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구름깔린 서울
3
천진항을 떠난 배는 6일만에 일본의 사세보항에 기항하였다. 전승군이라 우쭐거리는 장개석군의 장교들이 여러명 나타나자 사세보항에 주재하고있던 일본귀국민영접위원회 역원들은 눈이 둥그래졌다.
마동열이 나서서 려관도 고급으로 알선받고 부산행선박도 어렵지 않게 소개를 받았다.
그런데 부산항에 내렸을 때 일행은 모국에 첫발을 들여놓은 눈물겨운 격정도 터쳐놓기전에 뜻밖의 상황에 부닥쳤다. 그들을 맞이한 첫번째의 사람들이 군화를 신고 엠피철갑모까지 쓰고 껌을 징글맞게 씹어대고있는 양키들이였던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마동열이 손가락으로 자기를 부르고있는 미군 엠피놈을 쏘아보다가 분통이 터져서 꽥 소리질렀다.
마동열은 신분확인을 요구하는 그놈의 상판에 장개석군의 중위증명서를 꺼내 집어던지며 욕질을 했다.
《옛다, 내겐 이젠 필요치 않아. 한데 어떻게 바다건너에서 온 네놈들이 여기서 문지기노릇을 하는거냐?》
정시명은 분통을 터뜨리고있는 전우들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분명 이 땅에서는 주객이 바뀌고있었다. 귀국의 감격으로 부풀어오르던것이 졸지에 사그러지고 기분이 침울하기만 하다.
일행이 심사가 꼬여서 걸음을 쉬이 옮기지 못하는데 졸병 여럿이 또다시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그놈들은 다짜고짜로 정시명일행을 그 옆에 있는 빈창고로 몰아갔다. 거기에는 이미 끌려온 사람들이 까닭을 몰라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고있다.
《웬일이냐?》
마동열이 한 졸병놈의 팔목을 비틀어잡고 꽥 소리질렀다.
그놈이 뭐라고 대답하기전에 경적소리를 울리며 여러대의 자동차가 모터찌클의 호위밑에 부두선창에 쏜살같이 들어선다.
멈춰선 승용차들에서 미군장성들과 군복을 입은 조선사람들이 내리였다.
그쪽을 바라보던 정시명은 방금 차에서 내린 조선사람들속에서 낯이 익은 모습들을 보았다. 그는 마동열을 손으로 불러 나직히 말했다.
《저길 좀 보게.》
정시명의 눈길을 따르던 마동열이 나직이 탄성을 올렸다.
《아! 류동명참모총장입니다.》
분명 미군들속에 서있는 류달리 머리가 크고 풍채가 름름한 사람은 상해림시정부에서 군무를 주관해보던 참모총장 류동명이였다. 그 옆에 어깨가 떡 벌어지고 다부지게 생긴 사람은 장개석참모부의 중령으로서 《림정》과의 군사관계를 맡아보던 송호정이다. 마동열은 송호정을 모른다.
잠시후 부두가에는 경쾌한 고동소리를 울리며 호화스럽게 장식을 한 요트가 들어섰다. 요트에서 몇명의 미군장성들이 내려 마중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자동차들은 인차 모터찌클의 호위를 받으며 부두에서 사라졌다.
미군졸병들은 그제야 창고에 있는 사람들을 놓아주었다.
마동열이 아까 손에 잡혔던 졸병을 손가락으로 불렀다.
《어느놈의 행차냐?》
례영이가 통역을 하였다.
그 놈은 눈을 부라리다가 여차직하면 받아넘길 자세로 매섭게 눈총을 쏘는 마동열의 기상에 혼이 빠진듯 《하지사령관님이 일본서 오시는 길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정시명은 하지라는 소리에 귀가 커졌다. 그러니 류동명과 송호정이 미군장성들속에 끼여서 하지마중을 나올만 한 위치에 있다는건가. 생각밖의 희한한 일이였다.
때마침 림인석이 어서 부산역에 나가자고 일행을 몰아댔다.
일행이 서울역전려관에 려장을 풀어놓았을 때는 벌써 그들의 도착을 알리는 석간신문이 서울일판에 뿌려진 뒤였다.
