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장막을 헤치고

 

3

방안에는 맑고 잔잔한 선률이 흐르고있었다. 백화만발한 5월의 계곡을 감돌며 조약돌을 정갈히 씻어버리는 골개수처럼 유정하고 머리칼을 가벼히 날리는 미풍처럼 상쾌함을 자아내는 음악이였다.

정시명은 라지오에서 울리는 그 음악의 세계에 취하여 벽에 허리를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분초를 쪼개가는 빳빳한 하루일정의 복잡다단한 일들을 보내고는 밤 10시가 가까와오면 라지오앞에서 평양방송에서 내보내는 음악을 감상하다가 밤 10시의 종합보도를 듣는것이 어길수 없는 일과로 굳어져버리였다. 10분정도로 이어지는 길지 않은 사이음악이였지만 그 아름답고 깨끗하고 순결한 선률에 묻혀들 때면 정시명은 해종일 몰려든 피로가 가뭇없이 씻겨내리고 정신이 맑아지고 저도모르게 삶의 희열과 보람이 고즈넉이 차들군 한다.

이윽고 음악이 그치자 밤 10시를 알리는 신호종이 명료하게 울리고 귀에 익은 평양방송국의 녀방송원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억양이 독특하면서도 열정적이고 마디마디마다 속깊이에서 우러져나는 힘과 기백이 실리는 그 목소리에 이젠 습관되여 그런지 청춘의 정열과 젊음으로 충만되고 리지가 어린 방송원의 얼굴이 누이동생처럼 정답게 련상되군 한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녀방송원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를 강구던 그는 처음부터 가슴에 더운것이 뭉클 치받쳐오름을 느꼈다. 방송원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평양을 찾아온 남조선의 한 인사를 만나주신 이야기를 온 세상에 격조높이 전하고있었던것이다. 정시명은 자기도모르게 벽에서 허리를 떼고 숭엄한 자세로 앉아 방송원의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주의를 집중하였다.

금시 눈앞이 뿌잇해지면서 그립고 그리운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이 방불히 떠올랐다. 그이께서 바로 자기를 앉혀놓고 북조선이 지난 2년간 이룩한 찬란한 성과들에 대하여 담담한 어조로 차근차근 들려주시는것만 같았다.

장군님의 슬하를 떠나온것이 어떤 때는 방금 있었던 일처럼 그리워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벌써 오래전의 일처럼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때마다 목이 메이고 잦아드는것은 다시 찾아뵙고 열밤이고 스무밤이고 그이의 다정한 미소에 몸도 마음도 다 맡기고 말씀을 듣고픈 그 심정뿐이다.

사무치는 그리움에 잠겨있던 정시명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서렸다. 방송원이 장군님께서 쏘미공동위원회 사업에 대하여 심려하시였다고 전하였던것이다.

녀방송원이 아쉽게 김일성장군님의 회견소식을 끝내고 이어 남자방송원이 각지 근로자들의 건국투쟁소식을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정시명은 보도가 끝나자 무엇인가 가슴을 쿵쿵 울리는 거창한것을 느끼며 라지오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한손을 뒤잔등에 올리고 천천히 뒤뜰안을 거니는 그에게는 녀방송원의 마지막이야기가 귀전에서 그냥 떠나지 않았다.

(쏘미공동위원회와 관련하여 그이께서 심려하시는것은 무엇일가?… 아, 우리가 놓치고있었구나.…)

그는 마치도 장군님앞에 나서기라도 한듯 자신을 심심히 뉘우치며 이제부터라도 쏘미공동위원회사업에 대하여 주목을 돌려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무엇보다도 쏘미공동위원회사업과 관련한 각계층의 동향부터 조사하는것이 급선무일것만 같다.

지금 좌익권에서는 쏘미공동위원회사업을 재개하라고 미국에 압력을 가하고있지만 미국은 태도표명이 없는 상태다. 미국은 앞으로도 입을 다물고 꾹 닫아버린 대문의 빗장을 의연히 풀지 않으려는 심산일가.…

그런데 이튿날 송호정이 처를 통해 긴급련락을 보내왔다. 미군정청 통위부장 류동명이 가능한대로 빨리 정향처장을 찾아오라고 했다는 통보였다.

