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장막을 헤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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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은 그들의 생각으로 하여 흥떠진 기분으로 모나리자다방으로 들어갔다.

례영이가 가져온 차잔을 들고 정시명은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있게 될 미국놈들과의 대결을 두고 여러가지 문제들이 일시에 떠올랐다. 뻐근한것이 흉중에 꽉 차올랐다.

조직이 처음으로 벌리는 투쟁이므로 힘에 부치는 싸움이다. 그러나 한번 해보자는식의 싸움이 아니다. 물론 회담자체에는 크게 기대를 걸고싶지 않았다.

미국놈들이 자결이요, 독립이요 사탕발린 요설을 많이 늘어놔도 남조선을 타고앉을 흑심만은 버리지 않으리라는것은 밤에 불보듯하다.

애당초 미국놈들이 조선반도에 새로운 민주국가가 탄생되기를 바란다면 무엇때문에 이 나라에 기여들었겠으며 피한방울 흘리지 않는 주제에 군정은 왜 펴고있겠는가.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것처럼 쏘미회담에서 완전자주독립국가의 기틀을 선사받으리라고 생각하는것은 승냥이한테서 물고있는 고기덩이를 넘겨받을 꿈을 꾸는 양처럼 어리석기 그지없는짓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놈들이 2차쏘미회담을 코에 걸고 흉계를 꾸민다는데 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다.

미국놈들이 이 싸움에서 이기면 민족분렬이라는 력사적대범죄를 내키는대로 자행할것이다. 장군님의 명석하신 예언이 그대로 현실화되고있다.

아, 장군님께서 벌써 놈들의 꿍꿍이를 헤아려보신것이구나.…

그러니 이 싸움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맡아안자. 온 나라가 쏘미공동위원회를 재개하라는 피의 항전을 벌리고 안팎으로 미국놈들에게 압력을 가하고있는데 우리는 우리만이 할수 있는 타격전을 벌려야 한다.

미국놈들에게 이 나라의 허리를 찍어놓는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어야 한다. 이 땅의 주인들의 량심이 살아있고 이 나라의 완전독립의지가 굳건하다는것을 미국놈들의 골통에 쪼아박아넣어야 한다.

우리의 력량을 가지고 놈들의 모략을 짓부실수 있을가?… 그는 스스로 흥분되였다.

《흥국상회》를 무은 후 처음으로 벌리는 싸움이므로 더구나 절대로 패배하지 말아야 한다. 첫 대결에서 패하면 우리 동무들에게 주는 영향이 클것이다.

이겨야 한다! 이겨야 한다!… 정시명은 이렇게 되뇌이며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정시명은 자기가 몹시 흥분되였다는것을 알자 빙그레 웃었다. 그는 랭철한 리성으로 돌아가고싶어 머리를 가로젓고 놈들과의 대결방안을 곰곰히 세워나갔다.

놈들의 흉계를 재확인하는 사업부터 시작해야 될것 같다. 하지가 무엇부터 시도하려는가?

그는 신문에서 보았던 하지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려놓고 그놈의 속심부터 헤쳐보았다. 류동명의 이야기에서 포착된 문제들이 하지의 속궁리로 다시 어울려들었다.

선명해지는것은 회담탁에 마주앉기 이전에 회담에 관한 쏘련측의 반대의사를 유도하려 한다는것이였다.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미국놈들이 쏘련측으로부터 쏘미회담에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어떻게 유도해내려고 하겠는가. 조선문제를 쏘미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성의를 보여온 쏘련측이 무슨 근거로 회담에 나타나지 않겠는가?

미국놈들의 첫번째의 계획은 분명히 이것을 목표로 하고있다. 그러면 미국이 그렇게 할수 있다고 보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어떤 계교로써 쏘련의 불참의사를 유도하려고 하겠는가?

쏘련측의 립장을 변화시키려면 미국놈들은 그 무슨 획기적인 전술적변화를 내놓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정시명은 스스로 걸어놓은 첫번째 의문부호부터 해명해낼수가 없었다.

그는 이 문제가 절벽처럼 막아서자 일단 덮어놓았다.

정시명은 다른 문제점을 끄집어냈다.

미국놈들은 공산측의 회담참가를 적기에 막을수 없다는 가정도 세워놓고있다.

그 경우에 어떻게 나오겠는가? 이 문제를 놓고는 여러가지 해답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회담을 질질 끌다가 상대방의 반응에서 그 어떤 트집거리를 찾아내서 회담을 결렬시킬수 있다. 이건 그놈들이 상투적으로 써먹는 수법이다. 지난 시기 테헤란회담이나 포츠담회담에서도 미국놈들은 그렇게 한바가 있다.

