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해발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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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고있었다. 밝은 불빛을 받은 눈송이들이 마치도 축복의 붉은 꽃보라처럼 마당앞에 서있는 전나무들에 소복이 쌓인다.
《눈이 내립니다. 참송이들이 소담도 하군요.》
김정숙어머님께서 창밖에 시선을 보내시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올해의 첫눈입니다. 평양의 설경을 보게 되였습니다.》
정시명이 감개무량해서 김정숙어머님의 말씀을 받았다. 지금 정시명과 마동열은 김정숙어머님께서 손수 차리신 저녁상을 두분을 모시고 치르고나서 행복의 무아경에 심취되여 즐겁고도 인상깊은 시간을 보내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정시명의 련락원이 함께 왔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친히 려관에 자동차를 보내시여 마동열이까지 저녁식사에 불러주시였던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정시명의 옆자리에 앉으시여 그가 편한 마음으로 한가지의 음식이라도 더 들도록 다심하게 정을 기울여주시였다.
저녁상을 물리자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정시명일행을 응접실로 안내하시였다.
시간은 흐르고 오가는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정시명의 가족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고 자상히 물어주시던 김정숙어머님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정선생님, 이번 서울로 나가는 길에는 꼭 부인님을 데리고가시지요.》
어머님의 다정하신 권고에 정시명은 어줍은 미소를 입가에 담은채 목덜미를 슬슬 어루만지였다.
《하, 사실은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만…》
정시명이 이렇게 말끝을 여물구지 못한채 씨원스런 대답을 올리지 못하는데 어머님께서 걱정스러운 어조로 다시금 물으시였다.
《선생님, 그럼 부인님을 또 고향에 남겨두고 홀로 떠나시렵니까?》
《글쎄말입니다. 데려갔으면 피차에 좋을듯도 싶은데 이번에 서울에 가보니 촌아낙네들이 거접을 할 곳이 못됩니다. 그 사람이야 산골에서 여태 농사군으로 붙박혀 살아왔는데 막상 데려갈 생각을 하니 저희들 싸움에 짐이 되지 않을가 걱정이 큽니다. 그래서… 거 뭐 큰일도 아닌데…》
정시명은 안해의 어진 얼굴을 눈앞에 그리며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말씀드리였다. 마주서면 귀밑부터 발개져서 말 한마디 변변히 넘기지 못하던 사람이라 아무리 속이 크게 생각을 굴려봐야 도리질부터 하게 됨을 어찌할수 없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봄날처럼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눈가에 미소를 담으시고 잠시 정시명의 딱해하는 표정을 살피시였다.
《전 그게 작은 일이 아닌것만 같습니다. 장군님, 제가 굳이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하며 장군님께로 눈길을 돌리시였다.
《아, 이야기하오. 이런 일에서야 우리 남자들보다 정숙동무가 발언권이 있지. 어서 이야기를 하오.》
장군님께서는 만면에 느긋한 미소를 거두시지 않으신채 흔쾌한 어조로 말씀을 받으시였다.
《정선생님, 선생님의 깊은 심중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께서 부인님을 앞세우고 서울로 가시였으면 합니다. 바깥에 나간 남정네들은 하루를 십년으로 애를 태우며 기다리는 녀인들의 애절한 심정을 다는 모릅니다. 하물며 스무해가 어디 가볍게 입에 담을 세월입니까. 시집문턱을 넘어서면 울고싶어도 울어볼 곳이 없어 이불깃을 적시는게 녀인들의 가엾은 정상이지요. 예로부터 남편없는 아낙네는 불꺼진 화로란 말도 전해오지만 스무세월을 시집을 지켜 송죽같이 살아온 부인님께 더는 설음에 겨운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김정숙어머님의 말씀이 더없이 살뜰하면서도 부드러운 안개처럼 온몸에 젖어들었다.
정시명은 목이 뜨끈뜨끈한것으로 그들먹해져서 쉬이 대답을 올리지 못하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그 유정한 목소리에 진정을 담아 말씀을 이으시였다.
