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편 빛나는 길
제 1 장
일본학자대표단이 평양비행장에 도착한것은 그들이 도꾜를 떠난지 사흘째 되는 해질무렵이였다.
베이징까지 일부러 마중나와준 조선대외문화련락협회 강민석부장의 안내하에 학자일행은 승강대를 내렸다.
강민석은 자기 나라를 처음 방문하는 그 손님들을 시종 성심성의로 대해주었다.
사십을 갓 넘긴상싶은 강민석은 후리후리한 키에 몸매 또한 단정하여 첫인상부터 호감이 가는 사람이였다.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례절바르게 사람들을 대하는 품이나 일본어회화가 아주 류창한것을 보면 상당한 교육을 받은것이 알렸다.
야스이 가오루는 비행기안에서 그에게 한가지 부탁한것이 있었다. 이번 길에 될수만 있으면 류다른 인연으로 맺어진, 호세이대학 학생이였던 최학성이라는 한 제자를 만나고싶다는 희망을 비쳤던것이다.
야스이는 최학성이 이미 오래전에 귀국선으로 자기 조국에 돌아와있다는것만 알고있을뿐 그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강민석은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여 찾는 사람의 이름을 자기 수첩에 적어놓는것을 잊지 않았었다.
비행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중나와있었다.
고운 옷차림을 한 귀여운 소녀들이 달려와 일본학자들에게 향기그윽한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이분은 사회과학원 리중엽부원장입니다.》
야스이 가오루의 앞으로 다가선 사람을 가리키며 강민석이 소개하였다.
야스이는 리중엽과 뜨겁게 포옹했다.
교수, 박사인 리중엽은 심오한 전문지식에 몸을 잠근 학자에게서 느낄수 있는 사려깊고 날카로와보이는 눈매를 가진 나이지숙한 사람이였다.
《원로에 수고가 많았습니다. 야스이선생의 저서들을 읽고 명함만은 이미부터 익히고있었는데 이렇게 상면하게 되니 감개가 큽니다.》
리중엽은 구면지기나 대하듯 허물없이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진정으로 반가와하였다.
《아,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우리들을 이렇게 따뜻이 맞아주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야스이는 거듭 사의를 표한 다음 동료학자들에게 일일이 리중엽을 소개하였다.
일본학자들은 마중나온 사람들과 서로 악수를 교환한 후 곧 차에 올라탔다.
야스이 가오루는 리중엽부원장과 함께 한차에 가지런히 앉아갔다.
봄날치고는 따스하고 청명했다. 공기가 더없이 맑고 깨끗하다는것이 야스이 가오루가 이 땅을 밟는 순간에 받아안은 첫 느낌이였다. 그러나 자동차가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이국의 산천경개보다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데 그의 모든 주의력이 집중되였다.
옆에서 리중엽이 친절히 건네오는 말에도 야스이는 의례적으로 응대할뿐 정신은 줄곧 흘러가는 차창밖세계에 쏠려있었다.
주체의 나라, 인간을 가장 높은 정신적높이에로 승화시킨 사람중심의 철학리념이 펼쳐져있는 사회에서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싶었던것이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주체사상을 서적을 통하여 학술적으로만 인식하고있을뿐 그 리론이 실제적으로 구현되여있는 사회와 인간을 아직까지 보지 못하고있었다.
사상의 매혹성이란 진리의 힘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견인력이라고 한다.
어떤 사상이건 그것이 매혹적인 강한 힘을 가지려면 그 원리가 심오하고 리론전개가 독창적이여야 하며 설득력과 보편타당성을 가져야 할것은 물론이나 결코 그것만으로 위대한 사상이라고는 할수 없는것이다. 문제는 그 사상이 객관적으로 사회와 인간생활에 어떻게 구현되여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야스이 가오루는 그 매혹성으로 새 사조를 따르게 되였고 한편 그 점에 대하여 가장 큰 비중을 부여하여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른바 이 나라에 사는 인간, 그것도 외모가 아니라 사람들의 구체적인 감정, 내면세계를 헤쳐보고 체험하려는것이였다.
야스이는 이미 자기의 저서 《국제법과 변증법》에서 인류사회는 인간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전진과정이라고 하면서 진정한 인간해방을 위해서는 인간자신의 내면적해방을 실현해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그는 현실적으로 일본을 비롯한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들에서 사람의 정신적퇴페가 얼마나 불행한 사회적재난을 빚어내고있는가를 체험하고있었다.
사람들을 이 정신적퇴페에서 어떻게 해방하고 재생시킬것인가를 두고 그는 오랜 세월 탐구해왔으나 종시 그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여왔었다.
그랬던만큼 자기가 매혹된 사상의 생활력을 이 나라에서 충분히 확인하고 터득함으로써 지금까지 모색해온 해답의 관건을 얻자는 욕망이 이시각 그의 모든 사색을 지배하고있는것이였다.
차창밖에서 줄창 시선을 떼지 않고있는 로학자의 심경을 헤아려서인지 운전사는 그닥 속도를 놓지 않고 자동차를 몰아갔다.
넓게 트인 아스팔트길우에는 석양이 곱게 비껴있다. 도로의 좌우에서 어린 학생들이 무슨 일엔가 열중하고있는것이 안겨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길가의 화단들을 가꾸느라 웃고 떠들고있었다.
로동의 보람을 벌써부터 맛보는듯 한 동심들의 생기발랄한 모습에서 야스이는 하나의 아름다운 화폭을 보는듯싶어 저절로 기분이 맑아져 미소를 머금었다. 저토록 티없이 깨끗한 광경은 도꾜에서는 볼수 없는것이였다.
자동차가 교외를 벗어나 차츰 시내에 들어설수록 거리의 면모는 한층 뚜렷한 자태를 드러내갔다. 신록으로 단장한 가로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사이로 각양각색의 고층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었다.
붉은넥타이를 날리며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들의 대렬이 자주 차창을 스치며 흘러갔고 오가는 사람들로 거리가 번다해졌다. 모두가 활기찬 걸음걸이였다.
옷차림들이 숨가쁘게 바뀌는 류행에 때묻지 않고 한결같이 소박하고 단정했다.
그 모든것이 도시의 운치를 돋구며 거리를 보다 밝고 우아하게 하여주는것 같았다. 요란한 겉치장이란 조금도 찾아볼수 없는 도시는 어디를 보나 따뜻한 정서와 약동하는 랑만에 넘쳐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쾌한 기분을 자아내게 한다.
차창으로 비껴드는 그 하나하나의 광경이 야스이의 시야에는 아름답게만 비쳐들어 그는 벌써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을 읽은듯싶었다.
차가 밋밋한 언덕으로 올라섰을 때였다.
야스이는 눈앞에 거연히 솟아있는 한 동상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몸을 솟구었다.
《아, 천리마다!》
그는 이미 출판물을 통해 눈에 익혔던 그 거상을 첫눈에 알아보았던것이다.
