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별이 총총한 밤
1
그날 서안의 여름밤은 별이 총총하였다.
어느덧 자정이 넘어 해종일 복작거리던 도시는 깊은 꿈나락에 떨어졌다.
《도적을 주의하시오.- 자정이 넘었습니다.- 밤도적을 주의하시오.-》
서서히 다가왔다가 서서히 멀어져가는 야경군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졸음기가 실린듯싶다. 다만 어데선가 멀리서 들려오는 둔중한 포소리만이 국내전쟁의 동란속에 시달리는 광막한 대륙의 몸부림인듯 간간이 어둠을 흔들어놓군 한다.
온 시가지가 어둠의 장막에 싸인 이 시각에 도시의 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우중충한 시청건물과 마주선 자그마한 2층건물의 어느 한 방에서만은 불빛이 꺼지지 않고있었다.
이 도시에서 장개석의 국민당을 대표하고있는 서안판사처 사무실이였다.
조용히 방안을 거닐고있는 사람은 몇해전부터 서안판사처 처장으로 사업하고있는 정시명이였다.
보기좋은 보통키에 왕붓같이 굵고 진한 눈섭과 때일찍 벗어진 시원스러운 이마를 내놓는다면 별다른 특징이 없어보이는 사나이다.
쉰전이지만 고행에 찬 인생의 자국이런듯 어느덧 머리에는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하고 눈귀에는 가시주름발이 굵게 잡혀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 보면 시원스러운 이마밑으로 호수처럼 그윽하게 빛나는 두눈에는 높은 지성과 존엄이 깃들어있고 두툼한 입술은 내키지 않으면 하늘이 무너져내려도 다시 열릴것 같질 않아보이는데 누구라도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준수함과 세련미가 조화롭게 비껴있었다.
정시명은 문가에 다가가 창가림막을 올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제낀다.
밤하늘에 길게 꼬리쳐간 은하수를 따라 멀리 동녘의 하늘가에로 눈길이 갔다.
그 하늘밑에 고향이 있다. 홍안의 시절에 눈물을 뿌리며 떠나온 고국산천이 있다.
안겨준것은 가난이요 남겨준것은 설음이였건만 그래도 하루한시 잊어본적 없는 사랑하는 조국, 세월이 갈수록 더욱 애모쁘게 가슴을 파고들고 걸음걸음에 감겨드는 어머니의 품.
독립연에 오리라
광복의 봄을 안고오리라
압록강에 푸른 맹세 남겨두고
타향살이 흘러흘러 스무세월 지났구나
내 총검 비껴들고 혈전으로 만리
대륙의 광야에서 흰서리 맞건만
조국아, 그대 위해
내 바침이 없구나
허나 그대는 내 심장에 가득차있는
나의 사랑
나의 량심
나의 꿈이거늘
만리타향에서 보내는
아들의 축복을 받아다오
그대 위함이라면
목숨도 초불처럼 태워갈
사나이의 충정을 받아다오
끓어오르는 마음을 시구에 담아보는 정시명의 눈가에 뿌잇한 안개가 서려든다.
이마적에 그가 여느때없이 애틋한 향수에 취해들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는 사연이 있었다.
조국이 해방된지 한해가 가까와오자 중국에서 알게된 수많은 인물들이 매일같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저 찾아온다.
그중에는 일찍부터 중국혁명을 피로써 도와준 혁명가들도 있고 장개석의 국민당계에 망라되여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김구가 두령으로 있는 상해《림정》을 비롯한 민족주의적인 정당과 단체들에서 이름을 날리던 고명한 인물들도 있었다.
모두들 신바람이 났다. 조국의 어느 한 기관에서 초청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지레 남쪽의 한 기관의 중책을 맡아가지고 간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누구라없이 묻군 한다.
《정향(정시명이 압록강을 건너선 후 왜놈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줄창 써온 가명이였다.)선생, 언제 떠나시겠습니까?》
친분이 두터워진 중국사람들도 자주 물어왔다.
중국혁명에 바쳐진 그의 숨은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있는 중국의 동지들도 그렇게 물어왔고 그를 아직도 자기들의 세력권인물로 알고있는 장개석의 국민당중앙의 고위인물들도 그렇게 물었다.
각양각색의 인물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정시명은 헌헌히 웃으면서 짤막히 대답했다.
