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구름깔린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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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전에 왜놈의 관사로 리용되여왔던 서소문동의 집은 2층건물로 그들이 살아가기에는 족하였다.
일행은 류동명이 구해준 그 집으로 이사하여 세대별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직업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가지고있는 돈을 밑천으로 서울시장에 나가 장사를 시작하도록 했다.
그런데 일행중에서 리창순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광복된 제나라땅에 와서까지 비누장사요, 남새장사요 구차스럽다는것이였다. 그래 평소에 리창순을 마뜩지 않게 보아온 마동열이 《국일관》에 가서 기둥서방노릇이라도 할셈인가고 핀잔을 주자 젊은놈이 고약하다고 눈을 부라리였다. 정시명이 며칠동안만 각자 호구대책을 세우는것이라고 달래였지만 막무가내였다.
이틀후에 례영이가 쏘련대표부앞에서 리창순이 어슬렁거리는것을 보고 마동열에게 이야기하였다.
당시 평양과 서울에는 쏘미공동위원회 사업보장을 위해 각각 대표부를 두고있었다. 그런데 미국놈들이 서울에 설치된 쏘련대표부성원들이 남조선의 좌익정당들을 조종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돌리면서 집요하게 미행감시하고있었다.
마동열이 대뜸 성이 돋쳐 《어쩔셈이요, 미군정의 치하에서 쏘련대표부와 거래하다가 수갑을 차려고 안달이요?》하고 투박하게 쏘아붙였다.
《내 입구멍은 내가 책임지는거야.》
리창순이 묵묵히 앉아있는 정시명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다가 대답했다. 로어재간을 써먹으려고 쏘련대표부에서 일자리를 찾는것이 틀림없었다.
정시명이 마동열의 말이 옳다고 긍정하였다.
여럿의 핀잔에 리창순은 하는수 없는듯 덤덤해있다가 고개만 끄덕거리였다.
정시명은 일행을 이미 터를 잡은 전우들에게 하나씩 붙여주어 일자리를 얻게 해주었다. 례영이는 타자수강습소에 들여보내여 타자를 배우도록 하였다.
슬픔을 이겨내기 힘들어 언제나 다소곳이 고개만 떨구고 뒤자리만 찾던 처녀는 새로운 일거리에 재미를 붙이자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리창순이도 량곡도매소 회계원자리가 차례졌는데 그리 달가운 기색은 없어도 림시적이라는 말에 때를 기다려볼 심산으로 불만을 새기는것 같았다.
일행의 거처와 생활대책까지 세워지자 정시명은 남조선정세를 파악하는데 힘을 넣었다. 김승원이나 기타 정세에 대한 연구가 깊은 사람들을 만나 정세문제를 놓고 의견교환도 자주 진행하였다. 어떤 날에는 서울도서관에 해종일 틀고앉아서 점심도 건느면서 신문과 잡지에 붙박혀있기도 했다.
조만간에 반동세력이 미제의 비호밑에 자기의 대오를 정비하고 사회전반에 대한 통치기능을 장악할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시간은 확실하게 반동들에게 유리하게 흐르고있었다.
남조선사회의 암담해지는 실태를 파헤칠수록 우리 혁명이 장기성을 띠게 되리라는 생각에 머리가 무겁기만 하였다. 중국에서 서울에 올 준비를 하면서도 실상 아시아혁명정세의 유리한 발전추이에 편승하여 남조선사회의 발전도 비록 당면하여 곡절은 있어도 비교적 순조로히 발전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암담하다. 예측불가능한 상황이 련일 조성되고있었다.
남조선사회의 파국을 이대로 방임하여둔다면 정국은 결정적으로 전조선을 제놈들의 식민지적지배밑에 몰아넣으려는 미제의 위험천만한 야망대로 굴러갈것이다.
정시명은 혼탁한 시국과 위태로운 정세추이를 파고들수록 나라와 겨레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김승원과 조태준이 그리고 군부에 벌써 확고한 자리를 잡은 최원기도 만날 때마다 시국을 통탄하며 빨리 무슨 수를 내놓아야지 야단이라고 정시명의 얼굴을 쳐다보군 한다. 마동열이와 림인석이도 저녁마다 정시명을 만나 일사업정형을 보고하고는 꺼칠해진 얼굴로 한숨부터 내쉬군 하였다. 남조선사회의 반동화를 막지 못하면 결국 나라의 분렬이라는 비극적결과에로 이어질수 있다. 이 말은 정세추이에 민감하고 예리한 안지생이 처음으로 입밖에 냈다. 안지생이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너무 쉽게 그 말을 토해놨을 때 정시명은 온몸에 찌르르 전률을 느끼며 순간에 눈물이 찔끔 솟아났다. 일제를 대신하여 기여든 미제에 의한 식민지예속화, 나라의 분렬! 입에 담기조차 무섭고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끼오른 력사의 자욱을 거슬러보면 분렬로 단일민족의 삶의 터전이 갈라지고 강토가 쪼각이 나고 동족상쟁으로 불과 피의 바다가 소용돌이치던 3국시대가 겨레의 허물로 남아있다. 그래 선조들은 골육상쟁은 민족의 수치요, 강토의 치욕이라고 자자손손에게 피의 교훈으로 남겨준것이 아닌가.
