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구름깔린 서울
2
정교하게 만들어진 요트는 바람을 등에 달고 거친 물결에도 크게 요동을 치지 않고 쾌속으로 달렸다.
지금도 맥아더와 애치슨의 이야기들이 구절구절 어지럽게 떠올라 신경을 자극하였다.
하지는 현해탄의 사나운 물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브라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브라운은 귀밑머리가 희슥희슥한 신사풍의 무관이다. 첫 인상에 정숙이 깃들어보이고 무게와 인내가 어려있어 믿음이 간다.
하지는 브라운이 정통 앵글랜드족의 후예라는 말을 들은바가 있다. 영국에서 앵글랜드족은 전통과 례의를 존중하고 사람들을 대상하는데서 원만하다고 해서 《영국신사》라는 말을 만들어낸 족속이다.
아놀드의 길다란 상판이 떠올랐다. 어찌보면 그는 실패한 인간이다. 오끼나와에 군단이 선견대로 상륙할 때 부대지휘를 훌륭히 했다고 대통령의 감사까지 받도록 내세웠었던 인간이다. 그런데 그 인간이 서울에 와서 조선사람들과의 정치전에서는 패자가 되여 군복무를 만기전 해임이라는 비참한 최후로 마치게 되였다.
아놀드에 대한 해임은 사실상 하지 자신의 해임이나 같은것이였다. 아놀드대신 자기가 심문대에 올라서야 했었다. 그래서 하지는 아놀드의 해임건이 상정되였을 때 군인다운 솔직성과 량심을 가지고 자기를 심판하고 벌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아놀드는 자기와 같은 스코트족의 후예이다. 스코트족은 영국에서도 다혈질로 평가를 받는 족속이다. 용감하다는 평판을 듣는 반면에 덤빈다는 흑평도 듣는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도이췰란드군도 스코트계 영국대대가 나타났다면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고 한다. 하지도 아놀드도 이걸 큰 자랑거리로 여기고있었다.
이제 브라운은 또 어떤 운명을 강요당하겠는가. 군사외교관으로서 실력을 보였다는 저 사람이 서울에서도 자기의 명예를 보존할수 있을가. 아놀드와는 비교적 티각태각없이 호흡을 잘 맞춰왔는데…
(스코트와 앵글랜드라…)
하지는 속으로 쓰겁게 웃었다. 이 두 종족은 예로부터 마주서면 조화가 되지 않아 집안에서도 마을에서도 지어 정치무대에 나가서도 자주 충돌하여 왔다.
《중장각하.…》
브라운이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박은채 조용히 말했다.
《난 워싱톤을 떠나올 때 국무성 태평양지역 담당차관보 테일러를 만났습니다.》
《테일러?…》
하지가 흥미가 있어 물었다.
《그는 나에게 당신이 제출한 보고서와 아놀드소장이 제출한 보고서를 보여주었습니다.》
《보고서를?…》
《네. 당신은 그 보고서에서 리승만세력과 김구세력을 배제한 보다 온건적인 집단을 물색하겠다고 하였던데…》
하지는 생각이 났다. 그것은 트루맨의 요구에 따라 백악관에 보냈던 긴급전보문보고였다.
보고서는 이렇게 되여있었다.
《미국은 남북의 좌익세력을 막아나가기도 벅찬데 우익진영에서 뿔뿔이 싸움질만 하고있으니 우리는 세 방향에서 걷어채우는 축구공신세가 되였다. 나는 서로 물고뜯는 두 파벌- 리승만과 김구계렬을 정치무대에서 제거하고 보다 조용한 집단을 물색하려고 한다.》
트루맨이 이 보고서를 보고 국무성에 내려보냈던지 테일러가 아놀드에게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긴급전문을 보내왔었다.
하지는 아놀드가 합의를 받으러 들고왔던 보고전문이 생각났다.