《인차 떠나렵니다.》
그러면 그들은 또 이렇게 물었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정시명은 여전히 짤막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어정쩡한 대답에 상대방들은 자못 놀라운듯 고개를 기웃거리군 한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정시명의 심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지금도 정시명은 그 애매몽롱한 대답에 매듭을 짓지 못하고있다.
어디로 가려는가? 평양인가, 서울인가?…
무엇인가 인생의 중대결단이 요구되는 물음이다.
그것은 조국을 위한 복무를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량심의 결론이 요구되는 물음이다. 어쩌면 이제 이어질 삶의 질이 평가되고 지금까지 헤쳐온 생의 길이 총화를 받게 될 엄숙한 의미가 거기에 있다.
《조국을 위한 복무…》
정시명은 벌써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걷어안고 고민하여왔다.
이런 생각에 휘말려들 때면 먼저 떠오르는것이 있다.
그것은 경애하는 김일성동지께서 평양에 개선하시여 조국인민들에게 하신 열화같은 호소이다.
정시명은 김일성장군님의 개선연설을 조직에 대한 지도사업차로 대련에 갔다가 들었다.
전파를 타고 이국의 먼곳까지 울려오는 김일성장군님의 육성을 처음 접했을 때 정시명은 쇠물처럼 끓어번지는 환희와 격정을 금할길 없었다.
오매에도 그리웁던 위대한 장군님!
백두산을 진감하는 총포성이 신문과 방송에 실려 들려올 때면 조선사람으로 태여난 긍지와 자부심을 비로소 실감하며 한달음에 달려가 슬하에서 피와 땀을 바치고싶던 민족의 어버이!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라는 장군님의 그 애국적호소가 귀전을 울리고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날 정시명은 비상한 흥분과 열정에 휩싸여 속깊이 부르짖었다.
《가자, 어서 가자. 하루빨리 그이를 받들어 미력하나마 나의 성의를 건국에 바치자.》
그는 자기 사업을 하나하나 마무리하여가면서 장군님의 그 간곡한 건국의 호소에 몸과 마음을 바쳐나갈 자신을 그려보며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였고 행복스러웠다.
날과 달이 바뀌여가자 정시명은 조국에 대한 복무라는 이 문제를 걸고 자기의 미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장군님의 애국적호소에 나는 무엇으로 호응해야 하는가?
근래에 와서 정시명은 이렇게 문제를 걸어놓고 갈라진 조국형편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자기의 몫을 찾군 하였다. 나름으로의 분석과 평가를 내리고 자기가 나설 자리를 더듬었다.
조국땅에서는 두말할것없이 거창한 전환이 일어나고있다. 사회도 사람들도 산천도 인민의 의사에 맞게 훌륭하게 제모습을 갖추고있다. 세기적변혁의 중심에 세상풍파 다 이겨내신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웅 김일성동지를 확고히 모신 조국땅의 눈부신 변혁이 눈앞에 보이는것만 같았다.
얼마나 기쁘고 배심이 든든해지는 일이랴.
조국을 다녀온 사람들도 한입처럼 말하며 좋아한다.
《인제는 우리 조선이 살아났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모셨으니 내 나라의 앞날은 창창하다.》
그러나 서울소식은 들을수록 짜증이 앞서고 심상치 않았다.
미태평양군 총사령관 맥아더놈이 남조선전역에 살포한 《포고령 1호》에서 늘어놓은 수작질만 보아도 자자구구 민족의 전도에 불길한 예감을 준다.
《…
본관은 태평양방면 미군총사령관으로서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북위 38°선이남의 조선 및 조선인민에 대한 군정을 펴면서…》
군정이라니? 이 무슨 당치 않은 궤변이냐.
미국이 장장 반세기에 걸쳐 일제침략자를 반대하여 삼천리금수강산을 붉은 피로 적셔낸 나라에 군정을 실시한다니 이것이야말로 황당무계한 궤변이다.
정시명은 맥아더의 포고문을 여러번 읽었는데 그때마다 굴뚝같이 솟구치는 억하심정을 누를길 없었다.
군정이요, 점령이요, 온당치 않은 횡설수설로 엮어진 맥아더의 포고는 매조항과 문구들이 무엇인가 재난의 먹구름을 배태하고있었다.