《20여년간 해외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분골쇄신하던 정향선생일행 서울착》이라는 제목으로 된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보도기사였다.
《열혈청년시절에 나라를 광복코저 황해를 건너갔던 정향선생 광복소식에 접하자 귀로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타국에 의연히 남아 방랑하던 동포들을 모아 귀국을 종결짓고 떳떳이 환국했다.》
보도기사여서 기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나 정향의 애국의 길고 험한 20년과 남다른 우국충정을 간단명료하게 세상에 밝혀낸 글이였다.
서안판사처 처장 정향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삽시에 남조선 각지에 전해졌다. 서울 역전려관은 그에게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손님들의 발길이 뜨음해진 어느날 해질무렵이였다.
려관에 넥타이에 중절모를 눌러쓴 멋쟁이신사가 개화장을 휘저으며 나타났다. 희고 넓은 이마아래 시커먼 눈섭이 넓게 지나가고 두눈이 방금 닦아놓은 방울처럼 어글어글한데 이목구비가 번듯하고 풍채가 름름한데다가 걸음걸이마저 사뭇 정중해서 문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누구나 슬금슬금 길을 비켜주었다.
려관문지기가 막아서자 《이건 어데서 막 굴러먹던 개똥쇠야. 〈한민당〉선전부장도 몰라 봐!》하고 버럭 고함을 지르며 들어선다.
려관문지기는 고함소리에 얼이 빠져 개화장을 흔들며 거드름스럽게 현관복도를 걸어가는 신사의 뒤모습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는 정시명이 몇달전에 남조선에 들여보낸 김승원이였다.
김승원은 중국 청화대학을 졸업한후 인차 혁명의 폭풍에 뛰여들어 주로 지식인들속에서 활동하다가 정시명의 지하조직에 망라되였다. 그는 서울에 온지 반년도 안되는사이에 룡산에서 자그마한 고무공장을 경영하면서 앞으로 리용할 자금을 마련하고있었다. 한편으로는 정계의 우익집단에 발을 붙이는데 성공하였다. 벌써 남조선의 우익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이루고있던 한국민주당의 선전부장으로 등용되기까지 하였다. 김승원을 앞으로 정당들과의 사업에서 주역으로 내세울 계획밑에 우익정당에 들어가라고 당부하였는데 그대로 집행된 셈이다. 정시명의 서울도착에 대한 신문기사도 김승원이 내도록 했지만 당자는 우정 며칠후에야 정시명의 앞에 나타났다.
《정선생님!》
《김선생!》
그들은 뜨겁게 포옹하였다.
김승원은 그들 일행을 서울의 일류급 료정인 《국일관》으로 이끌었다.
《어떻게 된 일이요, 승원선생?》
삐거덕거리는 전차에서 내려 김승원의 뒤를 따르던 정시명은 《국일관》이라는 화려한 간판이 붙어있는 료리점앞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광복된 내 나라에 와서 료리점 한번 들어가는데 뭐가 잘못되였습니까. 베이징반점에서 저에게 짜장면을 사주시던 생각이 나십니까?》
《에잇 사람두. 그 소릴 몇번째 하는가?》
《정말 그때 그 맛이 잊어안집니다. 기막히게 맛이 있었는데. 아침점심은 빵 하나, 저녁은 미시가루 두숟가락… 고학생의 빈 창자에 그 고급한 음식이 춤을 추며 들어가던 그때가 늘 잊어안집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우로만 쳐들린 고개가 평생 가야 굽혀들지 않을것 같던 신사가 이렇게 자못 흥겨워서 우스개소리로 너스레를 부리는데 그 음성이 이상하게도 축축히 젖어있다.
김승원은 호남벌의 부자집자식이였다. 대를 이어오던 땅마지기를 넘겨주려고 탈가를 바라지 않던 그의 아버지는 한사코 대처에 공부하러 떠나겠다는 아들의 말을 듣자 《좋다, 어데 가서 배곯으며 살아봐야 애비마음 알게 될거다.》하고는 돈 한푼없이 떠나보냈다.
