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력사의 회오리속에서

 

3

남산의 5월은 붐비는 계절이다.

신록이 짙어가는 산천경개를 즐기는 사람들로 남산의 5월은 더 한층 이채롭다. 서울사람들은 공휴일이면 뾰족하고 날카롭게 오똑 솟은 북악산에 비하여 부드럽고 친근한 정을 느끼게 하는 남산에 올라 대자연의 웅건한 멋에 취하기도 하고 말안장같은 산정에 올라 유유히 굽이치는 한강과 멀리 북악산을 배경으로 넓게 펼쳐져있는 서울의 정경을 부감하며 인생의 고달픔을 위로하기도 한다. 한패의 사람들이 방금 산정에 오른듯 좀 때이른듯싶은 명주부채를 펴들고 바람을 일구며 바쁜 숨들을 몰아쉬고있다.

《얼마나 좋소. 저 마중위덕으로 겨우내 쌓인 체기가 다 씻겨가는것 같소.》

흰오리가 드문히 섞인 머리칼을 5월의 훈풍에 가벼이 날리며 한 사나이가 자못 흥에 겨운 어조로 부르짖는다.

일행속에서는 가벼운 웃음이 떠돈다. 정시명과 그의 전우들이였다. 일행의 환희에 찬 모습에는 두 처녀의 아릿다운 모습도 끼여있었다. 봄을 맞아 삶의 희열과 보람을 다시 찾은듯 자기의 밝은 모습을 되찾고 활짝 피기 시작한 례영이와 길철의 애인인 공주녀자고등학교 조직책임자였던 권혜숙이였다.

얼마전에 권혜숙은 지난해의 대구인민항쟁에 학생들을 불러일으켰다는 리유로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제주도와 광주, 인천 등지에로 피신하여 돌아다니다가 서울까지 왔었다.

어느날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길철을 만났다. 그러지 않아도 서울에 와서 길철을 찾아볼 생각이 간절했으나 쫓기는 몸에 분명 지하사업에 몸을 담고있을 애인에게 또 하나의 걱정을 끼칠가봐 삼가해왔었다.

권혜숙의 처지를 리해한 길철은 우선 누이인 길봉례집에 피신시키고 그 정형을 정시명에게 보고하였다.

길철의 이야기를 정시명은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로총각인 길철에게 꽃다운 애인이 있다는게 반가웠고 또 하나의 믿음이 가는 동지를 어렵지 않게 찾게 된것이 흡족하였다. 언제부터 사귀였는가고 물으니 길철은 다소 얼굴이 벌그레해져서 일정때부터 그 처녀가 자기의 심부름을 많이 했노라고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러니 벌써 오래전부터 길철이 사귀면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아온 사이라는것이다. 길철을 믿는이상 그가 자기처럼 믿는 애인을 의심할나위가 없었다.

정시명은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를 사업에 인입하였다. 그는 례영이가 맡아하던 시내련락임무를 인계받고 례영은 경리사업을 담당하게 되였다.

식솔이 늘어남에 따라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일감들이 수없이 제기되였던것이다. 그대신 조직의 자금확보를 책임진 림인석이 자기 사업에 시간과 힘을 더 넣을수 있게 되였다.

정시명의 기대대로 처녀들이 사업에 인입되자 녀성으로서의 섬세하고 침착한 활동으로 하여 인차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되였다.

이날도 처녀들은 구럭에 사이다 몇병과 봄과일을 들고 따라나섰는데 그러고보면 제법 그럴사 한 산놀이였다.

주모임은 대체로 일요일에 공원이나 식당, 산과 강기슭에서 진행되는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장소에서 두번이상 열지 않았다.

정시명은 지도부를 결성하는 모임이 있은 후 조직의 명칭을 《흥국상회》로 하고 성원들에게 상회의 공식적인 직함을 적당히 마련해준 조건에서 주모임을 상회의 사무실에서 하는것이 좋을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러 사람들이 공개장소에서 정기적으로 모여앉는것이 좋지 않을것 같았다. 그래 흥국상회의 주식분배와 같은 기업실무가 론의될 때만 그들을 불러서 얼굴을 보이게 하고는 모임은 이렇게 딴곳에서 열군 하였다.