《그렇습니다. 천리마동상이지요.》
옆에서 리중엽부원장이 하는 소리였다. 그는 이 로학자가 몹시 호기심에 싸여있는것을 알자 그대로 지나칠수 없음을 느끼고 물어봤다.
《내려서 보고가겠습니까?》
《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야스이는 선뜻 대꾸하며 서둘러 내릴 태세를 취했다.
그들의 차가 멎자 뒤따르던 차들도 주런이 멈추어섰다.
모두가 차에서 내려 동상을 둘러싸고 일제히 올려다보았다.
청동의 날개돋친 천리마가 적자색저녁노을빛에 번쩍이며 두리에 찬연한 광채를 뿌리고있었다.
세차게 갈기를 휘날리며 네굽을 쳐든 천리마는 금시 하늘만리로 치달아오를듯 한 기상이였다.
《대단한 창조물이군!》
《참으로 훌륭한 가치있는 기념비요!》
학자들은 모두 감동에 싸여 한마디씩 뇌였다.
사도미가 리중엽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마상에 앉은 사람들이 천리마기수를 상징하겠군요?》
《옳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다 천리마를 타고 달리고있지요.》
경탄해마지 않는 학자들을 둘러보며 리중엽은 말하였다.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남이 우리에게 천리마를 태워준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 천리마를 낳았고 그것을 타고 내달리게 하였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긍지높은 어조로 이렇게 전한 다음 리중엽은 계속 말하였다.
《우리 수령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여러 학자선생님들이 앞으로 우리 나라의 현실을 돌아보시면 잘 리해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천리마〉는 우리 인민의 의지이고 기개라고 할수 있습니다.》
야스이 가오루는 그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칠세라 귀담아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상의 위용을 이모저모로 살펴보며 혼자 속으로 되새겨보고있었다.
주석님께서는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 천리마를 낳았다고 하시였다. 그이의 그 말씀은 얼마나 많은것을 이야기해주고있는가. 이 나라에서는 그 어떤 마술의 도움이 없이 오직 사람의 의지에 의하여 신화가 현실로 되고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의 진정한 운명, 자기자신과 세계의 주인으로 될 운명을 되찾으며 자연과 사회에서 차지하는 이 위치가 내포하고있는 모든 권리와 의무, 특히는 자주성과 창조성에 대한 권리, 혁명과 건설의 참된 의무를 자각하였기에 한달음에 천리를 달린다는 전설의 천리마를 탈수 있었던것이 아닌가.
야스이 가오루는 현대조선의 참모습이 방금 리중엽부원장이 전해준 김일성주석의 말씀속에 집약적으로 웅심깊이 표현되여있는듯이 생각되였다.
그는 새로운 감동을 느끼며 다시한번 청동의 거대한 천리마를 올려다보고나서 천천히 자동차쪽으로 걸어갔다.
그들학자일행이 들 숙소는 대동강의 맑은 흐름이 지척에 바라다보이는 풍치아름다운 강기슭에 자리잡고있었다.
강변에는 석양빛이 빨갛게 내려앉아 구슬처럼 반짝이며 아롱거리고있었다.
학자들은 신선한 강바람을 쏘이며 한동안 서있다가 접대원의 안내를 받고 숙소로 들어갔다.
무리등의 휘황한 빛이 파리하고 보르르한 인조주단을 눈부시게 비쳐주는 긴복도를 걸어 그들은 저마다 호실로 들어갔다.
야스이는 리중엽, 강민석과 함께 넓은 홀의 쏘파에 앉아 금후 학자대표단의 행동계획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후 그들과 헤여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공기가 맑고 훈훈한 호실은 매우 산뜻하고 정갈하였다. 눈처럼 하얀 침대보며 갓 빤 베개잇, 큰 나무옷장, 사무용 겸 응접용으로 쓸수 있는 탁상, 네개의 안락의자… 실내의 그 모든것이 직사각형의 형광등불빛을 받아 은근한 색조를 발산하며 아늑하게 안겨와 장시간 려행에서 시달린 사람이라면 저절로 혼곤한 굳잠에 빠져들것 같았다.
그러나 야스이 가오루는 이상하게도 피곤을 전혀 몰랐으며 사지에 기운이 뻗치는것을 느꼈다.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나자 정신은 더더욱 맑아만 졌다.
야스이는 응접탁을 앞에하고 안락의자에 편히 기대여 이 나라에 도착후 받아안은 인상을 하나하나 머리속에 그려보았다.
아직은 사람들의 품성, 심리까지는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생기와 약동에 넘쳐있는 거리의 모습만으로도 그의 상상과 기대에 어지간히 만족을 주었다.
더우기 천리마동상앞에서 리중엽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이시각에도 그의 심중을 부풀게 하고있었다.
야스이는 아까 리중엽부원장에게 대회가 열릴 그날까지 우선 천리마기수들을 만날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을 했었다.
주체사상과 천리마운동, 과연 그것이 이 나라 사람들의 정신분야에 어떠한 영향력을 주고있는가를 그는 좀더 깊이 알고싶었던것이다. 그것은 비단 그 혼자만의 욕심이 아니라 동행한 학자모두가 일치하게 바라는것이기도 했다.
리중엽부원장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실현시켜줄것을 약속했다.
야스이 가오루는 자정이 가까와올무렵에야 조선에서의 첫 밤을 즐거운 꿈속에서 지새우려고 잠자리에 들었다.
강선제강소의 참관을 마치고 평양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안에 앉아있는 야스이 가오루와 사도미 아즈시는 그곳에서 받아안은 흥분을 내내 새기지 못한채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묵묵히 차창밖을 바라보고있었다.
강선은 《천리마의 고향》이라고 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 3년간의 전쟁으로 무참히 파괴된 제강소를 친히 찾아주시였다고 한다.
력사적인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주던 그곳 한 직장장의 음성이 지금도 사도미의 귀전에서 떠나지 않고있었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그날 우리들에게 제강소는 페허같지만 페허가 아니다, 강선땅이 남아있고 동무들이 이렇게 건재하고있지 않는가, 령토와 인민, 당이 있는 한 복구는 문제없다, 복구하는데 그칠게 아니라 전보다 크게 현대적으로 확장하자고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도를 하나하나 가르쳐주셨습니다.
수령님의 그 말씀에 큰 힘과 용기를 얻은 우리들은 그날부터 한사람같이 떨쳐나 재더미를 파헤쳐 페허속에서 전기로를 살려내여 40일만에 첫 쇠물을 뽑아냈습니다.》
직장장의 그 말에 사도미는 커다란 감명을 받았었다.
참으로 이들이야말로 창조와 혁신의 화신이였다.
그러한 기적을 낳게 된 힘의 원천이 무엇이겠는가?
사도미는 직장장의 말을 되새겨볼수록 생각이 깊어졌다.