아놀드는 보고문에서 하지의 립장을 이렇게 지지해나섰다.
《남조선의 주요인물들중 손꼽히는 인물은 려운형이다. 그는 정치가로서의 훌륭한 풍모와 실력을 겸비하고있다. 그러나 그는 좌익에 기울어지고있다. 김구는 강하지만 지나친 민족성으로 페쇄적이며 독선적이고 대세에 둔감하여 점차 지반을 잃고있다.
리승만은 정치력이 있고 통솔력도 있지만 사리사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국민적호응을 받지 못하고있다.
극히 소수의 무사공정한 인물이 있는데 그 으뜸을 차지하는 사람은 김규식이다. 미국은 이러한 세력들을 조화시킬수 있는 인물을 찾아내야 할것이다.》
브라운이 말을 이었다.
《마샬국무장관도 만났는데 미국이 관할하고있는 점령국중에서 남조선정치정세가 가장 불투명하다고 우려를 표시하였습니다. 마샬은 특히 금후 조선반도를 유라시아대륙의 동쪽을 봉쇄하기 위한 미국의 전초기지로 확보하자면 조속한 시일내에 미군정청을 대신할수 있는 현지통치권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건 옳소. 맥아더와 애치슨의 말도 쥐여짜면 그 소리거든.》하며 하지는 저도모르게 한숨을 내쉬였다.
남조선정객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골부터 쑤신다. 그는 브라운이 지금 자기에게서 남조선의 현지통치집단을 내오기 위한 미군정청의 공작실태를 알고싶어한다는것을 느끼자 동업자로서 허심탄회하게 말꼭지를 떼놓았다.
《소장도 이제 협상수석으로 부닥쳐보게 되겠지만 코코에 짜증부터 앞서는게 그 일이요. 지금까지 우리가 통치권의 중심에 내세우려 했던 인물들에 대한 평정은 소장이 보고서에서 보고온 그대로요.》
《난 워싱톤에서 전략정보국 부국장 하던 구펠로의 방문도 받았습니다.》
《구펠로? 흥.》
하지가 이마살을 찌프리고 코방귀를 뀌였다.
브라운이 호기심이 어린 눈매를 지어보였다.
《그 사람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있군. 아마 리승만을 잔뜩 추켜올렸겠지.… 하긴 우리도 처음에는 미전략정보국에서 품을 들여온 그 늙다리를 중심인물로 내세우려고 했던건 사실이요. 그건 이미전에 워싱톤에서 기정공론으로 굳어진것 같았소. 우리도 그에 따라 리승만과 대치될수 있는 일체 세력의 통치권접근을 차단해버리였소. 가장 위력한 집단은 김구세력이였소. 우린 벌써 45년 3월부터 장개석이 김구가 주석으로 있은 상해림시정부를 독립된 조선의 정통정부로 승인해달라고 요구해왔지만 일축하여 버렸소. 김구가 해방직후에 정통성있는 망명정부의 수반자격으로 귀국하겠다고 여러차례 요구해왔을 때도 끝내 개인자격으로 들어오도록 하였소. 이렇게 한데는 미국이 남조선에서 지배체계를 철저히 구축하기전에 다른 형태의 권력집단의 존재를 불허하려는 요구로부터 출발하였지만 다른 하나의 중요리유는 리승만의 세력팽창을 도모하려는데 있었소. 우리는 지어 김구일행이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서울에 한발 먼저 들어온 그의 측근세력들이 환영군중을 끌고나올수 있다고 예견하고 그의 도착을 비밀에 붙이기까지 하였소. 사실 김구가 들어오자 미군정청과 리승만, 김구와의 사이에는 삼각관계가 조성되고 그 삼각이 매우 복잡해지기 시작했소. 그런데 조선사람을 바지저고리로 알고있는 시대착오적인 백악관과 국무성사람들은 그들을 포용하여 리승만을 축으로 하는 현지통치권을 일본식으로 만들어내라고 매일같이 들볶아대오. 한데 이제 당신이 만나보면 첫눈에 짐작이 가겠지만 리승만이라는 위인은 한마디로 권력에 로망이 든 늙다리요. 김구세력을 배격하고 우리가 난처할 정도로 친미일변도로 기승을 부리니 이 나라 국민의 감정을 너무 거슬려놓는단 말이요. 그것이 오히려 우리 미국의 정치적립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해서 우릴 난처하게 만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요. 리승만은 중간세력과 김구세력을 덮어놓고 좌익으로 몰아부치고 공격을 해대오. 아마 친미지레대를 든든히 하려는 심산이겠지. 그들을 끌어당기려는 우리 군정당국에 대해서도 불질이요. 결국 내나 아놀드가 리승만의 정치적무게를 재평가하지 않을수 없었던거요.》