이날의 모임은 서울생활에 아직은 익숙되지 못하고 또 그중 젊은 마동열의 요구에 의하여 남산마루에서 서울장안을 구경하면서 진행하기로 하였다.

주모임에서는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는 정시명이 개별적으로 받는 조건에서 따로 청취하지 않고 함께 의논해서 풀어야할 문제거나 주사업에서 제기된 교훈적이고 경험적인 문제들만 내놓고 서로 협의를 하고 대책을 세웠다.

《림동무, 저 마루에 있는게 뭔지 아오?》

정시명이 서울시의 여기저기를 내려다보고있는 림인석에게 물었다.

시골에서 살다가 압록강을 건는 후 중국에서 내내 사업하여온 림인석은 서울바닥을 이렇게 발밑으로 굽어보는것이 처음이였다. 더구나 서울에 왔어도 늘쌍 내부에서 일해왔던 관계로 남산구경도 이날이 처음이였다.

《글쎄요?》

림인석이 산마루를 쳐다보다가 자신이 없는 대답을 한다.

《저게 봉수대라는거요. 일찌기 리씨조선이 설 때부터 500년을 내려오면서 변방의 여러곳의 경보를 조정에 알리는 신호대라는거요. 이 남산에만 해도 다섯군데의 봉수대가 있소. 지금은 통신수단도 발전되고 교통수단도 현대화되여 지방의 소식이 그날중으로 중앙에 집중되지만 그런 련락수단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저렇게 봉화대를 만들어놓고 밤에는 홰불로써 알리고 낮에는 연기로써 지방의 급보를 전하는것이 제일 안전하고 신속한 련락방법이였소. 봉화대의 시발은 멀리 함경도와 평안도의 변방지역과 제주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해변가마을들에서 하였소. 오랑캐가 나타났을 때에는 두번을 올리고 적이 국경가까이에 다가들면 세번, 나라지경에 들어서면 네번, 접전이 벌어지면 다섯번을 올리였소.

봉화대를 통한 경보는 불의의 재변을 중앙에 알림과 동시에 인민들을 각성시키고 준비시키는데도 의의가 컸소.》

일행은 어느새 적당한 자리에 둘러앉아 정시명의 이야기에 잠겨들었다.

이런 때는 이끼오른 력사의 기슭을 거슬러 저저이 엮어가는 이야기를 펼쳐가는 력사학자와 마주앉은 기분이다.

일행은 저도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취하여 정시명의 입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정시명을 알고지낸지 얼마 안되는 길철이나 김명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저 무한한 지식의 바다가 저 사람에게는 누구도 견줄수 없는 투쟁무기로 되고있다. 저러한 지적인 매력과 위력앞에서 누구인들 머리를 숙이지 않겠는가.)

정시명은 이윽고 자리를 잡은 전우들을 돌아보며 말머리를 돌렸다.

《주에 제기된 문제부터 들어봅시다.》

정시명이 이렇게 화제를 꺼내자 두 처녀는 기다린듯 자리에서 일어나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주변에서 한창 연한 이파리들을 내놓은 마라리며 삽주싹을 뜯으며 주변에 대한 경계를 하였다.

《저…》

김명호는 힘들게 입을 떼였다가 웬일인지 림인석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정시명이 김명호의 과묵한 성미를 참작하여 굳이 캐묻지 않고 마동열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뭐 특별한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자금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다방이나 가지고서는…》

마동열은 자기가 경영하고있는 사업거점의 일을 생각밖에 물망에 올린것이 민망스러워 괜히 씨근덕거리며 얼굴을 붉히였다.

지방과 서울시내의 련락임무를 총괄하고있는 마동열은 누구보다도 자금의 필요를 절박하게 체험하고있었다. 며칠전에 마동열과 례영이 인천에 신혼나들이차림으로 중대한 긴급련락차로 갔다올 때 시내로 들어오는 택시를 타지 못하고 뻐스를 타고오다가 놈들의 단속에 걸린 일도 있었다. 언젠가는 호부자자식의 차림으로 촌음식점에 들려 눅거리음식인 강냉이국수를 청해먹다가 경찰의 주목을 받은 일도 있었다.