회담결렬을 위해서는 우익세력을 써먹을수 있다.

1차쏘미회담때처럼 《탁치반대》구호를 내걸고 《회담반대》의 역풍을 몰아올수 있다. 그러면 미국놈들은 《조선사람들이 일치 반대하는 회담이 현실적의의가 있는가》하는 여론을 만들어가지고 회담중지를 선언할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미국이 모략의 막을 내릴수 있겠는가? 두번째의 도전으로도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오겠는가?

일방적인 퇴장을 생각할수 있다. 그러나 이건 막부득이한 경우에나 써먹을수 있는 궁여지책이다. 그리고 매우 저급하고 치졸한 방법이다.

1차회담때보다도 더 강도높은 규탄을 받게 될수 있다는것을 저놈들도 알고있을것이다.

그러니 이렇게는 감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다른 방법을 찾게 될것이다. 그것이 어떤 방법인가?… 어떤 방법인가?

사색은 다시 여기서 정지되였다. 역시 정확한 정보가 선행되여야 한다. 당장 길철부터 만나야 할것 같다. 모두가 미국놈들과의 첫 대결에서 크건작건 자기몫을 안고 움직여야 할것 같다.

그가 어느 하나도 명확한 계선을 긋지 못한채 삭막한 미궁에서 헤매고있는데 김명호가 먼저 나타났다.

김명호가 자리에 앉자 인차 화제를 꺼내놓았다.

《김선생, 미국놈들과 한번 부딪쳐봅시다. 큼직하게 말이요. 지금 온 나라가 미국놈들에게 쏘미회담을 재개하라고 드세게 압력을 가하고있지 않소. 그러니 우리도 이 전인민적인 싸움에서 제몫을 찾아내야 되지 않겠소.》

정시명의 다소 흥분된 이야기에 김명호는 긴장한 눈길로 그를 쳐다볼뿐이였다.

《미국놈들이 제2차 쏘미회담을 〈주동적으로〉 재개하려고 한다오. 그런데 이 말자체에 문제가 있거든. 어떻소. 김선생?》

정시명은 김명호의 의견을 듣고싶어서 이렇게 말고삐를 그에게 슬쩍 넘겨주었다.

《네, 문제가 있기는 있는것 같습니다.》

김명호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긍정하면서도 뜨아한 어조로 응수하였다. 그는 자기에게는 그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정리된 립장이 없다는듯 선뜻 말고삐를 넘겨받으려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시명은 굳게 닫아붙인 그의 두툼한 입술을 보다가 자신이 자기흥분에 사로잡혀있다는것을 생각하고 호주머니에서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다져넣었다. 상대는 문제가 완전히 파악되고 그에 대한 자기의 견해가 완전히 정립되기전에는 속생각을 함부로 내놓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시명도 아직은 길게 이야기할게 없었다. 류동명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다.

(이 사람과 전술적문제를 협의하자면 나의 자체준비가 너무 미흡하다. 내가 첫 싸움을 예견하고 확실히 흥분하고 조급해졌구나. 그래서는 안되지. 지휘관이 감정이 앞서서는 옳은 책략을 세울수 없지. 더구나 이제 벌려야 할 싸움은 돌격구령을 내리면 포탄이 날고 병사들이 달려나가 백병전을 벌리는 속전속결의 전투가 아니다.

이건 지혜와 지혜, 사상과 사상의 대결이 이루어질 정치전이다.…)

정시명은 구체적인 준비와 초보적인 결심이 없이 김명호와의 사업을 시작한 자신을 질책하며 담화를 인차 마치였다. 그는 류동명에게서 들은 이야기만 들려주고 정당들과의 사업을 쏘미협상문제에로 지향시킬것과 인차 협의에 참가할 준비를 할데 대한 과업을 주어 돌려보냈다.

한시간이 지나 길철이도 왔으나 길게 붙잡지 않았다. 역시 류동명의 이야기를 해주고는 그와 관련한 미국의 동향과 움직임을 알아내는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한바탕 해보잡니까?》

길철이 정시명의 지시를 접수하고나서 무엇인가 거창한것이 짐작되는지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우리가 미국놈들과 겨루게 될 첫 싸움이요. 미국놈들이 조선땅에서 제멋대로 날뛸수 없다는것을 단단히 가르쳐줍시다. 사실상 미국놈들은 10월인민항쟁에서 조선사람들이 어떻다는것을 알게 된것 같소. 이번 싸움은 우리만이 해낼수 있는 싸움이요. 이 싸움을 통하여 우리 지휘일군들부터 조직의 특색에 맞는 싸움방식을 익히고 전투력을 키워나가야겠소.》

저녁에 정시명은 다시 류동명을 찾아 집을 나섰다. 미국놈들의 립장을 보다 정확히 알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미군정청앞에 있는 다방에서 만났다. 류동명은 낮에 만났던 정시명이 다시 온데 대해 궁금해했다.