령토가 있고 인민이 있고 당이 있는 한 복구는 문제없다고 하신 수령님의 그 말씀에 힘을 얻고 빈터우에서 오늘의 현대적대야금기지를 일떠세운 강선의 투지와 기백! 그것은 숭고한 력사에 기록되여 영원히 전해질 이야기라고 하기보다 찬연한 금자탑이였다. 그 금자탑, 이는 곧 령도자와 인민이 하나의 의지와 지향으로 융합된 정신력이 이룩한것이 아닌가. 그 정신력의 근거가 무엇인지 잡힐듯하였다.
그 직장장은 천리마운동의 봉화를 지펴올리던 나날의 일들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며 한참 이야기하고나서 말했었다.
《바로 〈천리마〉의 이름을 지으신분도 그 운동을 호소하신분도 우리들을 천리마에 태워주신분도 우리 수령님이십니다.》
사도미는 그제서야 이 제강소가 《천리마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까닭을 똑똑히 알게 되였다.
사도미의 옆좌석에 앉아있는 야스이 가오루도 제나름의 사색속에 묻혀 묵묵히 차창밖을 바라보고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날개돋친 천리마가 선명한 형상으로 안겨온다. 그 마상에 올라 하늘을 날으는 사람들이 바로 그 시련과 창조의 나날을 긍지높이 전하던 그날의 강선의 로동자들과 같은 사람들일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들기도 하였다.
방금전 자기들앞에 쇠장대처럼 꿋꿋이 서있던 그 직장장한테서만으로도 조선의 기상, 천리마의 불같은 숨결을 후덥게 느낄수 있었다.
제아무리 값진 보석이라 할지라도 땅속에 묻혀있으면 빛이 안나듯이 사람의 슬기와 용맹도 그것이 백방으로 발휘되도록 부추겨주고 이끌어주는 령도자가 없이는 땅속의 보석처럼 되고만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바로 사회주의의 천리마를 몸소 발견하시고 이 땅우에 천군만마의 슬기찬 《천리마》를 달리게 하시여 인민들을 기적과 혁신의 창조자로 이끌어주셨던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 얼마전 《요미우리신붕》기자들의 현지지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신 말씀이 이 시각 야스이 가오루의 머리에 하나의 뚜렷한 표상으로 안겨왔다.
주석께서는 현지지도라기보다 배우기 위하여 군중속에 들어간다고 하셨고 인민대중이 선생이라면서 그들에게서 배운다고 하셨다.
얼마나 겸허하시고 인민에 대한 뜨거운 정애와 신뢰의 인간미에 넘치신 령도자이신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진심으로 인민대중을 선생으로 여기시고 언제나 인민대중속에 깊이 들어가시여 그들과 모든것을 의논하시고 고난을 뚫고나가시면서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을 이끌어오셨던것이다.
수령은 인민을 믿고 인민은 수령을 한없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 고귀한 혈연적뉴대가 곧 천리마의 거대한 원동력으로 된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주체사상의 위대한 생활력이다!)
로학자의 심장은 걷잡을수 없이 높뛰였다.
사람중심의 철리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은듯 하여 그는 솟구치는 격정을 누를수 없었다.
그날 숙소로 돌아온 야스이와 사도미는 낮에 강선땅에서 받아안은 감동이 자꾸 되살아올라 밤깊도록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천리마운동이 무엇인가를 이제야 어지간히 알게 된것 같소.》
야스이는 방안을 천천히 거닐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소리에 사색깊은 표정으로 쏘파에 앉아있던 사도미가 몸을 약간 앞으로 일으키며 응대하였다.
《저도 오늘 많은것을 느꼈습니다. 무참히 파괴된 전기로를 40일만에 복구하여 쇠물을 뽑은 강선의 그 기적, 그것은 로동의 진가를 체현하고있는 사람들만이 창조할수 있는 기적이라 봅니다.
로동을 무거운 고역으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생존수단으로 여기고있는 우리 일본사람들에게선 도저히 그런것을 바랄수 없지 않습니까.》
야스이는 문득 발길을 멈추고 새삼스럽게 사도미를 돌아보았다. 그는 사도미의 말에서 자신이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귀중한것을 발견한듯싶었던것이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폭넓은 감각적분석력으로 투시하고있는 사도미였다.
사도미는 웅글은 어조로 계속했다.
《〈로동은 인간사회의 부를 창조하며 인류의 모든 행복의 원천〉이라고 하신 김일성주석님의 가르치심, 그 말씀을 심장으로 받들어 따랐기에 조선의 근로자들이 〈천리마〉를 타고 질풍처럼 달리게 된것이 아닙니까. 이를테면 자주적인간의 본성적요구가 백방으로 발양될수 있도록 선도하는 령도자에 의해서 그런 놀라운 기적과 혁신이 이룩될수 있는 정신력이 사람들에게 심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 세상에서 인간의 가치를 가장 높이 올려세운 주체철학의 위대한 생활력이 있다는것을 새로이 깨닫게 되였습니다.》
《음, 그렇소. 옳은 말이요.》
야스이는 사도미의 말에서 어떤 감흥을 받은듯 혼자소리처럼 외울뿐 한동안 생각에 잠겨 움직일줄 몰랐다.
사람에게 로동이 고역으로 되는가 아니면 즐거운 창조적사업으로 되는가 하는것은 결국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하여 일하며 로동에 의하여 이룩된 물질적재부가 누구의 손에 들어가는가에 달려있는것이다. 그런데 일본사회의 형편은 어떤가. 방금 사도미도 말했듯이 독점자본의 체제하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에게 있어 로동이란 오직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힘겨운 부담으로 되고있다.
이러한 실태를 사도미는 오늘의 강선의 기적에서 꿰뚫어보고 그 진속을 깊이 해부하면서 로동의 진가에 대하여 얼마나 정당한 견해를 피력하고있는가.
야스이는 피어린 체험속에서 학문의 길을 걸어온 새 세대 신진학자인 그 제자의 예민한 분석력에 자신을 새삼스레 비춰보며 새로이 터득되는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며 한편 사도미와 같은 믿음직한 제자와 함께 어깨를 같이하여 새 진리의 길로 들어서게 된것이 사뭇 행복하였다.
안내원이 조용히 방안에 들어섰다. 그는 야스이에게 손님이 찾아왔다는것을 알렸다.
야스이는 천천히 방에서 나갔다. 그를 찾아온 사람은 헤나로 까르네로 체까와 한스 클레카츠키였다.
이른아침이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숙소에서 가까운 대동강반의 유보도를 홀로 산책하고있었다.
아침산보는 평소에 어길수없는 일과로 되여있는터이라 그는 남의 나라라고 하여 그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더우기 이 나라를 많이 보고 느끼고 알고싶다는 욕망이 노상 작용하고있어 여기서의 산책은 단순히 습관을 따르는데서 오는것만이 아니였다.
그는 주변의 풍경을 걸탐스럽게 둘러보며 천천히 거닐었다.
벌써 누가 씻어낸듯 포장길은 윤이 나게 반들반들 거두어져있었다. 유보도의 좌우에는 뽀뿌라, 버드나무들이 푸르싱싱한 새잎으로 단장했고 서로 다투어 피여난듯 맑은 이슬을 담뿍 머금은 붉고 희고 노란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로 뒤덮였다.
