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해발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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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유난히 맑은 어느 일요일 아침, 정시명은 마동열을 조용히 불렀다.

《우리도 평양으로 떠납시다. 동열이가 먼저 갔다 와야겠소.》

그의 목소리에는 여느때없이 흥분이 어려있었다.

《알겠습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기를 바라는 정시명의 요구에 습관되여온 마동열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당장 떠날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덤비지 마오.》

정시명은 그를 손짓으로 눌러앉히고 잠시 마동열의 밝아진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

《오후 4시까지 출발준비를 완료하시오. 난 오후 4시에 창경원 앵무새집 앞에 있겠소.》

정시명은 이날 점심시간에 《국방경비대》사령관인 송호정의 초대로 창경원 야유회에 가게 되였던것이다.

송호정은 장개석의 휘하에서 중령으로 있으면서도 《림정》계사업에 깊이 관여해오다가 귀국도 김구와 함께 한 민족주의거두들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림정》집단의 다른 중진인물들과는 년령상으로 퍽 아래인 쉰살안팎인데다 경향도 진취적인것으로 하여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민족의 래일을 대표하는 인물로 믿고 의식적으로 가까이 접근하여 왔었다. 그는 어려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으로 정의감이 강하고 지조가 높은 사람이였다. 일찌기 청화대학을 졸업한 송호정은 대세의 추이에도 민감하였으며 시대적사조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손문의 삼민주의나 맑스나 레닌의 저서들도 열심히 탐독하였다.

정시명은 벌써 오래전에 송호정의 사람됨을 정확히 포착하고 그와 인간적으로 깊이 사귀여왔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적으로 너나들이로 상종하군 하였는데 송호정의 처와 그의 자녀들도 정시명을 집안사람처럼 허물없이 정을 주고 지내온다. 서울에 온후 정시명은 송호정과 여러번 마주 앉았는데 바쁜 사람이라 깊이있는 이야기는 나누어보지 못하였다.

벌써 솔문장식을 한 창경원어귀인 흥화문에서 송호정과 그의 가족들이 정시명을 기다리고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웬일이요? 나무잎이 다 졌는데 야유회는 무슨 야유회요?》

정시명이 마주 걸어오는 송호정의 어깨를 무랍없이 건드리며 인사를 건네였다.

《아니, 야유회가 아니라 단풍놀이지, 저 사람이 어찌나 보채는지 추석때부터 단풍놀이 가자는걸 일에 몰려 못갔더니 조국에서의 첫 가을을 그냥 보낼수가 없다누만.》

《사령관에게는 좀 어울리지는 않지만 아주머님의 정성은 과히 이를만 합니다.》

정시명이 매달리는 송호정의 아들딸들과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송호정의 처를 둘러보며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저 량반이 언제 제 말 듣는답니까. 그래 부관더러 수를 내보라고 했더니 이렇게 모셔왔구만요.》

사실은 송호정의 처가 어제 저녁 아들을 시켜 정시명에게 야유회에 와달라는 부탁을 전하게 하고는 송호정의 부관에게는 정향선생이 래일 창경원에 휴식하러 가자고 한다고 이야기해 보냈던것이다. 안해의 수에 걸려든 송호정이 정향이 온다는 소리에 더는 어쩌지 못하고 만사를 미루고 창경원에 나타난것이다.

정시명이 남조선권력집단의 중추에 올라 벌써 안락한 생활에 재미를 붙인 송호정부처의 호의에 기꺼이 응해나선것은 그를 앞으로 남조선군부와의 사업을 위한 중요인물로 점을 찍어놓았기때문이였다. 남조선군부상층을 장악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인물은 미군정청 《통위부장》 류동명과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정이였다.

