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당 위원장 려운형을 만나주시여

 

해방후 서울에 있는 조선인민당 위원장 려운형선생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 장군님께서 하루속히 서울에 오시여 혼란된 정세를 수습하시고 나라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실것을 간절히요청하는 편지를 올리였다.

려운형선생은 해방전에는 조국해방을 위해 헌신해왔고 해방후에는 서울에서 조선인민당을 조직하고 진보적활동을 적극 벌려온 애국자로서 남조선인민들속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였다.

남조선정세를 언제나 깊이 파악하고계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직 한번도 만나본적은 없었지만 조선인민당의 당수인 그와 그의 활동에 대하여 잘 알고계셨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편지의 구절구절마다에서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며 모대기는 한 애국지사의 간절한 심정을 읽어가시였다. 편지의 마지막부분을 읽어가시던 수령님께서는 한순간 밝은 미소를 지으시였다. 려운형은 자신이 인차 평양으로 오겠다고 하면서 장군님께서 자기를 만나주시옵기를 간절히 요청하였던것이다.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아무때나 만나주시겠다는 내용의 회답서한을 보내시였다.

1946년 2월 려운형선생은 평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한생을 독립운동에 몸담고 살아오면서 당대의 인물로 손꼽히는 사람들은 거의다 만나본 선생이였다. 하지만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가는 그의 모습에는 이름할수 없는 감격이 어려있었다. 오래전부터 김일성장군님을 우리 민족이 반만년력사에 처음으로 맞이한 민족운명의 구세주로 흠모하여온 그였던것이다.

길을 걷는 그의 눈앞에 1937년 6월 력사적인 보천보전투가 있은 직후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을 하면서 보천보전투의 격동적인 사변을 신문호외를 통해 전체 인민들에게 알리고 보천보전투승리를 축하하여 기자들과 축배잔을 든 그는 새벽 3시에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자동차편으로 보천보를 향해 떠난것이였다.

그가 보천보에 간것은 만신창이 된 일제기관들을 보는 통쾌감을 맛보기 위한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반드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워야겠다는 열망때문이였다.

하지만 이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때의 심정을 말로는 다 표현할 길이 없었다. 후날 그가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백두산에 련락원을 파견한것도 이 소원을 풀어보려는 심정에서였다.

이러한 그였기에 일생의 소원을 풀게 되였다는 기쁨을 안고 나래라도 돋친듯 힘차게 걸음을 옮기였다.

2월 11일 한낮이 되여올무렵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청사로 찾아온 그를 반갑게 맞이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평양으로 오는줄 알았더라면 멀리 마중이라도 나갔을것인데 년로한 몸으로 먼길을 오는 선생을 도와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평양에서 맞게 되여 정말 안되였다고 하시면서 선생이 보낸 편지와 인편으로 보내준 소식도 듣고 한번 만나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이처럼 찾아와주니 정말 반갑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저마다 제노라고 하는 때에 나라와 민족앞에 불멸의 업적을 쌓으시고도 도리여 자신을 낮추시는 그이의 겸허한 풍모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수령님의 소탈하고 너그러운 인품에 끌린 려운형선생은 그간 남조선에서 겪은 고충과 애로를 솔직히 다 아뢰이고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주의주장을 펼치고있는데 해방된 조선이 나아갈 길을 장군님께서 밝혀주실것을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청을 쾌히 받아들이시여 그가 알고싶어하는 문제들에 대해 일일이 해답을 주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먼저 그에게 우리 인민은 장기간의 간고한 항일혁명투쟁을 통하여 일제를 격멸하고 조국을 광복하였는데 이제는 해방된 조선을 어떻게 건설하겠는가 하는것이 문제이라고 하시면서 우리는 남조선의 일부 사람들이 부르짖는 미국식《민주주의》의 길을 걸어도 안되며 우리 나라의 현실을 무시하고 혁명발전단계를 뛰여넘어 당장 사회주의혁명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대로 하여서도 안된다는데 대하여 지적하시고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식민지통치에서 해방된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가 나아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식으로 건국사업을 해나가야 합니다. 조선사람에게는 미국옷도 맞지 않고 쏘련옷도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맞지도 않는 다른 나라의 옷을 입을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조선식옷을 만들어 입어야 합니다.》

