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해발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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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지나 김일성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승용차가 왔다.

그런데 정시명을 안내하러 온 사람은 다름아닌 반년전에 헤여졌던 은송이였다.

《정향선생! 이게 얼마만이요?!》

《은송선생!》

그들은 너무도 뜻밖의 상봉에 감개무량하여 서로서로 끌어안고 볼을 맞비비였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장군님의 하해같은 사랑을 받으며 꿈같이 살고있지요. 아 참, 우리 장군님께서 이렇게 반가운 상봉을 마련해주시느라고 마음을 다심히 쓰시였군요. 두시간전에 저를 집무실에 불러주십디다. 해주에 가면 도보안서장이 기다리고있는데 거기서 귀한 손님을 모셔오라십디다. 그런데 그 귀한 손님이 이렇게 정향선생이실줄이야…》

은송은 그의 팔을 부여잡은채 연신 눈을 슴벅거린다. 그러나 그는 리진수의 앞에서도, 또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도 정시명의 생활과 사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만 줄곧 이야기를 하였다. 정향의 사업상특성을 고려하는 다심한 마음에서였다. 장군님의 품에서 받아안은 뜨거운 은정이며 인생의 봄맞이를 한 감격에 대하여 들려주는 은송의 이야기는 어떤 때는 그도 주체할수 없는 격정으로 간간이 토막나기도 하면서 평양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였다.

그들을 태운 자동차는 해방산기슭에 있는 당중앙청사앞에 멎었다.

정시명은 은송의 안내를 받으며 청사의 홀에 들어섰다.

순간 정시명은 우뚝 굳어졌다. 오매불망으로 그리워지던 젊으신 장군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마주 걸어나오시였던것이다.

《아, 정시명동지, 원로에 수고로이 오셨습니다.》

《장군님!》 정시명이 장군님앞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태양과도 같이 밝고 빛나는 모습앞에 서니 가슴속에 고이 묻어왔던 인사의 말은 어데로 잦아버리고 눈앞이 뿌잇해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넓으신 품에 그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말씀하시였다.

《정시명동지, 나는 오래전부터 동지를 보고싶었습니다. 이렇게 혈전만리를 헤치고왔으니 이제는 시름이 놓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나직하고도 잘 울리는 음성에 따뜻한 은정과 사랑을 담으신다.

그 마디마디가 정시명의 페부에 단비마냥 흘러들어온 몸을 포근하게 해주었다.

정시명은 마치 백년지기라도 만난듯 그렇게도 다감하고 허물없이 맞아주시는 장군님앞에서 가슴속이 깨끗이 정화되고 어려움도 가뭇없이 가시여졌다.

정시명은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서 삼가 옷깃을 여미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장군님, 백두산에서 풍찬로숙하시며 왜놈들과 싸우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였습니까? 칠성판에 올랐던 겨레의 운명을 구원해주신 장군님께 늦게나마 삼가 인사를 드리옵니다.》

정시명이 허리를 굽히는데 어느새 장군님의 애무어린 손길이 그의 허리를 안아주시였다.

《이러지 마십시오. 광복위업은 정시명동지와 같은 열혈애국충신들이 사생결단으로 싸웠기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의 참된 애국자답게 잘 싸웠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정시명동지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중국동지들의 감사전문을 받았습니다. 난 우리 인민의 자랑인 정시명동지를 이렇게 광복된 조국에서 만나 손잡고 일하게 된것이 정말 기쁩니다. 조선혁명가들의 존엄과 기개를 떨치고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좋습니까.》

《장군님, 겨레를 위해 바친것 없이 장군님의 치하를 이렇게 받으니 황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제 이제부터라도 장군님의 령을 받들어 내 나라의 애국충신이 되고저 합니다.》

《정시명동지, 우리 함께 사랑하는 내 나라 조선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합쳐 나갑시다.》

장군님께서는 다시금 정시명을 포옹하시며 그의 진정이 넘치는 맹세를 반갑게 받아주시였다.

《자, 어서 방으로 올라갑시다. 오늘은 정시명동지에게 전적으로 나의 시간을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헌헌히 웃으시며 정시명의 팔을 잡으시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시였다.