딱히는 알수 없어도 확실히 남쪽은 엄청난 불행을 걷어안고 날을 따라 력사의 악순환에 깊숙이 빨려들고있다. 쏘미공동위원회가 무엇인가 해줄듯싶어 한가닥의 빛을 보며 라지오의 파장을 맞추군 하지만 듣고나면 한숨과 실망만이 남을뿐이다. 미국놈들의 소갈머리가 벌써 짐작이 간다. 하긴 한푼이 곯아도 움직이지 않는 미국이 어찌하여 남조선에 숱한 군력과 정치, 경제, 외교적인 품을 들이고있겠는가. 미군정요원만 하여도 1 750명이나 쓸어들었다고 하니 그것들이 남녘을 어디로 끌고가려고 하는지 길게 생각할나위가 없다.
분명히 미국놈들은 대국들이 모여들어 저 유럽의 히틀러제국을 토막내서 깔고앉듯이 조선의 허리우에 아직은 가늘게 지나간 38분계선을 고착시키려고 하는것 같다.
광복된 조국땅에 부닥친 분렬이라는 위험천만한 재앙과 완전독립이라는 절박한 과제가 그의 심중을 괴롭히였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조국의 가장 훌륭한 아들됨을 자부하는 이 시대의 담당자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조국이 애타게 가리키는, 인민이 내세우는 이 절박한 력사의 요청을 회피할수 없지 않느냐.)
시간이 흐를수록 험악해지기만 하는 서울의 흉흉한 소식에 접할 때마다 정시명은 통분함을 못 이겨 밤을 뜬눈으로 밝히다가는 이런 생각에 목이 메군 하였다.
그러나 그게 헐하게 마음속에 자리잡는것은 아니였다. 서울에 가야 한다는 량심의 지남침이 굳어질수록 헤쳐온 40여년 인생의 돌기가 주마등처럼 연줄연줄 풀려지면서 그의 가슴을 벅벅 훑어내렸다.
가난과 천대와 그리고 시련과 자기희생으로 이어온 험난했던 40여생을 더 엄혹할지도 모를 고난의 자국으로 이어야 한다는것이 너무도 야속하다.
평온과 안식에 대한 인간본능의 유혹이 집요하게 그 모든 량심과 리성의 선택을 가뭇없이 밀어던지군 하는것이다.
그럴 때면 속깊이에서는 또 한명의 정시명이 불끈 성이 돋쳐 항변을 들이대는것이였다.
(투쟁의 리유와 동기가 어떻든지 그 모든 기저에는 행복에 대한 인간고유의 갈망이 어려있다. 인간이란 자고로 행복할 권리를 위해 그에 도전하는 온갖 불의와 싸우는것이다. 그 권리를 향유하고저 애써 헤쳐온 고난의 길이 마침내 행복의 대문에로 잇닿은 이 시점에 와서 구태여 나라고 차례지는 행복의 몫을 마다할 리유가 있는가. 항차 나는 북녘에 부모처자를 두고있는 사람이다. 내가 고향으로 가는것은 누구도 시비를 걸수 없는 응당한 권리가 아닌가.)
이렇게 정시명은 스스로 걸머쥔 고민거리를 놓고 복잡한 마음속의 격론을 벌려왔었다.
정시명은 창가에서 물러나 쏘파에 등을 붙이고 담배를 붙여물었다. 상해민중일보사에서 기자노릇하던 시절에 어느 싱거운 친구가 담배를 붙여물면 생각이 잘 떠오른다는 말을 해서 입에 붙이기 시작한것이 이제는 습벽으로 굳어져버렸다.
한번은 의사직업을 가진 한 동지가 찾아와 정시명이 감옥과 적구투쟁에서 얻은 위병을 고쳐주겠다고 며칠 머무른 일이 있었는데 그가 줄담배질을 하고 폭주를 하는것을 보고는 아연해져서 금주금연이 첫째가는 비방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비방이 그럴듯 하여 일후에 정시명은 주량은 일상시에 한잔, 정 기분이 동하는 자리에서는 석잔으로 줄였지만 한꺼번에 서너대씩 이어대는 줄담배기호만은 종시 버리지 못했다.
정시명이 다시 담배를 갈아대는데 조심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시명은 담배불을 비벼끄고는 나들문에 다가가서 바깥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똑-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는데 마치도 전건 두드리는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울렸다.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것은 정시명의 가까이에서 사업하는 동지들뿐이다.
그는 마음을 놓고 문을 열었다.