대동강이 아침노을빛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소리없이 흐르고있었다.
도시의 한복판을 젖줄기인양 적시며 쉼없이 유유히 굽이쳐흐르는 강물은 맑고 푸르렀다. 부드러운 안개발이 피여나는 수면으로 물새들이 떼를 지어 훨훨 날아들고있다.
로학자는 때때로 가슴을 쭉 펴고 숨을 크게 몰아쉬며 걸음을 옮기군 했다.
그럴 때면 페장깊이로 신선한 공기가 짜르르 스며들어와 온몸에 새 기운이 뻗치는것을 느꼈다.
그는 며칠째 아침마다 이 유보도를 산책해왔었다.
평양은 참으로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였다. 그간 도시의 곳곳을 돌아보며 그것을 느꼈다.
《겉볼 안》이라는 말이 있다. 거리와 자연의 모습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며 얼굴을 뜻하지 않는가.
야스이 가오루는 이제까지 세계 여러 나라를 려행하면서 수많은 도시들을 보아왔으나 평양처럼 공기가 맑고 거리마다에 가로수들이 시원히 들어섰으며 이르는곳마다에 잘 꾸려진 공원들이 들어앉아있는 고장을 아직 보지 못했다.
흔히 빠리는 《도시안의 공원》이라지만 진정 평양은 《공원안의 도시》였다.
전에 일본신문에서 본 한 탐방기자의 글이 조금도 틀리지 않고 옳았다.
그는 그날 그 기사에서 받았던 하나의 커다란 감동이 뭉클 되살아나면서 가슴이 마냥 후더워올랐다.
엄혹한 전화의 나날에 주석님께서 무르익히신 나라의 대자연개조에 대한 구상이 오늘 이 땅우에 얼마나 아름답게 펼쳐져있는가!
그이의 원대한 구상이 빛나게 마련되여있는 현실을 야스이는 새로운 감회속에서 뜨겁게 느끼며 천천히 거리를 걸어나갔다.
그는 며칠전 만경대참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민석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돌이켜졌다.
《우리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도시를 하나 건설하고 거리를 하나 형성할 경우에도 인민들의 건강을 제일먼저 생각하시여 나무부터 심고 공원부터 만들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말하며 강민석은 보통강을 따라 일떠서있는 다채로운 고층건물과 거리를 소개하였다.
그곳은 해방전 빈민촌으로 알려졌던 토성랑으로서 옛날에는 강기슭을 따라 토굴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고 한다. 헌데 그 한산한 고장이 지금은 웅장화려한 기념비적건물과 살림집들로 꽉 들어차고있어 빈궁의 흔적마저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이 변하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강민석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에 김사량의 단편소설 《토성랑》을 읽었던것이 상기되였다. 그 작품에는 토성랑마을사람들의 암담한 생활과 장마끝에 밀려온 홍수에 휘말려 아우성치는 참혹한 인간상이 생동하게 형상되여있었다.
야스이는 평양이 처음이였으나 그 작품을 통하여 이 거리의 옛모습을 충분히 그려볼수 있었다.
강민석은 이 거리를 천리마거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넓게 트인 도로변을 따라 줄줄이 서있는 가로수를 가리켜 수삼나무라고 알려주었다.
《아, 수삼나무!》
야스이는 탄성을 지르며 가로수의 푸르청청한 기상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바로 이 나무였구나! 주석님께서 몸소 가꾸신것을 삽목하여 온 나라에 심도록 식물학자에게 이르셨던것이…)
야스이는 전에 받아안았던 그날의 감격이 되살아오르자 두손으로 가로수를 어루쓰다듬으며 일매지게 키높이 자란 수삼나무를 보고 또 올려다보았다.
보통강반의 놀라운 전변,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김일성주석의 인간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과 배려가 바로 이 아름다운 거리와 강반을 낳은것이 아니랴.
야스이 가오루는 그 모든것을 새로운 감동속에 되새겨보며 산책의 길을 이어나갔다.
록화가 빈틈없이 조화롭게 잘되고 깨끗하게 이루어져있는 이 도시에서는 자동차배기가스냄새는 거의 느낄수 없어 산촌에서처럼 공기가 그지없이 투명하고 맑았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매연과 소음, 각종 오물로 하여 공기가 탁하고 숨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자랑할만 한 아름다운 자연의 나라였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자연이 세월이 갈수록 공해로 오염되고 파괴되여가고있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고도로 발전된 문명과 자연은 공존할수 없다》고 주장하고있으나 조선의 현실은 그런 주장의 부당성을 얼마나 웅변적으로 증명해주고있는가. 아이들이 유보도 여기저기의 의자에 앉아 책과 학습장을 펼쳐들고있는것이 눈에 띄웠다. 야스이는 가만히 다가가서 그들이 공부하는 모양을 살펴보았다. 아이들은 조용히 소리내여 외우기도 하고 책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기도 하였다. 모두 옷차림들이 단정했다. 그들이 앉아있는 의자주변에는 물통이며 비자루같은 청소도구들이 보인다.
야스이는 그제서야 티없이 청결한 포석길이며 물방울이 함뿍 맺힌 꽃밭들이 다 이 어린이들에 의해 그토록 산뜻하게 가꾸어졌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한 소년이 인기척을 느낀듯 뒤를 돌아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 안녕하십니까!》
그애는 한손을 높이 쳐들어 소년단경례를 했다. 눈매가 여물고 영특해보이는 아이였다.
야스이는 이 나라에서 아이들의 인사를 수다히 받았다. 그럴 때마다 어린이들이 하나같이 명랑하고 더없이 례절바르다는것을 느끼며 자기 나라 어린이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무거워지군 했었다.
《안녕하십니까!》
로학자는 그 소년의 발깃하고 통통한 볼을 만져주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공부에 열중하는 아이들에게 방해가 될것 같아 그 소년의 어깨를 한번 다정히 다독여주고나서 발길을 옮겼다. 학생소년궁전을 찾아갔을 때 아이들이 《세상에 부럼없어라》하고 부르던 창창한 노래소리가 귀전에 되살아올랐다. 랑만이 한껏 나래치는듯 한 그 노래는 가없이 넓고 푸른 하늘이였다. 세상에 부럼없이 무럭무럭 자라고있는 아이들의 순결한 마음이였다.
이 나라에서는 어린이들을 나라의 《왕》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어린이들을 귀중히 여기고 그들에게 좋은것을 선참으로 준다는 그런 단순한 뜻에서만이 아니였다. 어린이들에게 《왕》으로서 지녀야 할 최대의 사랑과 희망, 삶을 안겨준다는 사상에서 나온것이였다.
하기에 저 어린이들은 부럼없이 활짝 나래칠수 있는 세상을 마련해주신 위대한 수령님을 아버지라고 목청껏 부르고 따르면서 공부도 잘하고 조국의 일목일초를 아끼고 정성담아 가꿀수 있는것이 아니랴.
