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안개서린 도표
제 3 장
잠자리에 들려던 사도미 아즈시는 침상머리에서 울리는 전화종소리에 수화기를 들었다.
야스이 가오루로부터 오는 전화였다.
《이거 밤중에 안됐소만 긴히 만나야 할 일이 있는데… 우리 집에 와줄수 없겠소?》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사도미는 스승의 돌발적인 청에 다소 어리둥절해져 말끝을 흐리였다.
《전화로 말하기가 좀…》
《알았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사도미는 흥분에 싸여있는듯 한 스승의 목소리에서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기미를 알아차리고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서둘러 외출차비를 하고 자동차로 집을 나섰다.
같은 도꾜에 살지만 여기서 스기나미 오기꾸보의 야스이의 집까지는 퍼그나 상거한 거리였다.
네온등의 현란한 불광이 번뜩이는 번화가의 거리를 달리면서 사도미는 스승이 때없이 찾는 까닭을 이모저모로 추측해보았으나 별로 집히는것이 없었다.
로교수와 대면한것이 하루를 지난데 불과하였다.
지난 전쟁시 히로시마가 원자탄의 참화를 입은것이 바로 8월 6일인 어제였는데 일본에서는 이날을 반핵, 평화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국제적인 행사를 진행해온다.
야스이 가오루는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 의장직에서 비록 사퇴하였으나 그 조직의 고문으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활약하고있다. 사도미는 어제 스승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반전, 반핵, 평화》의 큰 프랑카트의 천단을 들고 시위대오의 앞장에 서서 거리를 행진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승에게서 별다른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 헌데 하루밖에 안되는 그 어간에 무슨 긴급한 일이 생겼단 말인가?
아무튼 례사롭지 않았다. 평소에 여간하여 흥분을 앞세우는 스승이 아니였다. 또한 자기 의사를 남에게 강요하거나 상대방의 사소한 자유라도 구속하는따위 행동을 하는것을 아주 질색하였다. 하기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자신이 스스로 찾아다녔지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부르는 법이란 좀체로 없었다.
오래전부터 그 스승의 충실한 동반자로 되여온 사도미는 그의 이러한 성미의 일단까지도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풀길없는 의문과 상상속에서 자동차를 몰아가던 사도미는 스기나미쪽으로 뻗은 소로길에 이르자 속도를 늦추고 한적한 밤거리를 한동안 달렸다.
어느덧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사도미는 차에서 내려 집울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고있었던듯 야스이가 현관밖에 나와 서서 복슬개를 얼리며 사도미를 맞이했다.
《안됐소! 밤중에 이렇게 먼길을 오게 해서…》
《선생님도 원, 별 말씀을… 덕분에 선선한 밤바람을 쏘이게 되여 기분이 상쾌하군요.》
스승이 미안해하자 사도미는 이렇게 응수하며 가벼이 웃어넘겼다.
사도미는 찾은 용건이 무엇인가 서둘러 묻지 않고 야스이의 기색부터 살폈다.
현관의 불빛을 받고 서있는 야스이의 얼굴은 폭양아래서의 《반전, 반핵, 평화》행진시에 탄듯 불깃하니 그슬려있었으나 밝은 표정이였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새에도 복슬개는 야스이의 바지가랭이에 묻어 돌아가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러다가 때로는 사도미의 다리에 감겨들며대구 꼬리를 휘젓기도 했다.
사도미는 허리를 굽혀 손으로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애무해주었다.
이때 바깥에서 나는 사람기척에 다즈꼬부인이 현관밖으로 신발을 끌며 뛰쳐나왔다.
부인은 전에 없이 수선을 떨며 손님을 반가이 맞이한다.
이토록 두 부부가 떨쳐나와 처음 대하는 귀빈이라도 영접하듯 하는것을 보자 사도미는 어리둥절해지면서 의혹이 더 들었다. 갑자기 이 집에 무슨 경사라도 생긴것일가?
부인은 지체하지 않고 손님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사도미는 아지 못할 기대와 호기심에 싸여 부인의 뒤를 따라 응접실에 들어갔다.
《무더운 밤이군요.》
다즈꼬부인은 혼자 외우며 소탁우에 있는 선풍기단추를 눌러놓고 사도미를 향해 돌아섰다.
《시원한 찬 거피를 하겠어요?》
《사모님, 저는 여름철에도 커피만은 더운것을 합니다.》
《참, 그래셨던걸…》
이미 전에부터 사도미의 그런 취미며 기호를 알면서도 새삼스레 물어본것이 쑥스러운듯 부인은 한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다즈꼬부인의 밝고 깨끗한 용모를 바라보며 사도미는 궁금증에 못이겨 슬쩍 물어봤다.
