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충신들의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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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이 길가를 나서는데 송호정의 승용차가 따라 왔다.
운전사가 시창유리를 내리더니 고개를 내밀고 타라고 하였다. 뒤자리에는 민순임이 앉아있었다.
차는 남산재를 내려서자 종로네거리를 지나 질풍같이 내달렸다.
민순임은 아직도 가슴이 활랑활랑거려 입을 꼭 다물고 앉아서 남편의 눈치만 살폈다.
정시명은 자동차에 올라앉아서도 등받이에 등을 붙인채 차창에 언뜻언뜻 스쳐가는 거리의 야경만 내다볼뿐이였다.
자동차가 한강다리를 넘어서자 차를 세우라고 부탁했다.
《댁에까지 모셔드리라고 마님이 분부하셨는데요.》
《됐소. 우린 여기서 걸어가겠소.》
《통인동이 여기서 어디라구요?》
《괜찮소. 고맙소.》
자동차를 바래주고나서 그들은 다리목에서 내려 한강변에 나섰다.
강뚝에서 잠시 초봄의 서늘한 바람을 탐스럽게 마시며 달빛이 비낀 강을 둘러보았다. 잔잔한 물결은 휘영청한 달빛을 안고 쉬임없이 반짝거리고있다.
가까운 곳에서 물고기 한마리가 불쑥 뛰여올라 고요한 수면을 마구 휘저어놓았다. 그러나 강물은 그 자그마한 반발을 무시해버리듯 둥그렇게 퍼져가는 파문을 삼켜버리고 다시 달빛을 담아싣고 유유히 아래로, 바다로 흘러갔다.
그 용용한 흐름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고있노라니 저도 대중할수 없는 불안에 가슴이 후득후득해오고 침울해졌다.
가까운 친구로 생각해왔던 사람이다. 말 한마디면 쾌히 손을 내밀것 같던 벗이였다. 사업이 시작부터 난관에 부닥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었다.
송호정의 말과 거동이 떠오르자 헤아릴수 없는 환멸과 비애가 흉중을 꽉 메웠다. 송호정이 내앞에서 그럴수 있는가. 송호정이 정말 미국이 쥐여준 총대를 자기의 사상과 리념으로 받아멨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송호정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쉽게 달려든게 아닐가.
《여보!…》
민순임이 불러서야 정시명은 소용돌이하는 생각에서 깨여났다.
민순임이 용기를 내여 불러놓았지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뿐이다. 그 둥글고 어진 눈이 촉촉히 젖어있는데 긴속눈섭끝에 애절한 원망이 가닥가닥 매달려 애처럽게 떨고있는것 같다.
무언의 그 힐난에 정시명은 죄스러웠다.
《여보, 미안하오. 미안하오… 당신까지 모처럼 데리고와서…》
《저 같은거야 뭐랍니까.》
민순임이 나직이 중얼거린다.
《그저 큰일하는분들이 의가 상하지들 말았으면…》
민순임이 영문을 딱히 모르면서도 속상해서 조심스레 말을 했다.
민순임은 바깥사람들 하는 일에 절대로 끼여들지 않으리라 골백번 곱씹어 생각해온다. 제가 나서 도울 일도 없으련만 제같은 촌녀인이 남편하는 일을 도와나선다는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날 일은 아무리 생각해야 잘된일 같지 않다. 저이도 너무 자기를 다잡지 못한것만 같다.
《같은 말씀도 툭 하고 탁 하고 다르다고 아버님이 늘쌍 말씀했습니다.》
민순임이 아래 입술을 감씹다가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거들어내놓자 정시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숙이는 안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저으기 자기의 주장을 펴는 안해의 모습이 여늬때없이 의젓하고 믿음이 갔다.
정시명이 감심이 되여 고개를 끄덕이였다.
《당신 말이 옳소.… 하지만 괜찮소. 우린 어차피 딴 길을 걷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요. 난 그 량반을 믿소.》
《부인도 마음씨가 여간 참하지 않아요.》
《그 녀인은 중국녀자요. 그리고 실은 주인과 같이 대학을 나왔소. 그들은 대학에서 사귀였다오.》
《그래요?… 저런! 그 말씀 왜 이제야 하세요?》
민순임이 놀라서 걸음까지 세우며 나무람조로 말했다.
《당신이 괜히 주눅이 들가봐…》
정시명이 히죽이 웃었다.
