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구름깔린 서울

 

4

어느날 미군정청에 있는 류동명의 부관이 정시명의 거처를 찾아왔다. 그는 만나고싶은 마음이 급하여 부관을 먼저 보내 문안을 드리니 시간을 얻어 인차 찾아오겠다는 류동명의 인사말을 전하고 돌아갔다.

정시명은 봉건적례의에 푹 젖어있는 류동명이 찾아오겠다는 소리는 뒤집어보면 와달라는 이야기같아서 부관이 갈 때 인사가 늦었다는 사죄를 전해보내고는 그날 늦은 저녁에 류동명을 찾아갔다.

부관이 적어놓고간 주소를 찾아가니 남산기슭에 벽돌담장을 두른 양옥집이 나타났다.

정시명은 담장너머로 뜰안을 들여다보았다. 뜨락이 꽤 넓고 규모있게 정리되여있었다. 담장밑으로는 아직도 푸름이 싱싱한 가지들에 노란 감알이 다롱다롱 달려있는 감나무와 살구나무, 앵두나무, 양벗나무가 일매지게 서있고 대문으로부터 현관문까지는 포도덩굴이 나무버팀대우에 얼기설기 엉켜있었다. 그밑에는 화강석으로 다듬은 걸상이 주런이 놓여있고 옆에는 이미 말끔히 거두어버린 꽃밭이 새하얀 조가비에 둘러싸여있었다. 뜨락의 남향쪽에는 밑둥아리가 어른의 팔뚝만 한 참대나무들이 꽉 들어차서 뜨락을 한결 정갈하게 해준다. 꽃이 피고 열매맺는 시절에는 과원속에 묻혀살것만 같다. 뜨락만 들여다봐도 주인의 지체가 엿보인다.

정시명은 마동열이더러 돌아가라고 이르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이내 산듯하게 군복을 다듬질해 입은 류동명의 부관이 대문밖으로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이미 낯을 익힌 부관은 대문가에 서있는 정시명을 보자 깍듯이 인사를 한 다음 잠간 기다려달라고 이르고는 절도있는 걸음으로 다시 뜨락으로 들어갔다. 이어 안쪽에서 문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니 정선생을 대문가에 세워놓다니.》하고 크게 부관을 나무라는 소리와 함께 반달음으로 뛰여오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아직도 풍신이 좋고 눈정기가 어려있는 류동명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대문의 두쪽을 와락 밀어내며 실내옷차림으로 나타났다.

《오셨구려, 정향선생!》

《그동안 옥체만강하셨습니까?》

정시명이 허리를 굽히는데 류동명이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반가움에 흠싹 젖어 답례를 하였다.

《내 얼마나 정향선생을 기다렸다고… 자, 어서 들어갑시다.》

류동명은 그의 허리를 오른팔로 감싸안고 집으로 안내하였다.

구한국말기에 조선군대의 교관대장으로 있었던 류동명은 70객이 된 오늘까지 줄창 군무에 몸을 담아온 오랜 무장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걸음걸이가 방정하고 몸가짐이 절도가 있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만은 거역할수 없는듯 그의 머리에도 백발이 내리고 아직도 희고 살진 볼과 이마에 거무스레한 로인반점들이 드문드문 박혀있었다. 그는 나들문에 이르자 《이게 내 집이요. 어서 들어서시우.》하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그 모양새가 꼭 사지판을 넘나들고 온 친자식을 맞아 기쁨에 겨워하는 인자한 촌늙은이의 순박한 모양이다.

응접실에 들어선 류동명은 잠시 기다려달라고 량해를 구하고는 옆방으로 갔다.

너렁청한 방에는 응접탁과 나무걸상이 몇개 있고 창문턱에 있는 커다란 백자기에서는 백리향이 오늘아침 갓 망울을 터친듯 향기를 그윽히 풍긴다. 벽에는 《제일강산》이라고 쓴 안중근의 필적족자가 걸려있을뿐이다. 청렴하고 검소한 옛 무인의 성품이 그대로 비껴있는 방이였다.

류동명이 김구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면서 붕괴와 추방과 개각의 파행을 거듭해온 상해림시정부에서 군부계통의 요직을 그대로 력임해온것은 그의 타고난 청렴결백과 정직한 품성때문이라고들 한다.

