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별이 총총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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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은 은송에게 자리를 펴주고는 아침에 먼길에 올라야겠는데 다문 몇시간이라도 눈을 붙이라고 일렀다.

그리고는 계단을 조용히 내려 뒤뜰로 향하였다.

평양으로 떠나는 은송을 만나니 소용돌이치며 가슴속에서 분화구를 찾던 격렬한 감정을 더는 걷잡을수 없었던것이다.

(은송선생이 부럽구나. 장군님을 뵈옵겠다고, 장군님 휘하에서 살아가겠노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하는 그 마음이 부럽구나. 그게 이 나라의 민심이 아닌가. 그 누구도 막을수 없는 광복시대의 도도한 대하가 아닌가.)

팽배해지던 마음의 금선을 은송이 별이 총총한 이 밤에 튕겨놓고 만것이다.

어찌할수 없이 울린 그 메아리가 온 가슴에 꽉 차서 심장을 흔들고 피를 끓게 하고 온몸을 벅차게 하였다.

《조국으로 간다! 평양으로 간다! 김일성장군님을 뵈옵고저 은송은 떠난다!》

정시명은 이렇게 되뇌이였다. 억만가지 소원과도 바꿀수 없는 그 소원을 은송이 이제 성취하게 될것이다. 은송이 받아안을 그 행복의 크기가 헤아려져 가슴속에는 자꾸만 뜨거운것이 욱 치밀어올랐다.

어쩐지 지금 정시명은 자기가 평생을 그 하나의 희망을 위해 바쳐온것만 같았다. 그 하나의 소원에 지나온 나날에 흘러보냈던 한숨과 절망과 용기와 희열과 땀과 피가 다 응축되여있는듯 싶었다.

그것은 어제, 오늘에 싹튼 감정이 아니였다. 조국이 광복되고 흠모하여마지 않던 김일성장군님께서 개선하시였다는 소식에 접한 그때로부터 그의 가슴에 가득차 있었던것이였다.

김일성장군님!》

그는 그리움에 사무쳐 입속으로 조용히 불렀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눈부리가 따거워진다.

…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중국의 무변광야에 전설적인 위인으로 전해지는 김일성장군님의 명망에 접하였던 정시명은 어느날 장군님의 막하에서 장군님의 전사로 광복전의 정예대오에 참군하고싶은 절절한 청원을 담은 편지를 드린 일이 있었다.

그때 그이께서는 정시명의 련락원으로 간 마동열을 만나주시고 깊은 신뢰와 고무가 담긴 친서를 보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정시명의 활동소식을 여러 동지들로부터 듣고있다고 하시면서 현재 동지가 중국관내에서 혁명의 한 지하전구를 무겁게 떠맡고있는 형편에서 우리가 국제주의적의무를 외면해서는 안될것이라고 하시였다. 또한 정시명이 우왕좌왕하고있는 상해림시정부인물들과 중국혁명을 도와주고있는 조선사람들속에서 존경과 신임을 받고있는 유리한 환경을 리용하여 그들이 우국충정을 변치 않도록 이끌어주며 특히 《림정》이 민족성을 견지하도록 측면보위사업을 잘해주면 우리 혁명에도 크게 도움이 될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조국광복의 날도 가까와 오는데 부디 건강에 류의하여 광복의 날에 조국에서 꼭 만나자고 뜨겁게 고무해주시였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마동열에게는 특별히 어려운 적구투쟁을 긴 세월 이어나가는 정시명동지의 신변을 책임적으로 지켜주라고 당부하시였다.

그 뜻깊은 친서와 따뜻한 은정을 받아안고 그리움에 눈굽을 적시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벌써 퍼그나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조국은 광복되였다. 평양과 서울 그리고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날리는 전파들이 조국소식을 전해온다.

정시명은 매일 여러 시간 라지오앞에 마주 앉군 한다.

격동적인 사변들이 눈앞에 방불하게 펼쳐졌다.

그이께서 평양에 입성하시였다.

평양은 새 사회로 끓고있다.

인민의 세기적숙망이 하나하나 풀려나가고 강산도 사회도 변혁의 열풍에 휩싸였다. 사람들도 강산도 우줄우줄 키돋움하는것이 막 보이는것만 같다.