《자금이 문제긴 문제입니다.》

림인석이 마동열의 말을 인차 받으며 공감을 표시하였다.

재정사업을 맡은 림인석이로서는 응당한 고충이다. 사업범위가 커지고 일이 심화됨에 따라 누구나 림인석에게 손을 내밀지만 그들의 주머니를 시원스럽게 채워주지 못한다. 이따금 지나가는 소리로 돈이 없어 겪은 여러가지 일들을 꺼내놓을 때마다 가슴이 졸아드는듯 한 아픔을 느끼군 하는 그였다.

《김선생도 그것때문이겠소?》

정시명이 방금 김명호가 림인석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던 생각이 나서 물었다.

《네… 사실은… 신문사에서 적자가 커집니다.》

김명호가 너부죽한 얼굴에 허거픈 웃음을 담으며 말꼬리를 여물구지 못한다. 림인석은 자신에게로 은근히 쏠리는 눈길들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동지들의 제기를 자기의 사업에 대한 비판으로 접수하면서도 대책적인 의견을 제기할수 없는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여러가지로 묘책을 써보았으나 아직 한번도 정시명을 만족시킬만 한 뾰족한 수는 내놓지 못하였다.

자금문제는 정시명이 늘쌍 관심하고 강조해온 문제였다. 사업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걸음마다 자금의 필요를 절감하고있었다.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선 현시점에 와서 이 문제는 더는 넘겨버릴수 없는 문제로 떠오르고있었다.

모든 사업이 다 그러하지만 적구에서 지하공작을 벌려나가자면 재정적보장이 있어야 한다. 조직을 기계라고 칭한다면 돈은 윤활유라고도 말할수 있다.

더우기 광복직후 남조선사회에서는 돈이 없이는 한걸음도 사업을 전개해나갈수 없는 형편이였다. 당시 남조선에서는 돈만 있으면 모든것을 다 해결할수 있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50만원이면 살려낼수 있었다. 문자그대로 황금만능의 세상이다.

정시명은 초기에 귀국하였을 때는 이미 기업가로 변신한 동지들로부터 적지 않은 자금을 받아 썼다. 그러나 독립군의 모금사업처럼 자금을 마련할수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자금을 모아들이면 우선 기업을 차린 동지들이 기업경쟁에서 패배하여 기업을 망치고 활동을 뒤걸음질하게 할수 있었다. 그리고 돈지원을 받는 경우 유사시에 놈들의 도발에 걸려들더라도 빠져나갈수 있게 출처를 철저히 위장해야 하였다.

그래서 정시명은 사업비를 자체로 해결할것을 결심하였으나 아직 다른 일거리에 밀려서 손을 크게 대지 못하여왔는데 그 일이야말로 우선시해야 할 일같다.

그동안 서울시내의 여러곳에 다방이나 매점 그리고 여러가지 봉사업소들을 장악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적자만 내고있었다. 설사 앞으로 궤도에 오른다 해도 그것만 가지고서는 방대한 활동을 담보하기는 어려울것이다. 동지들의 생활문제도 지금은 전적으로 박정인이 부담하고있는데 앞으로 계속 그런 식으로만 해나갈수 없었다. 신문사의 판권을 얻어내느라고 적지 않은 자금을 꺼내쓴 탓으로 박정인의 돈자리도 거덜이 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얼마전에 박정인의 아들 박영수가 결혼식을 하였는데 차려놓은 잔치상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너무도 조촐하게 차렸던것이다.

박영수의 장인되는 사람이 충청남도에서 갑부로 꼽히는 사람인데 그가 돌아가서 딸에게 했다는 소리도 귀가 솔가왔다.

《사둔장이 돈 많다 소문은 났어도 과히 돈 쓸줄은 모르는것 같군.》

그날 정시명도 마음이 좋지 않아 외독자 결혼식을 너무 가볍게 치른다고 섭섭한 소리를 하니 당자는 어줍게 웃어버리는데 주씨부인은 돌아앉아 눈굽을 닦았다.