《부부간의 사랑이 어려울 때 어이 짐으로만 되겠습니까. 저는 여적 이 나라의 녀인들이 남편을 배신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치욕을 덜길 없어 우물에 몸을 던지고 새끼줄에 목을 매여 남정네들의 사랑을 고이 지키고 간 녀인들의 이야기가 좀 많습니까. 정선생님을 그리며 스무세월 간직해온 부인님의 사랑은 어려운 싸움에서 오히려 힘이 되고 의지가 아니 되겠습니까. 그리고 나라가 광복이 된지 한해하고도 반년이 되여오는데 부인님도 많이 달라졌을것입니다.
정선생님, 부디 저의 부탁으로 받아주시여 부인을 데리고 가주십시오.》
마치도 오래간만에 마주 앉은 친누이의 살뜰한 타이름처럼 애틋한 정이 함뿍 어린 김정숙어머님의 간곡한 말씀이 어느 한마디도 흘림이 없이 정시명의 가슴에 푹푹 흘러들어 맥박을 빠르게 하고 가슴을 한껏 덥혀주었다. 정시명은 그만에야 고개를 푹 꺾었다. 불시에 두눈에 미음이 핑하니 돌았다.
아, 어느 세월 어느 누가 이처럼 가슴에 맺혀있던 설음겨운 옹이를 헤아려 사랑으로 더듬어주고 진정을 고여 삭여준 이 있었던가. 그는 목이 꽉 잠기였다. 잠시후에야 그는 감사의 정이 력력한 얼굴을 들고 축축히 젖어든 쉰목소리로 떠듬떠듬 대답을 드리였다.
《고맙습니다. 녀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제 녀사님의 그 높은 뜻이 담긴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안타까움에 젖어있던 김정숙어머님의 그 아름다운 눈가에 기쁨의 미소가 다시 고요히 흐르기 시작하였다.
《하하, 정숙동무가 어려운 문제를 하나 풀었습니다. 나도 정숙동무의 의견에 전적인 찬성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김정숙어머님께 신뢰의 정이 어린 눈길을 보내시며 방안의 분위기를 밝게 하시려는듯 유쾌하게 웃으시였다.
장군님께서와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정시명이 걸어온 다난한 혁명의 나날들에 겪은 일들에 대해서도 들어주시고 마동열의 모험담도 즐겨 들어주시면서 크게 소리내여 웃으시기도 하시였다.
정시명은 김정숙어머님께 지하투쟁경험에 대하여 들려달라고 무랍없이 청을 드리기도 하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제게 무슨 경험이 될만 한 이야기가 있겠다고요.》하며 사양하시다가 마동열이가 나서서 졸라서야 백두산시절의 감회깊은 추억의 세계를 방불하게 펼쳐주시였다.
만경대의 추녀낮은 초가집이며 회령 오산덕의 단칸짜리 세방살이에 대한 눈물겨운 이야기도 들었다.
항일의 전설적인 영웅들을 모신 이 밤은 정시명의 일생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여준 행복의 밤이였다.
벽에 걸려있는 쾌종이 두점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서야 정시명은 덴겁을 하듯 속으로 《아뿔사!》하고 시간을 잊고 앉아있는 자신을 때늦게 질책하며 황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군님! 제가 장군님의 귀한 시간을 너무 렴치없이…》
장군님께서는 송구스러움에 몸둘바를 몰라하는 정시명의 손목을 꼭 잡으시며 《아니, 일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동지를 이렇게 깊이 사귀게 되였는데 열밤을 패운들 어떻습니까?》하고 만면에 밝은 미소를 지으시였다.