조선식옷, 누구나 쉽게 리해할수 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말씀에 려운형선생은 진정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 세계를 풍미하던 기성의 리론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 진리였다. 해방직후 나타난 수많은 《혁명가》들과 《리론가》들이 끝없는 장광설로 론쟁만을 거듭하던 그 번거로운 시절에 이렇듯 명쾌한 말씀을 들은 그는 현명한 스승의 모습에 매혹된 제자마냥 온넋이 끌리고 온몸이 끌려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가 해방은 되였지만 사회의 모든 분야에 일제잔재와 봉건잔재가 그대로 뿌리깊이 남아있기때문에 그것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나라의 완전독립도, 사회의 민주주의적발전도 이룩할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현 단계에서의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조선식민주주의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조선식민주주의는 인민대중이 정권의 주인으로 되게 하고 전체 인민이 누구나 다 동등한 정치적권리를 가지게 하며 인민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이라는데 대하여, 우리 인민은 오직 이 길을 따라 나아가야만 나라의 완전자주독립과 조국의 무궁한 번영을 이룩할수 있으며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수 있다는데 대하여 해설하여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조선인민은 조선식민주주의의 요구에 맞게 진정한 인민의 정권을 수립하고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부강한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건국사업에서 절대로 외세에 기대를 걸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미국사람들이 우리 인민에게 완전독립을 가져다주지는 않을것이라고, 우리는 외세를 믿을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선민족의 단합된 힘을 믿어야 한다고, 려선생이 얼마전에 미군정의 고문직을 사퇴한것은 아주 옳은 처사라고 생각한다고, 선생이 앞으로도 이러한 견결한 립장을 계속 견지하리라고 믿는다고 말씀하시였다.

려운형선생의 심장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남조선의 복잡다단한 정국하에서 모지름을 쓰며 제나름으로 건국사업에 바쳐온 날들이 되새겨지면서 대해같은 위인의 세계에 매혹되지 않을수 없었다.

인생의 력정을 더듬어보면 그의 한생은 불행했던 민족의 력사와 더불어 몸부림쳐온 처절한 한생이였다. 국채보상을 위한 선전활동, 1918년에 상하이에서 조직했던 신한청년당의 당수, 상하이림시정부 림시의정원 의원, 고려공산당 입당, 빠리강화회의에 파견원을 보내여 나라의 독립을 요구, 원동피압박민족대표자회의에 참가하여 레닌을 만나 조선독립운동의 지지 호소, 이 모든것은 조선이 나아갈 길을 안타까이 찾아온 한 애국자의 몸부림이였으며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건져주고 이끌어줄 위대한 령도자의 출현을 목마르게 기다려온 한 인간의 모대김이였다.

려운형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과 처음으로 마주한 뜻깊은 자리에서 자기의 별호를 몽양으로 부르게 된 사연을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날 그때의 일을 회상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려운형선생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자기의 호가 몽양인데 이제는 소원이 풀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보천보전투가 있은 다음부터 어떻게 하면 나를 만날수 있겠는가 하고 자주 생각하다보니 나를 꿈속에서 만나군 하였는데 오늘은 이렇게 직접 만났다고 하면서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몽양이란 꿈속에서 해를 본다는 뜻입니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국사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도에 대해서도 일일이 가르쳐주시면서 이렇게 강조하시였다.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정견의 차이가 있건 없건 관계없이 제국주의와 봉건을 반대하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각계각층의 모든 애국적인민들이 굳게 단결하여야 새 민주조선을 건설할수 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여 각계각층의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을 튼튼히 묶어세우려면 민주주의적인 통일전선을 굳게 형성하여야 한다는것, 통일전선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며 조선에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통일전선이라는것, 여기에는 로동자, 농민, 인테리, 종교인을 비롯하여 민주조선건설을 념원하는 각계각층의 모든 애국적력량을 망라시켜야 한다는것, 남조선에서 민주주의적인 통일전선을 굳게 형성하려면 파쟁을 결정적으로 없애야 한다는데 대하여 일깨워주시면서 신중한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오늘 단결하는가 분렬하는가 하는것은 건국을 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참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후손들의 장래를 위하는 사람이라면 파쟁을 그만두고 단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것입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민주력량을 분렬시키며 우리 인민을 반민주주의의 길로 끌어가려고 온갖 책동을 다하고있는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적인 각당, 각파들과 각계 민주인사들이 협애한 생각을 버리고 굳게 단결하여나갈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남조선에서의 민족적단합을 이룩하는 사업에 려운형선생이 한몫 단단히 하기 바라시는 크나큰 믿음의 말씀이였다.