정시명은 류동명의 제의에 기꺼이 응하기로 하고 인천바다가의 해수욕장에서 만났다. 아직은 해수욕을 하기에는 이른 계절이였지만 그래도 한낮에는 봄볕이 재글재글 쪼이는 서울의 더위를 피해온 사람들로 붐비였다.

그들은 백사장에 세워진 버섯모양의 차일밑에서 마주 앉았다.

《그래 서울생활이 어떻소? 한번 시간을 내서 찾아본다는게 차일피일 미루다나니…》

류동명은 이렇게 첫 인사를 하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일전에 거처를 마련해주시여 저와 함께 서울에 온 지기들이 잘 지내고있습니다.》

정시명은 중경시절보다 퍼그나도 왕성해보이는 류동명의 모습을 일별하며 생각하였다.

(로당익장이라더니 젊어지는군. 미국놈들이 마련해준 자리가 이 왕년의 무사를 만족하게 해주는가.… 하기는 통위부장이니 실권은 없어도 간판은 야단스러운것이지.)

《이보시오, 처장.》

류동명은 이내 그를 급히 불러낸 문제를 꺼내였다. 오랜 무인생활에 습관된 류동명은 번거로운 례의는 싫어하는 사람이였다.

《전일에 선생이 했던 말씀이 생각나시오?》

《네?!》

《아, 거 뭐 장사노릇 하겠다던 이야기… 그래 정말 초야에 묻혀 시국을 등지고 살아가시오?》

《아, 그것말입니까?…》

정시명은 검버섯이 돋은 벌깃한 로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류동명의 묻는바가 인차 짚이웠으나 아직은 자기의 정체를 밝힐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아니, 안될 말씀이오. 이제 그렇게도 바라마지 않던 조국광복이 성취되였으나 국민이 정치의 노를 저어줄 명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있는 이 어수선한 란시에 어찌 선생같은분이 은둔할수 있겠소.》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류장군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건 지나친 겸양이시오. 내가 처장을 익히 알아지내온것이 장장 스무해는 족히 되오. 난 벌써 상해시절부터 선생을 광복대업의 큰인물로 존경해왔소. 오늘도 그 믿음이 변치 않아 이렇게 조용히 만나자고 했소. 국민이 부르고있을 때 그 요청을 일신의 안위를 앞세워 무시하는건 애국의 초지로 일관된 선생의 뜻이 아닌줄 아오.

정향선생이 정말로 장사에 꺼져버리면 항간에 돌아가는 험담도 바이 틀림이 없다는게 아니겠소?》

《뭐 돈버는 장사치에게 돌아가는 소리가 한두가지겠습니까. 그래 류장군이 들으신 험담이라는건 어떤것입니까?》

정시명은 호기심이 동해서 되물었다.

《들은 그대로 전해도 일없을가?》

류동명이 량해를 구한다는듯 능청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 북쪽정권에 큰자리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가 뒤발질을 당했다나. 그래 다시는 정계에 발을 들여밀지 않겠노라 이녘에 와서 장사질을 시작했다는게 아니요.》

그 소리에 정시명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들은바 있는 험담치고는 너무나도 엄청나고 어처구니가 없는것이다. 정시명이 온몸을 들썩거리며 한바탕 웃자 류동명이 비죽이 따라 웃고는 계속했다.

《내 그말 전해온 사람에게 허무맹랑한 수작질이라고 퉁을 주기는 했지만 이왕이면 듣지 않기보다는 못해. 뒤자리가 무죽하거든. 아, 북정권이 어째서 연안패들은 다 받아들여 한자리씩 주는데 정향선생같은 인걸을 쓴외보듯 한단 말이요.》

《허허…》

정시명이 헌헌하게 웃어버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가 어쩐지 명치에 맺혀든다. 정말 뒤자리가 쯤쯤하다. 이북에 뒤발질당하다니…

《웃어버릴 일이 아니웨다. 선생께는 객적은 소리로 들리겠지만 난 그 말이 우연치 않다고 봐요. 그런즉 허망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의 로파심으로 흘리면서도 한마디 들어두시오.》

류동명이 다시 자기가 꺼낸 말곬으로 이야기를 몰아갔다.