아마도 자기가 제기했던 정계에 복귀하는 문제를 놓고 찾아온것이라고 제나름으로 앞질러 생각했던것 같다.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돌아가서 두루 생각해보았는데 쏘미협상문제가 석연치 않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쏘미협상?…》

류동명이 정시명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동문서답이여서 다소 실망은 되면서도 의심쩍은듯 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사를 시작했다는 사람이 지나버린 정치담을 두고 우정 품을 놓고 찾아왔은즉 그게 다른 연고가 있을게 아닌가.

정시명은 류동명의 눈초리에서 상대방의 심중을 대뜸 간파했으나 이제는 류동명앞에서 그런데 개의할바가 아니라는 믿음이 생겨 말을 이었다.

《무엇인가 상서롭지 않은 결과가 예상됩니다. 당초에 우리가 쏘미협상에 크게 기대를 건것은 없다하지만…》

《쏘미협상?… 옳소이다. 그게 뭐 제대로 될가. 미국놈들의 립장이라는게 심통바르지 않다보니 뭐 기대를 걸어볼게 못되우다.》

류동명은 백발의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통분해하였다.

《전 그래도 쏘미협상이 제대로 열렸으면 합니다.》

정시명은 류동명의 말곬을 열어놓으려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랬으면 여북 좋겠소. 헌데 안될겁니다. 실은 내 며칠전에 하지의 방에서 미쏘협상과 관련한 미국무성의 지령문이라는것을 피뜩 보았는데 총적목표라는게 뭔지 아시우?… 회담의 완전결렬이라는겁니다. 아, 회담이라는거야 량켠이 마주 앉을 리유가 있어야 되는건데 이놈들은 마주 앉기전부터 내뺄 궁리부터 하니 무슨 회담이 된다는거요.》

류동명이 상대가 정시명인지라 이제껏 참아오던 울화를 터뜨려놓았다.

《완전결렬이라니요?! 그러면 회담을 재개한다는것은 무슨 쓸개빠진 수작이랍니까?》

《그래서 내 양인들이 흉칙하기 짝이 없다는거요. 꼭 흉물들이라니깐. 좀 들어보시우다. 협상대책이라는게 세갈래로 되여있는데 뭐 그게 심술스럽기 그지없단 말이요.》

류동명은 미국무성의 지령문을 생각나는껏 이야기하고나서 흰장미를 푸들거리며 일장 기염을 토했다.

《하여튼 양인들이 미쏘회담과 관련하여 내세운 방안이라는게 뭐 이러루하게 잘해보자는게 아니라 아예 돌아앉을 잡도리를 한것인즉 거기다가 무릇 희망을 건다는게 허망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놈들을 가만히 여겨보면 이 나라의 재결합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놈들이요.》

류동명이 예까지 말하고는 화가 동하는듯 차를 단숨에 마셔버린다. 정시명은 차잔에 입을 댔다뗐다 하면서 류동명의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주의를 집중하였다. 미국놈들의 진의도와 책략의 방향이 명백한 표상으로 안겨왔다. 어떻게보면 자신의 판단과 너무도 일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는 미국놈들이 왜 이런 고약한 놀음을 벌려놓는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놈들이 노리는바가 무엇이라고 짐작하십니까?》

정시명은 이 기회에 류동명을 각성시키는것이 좋을듯싶어 의논조로 물었다.

《거야 칠칠야밤에 불보듯 한 일이지요. 남북을 총괄하는 저들의 정부를 세워야 되겠는데 이제는 기회를 놓쳤고 힘에 겨운것이라는걸 알게 됐지요. 그러니 이 남쪽에만이라도 세워놓고 국토를 량분해놓아야겠는데 그게 아직까지는 여론의 인정을 받을만한 명분이 없다 그말이웨다.

그러니 이번에 그걸 찾아내려는데 있지 않을가. 난 그렇게 생각하우.》

《그러면 결국은 남북분렬을 고정화하자는게 아니겠습니까?》

류동명은 정시명의 예리해진 눈초리를 마주 보다가 슬그머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음-》하고 땅이 꺼질듯 길고 거친 숨을 내뿜었다.

《그놈들의 흉칙한짓을 알고야 어떻게 거저 스쳐버릴수가 있겠습니까.》

따지고드는듯 한 정시명의 말에 류동명은 몸을 흠칫거리였다.

