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진을 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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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단청이 울긋불긋한 대궐인데 대문 열리는 소리도 사뭇 야단스럽다. 당장 《여봐라!》하는 호령소리와 륙모방망이를 든 하인배들이 쓸어나올것처럼 으스스하다. 웬만한 경찰나부랭들이라면 과시 대문가에서 벌써 반정신이 나갈것 같다.

길철은 사랑채에 정시명을 안내하고는 박정인이 거처하는 안채로 들어갔다.

박정인의 생각을 다시 알아보아 랑패가 없도록 이말저말 빙글빙글 굴려가며 엮어가다가 일전에 말씀드린분이 사랑채에 기거했으면 하는데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소리에 박정인이 크게 기뻐하면서 《내 그런 일이 나라받드는 일이라면 여생을 바쳐서라도 지켜드리겠네.》하며 오늘중으로 당장 모셔오라고 서두른다. 그리고는 왜 하필이면 사랑채에 모시겠는가, 안채에 방들이 많은데 필요한 방을 다 쓰게 하라고 하였다.

길철이 박정인의 처의 의견이 어쩐지 념려스러워하자 박정인은 《여보게 그 사람이 나하고 산지 스무해도 넘었네. 실은 내 길선생이 이 이야기를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마누라에게만은 얘기해두었네. 내 마음이자 그 사람 마음인즉 두말하면 잔소리지.》하고 선선히 대답했다.

길철이 그제야 사실은 그분이 지금 사랑채에 와계신다고 실토하였다. 박정인의 낯빛이 달라졌다.

《이런 무례한 일이 있소. 나를 찾아준 귀인을 문가에서 기다리게 하시다니. 선생이 나를 안지 이젠 몇해가 잘되는데 어찌 이렇게도 례의에 소홀하단 말이요.》

박정인은 자못 랑패스러운듯 자리에서 황황히 일어서며 저으기 노여워하였다.

원체 기골이 름름하고 얼굴생김이 수더분한 풍류객이다. 말소리도 서글서글하고 손님대접도 귀천의 차별없이 융숭하게 해서 너나없이 쉬이 끌려들게 되는 선한 사람이지만 자기앞에서 요사를 떨거나 변덕을 부리는것을 제일 미워하고 한번 속으면 두번 상종을 하지 않는 곧은 성미였다.

박정인은 부인을 큰 소리로 찾았다.

이내 50대의 뚱뚱한 녀인이 나타났다.

《이보우 마누라, 그분이 오셨다는구만. 당신도 어서 단장하고 사랑채에 그분 맞으러 나갑시다. 그리고 내게도 얼른…》

박정인이 이렇게 열에 떠서 부르짖으며 서둘렀다.

이윽고 박정인은 정중한 초대를 받고 갈 때처럼 바지저고리에 흰당목보선을 받쳐신고 모시두루마기를 떨쳐입고는 주씨부인과 나란히 사랑채로 나갔다.

《박선생님, 이렇게 내외분이 우리들을 받아주시니 감사의 마음 이를데 없습니다.》

정시명은 그들에게 허리를 굽혀 정중히 례를 표시하며 진심으로 고마운 인사를 하였다.

박정인내외는 정중하면서도 호방하고 인정미 흐르는 정시명의 인품과 인사말에 첫 순간부터 흠뻑 반하고 말았다.

《저희들의 성의를 받아주시니 고마운 인사는 제가 올려야 하겠습니다.》

박정인이 이렇게 말하며 깊이 허리를 숙이는데 옆에서 그들의 첫 상면을 지켜보는 길철이와 그의 누이 길봉례까지도 속이 뭉클해졌다.

정시명은 박정인의 두손목을 꼭 잡았다. 조국을 위한 의로운 길에 선뜻 뜻을 두려는 이 자산가의 진정에 겨운 호의와 반기는 정이 고맙기 그지 없었다.

눈길과 말투에 비끼는 그의 무게있고 성실한 성품이 다시 확인되는듯싶어 옛 친구를 만나듯 믿음이 가고 정이 갔다.

《박선생님, 부인님.》

정시명은 그들의 안내를 받아 크고 정결하게 꾸려진 손님방에 들어서자 이렇게 조용히 불렀다.

《아무래도 우리가 더 깊이 사귀기전에 여쭈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네. 어서 말씀하십시오.》

박정인이 정시명이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듯싶어 주씨에게 나가보라고 눈짓을 하였다.

그래 주씨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정시명이 만류하였다.

