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해발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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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시계가 방금 한점을 때렸다.
마동열의 북상길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있던 정시명은 대문을 조심히 여는 소리에 상반신을 일으켜세우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일행이 나다니는 곳은 각이하여도 이 시간에 밖으로 다닐 사람은 없었다. 정시명이 찬찬히 내려다보니 예닐곱의 시커먼 형체가 대문쪽에 얼씬얼씬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머리칼이 오싹해졌다. 이어서 아래층 문들이 벌컥벌컥 여닫기는 소리가 나고 구두발소리가 2층으로 접근하고있었다. 정시명은 겉옷을 대강 걸치였다. 그리고 미닫이로 된 나들문을 벌컥 열며 《웬 놈들이냐?》하고 벽력같이 소리질렀다.
그러자 전지불들이 일시에 얼굴에 와닿았다.
《령감님. 미안합니다.》
대령옷을 걸친 정시명의 노기서린 기상에서 다소 주눅이 들었던지 한놈의 경찰이 이렇게 말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그놈은 전지불로 먼저 제놈의 어깨에 붙어있는 경찰계급장을 비쳐보이고 이어 증명서를 꺼내보였다. 중부경찰서의 형사놈들이였다.
《도대체 깊은 밤중에 웬일이요?》
정시명은 복도에 나가서 물었다.
《쏘련대표부와 접선을 시도하는 수상한자가 이 집에 드나들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령감님은 이 집의 가장이십니까?》
《아니 그렇지 않소. 다섯세대가 살고있소.》
정시명이 선뜻 짚이는데가 있었다. 리창순이 끝내 일을 친 모양이다. 리창순에게 차례진 자리가 량곡도매소 회계원이 틀림없는데 요새는 어디서 얻었는지 중절모에 신사복을 입고다녔다. 여러번 충고를 받고도 일행중에서 이색적인 냄새를 풍기는 버릇은 끝내 못고친다고 생각해왔는데 쏘련대표부에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령감님, 집사람들을 확인해주십시오.》
《그럽시다.》
정시명이 경찰들의 요구에 쾌히 응해나섰다.
아니나다를세라 리창순의 방에 가니 그는 없고 처와 아이들이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떨고있었다. 강릉에서 살던 그들은 얼마전에 남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보따리를 꿍져들고 서울에 왔었다.
《이 집 주인은 자주 나가군 합니까?》
《글쎄 장사질들을 하며 살아가자니 이따금 촌에 가서 물건들을 구해오지요. 나도 래일쯤은 장사일로 집을 뜨자던 참이였소.》
《령감님도 장사를 하시오?》
《어떻게 하겠소. 먹고살아야겠으니… 양복상회나 하나 꾸려볼가 하오.》
정시명이 말나가는대로 대답을 붙였는데 입밖에 뱉아놓고보니 그럴듯 했다. 앞으로 자신도 사업에 필요한 직업을 가져야 했다. 양복천도매점 같은것을 벌려놓으면 그 매매를 위해 여러 지역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닐수 있고 장차 기업을 확대하면 외국에까지 문을 열고나갈수 있을것 같다.
《그런데 이 집은 누구의 인가를 받으시였소?》
아직 장사일도 크게 못하는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는 큰집을 쓰고사는게 괴상쩍은 모양이였다.
정시명은 시끄러운 생각이 들어 큰소리로 일축해버렸다.
《미군정청 통위부장 류동명한테 가서 물어보오. 난 몰라.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고들어.》
이 말투에 높은 권력의 입김이 확연히 느껴졌다.
《아, 그렇습니까.… 편히 쉬십시오.》
놈들은 대번에 안색이 달라져 황급히 인사를 남기고는 제놈들끼리 투덜거리며 대문을 나섰다.
《어찌된 일이요? 주인은 어데 갔소?》
그놈들이 사라지자 정시명이 리창순의 처에게 물었다.
녀인이 입안소리로 웅얼거리는데 어느새엔가 어둠속에서 리창순이 엉거주춤거리며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리창순이 큰 허우대를 구부정해가지고 그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섰다.
정시명은 그의 처와 자식들을 방안에 들여보내 놓고 자기 방으로 데리고갔다.
