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무임소상으로 내세워주시고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겨 공화국의 창건과 더불어 초대내각성원으로 된 사람들속에는 남조선에서 조선건민회 위원장으로 사업하던 리극로선생도 있다.
그는 일제의 조선강점으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던 수난의 시기에 의분을 안고 반일의병투쟁에도 참가했고 《을사5조약》의 무효를 인정받기 위해 국제적인 회합에도 찾아갔었다. 보천보전투소식을 듣고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외우면서 축배잔을 들기도 하였던 그는 일제식민지통치가 더욱 악랄해지던 때에는 모국어를 지켜내려는 마음으로 애국적인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해방과 함께 일제의 감옥에서 풀려나온 후에는 서울에서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조직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조선어학회 복구, 조선말교과서편찬, 국어강습회조직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조선인류학회, 에스페란트학회, 국술협회를 조직하고 애국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46년에는 조선건민회를 조직하였으며 남북합작 통일전선 위원장으로 사업하였다. 1947년에는 민주독립당, 민족자주련맹의 요직에서 활동하면서 미제의 남조선강점과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여 민주력량을 묶어세우기 위해 힘써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리극로선생을 남북련석회의에 불러주시였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여생을 바치려는 애국애족의 한마음을 소중히 여겨 공화국창건과 더불어 첫 무임소상으로 내세워주시였다.
그러던 주체37(1948)년 10월 31일 저녁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과 그의 부인을 몸소 저택으로 불러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만나니 대단히 기쁘다고 하시며 선생이 평양에 온것이 어제같은데 벌써 반년이 되였다고, 정숙동무가 선생부부를 위하여 저녁식사를 마련하였는데 별로 차린것은 없지만 제 집처럼 생각하고 많이 들어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며 리극로선생은 그동안 공화국정부의 중요직책을 맡아 마음껏 일하며 자녀들도 건강하여 학교에 잘 다니고있으며 이사한 새 집이 마음에 들고 생활에서 아무런 불편이 없다는데 대하여 말씀드리였다.
그의 말을 들으시며 수령님께서는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이어 리극로선생은 그동안 북반부의 여러곳을 참관하면서 거창한 민주건설의 모습과 인민들의 행복한 생활상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며 장군님께서 훌륭한 정사를 펴기때문에 공화국북반부에서 모든 일이 잘된다고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과분한 말씀이라고, 우리는 빼앗겼던 조국을 되찾은 감격과 기쁨을 안고 민주조국건설에 헌신하고있는 인민대중을 믿고 그들의 의사와 리익에 맞는 정치를 하기 위하여 노력하고있을뿐이라고 말씀하시였다.
한없이 겸허하신 그이의 말씀에서 큰 감동을 받은 리극로선생이 장군님께서 어린시절부터 혁명투쟁에 나서시여 고생을 많이 하시였겠다고 심중의 말씀을 올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용히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장구한 세월 풍찬로숙하며 싸운 사람이 어찌 나 혼자뿐이겠습니까. 조국을 광복한 위대한 승리속에는 조선의 수많은 혁명가들과 인민들의 투쟁공로가 깃들어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화제를 선렬들의 피가 뿌려진 저 멀리 동북의 산야로 이끌어가시였다.
그이께서는 한때 리극로선생이 교편을 잡고 활동하던 환런현의 동창학교와 그 주변농촌에 자신의 가까이에 있던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자주 나가 강연회를 비롯하여 청년학생들과 농민들을 묶어세우기 위한 여러가지 사업을 하였다고 회고도 하시고 역시 그가 교단에 선적이 있는 푸쑹의 백산학교에 대해서도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그리고 1930년 9월에 5. 30폭동에서 피해를 본 조선동포들을 위문구제하기 위한 신간회대표단 성원으로 중국 동북지방에 가서 활동하면서 동포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한 그의 활동에 대하여서도 평가해주시였다.
별로 크게 한 일없는 자신의 공로를 두고 이렇듯 과분한 평가의 말씀을 주시니 그는 형언할수 없는 격정에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그는 흥분된 심정을 안고 최일천과 련계를 가지면서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였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수령님께서는 우리는 1936년 5월에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를 창건하고 그것을 확대강화하기 위하여 여러곳에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였습니다, 최일천이 서울에서 살고있는 선생을 찾아간것이 1936년 가을과 1937년 여름이였다고 하는데 그때 우리가 그를 파견하였습니다, 최일천은 국내의 애국적인 인사들과 각계각층 인민들속에 들어가 항일무장투쟁의 전과를 소개선전하며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을 꾸릴데 대한 우리의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조선어학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애국적활동이라고, 1940년초에 최일천이 선생을 찾아가 나의 투쟁자료들을 후세에 전할수 있도록 보관해달라고 한것은 당시 그가 적들의 감시속에 있는 몸이여서 많은 자료들을 간수하기 어려웠기때문이였을것이라고, 선생이 보관하였던 그 자료에 기초하여 지금 좋은 글들이 나오고있다고 또다시 분에 넘치는 평가의 말씀을 주시였다.
