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진을 꾸리다

 

3

정시명이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안지생이 찾아왔다.

그는 정시명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면서 최근 아놀드를 대신하여 부임한 브라운과 하지가 제가끔 정계의 거물급인물들을 공개적으로 혹은 비공개적으로 련일 만나 모의를 벌리고있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였다. 브라운의 랑설과 그 후일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대체로 론의점은 우익과 중간파인물들을 절충하는것이라고 자기의 이야기를 마치였다.

정시명이 미국놈들이 동분서주하는 까닭이 무엇일가고 넌지시 물으니 안지생은 별생각없이 명확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제놈들의 진을 짜보는거지요.》

그 말에 정시명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래?!… 그래. 우리도 어서 진을 짜야지. 서둘러야겠소. 시간을 잃으면 력사를 잃지…》

정시명은 곧 일에 몸을 잠그었다. 장군님께서 펼쳐주신 애국의 대강까지 받고보니 이제는 모든것이 확연하고 자신만만하였다. 벌써 서울에 도착하기전에 그의 머리에는 남쪽에 애국의 성새를 다져나갈 안이 주도면밀하게 작성되여있었다.

핵심을 꾸리는 사업부터 시작하였다. 사업을 폭넓고 심도있게 벌려나가자면 핵심들을 애국에 투철하고 품성이 바르며 조직적수완이 겸비된 일군들로 꾸려야 할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지만 개개가 하나의 전선씩 떠맡아야 할 지도부성원들이 구실을 할수 없는 사람들로 무어지면 제아무리 방략이 훌륭하고 전술이 기묘해도 어려운 적후활동을 보장할수 없다. 정시명은 렬차가 사고없이 달리자면 기관차가 든든해야 하듯이 반동의 소굴을 들부셔야 할 혁명조직을 힘차게 몰고가자면 지도부를 강철의 심장을 지닌 사람들, 내 나라, 내 겨레를 위해 단두대에도 웃으며 나설 인간들, 자기 초소를 능히 감당할수 있는 쇠소리나는 사람들로 꾸려야 한다고 여러번 마음속깊이 다지군 하였다.

정시명이 서울에 와서 여러 사람들을 료해하는 과정에 주목하게 된 사람은 전라도일대의 혁명사업을 지도하던 김명호와 경기도의 혁명조직들을 맡아보던 길철이였다. 경력에 곡절있는 사람들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남조선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민혁명군 국내공작원들의 지도밑에 혁명활동에 나선 오랜 혁명가들이다. 8.15광복후 지하에서 나온 이들은 남조선공산주의운동안에 기여든 박헌영패거리와 정면충돌하게 되였다고 한다.

이들은 놈들의 종파분렬주의적행동이 궁극에 가서 노리는것은 혁명운동의 내부분렬과 와해이며 이 움직임의 리면에는 배후세력이 있다는것을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놈들의 죄행을 단죄하면서 은밀히 그 배후관계를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사업을 벌려놓자마자 박헌영에게 발각되였다. 제놈들의 정체가 불원간에 드러날수 있다는것을 눈치챈 그자들은 곧 이들을 당에서 내쫓고 테로행위를 감행하였다. 이들은 다시 지하에 들어갔다. 새로운 투쟁의 길, 건전한 조직선을 찾아 암중모색하였다.

이 사실을 처음으로 정시명에게 보고한것은 김승원이였다. 《한민당》의 실권자인 김성수가 어디서 이 소식을 얻어듣고 그들의 인간의 무게가 탐나서 자기밑에 끌어들이려 한다, 김성수는 그들에게 각각 《한민당》 부장직을 제공하겠다고 했다는것이다. 김승원은 자기가 김성수의 위임을 받고 몇번 만나봤는데 지조가 있고 품성도 좋고 수준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사실 당시 남조선혁명가들속에서 박헌영에 대한 환상이 컸던 형편에서 제때에 놈의 반혁명적죄행을 가려보고 정면도전해나섰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 놓고도 이들의 정치적예리성과 성숙정도를 가늠할수가 있었다.

정시명은 그들과 여러날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고된 자료와 평가된 문제들을 확인하고 엄밀히 관찰하였다.

두사람이 다 첫눈에 들었다. 그러나 대조가 뚜렷하였다.

