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법정학교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시며

 

1946년 8월말 서울법정학교의 교원과 학생이 두번째로 평양에 찾아왔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 평양에 다시 오게 된데는 그럴만 한 사연이 있었다.

당시 남조선에서 미제는 교활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제하고있었다. 이해 3월에 미군정청은 《무허가학교페쇄령》이라는것을 공포하고 진보적경향이 강한 서울법정학교와 수많은 사립학교들을 강제적으로 페쇄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원래 해방전부터 법정학교는 사립전문학교로 운영되여왔었는데 그러다보니 이 학교에는 가난한 집 자식들이 비교적 많이 다니였다. 그런것만큼 8. 15해방을 맞았을 때 법정학교 학생들의 희망은 누구보다도 컸다. 하기에 서울법정학교 학생들은 미군정의 만행을 반대하여 맨 선참으로 학교페쇄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학교페쇄를 반대하며 학원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구호를 웨치면서 과감히 투쟁하였다. 특히 이 학교 학생들은 미군정의 파쑈적인 학원탄압만행을 반대하여 서울의 각급 학교 학생들과의 공동투쟁도 힘있게 전개하였다. 이 투쟁에 남조선 각지의 청년학생들이 적극 합류해나섰다. 청년학생들의 이와 같은 강력한 항거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청은 6월에 이르러 《국립서울대학교안》 즉 《국대안》이라는것을 조작하고 얼마후 그것을 법령으로 공포하였다. 《국대안》은 본질에 있어서 학원의 자유를 말살하고 식민지노예교육을 강요하기 위한것이였다.

법정학교 학생들의 분노는 하늘땅에 사무쳤고 그것은 마침내 불뿜는 화산처럼 터져올랐다.

청년학생들은 《미제침략군은 물러가라!》, 《학교페쇄를 결사반대한다!》, 《학원의 자유를!》이란 구호를 내걸고 련일 항의집회와 시위투쟁을 벌리였고 미군정청으로 몰려가 앉아버티기투쟁을 전개하였다.

법정학교 학생들의 투쟁은 서울의 광범한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성원을 받으면서 더욱 확대되였다. 대학생들과 전문학교 학생들이 달려왔고 수많은 중학생들이 합류되였다.

미군정은 시위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발악하는 한편 법정학교 학생들은 그 어떤 다른 학교에도 갈수 없게 하는 악랄한 책동을 감행해나섰다. 그리하여 학교에서 쫓겨난 500여명의 법정학교 학생들은 배움의 길을 잃고 헤매이게 되였다.

이무렵 남조선청년학생들의 마음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북반부에로 쏠리고있었다.

일제식민지통치의 가장 암담한 나날에도 신묘한 축지법을 쓰며 왜놈들을 삼대베듯 쓸어눕힌다는 김일성항일빨찌산의 전설적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온 그들이였다. 그들은 평양을 다녀온 신문기자들과 각계층 인사들이 들려주는 가슴뜨거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군님께서 베푸시는 새 정치아래에서 살게 될 꿈을 키워갔다.

(김일성장군님께 하루빨리 우리의 딱한 사정을 말씀드리자. 그러면 장군님께서 우리들에게 밝은 앞길을 열어주실것이다.)

이렇게 되여 학생들과 교원들은 련합총회를 열고 평양에 보낼 대표들을 뽑았던것이다. 학교페쇄반대투쟁위원회 학생위원장인 리욱휘와 교원위원장인 림유복이 대표로 선출되였다. 38°선을 넘어 들어오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걸음마다 적들의 감시가 뒤따랐고 사나운 총구들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38°선부근에서 갑자기 앓아눕게 된 림유복교원은 한걸음도 옮겨디딜수 없는 형편이였다. 그러나 그 어떤 곤난도 북으로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하였다.

리욱휘학생은 스승을 업고 드디여 38°선을 넘어섰다. 그들은 서울을 떠난지 닷새만에 평양에 무사히 도착할수 있었다.

력사적인 북조선로동당창립대회를 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서울에서 찾아온 법정학교 리욱휘학생과 림유복교원을 친히 만나주시였다.

두사람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그들의 눈만은 수령님을 만나뵈옵는 기쁨으로 빛나고있었다.

수령님께서는 동무들이 무더운 날씨에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겠다고 하시며 땀에 절은 학생대표의 옷을 벗겨주시였다. 그들은 너무도 감격스럽고 송구하여 몸둘바를 몰라할뿐이였다. 그들의 모습을 이윽히 바라보시며 진정되기를 기다리시던 수령님께서는 전번에 동무들이 찾아온것을 시간이 없어 만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온 동무들을 만나니 매우 반갑다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남조선청년학생들이 《국대안》을 반대하고 학원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는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하시면서 서울법정학교 학생들이 북조선에 들어와 공부할것을 희망하고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좋은 생각이라고, 우리는 남조선의 청년학생들이 북조선에 들어와서 공부하는것을 환영한다고, 지금 북조선에서도 로동자, 농민의 자녀들이 대학에서 공부할것을 열렬히 희망하고있다고, 우리는 평양에 종합대학을 창설하고 근로인민의 자녀들을 공부시키려고 한다고 하시며 다음과 같이 가르치시였다.

《근로인민의 자녀들을 공부시켜 훌륭한 민족간부로 육성하는것은 부강한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사업입니다. 우리는 종합대학을 비롯하여 많은 대학들을 설립하고 청년학생들을 대학에 많이 받아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동무들은 빨리 서울에 나가 학생들을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동무들이 서울에 나가 학생들을 인차 데려올수 있도록 필요한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순간 학생과 교원은 막혔던 물목이 터진듯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고 그만 흐느끼고말았다.