더우기 그이께서 남조선에서 파쟁을 없애고 민주력량의 통일단결을 이룩하는데서 려운형선생이 민주정당의 지도자의 위치에서, 통일전선을 강화하는 립장에서 각당, 각파들속에서 나타나는 파벌적경향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충고하여주고 그것을 제때에 바로잡아주었으면 한다고, 선생은 남조선의 많은 공산주의자들과 가까운 사이인것만큼 그들과 힘을 합쳐 민주주의적정당, 사회단체일군들을 여러모로 도와줄수 있을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하시였을 때 그는 무어라 말할수 없는 심정에 휩싸이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 그때로 말하면 그가 박헌영의 암해책동으로 여러가지 고충을 겪고있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고충을 충분히 헤아리고계시였다. 하기에 그이께서는 박헌영일파의 편협한 사업태도로 통일전선사업에 그 어떤 지장이라도 생길가 보아 념려하시여 그에게 그렇듯 간곡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던것이다.

려운형선생에 대한 수령님의 믿음은 이렇듯 두터웠다.

벌써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그 시기 일제의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활동하는 그의 기개, 정치무대를 활보하는 그의 활동성, 낡은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의 진취적성품을 평가하시여 1936년 5월 전민족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체인 조국광복회를 창립하실 때 그를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의 공동발기인으로 내세우기도 하셨던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하기에 려운형선생은 수령님께서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목적은 건국사업을 잘하자는데 있다고, 통일전선을 형성하는것으로 그칠것이 아니라 대중을 조직동원하여 새 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전개하여야 한다고 하신 말씀 한마디한마디를 놓칠세라 가슴속에 깊이 새겨나갔다.

통일이냐 분렬이냐, 자주냐 예속이냐 하는 중대한 력사의 시각에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민족대단합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시고 통일전선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도를 가르쳐주시는 수령님의 모습앞에 정녕 그는 암흑속에 비쳐온 광명을 본듯 격동되는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점심시간이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아침부터 먼길을 오느라 시장하겠는데 우리 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자고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날 그때 일을 회상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려운형선생과 한참 이야기를 하다보니 점심시간이 되였습니다. 내가 려운형선생에게 점심을 먹으러 우리 집에 가자고 하니 그는 좋아하였습니다. 그때에는 다른데 가서 점심을 먹을만 한데도 별로 없었거니와 나를 만나러 서울에서 비밀리에 들어온 사람을 아무데나 데리고 갈수도 없었습니다. 그날 려운형선생은 우리 집에 가서 김정숙동무가 차려준 조밥을 토장국에 말아 한그릇 다 내였습니다.

그는 아마 내가 자기를 국수집에 데리고 가서 국수나 한그릇 대접해보낼것이라고 생각하였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는 달리 우리 집에 데리고 가서 조밥에 토장국을 대접하니 아주 좋아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려운형선생을 여러차례 접견해주시고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며 크나큰 기대와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렇듯 그는 수령님과의 첫 상봉이 있은 그해에 3번이나 평양에 들어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았으며 그이께서 제시하신 근로대중의 통일적당창건방침과 인민대중을 하나로 묶어세울데 대한 통일전선방침을 관철하기 위하여 한몸의 위험도 무릅쓰고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어느날 려운형선생은 서울대학교 학생들앞에서 김일성장군님의 위대성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그때 려운형선생은 자기는 백두산이 낳은 당년 34살의 청년장군, 조국을 해방하신 민족적영웅 김일성장군님을 마음속으로 깊이 흠모하고 신뢰한다고 하면서 진수성찬을 차려 장군님께 대접하고 높이 받들어모셔야 할 우리 3천만 백성들이 자기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있는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요, 조국이 나아갈 진로이라고 소리높이 웨치였다. 장내에서는 오래동안 폭풍같은 환호가 일어났다.

한편 미제와 반동파들은 그가 평양에 다녀왔다는것을 알고 그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미 망국적인 《단정》조작의 씨나리오를 작성해놓고있던 미제는 그것을 추진시키는데서 장애가 되고있는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였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한복판에서 그는 백주에 적들의 흉탄에 맞아 그만 애석하게도 쓰러졌다. 그의 희생은 우리 민족의 건국위업에 있어서 큰 손실이 아닐수 없었다.

그의 희생이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두고두고 추억하시며 통일의 선각자로, 애국지사로 내세워주시던 수령님께서는 1990년 8월 15일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하도록 하시였다. 그러시고도 부족되는것이 있으신듯 려운형선생의 자녀들에게 친어버이의 사랑을 안겨주시였다.

해방후 려운형선생이 위대한 수령님과 첫 상봉을 한 그때로부터 세월은 아득히 흘렀다. 조선사람은 조선식옷을 만들어 입어야 한다는 심오한 진리가 비낀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 깊이 심취되였던 몽양, 수령님의 애국애족의 사상을 받들어 통일적인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건설에 한몸 다 바쳐온 몽양, 그에 대한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끊임없이 이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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