마흔살을 갓 넘긴 김명호는 몸이 실하고 얼굴생김이 넙적하고 두눈이 검실검실한게 사람이 매우 침착하고 진실해보였다. 말투도 느릿느릿하다. 한마디의 군소리도 없이 자기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군 하였다. 엄격한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다섯살에 천자문을 뗐다고 한다. 도수높은 안경까지 끼고 큰 웃음판에서도 조용히 미소를 짓는 모습은 선비처럼 담담하면서도 믿음직스럽다.

그와는 대조되게 길철은 날파람 있어 보인다. 매우 리지적이고 활동력이 있어 보였다. 김명호보다 몸무게가 스무키로는 떨어지지만 팔씨름을 하면 어림도 없다고 한다.

그는 자기의 경력을 이야기하면서도 사이사이 유모아를 섞어가면서 상대방을 따분하지 않게 웃기기도 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결혼문제에서도 판판 다른 견해와 처지에 있다. 김명호가 자기보다 다섯살우인 녀인에게 장가들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곰상스럽게 받아들였다면 길철은 집에서 쫓겨나면서도 마음에 차는 처녀를 만나기전에는 절대로 장가들지 않겠노라 고집을 부려 서른네살되는 이때까지도 총각이라고 한다.

어느날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정시명이 그 소리는 미타하다고 고개를 기웃거리자 《아, 정말입니다. 정동지, 저 하늘에 대고 맹세하건데 아직 처녀손목 한번 잡아본 일 없는 진짜배기 숫총각이올시다.》하며 능청을 부렸다.

《이거참, 야단은 야단이다. 내 곁에 팔리지 못하는 로총각이 둘씩이나 되니.》

정시명도 우스개소리로 길철의 이야기를 받자 그의 대답이 걸작이였다.

《아, 제 걱정은 아예 마십시오. 벌써 전 주인집따님한테 선을 보인 절름발이총각입니다.》

《주인집 따님?…》

정시명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때마침 방문이 빼서 열리더니 강습소에서 돌아온 례영이가 민순임이 방금 닦아준 군밤을 자그마한 싸리바구니에 담아들고 방안에 소리없이 들어섰다.

《옳지, 그렇댔구만!》

정시명이 그제야 길철의 말귀를 알아듣고 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함께 앉아있던 마동열과 림인석이며 김명호도 어처구니들 없기도 해서 크게 웃음판을 벌려놓았다.

례영이 조심스럽게 정시명의 앞으로 걸어와 싸리바구니를 사붓이 놓다가 사내들의 큰 웃음소리와 자기에게로 쏠리는 그들의 눈길에 괜스레 귀밑이 새빨개져서 얼른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때 김명호가 《에끼, 고약한 사람. 언제 벌써 감히 주인집 따님을… 하지만 길동문 지각생이요.》하고 꾹 눌러놓았다.

《네? 지각생이라니요?》

《내 저 림인석동무한테서 들어둔 얘기기는 헌데… 저 사람은 어떻게 하고…》

김명호의 능청스러운 눈길이 마동열에게로 돌아가자 전우들의 눈길이 그를 따라섰다.

그러자 마동열이 그 큰 손을 건사할데가 없는듯 허공에서 흔들다가 《아, 그건… 저 그건…》하며 그도 두볼이 벌그레하게 타들었다. 덩지가 커다란 사내의 숫진 그 모습에 좌중에는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게 정말이요?》

정시명이 모를 일이라는듯 고개를 기웃거리며 림인석에게 물었다.

《물론입지요. 저들은 천상배필이 될겁니다.》

림인석이 자신있게 선포한다.

《모를 일인데…》

정시명이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집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저 사람들이 알고있는걸 내가 왜 몰랐을가?》

하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례영이를 보는 마동열의 눈길이 례사롭지 않은것 같다. 요즈음은 례영이 강습소에서 늦게 올 때면 명동골깡패들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발걸음이 가볍게 마중가군 한다. 마동열이 왼심을 쓰고있는것은 확연한데 례영이 당자는 눈치를 차린듯 못차린듯 여전히 무랍없이 오빠라 부르며 때없이 따른다. 그리고 마동열의 눈치가 수상한것 같으면 아닌보살을 하고 곁을 주지 않는것 같다.