《정향선생이 초야에 묻히면 자기 인생에 쌓아올린 탑을 일조에 허물어버리는거나 같은거란 말이요. 파란만장한 이 나라의 광복사가 드디여 장을 마무리하고있는 시점에 와서 정향선생같은분이 급기야 나라일을 훌훌 털어버리고 세상잡사에 돌아앉는게 어찌보면 장부다운 인생결단인것 같지만 그게 바야흐로 일필휘지로 새겨갈 건국사의 큰페지를 비우는 큰 허실이 된다는 말이웨다.》

류동명은 다소 격앙된 어조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가는 접대원에게 랭수 한사발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곰방대에 권연 한대를 꽂고 불을 붙인 다음 맛스럽게 들이켠다.

정시명은 류동명이 말꼭지를 류다르게 펴면서도 아직은 서두르지 않는것이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여 묵묵히 자리를 지키기만 하였다.

《불원하여 이 남쪽땅에 광복 두주기가 다가오고있소이다. 허나 지금 나라 돼가는게 꼴불견이 아니요. 국민이 좌우로 갈라져 국내전쟁이나 다름없는 정쟁에 말려들어가고있는데 정치인들이라는건 나라평정할 방략을 내놓지 못하고 권력욕에 환장들이 돼서 돌아가고있소. 거기다가 양인들 하는짓들이 눈에 거슬리기만 하오. 나라정사 맡아본다고 하는 하지중장만 넘겨다봐도 그놈들 시커먼 속궁냥이 뻔하다는 그말이웨다. 그래 나도 어떤 때는 백발을 날리는 인생말년에 관직자리가 헛일이라고 생각해보지만 다들 이런저런 핑게대고 보신이나 할것 같으면 양인들에게 곁에서 바른소리 해줄 사람은 누구일고? …바른대로 말한다면 하지장군의 정치고문하던 구펠로, 그놈두 내가 쫓아버리도록 했소. 아, 정치고문이라는게 리승만의 연줄을 타서 금광채굴권이나 챙길 궁리나 하고있은즉 양인들에게 이 나라 정사 맡기는것이 승냥이무리더러 고간 지켜달라는거나 뭐가 다르냐 그말이웨다.》

류동명은 이렇게 기염을 토하는데 희고 긴 장미가 꿈틀거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거린다.

정시명은 류동명이 끄집어낸 구펠로의 금광채굴권이야기는 처음 듣는바가 아니였으나 류동명이 그를 쫓아내도록 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여서 무등 희한해서 로인을 쳐다보았다. 류동명은 아마도 하지의 곁에서 이따금 대바른 소리로 이 나라의 리권을 지켜가고있다는 그 허위단심으로 평생의 황혼을 즐기고있는 모양이였다.

정시명은 지난해 귀국한 후 구펠로의 추문에 접하자 그를 폭로규탄하는 여론전을 벌리게 하였었다. 그런데 하지에게 제때에 고소하고 움직이도록 부채질한것이 류동명이라는 말을 비로소 알게 되자 한켠으로는 류동명의 사람됨이 새삼스러워지기도 했다.

《참으로 장한 일을 하셨습니다.》

정시명은 진심으로 이 나라의 백성된 한사람으로 고개를 깊이 숙이였다.

류동명이 정시명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정시명은 로인답지 않게 살이 지고 따스한 기운이 있는 그의 손에 손목이 잡히자 어쩐지 가슴이 쭝해왔다.

《이사람 처장, 내 인사 받고싶어 그말 꺼낸게 아닐세.》

류동명은 이렇게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나무람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그의 손목을 흔들었다.

70여평생에 이르도록 기나긴 려정에서 형형색색의 사람들과 부딪쳐오며 친화력을 키워온 류동명은 그 나이에 어울리는 도고한 기상과 함께 인자하고도 섬세한 정으로 뭇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여 줄줄 안다.

사실 정시명은 류동명의 간단한 손동작에서 벌써 그와의 간격이 퍼그나도 좁혀든것만 같았다.

《내 정향처장에게 부디 청원하오. 정사에 몸을 담아주시오.》

류동명이 곡진한 어조로 말하며 그의 손목을 안타까이 흔들었다.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 이날이때까지 평생을 나라를 걱정하며 살아온 오랜 무인의 우국충정이 헤아려졌다.

정시명은 그의 신의를 더는 매정하게 뿌리칠수가 없어 《선생님의 말씀을 중히 받들도록 생각을 정리해보겠습니다.》하는 정도로 받아주었다.