정시명은 장군님의 그 말씀에 용기를 얻은듯 《저-》하고 아직 흉중에 걸려있는 문제를 꺼내다가 또 너무 시간을 지체시킬것 같아 뒤말을 삼키였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어서! 오늘 우리에게 차례진 이 밤은 정시명동지를 위한 밤이기도 하지만 보다는 광복의 덕을 보지 못하는 남조선인민들을 위해 마련된 밤이기도 합니다. 겨레의 운명을 떠맡은 우리들이 이 책임적인 순간순간을 어떻게 보냈는가 하는데 대하여 후대들이 평가할것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정시명동지.》
장군님께서는 그의 속내를 헤아리시고 정시명의 손목을 끌어 각근히 자리에 도로 앉히시고는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마디마디가 겨레의 어버이로서의 충직한 사명감에 젖어있는 그이의 말씀에 정시명은 어쩔수 없이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아까 말씀드린것처럼 적지 않은 사업대상들이 우리의 계급로선에서는 타협이 잘 되지 않는 인물들이라는것입니다. 중국에서 사업할 때도 저는 이 문제를 놓고 자신의 립장에 대하여 이따금 회의를 느끼군 할 때가 있었습니다.》
장군님의 안광에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정시명이 선뜻 꺼내놓기 주저한 심리적고충과 모대김에 대번에 공감이 되였던것이다.
정시명이 가슴속에 오랜세월 덮어두어 왔던 생각마저 허물없이 툭툭 털어놓은 그 심정이 더없이 미덥기도, 고맙기도 하시였다.
《정시명동지, 두려워할것이 없습니다. 내가 길림에서 활동할 때 장울화라는 막역한 중국동무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병 수십명까지 거느린 대부호의 아들이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민생단놀음이 한창 고조되고있을 때 이 문제를 헤집어놓기까지 하였습니다. 장워이화는 우리 혁명의 사령부를 지켜 왜놈들앞에서 자결하였습니다. 이건 뭘 말해줍니까. 인간이란 그 출신이나 토대에 관계없이 력사의 진리를 자기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람답게 살려는 아름다운 지향을 간직하게 될 때 그처럼 고결해지는것이며 자기의 힘과 능력의 한계점을 뛰여넘는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에 대하여 의문부호를 붙인다면 그건 일종의 인간에 대한 모독이고 범죄입니다. 그러니 꺼려할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전세계를 개조해야 할 혁명가들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강한 배심과 억척의 힘이 어린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정시명의 심중에 옥맺혀있던 매듭을 대번에 시원스럽게 풀어주시였다.
《더구나 정시명동지는 활동의 특성으로부터 이 문제를 대담하게 진취적으로 대하여야 할것입니다. 벗과 원쑤를 가르는 시금석은 그 어떤 주의주장도 아니요, 재산의 유무도, 출신성분도, 어제날의 행적도 아닌 내 나라, 내 겨레에 대한 그 인간의 오늘의 립장과 관점입니다. 나는 원래 참으로 진보적이고 고귀한 사상의 근간은 애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겨레, 내 나라를 위한 사랑을 떠난 주의주장은 공리공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구태여 자기의 리념으로 받아들인것이 무엇때문이였습니까. 조국과 인민을 구원하기 위한 사조를 연구하던 끝에 공산주의야말로 우리 시대의 참애국을 담보하는 유일한 학설이라고 인정하였기때문이였지요. 그러므로 혹자들이 공산주의를 접수하지 않는다고 하여 애국의 대오에서 배척한다면 그것은 내 나라에 바쳐진 수백수천의 유명무명의 애국선렬들을 무시하는 일종의 좌익소아병에 빠진것입니다. 우리가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었던 전봉준의 동학군이나 〈일사보국〉의 창검을 비껴들었던 홍범도의 의병대를 사랑하는것은 그들이 애국애민의 선각자들이였기때문입니다.