《그래. 그렇군!》

정시명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마동열의 벌그레하게 타든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정시명은 어쩐지 가슴속이 그 무엇인가 희망차고 환희로운것으로 그들먹해지는것을 느끼며 부지중 입속으로 중얼거리였다.

(사랑이라… 혁명과 사랑, 얼마나 좋은 일이냐.… 시대가 달라졌으니 사는 법도 달라지고 사랑하는 법도 달라져야지.)

마침내 정시명의 집에서는 지도부를 결성하는 모임이 열렸다.

김명호, 길철, 마동열, 림인석이 참가하였다.

정시명이 먼저 선서부터 하였다.

《나 정향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애국충신으로 살며 싸울것을 엄숙히 서약합니다.》하며 주먹을 불끈 쳐들었다.

모임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국의 믿음에 끝까지 충실하리라! 마지막피 한방울까지 다 바쳐 애국의 길에서 변치 않으리라… 맹세를 다지였다.

모두가 흥분되여있었다. 더구나 조직선을 잃고 정신적방황에 시달려온 김명호와 길철의 정치적소생의 기쁨은 비할바 없었다. 맹세를 다지는 그들의 음성은 떨리였다. 눈가에는 뜨거운것이 고여 초불에 얼찐얼찐 빛을 뿌렸다.

정시명이 책임자로, 김명호와 길철이 부책임자로 선출되였다.

조직의 이름은 《흥국상회》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여러모로 편리한 이름이였다. 정시명이 사장이 되고 부책임자들은 리사로, 성원들은 《흥국상회》의 적당한 직위를 가지기로 하였다.

정시명은 그 자리에서 이미 준비해두었던 《흥국상회》의 명함장들을 나누어주었다.

모임에서는 내부질서와 사업체계가 협의되였다.

사업분담은 개별적으로 받기로 하였다.

모두들 비상한 열정과 각오를 안고 정시명의 곁을 떠나갔다.

정시명은 지도부를 꾸려놓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으나 임무는 벅차졌다.

기관차는 기적을 울렸다.

정시명은 래일이면 또다시 만날 그들이지만 대문에서 떠나는 그들의 손목을 굳게 잡아주었다.

마동열이 지도부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되겠다고 제기했다.

정시명이 지금 거처하고있는 집은 여러모로 적당치 않다는것이였다. 우선 상해패들이 다 알고있으므로 로출된것이나 다름없다. 지대적조건도 좋지 못하다. 가까이에 있는 3층집에서 빤히 내려다 볼수 있다. 방도 작다. 사업규모가 확대되고 활동이 가열화되면 적들의 마수가 이쪽으로 쏠릴수 있다.

정시명은 그에 응하였다. 사실 그자신도 벌써부터 조직의 안전을 보장하며 일상적으로 협의하는데 편리하고 믿음직한 거점을 꾸리는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왔다.

정시명은 서울에서 오래 살아온 길철을 만나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데 대하여 의논하였다.

《좋기는 놈들이 신임하는 사람의 그늘밑에 은페되는것이 좋겠는데… 전일에 우리 일행이 모여살 때 경찰들이 달려든적이 있었소. 헌데 류동명통위부장의 이름을 대니 도망치더구만.…》

길철은 정시명의 말을 듣더니 즉시에 대답하였다.

《제가 아지트삼아 리용하고있는 누이네 집이 좋을듯 합니다. 주인은 학식도 있고 반일운동에도 참여했던 사람인데 사람도 좋고 집도 좋고… 그런데는… 딱 한가지…》

《믿을수 있는 사람이요?》

《예. 애국심이라고 할가, 여하튼 좋은 사람인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는… 부자입니다. 사람은 진국인데 부자입니다. 큰 부자입지요.》

《사람은 진국인데 부자라. 허허허…》

정시명은 미심쩍은듯 아퀴를 짓지 못하는 길철의 딱한 표정을 보며 껄껄 웃었다. 길철의 그 딱한 표정이 인차 리해가 되였다. 자기는 아지트로 믿고 사용하나 정시명의 거처로는 불미스럽다는것이였다.

《길철동무.》

정시명이 정색해서 말했다.