집무실에 들어서신 장군님께서는 정시명에게 자리를 권하신 다음 응접탁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바로 이 자리에서 남조선인민당 당수 려운형을 만나시고 서울에서 찾아온 수많은 인사들을 만났지만 정시명동지처럼 주의주장이 일맥상통하는 혁명동지를 만나기는 처음이라시면서 먼저 남조선정세와 관련한 정시명동지의 고견부터 듣고싶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정시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손을 저어 만류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담배를 무척 즐긴다는데 담배를 태우면서 격식없이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고 소탈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한없이 인자하시고 다심하신 그이의 인정미에 어쩔새없이 끌려든 정시명은 그이께서 내미는 담배를 받아들고 주춤거리다가 그이께서 켜주시는 성냥불까지 받아들고말았다.

장군님께서는 담배를 한모금 깊이 들이빠는 정시명의 모습에서 마음이 놓이시는듯 정다운 미소를 머금으시였다.

정시명은 이미 나름으로 분석하고 평가하여온 남조선정세를 개괄하고 지금까지 생각해온바를 서두름없이 차근차근 말씀드리기 시작하였다. 폭이 넓으면서도 주장이 뚜렷하고 론리정연한 그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 계속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이야기를 심중한 안색으로 들어주시였다. 때로는 수첩에 적어넣기도 하시고 때로는 정시명의 이야기를 긍정하시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시였다.

정시명이 이야기를 끝내자 그이께서는 못내 만족해하시면서 손수건으로 이마에 송글송글 내돋은 땀발을 자근자근 눌러 지우는 정시명에게 손수 유리고뿌에 물을 부어 권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그이께서는 원탁우에 놓여있는 커다란 지구의에로 다가가시여 세계를 한눈에 굽어보시듯 천천히 돌리시였다. 그이의 눈앞에서 온 세계가 자기를 드러내며 한바퀴 돌아갔다.

《정시명동지, 난 남조선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면 미국놈들에게 환상을 가지지 말라, 미국이라는 나라는 생겨나면서부터 우리 나라에 대포를 몰고 달려들어왔다고 말해줍니다. 지금 미국놈들이 겉으로는 이 나라에 좋은 일을 해줄듯이 떠들고있지만 우리 나라를 타고앉으려는 야심을 가리우기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놈들의 량면술책은 벌써 쏘미협상에서 드러났습니다.》

쏘미회담문제가 나오자 정시명은 저으기 긴장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 서울정계에서는 여론이 죽가마 끓듯 소란스럽다. 좌익권이나 우익권이나 이 문제에 대한 해석과 태도가 각양각색이다. 쏘미협상이 결렬되자 회담쌍방도 결렬책임을 서로 상대방에게 넘겨씌우고 거기에 따라 언론도 량쪽으로 갈라져 론전을 벌리고있다. 북쪽의 언론은 쏘미협상재개에 입을 모으고있다.

그러니 쏘미협상에 기대를 걸어도 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서울에 들어가서 여기에 심력을 바쳐나가야 한다. 그런데 정시명은 아무리 따져봐야 쏘미협상에서 큰것을 기대하는것은 부질없는 일 같다.

어느새 장군님께서도 정시명의 심중을 헤아리신듯 말씀을 멈추시였다.

《말씀하십시오. 정시명동지.》

《다른게 아니고…》

정시명은 인자하신 그이의 인품에 저도모르게 흠뻑 취해들어 무랍없이 심중을 헤쳐보이였다.

《지금 남조선의 좌익권에서도 쏘미협상과 관련하여 엇갈린 주장들이 무성합니다.》

《예, 리해됩니다.… 구태여 나의 립장을 밝힌다면… 원체 난 우리 문제를 놓고 대국들이 모여앉아 공론을 펴는것이 우리의 민족적자존심의 견지에서 기분이 나쁩니다. 고금동서로 세계의 정치사를 훑어보면 그 어느 시기 어느 나라도 저들의 리해관계를 떠나 남을 도와준 전례가 없습니다. 난 쏘미협상에서도 전적으로 우리의 민족적리해관계에 부합되는 결정이 나오리라고 생각해본적이 없습니다. 미국놈들이 끼여들고있는 회담에 그러한 기대를 거는것은 승냥이더러 삼켰던 먹이감을 도로 내놓을것을 바라는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쏘미회담문제에 주목을 돌려야 합니다. 쏘미회담을 열어놓고 미국놈들의 흉계를 들어내야 하며 이걸 기화로 못된 짓을 하지 않도록 각성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미국놈들이 조만간에 협상탁에 다시 끌려나올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장군님, 알겠습니다. 장군님의 고견에 접하니 명백해집니다. 저희들이 이 문제에 각성을 높여나가겠습니다.》

정시명은 서울정계에서 복잡하게 뒤엉켜 돌아가는 문제를 민족적존엄과 력사의 교훈으로 간명하게 풀어주시는 그이의 명철한 론리와 지성앞에서 가슴 뿌듯한것을 느끼며 말씀을 드리였다.