그것은 순결이였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니고 갖추어야 할 정신도덕적감정을 자래워주고 지켜주었기에 이지러지지 않는 깨끗한 동심이 한껏 자라오를수 있었던것이다.
봄빛이 완연하고 백화만발한 4월, 평양의 봄은 참으로 아름답다. 이 계절을 사람들이 류달리 사랑하고 정성담아 마련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로학자는 이 아침 그 깊은 뜻을 더한층 깨닫게 되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더없이 유쾌한 기분으로 숙소를 향해 활기차게 걸어갔다.
《단장선생님,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학자님들모두 하루 푹 휴식하는것이 어떻습니까?》
강민석이 기다렸던듯 숙소의 현관을 들어서는 야스이를 향해 말했다.
며칠째 지속된 현지참관으로 피로할 일본학자들을 생각하여 하는 소리였다.
야스이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강민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벌써 일요일이란말입니까?》
정녕 세월이 가는줄을 몰랐다. 듣는것마다 보는것마다 다 새롭고 놀랍고 감동적이여서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휴식같은것은 추호도 생각한적이 없고 나날이 보람차고 즐겁기만 하였다.
《저는 쉬고싶은 생각이 통 없습니다만… 어디 모두에게 한번 물어는 봅시다.》
젊은이들처럼 두팔을 벌려 가슴을 쭉 펴며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듯 하는 로학자는 이제껏 강변의 신선한 공기에 취해온탓인지 환갑이 썩 지난 사람답지 않게 원기왕성했다.
강민석은 그의 호담한 기세에 접하자 은연중에 마음이 흔들리였다. 전날 비행기안에서 그가 부탁하던 최학성의 소식을 오늘은 비치지 않고 후날에 전하려고 혼자 생각했었다. 만약 당장 가서 만나겠다고 나선다면 랑패가 될것 같아서였다. 그도 그럴것이 로학자의 건강을 념려하여 오늘은 일체 참관을 중지하고 휴식시키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고있는 강민석이였다.
그러나 그가 몹시 궁금해할것 같아 강민석은 알리기로 하였다. 엊그제도 그걸 묻던 로학자였다.
《단장선생님이 찾는 최학성을 알아봤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야스이는 환성이나 지르듯 강민석의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한꺼번에 물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학성군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한답니까?》
《과학원 연구사로 있습니다.》
《사회과학원말이지요?》
《아니, 물리학연구소에 있습니다.》
《뭘, 물리학연구소라구?…》
야스이는 저으기 의혹이 실린 시선으로 강민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본에서 최학성은 법학도였다. 호세이대학의 자기가 맡은 강좌의 학생이였었다. 그는 3학년에서 대학을 그만두기는 했다. 그래서 최학성은 비록 법학과정을 다는 필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애초의 전공과는 생판 다른 자연과학자가 되였으므로 그로서는 뜻밖일수 밖에 없었다. 혹시 최학성과 동성동명의 사람인지 모른다. 세상에는 그런 일도 간혹 있었다.
야스이의 이런 내심까지는 헤아릴수 없어 강민석은 그의 뜨아해하는 기색에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먼저 물어봤다.
《호세이대학에 다니다 귀국한 최학성을 찾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틀림없는것 같았다. 자기가 알건대는 호세이대학에 그런 이름을 가진 조선학생은 그 말고는 없는것으로 알고있다.
《녜, 분명 그를 찾았지요. 헌데 원래는 법학도였는데 어떻게 물리학자로?…》
《아-그래서였군요. 그 사연은 모르겠습니다만 그 연구사도 야스이교수님을 잘 알더구만요.》
강민석은 비로소 야스이가 의문하는바를 알았다.
사실 강민석자신도 아직은 최학성을 한번도 만나보지는 못하고있었다. 해당기관을 통하여 그의 거처와 직장을 알아내고 전화상으로만 간접적으로 대했을따름이였다.
그러나 강민석은 곧 후회했다. 로학자의 궁금증을 한시라도 빨리 덜어주려는 심산에서 그 소식만을 우선 전했는데 아닐세라 그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부장님, 수고하겠지만 이제 그에게로 날 좀 안내해주지 않겠습니까? 마침 일요일이라 학성군이 집에 있을게고… 물리학자가 된 그를 어서 만나고싶습니다. 다른 학자들은 휴식하도록 내가 말하지요.》
야스이는 이렇게 말하며 간절하게 나왔다.
강민석은 매우 난처해졌다. 그러나 응할수 없었다.
《단장선생님, 오늘은 쉬시고 래일 가도록 합시다. 사흘후엔 대회에도 참가하셔야겠는데 너무 무리하시다 탈이라도 나면 야단이 아닙니까.》
《탈이라니 원, 그런 걱정은 조금도 마시오.》
《정 그러시다면 본인을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면 어떻습니까?》
강민석은 나중에 이런 타협안까지 내놓으며 로학자를 진정시키려 했다.
허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여간만 고집이 완고하지 않았다.
강민석은 며칠전에도 그에게서 이런 점을 적지 않게 느낀 일이 있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앞으로 있을 사회과학자대회에서 일본학자들을 대표하여 학술토론을 하게 되여있다. 그래서 그는 참관의 여가와 저녁휴식시간을 리용하여 원고를 쓰군 하였다. 이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 강민석은 그의 로고를 덜어주려고 그에게 원고를 정리하고 타자하는 일을 우리가 도와주겠다는것을 비쳐보았었다. 그런데 로학자는 그 호의를 점잖게 일축했다.
《매우 고맙습니다만 나는 아직까지 남의 손을 빌어 원고를 정리한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많은 외국인을 상대해온 강민석은 그런 경우 그들스스로가 먼저 타자의뢰를 해온것을 수다히 보아온터여서 로학자가 그렇게 나오는것이 사뭇 놀랍게 여겨졌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본인을 부르다니요? 아니 내가 직접 가봐야 하겠습니다. 사는 형편이랑도 볼겸… 부장님의 휴식날을 침범해서 안됐소만 부탁합시다.》
야스이는 강민석의 손목까지 잡으며 매달리듯 간청해나섰다. 그 바람에 강민석은 더는 만류할 길이 없었다.
《박사님도 참.》
《허허…》
야스이는 자기 심정을 십분 리해해주는 이 키가 후리후리하고 일본어에 능통한 강민석부장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친근감이 더해지면서 소리내여 웃었다.
두 사람을 태운 자동차가 평성을 향해 달리고있었다. 살수차가 물을 뿌리고간 길이 곧게 뻗어있다.
《서로 민족은 달라도 사제간의 정이란 국경을 초월하리만치 깊고 두터운 그 무엇이 있는 모양이죠? 야스이교수님이 조선의 한 제자를 그토록 잊지 못하고 생각하시는걸봐도 말입니다.》
숙소를 떠난지 얼마 안되여 강민석은 차안에서 은근한 어조로 이렇게 먼저 말을 건네였다.