정시명의 뇌리에는 이러루한 사연들이 일시에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한창 움씰움씰거리기 시작한 조직이 자금난에 발목이 잡힐것만 같다.

정시명은 좌중을 둘러보았으나 누구도 답답한 가슴을 시원스럽게 해줄상싶지 않았다.

《문제는 돈을 얻는것인데…》

정시명이 조용히 혼자소리처럼 뇌이다가 한 생각이 피끗 떠올랐다.

《가만, 일전에 길철동무가 가져왔던 뭉치돈에 흥미가 있는데…》

《최남수말입니까?》

《그래, 최남수라고 했지. 무슨 사장이라고 했던것 같은데…》

《네, 〈명신상사〉 사장입니다.》

길철은 정시명이 넌지시 귀띔을 해주자 내려붙였던 속눈섭을 번쩍 들고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얼마전에 길철이 조직에 뭉치돈을 가져온적이 있었다. 그날 돈의 출처에 대해 흥미있어 하는 정시명에게 8.15전부터 알고있는 무역업자 최남수한테서 얻어온것이라고 밝히고는 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였다.

《명신상사》라는 큰 무역회사를 쥐고있는 최남수는 길철이와 한고향사람이였다. 광복전에 일본에 가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다가 아버지가 사망하자 더는 대학을 다닐수 없어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였다. 대학에서 광업분야를 공부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자 집과 가산을 몽땅 팔아 자그마한 금광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인부라야 고향에서 사귄 친구들과 자기까지 합쳐 불과 여라문명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황금노다지를 찾아냈다. 그통에 남도가 다 아는 벼락부자가 되였다. 사교술이 능하고 담이 큰 최남수는 그 금덩이를 밑천으로 기업체를 꾸리고 점차 무역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서울에 영화촬영소까지 차려놓았고 일본땅에까지 기업과 무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선사업에 돈을 아끼지 않아 민심을 푼푼이 모아들이고있었는데 더구나 서울에 와사는 고향사람들을 만나면 무엇이든지 보태주고야 속이 편해하였다.

길철이 뭉치돈을 받은것도 연고가 있었다.

어느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누이와 함께 행랑살이를 한다는 말을 들은 최남수는 다짜고짜로 자기 집에 끌고가 그의 손에 뭉치돈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자네가 우리 고향에서는 명물이야. 정치에 뛰여들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왕 나선 길이니 머리통이 열쪼각이 나더라도 대통령옥좌를 바라보며 부지런히 용을 쓰게. 돈은 내 대줄터이니.》하며 껄껄 웃었다.

길철은 아무런 사심도 없는 그의 돈을 두말없이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기업범위가 거창하고 들락날락하는 돈이 약차해서 그를 쥐여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있었다.

길철은 지금도 선뜻 나설수 없어 주밋거릴뿐이였다.

정시명이 길철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게 힘을 주듯이 말을 이었다.

《길철동무생각은 어떻소? 최남수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더 큰 몫을 안고 살아가게 할수 없을가?》

《네?》

《물론 우리에겐 돈이 필요하오. 그보다도 그 인간이 필요하오. 그러면 최남수에게는 우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정시명이 말을 잠시 끊자 길철은 그의 말꼬리를 잡고 생각에 잠겼다.

정시명의 문제설정이 어쩐지 가슴을 쿵 울리는데가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동지들을 포섭하는 사업을 시작할 때면 임무수행이라는 립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대상을 위한다는 견지에서 생각을 굴려본 일은 없었다.

《해보겠습니다.》

길철은 정시명의 웅심깊은 심중이 인차 납득이 되고 또 그로하여 가슴이 달아올라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였다. 참으로 최남수를 애국의 대오, 혁명의 대오에 세워준다면 그 인간에게 있어서도 얼마나 장하고 행복한 일이겠는가.

《가능하다고 보는 근거는?》

길철이 단마디명창으로 쉽게 응하는것이 의심쩍어 정시명이 오금을 박아 물었다.

《그건…》

길철은 입을 다물지 못한채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정시명은 길철의 제기를 받거나 임무를 줄 때면 드문히 이러루하게 불의적인 질문으로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지들이 현상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을 키워 정확한 평가를 내리게 하며 행동에 앞서 사색하고 연구하는 기풍을 세워주고싶었던것이다.