《정향선생님!》
키가 륙척이고 얼굴이 검실검실한 장개석군 중위복을 걸친 청년이 성큼 들어선다.
《마동열이 이 밤중에 어떻게?》
마동열은 10년전부터 정시명의 곁에서 사업해온 사람이였다.
며칠전에 상해에 보내면서 그곳에서 며칠간 머물러야 할 일감을 주었는데 이렇게 때이르게 되돌아선데는 무슨 일이 있는것 같다.
정시명은 그의 손목을 잡아 쏘파에 앉히고 부채를 쥐여주는데 마동열이 갔다온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은송선생님을 모시고 왔습니다.》하고 말했다.
《은송선생?… 어디에 계시오?》
정시명이 뜻밖의 소리에 의아쩍어하면서도 반갑게 마동열의 말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러는데 아래층에서 《은송이 올라갑니다.》 하는 걸걸한 목소리가 크게 나더니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2층으로 올라오는 나무계단이 쾅쾅 울렸다.
정시명이 문을 열고 마중하였다.
2층으로 중절모를 눌러쓰고 개화장을 든 60대의 건장한 사람이 성큼성큼 올라오고있었다.
은송이란 상해《림정》에서 외무차관으로 지내면서 근래에는 중국관내의 교포들을 묶어세워 민중독립당이라는 중도좌익적인 당을 만들고 그 위원장으로 있는 사람이다. 한때는 서울에서 공산당창건에도 관여하다가 동북 오지에 들어가 독립군에 참가하여 왜놈들과 맞불질을 벌린 일도 있는 반일지사이다.
그런가 하면 상해에 와서는 《림정》의 한직벼슬을 맡아가지고 중국국민당과도 관계하고 최근에는 중국공산당의 본거지로 되여있는 연안에도 들락날락하는 얼굴이 넓은 풍운아이다.
정시명은 일찍부터 복잡한 경력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진리의 길을 갈망하여 한생토록 모대겨온 은송의 인물됨을 헤아려 자주 상종하면서 품을 들여 혁명적인 영향을 주어왔다.
은송은 상해《림정》의 기본진이 다 서울에 들어간 오늘날까지 그냥 상해에 눌러있으면서 여전히 교포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자리를 뜨지 않고있었다.
그런데 얼마전에 정시명은 그가 관할하고있는 일부 인물들속에 리범석이 줄을 뻗치기 시작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리범석이란 일찍부터 장개석의 특무기관과 미국전략정보국의 첩자로 변질된 우익적인 민족주의자였다. 그놈은 분명 중도좌익으로 공인을 받고있는 민중독립당에서 심복을 키워 북조선의 주요기관들과 남조선의 좌익권에 끄나불로 침투시키려고 책동하고있었다.
이 소식에 접한 정시명은 그 수습을 위한 의견을 적어 마동열을 파견하였던것이다.
야밤삼경에 당자가 나타난것을 보면 무슨 긴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하지만 원체 사람이 좀 엉큼한데가 있어 속심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은송은 정시명의 손을 덥석 잡아 흔들고는 너스레부터 부린다.
《이 사람, 마중위, 말이야 제대로 해야지. 제가 나를 모시고왔나, 내가 저를 모시고왔지.》
은송은 중절모를 벗어쥐고 활활 바람질을 하면서 마동열의쪽을 돌아보며 한쪽 눈을 장난스레 쭝깃해보인다.
마동열이 정시명의 앞에서 무랍없이 엉너리질을 하는 은송의 거동에 입을 헤 벌리고 소리내여 웃다가 방을 빠져나갔다.
마동열은 오래전부터 중국관내에서 주먹이 드세기로 유명짜한 청년이다.
그는 일찌기 중국 무한의 격술훈련소에서 제일 높은 고단수의 격술을 수련하였고 그것으로 하여 장개석의 호위소대에까지 발탁되였다가 조선사람이라는 리유로 쫓겨났던 일까지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섬서지역의 일본놈들은 마중위라는 소리만 들어도 얼굴빛이 새까매지군 했다고 한다.
몇해전부터 동지들이 마동열을 정시명의 주변에 있도록 한것도 실상은 중요한 임무를 받고있는 그의 신변안전을 위한 대책이기도 하였다.
마동열은 마당에 나가 집주위를 한바퀴 돌아보고는 집뒤에 있는 련못가에 앉아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음들에 귀를 강구며 2층의 불빛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아직도 정적을 모살하려는 행위들이 여기저기서 그치지 않고있었다.
