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남통일협상의 전렬에 내세워주시여
사람들은 흔히 생활의 의의깊은 한순간을 사진에 담아 오래도록 소중히 보관해두고저 한다. 어느 가정에나 집안의 가보처럼 전해지는 사진들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세월이 흐르면 퇴색하기마련이며 퇴색한 사진처럼 흘러간 세월도 후세의 기억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져가기마련이다.
하지만 세세년년 퇴색하지도 않고 한 가정만이 아닌 만사람의 마음속에 아름답고 숭고한 화폭으로 전해지는 사진도 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에서 여생을 빛내여가는 홍명희선생을 쪽배에 태우고 손수 노를 저어가시는 한없이 자애로운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모습!
태양의 눈부신 빛발에 몸을 맡긴채 청춘의 모습으로 환히 웃는 홍명희선생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사진을 바라보며 세월의 노를 저어가보면 해방후 서울에서 평양에 온 맏아들의 물음에 홍명희선생이 미소를 지으며 하던 대답이 오늘도 메아리되여 울려온다.
《김일성장군님은 어떤분이십니까. 정말 우리 가정의 운명을 맡길수 있는분이십니까?》
《웃음이 많으신분이더라. 웃음이 많은분이 나쁠수야 없지 않느냐. 나는 그 웃음에 반하였다.》
한생을 민족을 이끌어줄 위인을 그리며 살아온 선생이 온넋으로 반하였던 위대한 수령님의 그 웃음, 그것은 행복의 기슭을 향해 온 겨레를 이끌어오신 태양의 밝은 미소였다.
그 웃음에 이끌려 행복의 대지에 인생의 보금자리를 폈던 선생의 한생에는 하많은 사랑의 이야기가 전하여지고있다. 그 많은 이야기들중에 인생의 말년에도 조국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선두에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을 안고 로당익장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그 한장의 사진과 더불어 우리 겨레의 가슴을 후덥게 하여준다.
1954년 10월말 평양에서는 내외의 커다란 관심과 기대속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조국의 평화적통일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북남조선의 각 정당, 사회단체 및 각계각층 대표자련석회의 혹은 북반부의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국회》의 합동회의를 평양 혹은 서울에서 1955년안으로 소집하며 북남조선 각 정당, 사회단체들과 각계 인사들이 평화적통일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호상 련락하고 래왕하고 접촉하도록 하며 북남조선의 주권당국은 전조선지역에서 이들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할데 대한 내용을 담은 호소문이 채택발표되였다.
이 제안은 북남간에 조성된 긴장한 분위기를 풀고 호상 접촉과 리해에 기초하여 협상의 방법으로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실현할수 있는 길을 명시한 현실적인 방안인것으로 하여 발표되자마자 전체 조선인민의 전적인 지지와 환영을 받았고 광범한 세계사회계의 적극적인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바로 이러한 때인 그해 11월 12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회의 호소문관철과 관련한 가르치심을 주시기 위해 홍명희내각부수상을 접견하시였다.
만나주실 때마다 건강부터 념려해주시는 수령님께서는 이날도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선생은 년세도 많은것만큼 건강관리를 잘하면서 힘에 맞게 일을 하여야 한다고, 건강이 첫째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지난 10월에 있은 최고인민회의 제8차회의에서는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천명하고 남조선의 《국회》와 제 정당, 사회단체, 각계각층 인사들과 전체 인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고, 최고인민회의 호소문이 발표되자 남조선인민들은 이를 적극 지지하고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받아안으며 홍명희선생은 전후에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이룩하는것을 현 계단에 있어서의 조선로동당의 총적임무로 규정하신데 이어 조선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철거시키고 조선의 통일문제를 조선인민자신이 협상의 방법으로 해결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온갖 심혈을 다 바쳐오신 수령님의 크나큰 로고가 헤아려져 가슴뜨거움을 금할수 없었다.
북남협상방안의 정당성과 그것을 지지하는 내외의 반향에 대하여 언급하시던 수령님께서는 이어 최고인민회의호소문리행을 반대하는 미제와 리승만도당의 반통일적책동에 대하여 까밝히시였다.