잠시후 군복을 깐깐히 떨쳐입은 류동명이 마누라와 집안에 있는 식솔들을 다 데리고 응접실에 들어섰다. 군복차림을 한 류동명은 대번에 걸음걸이와 몸가짐이 달라졌는데 무게가 있고 엄격해보이였다.

정시명은 중국에서 류동명과 여러번 상종하면서 교분이 두터워졌으나 그의 가족들과 만나보기는 처음이였다.

《인사들을 올려라. 우리 〈림정〉의 귀인이신 정향선생님이시다. 소시적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하시고 광복성전에 무공을 크게 쌓으신 이 나라의 성인이시다.》

류동명의 인사소개가 얼마나 장중하였던지 정시명조차 엄숙해졌다. 그는 구식절을 사뿐히 하는 안로인과 자식들의 인사를 받느라고 여러번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면서 맞절을 하였다.

가족들은 마지막으로 한줄로 서서 다시 절을 하고 응접실에서 나갔다.

그들은 응접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정말 정선생은 우리 〈림정〉의 귀인이시오.》

《류총장님,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저로서야 마땅히 도리에 맞는 일을 했을따름입니다.》

정시명이 곱씹는 류동명의 인사말이 거북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림정에 닥쳐든 폭풍을 단신으로 막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고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였소?》

류동명이 다난한 세월에 대한 추억에 감개가 되살아나 두툼한 눈두덩이를 내려붙인다.

류동명이 정시명을 귀인이라 부르는것은 인사치레가 아니였다.

정시명도 무등 감회에 젖어들었다. 눈앞으로 자그마한 2층목조건물이 다가온다.… 상해… 상해의 으슥진 뒤골목… 쾅쾅 울리던 널판자마루… 한숨과 담배내굴이 뒤엉켜 언제나 숨이 막히던 비좁은 방들…

《림정》이 상해시의 프랑스조계지에서 세방살이하던 집이다.

그 집에 불시에 들이닥친 폭풍… 폭풍…

(그래 그것은 폭풍이였지.)

정시명은 입속으로 되뇌여본다.

《폭풍이였어.》

그 폭풍을 가라앉히려고 어느날 《림정》참모총장 류동명이 느닷없이 정시명에게 달려왔다. 인사법도가 틀이 박히고 복잡한 류동명이 팔부터 덥석 잡고 《정선생》하며 찾아온 용건부터 황황히 내놓았다.

《이거 야단이 났소이다, 큰 야단이 났소이다.》

류동명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사연인즉 조계지안에 반일을 표방하는 조선민족주의단체를 두고있는것으로 하여 일본놈들과 여러모로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있던 프랑스총령사가 조계지의 질서에 혼란을 준다는 당치 않은 구실을 걸고 《림정》이 당장 철수하라고 한다는것이였다.

그때로 말하면 김구가 렬사 윤봉길을 시켜 상해홍구공원에서 일본 《천황》놈의 생일경축행사에 참가한 현지의 거물급 일본놈들을 폭탄공격으로 저승에 보낸 뒤이고 일본놈들이 《림정》계 인물들을 잡느라고 눈에 피발이 되여 돌아치던 때였다. 프랑스총령사도 이 사건으로 해서 일본놈들로부터 단단히 입침을 맞은 모양이였다.

그날 작열하는 드센 폭탄파편에 저승에 간 놈들은 모두가 상해주둔 일본군사령관 사라가와대장, 상해일본총령사 가와하시, 일본함대사령관 노무라 등 현지의 거물급 왜놈들이였다. 일본놈들이 혼비백산해질만 한 사건이였다. 《천황》의 칙령까지 내려 범인들을 잡아내느라고 할 때 프랑스총령사의 요구대로 하면 영낙없이 김구이하 《림정》계의 인물들은 서울형무소로 끌려가게 될 판이다. 그러니 그렇게도 도고하던 류동명이 서른살이나 년하인 정시명의 옷자락을 붙잡게 될만도 하였다. 류동명은 길고 숱많은 장미를 푸들거리며 《정선생, 어떻게 손을 써주시우. 거기서 쫓겨나면 림정은 거덜이 나고 독립운동의 맥이 끊어지는 형국이 창졸간에 벌어집니다.》라고 눈물겨운 호소로 매듭을 지었다.