《그래도 미국무성에서는 리승만을 일본의 요시다와 같은 인물로 평가하는것 같던데요.》
《그게 우리 현지인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비극이요. 요시다의 친미를 어떻게 리승만의 친미와 비할수 있단 말이요. 요시다는 신사요. 그의 친영친미는 국가의 흥망을 건져보려는 그 나름의 고민과 세계의 정치방식과 력학관계를 깊이 연구하고 분석한데로부터 나온 결단이요.》
하지는 언젠가 자기의 정보담당고문 노불이 하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국무성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그건 중장각하의 고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요시다는 오래동안 런던에서 일본대사로 일하면서 서방세계의 정치와 문물에 대해 깊이 통찰했다고 합니다. 그가 일본내각에서 추방되여 특고(일본의 고등경찰)의 독감방에 갇혀있으면서도 히틀러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영국과 미국과의 제휴를 일관하게 주장한것은 그 인간의 선견지명이였다고 봐야 옳을것입니다.》
《리승만은 다르지요. 그 인간은 이 나라의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의 힘을 빌리려는 단순하고 너절한 욕망으로부터 미국에 철저히 기생해 사는 늙은이요. 이런 인간들을 내세우는건 우리의 수치요.》
《김구는 어떻습니까? 일부에서는 서부도이췰란드의 아데나우어에 비하기도 하던데요.》
《근사한 비유요. 민족주의자들속에서는 두령으로 우상화되고있소. 물론 정권야심이 큰 인물이요. 김구는 림정이요, 림정은 민족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요. 그렇기때문에 김구는 자기들만이 남조선에서 정통정부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자처하고 그밖의 세력들에 대해서는 배척하고있소. 김구세력이 우리가 부활시킨 친일적인 세력들을 일괄적으로 배격하는데 문제가 있소. 그들을 곱게 봐주려는 우리에 대해서도 함부로 삿대질이요. 물론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질시하는건 진주직후에 우리가 저네들을 정계에서 소외시켜왔다는 원한도 있지요. 우린 사실상 국제적인정을 받으려던 그네들의 노력에 대해서도 걸음마다 좌절시켜버렸으니까. 영국과 프랑스외무상들이 김구의 특사를 현재로서는 조선의 림시정부승인문제를 고려할 리유가 없다고 외면해버린것은 다 우연이 아니요.》
브라운은 하지의 말을 주의깊이 들으면서 이제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이 만만치 않으리라고 예상되였다. 미쏘협상에는 방청으로 남북정당, 단체대표들도 참가하는데 정무담당군정장관이라는 직함을 내놓고라도 어차피 하지가 떠올리는 인물들과 만나야 하는것이다. 그리고 싫던좋던 자기를 생소한 서울땅에 보낸 펜타곤과 국무성의 요구대로 하지옆에서 정치권의 편성사업을 진두지휘하라는것이 틀림없다.