리극로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평가의 말씀에 너무나도 황송하여 자기는 조국해방을 위한 투쟁에 별로 기여한것이 없다고 말씀올리였다.
그의 말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폭압이 더욱 강화되자 애국자로 자처하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와의 투쟁에서 물러서거나 일제에게 투항변절하였지만 선생은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잘 싸웠다고, 선생의 지도밑에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을 반대하여 투쟁하였으며 애국적청년들과 지식인들을 결속하기 위한 투쟁도 잘하였다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뜻깊은 자리에서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애국적인 민주력량을 단결시키는 문제와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당시 남조선에서는 적들의 파쑈적탄압으로 하여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들이 지하에 들어가고 애국적인민들의 민주주의적진출이 매우 어렵게 되여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조건에서 건민회와 같은 합법적조직을 통하여 군중을 결속하며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한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리극로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가르치심에 연방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다음순간 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뜻밖의 말씀에 접하게 되였다.
《이번에 공화국의 내각을 구성할 때 김책동무를 비롯한 여러 동무들이 선생에게 산업상의 중임을 맡기자고 제기하였지만 나는 선생을 무임소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임소상의 직책을 가지면 선생이 남조선인민들을 조국통일의 기치하에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을 더 잘할수 있다고 생각하였기때문입니다.》
자기가 공화국의 첫 내각성원이 된다는것도 뜻밖이였지만 수령님께서 자기를 무임소상으로 임명하신데 깊은 뜻이 있다는것을 알게 된 리극로선생의 가슴은 흥분으로 높뛰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우선 건민회를 강화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려야 한다시며 건민회의 특성을 고려하여 애국적지식인들과 청년들로 핵심을 육성하고 그 대렬을 확대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로부터 건민회의 조직구성을 료해하신 수령님께서는 앞으로 건민회의 산하조직들을 튼튼히 꾸리고 거기에 더 많은 지식인들과 체육인, 청년학생들을 망라시키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건민회의 회원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킬데 대해 강조하시였다.
당시 건민회는 2만 5 000여명의 회원들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건민회의 일부 회원들속에서는 미제와 리승만《정권》에 일정한 기대를 거는 현상이 나타나고있었다.
그이께서는 이런 조건에서 회원들에게 미제의 식민지통치의 교활성과 리승만괴뢰정권의 반동성을 옳게 인식시키고 공화국북반부의 현실에 대하여서도 잘 알려주어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리고 건민회 회원의 대부분이 지식층인것만큼 그들을 통하여 남조선인민들에게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선전을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오래전부터 조선어를 연구해왔고 또 현재 조선어문연구회사업을 맡아보고있는것만큼 우리 말과 글을 발전시키는데서 선생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하시면서 조선어에 대한 연구사업을 계속 진행하여 그 우수성을 옳게 살리고 더욱 발전시켜나가는데 적극 이바지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리극로선생은 남조선인민들을 조국통일의 기치밑에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과 과학연구사업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다 바치였다.
그 나날 그는 조선어를 규범화하고 문화어를 적극 발전시켜나가는데 심혼을 쏟아부어 론문집 《조선어조연구》를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기도 하였다.
리극로선생은 공화국의 무임소상,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성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나라의 통일과 민족어발전을 위한 과학연구사업에서 적지 않은 공적을 이룩하였다.
돌이켜보면 리극로선생이 찾아내고 지켜온 우리 말속에서 민족의 얼을 귀중히 여기는 한 인간의 애국의 마음을 보시고 공화국의 당당한 일군으로, 조국통일의 역군으로 키워주신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은 그가 누려온 모든 행복과 영광의 자양분이였다.
우리 말과 글을 빛내이기 위하여 실로 많은 일을 하여온 리극로선생은 후대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적풍모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해주군 하였다. 하지만 자기가 한생을 바쳐 가꾸어온 모든 훌륭한 말과 글로써도 그는 수령님의 절세의 위인상에 대해 결코 다는 표현할수 없었으리라.
이렇듯 위대한 수령님은 무한한 사랑과 믿음으로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사들을 공화국의 당당한 지휘성원으로, 조국통일의 역군들로 키워주신 은혜로운 태양이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