《겨레를 위한 싸움에서 벗과 원쑤를 가르는 시금석은 내 나라, 내 겨레에 대한 오늘의 립장이요. 애국애민의 뜻만 있다면 그 누구라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것을 우리 〈흥국상회〉의 힘을 키우는 최고의 원칙으로 내세웁시다.》

며칠후 정시명은 모임에서 길철이 대상에 대해 자료적으로 이야기하도록 했다.

길철의 이야기가 끝나자 성원들은 서로 각이한 견해를 제기하였다.

김명호는 우리가 적진에서 사업하는 상황에서 이런 문제를 피할수 없다고 말했으나 문제에 대한 책임적인 언급은 피하였다.

아마도 지난날 무익한 정쟁에서 정력을 소모하다가 종당에는 조직에서 쫓겨난 쓰라린 교훈이 그를 매사에 조심하게 하는듯 싶었다.

(안되겠다. 심장이 바위같은 저 사람이 저런데 버릇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정시명은 이렇게 생각했다.

마동열은 장군님으로부터 가르치심을 받은 당자이므로 확고한 신조를 가지고 포섭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림인석은 계급선에서의 탈선이라고, 지도부의 거처를 부호집에 두는것은 모험이라고 단호하게 부정해나섰다.

론쟁이 벌어졌다. 모두가 자기의 주장을 옹호하여 열정적으로 변론을 하였다. 론쟁을 붙여놓으니 누구나 리론가들이고 웅변가들이다.

정시명은 그들의 론쟁에 끼여들지 않고 충분히 론의되도록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정시명이 휴식하고 모임을 계속하자고 하였으나 그들은 례영이 끓여온 차를 마시면서도 여전히 열을 내서 자기 주장을 전개하였다.

모임은 갑론을박하며 여러 시간 계속되였다.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한채 정시명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그는 결속하는 의미에서 말하였다.

《적의 심장부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어차피 복잡한 계층과 마주쳐야 하오. 지금 정계와 군부에 복무하는 사람들중에는 광복된 조국에서 겨레를 위해 나름대로 무엇인가 해놓겠노라 뛰고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소. 우린 그런 사람들을 모래무지에서 금알갱이를 골라내듯이 선발하여 동지로, 동정자로 포섭해야 합니다.》

정시명의 말이 계속되자 방안은 숨소리도 없이 조용해졌다.

정시명은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 문제에서 다시 론의가 되지 않도록 보다 명확하게 해답을 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여느때없이 길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물론 우리 대오를 로동자, 농민들을 기본으로 꾸려야 하오. 그러나 우리의 임무와 처한 형편을 무시해서는 안되오. 지금 이남정계와 군부의 중견인물들을 관찰해보면 누구나 사리사욕을 추구하여 움직이면서도 광복바람을 타고 민족주의적바탕에 지반을 닦으려고 하고있소. 그들속에서 잠자는 민족의식을 찾아내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참답게 복무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하오.

문제는 사람을 봐야 한다는것이요. 보되 사람별로, 건별로 봐야 한다는거요.

세상에 똑같이 생긴 모래알이 없소. 절대로 사람들을 몇개의 부류로 나누어놓고 이편저편에 사사오취하는 방법으로 몰아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린 필요하다면 각양각색의 인간들을 다 개별화하여 연구하고 동지들을 찾아야 하오. 일단 동지를 사귀려거든 그 사람의 마음속의 아름다운것을 찾아내야 하오. 결함부터 꼬집어 드는것은 사람을 사귀는 방식이 아니요.》

정시명의 진지한 이야기는 모두에게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모임이 끝나 다들 돌아가고 길철이만이 떨어졌다.

그는 박정인의 집략도를 큰 종이에 그려놓고 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설명을 시작하였다.