후날 김승원은 고학생의 고달픈 생활이 가난한 인간을 위한 리념인 맑스주의에로 자기를 접근시켰고 한생을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살아가리라는 맹세를 인생관으로 접수하게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정시명이 어느날 베이징에 왔다가 베이징반점에 데리고가서 짜장면 네그릇을 사놓고 한번 배불리 먹어보라던 일을 이렇게 두고두고 외웠다.
《자, 들어갑시다. 모두 네몫은 제껴야 합니다.
그리고 서울을 알겠거든 이 〈국일관〉에 가서 한나절 앉아있으라는 말도 있으니 바지띠를 늦추고 시간을 보내봅시다.》
김승원이 일행의 기분을 흥겹게 해주며 안내하였다.
사실 김승원은 《한교사무처》의 소식을 귀국민들을 통하여 들을 때마다 그렇게도 오매불망으로 기다려오던 조국에로의 귀환도 마다하고 겨레를 위하여 아낌없이 수고를 바쳐가고있는 전우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금치 못해 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고국에 돌아오면 축하연부터 크게 차리리라고 은근히 별러왔던것이다.
기생이 나와서 김승원에게 깍듯이 인사하고는 그들을 2층의 다다미방으로 안내하였다. 열려진 사이문으로는 정객인듯싶은 사람들이 빈 술병을 가득히 벌려놓고 무엇인가 론쟁을 하고있었다.
일행이 자리를 잡고앉자 김승원이 한마디 하였다.
《저 사람들이 〈한민당〉과 반공련맹의 수장들입니다. 똑똑히 봐두십시오. 저기 저 자지색넥타이를 맨 사람이 〈한민당〉의 송진우를 대신하여 실권을 쥔 저의 사촌형 김성수이고 그 옆에 모시적삼을 걸친 사람이 반공련맹의 회장입니다. 아마 료정정치가 또 시작되였나 봅니다.》
정시명이 옆방의 론쟁에 귀를 기울이니 과연 심각한 문제를 놓고 격론을 거듭하는것 같았다. 두 당사이의 의견상이를 해소하고 련합을 이루자는것인데 술잔을 찧으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는걸 보니 저도모르게 쓰거운 웃음이 떠올랐다.
잠시후 또 한패거리의 신사들이 떠들썩거리며 앞방에 자리를 잡는다. 얼핏 눈에 띄는것이 그들속에 끼여있는 대령의 계급장을 단 미국인 장교의 모습이였다.
《〈족청〉패이군.》
김승원이 쓰거운듯 내뱉는다.
《〈족청〉이라니?》
《리범석이 민족청년단이란걸 만들었답니다. 저놈은 〈족청〉의 고문입니다.
리승만이나 김구, 려운형이 떠들썩거리면서도 일진일퇴를 거듭하지만 리범석은 〈족청〉을 만들어놓고 소리없이 실력을 키우고있습니다.》
김승원이 실태보고하듯 차분히 이야기를 펴나간다.
약간의 료리들이 나오고 술상이 차례졌다.
《귀국을 축하해서 제가 한잔을 냅니다. 서울명기 구경도 시킬랍니다.》
《아니, 우리끼리 조용히 앉읍시다.》
번거로운것을 싫어하는 정시명이 기생소리에 이마살을 찡그리였다.
《뭐 한번 들어봅시다.》
서울에 처음 와보는 마동열이 반죽좋게 거들었다.
《제가 특별히 부탁해두었습니다. 앞으로 어차피 봐두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김승원이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이어 기생이 들어오고 가야금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나이가 들어 춤가락에는 한물 진듯 한 기생이 거문고를 튕기면서 처량한 음조에 맞추어 장탄식같은 신세타령을 뽑기 시작하였다.
우리 엄마 날 키울 때
쥐면 깰가 불면 날가
오만간장 태우시더니
스무냥에 날 팔아
장사로 떠났다오
아하야 무정쿠나 세월아
백옥같던 내 얼굴에
오이꽃이 폈으니
랑군님 만나드릴 고운 웃음은
거문고에 묻어두고
해와 달을 보낸다오
오마니, 오마니
날 찾아오지 마소
비바람에 흐무러진
청산의 란초는
남산의 남도령도
한번 보고 가버렸다오
광복의 기쁨이 차넘친 조국산천을 그려오던 일행은 기생이 목갈린듯 한 쐑소리로 저저히 엮어가는 사설에 목이 꽉 메였다.