지금 시국이 미제의 조종하에 분명히 분렬의 고정화에로 치닫고있다. 분렬은 불피코 동포와 동포가 찌르고 부시고 인간을 야수화하는 싸움을 낳기 마련이다.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세상에 태여났던 그 시대, 권력에 환장한 몇놈의 불망나니들때문에 겨레가 세쪽으로 갈라져 수백년을 끝이 없는 전쟁과 무익한 군력경쟁으로 강토는 황페화되고 사람들은 하루한시도 안식을 모르는 악몽속에 시달려야 했다. 백제는 왜나라를 등에 업고 신라는 당나라를 섬기면서 혈통을 같이한 동족을 침해하던 그 력사의 수치가 20세기에 와서 재현되고있다. 어찌하여 광복의 기쁨이 잦아들기도전에 우리 민족이 이렇게도 엄청난 력사의 악순환을 감수하고 불행과 치욕에 도전하게 되였는가. 지금 저마끔 외세를 등에 업으려고 미국놈들앞에서 구역질나는 요사와 아부와 처세를 보이고있는 간사한 무리들이 력사앞에 지닌 세대의 사명감을 인식하고나 있는가.
예속과 치욕의 천길나락에로 굴러가고있는 대세를 역전시키려면 이 남녘의 하늘밑에서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겠는지.
정시명은 어떤 날에는 울적해지는 심사를 달랠길 없어 남산의 다박솔에 해종일 몸을 묻고 혼탁된 력사의 기류가 어지러이 회오리치고있는 서울장안을 굽어보면서 해답을 찾아 고심을 하였다.
무엇보다 미국놈의 팔다리부터 잘라야 할것 같다. 제놈들의 영향밑에 민주진영까지 끌어들이려는 미제의 책동을 분쇄하고 미제의 몸뚱이에 기생하여 광복된 정세를 일신의 안락과 공명과 벼슬길에 리용하려는 반동세력을 철저히 고립시켜야 한다. 중간에서 동요하는자들은 끌어당기고 진보의 길에서 주춤거리는자들에게는 힘을 주고 벌써 외세를 업은 놈들은 그 요람기에 기세를 꺾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조성된 정세와 전략적인 과제들은 더욱더 풀길없는 수많은 의문점을 던지면서 그의 심중을 사색의 미궁에로 몰아넣군 한다. 이 방대한 과업을 위해 조직을 어떻게 꾸리며 조직의 성격은 어떻게 부여해야 하겠는가. 조직은 어디에 뿌리를 박으며 주요활동무대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민족세력과의 련계는 어떻게 가지며 반동진영과의 사업은 어떤 방향에서 어디에 목표를 두어야겠는가.
더듬을수록 삭막해지고 깊어질수록 헤여날길 없는 앞날의 문제들을 그러안고 사색을 거듭하던 정시명의 마음은 평양으로 달려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만이 이 문제들에 대하여 해답을 주실것이다. 그이께서만이 이 혼탁한 남조선의 정치의 탁류를 정화시키고 민족의 완전자주독립을 이룩하여 이 땅에 겨레가 길이 복락을 누려갈 인민의 락원을 가꾸어갈 대경륜을 안고계실것이다. 벌써 남조선의 민심은 평양으로 쏠리고있었다. 더더구나 민족의 사활을 념려하는 지성과 량심의 라침판은 확고히 평양을 향하고있었다. 각이한 정견을 가진 민주인사들과 혁명가들, 기자들, 과학자들, 문화인들, 우익정객들과 지어는 학생들까지도 명예도 재산도 직위도 던지고 장군님의 품을 찾아 38선을 넘나들고있다. 그들중에는 장군님의 품에 아예 눌러앉는이도 있고 민족재생의 대강을 받아안고 다시 서울로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시명은 자기도 더는 지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