정시명은 《림정》을 아직도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가는 《정통정부》로 착각을 하고있는 류동명의 시대착오적인 말은 귀에 거슬렸지만 반일이라는 립장에서는 아직 동요가 없는 이 민족주의단체의 바람앞의 초불같은 운명을 두고 수수방관할수는 없었다.

그는 류동명의 부탁을 쾌히 접수하였고 그 실행에 달라붙었다.

류동명이 정시명을 《구원자》로 믿고 찾아오게 된데는 그가 중국의 좌익계는 물론 우익계에까지 넓은 인맥을 가지고있다는것과 함께 불의앞에는 타협이 없는 강직한 성미와 정의를 위함이라면 주의주장을 초월하는 아량을 가지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정시명은 필요한 대책을 궁리하다가 먼저 《상해일보》의 석간신문에 상해주재 프랑스총령사를 격찬하는 기사를 크게 내도록 하였다. 이 기사에서 정시명은 프랑스총령사가 《자유세계》의 공명정대한 외교관답게 약소민족의 불행과 고통에 동정과 뉴대를 가지고있는 《진보성이 강한 인물》이라고 잔뜩 춰주었다.

《총령사는 그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정의와 진리에 투철하고 불의앞에서 용감한 명망높은 외교관이다. 그는 외부의 압력에도 끄떡없이 조계지안의 약소민족의 애국단체들을 보호해줌으로써 민족주의적이며 인도주의적인 자유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고 만인의 찬탄을 받고있다.》

하루저녁사이에 용감한 외교관으로 상해일경에 유명짜해진 프랑스총령사는 으쓱해졌다. 다음날 점심녘에 령사관원을 정시명에게 보내여 만찬회에 초대한다는것을 정중하게 통지하여왔다.

총령사는 그에게 두번세번 사의를 표하며 감사의 축배를 권하다가 그 자리에서 《림정》에 대한 추방령을 취소한다고 선포하였다. 외부의 압력에 끄떡없는 명망높은 외교관이라는것을 다시한번 《과시》한것이다.

저들의 운명은 물론 조선독립운동의 《대본영》이라 자화자찬하던 《림정》의 존재가 막바지벼랑턱에 나섰을 때 슬기롭게 건져준 정시명을 류동명은 물론 김구도 두고두고 은인으로, 평생의 지인으로 부르며 감지덕지해하였다.

정시명은 그후에도 《림정》계를 친일친미집단으로 변질시키려고 침투해오는 특무들의 정체도 제때에 통보해줌으로써 피해를 덜게 해주군 하였다.

김구의 《림정》계는 지난해에도 정시명으로부터 요긴한 도움을 받았다. 8. 15후 《림정》을 인솔하고 영예롭게 《환국》하려고 귀환길을 서두르던 김구는 예상밖의 암초에 부닥쳤다. 그것은 김구의 도고한 민족성에 위협을 느끼면서 남조선의 정계편성을 용의주도하게 진척시켜나가던 미국이 《림정》의 영상을 왜소화할 정치적기도로부터 《림정》주석으로서의 김구의 개선을 반대해나섰던것이다. 김구가 미군정청대표와 몇차례의 공방전을 벌렸으나 그놈은 개인자격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종전의 립장으로부터 한걸음도 물러서려하지 않았다.

광복된 다음날부터 시작된 말싸움은 10월에 이르기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하는수없이 김구는 장개석의 힘을 빌리기로 하고 류동명을 또다시 서안에 있던 정시명에게로 파견하였다. 김구와 장개석과의 회견을 주선해달라는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시명도 신중히 대하였다. 그것은 그러지 않아도 어중이떠중이 우익세력들이 모여드는 서울에 김구의 세력을 들이미는것은 반동세력의 힘을 가세해줄수 있다는 타산에서였다. 그러나 김구의 비서 안우생과 김규식의 비서 신기언을 통하여 《림정》의 동향과 금후 남조선정치세력의 재편전망을 예리하게 주시해온 정시명은 결국 그들을 도와주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은 당시 미제가 보다 우익적인 반공광신자 리범석일파와 리승만, 서재필을 비롯한 미국에서 기른 친미주구들을 장차 남조선통치기관의 중추에 내세우려한다는것을 간파하였기때문이였다. 그놈들을 견제하자면 그래도 《림정》계를 맞세우는것이 제일 현실적인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정시명은 일찍부터 여러가지 직급의 합법적신분을 리용하여 상해림시정부의 거물급인물들과 자주 접촉하여 독립운동의 선에서 리탈하지 않도록 영향을 주었다.