정시명은 정황에 대한 판단이 신속하고 결심채택과 행동에로의 돌입이 과단성있게 진행되는 길철에게는 특별히 류의해야 할 문제이므로 늘쌍 관심하고있었다. 행동과 사고가 재빠른 사람일수록 빈틈이 많고 지나간 자국에 필요없는 흔적을 많이 남기는 법이다.

길철이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하자 정시명이 자기의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자기가 대상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견해가 서있어야 하오. 그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가. 벗인가 원쑤인가, 포섭할수 있겠는가 리용하는 정도이겠는가, 동지로 사귀지는 못하겠는가, 이런 견해에는 다 타당성이 있는 론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가 가진 결점이 무엇인데 이러이러한 장점으로 해서 극복할수 있다던지 혹은 이러한 장점은 있지만 저러저러한 결점으로 해서 우리 대오에 들어설수는 없다든지… 사람의 마음을 구태여 가지수로 계산하면 수천수만가지 갈래로 나눌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니 우린 대상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관찰하고 연구한 다음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견해를 가져야 하며 그에 기초하여 결심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 하오.》

정시명은 이야기를 잠시 끊고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서울장안과 변두리에 련련히 뻗어간 관악산지의 봉우리들을 굽어보았다.

그의 눈길에 산나물을 열심히 뜯고있는 권혜숙의 늘씬한 허리가 언뜻 스쳐갔다.

그의 모습이 숲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자신은 권혜숙이나 전우들에 대하여 다 알고있는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권혜숙은 복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하게 생긴 례영이와는 판이하게 눈도 코도 입도 다 시원스럽게 생기고 성미까지도 괄괄하다. 그래서 어느 모임끝에 마동열이 롱소리로 우리 집 괄량이라고 불렀는데 당자는 대번에 눈살이 꼿꼿해서 마동열을 쳐다보더니 《흥!》하고 코소리를 내며 건너방으로 달아나버렸다. 길철이 폭소를 터뜨리며 《마동무가 면바로 맞혔소. 저 아가씨의 별명이 괄량이에다가 말자까지 덧붙여서 말괄량이였다오.》해서 모두가 크게 웃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야 정시명은 례영이를 통해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권혜숙을 보게 되였다.

권혜숙의 고향은 남해바다가라고 한다. 아버지는 땅마지기나 가지고있는 농사군이였다. 권혜숙이 부산녀고를 다닐 때 갑자기 그를 시집보내려고 불러들였다. 당시 권혜숙은 학생들의 선두에 서서 학교안의 악질교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는데 아버지가 그걸 알고 일찌감치 시집을 보내 집안의 화근을 뿌리빼려고 했던것이다. 그런줄은 모르고 《부친급병》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온 처녀는 집에서 벌려놓은 잔치바람에 반정신이 나가버렸다. 울며불며 야단을 부렸으나 아버지의 결심은 휘여들지 않았다. 여러날 자리에 누워 끙끙 앓던 처녀는 잔치전날에 북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쏘련에 가버리자고 마음을 먹었던것이다. 그러나 두만강가에서 경찰들에게 걸려들었다. 아버지가 경찰서에 탈가한 딸을 잡아달라고 의뢰하여 전국적인 수배령이 내렸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경찰들에게 끌려온 처녀는 며칠후에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갔다. 여기서 길철을 만나게 되여 그의 지도와 방조속에 청계피복공장에 녀공으로 들어가 혁명의 길에 나섰다. 광복후에는 공주에서 교원으로 일하면서 여전히 지하사업에 참가하여왔다고 한다.

이 순간 정시명은 자기가 권혜숙이만이 아니라 김명호나 길철이나 그리고 박정인과 길봉례 등 한처마밑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누가 묻는다면 이야기해줄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생겨났다. 그들에게 일을 시키면서도 너무도 모르는것이 많다는 후회가 갈마들었다.