《당신 괄세합디까?》
《아니, 아니예요…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저 새새 묻더군요.》
《뭘 말이요?》
《우리가 살아온 고향이야기며 북조선이야기죠. 토지개혁이라는게 뭔가, 어떻게 했는가, 지주들이 가만히 있던가, 현물세는 얼마나 내는가, 남녀평등권이란 뭐인가, 녀맹에서는 뭘하는가.》
《뭐라고 합디까?》
《왜 그 좋은걸 버리고 여길 왔느냐고, 서울살이가 후회될게라고 합디다.》
《그래서?…》
《주인이 꼭 가야 한다고 해서… 서울서 중한 일이 기다린다고 해서 따라 왔노라 했지요.》
《하, 거참… 당신은 사업을 잘해냈구만.》
《사업이요?》
《그런게 바로 사업이라는거요. 우리 일이 별게 아니요. 생각이 짧은 사람들에게는 보탬을 주고 옳은 길에서 비켜선 사람들은 바로 들어서게 해서 모두가 나라 위해 살도록 하는거요. 당신 참 수고를 했소.》
정시명이 진심으로 고마와하며 밝게 웃었다. 과연 민순임은 이날 자기가 소리없이 맡아안은 몫을 소리없이 잘해낸것 같다. 무겁던 가슴 한귀퉁이가 들리는것 같다. 안팎으로 흔들어대느라면 송호정이 제아무리 질겨먹은 뿌다귀에 보짱을 세워놓았다 해도 견디여내지 못할걸…
《자, 갑시다!》 정시명이 걸음을 재촉했다.
머리우에서 밤새가 청아한 가락으로 강반의 정적을 조용히 흔든다. 방축에 올라서니 동전만 한 잎새가 불린 버드나무가지들이 흐느적이는데 그 사이로 휘늘어져내리는 달빛이 춤추듯 그들의 몸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이쪽저쪽으로 숨기도 한다. 벌써 여기저기에는 남녀청춘들이 쌍쌍이 붙어앉아 행복을 속삭이는 모습이 달빛에 어려 이채롭게 눈에 띄였다.
민순임이 그런 광경들에 자주 곁눈이 돌아가서 《이봐요. 여긴 우리네 같은 사람들이 들어설 곳이 아닌가 봐요.》 하며 쑥스러워했다.
정시명이 그 말에 껄껄 웃기부터 한다.
《그래, 저런 시절은 지나갔지. 여보, 거 뭐 우리도 여기 잠간 앉았다 갑시다. 보오. 얼마나 좋소! 달빛도 좋고 강물도 좋고 봄바람도 좋고…》
정시명이 방축우에 아무렇게나 퍼더버리고 앉으며 아름다운 강반의 밤경치에 취해든듯 감개에 떠서 속삭인다.
돌이켜보면 이렇듯 제멋에 들떠서 안해와 더불어 강반에 나서보기는 그와 인연을 맺은이래 처음인것 같다.
은근히 취기가 오른것이 더구나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얼마나 교교한 달빛인가. 희푸릿한 달빛을 받은 안해의 둥실한 얼굴도 이밤따라 유별히도 정이 간다.
송호정으로 해서 흐려졌던 마음이 부신듯이 사라졌다.
《자, 어서 이리 와서 앉으라는데두… 우리도 한번 젊은 시절에로 돌아가봅시다.》
젊어서는 희망속에 살고 나이 들어서는 추억속에 산다고들 한다. 나이 든 부부들에게 가장 소중한 추억이라면 두말할것 없이 자기들의 사랑의 첫 기슭에 얽혀있는 가지가지 사연들일것이다.
《원, 참 당신은… 이럴 때도 있었구려.》
민순임이 정시명의 손에 손목을 잡히운채 쑥스러운듯 이렇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가슴안이 일렁일렁 달아올라 남편의 곁에 와서 무릎을 세우고 다소곳이 앉는다.
민순임에게 젊은 시절의 사랑의 이야기를 구태여 묻는다면 기다림과 그리움의 추억만을 담을것이다.
기다려지던 애인… 그리워지던 남편… 이게 전부다.
애모쁜 그리움속에 시작되여 기다림속에 영영 떨어져간 젊은 시절.
무슨 다른 얘기가 없을것 같다.
《여보, 생각나오? 서울 하숙집 말이요.》
정시명이 문득 꺼낸 소리였다.
《서울 하숙집?…》
뜨아한 어조로 반문하던 민순임이 그만에야 《원 당신두, 생강스럽게…》하고 처녀시절처럼 수집어 어쩔줄 몰라한다.
《하하…》
정시명은 민순임이 열적어하는게 보기 좋은듯 소리내여 웃는다.
정시명이 배재학교 2학년때다.