얼마나 많은 일이 장군님의 두어깨에 실려있을것이냐. 어서 빨리 장군님 뵈옵고 그이의 중하를 덜어드리자. 건국의 거창한 위업에 어깨를 들이밀자.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고 급해났다.

여겨보면 내 나라의 참다운 미래를 위하여 참으로 사심을 버리고 열혈의 심혼을 바쳐온 사람들은 모두가 평양으로 간다.

마땅한 대세다. 해를 따라 만물이 자라나고 꽃피는것과도 같은 일이다. 반대로 력사의 반동으로 락인되여있거나 공산주의를 끝내 접수하지 못한채 력사적감각을 잃은 사람들은 다투어 서울에 몰려간다. 그것들이 이역에서 보인 작태를 보면 서울에 몰려가서 어떤 짓을 하겠는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된다. 그러면 저 서울은 어쩔텐가. 나라의 절반땅이 무슨 꼴로 돼가겠는가. 북과 남이 갈라지는 오늘 서울은 더더구나 누구도 비켜서서는 안되는 곳이다.

시간이 흐르고 서울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식들이 겹쌓일수록 정시명의 생각은 복잡하게 엉켜들고 심각해졌다.

또다시 민중의 피가 흐르는 결전장들이 눈을 떠도, 잠자리에 들어도 자꾸만 밟혀온다. 분노와 원한이 사무친 눈들이 그 처절한 싸움터를 뒤에 남겨둔채 평양으로 길떠날 차비를 하는 자기를 노려보는것만 같았다. 심장은 평양길에 어서 오르라고 흉벽을 마구 두드리건만 리성은 발목을 잡는다.

(아서라… 다시 생각해보라.…)

정시명은 뜨락을 건너 련못가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은하수는 기울고 삼라만상은 려명을 앞둔 고요속에 묻혀있다. 이상스럽게도 귀따갑게 들려오던 련못가의 개구리들의 청비린 노래가락도 다 기진해버린듯 사라졌다. 물기가 번들거리는 련꽃들이 커다란 이파리를 다물고 반듯한 수면우에서 살랑살랑 흐느적이고 이따금 물고기들이 떠다니다가 먹이감을 노리고 첨버덩 물소리를 내며 뛰여오르기도 한다. 정향나무에서 풍겨오는 향기가 코구멍을 알싸하게 자극한다.

정시명은 련못을 잠시 둘러보다가 뭇별들의 빛이 바래여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며 방금 은송에게 하고싶었으나 굳이 입을 다물어 삼켜버렸던 그 애끓는 소원을 조용히 되뇌여본다.

《나를 리해하여주시오. 나도 피와 얼을 가진 인간이요. 평양에 가고싶소. 김일성장군님을 가까이 모시고 건국에 몸바치고 싶소. 그러나 나는 서울길에 올라야 할것 같소. 거기가 내가 서야 할 새 전구요.》

왜 이 말을 선뜻 입밖에 내놓을수 없었던가.

아니, 더는 동요하지 말라. 나의 선택에 그 어떤 공명도 영달도 없다는것을 량심을 가지고 보증할수 있다. 나는 행복을 누리려고 새로운 선택을 한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 시대가 새롭게 끌어안은 과제를 맡아 나서려고 할뿐이다.

이제는 세상에 공개할 때가 되였다.…

정시명은 동요하는 마음에 든든한 대못을 꽝꽝 박아넣듯이 마디마디를 씹으며 나직이 부르짖었다.

정시명은 드디여 번거롭던 감정의 충돌에 결단을 내리였다.

그렇게 하니 가슴이 쩡 열리는것만 같다.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언제 나왔는지 은송이 벙글거리며 서있다.

《아니 언제 나오셨습니까? 난 지금쯤 굳잠에 계실줄 알았는데.》

《한 사람은 고민거리를 안고 별만 쳐다보는데 나더러는 셈평좋게 꿈나라에서 딩굴라니 어디 인사가 되였습니까. 내겐 타향의 마지막밤이니 함께 이슬을 맞아봅시다.》

그들은 유쾌하게 웃으며 련못가의 돌걸상에 나란히 앉았다.

《내 정향선생의 생각을 맞춰보라오?》

은송이 비주름히 입가에 미소를 담으며 은근하게 물었다.

《내 생각?》

정시명은 은근히 두려워났다.

그가 정말 내 속심을 다 계산한게 아닐가.