《김선생, 이게 어떻게 되여가는 판국이요? 부산에 오르니 미국놈이 총대를 건들거리며 몸수색을 하지 않나, 나라가 광복되였다면서 저 녀자들은 어째서 그 덕을 입지 못하오?》
림인석이 비분강개한 어조로 부르짖으며 김승원이 권하는 술잔을 받는다.
《이게 이남민중에게 차례진 광복덕이 아니요. 남쪽땅의 운명이요.》
《운명이라니?》
기생의 신세타령에 눈굽이 젖어든 마동열이 기가 차서 부르짖었다.
거문고를 뚱땅거리게 해서 일행을 흥겹게 해주려 했던 김승원은 얼른 기생더러 방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기생이 제깍 자리에서 일어나 다홍색치마를 곱게 휘저으며 방에서 나갔다. 하지만 좌중에는 웃음이 사그러들고 모두가 묵묵히 음식만 집었다.
김승원이 권하는 료리를 이것저것 맛보던 정시명은 아까부터 《족청》패들속에서 자기 등뒤를 집요하게 따르는 눈길이 있다는것을 포착하였다. 오랜 지하활동이 그에게 키워준 예민한 륙감이였다.
정시명이 또다시 김승원이 부어주는 술잔을 받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앞방을 돌아보았다. 《족청》패에 섞여있던 경찰차림의 사나이가 정시명의 눈길을 그때까지 기다리고있은듯 벙긋 웃어 알은체를 하였다. 짧게 깎은 머리에 얼굴은 둥글고 코마루가 우뚝 솟은게 참나무처럼 단단해보이는 사나이였다.
그가 일어나려고 하자 정시명이 얼른 왼손을 가벼이 흔들어 도로 주저 앉게 하였다. 그는 반년전에 주로 권력기관을 대상으로 사업할데 대한 임무를 주어 서울에 들여보낸 조태준이였다.
《거 참, 눈에 익은 사람이다.…》
정시명이 김승원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넌지시 말했다. 조태준이 어떻게 지내는지 김승원의 입을 통하여 알고싶었던것이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사이였다.
《누구말입니까?》
《저 건너방에 있는 제복쟁이가 말이요.》
김승원의 자리에서는 그 방이 정면으로 보이는지라 김승원이 고개를 들어 그쪽을 둘러보다가 설명해주었다.
《오, 조태준… 아, 정선생님도 아실겁니다. 거 장개석의 수하에서 고급참모로 있으면서 서안훈련소의 부소장을 력임했던 리범석의 직계인물입니다. 〈족청〉조직부장인데 얼마전에 경찰학교 교무주임직도 차지했다고 합니다. 리범석이 경찰계에도 재빨리 줄을 놓고있습니다.》
《그렇구만.》
정시명이 례사롭게 그의 말을 받았으나 마음은 이를나위없이 흐뭇하였다. 리범석이 서두르는 품이 일을 칠 조짐이니 그놈의 밑에 든든히 자리를 펴라고 특별히 강조해서 보냈는데 말을 듣고보니 임무를 수행한것 같다.
정시명은 벌써 오래전부터 리범석의 정치적야망에 대하여 경각성을 높여왔다. 지금 나이로 볼 때 남조선정계에서 두각을 보이고있는 리승만이나 서재필, 김구, 려운형이가 다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리범석은 정치인으로서는 청춘기라고 볼수 있는 50대이다. 개인의 정치성향으로 볼 때도 정시명은 이제까지 대상한 수많은 인물들중에서 리범석이만큼 악질적이고 파렴치하며 의식적인 반공광신자는 보지 못했다. 김구의 반공은 편견과 무지로부터 생겨난것이라면 리범석의 반공은 그의 철저한 리념이였다. 게다가 리범석은 재빠르게 미국의 힘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리범석의 망동을 그대로 방임해두다가는 종당에는 그놈에게 남조선의 권력이 집중될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남조선사회의 반동화는 최악의 사태에로 치달아오를것이다.