《글쎄요.…》하고 야스이 가오루는 한마디 조용히 응대했을뿐 차창밖에 얼굴을 돌린채 잠자코 있었다. 그가 갑자기 진중해진것을 보면 어떤 사연많은 과거의 감회속에 잠겨있는것 같았다. 그래서 강민석이도 더는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게 되였다.
자동차가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교외에 들어섰을 때에야 로교수는 추억을 더듬어가듯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요. 사제지간이란 신성한 학문의 뉴대로 맺어져있는 류다른 관계라할가요?…
허지만 최학성군과 나와의 관계는 그보다 더 뜻깊은 인연으로 서로 맺어진 사이랍니다. 나에게 언제나 각별한 정을 불러일으키는 그 최군을 찾아가는 길이므로 좀 이야기합시다.》
야스이 가오루는 이렇게 말머리를 떼더니 흘러간 지난날에 있었던 일들을 강민석에게 자초지종 들려주고나서 감회에 젖은 어조로 말을 맺었다.
《…그렇게 헤여진 후 오늘에 이르는 오랜 세월을 최학성군과는 통 만나지 못하였지요.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물리학자로 성장한 그는 이 훌륭한 자기 조국에서 아마 그 큰 머리가 더 커졌을겁니다. 허허…》
강민석은 한 제자를 언제나 잊지 못하고 그려온 이 로학자의 심정이 비로소 잘 헤아려졌다.
진정 거기에는 단순히 사제간의 의리보다 그것을 초월한, 웃음으로 넘길수 없는 깊고 뜨거운 인간의 정리가 있었다.
강민석은 바야흐로 벌어질 두 사람의 감격적인 해후를 머리속에 그려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적 일입니까. 헌데도 그를 잊지 않고 늘 생각하셨다니.…
최학성연구사인들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옛 스승을 맞이하겠습니까. 아마 깜짝 놀랄겁니다. 그런 사연을 미리 알았더면 신문기자라도 동행해올걸 그러지 않았습니까. 참 아쉽구만요.》
《뭘 그렇게까지 소문낼 필요야…》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유쾌히 소리내여 웃었다.
그들은 그간 여러날 접촉하는 과정에 자연히 허물없는 사이가 되여 이제는 제법 롱담까지 나눌 정도의 친숙한 관계로 되고있었다.
어느덧 자동차는 평성시내에 들어서고있었다.
이 고장을 과학의 도시라고 하였다.
육중한 굴곡을 이루고 련련히 뻗어나간 산발을 배경으로 길다랗게 들어앉아있는 평성은 과연 다른 도시와는 다른 인상을 주었다. 우선 아담하고 정갈하고 조용했다. 건물 하나하나가 정연히 서있는 가로수들과 조화로운 색조를 이루면서 어딘지 도시전체가 숙연한 감을 준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역시 사색에 잠겨있는듯 걸음걸이에 무게가 있어보였다. 고층주택의 베란다마다에 갖가지 꽃들이 핀 화분들이 놓여있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쾌한 기분을 자아내게 하였다.
최학성의 집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수 있었다.
자동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아빠트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 8층에서 내렸다.
정작 목적한곳에 당도하고보니 강민석은 은근히 걱정부터 앞섰다. 평양을 떠나올 때 최학성에게 자기들의 방문을 알려줄것을 부서에 부탁하고 오지 못한것이 념려되여서였다. 아무 기별도 없는 돌연한 방문으로 주인을 당황하게 만들수도 있는것이였다.
최학성의 집앞에 이르자 강민석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현관문가에 달려있는 신호단추를 눌러 밖에 래방자가 있는것을 알렸다.
한동안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이 잠잠했다.
다시한번 신호단추를 눌렀다.
한참 지나서 문이 빠끔히 열렸다.
《누구시나요?》 하고 물으며 처녀애가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예닐곱살이나 될 곱살하게 생긴 아이였다.
《아버지 계시냐?》
강민석은 처녀애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 아이는 키가 큰 아버지또래의 사람과 그의 곁에 서있는 머리 허연 웬 할아버지를 새별같이 반짝이는 눈으로 한번 쭉 훑어보고나서 대답했다.
《예, 계셔요!》
《그-래. 그럼 아버지를 좀 불러다오. 우린 평양에서 왔단다.》
《평양에서요?…》
처녀애는 눈을 반짝거리며 돌아서더니 안으로 뽀르르 달아갔다.
잠시후 훤칠한 키에 머리가 크고 혈색좋은 얼굴의 사나이가 현관문을 활짝 열어제끼며 두 사람앞에 나타났다. 그는 밖에 있는 두 래방자를 일별하다가 로교수의 시선과 마주치자 급기야 두눈을 번쩍 빛냈다.
《야스이선생님!》
최학성은 부르짖으며 무춤 굳어졌다가 쓰러지듯 교수의 품에 와락 안기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안경낀 눈을 슴벅거리며 량팔을 벌려 최학성을 뜨겁게 포옹했다.
《최군! 엉, 이게 얼마만이요! 참으로 기쁘오.…》
뜻하지 않는 만남에 최학성은 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번지지 못하고 백발이 성성한 스승의 엄청난 변화를 놀라움과 반가움에 겨운 눈길로 바라보기만 하고있었다. 하많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호세이시절, 그 대학의 은사가 이렇게 찾아주리라 꿈에도 생각못했었다. 참으로 뜻밖이였다.
이윽고 최학성은 강민석과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갑작스런 방문으로 주인이 몹시 당황해하리라고 걱정했던 강민석은 의외에도 최학성이 침착하고 스스럼없이 손님을 맞아들이는것이여서 저으기 마음놓였다.
그들은 주인의 뒤를 따라 넓고 시원한 전실을 거쳐 서재 겸 응접실로 사용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최학성은 호기심에 차서 뒤따라 들어온 어린 오누이를 향해 일렀다.
《얘들아, 할아버님과 아저씨께 인사올려라.》
오누이는 가지런히 서서 머리를 꾸벅 하며 동시에 소리를 내였다.
《안녕하십니까!》
야스이 가오루는 자기 아버지를 신통히 닮은 머리 큰 총각애를 두팔로 담쏙 품에 안고 처녀애를 곁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참, 모두 곱고 착하구만요! 헌데 이 할아버지가 너희들에게 줄 선물 하나 들고온것이 없으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그는 후회막급이였다. 이런줄을 알았더라면 강민석에게 부탁해서라도 무얼 좀 마련해가지고 올것을 그랬다고 여간만 서운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헌데 그의 옹색하고 거북한 기분을 이때 옆에서 강민석이가 제꺽 풀어주었다.
강민석은 끼고 온 서류가방안에서 캬라멜이며 그림책들을 꺼내여 아이들의 손에 쥐여주며 명랑한 소리로 알렸다.
《할아버님이 주시는거다.》
야스이는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자기의 불찰을 강민석이가 맡아 덜어주는것을 보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얼마나 사려깊고 세심한 일군인가!