《우리 누이가 행랑살이를 하고있는 집은 통인동에 있습니다. 대궐같은 본채가 있고 그 좌우켠에는 마루를 깐 응접실과 여러칸의 온돌방이 달린 사랑채가 있습니다. 본채와 통하는 문만 막으면 완전히 딴집으로 쓸수 있습니다. 대문만 하여도 바깥으로부터 세개나 됩니다. 이 집은 서울장안에서 호화주택으로 속하는 집으로서 주인인 박정인은 사회적으로는 인격자로, 돈많은 재산가로 알려져있습니다. 바스락별을 단 경찰들도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지요. 바깥대문옆에 있는 행랑채에는 저의 누이가 살면서 저의 시중을 들고있는데 수위임무도 수행할수 있을것입니다.》

박정인의 집에 대하여 신명나서 설명하고난 길철은 집주인의 경력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박정인은 원래 안주의 천교리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집에서 태여났다. 고향에서 농업학교를 다니다가 반일운동에 참가했다 하여 퇴학당하였고 3.1운동때에는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고문도 받고 옥살이도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박정인은 반일의 뜻을 안고 간도로 들어가 독립군에서 싸우다가 일제의 봉천령사관에 잡혀들어가 또다시 5년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출옥후에는 심양시가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다시 나설 기회를 은근히 노리고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나 정분을 나누게 된 녀인이 바로 지금 같이 사는 어느 호부자의 미망인인 주씨였다. 관계가 깊어져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주씨는 오성공사라는 규모가 큰 미곡무역상사를 경영하고있었다.

경영권이 자연적으로 박정인에게 넘어왔다. 이때로부터 박정인은 무역상사와 안락한 가정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가정에 박히고 말았다. 그래도 애국의 열의만은 변치않아 독립군에 자금도 열성스레 바치고 심양에서 조선아이들을 위한 동광중학교 보함포간이학교를 세웠다.

그러다가 일본놈의 감옥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여 조상의 땅에서 눈을 감겠노라 주씨부인과 작별하고는 중환의 몸으로 혼자 서울로 나와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서울에 그냥 떨어졌다.

주씨부인도 남편의 뜻을 받들어 인차 재산을 정리하여가지고 뒤따라왔다.

주씨부인의 지극한 간호로 건강이 예상밖에 호전되자 박정인은 다시 실업계에 나섰다.…

길철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있던 정시명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길선생은 어떻게 아시게 되였소?》

《제가 그를 알게 된것이 저의 누이가 그 집에 행랑살이를 들어간 뒤였습니다. 누이는 서울 서대문감옥에 갇혀있는 매부의 옥바라지를 위해 시골에서 올라와 박정인의 집에 들어갔던겁니다. 매부가 옥사한 뒤로 아예 그 집에 눌러앉고 말았지요.

박정인은 저의 매부가 반일운동가로서 옥사했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 일처럼 여기고 누님의 뒤를 각근히 돌봐주었습니다. 마침 그무렵에 저도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습니다. 재판소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 공작원들과 련결되여있던 나에게 종신징역이라는 중형을 덜컥 선고합디다. 초심에서는 뭐 사형이라나요. 누이가 하나밖에 없는 혈붙이를 구원해달라고 박정인에게 눈물을 흘리며 부탁했는데 내가 사상범이라는 소리에 두말없이 응해나서더랍니다. 그때 박정인이 거액의 돈을 날린 덕에 전 형무소에 넘어가기전에 집행유예로 출옥하였습니다. 그후로부터 박정인과 저와의 사이에도 깊은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사귀고보니 사람이 참 진국이더군요.》

길철은 이렇게 말끝을 여물구고는 이야기를 마치였다.

정시명은 길철의 말을 다시 음미하듯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곰방대에 담배를 다져넣으면서 길철에게도 권하였다.

정시명은 담배연기를 한모금 길게 뿜어올리며 물었다.

《그 사람의 고향이 안주라고 했지요?》

《네-》

《그런데 광복이 됐는데 왜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오? 남북을 살펴보면 어느 곳이 살맛 좋은가 알았을게 아닌가?》

《네, 그럴만 한 곡절이 있습니다.》

길철이도 써레기담배를 말아물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8.15후 박정인은 고향땅에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지요. 그해 봄에 고향에 갔던 박정인이 늙은 부모에게 땅을 사주고왔는데 이게 큰 화단거리로 되였단 말입니다. 한해 농사를 지어보고는 토지개혁으로 몰수당했다는것입니다. 결국 나라의 버림을 받게 된것이지요. 박정인은 애국의 뜻을 돈과 바꾸어버린 자신에 대하여 처음으로 돌이켜보았답니다. 나라와 겨레앞에 지은 죄를 비로소 깨닫게 되였던것입니다.