그들중 류동명은 인간적으로는 정시명에게 흠뻑 반해있으면서도 완미한 민족주의자로서의 고집은 좀체로 버릴 위인이 아니였다. 한때 중국에서 리청천에 앞서 《광복군》사령관으로 있을 때 공산주의파쟁군들과 행세식 사회주의자들의 모략과 권모술수를 많이 체험한 류동명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좋지 않게 보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시명만은 배척하지 않고 오랜 세월 깊이 사귀여왔는데 그 리유에 대하여 동료들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정향이 무슨 공산주의자인가, 그는 애국지사요, 조선독립운동의 거물이다. 정선생이 설사 공산주의자라 해도 난 그만큼 도량이 크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그런 의사를 지기로 둔것을 기꺼이 자랑한다. 정향에게 견줄만 한 광복투사를 어디 내세워보라.》

정시명은 류동명이는 당면해서는 사업에 직접 인입하지 않으면서 리용하려고 계획하고 그와의 사업을 더 전진시키지 않았다. 송호정이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보다 적극적인 공산주의동정자로, 나아가서는 앞으로 출현할 애국적인 군사조직의 핵심으로 개조하여 같이 손잡고 일하고싶었다. 그것뿐이 아니였다. 송호정이 미국놈의 앞잡이로 되여가는것을 곁에서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그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그것은 의리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군부의 실력자인 송호정과의 사업을 첫 사업으로 내세운데는 그밖의 절박한 사정도 있었다. 그를 애국의 길에 돌려세우면 권력기관의 기둥으로 기틀이 잡혀가고있는 군집단을 무력화시키거나 인민의 편에 가까이 접근시켜 자주독립지향력량의 진출과 재편성과정을 측면에서 지원해줄수 있다는것이였다.

정시명이 들은데 의하면 지금까지는 군집단이 인민탄압에 직접 동원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군부가 자기의 조직구조를 완성하면 반드시 미국놈들의 총알받이로, 반북대결과 인민탄압의 도구로 리용되리라는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정시명은 우선 그 우두머리로 있는 송호정부터 단단히 틀어쥐고 군의 반동화에 가능한껏 제동을 걸어 일정한 기간만이라도 남조선에서의 통일세력의 재편성과정을 촉진시키는데 도움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날 정시명은 볕이 좋은 창경원의 아늑한 잔디밭에서 송호정가족과 다과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시명이 한담을 주고받다가 우스개소리로 《나를 위해서도 사령관노릇을 길게 하게나.》하자 송호정은 벌컥 화를 냈다.

《만주패들때문에 못해먹겠어. 일본놈들 사타구니에 끼여 개질을 하던것들이 어떻게 신성한 국방에 기여들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당시 미제는 사령관자리에는 내외의 여론을 타산하여 명색이나마 항일을 표방했던 장개석군의 중령 송호정을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실권은 관동군출신의 장교들이 좌지우지하도록 세력균형을 이루어놓았다.

《만저우패들?… 전범죄를 지은자들이 어떻게 광복된 오늘에 국방보위에 주력으로 나섰는가?》

정시명도 송호정의 각성을 높여주기 위하여 맞장구를 쳤다.

《그게 이 남쪽의 독립선물이라는거야. 정형은 아직도 모르고있군. 광복은 무슨 광복이야, 송호정이 뭐 머리속이 맑아져서 이 벙거지를 썼는줄 아나?》

《송형, 자넨 점점 아리숭한 소리만 하는구려. 그럼 자넨 만저우패의 꼭두각시가 됐단 말인가?》

《차라리 만저우패의 꼭두각시라면 좋기나 하겠네. 그건 그래도 동족이 아닌가. 내 지금 일일보고는 미군고문한테 하네. 그 녀석은 새파란 중령놈인데 이건 사무실에 들어가도 앉으라는 소리도 없이 턱질이지. 림정의 참모총장 류동명장군신세도 하지손아귀에 있다는걸 정말 모르는가? 거기에도 손아래에서는 만저우패가 득세하네.》

정시명은 입가에서 웃음을 거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송호정의 기분상태로 보나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보나 이대로 가다가는 그 자리를 얼마 유지못할것 같다. 그래 심각한 어조로 충고를 하였다.