당시 상해림시정부 주석 김구나 부주석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최동오, 류동명 등 수많은 민족주의거두들은 대체로 반공을 리념으로 내세운 고루한 민족주의자들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정향이 공산당에 동조하는 인물이라고 하면서도 만리타향에서 일제를 반대하는 싸움을 벌리는 지조높은 우국지사로 인정하고있었다. 더구나 한번 만나면 쉽사리 끌려들게 되는 그의 높은 인품과 다재다능한 식견으로 해서 그와 사귀는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그의 말이라면 군말없이 따르군 하였다. 정시명은 앞으로 서울에 나가 활동하는데도 그들과의 선을 가지고있는것이 좋을것 같았다. 어차피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평양이 아니라 서울로 향할 인물들일것이다.

정시명은 장개석의 턱밑에 있는 동지들을 발동하여 장개석이 공개석상에서 김구를 만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장개석의 총애를 받던 김송일까지 내세워 현 시국에서 김구에게 정치적투자를 해주는것이 좋으리라는것을 력설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여 장개석은 정시명의 조종에 따라 자기 부인인 송미령이까지 참가시켜 김구를 위한 작별연회를 차려주고 20만딸라의 정치활동자금까지 제공하였다. 그리고 자기 측근의 미군고문들도 연회에 초빙하여 김구를 소개하였다.

장개석의 후원은 김구와 《림정》계의 몸값을 높이는데 크게 도움이 되였다.

미군정청은 하는수없이 《림정》이 두번에 나누어 들어오는것을 승인하고 제놈들의 《씨-47》수송기까지 내여 그들의 입국을 공식적으로 보장하여주었다.

김구는 정시명의 거듭되는 지원을 받고 고마움을 금치 못해 하면서 류동명을 그에게 파견하여 자기의 감사와 사의를 정중히 표하도록 하였다. 귀국에 앞서서는 직접 정시명을 찾아와서 눈물이 핑그르르해서 그의 손목을 잡고 오래동안 놓을줄을 몰랐다.…

류동명의 딸이 쟁반에 김이 물물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방안에 들어서서야 그들은 생각에서 깨여나 마주보며 싱긋이 웃었다.

《선생님, 중임을 맡으신것을 축하합니다.》

정시명이 이렇게 첫말을 떼자 류동명은 《어험, 어험》하고 마른기침을 몇번 하더니 손을 내둘렀다.

《말도 마오. 축하를 받을만 한게 못되는것 같소. 사실 내 백범(김구의 호)이 미군에 관여하지 말라는걸 그냥 우겨서 다시 군복을 입었소이다. 바깥에 나앉으면 또다시 정계의 탁류에 말려들것이니 그게 이젠 신물이 나는것이요 차라리 이 길이 좋을듯싶었는데 막상 나서보니 후회되는바가 많소.》

류동명이 백발의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기염을 토하다가 《그건 그거구…》하고 쳐들었던 손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오랜 무인생활이 체질화된 류동명은 언제나 군설명이 없이 자기 속을 직통으로 헤쳐놓는 사람이다.

《정향선생, 어서 빨리 이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 잡기 위해 나서주시오. 눈꼴 사나운것이 너무 많소.》

류동명은 이렇게 간곡한 청으로 화제를 돌려놓았다.

《난 지금 민족군을 만드는 일을 벌려놓았소. 우리 통위부에 고문직을 하나 더 받을테니 내곁에서 좀 끌어주시우. 부탁이요. 내 이것때문에 정선생을 더구나 기다렸소이다.》

부탁하는 품이 극성스러워 정시명은 순간적으로 그것도 좋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느 행정기관에 매운다면 여러모로 행동의 구속이 있어 사업의 폭을 넓혀나가는데도 제한적일것이라고 생각을 고쳐하였다.