《나도 이젠 한일 없이 나살이나 건사하구 하두 많은 사람들을 사귀여서 제법 관상을 볼줄 알지요.… 에, 당신네들은 너무도 몰인정하다, 당신들은 분주스러운 치닥거리는 다 밀어맡기고 떠나면서도 이 방랑객의 피가 설설 끓는 소리는 듣지 못하느냐.…》

은송이 이렇게 운을 달아 구성지게 엮어대자 정시명이 껄껄 웃었다.

은송이 호걸스럽게 웃고있는 정시명의 두 손목을 부여잡는다. 어떻게 된일인지 풍상고초 다 겪어온 은송의 눈에 눈물이 글썽하다. 그 역시 방랑객의 설음이 뼈에 사무쳐있는 사람이다. 은송은 정시명이 무엇때문에 전례없이 소심해졌는지 딱히 가늠은 안되면서도 조국을 그리워하는 그 애절한 심정만은 십분 리해하고있었다.

정시명은 오랜 지기의 눈물을 보자 그 열렬하면서도 진정이 어린 인정에 덩달아 목이 잠겨들었다.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진심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정말 못 견디겠습니다. 조국이 그립습니다. 고향이 그립습니다. 눈을 감으면 부모처자들의 얼굴뿐이지요. 왜놈에게 쫓겨다니느라 처자식얼굴조차 변변히 익히지 못했지요.

그리고 은송선생, 솔직히 말해서 난 우리 혁명의 수뇌로 추대된 김일성장군님을 한시바삐 뵙고싶습니다. 난 벌써 오래전에 그분의 전사로 살아가는게 필생의 소원이라 다짐드렸지요. 그분을 몰라서야 무슨 조선사람이고 조선의 애국자이겠습니까. 우리 혁명의 력사를 돌아보면 난 이따금 홀로 가슴을 칠 때가 있습니다.

내 서울서 공부할 때, 그러니 20년도경부터였지요.

은송선생도 잘 아시는 제노라하는 〈공산주의〉거물들과 민족주의두령들은 다 만나보았습니다. 서로 질시하고 싸우고 결국은 주저앉아버렸지요. 솟아오르기도 전에 지리멸렬되고말았지요. 무엇때문이였겠습니까.

내 겨레, 내 나라를 한품에 걷어안고 가꾸어낼만 한 웅지와 덕망과 배심을 갖춘 동량이 없었던 탓이였지요.

그러니 은송선생, 생각해보시오. 내가 김일성장군님을 그리워하는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정시명의 이야기는 장강의 물결처럼 력사의 복판을 폭넓게 그러안고 전개돼다가도 사품치며 흐르는 여울물처럼 강렬한 열정과 기백으로 격조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정시명은 일상시에는 그 두툼한 입술을 쉽게 열지 않는 과묵한 성미였다. 그러나 일단 마음이 동하면 눈망울에 광채가 비끼고 입을 열기가 바쁘게 청산류수와 같은 열변이 쏟아져나온다. 그는 어떤 복잡한 문제도 론리정연하게 그림처럼 명료하게 펼쳐보이면서 지성과 열의로 상대방의 심금을 울려놓고야 마는 비상한 설득력을 가진 놀라운 웅변의 소유자였다.

은송도 정시명이 펼쳐놓은 추억의 세계에 깊이 공감되여 자못 감개무량해서 응수하였다.

《정향선생, 지당한 말씀이시오. 참말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나도 아까 말했지만 그분이 계시는 평양이기에 더욱 그리워지고 고향길도 마다하고 가볍게 떠나는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솔직한 말로 이렇게 괴로워하는 정향선생을 남겨두고 나도 훌훌 떠나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은송은 담배를 정시명에게 권하고 자기도 불을 붙여 물었다.

정시명은 한모금 길게 들이마시고는 눈을 잠시 감은채 말이 없었다. 정시명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하느라고 숨을 크게 몰아쉬였다. 기세차게 이야기를 몰아갔지만 역시 은송앞에서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해도 운명적인 량심의 결단을 실토 정하기에는 너무도 베찼다. 더구나 고향이 서울이면서도 굳이 평양에 가려고하는 은송이고 보니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은송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하여튼 장군님을 뵈오면 정향선생도 인차 뒤따라 온다고 말씀을 드리겠으니 너무 마음쓰지 마시오.》

그 소리에 정시명은 충동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황황히 그의 뒤말을 가로챘다.