《부인님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아시는게 좋을듯싶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뒤날에 후회를 남길수 있다는데 대하여 생각해보셨습니까?… 우리는 이 남녘땅에서 민족을 배신하는 역적무리들과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울것을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나라가 한집안으로 합쳐질 때까지 말입니다. 우리가 당할수 있는 위험과 그로부터 댁에도 미칠수 있는 후과에 대하여 감추고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여 싸움을 크게 벌릴수록 놈들도 나나 나를 도와나선 사람들을 해치려고 할것입니다. 서울에는 나라를 두쪼각으로 갈라놓으려는 놈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활개를 치고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싸움은 사생결단의 싸움으로밖에 될수 없습니다.

우리는 박선생이 이제 사양할지라도 구태여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정시명은 박정인의 진정에 끌려 그에게 진속을 활짝 열어보였다.

무릇 인간의 성실성은 인간의 고귀함을 규정하는 첫째가는 징표라고 한다.

사회앞에, 집단앞에, 자기 안해와 벗들앞에 성실하게 산다는것이 얼마나 마땅하면서도 고상한 미덕인가.

정시명은 인간고유의 이 아름다운것이 깃든 심장이라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사귀고싶었고 나라 위한 길에서 활짝 꽃피워주고싶었다. 또 그러한 인간들을 찾아내면 자기도 인간의 그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참인간이라는 자부심으로 하여 스스로 행복하여지는것이였다. 그리고 그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그들과의 교제를 성실하게 하기 위해 애썼으며 사업상 특성으로부터 그 어떤 사교적인 위선이나 계교가 배여날세라 굳이 조심스럽게 자신을 다듬군 한다.

정시명은 전우들에게도 성실한 대상과의 관계는 그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성실하게 가져야 한다고 말해주군 하였다.

이 순간에도 정시명은 부인까지 곁에 세우고 진정을 고이려고 애쓰는 박정인의 성실성과 진의를 조금도 의심하고싶지 않았으며 그 아름다운 심경을 우롱할세라 자기의 마음도 티없이 맑게 헤쳐놓는것이였다.

《선생님, 나를 믿어주시오. 내 젊은 시절에는 길을 잘못 들어 장검을 일찌기 버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나를 잡아주는 손이 있는데 이제야 다른 길에 들어서겠소. 날 다시 애국하는 길에 세워주시오. 겨레앞에 지은 죄를 내손으로 씻게 해주시오.》

《선생님, 저도 주인의 뜻을 따르렵니다.》

박정인이 자못 엄숙한 어조로 정시명의 말을 받자 그때까지 고개를 다소곳이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부인이 곁들어 나섰다.

녀인은 며칠전부터 남편의 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를 곁에서 목격해왔던지라 여차하면 모처럼 차례진 이 기회를 잃을듯싶은 조바심이 나서 한마디 내비친것이였다.

정시명은 내외가 극성스럽게 인사를 차리자 그저 고맙다는 인사만 여러번 곱씹었다.

박정인은 그들이 돌아간후 일체 잡인출입을 금하게 하고 언제 그랬는가 싶게 마작놀이도 술놀이도 싹 걷어치웠다.

그리고는 안팎청소를 주관하고 집안사람들모두가 옷차림도 정결하게 하고있도록 단단히 신칙을 하였다. 정시명일행이 들어오기 전날에는 대궐같은 집이라 여러 사람이 여러가지 명목으로 지내왔는데 사례금을 후하게 주어 다 보내고 사랑채에서 살아온 길철의 누이 길봉례만 남겨놓았다.

×    ×

정시명은 박정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자 사업거점을 튼튼히 꾸리는 일에 달라붙었다.

흥국상회사무실을 기본거점으로 만들어 리용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사람출입이 너무 많은 곳이여서 이따금씩 나타나 사장행세를 해보이기로 하고 기본 거처지는 박정인의 집으로 눌러놓았다.

집주인과의 호상관계부터 합리적으로 하였다.

박정인의 생활형편으로 보아 세놓이로 준 방을 얻어쓴다면 곧이 들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박정인과는 만저우에서 공동으로 농장일을 보던 친구간으로서 얼마전에 귀국하여 이곳에 림시로 거처하는것으로 하였다. 이렇게 하면 정시명이 중국실정을 잘 아는 조건에서 누가 와서 탐문하더라도 걸려들것이 없었다.

그는 사업거점의 특성과 신분에 맞게 자신의 변장도 잘하여 놈들의 수사망에 사소한 단서도 주지 않도록 하였다.

정시명은 박정인의 도움을 받아 이제까지 입고다니던 국민당의 대령계급장을 떼낸 군복을 벗어던지고 박정인이 입고다니던 모본단바지저고리에 양단야구자를 입고 그우에 락타직외투를 걸치였다. 그렇게 차리고 나서면 마치도 몰락한 시골지주나 돈깨나 건사하고있는 유생으로 보였다.