사실 북남협상방안은 제네바회의가 파탄된 후에 제시된것으로 하여 조국통일운동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지는 방안이였다.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네바에서는 조선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위한 국제회의가 진행되였다. 그러나 51일간이나 진행되여오던 회의는 조선인민이 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하는것을 한사코 반대하고 유엔의 주동적역할(이것은 본질상 미국의 주동적역할)을 고집하는 미제의 부당한 책동에 의하여 파탄되고말았다.
이런 조건에서 자주적평화통일을 다그치기 위한 현실적인 길은 조선사람들끼리 합의에 도달하는데 있다고 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회의에서 북남협상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시고 그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실무적대책들을 강구하도록 조치를 취하여주시였던것이다.
미제는 최고인민회의호소문이 채택발표되자 남조선《국회》에서 최고인민회의호소문을 거부하는 결의를 채택케 하였으며 리승만역도는 기자회견을 벌려놓고 《무력으로만이 통일이 가능하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면서 온 민족의 평화통일념원에 전면도전해나섰다.
공화국정부는 한강토안에 살면서도 생사여부조차 알지 못하고있는 부모처자와 형제자매, 친척, 친우들이 서로 안부라도 주고받을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북남조선사이에 우편련락을 재개할데 대한 내용의 서한을 공화국체신성의 이름으로 남조선체신부 장관에게 보냈지만 미제와 남조선당국은 이 제의마저 무턱대고 거부해나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제와 리승만도당의 반민족적, 반통일적인 책동에 대해 격분을 금치 못하시면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이 최고인민회의호소문을 거부하고있는 조건에서 우리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와 공화국북반부의 각 정당, 사회단체들에서 남조선의 〈국회〉의원들과 제 정당, 사회단체 당원들과 맹원들 그리고 무소속 사회정치활동가들에게 남북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국의 평화적통일문제를 협상하자는것을 제의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남북협상의 의사를 표명하게 하며 리승만괴뢰도당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참으로 가슴에 새길수록 깊은 뜻이 안겨오는 말씀이였다.
남조선의 《국회》의원들과 제 정당, 사회단체들, 무소속 사회정치활동가들에게 통일협상을 제의하고 그들자신이 북남협상의사를 표명하도록 함으로써 리승만도당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하는것이야말로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이 북의 통일제의를 무턱대고 거부하고있는 당시의 조건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최선의 방책이 아닐수 없었다.
그이의 말씀을 받아안고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시던 수령님께서는 우리는 최고인민회의 제8차회의 호소문을 가지고 적극적인 선전공세를 취하는 한편 호소문에서 제의한 남북조선의 각 정당, 사회단체 및 각계각층 대표자련석회의나 우리의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국회》의 합동회의소집을 실현시키기 위한 합리적인 방도도 더 연구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남북협상의 방도문제는 우리 나라에 조성된 주객관적조건을 고려하여 여러 측면으로 연구하여야 한다고, 그래야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남북협상방도가 나올수 있다고 언급하시였다.
이날 오랜 시간에 걸쳐 북남협상과 관련한 구체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시던 수령님께서는 남북협상방도를 연구하는 사업에 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온 전 남조선정계인사들도 인입할수 있을것이라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당면하게는 그들이 최고인민회의 제8차회의에서 채택된 호소문을 실현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남북협상의 방도를 찾아내는데 나서도록 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이와 관련하여 당과 국가의 간부들이 전 남조선정계인사들을 만나보도록 하려고 한다고, 선생은 그전부터 그들과 안면이 있는것만큼 한번 만나보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받아안으며 홍명희선생은 지난날 남조선정계에 몸담고 미제와 리승만도당의 반공, 반공화국책동에 이러저러하게 관여하였던 재북인사들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고 통일방도를 모색하는 중대한 사업에 참가시켜주시려는 그이의 한없이 숭고한 도량과 믿음에 머리가 숙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정녕 한번 믿음을 주시면 끝까지 믿으시는분이 바로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43(1954)년 11월 12일 홍명희선생을 만나주시고 하신 말씀은 당시 조성된 정세하에서 나라의 통일문제를 실현할수 있는 가장 빠르고 옳바른 길을 명시한 강령적인 가르치심이였다.