《댁에 갑자기 경사라도 생겼습니까?》
《글쎄, 경사라고 할가요. …이제 주인을 만나시면…》
부인은 미소를 띠우며 이렇게 얼버무리면서 총총히 방에서 사라졌다.
사도미는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쏘파에 앉아 담배를 막 붙여무는데 야스이 가오루가 서재에서 나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록음기가 들려있었다.
《실은 중대한 뉴스가 입수되여…그래 함께 듣고싶어 야밤삼경을 무릅쓰고 불렀던거요.》
야스이는 록음기를 탁상우에 얹으며 말했다.
가뜩이나 의혹에 싸였던 사도미는 한층 마음이 동하여 성급히 물었다.
《중대뉴스라뇨?》
《이제 들어보면 알거요.》
야스이는 조용히 대꾸하며 카세트단추를 누르고나서 사도미와 마주하고 앉았다.
두 교수는 록음기를 앞에 하고 숨을 죽였다.
불현듯 먼 우뢰소리인양 장쾌하고 맹렬한 음향이 거센 바람을 안고 설레이는 파도처럼 울려왔다.
그 소리는 음악의 흐름마냥 차츰 비상한 속도와 열정의 환호로 변하면서 삽시간 그들의 청각에 메아리쳐 울려와서는 온몸을 뜨겁게 감싸기 시작하였다.
한순간 두 교수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듯 서로 부딪쳤다.
사도미는 그 장엄한 울림이 무엇인가를 직감적으로 포착한듯 그의 너부죽한 얼굴이 벌거우리해졌고 한편 야스이의 마음을 읽은듯 근엄한 미소로 그의 시선에 응수했다.
그것은 장내를 진감하는 폭풍같은 만세의 환호성이였던것이다.
얼마후 그 환성은 차츰 잦아들더니 문득 한순간에 그 모든 음향이 씻은듯 사라지고 정숙이 깃들었다.
한동안이 흐른뒤 잠든듯 한 정숙을 흔들며 통역하는 방송원의 목소리와 함께 박력있는 육성이 유난히 뚜렷하게 울려나오기 시작하였다.
힘차고도 무게있는 우렁우렁한 음성이였다.
그것은 사도미가 이미 몇번 방송을 통하여 들어 귀에 익은 확신에 넘쳐있는 음성이였다.
《김일성주석님이시군요!》
사도미가 가벼이 탄성을 지르며 야스이를 돌아보았다.
야스이는 눈을 빛내며 나직이 응대했다.
《그렇소, 주석님께서 이제 〈닉슨충격〉을 어떻게 해부하시는가 들어보오.》
《예?!…》
사도미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제서야 스승이 야밤에 자기를 부른 까닭을 비로소 알았다.
뒤미처 알게 되였지만 김일성주석의 연설은 후날 력사적인 《8월 6일선언》으로 세상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세인에게 큰 격동을 안긴것으로서 한 외국수반을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에서 하신 연설이였었다.
그것을 야스이 가오루가 평양에서 보내는 일본어방송을 청취하다가 우연히 행운이 차례져 접하게 되여 록음하였던것이였다. 그는 얼마전부터 평양방송을 듣는것을 중요한 일과의 하나로 정하고있었다. 그중에서 주체사상강좌시간만은 놓치지 않고 꼭꼭 청취하였다.
근간에 미국대통령 닉슨의 중국방문계획이 발표되였다. 그러자 일본만이 아닌 온 세계에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그 사변은 《닉슨충격》이라고 불리우리만치 급기야 수다한 문제들을 파다히 야기시켰다.
지구상의 크고작은 신문, 방송, 통신들이 이 돌발적이고 이례적인 닉슨의 중국방문을 저마다 제나름의 판단과 분석을 가하여 대서특필로 요란하게 보도하고있었다. 그야말로 근래에 없던 특종보도감이였다. 한편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도 각양각색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큰 기대를 걸고 과대평가하면서 환상적으로 대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진의도를 가늠할바를 모르고 당황해하는 참으로 일대 혼란상을 빚어내고있는판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정치제도가 판이하게 상반된 두 국가, 그것도 장구한 시기 력사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두 나라사이의 돌연한 접촉이였으므로 각이한 견해와 추측이 나올수밖에 없는것이였다.
닉슨대통령의 돌발적인 중국방문, 김일성주석께서는 과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고계시는가?