은송은 정시명이 권하는 차를 몇모금 마시더니 정시명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독립연에 오리라
압록강에 푸른 맹세 남기고
타향살이 흘러흘러 스무세월
하고는 소리내여 웃었다.
《시가 참 운도 좋고 가슴을 쿵 치는데가 있습니다.》
은송은 여전히 사람좋은 웃음을 입가에 벙글써 담고 롱절반 진담절반으로 말했다.
《어뿔싸, 그러니 남의 속비밀을 말짱 엿들었군요. 그래 언제 오셨습니까?》
《밤차로 서안역에 방금 내려 곧바로 왔지요. 아, 정향선생이 이렇게 향수에 젖어있을줄 알고 마중위가 려관으로 끄는것을 한사코 뿌리치고 깊은밤 감히 문턱을 넘어섰지요.》
그들은 다시 유쾌하게 웃으며 자그마한 원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향수라… 허허… 어떻게 이렇게 나타났습니까? 마동무에게 보낸 편지에 급하게 처리할 문제는 다 제기했는데요.》
정시명은 은송이 불원천리하고 상해에서 온게 자못 궁금해서 인차 사업에로 화제를 몰아갔다.
《정향선생, 내 지역장들을 불러놓고 정선생의 통보를 다 알려주고 긴급대책을 세워놓았습니다.
사실은 작별인사를 하러왔습니다.》
은송은 웃음을 거두고 대답하였다.
《작별이요?… 예. 그래서 오셨군요.》 정시명은 그럴법한 일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떠날 때가 되였지요. 그래 언제 떠나시겠습니까?》
《래일 아침차로 곧장 베이징쪽으로 갈가 합니다. 아까 역에 내려서 차표예약을 해놓았습니다.》
《베이징쪽이요?… 그건 어째서요? 서울로 가자면 상해에 되돌아가서 거기서 일본을 향한 배를 타고 시모노세끼로 가는게 제일 안전하겠는데요.》 정시명은 서울로 가는 전우들의 뒤를 여러번 봐준 일이 있어 이렇게 일깨워주었다.
《하, 그래서 내 오늘 정향선생 뵈오러왔습니다. 좀 의논도 하려고요. 사실은 난 평양에 가렵니다.》 은송이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평양에요?… 은송선생이야 서울에 가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옳습지요. 고향도 서울이고요. 뭐 평양에 가야 날 기다려줄 이도 없지요.
하지만 내 열백번 재여보고 결심한바입니다. 난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그분의 휘하에서 일하고싶습니다.》
《그래요?!》
뜻밖의 이야기에 정시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상해《림정》의 숱한 인물들이 서울길에 오를 때마다 그냥 상해에 남아서 바재이더니 그들과 뜻을 달리하고저 드디여 용단을 내린 모양이다.
정시명은 은송의 남다른 뜻과 기개가 반가와 자리에서 움쭐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두손을 뜨겁게 움켜잡았다.
《훌륭한 뜻입니다. 나는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정시명은 진심으로 그의 결단을 축복해주었다.
《정향선생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참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은송이 눈덕이 무겁게 드리우고 낯빛이 어두워진다. 길게 끌다가 여물구지 못하는 말끝에 깊은 여운이 어려있다.
그는 정시명의 파고드는듯 한 눈길을 슬며시 외면하더니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였다.
《말씀하십시오, 은송선생, 무엇때문입니까?》
《내 실은 결심을 굳힌지는 오래지만 막상 걸음을 떼자니 베찬게 있습지요. 평양이 나의 환국을 어떻게 받아주겠는지…》
은근히 긴장되였던 정시명은 그 소리에 사개가 탁 풀린듯 크게 웃음부터 터뜨려놓았다. 그렇지만 은송의 고충이 인차 가늠이 되여 가슴이 뭉클해올랐다.
은송의 지나온 생을 점검해보느라면 공산주의와 담을 쌓고 지낸 시절도 있었던것이다. 그게 은송의 명치에 옹이져 내려가지 않는 모양이였다.
그러나 정시명은 그것으로 해서 평양길을 념려하고 죄의식을 갖고 모대겨왔을 그 심중이 더없이 미덥고 진실하게 느껴졌다. 무릇 사람들치고 한생에 허물이 없을 인간이 몇이 되겠는가. 문제는 생겨난 허물을 돌아보며 어떻게 평가하고 그 허물에서 어떻게 교훈을 찾아내는가 하는것이 중요하다. 이런 속에서 인간은 수양되며 완성되여가는것이다.
