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장막을 헤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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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경에 오겠다던 브라운은 끝내 점심시간이 다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준비해놓았던 오찬상은 비서실의 윤치영을 불러 모윤옥을 가운데 앉히고 요정을 냈다.
리승만이 낮잠에서 깨여나 정신을 차릴무렵에야 브라운이 왔다고 윤치영이 알렸다.
브라운은 리승만이 내미는 손을 잡고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고맙소이다, 바쁘신 시간을 내주시여…》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김구선생한테 들려오느라고.》
브라운이 사죄를 하는데 그 인사치례가 대번에 리승만의 뇌리를 강하게 자극하였다.
(또 김구냐?)
《그러니… 또 순례방문이신가요?》
《아니…》
브라운이 한번 고개를 가로 젓더니 가볍게 웃었다.
처음 보는 그 웃음이 다소 리승만에게 용기를 주었다.
자리에 앉자 브라운은 방안을 한바퀴 휘둘러보고는 《난 2차미쏘협상과 관련한 리선생의 고견을 듣고싶어 왔습니다.》하고 화제를 펴놓았다.
《2차협상?》
리승만은 전혀 예기하지 못했던 문제라 당황해지기까지 하였다. 저도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안으로 금이발이 번쩍번쩍거렸다.
모윤옥이 소리없이 들어와 브라운의 뒤자리에 앉았다. 브라운이 돌아보며 눈을 찔 빨았다. 리승만은 모윤옥을 가운데 앉혀놓고 좌석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하고싶었는데 브라운이 내쫓으라는 소리같아서 그에게로 고개짓을 해보였다.
《말씀하시오. 우리한테서야 무슨 고견이 나오겠소. 거야 뭐 전일에 우리 〈독촉〉이 분명한 신호를 보냈던것 같은데.》
리승만은 그 문제라면 더 길게 론의할 가치가 없는것이라는 립장을 이런 식으로 내놓았다.
《바로 그 문제때문이지요. 우리는 당신들이 전술적으로 미쏘협상을 지지할것을 요망합니다.》
《미국도 미쏘협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이 아닙니까?》
리승만은 1차면담시에 은근히 협상반대에로 자기를 유도해가던 브라운의 말이 생각났다.
《전술이란 가변적이지요. 정치는 정세라는 파도를 정확히 재빨리 타고 흘러야 실책을 면할수 있습니다.》
《무슨 소린지?… 리유를 설명해주시오.》
《리유는?… 미국이 협상을 재개할 결심이라는것이 리유지요.》
《그래 김구는 뭐라고 합디까?》
《동의를 했습니다.》
《그럼 난 반대요.》
리승만이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자 브라운은 지금까지 얼굴에 담고있던 온화한 빛이 일시에 지워졌다.
브라운은 한동안 얄팍해보이는 입술을 다물고 눈에는 엄숙한 빛을 담은채 리승만을 쏘아보았다.
그는 지금 하지의 밀령을 받고 떠나온 길이였다. 어제 저녁에 2차미쏘협상을 시급히 재개할데 대한 미국무성의 최종지시가 떨어졌다. 미국은 남북조선인민들의 드세찬 압력을 더는 막을수 없었던것이다.
미군정청에서 작성보고한 회담전술안에 다소간의 수정을 가한 협상대책안도 극비전보문으로 내려왔다.
온밤 변신원들이 달라붙어 변신하였다.
그에 의하면 협상의 총적목표는 회담을 완전파탄시키는것으로 규정하여놓았다. 그러되 그 책임을 공산측에 들씌워 남조선에서 《단선단정》의 실질적인 구실과 전제를 마련한다는것이였다.
협상대책안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였다.
《총적목표달성을 위해 세가지의 방법을 선택한다.
첫째, 회담재개전에 공산측의 반대의사를 유도해냄으로써 공산측의 반대로 미쏘회담이 무산된것으로 한다.
이를 위한 대책의 세부는 미국무성의 정책연구팀에서 추진한다.》
김구와 리승만에 대한 브라운의 불의방문도 이로부터 조직된것이였다. 미쏘회담을 시종 반대하여온 김구, 리승만이 방향전환을 하면 좌익과 중도세력들의 정세판단에 혼란을 주고 공산측의 협상태도를 후퇴시키게 될것이라는것이다.
《둘째, 회담장에서 회담을 결렬에로 끌고나가는것이다.
이를 위하여서는 현지세력들이 회담과정에 대하여 불신하도록 회의를 유도하며 그들을 회담장에서 탈퇴시킴으로써 협상을 중단하는것이다.
셋째방법은 우의 전술안들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수 없는 경우에 추진시키되 이에 대해서는 국무성밖의 기관들이 담당한다.》
하지와 브라운은 셋째방법이란 모략이며 담당기관은 미전략정보국이라고 생각하였다.
브라운이 오전에 김구를 찾아가니 그는 반대의사를 내놓았다. 자기는 미쏘회담이 신탁통치를 위한 실무회담에 지나지 않으므로 반대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노라 하였다.
그러나 그도 현단계에서 회담의 최종결렬을 위한 한발자국의 양보라고 하자 내키지 않은투로 고개만 끄덕거리였다.
브라운은 리승만과는 설명을 하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김구가 찬성하니 자기는 반대한다는 이러한 론법이 도대체 이 나라의 정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대답인가? 리승만의 반대주장이 너무도 단순하고 졸렬하여 기분이 크게 잡치였다.
브라운은 새삼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보다가 이 기회에 이 인간을 단단히 다불려놓아야 되겠다고 속셈을 하였다.