야스이는 물론 사도미자신도 벌써부터 몹시 알고싶어했던 문제였었다.
두 교수는 록음기에 온 신경을 모아 열심히 경청하고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주석께서는 《닉슨충격》의 소란한 파도를 장검을 한번 휘둘러 제압하듯이 어렵고 복잡한 리치나 언사로서가 아니라 쉽고 단순한 론리로 명료하게 발가놓으시며 말씀하시였다.
《…세계인구의 거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에서의 위대한 혁명적변혁과정을 〈힘〉으로써 저지시켜보려고 스무해이상이나 무모하게 추구하여온 미제의 중국적대시정책이 마침내 완전히 파산되였다는것을 의미하며 미제가 세계의 강대한 반제혁명력량의 압력앞에 드디여 굴복하였다는것을 말하여 줍니다.
결국 닉슨은 지난날 조선전쟁에서 패배한 미제침략자들이 판문점에 흰기를 들고 나오듯이 베이징으로 흰기를 들고 찾아오게 된것입니다.
모든 사실은 우리 시대에 제국주의의 붕괴과정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습니다.
…
닉슨의 중국방문은 승리자의 행진이 아니라 패배자의 행각이며 미제국주의의 서산락일의 운명을 그대로 반영하는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인민의 큰 승리이며 세계 혁명적인민들의 승리입니다.》
흰기를 든 패배자의 행각, 김일성주석께서는 닉슨의 중국방문의 진속을 이렇듯 고도로 압축된 힘있는 언어로써 일격에 발가놓으심으로써 세상의 환성과 비명을 동시에 밀어버리시는게 아닌가!
복잡하게 뒤엉킨 그 어떤 사물현상도 순간에 그 밑바닥까지 환히 꿰뚫어보시는 김일성주석의 비범한 예지와 명철한 과학적통찰력앞에서 두 교수는 크낙한 감동에 못이겨 시로 약속이나 한듯 손을 뜨겁게 맞잡고 놓을줄 몰랐다.
김일성주석께서는 흰기를 든 닉슨의 행각만을 규정하신것이 아니였다. 한손에 감람나무가지를 들고 다른 한손에 총칼을 쥐고 휘두르는 제국주의자들의 《량면전술》에 대하여서도 신랄하고 엄격하게 경고하고계시지 않는가.
인간의 언어란 세상만사를 자유자재로 형상할수 있을뿐만아니라 포착하기 어려운 정서나 감정, 예감까지도 다 표현할수 있는 위력한 수단이라고 한다.
헌데 김일성주석의 말씀 한마디한마디는 순식간에 그렇듯 선명하고 참신한 감화력으로 심장속깊이 파고드는것이여서 두 교수로 하여금 위대한 언어의 세계를 발견한 한없는 희열로 가슴을 마냥 설레이게 하였다.
이미 록음기가 멎은지도 이윽하여 응접실은 조용하였다.
두 교수는 지금껏 받아안은 숭고한 감정을 영원히 간직하려는듯 쏘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채 서로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그들은 심원한 사색을 할줄 아는 재사였으며 지식층의 정화였으나 주체철학을 접하고 따르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는터여서 그 방면에서는 아직은 초학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진리나 정의보다 다만 목적만을 믿는 부류의 인간들과는 달리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위대한 사상에 일단 접하는 날에는 온 심혼을 그 세계에 바칠줄 아는 높은 교양과 도량의 소유자들이였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문득 머리를 든 야스이 가오루는 침묵을 깨치며 입을 열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사도미를 주시했다.
자기 판단이나 의사를 남에게 이야기할 때 곧잘 취하는 자세였다.
《…》
사도미는 그가 묻는 의도를 충분히 짐작했으나 선뜻 대꾸를 못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두눈을 슴벅거렸다.
야스이는 흥분이 앞서는듯 구태여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오늘날의 혼란한 세계를 그처럼 예리한 통찰력으로 분석하고 평가하시는분을 나는 난생 처음 대했소. 김일성주석님이시야말로 현시대를 대표하는 유일한 령도자이시고 위인이시라는 확신이 금번 하신 연설을 경청하고나니 한층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격정을 받아안았습니다.》
이렇게 선뜻 호응해나선 사도미의 뇌리에는 이때 불현듯 지난날의 스승의 모습이 선명하게 스치며 떠올랐다.
그날도 야스이는 지금과 같이 격앙된 감정에 사로잡혔었다.
지난해, 사도미가 영국으로 떠나기 며칠전이였다.