언젠가 리범석은 제일 좋아하는 책이 어느것이냐는 물음에 히틀러의 《마인 캠프》(나의 투쟁)라고 대답한적이 있었다. 그 대답만 가지고도 반동의 극단에서 권력의 칼을 벼리고있는 그놈의 체질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날 밤 김승원은 정시명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남조선의 복잡한 정치정세에 대하여 밤이 새도록 개괄하여주었다.
조태준의 소식이 못내 궁금하였는데 어느날 조태준이도 찾아왔다. 정시명이 호실에 들어선 그를 끌어안으니 숨이 막혀 죽겠노라고 엄살을 떤다.
《아, 선생님, 간지럽습니다. 절을 먼저 드리고요.》
《절은 무슨 절…》
마치도 며칠전에 나들이갔던 친동생이 문턱을 넘어선듯싶은 그 스스럼없는 태도에 정시명은 대번에 속안이 홀가분해져서 롱조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조직부장벼슬까지 땄다는데 이젠 머리도 기르고 쭉 빼고다녔으면 좋겠군.》
《뭐, 막돼먹은 상놈, 다스린다고 량반이 되겠습니까.》
《허허-》
정시명은 언제나 꾸밈새없이 달라붙는 청년의 익살에 소리내여 웃으며 정찬 눈길로 그를 살피였다. 외관상으로는 키가 작고 몸이 체소하며 그리 볼품없어보이는 사람이다. 머리를 늘쌍 짧게 깎고다니는데 구태여 멋부릴 생각도 없으니 건사하기 좋고 시원해서 좋다는것이다.
하지만 이 사나이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으며 출세도 빠르다. 그는 장개석군에서 스물일곱살에 중령별을 따내고 하북지구사령부 고급참모가 되여 관록있는 장군들과 사업한 인물이며 리범석이 제 손아귀에 걷어쥐려고 무던히 왼심을 썼던 수완가다.
조태준은 원래 평양출신으로 도꾜 와세다대학 영문과 졸업무렵에 독서회사건에 걸려들어 상해로 도망쳐왔다가 정시명을 알게 되여 애국의 길에 나선 사람이였다. 총명한 두뇌와 박식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출세의 길에 재빨리 오르게 하였다.
조태준은 그동안 진행한 일들을 이야기하고는 정시명의 요청에 따라 남조선에서 권력기관들의 구조가 축성되여가고있는 자료를 설명하였다.
정시명은 조태준이 몸을 담고있는 리범석의 민족청년단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의 조직체계며 활동방식을 캐여물었다. 조태준의 말을 듣고보니 어제 《국일관》에서 지나가는 소리로 한마디 하던 김승원의 분석이 옳다는 생각이 났다. 정시명의 판단에도 《족청》이 현단계에서 우익반동진영에서 가장 확고한 정치적기반을 가진듯 싶었다.
《어떻게 리범석의 참모장자리에 올랐소?》
《뭐 그저 그렇게 됐습니다.》
조태준은 치하가 섞인 정시명의 물음에 어물쩍 대답하고는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정파들의 혼탁한 각축전에서 리범석은 슬쩍 비켜섰습니다. 이른바 〈비군사〉, 〈비종파〉, 〈비정치〉라는 〈3비정책〉을 내걸고 〈족청〉을 조직하였지요. 그러자 끝이 없는 파쟁에 환멸을 느낀 많은 청년들이 리범석의 구호에 매력을 느끼고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리범석은 서울에 오자마자 서울중심구역인 을지로 5가에 있는 3층 적산건물을 불하받아 중앙훈련소까지 운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원들에게는 히틀러의 〈청년단〉을 흉내내여 가슴과 팔소매에 보라매를 그린 곤청색제복과 채양이 달린 둥글모자까지 씌웠습니다. 히틀러〈청년단〉의 제복과 다른게 뭔가 하니 상징적인 독수리대신 보라매를 내놓은것뿐입니다. 얼마전에는 〈보라매〉라는 기관지까지 발행하여 청년들에게 제놈의 영상을 높이고 그들속에서 반공리념을 고취하고있습니다. 벌써 면에까지 〈족청〉의 말단조직을 내왔는데 창립선포후 석달도 안되는 사이에 100만에 가까운 청년들이 망라되였습니다.