《은송선생, 그러지는 마십시오. 난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있습니다.》

《달리 생각하다니요. 그러면?…》

은송의 가뜩이나 큰눈이 떼꾼해졌다. 이 사람이 설마 귀국을 단념하자는것인가? 이역에서 타향사람들과 어울리더니 여기에 아예 눌러앉자는것인가?

은송의 두눈에 순간 의혹과 질시의 복잡한 빛이 언뜻 스쳐갔다.

은송이 가까이 하던 사람들중에도 귀국행을 포기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저마끔 피치 못할 리유는 있건만 그 사람들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람이야 그럴수 있는가. 아니 속단하지 말자.

은송은 예리한 눈길로 정시명의 얼굴을 더듬으며 다우쳐 물었다.

《말씀해주시오. 난 그걸 알아야 떠나겠소.》

《은송선생,… 난 서울에 가야 할것 같습니다.》

《서울에요?!》

은송이 깜짝 놀라서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정시명이 웃몸까지 흠칫거리며 굳어지는 은송을 마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정향선생! 그게 정말이요?!》

정시명의 괴로움을 제나름으로 해석하였던 은송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그러나 정시명의 낯빛은 례사스럽다. 여전히 속생각을 깊이 묻어두고있는 천연한 모습이다. 하기는 정시명이 이런 좌석에서 허투로 실언을 내뱉을 사람이 아니다. 이미 결심이 다져진것 같다.

정시명은 자기의 가슴속을 꿰뚫어보듯 예리하게 지켜보는 은송의 눈길을 피하여 하늘을 쳐다보았다. 평온한것 같은 그의 표정밑에는 실상 복잡한 마음의 갈래들이 서리서리 엉켜있었다.

은송은 한동안 정시명의 일거일동을 예민한 감각으로 훑다가 급기야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심중이 대충 건너짚이자 가슴안 불이 달린듯 확 달아올랐다.

그는 잠시후에야 느릿느릿하면서도 정중하게 물었다.

《왜 서울에 가신다는겁니까? 거기에 어떤 패당들이 모여드는지 정향선생이 모르신단 말이요. 내같이 얼룩덜룩하게 살아온 사람도 평양길에 나서는데 정향선생이 어째서 서울에 가신다는거요. 내 개인의 욕심으로도 정향선생이 평양에 가서 신생조선의 큰 일감을 맡는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가시다니?… 난 찬성할수 없소.》

은송은 정시명의 의사를 꽉 눌러버리려고 년장자의 위엄을 휘두르며 다가든다.

《허허허.》 정시명은 은송이 다소 격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자기의 결심을 의심스러워하고 비난하자 허거픈 웃음부터 터치였다. 그러나 인차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눈빛으로 되돌아가서 은송의 묻는듯한 집요한 눈길을 마주보았다.

《서울소식도 아시겠지요?》

은송이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예. 대충…》 정시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하였다.

《그런데두 그쪽에 발길을 돌리겠다는거요?》

정시명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사이에는 한동안 납덩이같이 차고 무거운 기운이 떠돌았다.

은송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시명이 어쩌면 일생을 내맡길 모질고도 운명적인 선택을 내렸다는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이 사람이 또 결전장에 뛰여들려는구나!)

은송은 창졸간에 솟구쳐오르는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정향선생!》하고 부르며 그의 든든한 어깨를 그악스레 움켜쥐였다.

(불사신같은 사람!)

그는 정시명의 침착하고도 사려깊은 모습에서 평생을 나라 위한 한길로만 줄달음쳐온 존경하여 마지 않는 애국지사의 불굴의 넋의 일단을 새롭게 찾아보면서 눈시울이 축축해오고 고개가 깊이 숙어짐을 어쩔수 없었다.

(나라의 재난을 두고 일신의 안락을 흔연히 버릴줄 아는 이같은 지사가 세상에 몇몇이 될텐가.… 아,… 그렇지만…)

정시명의 결심에 은송은 흉벽을 때리는 감동을 금치 못하면서도 선뜻 지지할수는 없었다. 또다시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운 싸움에 그를 떠나보내는것이 너무도 죄스러웠다. 피어린 투쟁무대를 드디여 내리게 되는 이 사람이 다시 사선의 고개가 첩첩할 곳으로 떠나는것을 어떻게 보고만 있겠는가. 뜻은 고원해도 선뜻 공감을 표할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될것 같다. 어쩌면 정시명의 운명에 분수령이 될지도 모를 이 밤에 자기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서 후날에 뼈저린 후회가 없도록 해야 할것 같았다.