그이의 높은 뜻을 받들고 홍명희선생을 비롯한 당과 국가간부들이 전 남조선정객들을 만나보았다. 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조완구, 최동오선생을 비롯한 전 남조선정객들은 한결같이 공화국의 정당한 통일방안에 대한 지지와 공감을 표시하였으며 자기들을 평화통일방도를 찾는데 나서도록 해주신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에 감격을 금치 못해하면서 그 믿음에 보답할 결의들을 다지였다.
나이도 많고 능력도 부족한 자기를 믿으시고 중요한 통일방략들을 의논해주시며 북남통일협상의 전렬에 내세워주시는 수령님의 크나큰 기대에 보답할 일념을 더욱 가다듬은 홍명희선생은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회의 호소문을 관철하기 위한 사업을 힘있게 밀고나갔다.
그는 그후 조선의 평화적통일에 관한 문제를 토의협상하기 위한 북남조선국회대표단의 호상파견과 북남조선간의 접촉 및 조선문제의 평화적조정을 위한 기타 조치들을 열렬히 환영하며 또 그의 실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할데 대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9차회의 선언,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제시된 통일방안을 관철하기 위한 사업에 자기의 힘과 열정을 다 바쳐나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령의 몸이지만 조국통일과 민족의 단합을 이룩하기 위해 애쓰는 그의 애국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시며 자주 그를 몸가까이 부르시여 귀중한 가르치심도 주시고 그의 생활도 세심히 돌봐주시였으며 그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내세워주시면서 주실수 있는 믿음과 은정을 다 베풀어주시였다.
홍명희선생에 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은 그의 명예나 그 어떤 뛰여난 능력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헌신해온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였고 로년에도 조국통일을 위해 모든것을 바쳐가는 량심에 대한 믿음이였다.
홍명희선생과 자그마한 뽀트에 오르시여 노를 저어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찍은 한장의 사진은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을 그 사랑과 믿음에 대한 끝없는 사색에로 이끌어가고있다.
그 사진은 1958년 5월 1일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5. 1절경축행사가 끝난 후에 찍은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주석단에서 내리시는 길로 홍명희선생을 자신의 차에 태우시고 교외의 한 호수가로 나가시였다.
호수가는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련상시켰다. 호수의 수면은 푸르싱싱한 나무며 하늘의 흰구름을 떠싣고 고요히 설레이는데 기슭에서는 개나리며 진달래가 다투듯 피여나 자기의 모습을 한껏 펼쳐보이고있었다. 수령님께서는 봄냄새 그윽히 떠도는 호수가에 매여놓은 한척의 작은 배에로 홍명희선생을 이끌어가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오늘 날씨도 좋은데 소풍할겸 배나 함께 타자고 하시며 그를 배의 고물쪽에 앉히시였다. 그리고 몸소 노를 잡으시고 호심쪽으로 배머리를 돌리시고는 천천히 노를 저어가시며 선생이 젊으신 때에는 배를 타셨겠는데 이젠 칠순이 넘었으니 언제 배를 타보시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호수가로 모셔왔습니다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늘 사무실에만 계시지 말고 시간을 내서라도 산보도 하시고 배놀이도 하시라고, 그래서 로당익장하여 통일의 날도 보고 서울에도 나가보셔야 할것이 아닌가고 정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이제는 고목이라 생각하며 스스로 앞자리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자기의 건강에 대해 마음쓰시며 로당익장해야 한다고 하시는 수령님의 태양같이 환하신 모습을 우러르는 그에게는 1948년 봄 처음 그이를 만나뵙던 때의 일이 삼삼히 떠올랐다. 그때 시종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따뜻이 대해주시는 수령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보며 그는 사상과 리념을 초월하여 그 숭고한 인간미에 깊이 탄복하였었다. 하기에 그는 후날 가족들을 데리고 북으로 들어온 맏아들 홍기문이 김일성장군님은 어떤분이신가고 물었을 때 자기는 그이의 웃음에 반하였노라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였던것이다.