정시명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최남수에 대한 내 의견을 먼저 내놓읍시다. 그에게서 좋다고 생각하는건 무엇인가. 그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정이요. 자기가 알고있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하여 걱정할줄 알고 동정할줄 아는 그 마음이 소중한것이요. 나쁜것은 무엇이겠는가. 돈을 세상의 전부처럼 생각하는거요. 아마 최남수는 사람들을 동정하고 가까이 사귀는것도 내놓는 돈의 크기로 회계를 깐깐히 하고있을것이요. 그러면 그의 결점을 장점으로 지워버릴수 있는가. 능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람들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과 배려는 그의 타고난 성미라고 생각되오. 아버지도 원래 덕망이 높았다고 하니 그런 의미에서 교양이 잘된 가정이요. 반면에 돈에 대한 관심, 치부욕은 구차한 생활환경이 만들어준 악덕이요. 어지러운것은 우리가 다듬어줍시다. 자기 고향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내 나라, 내 겨레를 위한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승화시켜나간다면 그는 벌어온 돈을 어떻게 써야 값진가 하는것을 깨닫게 될거요.》

정시명은 자금문제는 그것으로 눌러놓고 화제를 돌렸다.

《한가지만 제기하겠습니다. 쏘미회담재개가 정치의 전면에 떠올랐습니다. 미국놈들이 더는 뒤걸음질하지 못하게 되여 가고있습니다. 이건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미 예견하신바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쏘미협상을 기화로 미국놈들이 쏠라닥거릴수 있다고 경종을 울리시였습니다.

오늘 회의에서 이 문제를 누구도 제기하지 않은것은 우리가 아직 자기의 임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정세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지 못하고있다는것을 말해줍니다. 모든 동지들이 이 문제에 주의를 돌려야 하겠습니다.》

정시명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울렸지만 누구나 자신들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심중하게 접수하였다.

길철은 지도부회의결정에 따라 최남수와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다그쳐나갔다. 그는 몇명의 조직성원들까지 동원하여 최남수의 동향과 주변인물들을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사업부터 시작하였다.

그들의 조사자료를 종합하니 매우 흥미있는 자료가 포착되였다. 리승만의 개인비서로 있으면서 《민주동맹》이라는 정치조직을 무은 리승규라는자에게 정치자금을 계통적으로 대주고있다는 자료였다.

길철은 이 자료를 보고하여온 성원에게 리승규라는자의 정체에 대하여 더 상세히 알아볼것을 지시하였다.

리승규는 광주사람으로서 최남수와는 동경에서 사귄 사이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에서 돌아온 리승규는 광주의 유지들을 그러모아 《민주동맹》이라는 자그마한 그루빠를 만들어놓고는 그 앞에다가는 《한국》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달아놓았다. 광복후의 회오리치는 정치바람을 타고 서울에 기여든 이자는 대세를 관망하다가 날쌔게 리승만의 옷섶에 매달렸다. 리승만은 《한국민주동맹》의 지도자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리승규의 대포에 속아넘어가 자기의 비서실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아직 정치적신조가 뚜렷하지 못하고 대세의 흐름에 둔감한 최남수는 반동들의 거짓선전에 넘어가 리승만역도를 민주와 독립의 대변자로 숭상하면서 역도의 꼬리에 매달린 리승규를 대견하게 여기고 막대한 돈을 찔러주고있었다.

리승규는 《민주동맹》의 운영금으로 다달이 최남수한테서 기부받은 돈을 제놈의 방탕한 생활에 거진 탕진하고있었다. 사실상 《민주동맹》이라는게 백명안팎으로 조직된 작은 집단인데다가 친목회처럼 이따금 모여 기생집에서 술놀이나 하는 정도로 운영되였으므로 운영비라는 말도 가당치 않았다.

길철은 료해한 자료들을 종합한 다음 정시명과 함께 그와의 사업계획을 면밀히 세웠다. 최남수를 전취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리승만역도의 대미굴종과 매국죄행을 알려주고 어떻게 사는것이 참된 인생인가 하는것을 인식시켜야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리승규의 협잡과 정치적투기행위에 리용되고있다는것을 사실적자료로써 납득시켜야 하였다.

정시명은 길철이 밀매업자로 나서서 합작을 하는 방향에서 최남수와 관계를 가까이 하게 하고 리승규의 자금내용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알아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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