은송은 상대방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정향선생이 쉽지 않게 내린 비상한 결심이 리해는 됩니다. 서울에 가서 다시 싸움판에 뛰여들겠다는 그 고결한 마음에 감동도 되구요. 하지만 정향선생, 나는 지지할수는 없습니다. 20년이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적은 세월입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거늘 곱이 되는 세월이지요. 하물며 그 세월의 어느 하루인들 편안히 지낸적이 있었습니까. 반일항전에 바쳐진 정향선생의 수고를 천으로 만으로 헤아리겠습니까. 그리고 선생이야 나하고도 처지가 다르지 않습니까. 고향도 부모처자도 다 북쪽에 있고 게다가 평양걸음이 정선생이야 얼마나 당당합니까. 너무 자신에게 가혹한걸 강요하지 마시오. 우리도 뭐 가슴에 돌덩이를 차고다니는거야 아니지요. 수난으로 이어온 인생을 이제야 비로소 총화짓게 되였는데, 나는 동의할수 없습니다. 조국이 아직도 일본놈들의 발밑에 눌려있다면 그런대로 숙명이니 하고 접수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지나칩니다.》

은송은 완고하고도 사리정연하게 반대의사를 다시금 중언부언하며 내놓았다.

정시명은 은송이 정색을 하고 힐난조로 자기의 진정을 토해놓자 저으기 당황해졌다.

오래동안 숱한 고민속에서 굳힌 결심을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강한 반대에 부딪친것이다.

은송의 말이 심각해지고 사리가 분명할수록 정시명의 가슴은 쓰려왔다. 그는 마음속에 힘들게 세워놓은 인생의 새로운 기둥을 은송이 사정없이 뿌리를 잘라내고 쓰러뜨릴가봐 겁이 났다.

《아, 은송선생!》

정시명이 어망결에 괴롭게 부르짖었다.

《뭐, 나같은 방랑객이 어디 한둘입니까.》

정시명이 목이 쉰 소리로 중얼거리자 은송이 팔을 홱홱 내둘렀다. 더이상 론의할 여지가 없다는것이다.

《뭐 그런줄 아시고 고쳐 생각하십시오. 서울에 가시다니요. 안될 일입니다. 아침에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은송은 그를 놓아주고 성난듯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련못가에 홀로 남은 정시명은 그의 뒤모습에 눈을 박고있다가 한손으로 정향나무의 가지를 움켜쥐고 번거로운 생각에 잠겼다.

벌써 오래전부터 일고잦던 번민이 다시 가슴속에서 태질하기 시작하였다.

서울길에 반대의사를 던진 은송의 말까지 들으니 힘들게 내렸던 운명의 선택이 새삼스럽게 얼마나 심각한것인가 하는것이 페부에 와닿는다.

(저 사람은 내앞에서 속에 없는 말을 해본적이 없다. 나에게 들이대는 아픈 말들이 인간의 상정을 뜨겁게 리해하여주는 은송의 속마음 그대로인것만은 틀림이 없다. 가슴에 돌덩이를 차고다니는게 아니라구?… 그래 그 말은 옳아. 돌덩이라…)

예까지 생각이 뻗어가자 정시명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또다시 동요하고 있다는 리성의 목소리가 우뢰처럼 터졌다.

(동요하지 말라 정시명! 이미 선택한 길은 애국의 길이다. 서울로 가야 한다. 가정의 비극을 외면하는 효자가 어디 있으며 나라의 불행앞에 제몸 사리는 충신이 어데 있으랴.)

정시명은 국토의 분렬과 관련한 김일성장군님의 말씀들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구절구절에 맥박치는 겨레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민족의 전도를 책임지시려는 그 원대한 웅지와 고결한 덕망에 접할 때마다 장군님에 대한 경모의 정은 열배로, 백배로 커만 졌다. 그와 함께 그러한 가르치심의 밑바닥에 력력히 어려있는 장군님의 심려와 불안과 비분을 찾아볼 때면 자기도모르게 심장이 졸아드는듯 한 진통을 느꼈고 호흡이 가빠지군 하였다.