미국놈들도 리범석에게 커다란 기대와 재정적지원을 주고있습니다. 그놈들은 래년도에는 2천만딸라라는 거액의 자금을 미군정청의 〈일반사업비〉라는 명목으로 지불할것이라고 합니다. 지어 미국놈들은 〈족청〉의 중앙훈련소와 지방의 곳곳에 분산설치한 훈련소들을 병영화하고 여기에 미국제 보총과 기관총, 박격포까지 넘겨주어 장차 남조선군부와 폭압기관의 골간을 키워내도록 적극 부추기고있습니다.
정치의 거목들이라 하는것들이 공리공담만 일삼으면서 물고뜯는 개싸움에 힘을 빼고 경황이 없어 하는데 리범석은 이렇게 배포유하게 정객들의 당파싸움에 미소를 지으면서 물밑에서 유유히 권력의 기초를 다져가는것입니다. 전 상해에서 그놈밑에 좀 있어보기는 했지만 리범석이 이렇게 그릇이 크고 머리가 도는 놈인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이놈의 기를 눌러놔야 되겠습니다.》
조태준은 이렇게 자기의 이야기에 아퀴를 지었다.
정시명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조태준의 말을 듣고 리범석이 과연 위험한 인물이라는 판단이 적중했다고 생각했다.
조태준을 돌려보낸후 정시명은 아직 남조선실태에 대해 다 파악하지 못했어도 리범석이 권력지반을 넓히는 놀음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대책을 세워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며칠후 찾아온 안지생에게 《광복군》에서 리범석의 상관으로 있던 리청천을 꼬드겨 리범석의 비대를 견제할수 있도록 《족청》과 평행선을 달리는 우익계청년조직을 내오도록 하라고 긴급임무를 주었다.
정시명은 김승원이 제공한 자금을 가지고 일행에게 림시생활대책부터 마련해주고는 찾아오는 동지들과의 만남에 힘을 넣었다. 누구나 조국땅에 와서 하루하루를 헛되게 생활하지 않은것 같다. 사람들을 만날수록 힘이 생기고 자신심이 커진다. 그는 동지들의 사업보고를 청취하고 떠나보낼 때마다 지금은 첫째도 둘째도 이미 터를 잡은 분야에 더 깊이 뿌리를 박으며 손을 잡을만한 사람들을 물색하는 사업에 전력을 기울이라고 당부하였다.
정시명을 기쁘게 한것은 중국관내에서 가까이 지내온 류동명이 미군정청의 통위부(괴뢰국방부의 전신) 부장으로, 송호정이 괴뢰국방경비대(괴뢰군의 전신) 총사령관으로 등용된것이였다.
부산부두에 하지를 마중하려 그들이 나타난것이 우연이 아니였다. 그들은 애국에 눈을 뜬 인간들이다. 일찌기 망국의 비운에 가슴을 치며 압록강을 넘었던 이 나라의 선각자들이다. 군부의 실력자들이 애국의 편에 확고히 몸을 담는다면 두말할것없이 여러모로 요긴한 도움을 받으리라는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미심쩍은것도 있었다. 그들이 무슨 돌풍에 휘감겨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서울에 와서 속심이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하는것이다. 미국놈들의 눈에 걸려든 리유가 의심쩍다. 두 인물이 다 미국놈들의 시중군치고 제일 고급한 자리에 틀고앉았는데 그게 어디 좀해서 차례지는 자린가. 8. 15후의 급변하는 정치기류에 재빨리 날개를 펼쳤다면 그건 분명히 미국놈의 정책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동조하는 인물이라고 평정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정시명은 송호정이나 류동명이 벼슬자리가 탐나서 애국의 초지를 마른 나무가지 꺾어버리듯 하고 외세에 아부할 비루먹은 인간들이 아니라는것을 굳이 믿고싶었다.
(아, 아, 송호정, 자네만이라도 뜻을 거두지 말아주게. 자네가 잡은 칼에는 제발 민중도살의 피가 발리지 않게 해주게.)
정시명은 친구를 위해서 애타는 심정으로 바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