《그렇게 해주시오, 정향처장.》

류동명은 정시명의 대답이 어정쩡했으나 지금은 그나마도 만족한듯 로인반점이 거밋거밋 박힌 얼굴에 그제서야 함뿍 미소를 담고 정시명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전 아직도 미국놈들이 누구를 내세워 권력이양을 하려고 하는지 가늠이 안됩니다.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구태여 이름을 찍으라면 미국사람들도 아직은 자신이 없는듯 한데… 하지장군은 지금도 좌우익과 중간파를 다 묶어세울수 있는 그릇이 큰 인물을 물색하고있지만 정향처장도 돌아봐요. 그런 인물이 이 남한땅에 어디 있소? 그래서 사실은 정향처장이 수락한다면 하지에게 천거해볼 심산에서 오늘 수고로이 오시라 부탁드렸소이다. 내 일전에 우리 통위부 고문으로 이야기했던건 취소요. 내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보자고 지내 욕심을 부렸거던… 하지에게 말을 붙여보라우?》

《하지에게요?》

《정사에 나설려면 밉던곱던 그 사람들과 어울려야 될게 아닙니까. 난 정처장이 기발을 들면 분명 좌, 우, 중도가 그 밑으로 모여들것이라고 믿어요. 그러면 하지도 어차피 수면우에 떠오른 인물들로부터 자기의 견해를 달리할수 있을것이라고 봐요.》

정시명은 류동명의 열띤 이야기가 계속되자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류동명의 이야기가 현실적가능성이 있을듯 하지만 너무도 단순한 판단이라고 생각하였던것이다. 하지가 자기- 정시명이라는 인물을 리승만이나 김구와 같은 서렬에 올려놓고 금새를 재이게끔 되자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공정들을 이제부터 시작해야 되겠는가. 하지는 고사하고 류동명이조차 정시명이라는 이름마저도 모르고있지 않는가. 기실 류동명은 통위부장이라는 당시로서는 실력자로서 정계에 관여하고있었지만 아직도 한명의 우국지사에 불과하였지 정치의 복잡다단한 생리를 속속들이 꿰뚫고있는 정치가는 못되였다.

류동명도 정시명의 입가에 비낀 미소에서 자기의 정치적단순성을 느낀듯 접대원이 떠다놓은 찬물 한사발을 쭉 들이켜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자기의 안목으로 관찰한 정치의 현황을 나름대로 자상히 이야기하는데 빈번히 《내 생각에는 말이요.》하는 말을 련발하군 하였다.

그의 이야기는 전후 련계가 부족하고 명백한 평가와 분석이 없었지만 미국놈들과 리승만, 김구와의 삼각관계에 대한 명확한 표상을 주는 생동성이 있어서 실감이 있었다.

류동명은 때로는 자기가 보아두었던 미군정청의 극비문건내용들도 인용하였는데 그 나이치고는 기억력이 상당하였다. 아마도 류동명은 정시명과의 담화를 위하여 사전에 이야기준비에 품을 들였던것 같았다.

정시명은 적지 않은 이야기들은 자기도 알고있었지만 류동명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면서 다시금 정치의 흐름을 그려보았다.

《그렇게 됐은즉 내가 정향처장을 하지중장에게 소개하려고 생각한것이 과히 웃어보낼만 한 일이 아니지 않소.》

류동명은 이렇게 정세를 개괄해보이고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자기가 내놓은 문제에 매듭을 지었다.

정시명은 류동명의 옆자리에 앉아 자동차를 타고오면서 차창밖에 언뜻언뜻 스쳐가는 풍경에 눈길을 보낸채 류동명의 이야기를 곰곰히 되살리였다. 그리고 조성된 정세를 분석해보고 금후 대책적인 방향을 생각해보았다.

명백한것이 몇가지 떠올랐다.

무엇보다 류동명이 예나제나 변함없이 진심으로 민족의 향방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애국충신이라는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정치적우매성은 여전한것 같다.

그는 아직도 미국에 대하여 어린애같은 단순심리를 가지고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있다. 더구나 근래에는 미국놈들과 아침저녁으로 상종하는 까닭에 미국의 국력에 위압을 당한듯싶었다. 류동명을 저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로 명백한것은 현 남조선정치구도에서 중심은 하지를 대표로 하는 미국이라는것이다. 특히 남조선의 정국방향은 전적으로 하지의 결정권에 속하여있다는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장차 앞으로의 투쟁대상은 하지를 두목으로 하는 미군정으로 설정되여야 한다. 대결대상은 하지이며 조직의 전략적목표는 조선반도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화정책을 파탄시키는데 기여하는것이다.