회의를 지도하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자기들을 위하여 시간을 내시여 친히 만나주시고 소원대로 평양에 와서 마음껏 공부할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그이께 작별인사를 올리고 나온 학생대표는 앓는 교원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그걸음으로 평양역으로 달려갔다.

역의 한 일군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말씀이 계셔서 특별렬차를 마련해놓았다고 하면서 그를 대기중인 한대의 기관차로 안내하였다. 그 기관차로 말하면 새 민주조국건설에 소요되는 설비자재들을 가득 실은 차량들을 끌고 방금 신의주쪽으로 떠나려던것이였다. 남행렬차가 떠나려면 아직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아있었으므로 서울로 가는 학생을 잠시라도 지체시키지 않기 위하여 기관차로 된 특별렬차를 따로 준비해놓았던것이다.

특별렬차는 기적소리 높이 울리며 기운차게 달려갔다. 입학을 승인하는 문건과 신임장, 많은 려비까지 마련해주시고도 한사람을 위해 특별렬차까지 마련해주시니 수령님의 그 사랑, 그 은덕이 그대로 날개가 되고 힘이 되여 평양을 떠난지 이틀만에 그는 서울에 도착할수 있었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직접 만나뵈옵고 돌아간 그 학생을 맞이한 법정학교 학생들과 교원들은 격동된 심정을 누를길 없어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김일성장군 만세!》를 목청껏 부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며칠후 법정학교 학생 90명은 평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학생들이 38°선을 넘어섰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들이 평양까지 오는데 불편이 없도록 자동차까지 보내주시였다. 수령님의 배려로 학생들이 들 려관이며 대학기숙사들도 빈틈없이 준비되였다.

그해 9월 12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법정학교 학생들이 평양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받으시자 바쁜 일을 뒤로 미루시고 또다시 림유복, 서휘석을 비롯한 학생, 교원대표들을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함께 온 학생들모두가 건강한가, 도중에서 다른 일은 없었는가 하나하나 료해하시다가 10명의 학생들이 38°선을 넘다가 미국놈들에게 체포되여 아직 오지 못하였다는것을 아시고 그들이 걱정되시여 안색을 흐리신채 아무 말씀도 없이 한동안 먼 남쪽하늘가를 바라보시였다.

얼마후 그이께서는 자애깊으신 눈길로 학생들을 둘러보시며 그들에게 어떤 학과들을 지망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학생들 대부분이 법학을 비롯한 사회과학부문을 지망한다는것을 아시고 앞으로 우리 나라를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하기 위하여서는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그러자면 기술인재가 많이 요구된다고, 그러므로 동무들은 모두 법학이나 다른 사회과학만 하려고 할것이 아니라 자연과학학부에도 들어가고 또 일부는 교원대학에도 가서 과학의 여러 부문을 깊이 연구하여 새 조국건설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간곡하게 가르치시였다.

대표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심장깊이 새기면서 자기들을 나라의 믿음직한 역군으로 키우시려는 그이의 기대에 반드시 보답하고야말 굳은 결의를 다지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뜻을 받들어 그후 학생들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교원대학에 나뉘여 입학하였다. 얼마후에는 체포되였던 학생들도 끝내 수령님의 품에 안기여 대학입학의 소원을 풀게 되였다.

학생들과 함께 온 교원들도 여러 대학들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품은 학생들의 따사로운 집이였고 정다운 고향이였고 마음껏 과학을 탐구하는 배움의 전당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언제나 남조선에서 들어온 학생들의 학부형이 되시여 그들의 생활과 학습을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어느날 김일성종합대학 기숙사를 찾으신 수령님께서는 우리가 농민들의 애국미로 종합대학을 세울 때 북반부의 로동자, 농민의 아들딸들만 받아 공부시키자는것이 아니였다고 하시며 여기에 남조선의 로동자, 농민들의 아들딸들도 데려다 공부시킬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남조선에서 온 학생들의 이부자리까지 손수 만져보시고 솜도 더 두툼히 넣어주고 생일도 크게 차려주어 집생각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시며 모두가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맏누이가 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7(1948)년 새해를 앞두고 그들에게 친히 새해선물도 보내주시였으며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장학금제도를 내왔을 때에는 그들이 선참으로 그 혜택을 누리도록 해주시였다.

그이의 이렇듯 깊은 관심속에서 남조선청년학생들은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이 배우고배워 나라의 믿음직한 민족간부로 자라났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에서 들어온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 일할 때에도 그들을 사랑의 손길로 보살펴주시였다.

1949년 여름 어느 한 학교에서 진행된 졸업식에 참석하셨던 수령님께서는 축배잔을 올리는 교원이 몇년전 법정학교에서 들어온 학생이였음을 알아보시고 해방직후 그들을 데려오던 나날을 감회깊이 회상하시며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1956년 10월 어느날에는 김일성종합대학창립 10돐 기념행사진행정형을 료해하시다가 서울법정학교에서 넘어온 종합대학출신의 청년들이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잘 싸웠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못내 만족해하시면서 기쁜 일이라고 거듭 치하하시였다.

그후 이들은 당, 행정, 경제일군으로, 과학, 문화, 교육기관의 유능한 일군들로 자라나 맡겨진 과업을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이제는 오래전의 일로 되였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 조국의 력사에 하나의 전설처럼 남아 겨레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있다. 그 시절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련해주신 특별렬차는 다만 한 학생을 싣고 달린것이 아니였다. 수천수만의 이 나라 아들딸들을 민족의 단합과 통일애국의 길로 부르며 렬차는 달리고달리였다. 남조선의 평범한 학생들을 위해 울리던 특별렬차의 기적소리는 오늘도 삼천리조국땅에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며 우렁찬 메아리를 울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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