그이의 밝은 모습을 우러르느라니 어느덧 힘과 정열에 넘치던 젊은 시절에로 되돌아간듯 한 기분이였다. 고목신간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새기게 되는 순간이였다.
그때 한척의 배가 급히 다가오고있었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홍명희선생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올리였다. 배를 몰아오시는분은 이미전부터 호수가에 와계시던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였던것이다. 배사이의 거리가 가까와지자 그이께서는 사진기를 드시고 만면에 해빛같은 미소를 지으신 수령님과 만시름을 놓고 환희와 행복에 넘쳐있는 홍명희선생의 모습을 렌즈에 담으시였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주체93(2004)년 12월 중순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 홍명희선생에게 돌려주신 믿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감회깊이 들려주시다가 그때를 회고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그때 수령님께서 홍명희선생과 단 둘이 탄 배에서 직접 노를 저으시는 력사적인 화폭을 담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은 내가 찍은것입니다. 그때 내가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면서 그 모습을 사진찍으려고 하니 홍명희선생은 사진을 잘 찍어달라고 하였습니다.》
한평생 온갖 인생고초를 다 겪어온 남반부출신의 한 일군에게 환생의 기쁨을 안겨주시는 수령님의 모습, 이는 생의 마지막기슭을 바라보는 인생을 품에 안으시고 새 삶의 기슭을 향해 노저어가시던 위대한 은인의 모습이였다.
청춘을 되찾은듯 온갖 시름 다 잊고 밝게 웃는 홍명희선생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후날 조국의 여러 출판물들에 실리여 해내외동포들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는 믿음과 사랑속에 로당익장하던 그는 1968년 3월 5일 8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의 정세가 몹시 긴장한 속에서도 몸소 고인의 령구를 찾으신 수령님께서는 조의를 표시하시면서 비감을 누를길 없으시여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고 또 닦으시였다.
홍명희선생의 생시에는 언제나 태양처럼 밝게 웃으시며 힘을 안겨주시고 희망만을 안겨주시던 수령님이시였건만 이날은 가슴아픈 슬픔을 억제할수 없으신듯 오래오래 눈물을 흘리시는것이였다.
흔히 이르기를 위인들은 눈물이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홍명희선생의 서거에 그토록 슬픔을 금치 못해하시는 수령님의 모습을 우러르며 사람들은 그처럼 인정에 무르시고 눈물이 많으신 그이의 거룩한 위인상에 대하여 다시금 가슴뜨겁게 느끼였다.
후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나는 홍선생이 통일의 날을 보지 못하고 간것이 가슴아픕니다.》라고 하시며 홍명희선생과 함께 일해오신 나날들을 추억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선생은 조국통일을 위해 생애의 말년에도 계속 일을 했다고, 내가 늘 저녁에도 일찌기 퇴근하고 몸이 불편하면 집에서 쉬라고 권고했는데 그는 어느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나와 일을 했다고, 우리가 좀더 잘 돌봐드렸어야 했을걸 그랬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의리와 인덕의 최고화신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근 20년세월이 지나 애국렬사릉이 건립되였을 때에는 그의 유해를 그곳에 옮겨 안치하도록 하시고 조국통일상이 제정되였을 때에는 그 수상자로 내세워주시였다.
세월은 류수와도 같이 흐른다. 흐르는 세월은 지나온 세월의 모든것을 망각의 안개속에 덮어버리고만다. 하지만 조국을 위해 한생을 다 바쳐가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귀중히 여기시며 자애로운 품에 안아 보살펴주고 이끌어주신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은정은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전하여지고있다.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하시며 온 겨레를 조국에 대한 사랑의 길, 통일의 길로 이끌어오신 어버이수령님, 그이의 자애로운 손길은 오늘도 온 겨레를 통일의 기슭을 향해 불러주고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