그러자면 하지의 립장과 견해를 알아야 하며 미군정청안에 조직을 보강해야 한다.

셋째로 명백한것은 미국이 조선에서 통일적인 정부를 세울데 대한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을 뒤집어엎으려 한다는것이다. 그놈들이 현시국에서 남조선의 주되는 세력을 묶어세우기 위해 갖은 오그랑수를 다하고있는것은 통일정부구성에 대비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데 있다. 하지는 그 단독정부를 이끌수 있는 재목감을 아직도 결심하지 못한채 전전긍긍하고있는것이다.

누구한테 주패장을 던지려 하는가?… 정시명은 다시금 류동명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하지의 립장에 서서 해답을 찾아보았다.

일시에 여러 정객들의 얼굴이 떠올라 주마등처럼 하나하나 지나갔다. 종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하지를 만나는것이 문제를 파악하는 최선의 지름길 같다. 그를 만나본 후에 차후행동방안을 세워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류동명이 이런 말을 꺼냈다.

《한번 하지중장을 만나보지 않으시려우?》

《하지를 말입니까?》

《만나보시우. 뭐 그 사람을 복잡하게 대상할것두 없어요. 그 사람, 군사치고는 말재간은 있는 사람이지만 처장앞에서는 상대가 안될거라고 봐요. 미국것들이라는게 나라덩지를 믿고 앞에서는 우쭐거리지만 사귀고보면 잠뱅이 한가지라니…》하며 류동명이 껄껄 웃었다.

《예, 마크 트웨인이라는 한 미국작가가 말한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미국정치가들이 하는 일이라면 벼룩이도 할수 있다.… 이렇게 말입니다.》

《벼룩이도 한다고? 허허허 거 정말 명담이군.》

류동명이 다시금 폭소를 터뜨리였다.

《좋습니다. 만나봅시다. 이번 주말로 하면 어떨가요?》

《그건 안될것 같소. 어제 저녁 비행기편으로 워싱톤에 불리워갔소. 마샬국무장관의 긴급호출을 받고 떠났다고 하니 언제 돌아올지는 미정이우다. 하여간 돌아오면 쉬이 면담을 주선하리다.》

류동명은 정시명이 자기의 제의를 쾌히 받아들이는듯싶어 사뭇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하지가 왜 불리워갔답니까?》

《글쎄… 미쏘협상을 재개한다고 하는데 그 문제가 아닐는지…》

류동명이 자신이 없어 말끝을 여물구지 못하는데 정시명은 새로운 소식에 귀가 번쩍 띄였다.

그러지 않아도 은근히 그쪽으로 화제를 몰고가려고 했는데 류동명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놓으니 다행스러우면서도 희한한 생각도 들었다.

그래 얼른 그 말을 받았다.

《미쏘협상을 다시 연답디까?》

《아마 그런가봐요. 그놈들이 흉칙하거든.》

류동명이 정시명이 호기심을 보이자 말을 계속 하였다.

《쏘련사람들이 받아물지 않을것을 타산했다나 봐요. 그래서 회의를 다시 열자고 작정한가 봐요.》

《그러면?…》

《양놈들 속통이 뻔하지요. 지난해 미쏘회담이 열렸을 때 우리 겨레가 얼마나 관심이 컸댔소. 헌데 미국것들이 그걸 결렬시켜놓으니 제놈들 꼴이 세상앞에서 어찌되였소. 내만 봐도 그 다음부터는 양인들이 곱게 보이지 않더군. 그런데다가 국민이 미쏘회담을 재개하라고 들고일어났으니 야단이지요. 그러니 아마도 지난해의 실점을 회복하자는거겠지요.》

《그런데 쏘련이 쏘미공위재개를 반대할 리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마주앉아야 공리공담만 주고받을 그따위 회의에 그 사람들이 다시 나앉을 탁 없지요. 한주일전에 미국무성 고문이 미쏘회담수석대표인 브라운소장을 데리고와서 하지와 쑥덕공론하는걸 내 들었소. 흉칙한놈들이야. 일은 저네들이 비틀어놓고는 돌아앉아서 죄를 넘겨씌울 수작을 벌리는거야. 흉칙해. 흉칙한것들이라니까.》

류동명은 흉칙하다는 말을 련발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국놈들이 흉칙한거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이 아닙니까.》

정시명은 류동명의 이야기에 이렇게 간단히 대답은 하였으나 신경은 날카로와졌다. 미국놈들이 분명 또 하나의 정치적사기극을 준비하고있는것 같다.