《신의에 보답을 못하는 이놈을 용서해주십시오. 항간에 묻혀 조용히 여생을 보냄이 이 20년방랑객의 일루의 희망입니다.》

《그게 웬 말이시오? 내 정향선생이 왼쪽에 기울어져있는분인줄 알면서도 익히 사귀여온것이 백의동포를 귀하게 여기는 그 거룩한 뜻이였는데 정국이 어지러워지는 이 판국에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시오?》

류동명은 다소 실망이 가는듯 격앙된 어조로 여전히 정시명을 공박하여 나섰다.

《안될 말이요. 이 이남땅에 생각되는 인물을 꼽아보시오. 내 어제도 백범어른을 만나보았는데 기는 있으나 확실히 지와 인이 모자라오. 겨레를 거느리고저 하면서도 수를 내놓아 민심을 모으고 도량을 넓혀 3천만을 한식솔로 만들 생각은 없이 고집만 앞세우고 의합이 안되는 사람은 무턱대고 삿대질이니 그게 지금 세상에 통할상 싶소. 그래서 김구를 따라선 〈림정〉식솔들이 이제는 저마다 영웅호걸이 돼서 뿔뿔이지. 리승만도 내 몇번 만나봤는데 난 그 서양향수냄새부터 코살이 여의치 않아 길게 앉아볼 생각이 없더구만. 미국사람들의 눈치를 보면 리승만에게 주패장을 던지는것 같은 낌새가 보이는데 난 반대요. 백가지를 제껴놓더라도 그래 우리 민족이 무엇이 모자라서 대양건너서 온 오랑캐계집을 항차 국모로 섬긴단 말이요? 그걸 달고 광복된 제나라로 기여든게 애당초 심보가 고약하단 말이요. 더구나 제 태를 묻힌 땅에는 30년가까이 저를 기다려준 마누라가 새끼들을 거느리고 눈이 새까매있는데…》

류동명이 비분강개한 어조로 설분을 토했다.

정시명은 이 사람이 여전히 애국의 지조만은 변치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속으로는 기쁘기 이를데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하든지 손을 잡아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자기의 진속을 터놓을수 없어 묵묵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 남쪽에서 이렇게 저마끔 자리다툼에 열이 나서 이마받이를 하고있을 때 지금 북쪽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슬금슬금 자기네의 기틀을 다져가고있소. 내 전일에 북쪽에 갔다온 기자를 만나고 얼마전에 김장군을 뵙고온 몽양 려운형씨도 만나 얘기를 나누었는데 민심은 확고히 공산주의로 기울어지고 질서가 서고 민생이 안정도모되여 있더라오. 정향선생이야 정치를 하셨으니 아시겠지만 그 사람들은 토지개혁 하나만 가지고도 북조선인구의 7할을 자기편에 끌어모았소. 정사야 그렇게 해야지. 참 정향선생, 내 제말만 말이라고 인사가 늦었소. 아직 똑똑한 거처가 없다면서?》

《같이 온 사람들이 여럿이 돼서 서울 역전려관에 함께 자리잡았습니다.》

《음, 그거 안됐구만. 부관이 말을 했소. 반생을 이국살이로 고생하였는데 제나라에 와서까지 궁하게 지내서야 될 말인가. 그래 몇세대가 되오?》

《다섯세대가 됩니다.》

류동명은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서대문구 서소문동에 있는 적산가옥 한채를 정시명과 일행에게 넘겨주도록 지시를 내렸다.

류동명의 딸이 들어와 저녁상이 준비되였다고 일렀다.

류동명은 식사중에도, 식사를 마치고도 정시명을 어떻게 하든지 정계에 끌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의 끈질긴 부탁을 단마디로 거절하기 미안하여 종시 정시명은 생각해보겠노라고 대답했다. 류동명은 그런 정도의 대답이라도 듣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를 놓아주었다.

정시명은 류동명이 맡은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속을 몹시 쓰고있다는것을 직감하였다.

류동명과 그의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대문을 나서니 부관이 자동차를 대기시켜놓고 기다리고있었다.

부관옆에는 마동열이 서있었다.

정시명이 놀라서 《아니, 지금 몇시라구 마중위가 여적 있었단 말이요?》하고 책망조로 말했다.