정시명동지, 절대로 흔들리지 마시오. 나라의 광복이 애국과 매국이라는 큰 선에서 새로운 구조적변화를 가져오고있습니다. 그래, 계급로선에서 타협이 되지 않는다고 제껴놓으면 광복된 이 나라를 두고 그네들이 발붙일 곳이 어디겠습니까. 인민에게 봉사하고 나라 위해 손을 내민다면 김구라도 마다할 리유가 없습니다.》
김구라는 그이의 말씀에 정시명은 다시한번 크게 놀랐다. 김구는 지금 혁명세력의 첫째가는 과녁으로 되고있다. 그는 8. 15전에도 공산주의와는 담벽을 두텁게 쌓아놓고 살아왔지만 8. 15후에도 의연히 공산주의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달고 달려들고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김구의 수표가 있는 증명서를 감춘 자객들이 북반부의 여기저기에 출몰하면서 못된 짓을 벌리고있다. 때문에 좌익계의 언론들은 공개적으로 《김구, 리승만을 타도하자.》고 주장하고있는것이다. 그런데 분명 장군님께서는 김구의 이름을 명백히 찍으시였으니 내가 헛갈려 들은것이나 아닌가. 정시명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듯이 복잡한 심경이 어린 눈길로 장군님의 안광을 우러렀다.
장군님께서도 어느새 그의 얼굴에 떠오른 심리적충격을 헤아리시고 잠시 말씀을 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흔연한 미소를 지으시였다.
《정시명동지, 나도 김구가 광복된 오늘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적의를 버리지 못하고 못난 짓을 마구 벌려놓는것을 접할 때마다 분노도 가지만 그보다앞서 가슴도 아픕니다. 김구라는 인간의 한생을 훑어보면 어쨌든 그는 일본놈들을 반대하여 살도 날리고 폭탄도 던지고 죽을 고비도 여러번 겪은 이 나라의 애국지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린 이것을 중시해야 합니다. 이 허물, 저 허물 다 헤집어 이 사람, 저 사람 다 떼버리면 우리가 건국대업을 어떻게 떠메고 나가겠습니까. 난 불원한 장래에 북남정치인들을 평양에 다 청해놓고 건국정사를 의논하자고 하는데 거기에 김구 같은 이들도 꼭 참가시키고싶습니다.
정시명동지, 내 나라를 위해 흘린 지사들의 한방울의 피와 땀이라도 귀하게 여겨줍시다. 설사 그 길에서 어제날 우리에게 칼을 날렸다해도 애국의 뜻만 접수한다면 대의를 위해 새 조국건설에 동참시킵시다.
세계를 창조하겠다고 나선 우리 혁명투사들의 배포는 바다처럼 커야 합니다.
정시명동지! 우리는 시내가 되지 말고 대하가 됩시다! 바다가 됩시다!》
《장군님!》 정시명은 이렇게 열차게 부르짖으며 그이를 우러러 고개를 높이 들었다. 유난히도 이글거리는 그이의 안광이 정시명의 격동된 모습을 굽어보았다. 저 빛나는 눈길에 한없는 정감을 담으시고 겨레와 강토를 보살피신다. 저 아름답고 예지에 충만된 눈길로 이 땅에 태여난 모두를 헤아리시며 그들모두에게 락을 주시고저 대해같은 도량과 해와 같은 자애를 부어주신다.
(삼천만을 한품에 안고계시는 장군님!)
부지중 그의 마음속에 이러한 부르짖음이 뚜렷이 울렸다.
(아, 이분이시야말로 조선사람모두가 너나없이 운명을 선뜻 맡길수 있는 겨레의 어버이시구나. 이분의 마음속엔 그저 겨레의 오늘과 래일만이 꽉 들어차있구나. 삼천만인민, 삼천리강토를 안고계시는 태양과도 같은 품속에서 내 기꺼이 그 광휘를 받아 빛나는 하나의 별이 되리라.)
정시명은 서슴없이, 하지만 첫 사랑을 고백하는 젊은이들처럼 숫저운 마음으로 나직이 말씀드렸다.
《장군님! 제 한생을 장군님의 애국충신으로 변치 않고 살아가렵니다.》
그것은 장군님께 다지는 정시명의 서약이였다.