《리선생, 난 구펠로에게서 당신에 대한 좋은 평가를 듣고왔소. 그런데 지금 나는 구펠로가 왜 서울에서 쫓겨났으며 당신이 어째서 사령관의 랭대를 받고있는지 리해가 되였소. 당신은 정치의 문맹자요!》
《뭐라구요? 소장각하 …당신이 도대체 서울에 온지 얼마나 됐다구 그런 실언을 탕탕 하는거요. 당신은 례절이 없소.》
리승만은 내려붙은 눈덕을 걷어올리고 어성을 높였다.
그러나 브라운은 경멸에 찬 눈길을 접히지 않고 그냥 매정하게 질책을 하였다.
《당신은 아직 이 나라의 통수권자가 아니라는걸 명심하시오. 미국은 당신이 정상에로 가는 길에 푸른 신호등을 켜주지 않았단 말이요.》
《소장각하, 당신은 나에게서 뭘 더 바란단 말이요. 그래 이 나라에서 솔직한 말로 나보다 더 절친한 미국의 벗이라도 찾아냈단 말이요?》
《그건 우리의 화제에서 탈선된 소리요. 난 당신이 당파적인 정쟁에서 벗어나 미국적인 리해관계를 중시할것을 바라오.》
《좋아요. 당신이 제기한 문제가 미국의 정치에 부합된다면 난 구태여 그 과정을 묻지 않겠소. 접수하리다.》
리승만은 브라운이 그 도고한 자세를 한점도 흐트러놓지 않으려 하자 기고만장하던 종전의 허세를 버리였다.
브라운에게는 리승만의 갑작변이가 또 어처구니 없었다. 도무지 이런 인간이 어떻게 정치의 노를 쥐고있을가. 남의 소리를 아무런 려과도 없이 자기의 공론으로 접수해버리는 이런 인간이 미국의 첫째가는 벗이라니 소가 웃다 꾸레미 터질 노릇이다.
그러니 미국의 남조선정책이라는것도 추진될리 만무하다.
브라운은 극도의 환멸감에 소태를 씹은듯 입이 쓰거워났다. 이런 인간을 구펠로가 어떻게 감싸고 돌아갈가.
《잘해보시오. 리선생, 나도 당신도 정치를 하고있소. 정치야 정치답게 해야지. 이건 아이들이 벌리는 유희가 아니란 말이요.》
브라운은 그래도 지금까지 보여왔던 사교적인 례의와 정중성의 자그마한 감정까지 일소해버리고 마치도 소학교 아이들을 훈계하듯 책망하고 일어섰다.
자동차를 타려고 하는데 모윤옥이 그에게 자그마한 부인가방을 내민다.
《부인님께 저의 성의로 전해주세요.》
《모윤옥양의 성의?… 고맙소.》
브라운은 그 가방이 리승만이 마련한것이고 그 가방안에는 딸라뭉치가 차있을것이라는것을 감촉하였다.
자동차를 타고오면서 브라운은 제풀에 허허- 하고 웃고말았다.
어떻게 저 인간에게 사람들이 모여들가. 《독촉》만 봐도 수십만이라 한다.
《한민당》까지 저 인간을 내세운다. 거기에 리승만이 자기 심복자인 장덕수를 정치부장으로 들이박아 조종하고있다지만 거기 실력자들을 만나보니 만만치 않다. 여러개의 청년단체도 모여들고 정보모략집단들도 여러개 쥐고있다고 한다. 사처에 저 인간의 사진이 김구와 나란히 걸려있다. 리승만의 《구심력》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가? 저렇게 권력에 미쳐 주견머리 없는 인간이 주위의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마술력》은 어디에서 오는걸가.
아… 그렇지… 브라운은 웃었다. 그앞에 차려놓았던 만찬상이 생각났다. 상대방의 구미에 발라맞추어 그가 노린것은 무엇인가. 미국의 힘, 미국의 지지이다. 저 인간이 맹목적인 굴종으로 얻어내는 미국의 지지가 측근세력을 통솔하는 힘이고 기교인것이다.
《미국의 끈에 매달린 로구!》
브라운은 입속으로 나직이 외우며 또다시 웃었다. 저런 뼈대없는 인간들을 추려서 그에 의지하려는 미국무성도 가련하다.
그의 눈앞에 다른 모습들이 리승만의 상판을 밀어내고 떠오른다. 기골이 름름하고 멋지게 생긴 사나이, 우렁우렁한 목소리, 아니면 아니고 옳으면 옳다고 분명하게 주장하던 모습-려운형이다. 두볼이 심술스럽게 처지고 입술이 앞으로 밀려나온듯 한 얼굴,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하고는 버릇처럼 눈을 꼭 감아버리던 모습-김구다.
《그게… 인간들이지!》
브라운은 또 한번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브라운이 떠나가자 리승만은 고현놈이라고 뒤발질하기 시작했다. 이제 브라운은 하지에게 곧바로 달려갈것이다. 두상이 어쩌오저쩌오 하면서 횡설수설할것이다.
《당초에 날 롱간해먹자고 잡도리하고 달려든 놈이여.》
리승만은 부엉이 눈처럼 부어오른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욕질을 했다.
비서실에 들린 리승만은 거기서 윤치영과 한창 육담을 늘어놓으며 그 풍만한 가슴을 흔들어대고있는 모윤옥을 불러 다시는 브라운에게로 발길질 말라고 소리질렀다.
모윤옥이 입을 여우입처럼 해가지고 삐쭉거렸다.
리승만은 윤치영이더러 시급한 시일안으로 워싱톤을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그 준비를 이틀안으로 끝내라고 분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