지난 학년말방학에 집에 갔다가 아버지의 강권으로 웃마을에 사는 민순임과 선을 보고왔던 정시명은 결혼식을 하게 약조가 되여있는 2학년 겨울방학에는 우정 서울친구들의 집에서 어정거리면서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결혼식준비를 다 해놓고 신랑쟁이 오기만을 눈이 까매서 기다리던 집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형이 찾아온다, 처남되는 이가 찾아온다, 연방 아버지의 엄명이 날아왔으나 당자는 태평스럽게 도서관에 붙박혀 적색도서들만 읽고있었다. 정시명의 생각은 결혼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 할 심산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하숙집에 들어가니 뜻밖에도 민순임이 와서 허리를 동그랗게 해가지고 오도카니 한 구석에 앉아있었다. 정시명을 데리러 왔던 처남이 결김에 《그 사람 분명히 서울체네들을 봐두고 다니는것 같으니 네가 한번 서방될 사람 시원히 만나보고 오너라.》며 강다짐으로 서울에 끌고나와 자기는 돌아가고 민순임만 남겨놓았던것이다.
일은 그 뒤가 난사였다. 같이 하숙하던 동무들 셋이 따라 들어왔는데 정시명이 얼른 《우리 누나요.》하고 소개해버린것이다.
그렇게 소개해버리고나니 일은 더 우습게 번지고 말았다. 동무들이 친구의 누나로 깍듯이 인사를 개올리는데 민순임이 정시명의 누나역을 하기는 더욱 서툴었다. 차라리 누이동생이라 불러주었으면 어색한대로 처신을 하겠는데 신랑되는 사람앞에서 누나구실한다는게 당치 않은 일이였다.
정시명이 역시 오랍동생노릇을 하자니 피차에 땀이 나는 일이였다. 저녁시간이 되여 민순임이 려관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자 동무들이 펄쩍 뛰였다.
오래간만에 오랍동생을 만났는데 이 방에서 쉬다가 래일 아침 기차표를 자기네가 마련해오겠으니 그때 떠나라는것이였다. 서로 눈을 찔끔찔끔 맞춰가며 엉너리를 치는 품이 다 속내를 알아차리고 하는 수작들이였다.
그렇게 민순임과 정시명을 억지로 눌러놓고는 자기 이불들은 다 그러안고 키득거리며 나가버렸다. 나가면서 문고리에 붕어처럼 생긴 큼직한 자물쇠를 덜컥 채워놓기까지 하였다. 그 장난꾸러기들이 정시명과 민순임의 사이를 몰라볼리 만무했다. 정시명이 이게 무슨 꼴이 됐느냐고, 뭐가 급해 찾아다니며 망신을 당하게 하느냐고 밸을 썼으나 처녀는 한마디 항변도 없다가 한마디 한것이 정시명을 웃기고 말았다.
《거기서… 서울처녀들을 따라 다닌다고 하기에…》
정시명이 어처구니 없어 크게 소리내여 웃고는 자리를 폈다.
그런데 친구들이 우정 미욱을 부리며 제 이부자리들은 다 안고나간지라 그게 또한 야단이였다. 이부자리 하나 놓고 밀고 당기고 하다가 결국 민순임이 이불을 덮고 정시명은 다다미우에 단벌 무명저고리를 덮고 누웠다.
밤이 깊을수록 방안이 얼어들어 정시명은 잠들수가 없었다. 민순임이도 다리를 꼬부리고 새우잠을 자고있는 신랑을 옆에 두고 누우니 잠이 올리 없었다. 그래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정시명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는데 정시명이 다시 넘겨씌워주었다. 이불이 그들사이에 여러번 왔다갔다 했다. 하는수 없이 민순임이 다시 덮었다.
밤이 깊어 정시명이 덜덜 떨다가 물었다.
《자나?》
민순임이 뒤치락거리는것으로 대답하자 정시명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같이 잘가?》
아무래도 잠자리를 같이 할 녀자인데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당장은 너무 몸이 얼어들어 잠들수 없는것이 급해났던것이다. 그 소리에 민순임이 갑자기 가슴이 활랑거리고 숨소리가 높아졌다. 민순임이 종시 대답을 못하는데 정시명이 크게 용단을 내린듯 이부자리밑으로 언발을 슬그머니 들이밀었다. 그러자 민순임이 정시명에게 돌아누우며 한손으로 이불을 들어 무언의 약속을 내리고야 말았다.