너무도 큰 행복과 목메여오르는 작별의 서러움을 가까스로 묵새기는 정시명의 떨리는 아뢰임에 장군님께서도 가슴이 확확 달아오르시는듯 격앙된 어조로 답례를 하시였다.
《정시명동지, 나는 정시명동지를 믿습니다. 이 밤을 우리 서로 잊지 맙시다.
우리, 겨레앞에서 애국충신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갑시다.》
장군님께서는 정시명의 손목을 꼭 잡으시였다. 수령과 전사의 불덩이같은 주먹들이 한동안 하나로 합쳐져 풀리지 않는다.
잠시후 장군님께서는 정시명이 담배를 즐겨하기에 물부리를 마련했는데 자신께서 쓰시던 회중시계도 상봉의 기념으로 받아달라고 하시면서 김정숙어머님께서 들고계시던 자그마한 자개함을 정시명의 손에 들려주시였다.
(함에는 상아물부리와 회중시계가 있었다.)
장군님께서는 마동열의 하직인사를 받으시며 심중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마동열동무, 내 동무에게 특별부탁을 하겠소.》
마동열이 6척장골을 쭉 펴고 차렷자세를 취하였다.
《동무는 첫째도 둘째도 정시명동지의 신변을 책임지는것이 자기의 임무라는것을 명심해야겠소. 이건 우리 혁명의 요구이고 나의 부탁이요.》
《장군님 명심하겠습니다.》
마동열이 기운차게 대답을 드리였다. 장군님의 그 특별부탁을 접하는 정시명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겠으나 목이 꽉 잠겨들어 고개만 깊이 숙이였다.
정시명과 마동열은 두분의 뜨거운 바래움속에 저택을 나섰다.
삼경이 지나서야 려관에 들어온 정시명은 담배를 연신 갈아대며 창가에 앉아서 밤을 새웠다.
마동열도 장군님께서 정시명에게 낮에 들려주신 가르치심을 들려달라고 부탁하고는 말떼기를 기다리며 날샐녘까지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동열이, 자네 지금 몇이던가?》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지던 이야기가 뚱단지같아 마동열이 흥심없이 대답했다.
《스물일곱입니다. 그건 어째서 묻습니까. 뭐 장가라도 들여주시겠습니까?》
《아 그래, 동열이 아직 총각이지… 스물일곱이라…》
마동열의 응석기 어린 대답에 여느때라면 맞장구 치며 웃었을 정시명이 이렇게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다시 담배 한대를 꺼내문다. 그가 다음말을 끝내 꺼내지 않자 기다리기에 지친 마동열은 그만 실망하여 잠자리에 들고말았다.
정시명은 네활개를 펴고 코나발을 불기 시작하는 마동열의 사내다운 모습을 이윽토록 지켜보다가 사뭇 부러워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사람아, 자넨 나보다 스무해는 장군님을 모시고 더 살아갈수 있으니 얼마나 복이 있는가… 참으로 내 인생도 허무하구나. 어찌하여 대륙의 광야에 한생을 바람같이 날려보내면서도 내 그렇듯 위대한분을 이제야 가까이 모시게 되였는가.》
다음날 마동열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또다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다 들려달라고 졸랐다.
《동열이도 함께 참가하지 않았나.》
《아니 낮에 하신 그분의 가르치심을 알고싶어그럽니다.》
《차차 이야기하지. 동열이가 장군님 만나뵈온 소감을 먼저 들려주지.》
《소감을요?… 글쎄요. 뭐 생각되는건 많은데… 난 이런 생각부터 했습니다. 우리의 장군님은 참으로 젊으셨구나, 그리고 위대하시구나, 이런 생각이… 아니 그것으로는 저의 심정을 다 이야기하지 못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시명이 마동열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지식과 수양으로썬 장군님의 인간상을 다 그려낼수 없어. 장군님은 지인용을 다 갖춘 영웅이시지. 그렇지… 력사의 변두리에서 짓눌려온 백의민족이 마침내 세기의 마루에 우뚝 솟아오른 희세의 영걸을 맞이했어.》
《그리고 전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심양에서 선생님을 괴롭혔던 그 아침을 생각했습니다.》
《심양의 아침?》
뜻밖의 소리에 정시명은 감회가 깊어졌다. 마동열에게가 아니라 실은 자기의 약해지는 마음을 분연히 꾸짖던 그 아침이 방불히 떠올랐다. 괴롭던 아침이였다. 추억에 아프게 새겨진 아침이였다.