정시명은 세월의 때가 복잡하게 묻어있는 은송을 참다운 애국의 길, 혁명의 길로 이끌어주기 위하여 지금껏 들여온 공이 헛되지 않았다는것으로 하여 스스로 감격스럽고 행복해졌다.
《공연한 기우입니다.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는 세월의 묵은 때를 말짱 지워버리고 애국의 길을 김일성장군님의 품에서 찾은 이 인간의 인생의 전환을 끝까지 지켜주고 꽃피워주고싶었다. 그의 소원이 성취되도록 자기 마음도 깡그리 합쳐주고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싶었다. 평양에 가겠다는 리유가 얼마나 의로운것인가.
그래 정시명은 인생의 황혼기에 드디여 비껴든 아름다운 노을을 더욱 찬란하게 빛내주고싶은 마음으로 곡진하게 위로하고 타일렀다.
《은송선생, 평양에 가시면 김일성장군님부터 찾아뵙게 되겠지요?》
《물론입지요. 내가 누굴 믿고 평양에 가려는거겠습니까.》 은송이 주저없이 받는 소리가 정시명의 속을 더욱 후덥게 해주었다.
《예, 꼭 그렇게 하십시오. 장군님께서 은송선생의 귀국을 환영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애국의 리념을 진보적인 주의, 주장의 근본으로 내세우시고 삼천만 민족을 한품에 너그러이 안아주시는 그분의 도량과 덕망이야 이미 조국광복회정강에 그대로 비쳐진것이 아닙니까.》
정시명은 글구마다 애족애민이 철철 흐르던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 짓던 10년전의 은송의 모습이 어제런듯싶어 이렇게 말했다.
《정향선생, 정말 고맙습니다. 내 이젠 더는 기웃거리지 않고 가볍게 평양길에 오르겠습니다. 사실은 그 말씀을 듣고싶어 마중위를 앞세우고왔습지요.
에, 됐습니다. 이게 다 아직도 은송의 속대가 궁근 탓이지요.… 에, 에… 정향선생속을 그간 무던히도 썩였는데 언제면… 자, 내 술 한잔 낼랍니다. 허허허…》
은송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가슴이 시원히 틔여가지고 큰소리로 한바탕 웃었다. 정시명도 시름이 가셔진 은송의 얼굴을 보는게 흡족해서 즐겁게 웃었다.
은송이 정말 술 한잔 내려는지 손가방에서 목함을 꺼내 뚜껑을 열고 황금빛갈의 도자기술병을 꺼내놓는다.
《아, 이거 내가 정말 말 한마디에 천냥을 얻는가봅니다.》
정시명이 또다시 맑은 소리로 웃으며 벽장안에서 윤기가 자르르한 놋잔을 꺼내놓았다.
그는 어둑시그레한 방안을 더 밝게 해주고싶어 초대 두대를 꺼내 불을 붙여 세워놓았다.
병마개를 뽑자 모태주의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모태주가 세계적으로 이름난것은 그 향기때문이라고들 한다는데 그럴듯 한 소리다.
은송은 그 냄새를 맡으며 몇번 코날개를 벌름거리다가 놋잔에 술을 따르고는 자못 감개무량해서 말을 뗐다.
《이렇게 쉽게 풀리는걸 난 벌써 한해째 망설여왔습니다. 내가 어째서 심대가 바른 사람들만 모여드는 평양을 내놓고 각설이무리들만 번성하는 서울에 간단 말이요. 자, 듭시다.… 내가 먼저 평양에 가서 자리잡고 기별을 띄우리다. 미안하지만 우리 집안단속을 부탁드립니다.》
은송은 입가녁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당안에 생겨난 불미스러운것들을 밀어붙이고 훌쩍 제먼저 떠나는것이 미안했던것이다.