자자구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면서 그는 장군님께서 광복된 오늘에 와서 제일 가슴아파하시는것이 새 나라, 새 제도, 새 생활 창조로 부글부글 끓고있는 평양이 아니라 미국놈들의 군화발에 억눌리고 이그러져가는 서울풍경이라는것을 똑똑히 깨닫고있었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생의 새로운 선택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였고 여기에서 뿌리를 내렸으며 여기에서 굳어진 감정이고 리성의 결단이였다.

(장군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이께서 마련해주시는 행복을 받아안기전에 장군님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그 무거운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애쓰는게 도리이다.

나는 벌써 오래전에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그이의 전사로 살아가리라고 맹약을 드린 인간이다. 그러니 어떻게 장군님께서 가장 가슴아파하시는 문제를 알면서 감히 그를 외면할수 있겠는가.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건국위업에 각자가 소신껏 힘과 지혜와 열을 모아줄것을 바라고계신다.

내게는 애국에 한몫이 될만 한 돈도 없고 기술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국토의 재통일에 이바지할수 있는 경험이 있고 토대도 닦아져있다. 건국을 위해 다른 사람이 대신할수 없는 나의 몫이 바로 서울에 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가고싶다고 고향으로 갈수 있으며 기다린다고 해서 항일전사로서의 복과 영예를 찾아 떠날수 있느냐.

내가 선택한 길에는 보다 사나운 불보라가 마주쳐 올수 있다. 감옥과 단두대가 기다릴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가자, 가야 한다.

정시명! 다시 서약을 다지라.

운명은 이미 결정되였다. 끝까지 인생의 종점까지 나라걱정을 하며 나라 위해 몸바치는 인간이 되라!)

정시명은 정말 서약을 하듯 멀리 동터오는 조국의 하늘을 우러러 속깊이 부르짖었다.

다음날, 정시명은 서안역에서 다시 한번 은송으로부터 다짐을 받았다.

《정향선생! 내가 한 이야기를 흘려보내지 마시고 생각을 다시 해주시오.》

그 소리에 정시명은 그의 손을 굳게 잡아 흔들면서 청맑은 소리로 즐겁게 웃었다. 밝고 명쾌한 웃음이였다.

은송은 저 사람의 결심을 흔드는건 하늘을 움직이는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흔연히 웃어보이고는 렬차의 승강기에 올랐다.

그는 자기자리를 봐주러 먼저 차에 올랐던 마동열을 세워놓고 근엄한 어조로 훈시를 하였다.

《이보게 마중위, 내 저분의 도움으로 제나라 백성된 구실을 하게 된 사람으로 긴히 부탁할게 있네. 뭔가 하니 정선생을 잘 모셔달라는걸세. 난 이게 저분과의 마지막작별일것 같은 위태위태한 생각이 자꾸 들어 못견디겠네. 자네 내 부탁을 허투로 듣지 말아주게.》

《선생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마동열은 어제밤에 그들사이에 오간 이야기를 딱히 알지 못하면서도 엄숙하게 받아들였다.

기차가 움직이자 은송은 두눈에 더운 눈물이 그렁해가지고 손을 높이 들었다. 그는 정시명이 작은 점이 되여 시야에서 아물거릴 때까지 그렇게 손을 쳐든채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승강구에 굳어져있었다.

바래워주는 정시명도 오래도록 한자리에 서서 점도록 부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은송은 오매에도 그리운 고국산천을 밟게 될것이다.

《아, 은송, 당신이 부럽구려!》

그는 역구내에 있는 나무걸상에 앉아 은송을 태운 렬차가 사라진 후에도 그자리에 눌러앉아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고행에 찬 지나간 세월이 련련히 비껴가기 시작하였다.

 

… … …

여름이면 지붕우에 호박꽃이 노랗게 피고 가을이면 물동이같은 호박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초가삼간 …

고향에 대한 추억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된다.

일찌기 화승총을 둘러메고 의병대의 선봉에 서서 태백산과 묘향산오지를 주름잡다가 쉰이 넘어서야 부상당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고향집에 들어선 아버지,

해종일 전야에서 노그라지듯 지친 몸을 끌고 들어와서는 밤새도록 대가정의 시중을 들며 밤다듬이질소리에 가락을 맞춰 끝없이 설분을 엮어가던 어머님의 구슬픈 노래,

나어린 학생의 몸에 달린 오롱이 조롱이,

그 시절 그 나이엔 누구에게나 례상사였는데 어찌하여 애들의 재롱을 받아주는것이 그리도 망신스러웠을가.