《제가 그때 선생님의 뜻을 거역하였더라면 오늘의 영광을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전 장군님의 말씀을 새기면서 하마트면 큰 행복을 놓칠번 했다는 생각을 곱씹군 했습니다.》
《큰 행복이라… 허허… 좋은 말이야. 큰 행복이구말구. 나도 그런 생각을 했소. 민족의 재결합을 위한 사업에 자신을 바치기로 한 우리의 선택이 얼마나 천만다행이였는가 하고말이요. 사람이 제 생각에만 옴해서 살아서야 어떻게 행복이라 할수 있겠나. 사람이라 이름 가지면 누구나 나라걱정하며 살아야 되는건데 실은 이게 가벼운게 아니거든.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행복자라고 자랑할만 한 사람들은 못돼. 장군님의 뜻을 받든다는것만으로는 부족하거든. 난 어깨가 더 무거워지오. 우리가 과연 그런 큰 행복을 안고 살만 한 인간으로 되겠는가, 장군님은 나에게 삶의 의미와 목표를 비길데 없이 커다란것으로 세워주시였소. 겨레앞에 우리들을 거인으로 내세워주시려 마음을 쓰신단 말이요. 그러니 주시는 믿음에 실망을 얹어드리지 말아야겠는데…》
정시명은 다시 입을 꾹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동열은 정시명이 더 입을 열것 같지 않자 잠시 자리에서 궁싯거리다가 방안을 나섰다.
정시명은 눈송이가 소담히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두어깨에 산같은 무게가 덧실린듯싶다. 지금 그의 눈앞에 비껴드는것은 이제 서울에 나가 부닥칠 복잡다단한 상황이나 벌려나갈 투쟁에 대한 구상이 아니였다. 겨레앞에 애국충신으로 살자고 하시며 굳게 포옹해주시던 장군님의 인자하신 모습만이 꽉 차있을뿐이였다. 서울길에 오른 선택을 그렇게도 고마웁게 받아주시며 은정을 베푸시던 장군님의 말씀이 구절구절 되새겨졌다.
《애국충신!》
그는 입속으로 가만히 불러보았다.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 이 세상의 모든것을 합쳐도 그 소중한 칭호는 살수 없다. 바란다고 차례지는것도 아니고 주고싶다고 함부로 안겨주는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 인생에 겨레를 떠난 다른 생활이 끼여들수가 없다.
살아도 죽어도 장군님께 다진 약속을 지켜가는것이 곧 내 삶이요, 내 한생토록 세워두고 지켜가야 할 표대이다. 아니 마음의 거울이 돼야 한다. 걸음걸음이 나라에 유익한 행보가 되고있는가를 평가받자면 그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면 된다.
정시명은 품속에서 장군님께서 선물로 주신 상아물부리를 꺼냈다. 백옥같이 하얗고 정교한 세공장식을 한 물부리를 들여다보다가 담배를 꽂고 불을 달았다. 한모금 달게 들이켰다. 구수한 담배연기가 상아물부리를 거쳐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담배연기를 달게 삼켰다. 페장으로 구수한 연기가 적셔들었다. 정시명의 얼굴에 행복의 미소가 피여올랐다.
며칠후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정시명의 숙소에 고급양복천과 비단옷감, 식료품이 들어있는 트렁크를 보내오시였다. 정시명이 20여년만에 부모처자를 빈손으로 찾아가는것이 념려되시여 손수 마련하여주신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