브라운은 피뜩 국무성에서 보아두었던 조선관계자료들중에서 유모아적인 한건의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기사를 보면서 그는 현지의 점령군사령관이 정권인수를 노리는 거물급정치세력을 지나치게 비하했다고 비판적시각에서 평가했는데 하지의 고충을 들어보니 리해가 되였다.
《각하께서 올봄에 벌려놓으신 기자회견내용이 생각납니다. 난 그 기사를 읽으면서 중장각하의 제스춰가 지나치다고 속단하였지요.》
브라운은 그때의 자기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도 인차 상기되는지 껄껄 웃기부터 하였다.
《아, 그것말이요?… 국무성이 짜준 각본이였는데 미련을 부리는수밖에 없었지요. 정치라는게 참 어떤 의미로서는 너절한 놀음이요.》하고 하지는 또다시 껄껄 웃고나서 말을 이었다.
《그날 우린 남조선에서의 미군정의 역할이라고 일부러 기자회견의 제목을 크게 걸어놓고 김구세력을 견제해서 포섭하려는데 목표를 두었지요. 기자회견의 조직자인 노불은 프랑스의 〈몽드〉신문 기자에게 돈을 찔러주고 김구의 상해림시정부의 성격과 그에 대한 미군정의 견해를 묻도록 해놓았소.
나는 이미 노불이 써준 각본을 그대로 외웠지요.
〈글쎄요. 난 조선에 림시정부가 존재했다는것을 모르고있었는데… 내가 듣건대는 중국의 동남부지역에 조선사람들의 큰 테로집단은 있었다지만…〉 그 내용이 미국과 서방세계는 물론 남조선의 신문, 잡지들이 받아물어 대서특필로 세상에 전해진겁니다. 하하…》
《중장각하, 국무성은 필시 밀어부치기로 고단수의 효과를 노렸겠는데 그만 필요이상의 자극제로 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하하 옳소. 필요이상의 자극이였지요. 내 그말 하나때문에 혼났소. 고단수의 계략이 아니라 상대역을 잘못 파악하고 서투른 연기를 보인 졸작이였소. 노불이 설명하기를 되게 때려 매여달리게 하는 전술로 한번 해볼만 하다 했는데 웬걸요… 역반응이 일어났지요. 김구세력은 국제적인 승인으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려던 시도가 우리의 모욕적인 평가로 랭대를 받게 되자 매달리기는 고사하고 더욱 고집스럽게 미군정청은 물론 리승만과 친일자산가들의 집단인 한민당을 반대하는 길로 나갔지요. 그러니 어떻게 되였겠소. 혹 떼려다가 혹 하나 더 얻은 셈이지요. 백악관이나 국무성은 대양건너에서 입방아나 찧지만 조선사람들을 너무 모른단 말이요.》
《그래, 그 조용하다는 3의 인물들은 어떻습니까?》
브라운이 다시 원점에로 화제를 몰아 백악관에 제출한 보고서내용을 상기시키자 하지가 또다시 껄껄 웃기부터 하였다.
《왜요?… 국무성에서 배격을 당하였습니까?》
브라운은 국무성관리들의 립장을 듣고온지라 지레짐작하면서도 넌지시 물었다.
《아니… 배격이라니?… 전적인 지지를 받았지요.》 하지가 웃음기를 지우고 다시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트루맨대통령도 우리의 제안을 승인하고 우익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사업을 조속히 끝내도록 지시를 보내왔지요. 그래서 걸려든게 〈자주련맹〉총재인 김규식이라는 사람인데 김구의 밑에서 부두령을 하던 사람이였소. 사람이 조용하면서도 강직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지요. 내방에 자주 불러들이고 공식장소에 나가서는 가까이 세워놓으면서 김규식을 장차의 정상인물로 내세우려 한다는 정보를 여론에 흘려놓았소. 사회적공감대가 어느 정도이겠는지 타진하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김규식이 아무리 우리의 후원을 받고 날고뛰여도 김규식이쯤은 하인취급하는 김구나 리승만을 옆에 낄만 한 재목은 못되더란 말이요. 결국 우린 김규식의 정치력을 재인식하고 방향전환을 했는데 국무성에서 천재적인 인간을 천거해왔지요.》
《천재적인 인간? 닥터 제이손을 말입니까?》
《옳소. 서재필이지요.》
브라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하지가 갑자기 실성한 사람마냥 또 요란스럽게 웃기 시작하였다. 우묵하게 패여든 가뜩이나 작은 눈이 아예 지워져버리고 말이발처럼 굵은 앞이가 이몸채로 드러났다. 그는 브라운이 지켜보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을 야단스럽게 흔들어대며 제풀에 눈물이 글썽해서 폭소를 그치지 않았다.