정시명은 쏘미공동위원회의 결렬책임을 쏘련과 민주진영에 넘겨씌우려는 책동이 단지 여론을 의식한 미국의 제스춰라고만 생각되지 않았다. 미국놈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선에서 제놈들의 식민지적기반을 닦으려고 교활하게 책동하고있다. 그러자면 어차피 미군과 쏘련군의 대치선으로 되여있는 38°선을 남북의 경계선으로 눌러놓고 그를 제도적으로 고착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획책하고있다. 여기서 걸림돌은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채택된 조선을 독립국가로 건설하며 림시정부를 수립할데 대한 결정이다.

결국 미국놈들은 또 하나의 결정적인 타격을 시도하는것이다.

이 타격이 성공되면 미국놈들은 쏘련측과 민주진영이 통일정부수립에 관심이 없으므로 현 단계에서는 남조선에서의 《단독정부》수립이 불가피하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공공연하게 들고나올것이다.

이를 분쇄해야 한다. 놈들에게 제놈들의 식민지적야망을 정당화할수 있는 구실과 명분을 주지 말아야 한다. 이번 기회에 미국놈들의 가면을 세상앞에서 벗겨놓고 그놈들을 수세에 몰아넣어야 한다.

정시명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류동명은 정시명이 일을 보는 흥국상회정문에 자동차를 세웠다.

그는 하지가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로 필요한 절차를 밟아놓겠으니 당분간 서울을 뜨지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는 자기의 요청을 심사숙고하여 아무튼 대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곡하게 말하였다.

정시명은 자기 사무실로 가자 인차 마동열을 전화로 찾았다.

김명호와 길철을 찾아내여 한시간간격으로 모나리자다방에서 만나게 해달라고 하였다.

모나리자다방은 경비사령부의 가까이에 있는 차점으로서 례영의 이름으로 등록해놓고있는 정시명의 사업거점이였다.

모나리자다방은 마동열이 운영하고있는 크로바차점과도 가까이에 있어 앞으로 그들을 결혼시켜 딴살림을 시킨다고 하여도 일보기가 편리하게 되여있다.

요새 마동열과 례영의 사이에는 무언의 장벽이 쌓아지고있었다. 마동열의 눈치가 달라지고 주위의 눈길이 자기와 마동열의 사이를 색다르게 보는것을 알게 된 례영은 마동열의 앞에서는 새침해져서 말한마디 하지 않았다. 처녀가 싸늘하게 태도를 보이자 마동열이도 괜히 거북스러워 례영이 나타날 때마다 구석짬을 찾느라고 덤비군 한다.

그래도 밤늦게 다방에서 돌아올 때면 꼬바기 마중을 가군 했는데 전에는 례영이가 또 오셨는가고, 고맙다고, 래일도 늦게 올것 같으니 또 수고해달라고 무랍없이 인사를 차렸건만 인사는 고사하고 왜 또 나왔느냐는듯 한 맞갖잖은 표정이다.

그때마다 총각은 밸이 우쩍 끓어올라 다시 마중나오면 내 도리깨아들이라고 자신에게 화를 내건만 막상 다음날 저녁이 되여 어슬어슬해지면 례영의 걱정에 또 떠밀려나온다.

당자들은 어떤 사이든 그들에게로 가는 눈길들은 한결 따스해졌다.

민순임이도 처음에는 동열삼촌이라고 어려워하였는데 그들의 색다른 교감을 알게 된 때부터는 마치도 사위취급하듯 《자네》로 호칭이 바뀌여지고 《이러저러하게 하게나.》하고 말투가 별로 곰상스러워졌다. 그리고 어느저녁인가 정시명에게 례영이네가 정말 조금도 짝이 기울지 않는 천상배필이라고 말끝마다 뇌이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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