《그러니 어쩐단 말이요? 좌익에서 들고일어나겠지만 힘으로 될수 없는 일이 아니요. 대구항쟁도 뒤집어놓고보면 조상의 강토를 하나로 만들자는게 아니겠소. 헌데 숱한 피만 흘러보내고 말았지요. 지금까지 좌익권에서 얼마나 많은 주검이 났소. 우익에서 같이 들고나서야겠는데 양인들에게 덜미를 잡혀있는 꼴들이니 엄두도 내지 못하는게 아닌가. 참 난사는 난사야. 시운이 오락가락하는걸 보느라면 마치도 을사년의 서울풍경을 보는것만 같소. 그래 정향선생이 이렇게 이 늙은이를 다시 찾아주실적에는 무슨 방략이라도 나서지 않았겠소?》

《아니,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접하고보니 당장은 쏘미협상을 기어이 재개하도록 제나름으로의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국놈들이 이 나라의 주인들을 업수히 여겨도 분수가 있어야지 어찌 한 나라 민족의 운명을 저울에 올려놓고 그리도 희롱질인가 말입니다. 미국놈들이 협상무대에서 더러운 흉모를 벌리는것을 내버려둬서는 안됩니다.》

《정향처장! 그래서 내 정향선생을 이 혼탁한 시국을 바로 잡는데 나서라는게 아니요. 내 다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이 나라 백성된 마음으로 청을 드리건대 정향처장이 부디 정사에 나서주시오.

내 요 며칠새 이일저일 여의치 않아 이 서울장안에서 제노라 하는 명사들의 이름을 이리저리 훑으며 세상바람새 가라앉힐 위인을 찾아 헤매여왔소이다. 자, 이것 보시오.》하며 류동명은 품안에서 자그마한 수첩을 꺼냈다. 거기에서 차곡차곡 접은 참지를 찾아내여 정시명의 눈앞에 펴놓았다. 정말 거기에는 남조선정계에서 알려진 유명인물들의 이름이 좌익이건 우익이건 중도파인물이건 관계없이 수십명이나 써있었다.

앞머리에 정향이라는 성함도 씌여있었는데 색연필로 동그라미가 쳐있다.

참지에 깨알같이 써넣은 이름들을 들여다보느라니 정시명은 가슴이 뭉클해왔다.

참지에 숱한 이름들을 꼬박꼬박 새겨넣고 며칠토록 그걸 들여다보며 지내왔을 늙은이의 절절한 심경과 안타까움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헤아려졌던것이다. 류동명이 나라걱정이 오죽했으면 겨레를 맡아줄 영걸을 찾아 이렇게도 세심하고도 눈물겨운 고심을 하여왔겠는가. 야속함과 비탄에 잠겨 이 이름들을 오르내리 훑을 때마다 우국충정을 한생의 기둥으로 뻗쳐놓고 살아온 늙은 무장이 무엇을 생각했으랴.

정시명은 불쑥 선생님이 찾고계시는분은 평양에 계신다고, 그분은 김일성장군님이시라고 하는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시명은 뜨거운 정을 모아 그의 손목을 잡았을뿐이였다.

그는 늙은이의 손등을 쓰다듬다가 진정에 넘쳐 이야기하였다.

《선생님의 그 충정을 제 한생토록 명심하렵니다.》

그것은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명감으로 꺼져가는 생의 황혼을 아름답게 물들이고있는 뜻이 높은 한 지사앞에 다지는 인간 정시명의 엄숙한 서약이기도 하였다.

《원, 내 부질없는 소행에 너무 큰뜻을 싣지 말아주시우다. 뜻만 남고 열도 기도 다 쇄락해버린 늙은이 락엽이 져오니 비로소 근본의 귀함을 절감하게 되는거지요.》

《아닙니다. 그 뜻이 소중한것이 아니겠습니까. 서울정치인들이 그런 뜻으로 산다면 어째서 서울공기가 이다지도 어지럽겠습니까. 오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겠으니 고견을 주십시오.》

《고맙소이다.》

류동명은 다소 뜨아해하면서도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시명은 류동명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김명호와 길철에게 통보해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활동선에서 각각 시급히 대책적안을 세워서 제출하라고 지시하였다. 자신도 다시금 미국놈들의 책략에 대처한 방안을 연구하느라고 여러 밤을 뜬눈으로 밝히였다.

점차 작전안이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세번째 방안이라는것이 묘연하다. 목표물이 나타나야 살을 날리겠는데 그게 아직은 미지수이다. 미국무성은 분명 다른 계통을 통하여 세번째방안을 모색하는것 같다.

유엔일가? 3국을 통한 모종의 막후교섭일가?

미국놈들이 힘을 믿고 유엔에서 독판치기를 하기 시작하였으니 제놈들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내려먹일수도 있다. 그 경우에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자면 어떻게 하든지 셋째방안이라는것도 알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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