장군님께서는 만면에 함뿍 미소를 담으시고 감사의 정이 력력한 정시명의 모습을 일별하시다가 다시금 지구의를 천천히 돌리시였다. 밤색으로 표시한 미국이 나타나자 세우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생각깊으신 눈으로 그 자그마한 지도를 통해 워싱톤의 검은 속심을 투시하시듯 묵묵히 들여다보시였다.

정시명도 그이의 눈길을 따라 섰다.

그이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러면 미국놈들이 백년토록 굳혀온 제놈들의 정치적야망을 어떻게 실현하려 하겠는가.

첫 단계의 목표는 분명코 제놈들의 괴뢰들을 내세워 친미적인 정부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남조선을 타고앉으려고 할것입니다. 그러나 8. 15후 지금까지의 변혁과정은 미국놈들에게 그러한 기도가 망상이라는것을 깨우쳐주었습니다. 력사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고있는 이 나라 공산주의자들과 인민들의 결심과 힘을 비로소 리해하기 시작한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미국놈들이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고착되고 총선거에 의한 정부가 선다면 스스로 물러가겠는가? 천만입니다.

우리 나라에 대한 미국의 전략을 명확히 규정하자면 미국의 대외정책의 총적방향으로부터 고찰해야 합니다.

미국은 이미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극도로 쇠약해진 서유럽을 〈마샬안〉이라는 경제적공간을 리용하여 재빨리 거머쥐였습니다.

이제 멀지 않아 뛰르끼예와 그리스를 장악하기 위한 트루맨주의가 공포될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유라시아대륙의 서남쪽을 타고앉는 셈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다시 지구의를 천천히 돌리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두통거리는 여기 아시아입니다.》라고 하시며 아시아지역을 짚으시였다.

《벌써 미국은 남북전쟁을 종결하자마자 저들을 태평양국가라고 하면서 태평양연안을 제놈들의 지배속에 끌어넣기 위한 침략적인 교리로서 태평양주의라는것을 내놓았습니다. 미국놈들이 태평양을 제놈들의 호수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도적궤변이 바로 이러한 교리로부터 흘러나온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미국놈들에게는 태평양주의 꿈을 현실화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되였습니다.

이미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을 타고앉았고 남아시아지역에서는 필리핀을 타고앉았습니다. 여기 동남아시아에서도 자기의 진지를 확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의 이 전략에 따라 며칠전에 프랑스가 신생 윁남의 수도에 대한 전면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조만간에 미국놈들이 여기에 슬그머니 끼여들어 자기의 세력권을 확대하게 될것입니다.

다음은 여기 동북아시아에서 이 아시아대륙을 병탄하기 위한 정치, 군사적지탱점을 확보하려고 하는데 미국놈들이 100년전부터 눈독을 들이고있는 지역이 바로 우리 조선반도입니다. 조선땅에서 총 한방 쏘지 않고 정복자의 행세를 한다는 세계적인 비난과 조소를 받으면서도 남조선에 대군을 풀어놓은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놈들이 100년 숙원이 드디여 실현되게 된 지금에 와서 이미 타고앉은 진지를 내놓을수 있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천리혜안의 통찰력으로 세기를 이어온 미제의 오만한 세계전략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대조선정책의 정수를 투철하게 꿰뚫어보시고 흰종이에 선을 그어가시듯 명백하게 펼쳐주시였다. 그 빛나는 예지와 심오한 분석과 력사우에 흩날리는 파편과도 같은 개개 현상들을 하나의 끈으로 꿰들고 폭넓은 식견과 명철한 판단력으로 움직일수 없는 결론을 도출해내시는 그이의 가르치심에 정시명은 커다란 환희와도 같은 감동을 억제할수 없었다.