민순임이 집으로 내려간지 두달만에 형수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약혼녀가 태기가 있으니 졸경을 치르지 말고 빨리 와서 식을 올리라는것이였다. 바빠맞은 정시명이 형수의 긴급호출에는 응하는수밖에 없었다.
결혼식을 한 후에 정시명은 동무들로부터 누님이 잘 있느냐고 놀림을 받군 하였는데 정시명은 정말 살면서 안해라기보다 누이처럼 여겨지군 할 때가 많았다. 민순임은 아무때나 다심한 누이처럼 군말없이 남편의 뒤시중을 들면서도 크게 바라는 일도 없이 집안일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였다.
그게 벌써 스물다섯해전의 이야기다.
열시를 알리는 싸이렌소리가 이제는 밤이 깊었노라 일깨워주듯 길게 서울의 밤하늘을 흔들고 강반의 버들도 흔들었다.
《벌써 이렇게 되였는가?》
정시명이 아쉬운듯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어디로 가실랍니까?》
《전차정류소로 가야지.》
그들은 자리를 털고일어나 강뚝에서 내려 큰 도로에 나섰다.
민순임이 문득 발을 세우고 《이보세요. 우리넨 휴가라는게 없는가요?》하고 물었다.
《휴가?… 하하하…》
정시명이 실없는 소리같아 어이없어 소리내여 웃었다.
《원, 남은 열두번 생각다가 해본 소린데…》
《없소. 어떻게 집에 간단 말이요. 자, 빨리 갑시다.》
정시명이 분명한 어조로 대답을 주고는 앞서서 걸음을 빨리 했다.
민순임이 정시명의 빠른 걸음을 따라 서느라고 숨을 할딱거리며 《그래도 가고싶은 사람들은 다 갔다 온다는데…》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딴은 그래. 헌데 기어이 집에 다녀올 일이란건 뭐요?》
《맏이 나이가 몇인줄 아세요? 그애 짝을 맞춰주고 올랍니다.》
《맏이의 짝을?… 허허허.》
정시명이 민순임이 꺼내놓은 리유라는게 너무나도 왕청같은것이여서 다시한번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고 말았다.
《셈평 좋은 소릴 한다… 그 일때문에 38선을 넘는단 말이요? 그거야 아버님도 계시고 형님내외분이 어련히 맡아주지 않을라구.》
정시명이 한바탕 웃어넘기고는 안해를 무시하는것 같아 짐짓 정중하게 응수하였다.
《내가 봐둔 처녀가 있어 그럽네다. 당신이야 뭐 그런 일에 깜깜이시니…》
《그건 뭐 당신 결심대로 하오. 어떤 처녀이기에?》
《당신두 잘 알아요.》
《내가?… 내가 잘 아는 처녀가 있다.… 에잇 답답두 하다. 말해보오.》
정시명이 버쩍 호기심이 동했다.
《례영이…》
《례영이?》
정시명이 발을 우뚝 세웠다.
《그래요. 례영이… 우리 집안에 맞아들이자요. 난 그애 없이는 살지 못할것 같애요. 당신두 좋지요?》
민순임이 요 며칠새 입안에서 뱅뱅 돌면서도 차마 입밖에 내지 못했던 말을 끄집어내놓고는 속이 시원해서 다그어댔다.
《당신이 말씀하셨지요. 례영이 아버진 당신 생명의 은인이자 우리 가정이 잊지 말아야 할 분이지요. 어떠세요? 당신 마음엔…》
《례영에게 말을 해두었소?》
《아직은… 그 애가 우리 성의를 마다할라구요. 그래서 당신이 허락하면 례영이를 아예 데리고갔으면 해서…》
정시명이 이미 안해의 머리에는 타산이 다 돼있는 소리를 듣자 시적시적 걸음만 옮겨놓았다. 눈앞으로 김정필의 모습이 떠오른다. 맏이의 나이를 물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담던 일이 어제런듯싶다. 그래, 례영이를 행복하게 할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마다하랴. 맏이를 맞세워 놓으면 친구앞에서도 하나의 빚은 성의있게 값는 셈이다. 그러나 례영이앞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며느리로 받아들이는것이 어쩐지 량심에 께름직하다.
며느리라니?… 아니, 안될 말이다.…
정시명은 은근히 화가 돋쳤다.
정시명이 입을 꼭 다문채 걸음만 옮겨놓자 민순임이 말 꺼낸 김에 끝을 보고싶어 《말씀해줘요.》하고 대답을 보챈다.
정시명이 흘끔 안해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안되오.》하고 한마디로 잘랐다.