어질디어질게만 생겨먹은 안해의 품에서 캐득거리던 그애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정시명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려보기조차 죄스러운 추억이였다.

… 눈앞으로 서울풍경이 흘러갔다.

열정과 공상, 방황과 좌절…

서울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던 배재고등학교…

종로뒤골목에 찌그러져가는 판자집들이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가.

우듬지도 다듬지 않은 박달나무를 뻗쳐놓았던 학생책방에서 자주 열리던 맑스주의독서회…

공산주의선각자라고 자화자찬하던 사람들이 저마끔 열변을 토하던 3. 1공원…

포도우에 흩날리던 6. 10만세운동의 삐라들…

거리의 곳곳에 나붙어있던 《지명수배자-정시명》광고들…

환멸과 좌절끝에 시작된 방랑살이…

눈앞으로 《망명자의 노래》가 처량하게 울리던 압록강의 거센 물결이 너울거린다.

심양과 북경, 남경과 상해…

끝없는 방황끝에 충칭의 어느 주막집에서 토했던 절규가 지금도 고막을 아프게 찌르는것 같다.

《누구냐, 나를 이끌어 태여난 보람을 안겨줄 이가? 나의 조선을 구원할 혁명의 진리는 어데 있느냐?

온 세계의 무산자가 받아문 맑스의 붉은 리념을 우리 조선은 어찌하여 불국사의 념불처럼 외우고 모독하고만 있느냐.》

아니, 그것은 내 인생을 한바퀴 돌려세운 뜻깊은 총화였지.…

눈앞으로 어지러운 과거가 밀려가고 피빛으로 불타던 붉은기가 떠오른다.

그 붉은기앞에서 주먹을 불끈 쳐들고 다지던 엄숙한 서약이 구절구절 다시 장엄한 메아리로 울려온다.

《나는 리념적좌절과 방황의 험로를 헤매던 조선사람으로서 동방민족의 공동의 적 일제와 착취계급을 타승하는것이 조선의 독립과 민중해방을 앞당기는 길이라는것을 확신하면서 세계무산혁명대오에서 마지막피 한방울까지 다 바쳐 싸울것을 맹세합니다.》

정신적방랑은 이로써 끝났다.

싸움의 목표는 뚜렷해지고 투쟁의 강도는 치렬해졌다.

중세기적인 고문으로 이어진 7년간의 감옥살이…

피어린 총격전들…

죽음의 고비를 무시로 넘나드는 지하전구…

간단없는 추격과 미행과 감시…

담도 커지고 지혜도 커지고 인간도 커졌다.

그에게는 혁명의 커다란 전선이 맡겨졌고 김구의 상해림시정부도, 장개석의 국민당도 하나의 사업대상으로 되였다.

하지만 중국의 무변광대한 대륙을 누비며 20년세월을 분주히 뛰여다니면서도 어느 순간인들 고국의 산과 강과 그 땅의 주인들을 잊은적 있었던가.

살래야 살길없어 떠나온 산천이건만 선조들의 뼈가 묻혀있고 부모형제가 살아가고 처자가 기다리고있는 땅이 아닌가. 불타는 전쟁터에 나설 때도 정시명은 처절하던 3. 1인민봉기의 피의 나날들을 더듬었다. 귀주의 유명한 고량주를 들면서도 고향의 시큼털털한 막걸리생각에 가슴이 저려들군 하였다.

수도물도 끓여먹는 남경의 황토빛물을 마실 때에는 고향마을 뒤산에 사시장철 퐁퐁 솟아나던 수정같은 옹달샘이 생각나 눈부리가 따가워지군 했다.

참으로 조국이란 살아 생전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만리혈전터에 피를 뿌리고 쓰러진다 해도 기어이 뼈라도 묻히고싶던 향토였고 마음속에 가장 소중히 간직된 사랑이였다.…

《가자, 어서 가자! 내 나라, 내 겨레를 위한 싸움의 불바다를 다시 헤쳐보자!》

정시명은 나무걸상의 모서리를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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