브라운은 처음으로 상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첫 인상에 세모진 얼굴이라는것이 두드러졌는데 얼굴의 륜곽을 뜯어놓고보아도 다 세모진것들이 오종종하게 이어져있는것 같다. 이마도 삼각으로 보이고 눈도 꼭 세모가 져있다. 턱도 세모진 턱이요 코줌방도 세모가 뚜렷하다. 그 세모진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세모진 얼굴을 만들어놓았는데 저렇게 웃고보니 얼굴의 특징이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그만에는 브라운도 영문을 알길 없으면서도 주빗이 따라웃었다.
하지는 한참 그렇게 발작적으로 웃고나서야 간신히 자신을 억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런걸 말해서 신문쟁이들은 정치만화라고 부르더구만.》
하지가 다시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이야기하였다.
하지가 엮어놓은 정치만화란 이런것이였다.
… 김규식이마저 통수권의 후보에서 지워버리자 국무성에서 소개장을 보내왔다. 서재필이라는 미지의 인물이였다.
그에 의하면 서재필은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주도자의 한사람으로서 김옥균과 같이 일본에 망명했다가 미국녀자와 결혼하여 미국시민권을 따낸 철저한 미국계의 조선사람이라는것이였다. 서재필은 이미 미국의 압력밑에 1894년에 리씨조선이 한국(대한제국)으로 독립을 선포했을 때 김홍집내각의 고문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닥터 제이손이라는 미국식이름까지 가지고 미군의 군의계통에서 복무하였다. 하지는 전혀 파악이 없는 인물이였지만 국무성이 직접 추천해온 인물인데다가 경력으로 보아 리승만이나 김구를 대적할만 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동의하였다.
하지는 초기에 서재필을 자기의 개인고문자격으로 옆방에 앉혀놓고는 그를 장차 세워질 남조선《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할것이라는 소문을 광범하게 류포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리승만과 김구가 호상간의 맹렬한 비난과 공격을 중지하고 미군정에 바싹 접근하도록 심리적충격을 주자는것이였다.
이러한 충격료법은 일정한 기간에는 효험이 있었다. 그러나 날이 지남에 따라 그로 인한 후과는 치명적이였다. 서재필의 몸값이 하지도 모르게 항간에는 너무도 잘 알려져있었던것이다. 그가 평생에 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였다면 김옥균의 동지로 나섰다는것과 《독립문》건설에 단독 출자한것이다.
서울서대문밖의 무악재에 리조의 태조 리성계가 명나라 황제의 사신을 례의를 갖추어 영접한다며 세워놓은 《영은문》이라는 루각이 있었다. 이것이 1896년경에 와서 사대주의의 극치로 규탄을 받게 되였다. 그래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기로 공론이 되여 빠리 어드와드개선문의 축소판과 같은 독립문이 서재필이 기부한 돈으로 설계되고 건립되였다. 그런데 이 일로 일약 《독지가》로 이름을 날린 서재필의 인금이 바로 그 《독립문》앞에서 그것도 하지까지 지켜보는 속에서 땅바닥으로 추락될줄은 하지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였다.
《독립문건립 50주기 축하식》이 내외의 명사들의 참석밑에 열렸는데 여기에 하지도 참가했다.
