게 아닌가. 십분 타당성이 있는 가설이다. 미국놈들이 흔히 써먹는 계략이다. 회담장에서 해낼수 없으면 회담뒤에서 얻어내려고 할수 있다.
여기에서 주역으로 나설것은 모략의 명수들이 모여있는 정탐기관일수 있다.
다음날 정시명은 모임을 열었다. 모임에서 정시명은 제2차 쏘미협상과 관련한 미국의 정책적목표에 직접적인 강타를 들이대기 위한 전술안을 내놓았다.
김명호와 길철의 제안이 이미 연구가 심화되여 파악이 있는것이므로 그대로 지도부의 결정으로 채택되였다. 그에 따르는 분담이 조직되였다.
정시명은 모임을 결속하면서 엄숙하게 강조하였다.
《동지들, 방금 결정한 싸움은 우리가 미국놈들과 벌리는 첫 대결이요. 국부적인 전투가 아니라 정책적이고 전면적인 대결이요. 어떤 동무들은 방금 조직된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 힘겹고 승산이 가늠되지 않는 싸움이라고도 할수 있소. 사실 어렵고 복잡한 정치전이며 우리모두가 익숙되지 못한 투쟁인것만은 사실이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조국앞에 박두한 위험을 두고 피해설수는 없소. 이번의 싸움은 우리만이 치를수 있는 싸움이라고도 할수 있소. 그러니 〈흥국상회〉의 명예를 걸고 본때있게 싸워봅시다. 다시 강조할진대 만약 이번 대결에서 우리가 패배하면 미국놈들은 큰 저항이 없이 〈단선단정〉이라는 정책적목표물에로 접근할수 있소.
동무들, 우리가 살아있는 한 미국놈들이 제마음대로 이 나라의 허리에 분렬이라는 패말뚝을 손쉽게 박아넣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부터 벌려나가게 될 우리의 싸움은 언제나 민족의 운명과 직결된 그런 싸움으로 될것입니다. 민족이 부여한 력사적과제를 한시도 잊지 맙시다. 이번 대결에서 우리가 경계할것은 절대로 적을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과소평가하지도 말아야 한다는것입니다. 매사에 심사숙고하면서도 담이 크게 지혜롭게 대결전을 벌려나갑시다.》
첫 작전명령을 내리는 정시명의 목소리는 저으기 비장하였다.
정시명은 모두들 돌아가자 불꺼진 곰방대를 입에 문채 앉은뱅이책상앞에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피곤이 몰려들어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똑똑똑-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례영이가 발끝으로 발볌발볌 들어와 정시명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베개를 고여주었다. 그리고는 널려져있는 재털이며 종이장들을 정리하고는 불을 끄고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불시에 고독감이 쓸어들고 여러가지 시름겨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정말 해낼가? 너무 아름찬걸 맡아안지 않았는가. 싸움은 이제 시작되였다. 나는 이미 《흥국상회》사장으로서 구령을 내렸다. 다들 자기 몫을 감당할가?) 정시명은 이렇게 입속으로 자문자답을 하였다.
어쩐지 불안하다. 걱정스럽기만 하다.
상대는 미국이다. 적어도 2차세계대전에서 미군에 대한 총지휘권을 행사했다는 마샬이 지휘하는 미국무성과 맞선 싸움이다.
상대는 온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노리는 강력한 힘과 두뇌진의 후원을 받는 로회하고 최정예의 조직체계를 가진 집단이다.
우리는 어떤가. 몇달전에 무어진 조직이다. 김명호도 길철이도 기세충천해 떠나갔지만 그들은 다 풋내기들이다. 항차 이런 일에서는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는 젊은 사람들이다.
그의 눈앞으로 전우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다가왔다. 적진의 인물들도 그렇게 다가선다. 그들을 일대일로 맞세워보기도 했다.
(아, 아… 내가 흔들리고있구나. 돌격구령을 내린 지휘관이 동요하다니…
이래서는 안되지. 안되구말구… 우린 이 나라를 지켜싸우는, 이 나라의 토양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다.
두려워말라 정시명! 용기를 내라! 자신을 믿으라! 전우들을 믿으라!
그대는 계산을 잘못하고있다.
그대와 그대의 전우들은 사자들이다.
통일은 정의요, 분렬은 범죄이다. 애국은 진리요, 매국은 반동이다.
우리는 밝은 태양이 더 밝게 빛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요, 저놈들은 빛을 두려워하고 어둠속으로 이 세상을 끌어가려고 버둥질하는 무리다. 나라를 합치는것은 이 땅의 량심이요, 이 땅의 영원한 삶의 노래이다. 네놈들이 아무리 요사를 부리고 총포를 휘두른들 우리의 영원한 심장의 노래인 조국찬가를 이겨내지는 못한다.
우리의 전우들은 네놈들이 백년가야 얻을수 없는 애국의 심장과 인간사랑으로 끓는 피가 용솟음치고있다. 백악관의 머슴들인 네놈들이, 월가의 사환군들인 네놈들이 이걸 알탁이 없다. 그래 맞서보자. 겨루어보자. 이건 네놈들과 겨루는 첫 대결이다. 우리는 조선사람들의 유명짜한 배지기로 네놈들을 둘러메치고야 말것이다.)
정시명은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