저더러 이젠 그 죄를 씻어버릴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것 같다고 비통해하더군요. 사람이 싹 달라집디다. 만사를 귀찮아하고 돈모으는 재미도 없어진것 같습니다. 기업일은 대리인에게 맡겨버리고 친구들을 불러들여 술추렴이나 하고 마작놀이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데 그 정상을 보기가 하도 딱해서 한번은 제가 따끔하게 입침을 놓았지요. 로형께서 이렇게 타락해버리면 어쩌느냐고. 하지만 그의 속에 얼어붙은 응어리는 쉽사리 풀리지 않습디다.…》

길철의 이야기가 이 대목에 이르자 정시명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박정인이 아버지의 토지를 몰수한 북조선정권의 처사에 엇서는게 아니라 자기를 돌이켜보며 심한 죄의식에 사로잡혀있다는것이 례사롭지 않았다.

지금 월남자들속에는 토지개혁에 반기를 들고 남으로 줄행랑을 놓은자들이 많다. 그들은 새 정권의 인민적시책에 대해 리성적으로 판단하고 기꺼이 접수하며 그에 순응하여 나가야 되겠지만 오히려 분별을 잃고 앙심을 먹으면서 북조선에 뿌리내린 새 제도와 인민의 원쑤로 굴러떨어진것이다.

그런데 북조선정권의 시책을 량심적으로 평가하고 거기에서 죄몫을 찾아내여 참회하고있는 그 인간의 뜻에는 뭇사람들과는 다른 진보적이고 고결한것이 있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사람이 고고성을 터뜨렸다가 한줌의 흙으로 사라질 때까지 하나같이 비단결같이 살았으면 좋으련만 언제나 심지 바르게만 사는건 아니다. 타의든 자의든 허물이 없이 세상을 하직한 인생이란 극히 드물다. 문제는 자기에게 생긴 허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것이 인생의 질을 평가하는데서 중요한 좌표로 된다.

량심이라는 보석같은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쉬이 허물을 찾아내여 지워버리지만 그게 먹물처럼 시꺼먼 사람이면 허물됨에 판단을 내리지 못한채 겹치는 허물에 깔려 종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고 버림을 받는다.

그런데 박정인은 자기 인생의 허물을 제때에 찾아내서 타매하는 능력이 있는것 같다. 사람이 사람다운 구실을 하도록 하는 량심의 대가 서있다는것이 반갑고 믿음이 간다. 그리고 어서바삐 그 인간을 찾아서 옭맺힌 고민거리도 함께 의논해주고 사라져간 생활의 활기와 웃음도 되찾아주고 굴곡이 진 인생길을 곧바로 펴고싶어하는 그 인간을 도와주고싶었다.

정시명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길철은 자기가 모임에 앞서 박정인을 찾았던 이야기를 하였다.

《정동지한테 말꼭지는 떼놓았지만 아무래도 미타해서 사실은 선통을 해봤습니다. 국토분렬을 막기 위해 몸바쳐 나선분이 선생을 만나보겠다고 하는데 의향이 어떠신가 했습니다. 그랬더니 박정인이 꿈같은 소식에 감격스러워하면서도 반신반의합디다. 하, 그런분이 어찌하여 나라 위한 넋을 돈에 전당잡힌 나같은 수전노를 찾아주느냐는것입니다. 두번세번 이야기해주어서야 박정인이 너무 좋아 〈길선생! 어서 모셔오시우. 원 내같은 돈벌레를 알아주시다니 어서 모셔와주오.〉하고 서두르는데 내가 입밖에 내놓은 그 희한한 소식을 거두지나 않을가 념려되는듯 두번세번 곡진하게 부탁합디다. 사람은 진짜배기랍니다.》

길철이 말끝에 머리를 쓸어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정시명은 재삼 박정인의 인간됨을 후하게 평하고싶어 하는 길철의 진속을 그 미소에서 찾아보며 자기도 입가에 웃음을 담았다.

이야기에 그려진 박정인의 모습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 인간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옹호해나서는 길철의 자세가 더 마음에 들었다.

정시명은 곧 길철을 앞세우고 박정인의 집으로 향하였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