《당신이 경찰들이 찾아온 그 수상한자가 맞소? 쏘련대표부에 드나들었다고 하더군.》
리창순은 입을 다물고있다가 재차 물어서야 일자리때문에 쏘련대표부의 성원들과 몇번 만났다고 실토했다. 그러니 그때부터 리창순이 경찰의 미행을 당해온 모양이다. 각성이 없는것은 둘째치고 살림살이걱정까지 해주는 자기와 상론도 없이 그만큼 위험성을 이야기해주었건만 쏘련대표부를 찾아다닌 그의 소행이 여간만 괘씸하지 않았다. 원체 정시명은 그를 사업에 인입하는 문제를 두고 지금까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저울질해왔다. 큰 체통에다 이목구비가 번듯한게 호인같은 인상을 주는데 사귀여보면 사람이 개차반이였다. 언행에 그늘진게 많고 안팎이 다르고 우물우물거리며 엉큼한게 도무지 믿음이 안가고 정이 들지 않았다. 예전에 김송일이 뭘보고 천거했는지 딱히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언젠가 리창순이 언듯 하는 말에 처가켠의 밭은 친척이라고 했다.
《자네에게 여러번 타일렀는데 오늘은 경찰들까지 꼬리에 달고다니니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우린 자네의 생활에 대하여 더는 간섭을 하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 역시 일행을 위해 자중하거나 물러나야 하겠네. 둘중의 하나를 택하게.》
정시명은 그의 행동이 뒤날에 기회주의적인간으로 전락될수 있다는것을 벌써 예감해왔던지라 이 기회에 아예 일행 가까이에서 제거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재간있는 원예사는 병든 나무를 살려내는 재간도 있어야지만 쓸모가 없는 가지는 제때에 잘라던지는 재간도 있어야 한다.
리창순은 정시명의 싸늘한 어조에서 그의 의도를 판단하였던지 《죄송합니다.》하고는 방안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며칠후 리창순은 왕십리쪽에 세방을 얻었다면서 손달구지를 끌고와서 얼마 안되는 가장집물을 싣고 나가버렸다. 그런데 얼마후에는 리창순이 끝내 체포되여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말이 전해져왔다. 쏘련대표부근처에서 체포되였다는것을 보니 또 그곳에 들락날락한 모양이다.
뜻밖의 봉변에서 정시명은 여러가지 교훈을 찾았다. 앞으로도 이처럼 허무맹랑한 사고를 저지를수도 있다. 한 사람의 부주의가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을수 있는것이다. 자신과 동지들의 위장을 더욱 빈틈없이 해야 되겠다고 재삼 마음에 다지였다. 상해파라는 큰 그늘이 있다고는 하지만 놈들의 수사진의 눈초리를 멀게 하자면 놈들에게 사소한 언질도 주지 않도록 각자가 직업과 거주, 자금출처 등 모든 사업과 생활이 정정당당한 근거를 가지고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누구에게나 알려져있어야 하며 사회의 합법적인 인정을 받을수 있는 직업부터 가져야 한다. 정시명은 애국적인 조직을 국내 각지에 뻗어가게 하기 위하여 피복상사를 시급히 조직하며 동시에 서울시안에서의 활동보장을 위해 남자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수 있는 리발관이나 녀자들이 무시로 찾아드는 미용원 그리고 책방이나 식당같은것을 여러개 내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교훈은 이것뿐이 아니였다. 이 혼란된 정세속에서도 놈들의 수사망이 졸지 않고있다는것이다. 미제는 일제의 통치체계를 청산하면서도 경찰만은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계속 유지하였다. 놈들은 미군정청에 경무국을 설치하고 일제시기의 경찰력량을 고스란히 넘겨받아 보존하면서 그것을 골간으로 폭압력량을 확대시켜 와해상태에 처하였던 사찰, 폭압기관들을 짧은 시일안에 부활시켰다. 당시 경찰력량만 하여도 3만 5천명이였다. 10월인민항쟁후 좌익력량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한 미제와 반동들은 이미 남조선민애청과 남조선로동당을 비법화하였으며 남조선전역에 걸치는 폭압체계를 재정비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적들의 수사폭압망에 붉은 보루를 쌓아야 할것이며 그를 통하여 적의 수사기도를 손금보듯 장악하고 사전에 적발, 분쇄해야 할것이다.
정시명은 자신과 전우들의 일거일동이 높은 대적관념의 견지에서 보다 치밀하게 진행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깊이 하였다. 리창순이처럼 벌써 오래전부터 자기를 미행하고있는것도 모르고 움직인다면 놈들과의 대결에서 첫 걸음부터 수세에 빠지고 말것이다.