자동차가 떠나자 정시명이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며 엄하게 말했다.

《가라면 갈노릇이지 할 일이 없어 여기서 빈둥거린단 말이요? 다시는 데리고나오지 말아야겠군.》

《아, 아니 그건 선생님의 권한에 속하지 않습니다.》

마동열은 이 문제에서는 양보가 있을수 없다는듯 선뜻 자기의 주장을 내비치며 고집을 부렸다. 실상 마동열은 중국에 있을 때보다도 더 신경을 예리하게 해가지고 정시명의 주변을 살피고있었다. 여기저기서 정치적테로행위들이 감행되고있었던것이다. 벌써 김구와 려운형이 각각 세차례의 저격을 당하였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동열은 잠이 오지 않았다.

자동차는 어둠이 깔린 길을 미끄러지듯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정시명은 등받이에 허리를 붙이고 방금 류동명과 나눈 대화를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령감이 여전히 나라 걱정하는것이 천만다행스러웠다. 사람이 열백번 달라질수는 있어도 달라지지 말아야 할것이 있으니 그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뜻을 세우고 사는 사람일수록 나라위한 마음에 좀이 쓸기 시작하면 그 인간은 쉽게 사회의 버림을 받게 된다. 그런데 류동명이 의연히 그 마음이 결곡하기 그지없다. 그 속대가 단단하기로 쇠돌같고 그 뜻이 높기로 하늘같다.

헌데 문제가 있다. 어떤 나라를 위한 충의인가. 이게 문제다. 미국놈들이 만들어주는 나라가 이 나라 백성의 구미에 맞지 않으리라는것을 류동명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있다. 미국놈들이 분명 류동명의 무인기질과 애국심을 높이 산것은 아닐것이다. 민족주의운동에서 지울수 없는 그의 이름을 리용해먹으려고 중임을 맡겨준것이 틀림없다. 이걸 류동명이 모른다.

종당에 자기의 운명이 인민을 반역하고 나라를 등지는 매국의 길에 굴러떨어지리라는것을 모르고있다. 북녘에서 벌어지고있는 눈부신 변혁에 탄복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다는 그 한가지 리유로 두려워하고있다. 무지와 편견, 뿌리깊은 편견으로부터 초래된 인간의 삐뚤어진 사고방식이다. 진보와 시대의 추이에 둔감하고 한생을 보듬어온 고루한 민족주의울타리에 속박되여있는 인간의 체질적본능을 미국놈들이 롱간질해먹고있다. 그 울타리를 헤쳐줄수 있을가? 지금 반공이라는 구호를 자랑거리처럼 휘두르면서 칼부림을 마구 하는 김구와 엇비슷한 저런 인간들을 자기 만족감에 도취된 세계에서 끌어낼수 있을가? 저 모양대로 둬두어서는 안되겠지만 끌어내주는게 너무도 아름이 버는 일이다.

보매 이 서울장안에만 하여도 저같은이들이 부지기수일것 같다. 하지만 품은 먹어도 저들을 돌려세워야 한다. 힘에 부친다고 저들을 방임해둔다면 내가 구태여 무엇때문에 이 력사의 먹구름이 짙게 깔린 서울에 들어섰는가. 이미 좌익권은 자기의 서렬을 완비해놓았다. 내가 또 새로운 합법적인 정당이나 사회단체를 내오면 오히려 좌익권의 력량을 분산시키거나 애국진영의 혼란을 더 복잡하게 할수 있다. 그래 나는 저들속에 들어가야 한다. 좌우익이 힘겨루기를 하는 중간에 끼여들어 거기에 우리의 좌지를 전개해야 한다. 저들을 저 모양대로 놔두면 미국놈들과 반동의 힘을 더해주는것으로 된다. 이것은 민족의 힘을 약화시키는 죄악이다. 저들에게 나라를 위한 참애국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우쳐주어야 한다. 그래서 저들이 인생말년을 겨레에 대한 정직하고 훌륭한 복무로 장식하도록 지성을 다해보자.

외세를 쫓아내고 분렬을 막으며 민족의 재결합을 실현하는 지름길은 여기에 있다.…

자동차는 여전히 서울장안에 짙게 서린 어둠을 헤치며 기세차게 달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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