《왜요?》
《글쎄 안되오.》
정시명이 무뚝뚝하게 반대해나서자 민순임이 더욱 등이 달았다.
《리유가 뭡니까? 저도 압세다.》
민순임이 평소의 그 여리던 마음이 어데 있었나싶게 곱지 않게 따지고 든다.
《그앤 내 딸이야!》
《그럼?… 나는 또 누굽니까?》
《그래그래… 그 앤 우리 딸이지. 친딸이야.》
《딸이면 어떻고 며느리면 어떻다는거요? 오히려 딸이야 출가외인이라고 문턱을 넘어서면 남의 사람이지만 며느리야 눈을 감겨주는 딸이상의 혈붙이가 아니예요.》
《어쩌구저쩌구 해도 며느리는 딸보다 한걸음 뜨단 말이요.》
《원, 거야 뭐 생각나름이고 살아갈나름이지요.》
민순임이 그냥 고집을 부리자 정시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내 옛말 하나 하리다. 옛날부터 딸이라 함은 족보를 캐여보면 따른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오. 이를테면 좋건 나쁘건 부모를 평생 따르는 혈점이라는거요. 헌데 며느리라는 말은 뫼를 나른다는 말에서 생겨났소. 예로부터 조상들이 제사지내는 일을 사람의 제일 신성한 법도로 일러왔는데 제물을 차려주는 중한 일을 맡아하는 내인이라는 뜻이요. 어떻소. 딸과 며느리가 차이가 크지 않소?
글쎄 이건 고담이지만 례영이 그 앨 며느리로 내곁에 두려고 하지 마오. 그앤 전우의 딸이야. 우리의 친딸이요.》
정시명의 말에 진정이 울리고 뜨거운것이 흘러 민순임은 코마루가 저려올라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정시명이 말하는 뜻풀이는 바이 가늠이 안되였지만 례영이를 생각하는 그의 뜻은 비할바없이 높고 옳다고 생각되였다.
정시명이 전차정류소에 이르러 지나가는 소리로 슬쩍 내비치였다.
《례영이도 제 생각이 있는가 봅디다.》
《네? 그건 무슨 말씀인가요?》
《알고도 모르는게 자식들 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말끝에 정시명은 소리내여 웃는데 민순임은 처음 듣는 소리라 눈만 껌벅거리였다.
자정이 가까와서야 그들은 통인동의 박정인네 집대문앞에 닿았다.
초인종을 누르니 대문우에 매달려있는 종이 땡땡 야무지게 울렸다.
대문간과 잇닿아 있는 사랑채에서 길봉례가 얼른 나와 구멍으로 내다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정시명이 먼저 들어가고 민순임이 길봉례와 몇마디 이야기를 건늰후 중대문에 들어서는데 대문종이 또 땡땡거렸다.
돌아서보니 마동열이 그리로 쑥 들어온다.
《아니, 저 사람이…》
민순임은 깜짝 놀랐다.
아까 례영이가 붙잡는것 같애서 지금껏 생각도 하지 않고있었는데 기어이 그림자처럼 슬그머니 따라다닌 모양이다. 그런즉 지금 몇시냐. 따라다니는 사람의 수고로움은 생각지도 않고 제흥에 겨워 밤시간을 늦도록 흘러보낸것이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민순임이 종종걸음으로 마주 가서 《이 사람, 이 무슨 고생이람.》하고 나무람을 하였다.
《원 사모님두, 고생이랄게 있습니까.》
《부처간에 놀러갔다오는 길인데, 참 사람두 미욱두 하지. 다시는 이러지말아요. 선생님이 아시면 큰 야단을 칠거예요.》
《네,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이 사람, 어서 들어가 저녁이나 받아요.》
《뭘요. 제가 뭐 배곯고 다닐 놈인가요. 걱정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마동열은 히쭉 웃으며 길봉례의 사랑채와 대칭으로 서있는 맞은편 사랑채의 자기 침실로 들어갔다.
잠자리를 폈을 때 민순임이 마동열의 이야기를 하며 사람이 고지식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우리때문에 밤이슬을 맞게 했노라고 미안쩍은 소리를 했다.
정시명이 그 소리를 듣더니 《그 사람이 고지식해서 그러는게 아니요. 세상에 드물게 바르게 사는 사람이요.… 참, 당신 그 사람이 어떻소?》했다.
《어떻다니요?》
《아, 례영이 짝으로 되지 못할가?》하고 정시명이 의미있게 미소를 짓자 《정말?!》하며 민순임이 두손을 모아잡으며 큰눈을 슴벅거린다.
정시명은 자못 흡족해서 껄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