《송형, 정신 차리게. 이 어지러운 정국에 자네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 다른 놈은 몰라도 참모장만은 기맥이 통하는 측근으로 앉혀놓고 틀어쥐게. 신통치 않으면 몰아내게나. 막중한 자리에 앉아있을수록 곁에 살을 나눌만 한 인물을 두고있어야지 껄렁한 친구를 앉혀놓으면 만사를 그르치네. 내 오늘 진심으로 권고하네. 송형은 사령관자리를 지켜야 하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이 남쪽땅을 지키기 위해서지.… 다시한번 당부하네만 참모장을 틀어쥐라구. 그가 만저우패라고 해도 무방하네. 사령부안에서 참모장을 내세워 송형의 지반을 닦아야 하네. 바닥이 단단하면 물도 새지 않을걸세. 그리고 이걸 생각하라구. 사람을 사귀면서 광복전의 과거사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구. 내 두루 생각해보니 광복후 이 남쪽땅의 세력구조나 의식구조가 새롭게 형성되고있네. 틀림이 없거던. 어제날엔 무산혁명을 위한다고 돌아치던 사람이 권력과 치부의 노란자위를 삼키려고 분별을 잃고 뛰는가 하면 일제의 기관에 붙어살던 사람이 광복된 조국에서 자기를 속죄하면서 바른길을 찾느라고 애쓰기도 하네. 과거사는 새 벗을 사귀는데서 참고는 되겠지만 기준으로 되여서는 랑패야.》

송호정이 예나제나 다름없이 진정에 넘치면서도 쉽게 공감을 갖게 하는 정시명의 사리정연한 조언을 심중히 받아들이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였다.

송호정은 이날 수하에 있는 문제성있는 요직인물들과 그와 관계하고있는 인물들에 대한 자료를 구체적으로 털어놓으면서 그의 조언을 요구하였다.

정시명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자 앞날이 더욱 걱정스러워졌다.

그가 현 위치에서 밀려난다면 두말할것 없이 크게 랑패다. 앞으로 군부의 요직을 차지하게 될 인물들중에서 송호정만한 믿음직한 사람을 찾기는 힘든것이다. 그래 정시명은 송호정이 제기한 문제들에 일일이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다가 마동열과 약속한 시간이 되여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앞으로 자주 만나 사업토론을 할것을 약속하고 송호정의 일가와 헤여졌다.

오후 네시 정각에 마동열이 구경군들속에 끼여 앵무새집에 나타났다.

그들은 창경원숲속에 있는 휴식장으로 갔다. 이미 꽃밭을 말끔히 거두어버리고 잎새 떨어진 나무가지들만이 앙상하게 서있는 곳이였지만 그래도 창경원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 휴식장은 인산인해였다.

《준비가 다 되였소?》

《예.》

《우리의 도착보고를 드리는것이 마동무의 임무요. 38선 어느 지점을 통과하겠소?》

《저…》

마동열이 우물쭈물하였다.

《개성에 가서 장사군들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군.》

정시명이 엄하게 나무랬다.

《목표가 똑똑치 않은 화살이 명중될리 만무요. 중요한 임무를 맡고가는데 평양까지 며칠동안 가며 어느 경로를 어떤 방법으로 통과하겠다는 구체적인 타산이 있어야지. 여기가 적구라는걸 잊은게 아니요? 자기가 하는 일에 신심이 없을 때는 애초에 나서지 말아야 해. 서울장안에 대북장사군들이 수두룩한데 왜 한두명 만나서 사전료해를 하지 않았소.》

《잘못하였습니다. 이제 곧 나가서 장사군들을 만나겠습니다.》

워낙 천성이 고지식하고 가식이 없는 마동열은 정시명의 엄한 질책에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잘못을 뉘우치였다.

《내 말을 듣소. 개성행렬차는 서울역에서 오후 5시반에 떠나는데 개찰은 20분전에 하게 되오.》

정시명은 송호정을 만나기에 앞서 서울마포시장에 들려 장사군을 통해 북반부로 들어가는 밀로를 료해한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들려주었다.

평양까지 들어가는 로상에서 생길수 있는 여러가지 정황들도 이야기해주고 그를 극복한 장사군들의 경험에 대해서도 실감있게 들려주었다. 도중에 숙박할수 있는 려관과 해당 려관들의 숙식실태까지 설명하면서 황해도지방에 악성감기가 돌고있으니 주의하라는 말도 해주었다.

《자신이 생깁니다.》

마동열이 뒤덜미를 슬슬 문다지며 입가에 어줍은 웃음을 담으면서도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정시명은 출발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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