《그 일은 념려마십시오. 은송선생이 떠나시면 내 인차 상해에 가서 수습을 하겠습니다.》
《그래 정향선생은 언제 오시겠습니까?》
《인차 가야지요. 나도 정말 이제는 더 못 참겠습니다. 벌려놓은 일들을 마무리하고 쉬이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함께 떠납시다. 정향선생이 인차 떠날 생각이라면 나도 며칠 출발을 미루고 기다리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십시오. 내친 걸음인데 이왕이면 결심대로 인차 떠나십시오. 그리고 나는 사실…》 정시명이 말끝을 꿀꺽 삼키였다. 지금까지 속깊이 묻어두어왔던 말을 비로소 처음 입밖에 내놓으려니 가슴이 쭝해왔다. 아직도 자기의 결심을 공개하기에는 심장의 박동이 가벼운것 같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찌는듯 한 봄볕아래서 한껏 달아올랐던 도시는 대륙의 서늘한 밤바람에 식어가며 고요히 잠들고있었다. 늦보름달이 고개를 내밀었는지 정원수들이 희푸릿한 달빛을 안고 미풍에 살랑살랑 잎사귀를 흔든다. 쾌청한 하늘에는 빈구석이 없이 뭇별들이 총총히 들어박혀 반짝반짝 무엇인가 신비로운 이야기를 쉬임없이 속삭이는것만 같았다.
은송도 자리에서 일어나 정시명의 등뒤에 다가섰다. 사람들의 눈가에 언뜻 스쳐가는 자그마한 감정의 빛갈도 정확히 포착할줄 아는 은송은 정시명이 전에없이 자기마음을 다잡지 못하고있다는것을 눈치채자 송구스러워졌다.
그가 알고있는 정시명은 언행이 무거우면서도 정확하고 결패있는 사람이다. 자기의 감정을 명확히 표현할줄도 알았지만 정황과 필요에 따라 조절하고 윤색할줄 아는 세련된 투사이다. 그러면서도 벗들앞에서는 흰종이처럼 깨끗하게 마음속을 비쳐보이는 한없이 솔직담백한 인간이다.
인생세파에 부대껴오면서 하늘 높은줄 모르던 은송의 자존심이 정시명의 앞에서는 순식간에 허물어지는것이 다른 리유가 아니다.
인간이 깨끗하고 아름답기때문이다.
그 아름다운 인간적매력에 끌려 은송도 열다섯이나 년하인 정시명의 앞에서는 하냥 어깨를 떨구고 선배처럼, 맏형처럼 믿고 따르고 의지하게 되는것이다.
오랜세월 그러한 정시명의 마음가짐에 습관되였기에 이 순간 은송은 그의 개운치 못한 모습에서 저으기 당황해지기까지 하였다.
《왜 그러시오? 정향선생,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은송은 상대방의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나누어지고싶어 각근하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정시명이 입가에 어설픈 미소를 짓고는 자기의 복잡한 속생각을 썩뚝 잘라던질듯이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은송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평양에 간다는 제멋에 둥- 떠서 상대방의 속은 아랑곳 없었던게 무척 죄스러웠다.
그래 그는 한결 다심해져서 그의 속을 조심스러우면서도 끈질기게 흔들기 시작하였다. 은송은 정시명의 말문을 열어놓고싶어 그 특유한 우회의 방법으로 느슨하게 공격을 들이댔다.
《정향선생, 우리가 서로 알게 된것이 언제였던가요?》
새삼스러운 소리에 정시명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감옥에서였지요. 벌써 열다섯해가 됐습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 낯을 익히지 못했어도 마음이 쉽게 통했는데…》
《허 허-》
두 사람의 얼굴에 그윽한 미소가 어려올랐다. 그 조용한 웃음에는 깊은 감회와 함께 따뜻한 인정이 함뿍 어려있다.
은송은 지금 정시명이 상해민중일보사 기자로 일본놈들의 침략성을 후려치는 글을 련속 발표하여 조중인민들의 심장에 반일항전의 불길을 크게 타오르게 한것으로 하여 왜놈감방에서 옥고를 치르던 때를 거들고있다.
그때 은송은 중국동북지방의 독립군대표로 의연금을 모으려 상해에 왔다가 왜놈들에게 붙잡혀 정시명의 옆감방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그때 두 사람은 담벽을 사이에 두고 7년간이나 통방신호로 의사소통을 하였다.
그런데 감옥문을 나설 때까지도 종시 얼굴들은 보지 못하고 헤여졌다.
일후에 이렇게 만날 때면 자주 그 시절을 화제에 올리고 회포를 나누군 한다.
은송은 이날 밤 정시명의 심중을 헤쳐보려고 여러가지로 수를 썼으나 끝내 정시명의 꾹 다물린 입은 성벽처럼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