서재필이 80객이 된 몸으로 주빈으로서 처음으로 연탁에 올랐다. 그런데 《여러분!》하고 겨우 우리 말을 번진 다음에는 입을 헤벌린채 그 자리에 굳어진듯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모국의 말을 다 잊어버린탓으로 그 다음말을 이을수 없었던것이다. 말을 그냥 하자니 조국사람들앞에서 차마 영어로 할수도 없고 조선말을 하자니 한마디도 번질수 없어 뒤로 훌렁 벗어진 대머리에 땀발만 서리고있었다. 행사참석자들이 영문을 알길없어 어리둥절해졌는데 사회자가 가까이 다가가서 뭐라고 했다. 그제야 서재필은 죄송하다고 먼저 사죄부터 하고 영어로 축사를 해나갔다. 래빈으로 초대된 서울적십자병원 원장인 서양인이 통역으로 나서서 서재필의 영어말을 조선말로 통역을 하는 웃지 못할 희극이 연출되였다. 행사장이 술렁거리고 여기저기서 경멸과 조소어린 비웃음과 지탄의 목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자리에 서있던 하지까지도 속이 한줌만해져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싶은 심정이였다. 고국이 준 이름을 갈고 말까지 다 잊어버린 인물을 나라정사의 중심에 앉히려 한다는것부터 조선사람들의 감정을 미처 계산하지 못한 정치적만화였다. 리승만과 김구는 물론 적지 않은 정당, 사회단체들이 하지에게 공식대표들을 파견하여 서재필을 권좌에 앉히려 한다는 소문의 진의를 따지고들면서 이 나라의 존엄과 체면에 대한 로골적인 무시라고 규탄하였다.
국무성의 연출에 놀아난 하지는 곤욕만 치르었다.
남조선의 정국은 더욱 혼란과 무질서에 빠져들고 일은 하지의 욕망대로 진척되지를 않았다. 김구와 리승만, 김규식 그리고 려운형과 같은 인물들의 반목질시는 더욱 골이 깊어 하지의 재간으로 더는 메울수 없게 되였다.…
《국무성것들이 하는짓이란 이렇소.》 말끝에 하지는 또한번 한바탕 폭소를 터뜨려놓는다.
브라운도 연탁에 올라 진땀만 바질바질 흘렸을 서재필의 가련한 몰골을 그려보면서 따라웃었다. 그러면서도 만사를 초탈한것처럼 태연히 웃고있는 하지에게 깊은 동정이 갔다.
(나도 저렇게 숨가쁜 처지에 빠지지 않을가.)
브라운은 이런 생각이 들자 자기도모르게 주먹을 꽉 틀어잡았다.
(그렇게는 되지 않을것이다, 그렇게는…)
브라운은 속으로 강심을 다지며 한마디 했다.
《각하, 최선을 다해 각하를 보좌하겠습니다. 광복정국이니 혼란을 피할수야 없겠지요. 하지만 평정은 되리라고 믿어마지 않습니다.》
하지는 외교적인 례의가 다분히 어려있는 신임보좌관의 결의를 듣자 놀란듯 한 눈찌로 그를 힐끔 돌아보고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도 자신감에 넘쳐 박력을 찍는 그의 말투가 슬그머니 비위를 건드렸던것이다. 그래 《고맙소.》하려고 하던 답례를 버리고 고개를 시큰둥히 꺼떡거려보일뿐이였다. 그는 한참후에야 시들한 어조로 한마디 하였다.
《잘해보시오. 마샬은 당신이 협상의 명수라고 말해줬소.》
《과찬입니다, 중장각하.》
브라운은 직속상관의 돌변한 태도와 비꼬는듯 한 말에서 이제부터 익숙되여야 할 인간의 성격적기질의 일단을 재빨리 포착하고 그에 맞게 싹싹해진 어조로 공손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