야스이는 그의 사람됨을 갈수록 더 깊이 느꼈다.
《얘들아, 어서 엄마를 불러오너라.》
최학성이 아이들에게 일렀다. 오누이는 곧 방에서 나갔다.
야스이와 강민석은 쏘파에 나란히 앉았다.
최학성은 잠간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담배를 붙여물고 조용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유리창으로 담뿍 스며드는 해빛에 실내가 몹시 밝고 아늑했다. 가장집물의 갖춤새는 소박했으나 주부의 알뜰한 손길이 구석구석에 깐깐히 미쳐있어 어디에나 알른알른 윤택이 돌았다.
야스이 가오루의 시선이 많이 미친것은 서가였다.
서가에는 조선문판 서적이 태반을 차지하고있었다. 한편 그와 못지 않게 외국문판도 적지 않게 보였다. 그것들은 영어, 도이췰란드어, 로어, 일어 등의 원서들로서 다 자연과학분야의 책들이였다. 그속에 법학계통의 책자가 혹 섞여있지 않는가 하여 눈여겨 더듬어보았으나 하나도 띠우지 않았다.
야스이는 어지간히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최학성이 현재는 설사 전공이 물리학이라 하더라도 자기에게 받은 법학강의 속기록쯤 몇권은 보존하고있으리라 기대를 걸었던것이다.
그렇다면 최학성은 전공전환과 함께 호세이시절을 망각속에 묻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야스이는 서운한 심사에 잠겨 서가에서 시선을 옮겼다.
숱한 자료며 원고가 쌓인 책상에는 문헌과 노트들이 펼쳐져있는데 그우에는 전자계산기와 삼각자, 원주필이 널려있었다. 이런것으로 미루어 이 방의 주인은 오늘이 일요일인데도 쉬지 않고 이제까지 무슨 연구에 몰두하고있었음을 쉬이 알수 있었다.
얼마후 최학성이 한 젊은 녀인과 함께 방에 나타났다.
그 녀인은 손님들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보낸 다음 량손에 받쳐들고온 청도자기화분을 탁자우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그 화분에는 방금 망울을 터친듯 세송이의 활짝 피여난 진주꽃이 다소곳이 고개를 수그리고있었다. 크고 탐스럽고 정열에 타는듯 빨간 매혹적인 꽃이였다.
방안이 더 밝고 환해졌다. 이 가정의 단란하고 행복한 일단을 잘 보여주는듯싶었다.
《저의 안해입니다.》
최학성은 로교수와 강민석에게 그 녀인을 소개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보조개가 살짝 패인 녀인은 그 용모나 자태가 우아하고 깨끗해보였다.
《먼길을 일부러 찾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주인은 야스이선생님에 대해서 늘 이야기하군 합니다. 저도 일본에서 원수폭금지대회에 참가했다가 선생님을 한번 뵈온적이 있었어요.》
최학성의 안해는 홍조어린 얼굴에 환한 미소를 피우며 해맑은 목청으로 로학자를 존경을 담아 깍듯이 대했다.
《아- 그래요. 대단히 기쁩니다. 모두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걸 보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구만요.》
야스이는 쏘파에서 몸을 일으켜 그 녀인에게 자기의 진심을 솔직히 말했다.
서둘러 방에서 나갔던 최학성의 안해는 차쟁반을 들고 도로 돌아왔다.
《선생님이 좋아하시겠는지. … 오갈피차랍니다.》
녀인은 야스이앞에 차잔을 옮겨놓으며 은근히 걱정을 앞세웠다.
강민석이 옆에서 녀인의 역성을 들고나섰다.
《교수님, 이 오갈피차는 우리 나라 명산물로서 커피나 홍차와는 다른 감미가 특유한 음료입니다. 건강증진에 아주 좋습니다.》
《오갈피라?… 음, 귀한 약재로 쓰인다는 말을 들은것 같소.》
야스이는 차잔을 손에 들며 혼자소리처럼 뇌였다.
《그래요! 교수님도 아시누만요. 강장제로도 아주 좋다고 합니다.》
사제간의 뜻깊은 상봉마당을 즐겁게 하려고 왼심을 쓰는듯 강민석은 롱담도 적당히 섞어가며 내내 명랑하게 나왔다.
손님들의 말에 저으기 마음놓은듯 녀인은 벙긋이 웃으며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야스이는 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진록색의 차를 한모금 마셨다.
향기며 맛이 독특한게 구미에 맞았다. 강장제라더니 장기관들이 순시에 자극을 받은듯 속이 후련한게 기분이 좋았다.
강민석은 차를 마시고나서 자리를 일며 말했다.
《교수님, 밖에 좀 나갔다오겠습니다. 일이 좀 있어 지체될지 모르겠는데 그새 두분께서 회포를 차분히 나누도록 하십시오.》
《신문기자라도 청해오려는게 아니요?》
야스이는 아까 오는 도중 차안에서 그가 하던 소리가 피뜩 생각나 가벼운 롱조로 떠보았다.
《기자라구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요. 허지만 교수님이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하셨는데 설마, 허허… 그럼 최동무! 스승과 뜻있는 시간을 보내기 바랍니다.》
강민석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면서 방에서 떠나갔다.
류다른 인연으로 맺어진 두 사제지간의 오래간만의 해후를 보다 흥거롭고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마련해주려고 그는 일부러 자리를 피하는것이였다.
최학성부부는 현관문밖까지 따라나오며 강민석에게 점심까지는 꼭 돌아오도록 거듭 당부하였다.
강민석은 알았노라면서 승강기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방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쏘파에 편히 기대여있는 야스이의 곁으로 최학성은 안락의자를 끄당겨놓고 그와 마주하고 앉았다.
《선생님이 저를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주실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간 편지 한장 드리지도 못하고… 면목이 없습니다.》
최학성은 진정을 터놓았다.
《무슨 소릴 하오. 내가 군을 잊다니… 편지로 말하면 피차 마찬가지지. 그보다 학성군이 이토록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물리학자로 된것을 직접 목격하고보니 정녕 기쁨이 이를데 없이 크오. 뒤늦게나마 나의 축하를 받아주면 고맙겠소.》
야스이는 두눈을 슴벅거리며 말했다.
쌀쌀한 겨울저녁 거리, 퇴색한 얇은 잠바를 몸에 걸치고 창백한 낯색으로 혈액은행앞에서 비칠거리던 그날의 최학성의 옛 환영이 언뜻언뜻 뇌리를 스치여 야스이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최학성을 자꾸만 쳐다보게 되였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를 그렇게 축복해주시니…》
최학성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실상 이 스승을 접촉한것은 강의실에서의 교수시간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상종하는 일도 없었는데 이렇듯 따뜻한 정애를 품고 대해주니 그는 진정 고마움이 한량없었다. 그 스승에게 하직도 못한채 떠나온것이 후회되였다.
