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진을 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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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은 어느 날 안지생을 만나 장시간에 걸쳐 협의를 하였다.

안지생은 서울에 돌아온후 김구가 거처하는 서울 죽첨동의 경교장에서 김구의 련락원으로 있었다.

경교장은 서대문 네거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지금도 고려대학병원 본관으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있다.)

본래는 신의주에서 살던 으뜸가는 광산업자 최창학의 소유였다. 8. 15후 적산가옥으로 되였는데 귀국한 김구가 아들을 데리고 자기 비서들과 함께 지내게 되였다.

김구가 경교장에 틀고 앉으면서부터 여기는 우익진영의 정치참모부가 되였다. 하루에도 수십명의 우익계 인물들이 들락날락하였다.

안지생은 그들속에 끼여서 그들에게 일정한 영향도 주고 동향도 장악하였다.

김구나 상해패의 우두머리들은 안지생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 인정하고 여간 귀여워하지 않는다. 그가 있는데서는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극비밀에 속하는 이야기도 나누군 하였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생각을 들어본다면서 꼭꼭 안지생이더러 상정된 문제들에 대하여 의견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가 내놓은 의견이 신통해서 모두들 혀를 찼다.

안지생은 김구가 지금 명백히 우익에로 기울어져 있다고 결론을 먼저 내리였다. 그가 《림정》계를 중심으로 자기 진영을 구축하고있는 자료들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나의 소원》이라고 표제를 단 김구의 구술원고부본도 있었다. 곧 발표될것이라 한다.

이 책을 보면 미국놈들이 김구를 멀리하는 까닭을 알게 될것이라고 주해를 달았다. 김구의 얼굴이 있다는것이다.

안지생은 리청천을 건드려 우익적인 청년조직인 《대동청년단》이라는 조직을 무은데 대하여서도 보고하였다. 정시명이 기다리던 보고였다.

리청천은 리범석의 《족청》을 견제하여야 한다는 안지생의 이야기에 처음은 껄껄 웃기만 하였다. 까짓거 내버려두라는 배심이였다. 리범석의 놀음판을 자기가 뒤에서 끈을 달아 당겼다 늦추었다 한다는것이였다.

《안되겠다.》 안지생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리청천은 리범석의 정치적야심에 대하여 전혀 방심하고 그전날 자기의 수하부하 정도로 알고있는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안지생은 《족청》의 중앙훈련소로 그를 데리고갔다. 리청천은 리범석이 도대체 무슨 짓을 벌려놓는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따라섰는데 훈련소에 들어가기전에 벌써 까무라치듯 놀랐다. 훈련소 정문에는 리범석의 안경쓴 초상이 걸려있고 훈련소의 방들마다 그놈의 훈시가 나붙어있었던것이다. 《이놈의 자식!》 리청천의 입에서 대바람에 쌍욕이 터져나갔다.

리범석이 《제가 힘을 키워 리청천장군의 정사를 받들겠수다.》하던 말은 궤변이였다.

리청천은 밸머리가 사납게 꿈틀거렸다. 당장 그놈의 목줄을 짓뭉개버려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원래 리청천은 류동명에 이어 《광복군》 총사령관노릇을 할 때부터 제놈의 밑에서 참모장으로 있던 리범석의 처세술과 탐위주의적근성을 잘 알고있었지만 일이 이 정도로 벌어질줄은 몰랐다.

《족청》이 무엇때문에 생겨났으며 무엇을 노리고 움직이는가 하는것이 어렵지 않게 판단이 되였다.

(지생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였구나.)

그리하여 그는 중국에서 장개석의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 특설반 책임자로 있던 시기 때를 묻힌 사람들을 내세워 《대동청년단》이라는것을 부랴부랴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대동청년단(대청)에는 북반부에서 내려온 청년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점차 리범석의 《족청》에서 탈단한 우익계청년들도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대청》세력이 강화되자 가는 곳마다 《대청》과 《족청》은 자파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서로 상대방을 물고 뜯으면서 코코에 충돌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가지고 상대방의 세력을 분렬약화시키려고 갖은 모략을 다 꾸몄다. 때로는 백주에 서울 네거리에서 피비린 란투극까지 벌려놓았다. 이놈들은 지어 남조선 군부, 사법, 검찰기관에서도 파벌을 만들어가지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물어채는 놀음을 벌렸다. 이것은 반동적인 청년들을 하나의 조직된 력량으로 묶어세우려고 책동하고있는 미제의 야망을 분쇄하는데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

《싸움을 붙여놨으니 이제 두고보십시오.》

안지생은 이렇게 이야기를 끝내며 빙긋 웃는다. 왼볼에 보조개가 살짝 패우는 이 처녀같은 청년을 두고 누가 그 엄청난 투쟁의 조직자라고 믿겠는가.

정시명은 사랑과 믿음에 넘쳐 짤막히 치하했다.

《잘했구만!》

정시명은 김구계렬과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려나가기 위한 사전준비를 잘 벌릴데 대하여 강조한 다음 안지생을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이내 김구의 구술원고를 읽었다.

그 한 대목에서 눈길이 멎었다.

《일찍 어느 민족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리해의 충돌로 하여 두파, 세파로 갈라져 피흘리며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잔뒤의 초목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곁고 한수풀을 이루고 살고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라는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흥망성쇠의 인연에 얽힌 한몸으로 이 땅우에 남는다.》

정시명은 책을 덮고는 벽에 허리를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볼이 심술스럽게 처진 김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림정》을 중심으로 모두가 뭉쳐줄것을 바라는 그의 속심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리승만에게도 추파를 던지고 홍명희, 려운형, 리극로 등 중간파 거물들에게도 손을 내밀고있다는 김구의 자세가 엿보이는 글이였다.

그래도 이 글에는 사상을 경시하고있는 제한성은 있지만 민족의 영원함을 주장하는 애국충정이 진하게 깔려있다. 안지생이 방금 남겨놓고 간 말이 생각났다. 《여기에 백범선생의 얼굴이 있습니다.》 정시명은 제 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시명은 또 하나의 문건을 꺼내들었다.

리승만이 《독립촉성협의회》에서 한 연설문이였다. 그도 자기 두리에 뭉쳐줄것을 호소하고있다.

(진을 꾸려야 한다. 애국의 진을.)

정시명은 안지생의 말을 조용히 외워보았다.

모두가 바삐 뛰고있다. 미국놈들은 그놈들대로 제놈들의 정책집행을 맡아줄 정치집단을 편성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뛰고있다.

반동세력도 이 땅에서 대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안깐힘을 다하고있다.

우리도 뛰여야 한다. 시간을 놓치면 모든것을 놓친다. 어정거려서는 안된다.

진을 꾸리자. 어서 바삐! 한시 바삐!

정시명은 야릇하게 엄습해오는 불안과 초조감에 휩싸여 다시금 조용히 부르짖었다.

그의 눈앞에 남조선의 정치세력의 중심을 이루고있는 려운형, 리승만, 김구, 김규식 등 여러 인물들이 일시에 떠올랐다.

누구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겠는가.

누구를 중심으로 애국의 진, 통일지향의 대오를 무어야 하겠는가.

송호정이, 류동명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들도 마땅히 우리의 대오에 서야 할 사람들이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느 한사람도 가볍게 따라 나설것 같지 않았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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