정시명은 실천에 달라붙었다. 고무공장을 경영하는 김승원에게서 자금을 구해가지고 림인석에게는 리발소를 맡기고 그의 처에게는 미용원을 꾸리도록 하였다.
림인석의 처는 중국에서 녀자사범학교까지 졸업한 녀성으로서 학식도 있고 활동력도 있어서 정시명이 몇번 사업에 인입했던 일도 있었다.
마동열에게는 지방특산물을 받아 운영하는 자그마한 식당을 마련해주기로 하였다. 련락사업을 담당했으니 마땅한 직업일수 있었다.
피복상회는 정시명이 꾸리기로 하였다. 마침 김승원으로부터 서울시안의 천공급을 맡아보던 천도매소가 자금난으로 파산직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 천도매소는 남조선의 여러 도시들과 련계를 맺고 서울시안의 여러 상점들에 공급하는 고급천의 절대다수량을 다루고있는 큰 상사였다. 이 천도매소를 접수하여 옳게 움직인다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것 같았다.
정시명은 림인석으로 하여금 천도매소의 주인을 만나 넘겨받기 위한 실무적인 거래를 하게 하고 부족되는 자금을 해결하기 위하여 송호정을 찾아갔다.
마침 그 자리에 류동명이도 와있다가 정시명이 들어서자 반색을 하였다.
장사를 하겠다는 정시명의 말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정향선생이 장사치가 되겠다니 이게 실성한 소리가 아니요?!》
류동명이 하는 소리였다. 은근히 노염이 생겼던것이다. 통위부의 고문으로 돼서 이끌어달라고 부탁한것이 며칠전의 일이다. 그런데 돌아앉아서 장사노릇할 생각이나 하다니.…
《가당치 않은 소리! 송장내가 나는 리승만이 정사를 틀어쥐겠노라 오금에 바람을 일쿠며 바재이는데 정향형이 그래 항간에 주저앉아버리겠다니 이거야말로 공산당의 말투로 하면 정치전향이요, 타락이 아닌가, 엉?》
송호정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너무 그렇게 나를 과대평가하지 마오. 그래 뭐 나에게 대통령감투라도 씌워주려나, 허허…》 정시명이 껄껄 웃었다.
《여보게 이사람, 다시 생각해보게. 정향같은 인재가 정계에서 사라진다는것은 국력의 랑비라는걸 알아주게. 안될 말이요.》
류동명이 여전히 혀를 차며 달래듯 말하였다.
《자네가 대통령감투를 쓰지 못할 리유가 뭔가. 지금의 혼미한 시국이야말로 자네를 부르고있네. 안돼. 장사치가 될것 같으면 난 한푼도 내줄수 없어!》
송호정이 화가 나서 피대를 돋구었다.
정시명이 여느때 같으면 그들의 호의가 반가웠겠지만 지금은 거기에 마음을 쓸 계제가 아니였다.
《사람이 나서 제 분수에 어울리게 지내야지 어찌 팔자에 없는 부귀영화를 바라거나 명성을 원하겠소. 내 이제까지 남들의 손에 얹혀 밥을 먹어왔는데 여생이나마 식객노릇을 덜가 하니 그리 아시고 도와주오.》
류동명이, 송호정이 다같이 혀를 끌끌 차면서도 정시명의 요구가 끈질겨 성의껏 돈을 모아주었다.
며칠후에 동대문 네거리에 《흥국상회》라는 간판을 크게 써붙인 고급천도매상사가 나오고 시청에 그 주인이름이 정향으로 정식 등록되였다. 종로구와 마포구에 련이어 명월이라는 림인석의 처의 이름을 단 미용원과 다방이 생겨나고 서울운동장 남쪽 모서리에는 고급리발소인 문화리발관이 개업을 하였다.
이것은 정시명이 서울에 창설한 첫 사업거점들이였다.
이렇게 되자 중국에서 정시명에 대하여 알고있는 사람들속에서 정향이 이젠 정치와는 담을 쌓고 조용히 돈을 벌며 살아가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갔다.
평양정권에 큰 자리를 선통해보았는데 랭대를 당했다는 터무니없는 랑설도 돌아갔다. 그 화풀이로 고향에도 가지 않고 서울에 들어와 장사를 시작했다는것이다. 정시명의 인품과 영향력에는 크게 그늘이 지게 하는 소문이였지만 터전을 다지는데는 더없이 고마운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