필요에 따라서는 능란하게 옷차림도 바꾸어가면서 기업가가 되기도 하고 행정기관의 고관이나 재판소의 판사로 되기도 하였다. 변장술에 따르는 실무지식도 전문가들에 못지 않게 수준이 높아 누구에게나 그대로 통할수가 있었다. 정시명은 장사치들속에 들어가면 해박한 장사물계로 쉽게 어울리고 지식인들과 마주 앉으면 바닥없이 퍼내는 심원한 지식으로 그들을 취하게 하였다.

정치인들과 마주 앉으면 시국에 대한 명석한 견해로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것은 물론 지칠줄 모르는 왕성한 정력과 사업에 대한 심오한 연구로부터 이루어진 노력의 열매였다.

박정인의 생활에서는 눈에 뜨이게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중대문우에 다락을 만들었다. 모임이 있을 때면 주씨와 함께 거기에 올라 마작을 놀면서 바깥동정을 살피였다. 정시명일행의 숙식도 다 맡아 보장하였다.

그러는사이 부모들이 아들곁으로 왔다.

박정인은 부모들까지 서울에 오자 만시름을 잊고 정시명의 사업을 성의껏 도와나섰다.

그는 아버지에게 장기를 배워주어 다락우에 올라가서 자기대신 망을 보도록 하고 자신은 사업에 참여시켜달라고 정시명에게 졸랐다.

정시명은 박정인의 청을 쾌히 받아들였다.

어느 날 박정인은 이목구비가 번듯하게 생긴 청년을 데리고왔다.

《선생님, 제 아들이올시다. 좀 애국자가 되게 해주시오.》

정시명이 박정인의 무랍없는 청탁을 받고 망설였다.

충청남도 도청 총무과장으로 있다는 박영수는 첫 인상에 아버지를 닮은것이 무척 호감이 갔다.

그러나 주씨부인이 금지옥엽으로 키워왔다는 외독자라는것이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들었다.

《아주머님과 의논이 되였습니까?》

《선생님, 애국자로 되는데도 어머니의 승인이 있어야 합니까?》

정시명의 얼굴을 응시하던 박영수가 주저없이 받아넘긴다.

《허허… 그래, 그렇지… 그건 누구도 막을수 없는 각자의 권리지. 좋소, 생각해봅시다.》

정시명이 박영수의 꾸밈새 없는 말이 마음에 들었지만 인차 결심은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자 박정인이 자못 섭섭해서 한마디 하였다.

《얘가 경성제국대학을 나왔다고 그러시오? 아니면 외아들이라서 마음 쓰시는게 아니시오?》

《그런 생각도 바이 없는게 아닙니다. 아드님까지 우리 일을 하면 결국 박선생네 집안은 3대가 어려운 일에 나서게 됩니다.》

《원 3대가 다 나라를 위해 나선다면 그보다 긍지로운 일이 어데 있겠습니까.》

정시명이 그의 말에 코마루가 찌르르해왔다.

그래도 박영수만은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싸움에서 비켜주고싶은 생각은 어찌할수 없었다.

《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기에 기어이 선생님들 휘하에 맡기렵니다. 그래서 렴치불문하고 아래웃턱을 뛰여넘어 감히 선생께 청탁드리는게 아닙니까!》

박정인의 절절한 당부가 정시명을 더 빠져나갈수 없게 하였다. 그는 끝내 마음이 동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박정인도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고는 아들을 남겨두고 물러갔다.

《앉으라구.》

정시명이 그의 옷섶을 잡아 방바닥에 앉히고는 담배를 꺼내 권하였다.

《한대 태우지.》

《전 아직…》

《아버지도 담배는 태우지 않더구만… 입에 붙여보지 않았으면 아예 버릇을 굳히지 않는게 좋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고있나?》

《예.》

《난 영수한테 아무런 약속도 해줄수 없소.》

《알고있습니다.》

《좋아. 다만 내가 믿고있는것은 우리가 나라의 운명을 자기의것으로 받아들이고 겨레의 고통을 덜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나간다면 후손들이 우리더러 애국충신으로 불러주리라는것이요.》

《더 바랄게 없습니다.》

정시명은 더 옹골차고 사내다운 억세임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도 투쟁대오에 세워주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은 이젠 귀중한 전우가 된 박정인의 부탁이다. 그리고 본인의 소망이다.

애국의 대오에 들어서는것은 박정인의 말대로 행복이요, 영광이다. 그 누구도 그걸 향유하고저 하는 이 시대 참인간들의 권리를 막지 말아야 한다.

첫 임무를 주었다.

《이제부터 일체 좌익의 운동에 관여하지 마오.》

《네?》

《될수록 더 높이 올라가도록 하오.》

《뭐, 도지사쯤은 자신있습니다.》

《도지사?… 고작해서…》

《네?》

《허허… 좀더…》

정시명은 유쾌하게 웃었다. 박영수도 한껏 긴장되여있던 속을 풀고 희멀쑥한 얼굴에 웃음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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