그이의 말씀은 시간이 흐를수록 복잡다단한 정치의 탁류를 걷어안고 넓은 폭과 심도를 가지고 도도히 굽이치기도 하시고 하나의 작은 세부에서 열백을 펼쳐보이는가 하면 열백의 서리서리 엉킨 정치의 삼검불을 하나의 명백하고 료연한 결론으로 풀어내기도 하신다.

말씀을 끊으시고 방안을 천천히 거니시던 장군님께서는 방 한쪽면을 가득채운 조선지도앞에서 걸음을 멈추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조국의 산천, 그 강토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민모두를 한품에 안아보시듯 그윽한 눈길로 지도를 들여다보시였다.

《민족의 분렬이라!…》 이윽고 그이의 크나큰 심려가 응축된 나직한 부르짖음이 방안의 숙연한 정적을 무겁게 흔들었다.

정시명이 남조선정세가 민족분렬에로 기울어지고있는데 대하여 분석적으로 말씀드렸는데 그이께서는 이미 통감하고계시는 문제였지만 다시 한번 커다란 비분을 느끼신것이였다.

《바로 이것이 미국놈들의 두번째 선택입니다. 이제 미국놈들이 갈길은 달리 될수 없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정시명에게로 돌아서시였다. 방금전까지도 자애에 넘쳐 아침해살을 받은 맑은 호수처럼 은은한 빛을 담고있던 그이의 안광에 추연한 빛이 서리였다.

《민족의 분렬!》 그이께서는 다시 격하신 어조로 되뇌이시였다.

《옳습니다. 우리가 백두산에서 장장 20년세월 험난한 불바다를 헤치면서도 꿈에도 생각해본적이 없던 너무도 절통한 민족적비극이 현실화되여가고있습니다. 정시명동지가 이 비극을 막기 위한 민족사적과제를 자기 몫으로 맡아안고저 한것은 우리 시대 공산주의자로서 애국자로서 너무도 응당하면서도 훌륭하고 의로운 립장입니다. 강토의 분렬을 허용한다면… 아니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방임한다면 그가 누구이든 리유불문하고 천추만대에 력사의 죄인으로 전해질것입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이 떨립니다.》

장군님께서는 다시금 숭엄한 눈길을 드시여 조국의 지도를 더듬으신다. 그 눈길에 한없이 절절한 빛이 어린다.

정시명도 그이를 우러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앞으로 다가갔다. 조국의 지도우에 점과 선과 색조로 표시된 무수한 산발들과 강과 바다와 마을들이 그이의 품속에 고즈넉이 안겨 숨쉬고 움직이는것만 같다.

《지금 미국놈들은 어떻게 하든지 쏘미협상을 결렬에로 몰아가려고 갖은 오그랑수를 다 쓰고있습니다. 무엇때문이겠습니까. 일본놈들을 대신하여 남조선을 깔고앉자는것입니다. 미국의 호전세력들은 공공연하게 38선을 압록강으로 끌어올려 대쏘방파제를 두만강과 압록강에 쌓아야 한다고 줴치고있습니다. 벌써 남조선에서도 심상치 않은 론조가 울려나오고있습니다. 얼마전 리범석이 반공광신자들의 회합에 나타나 뭐라고 했는가 하니 민족주의힘을 키워서 공산주의를 타승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조국광복을 자기의 피와 희생으로 안아온 우리가 압록강, 두만강을 미국의 방파제로 만들도록 내버려둘수 있으며 조국광복위업에 품한자루 들인게 없는 리범석따위에게 순순히 자기의 진지를 양보하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어데까지 치달아갈것 같습니까?》

그이께서는 잠시 말씀을 멈추시고 정시명에게로 묻는듯 한 눈길을 보내시였다. 그이의 안광에 순간 푸릿한 섬광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전쟁! 전쟁입니다.》

그이의 격노하신 음성이 방안을 쩌렁 울린다.

장군님의 명석한 분석과 정연한 론리, 불의에 대한 비타협적인 반석같은 담력에 접하는 순간 정시명의 뇌리에는 리범석의 안경을 쓴 길다란 상판이 피끗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조태준이 바로 《족청》의 실태를 보고할 때 리범석의 그 궤변을 이야기한적이 있었다. 그때 정시명은 그것을 남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리범석의 터밭가꾸기정도로 평가하였다. 장군님께서처럼 민족의 사활과 결부시키지는 못하였던것이다. 천리혜안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말씀을 듣고보니 리범석의 그 야심적인 망언이 얼마나 막중한 민족적재난을 예고하고있는가.