당시 최학성은 학비를 충당할 길이 없어 대학을 중도에서 나와 규슈로 내려갔었다. 그 나날의 쓰라림을 잊을수 없는것처럼 윈으로 떠나 부재중인 야스이교수에게 부득이 인사도 못하고 남행렬차에 몸을 싣고 도꾜를 떠나가던 일이 오늘따라 그의 머리속에 방불히 그려졌다.
최학성의 마음을 읽기나 한듯 야스이는 한동안의 침묵끝에 먼저 궁금히 여겨오던 일부터 물었다.
《최군, 호세이를 떠난 후 어디서 무얼하다가 귀국했소?》
《나가사끼에서 로동하다 귀국의 배길이 열리자 인차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습니다.》
최학성은 《조국의 품》이라는 말에 유독 억양을 담아 이야기했다.
《난 그런것도 모르고 군을 얼마나 찾았는지 아오? 대학을 떠난 후 거처라도 알려줄게지.》
야스이는 당시의 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책망조의 음성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이래저래 생활에 몰리다보니…》
그는 스승을 향해 자신이 겪어온 지난 생활을 조용조용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리수과목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있던 최학성은 일찍부터 장래 물리학자가 될것을 희망해왔다. 허지만 그의 뜻은 일본에서는 도저히 실현할수 없는 한갖 망상으로밖에 되지 않았다.
그무렵에 총련이 결성되였는데 동포들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조국에로의 귀국운동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포기했던 애초의 희망을 다시금 품게 되였다.
최학성은 조국의 품에 안기자 물리학부를 지망했다.
대학편입을 위한 면담시 시험관이 학생은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왔는데 왜 이제 와서 물리학으로 전과하려고 하는가고 물었을 때 그는 자기 결심을 솔직히 말했던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물리학도가 되였다. 바람세찬 이국땅에서 그토록 애타게 바라던 광활한 길이 그의 앞에 드디여 활짝 열리였다. 조국은 배움의 갈망과 고역에 시달려온 혈혈단신의 청년을 따뜻이 품어 그의 희망이 한껏 나래칠수 있도록 온갖 사랑과 지성으로 떠밀어주었다.
최학성은 만약 자기가 조국의 품에 안기지 않았더라면 어떤 운명에 놓였을것인가를 옛 스승앞에 구태여 이야기하지 않았다. 스승이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도 남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선생님, 저는 비록 법학을 떠나 물리학으로 전환했으나 호세이시절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입니다. 정의와 량심, 인간문제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그 나날의 선생님의 모습을 언제나 기억하고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선생님의 저서를 소중히 보관하고있습니다.》
최학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다가가더니 책장안에서 한 책자를 찾아들고와 스승앞에 내놓았다.
야스이는 그것을 손에 들고 보았다.
《민중과 평화》라는 제명을 단 그 책은 야스이 가오루가 집필한 몇편의 저술을 묶은것이였다.
《민중과 평화》, 그속에는 제2차 세계대전 전과 후의 고난과 시련을 헤쳐오며 체험한 한 법학자의 회의와 번뇌, 량심과 항거의 정신적편력이 비껴있었다.
야스이는 그 시절의 회억을 불러일으키는 책자를 조선에서 대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것도 물리학자의 서재에서…
로교수는 그것을 오늘까지 간수하고있는 최학성이 고맙게 여겨지면서도 한편 부끄럽기도 하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은 빈약한 사색과 감정으로 엮어진 하잘것없는것이였다.
최학성에게 차례진 오늘의 생활을 놓고보아도 그것을 알수 있었다. 그 책속에 력력히 어려있듯이 자신이 한생을 찾아온 그길을 최학성은 이미 걷고있었으며 그길에서 일약 광명한 세상에로 도달하지 않았는가.
무릇 인간해방이란 본질에 있어서 사람들의 참된 삶과 운명 개척에 관한 문제이다.
《민중과 평화》도 제딴에는 그러한 사회적문제를 모색하노라 한것이였다.
그러나 최학성은 모름지기 거기서 아무러한 감흥도 얻을수 없었을것이다. 현재 필자자신조차도 불만을 품고있는데야… 바람세찬 이역땅에서 헤매던 한 청년을 누가 안아다 품어서 오늘은 이렇듯 당당한 과학자로 육성하고 세상에 버젓이 내세워주었는가.
그것은 바로 최학성의 조국이였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중한 존재로 여기는 사랑하는 주체조국의 품이였다. 그품이 있었기에 그의 리상도 미래도 창창하게 열렸고 빛날수 있었던것이 아닌가!
야스이 가오루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마냥 달아올랐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했다.
《학성군, 하찮은 이 책이 무어기에 조국에까지 가져오다니…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것을 말이요. 그러나간에 호세이시절을 잊지 않는다니 고맙소.…나역시 군을 언제나 잊지 못하고있소. 더우기 윈으로 떠나는 나를 위해 바치던 그날의 군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않을거요.》
로교수는 목이 메여오는듯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가 어성을 높여 말했다.
《학성군, 난 당신이 참 부럽소. 나는 제딴에는 주체사상에 대해서 적지 않게 인식하고있다고 생각해왔는데 군을 대하고보니 그 위대성, 그 진리성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였소. 군의 그 큰 머리가 더커진 까닭도 이제야 알게 되오.》
《저의 머리가요? 선생님도 참…》
최학성은 검고 숱이 많은 자기 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린아이처럼 어줍게 웃었다.
그 순진한 미소에 야스이도 따라웃으며 한층 기분이 맑아졌다.
《하기야 머리가 어찌 더 커졌겠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거지. 사회와 민중을 위해 헌신할줄 아는 사람이란 대체로 뇌수가 크다지 않소. 그래서 나도 조선에 배우러 왔단 말이요. 내 머리도 늘그막에나마 좀 커질가 해서, 허허…》
야스이는 쏘파등에 몸을 기대며 소리내여 웃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고있었다. 물리학자로서의 최학성의 두뇌가 이 나라의 광휘로운 빛발속에서 더한층 크게 자라리라는것과 한편 자기자신도 그렇게 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고있는것이였다.
스승과 제자간의 오래만의 상종이여서 둘사이의 이야기는 끝이 없을상싶었다.
만약 강민석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점심때가 지나가는것도 몰랐을것이였다.
강민석은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로교수에게 사진기를 들어보이며 벙글거렸다.
《기자는 데려오지 않았지만 이것은 구해가지고 왔습니다.》
이 시각을 위해 이미 평양을 떠나올 때부터 가지고 온것을 두고 강민석은 짐짓 그렇게 말한다.
《그것 참 다행입니다. 부장님, 이제 당장 찍어주겠습니까?》
야스이 가오루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민석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최학성더러 어서 부인과 아이들을 데려오도록 재촉했다.
갑자기 서재안이 흥성거렸다.
그날 오후 최학성과 헤여져 야스이 가오루는 평양숙소로 돌아오는 도중 체신부에 들려 도꾜의 안해에게 자기 마음의 한 갈피를 전보로 날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