《이 땅에 전쟁의 포성이 울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고대로마의 철학자 쎄네가는 세상에서 오직 사람만이 전쟁을 한다고, 그 어느 짐승도 전쟁은 하지 않는다고 인류의 량심에 피맺힌 절규를 남겼습니다. 물론 우리는 전쟁 일반을 반대하지 않으며 전쟁에도 준비되여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내 나라, 내 겨레를 사랑하는 애국자라면 부모처자형제가 이편 저편으로 갈라져 류혈참극을 벌리고 선조의 유골이 묻혀있는 내 나라 산천에 불먼지가 날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아까 정시명동지는 골육상쟁을 대범죄라고 했는데 그것은 민족의 수치이기도 합니다. 천추에 씻지 못할 시대의 치욕입니다.

자고로 골육상쟁을 사촉하는것은 외세요, 거기에서 어부지리를 얻는것은 한줌도 못되는 민족반역의 집단입니다. 재생의 기쁨을 누려야 할 우리 인민과 강토를 외세와 권력에 환장한 민족반역자들의 롱락물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외세가 없고 평화롭고 자주적인 인민의 완전독립국가를 세워 삼천리강토우에 인민의 락원을 세우자! 이것이 우리의 구호입니다. 이것이 현단계에서 나라의 전도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구호가 되여야 한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과제를 놓고 모든 전술적인 문제들이 제기되고 풀려나가야 합니다.》

장군님의 가르치심이 계속될수록 정시명의 온넋은 애국애족으로 불타는 그이의 세계에 완전히 심취되여버렸다. 비범한 정치적안목으로 남조선의 제반문제들을 통찰하시고 천리혜안의 예지로 명확한 투쟁대강과 신묘한 전법을 밝히시는 그이의 가르치심을 정시명은 마치도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가슴에 차곡차곡 포개넣었다.

장군님께서는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적문제들에로 화제를 끌고나가시였다.

《오늘 우리 인민앞에는 완전독립국가건설에 역행하는 반동세력과 미제를 고립약화시키고 애국적인 세력들을 하나로 결집하여 외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한 투쟁에 주되는 힘을 돌려야 할 과업이 나서고있습니다.

정시명동지가 적구에서 민족적독립과 나라의 통일적발전을 저애하는 모든 력사의 반동들을 총포성이 없는 책략과 전술로 무자비하게 타격하겠다고 하는데 조직의 성격이 옳게 규정된것 같습니다. 전투적이며 탄력성이 있고 깊이 은페되여있으면서도 활동성이 강한 조직을 적소굴에 창설하여 그 개개 조직들이 조국의 운명과 민족의 사활을 지켜나선 멸적의 표대가 되게 하겠다는 정시명동지의 결심도 훌륭합니다.

나는 지금도 종종 우리가 백두산에서 벌려온 그 험난한 싸움을 돌이켜보군 합니다. 일본놈들이 창해일속이라고 떠들던 우리 혁명군이 어떻게 국가적지원도 공고한 후방도 없는 역경에서도 일제 백만대군을 쥐고 흔들며 마침내 조국광복을 안아올수 있었겠는가? 그 대답은 여러가지로 도출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비결은 그 대오가 조국광복성전에 피와 생명을 바치려는 민족의 우수한 아들딸들로 꾸려지고 하나의 사상과 의지와 규률로 뭉쳐진데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정시명동지가 벌리게 될 투쟁에 대하여 찍고 넘어갈수는 없습니다. 정세란 언제나 류동적이고 따라서 싸움도 림기응변이 되여야 합니다. 투쟁대상과 목표물도 정시명동지가 찾아내여 결심을 내릴것이고 투쟁전술과 방도도 정시명동지가 선택하게 될것입니다.

하지만 명백한것은 미제와 그 주구들이 이제 쏘미회담을 가지고 쏠라닥거릴것이며 회담을 걷어치운 다음에는 〈단선단정〉에로 나갈것이고 나라의 분렬을 위한 국제적공인을 조작하여 점차 힘의 방법으로 이 땅 전체를 타고앉으려고 할것이라는것입니다.》

《장군님, 모든것이 석연해집니다. 저는 서울 한복판에 떡 틀고앉아 미국놈들의 그러한 책동에 대처하여 배후에서 강력한 타격전을 벌리겠습니다. 이것을 총적과제로 내세우렵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 민족이 저에게 부여한 지상의 과제로 접수합니다.》

정시명은 힘과 열정에 넘치신 장군님의 말씀에 자리를 차고 일어나 허리를 쭉 펴고 흥분 어린 어조로 화답하였다.

《어려운 싸움입니다. 난 오랜 세월 이역에서 고생한 동지가 또다시 보다 어려운 적구에서 고생할걸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우리야 민족의 중임을 스스로 안고 목숨도 바치고저 나선 사람들이 아닙니까.》

장군님께서는 숯불처럼 이글거리는 정시명의 눈을 마주 보시다가 가까이 다가가시여 그의 두손을 덥석 잡으시였다. 그이의 목소리가 퍽 갈리시였다.

장군님의 따스한 온기가 정시명의 온몸에 뜨거운 격류가 되여 퍼져갔다.

정시명은 마냥 가슴이 후덥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터질듯 쾅쾅 소리내여 뛰는것 같았다.

그는 가까스로 벅차오르는 숨결을 누르고 말씀을 드리였다.

《장군님! 장군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마음 쓰지 말아주십시오. 제 일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다한들 나라의 대소사를 맡아안으실 장군님의 로고에 비기겠습니까. 저는 벌써 장군님의 전사로 살것을 굳이 희망하여왔는데 이젠 그 소원을 풀게 됐으니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정시명동지, 나는 동지에게 아무것도 드릴것이 없습니다. 하기야 우리야 모두 타향에서 구멍 뚫린 배낭만 하나씩 둘러메고왔지요. 그래도 빈손으로 어려운 싸움길로 돌려보내자니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장군님,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 빈손으로 왔다가 거창한 바다를 안고나가는 심정입니다. 인간이 커진다는 말이 비로소 실감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참, 장군님, 제가 한가지 소청을 드릴게 있습니다.》

정시명이 장군님의 소탈하신 인품에 끌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며 얼굴을 붉혔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저… 이제 서울에 나가면 아무래도 려운형도 만나고 홍명희도 만나고 큰 인물들과 사업을 해야 될것 같습니다. 그런즉 장군님의 파견장이라도 받아안았으면 합니다.》

《파견장말입니까?》

장군님께서는 정시명의 무랍없는 청을 반갑게 받으시며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담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가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래, 려운형선생도 만나야지요.… 그리워집니다. 두달가까이 지내봤는데 참 정이 가는분이였습니다. 사람이 강하면서도 솔직하고 주의주장이 분명하고… 요즈음 놈들의 테로도 여러번 당하고있다는데 걱정이 됩니다. 홍명희선생도 만나야지요. 그런데 파견장이 꼭 필요하겠습니까. 정시명동지가 서울에서 전투좌지를 차지한건 공산주의자로서, 애국자로서 자신이 선택한것인데 그 진정을 가지고 그들과 만나면 되지 않겠습니까. 욕심같아서는 나도 정시명동지를 여기 평양에 붙잡아두고 함께 지내고싶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애국애족대업에 몸을 바치고저 하는 정시명동지의 애국적결단을 막을수야 없지요. 정시명동지에게 내가 줄수 있는것은 동지적인 신임입니다.》 하시며 장군님께서는 정시명의 두손을 여전히 꼭 잡으신채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난 오늘 정시명동지와 처음으로 상봉하였지만 구면지기처럼 사상도 의지도 하나로 되여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이것이 나에게는 기쁘고 소중합니다.》

《장군님!》

정시명은 너무도 뜻밖의 다함없는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시는 장군님의 태양의 모습을 우러르며 나직이 부르짖었다. 순식간에 흉중을 꽉 메운 감격과 고마움을 터쳐올려야 되겠는데 그 심정을 집약할수 있는 적중한 말이 인차 떠오르지 않았다.

참으로 장군님께서 안겨주신 신임은 이 땅에서 장군님의 사상을 력사의 진리로 받들어 싸우는 혁명전사로서 세상에 다시 없을 정치적믿음이고 영광이였으며 가장 존엄있는 표창이기도 하였다.

장군님께서는 다시금 정시명의 두손을 포근히 감싸잡으신 손에 힘을 주신다.

그이의 따뜻한 온기가 주먹을 통하여 온몸에 포근히 흘러들었다.

《장군님! 장군님의 뜻을 받드는 길에서 내 한몸 다 바치겠습니다.》

《정시명동지!》

장군님께서는 정시명의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을 들으며 정깊은 미소를 담으신채 영채가 빛나는 안광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시였다. 크나큰 격정에 휩싸여 눈물짓는 정시명의 사람됨이 새삼스럽게 더 사랑이 가고 믿음이 가시였다.

그이께서는 정시명의 팔을 끼고 다시 쏘파에로 향하시였다. 마주앉아 시간을 보낼수록 더욱 아름답게 비쳐오고 정이 들게 한다. 그럴수록 정시명과 보내는 시간이 더없이 즐거우시였다.

그이께서는 정시명을 옆자리에 앉히시고 한결 밝고 유쾌한 음성으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정시명동지, 내가 어떻게 되여 만나자바람으로 우리의 훌륭한 동지로, 전우로 믿게 되였는지 고백할가요?》

《네?…》

정시명은 코마루가 찌르르해왔다.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정화시켜주시는 그이의 모습이 어찌도 인자하고 정에 겨운지 그저 목이 꺽 메여온다. 그이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아름다운 노래처럼, 정들은 어머니의 일깨움처럼 다정하게 울리였다.

《난 사실 조국에 돌아온 은송선생에게서 정시명동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때부터 무척 기다려왔습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해내외에서 들어오고있는데 개중에는 독립운동경력을 그 무슨 출세와 공명의 간판으로 내드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인민은 어려운 시절에 나라 위해 바친 선각자들의 공로를 매우 공정하게 평가하고 새 사회 건설에서 지도적위치에서 사업하도록 기회를 마련해주고있습니다. 사실상 해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와 땀을 바친 그들이 광복된 조국에 와서 행복을 누리고 국가건설의 중임을 담당하는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중국에서 나온 동무들중에도 우리 가까이에서 일하는 동무들이 여럿이 되는데 일을 잘합니다. 은송선생도 지금 통일전선사업에서 중임을 맡아가지고 일을 잘합니다.

그런데 정시명동지는 자기에게 차례질 이 모든것을 다 버리고 우리 민족앞에 놓여진 새롭고도 복잡한 투쟁과제를 스스로 맡아안았습니다. 이게 말이 쉽지 누구나 할수 있는 범상한 선택입니까. 서울에서의 투쟁은 정시명동지도 예상하고있지만 그 강도나 폭에 있어서 더욱 거창하고 준엄합니다. 사실 지금 북조선에서 민주기지를 창설하는것도 중요하고 절박하지만 우리 혁명의 전략적견지에서 볼 때 통일적인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한 지반을 닦는 사업은 한시도 늦춰서는 안될 초미의 과제입니다.

정말 어떤 때는 서울소식이 하도 답답해서 내가 직접 서울에 나가 일하고싶은 생각이 들군 합니다.

분명 남조선사업은 보다 어렵고 복잡한 성격을 띠고있습니다.

그런데 오랜기간 투쟁속에서 세련되고 준비된 정시명동지가 8. 15가 가져온 복과 영광을 흔연히 마다하고 기꺼이 그쪽으로 간다고 전해왔습니다. 그 뜻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던지… 난 눈물이 났습니다. 감동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그래 은송선생을 만나고나서 김책동무에게 자랑을 했지요. 자, 봐라. 우리 나라에 이런 훌륭한 애국자도 있다, 우리에게 또 한명의 전우가 생겨났다,

이게 진짜 조선의 혁명가다.…

김책동무도 얼마나 감동이 컸던지 눈물이 글썽해서 한마디 하는 소리가 걸작이였지요. 〈하, 안중근이, 리준이 막다른 골목에서 나라 위해 제 몸을 던졌는데 그 량반은 고생살이를 만들어가지고 투신각오를 했습니다. 정말 헐치 않은 동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만나자마자 뜻도 마음도 하나가 되였습니다.

그러니 정시명동지, 동지에 대한 나의 믿음이 우연이겠습니까.》

《장군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의 선택이 쉽게 이루어진것은 아닙니다. 고민도 컸고 동요도 있었습니다. 장군님께서 저의 마땅한 선택을 이렇게도 소중하게 여겨주시고 과찬의 말씀을 해주시니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장군님의 높으신 뜻을 따르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만면에 그윽한 미소를 담으시고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정시명의 두볼에서는 저도 의식할 겨를이 없이 더운 눈물이 이랑을 짓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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