강의를 필하고 교수실로 돌아온 그는 뜻밖에도 자기를 기다리고있는 야스이와 마주하게 되였다. 도꾜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요꼬하마까지 일부러 찾아온 스승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사도미는 반가움에 앞서 놀라와했다.
《아니, 무슨 일로 이렇게 먼걸음을 하셨습니까? 저를 부르면 될걸말입니다.》
사도미는 저으기 송구함을 금치 못해하며 로교수를 대했다.
《보고싶어서 왔지요.》
야스이는 미소를 머금으며 시간을 좀 낼수 없는가고 하였다.
사도미는 대학가까이에 있는 다방으로 스승을 안내했다.
두 교수는 다방의 안침진곳에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야스이는 접대원이 가져다준 차를 한모금 마시고나서 사도미를 향해 느닷없이 물었다.
《김일성주석님을 아시오?》
그의 지나치게 동심같은 질문에 사도미는 금시 당황해졌다.
《그분이야 세상에 너무나 널리…》
《물론 당신이 그분을 모를수야 없겠지요. 실은 그런것이 아니고…》
야스이는 상대방의 어정쩡해하는 기분같은것에는 아랑곳없이 들고온 가방에서 천천히 한 책자를 꺼내여 사도미앞에 내놓았다.
《이 저작을 읽어보았습니까?》
사도미는 얼른 책을 받아들고 표제에 시선을 주었다. 《김일성전》이였다.
그 도서를 소개한 신문, 잡지의 광고만을 보았을뿐 미처 구해보지 못하고있었다.
사도미는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아직은…》
《꼭 보십시오. 이 저작에는 당신이나 내가 여태 갈망해온, 세상의 탁류를 짓부시며 도도히 흐르는 대하가 있고 찬란한 태양의 빛발이 있습니다.》
야스이 가오루는 그만의 특유한 청높은 창창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벅차오르는 뜨거움에 목안이 달아오른듯 문득 차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스승의 전에 없이 격정에 겨워하는 모습에 접하자 사도미는 저절로 그의 앙양된 기분에 말려드는 자신을 느꼈다.
그무렵 야스이 가오루는 정신적으로 커다란 고충을 겪고있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안타깝고 울적한 심사를 터친적도 있는데 사도미는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고있었다.
그때 로교수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를 이끌어줄 위대한 사상, 나의 안타까움을 풀어줄 참된 진리를 찾을수만 있다면 아무리 험난한 가시덤불길도 웃으며 뚫고 가파로운 벼랑도 톺아오르겠소.》
그랬던 스승이 《김일성전》에서 시대의 대하, 태양의 찬란한 빛발을 발견했다고 격하여 말하였다. 하다면 그속에 그가 그토록 암중모색하며 갈망하던 광명의 상상봉에로 뻗은 도표라도 밝혀져있단 말인가?
그날 사도미는 헤여지기 앞서 야스이로부터 《김일성전》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의 영향하에 주체사상을 받아안게 되였고 그 철학학설을 열렬히 따르며 배우는 학도로 되였다.
그후 야스이 가오루의 발기로 여러 학자, 교수들로 무어진 《김일성주석 저작연구회》가 도꾜대학의 한 강실에서 탄생하게 되였고 사도미는 그 학술조직의 일원으로 되였다. 그것은 명실공히 일본에서의 주체사상연구의 첫 조직체였다.
그런 스승이고보면 김일성주석의 연설을 새롭게 접한 이 밤의 감동이 오죽하겠는가.…
야스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에 사도미는 생각에서 깨여났다.
로교수는 전축앞으로 다가가더니 소리판을 골라 음반에 얹었다.
전주곡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이어 가수가 부르는 청아한 노래소리가 실내의 숭엄한 공기를 조심스레 튕겨주며 정서짙은 랑만의 색조를 그으면서 울려왔다.
슈벨트의 가곡 《겨울나그네》중의 《도표》였다.
평소에 야스이가 즐겨듣는 명곡들중의 하나였다. 곡도 좋거니와 더우기 자기 심정을 말해주는듯싶은 월헬름 뮬러 (도이췰란드의 랑만주의 시인)의 가사도 퍽 마음에 들었다.
전축앞에 숙연히 서있는 스승의 경건한 모습을 바라보며 사도미는 선률에 맞추어 혼자 속으로 불렀다.
길가의 도표가 내앞에 서있구나
나의 앞길 가로막아 못박힌듯 서있구나
오직 하나의 길만을 나는 걸어야만 하나니
그길을 되돌아온 사람 아무도 없어라
두 교수는 한동안 명상에 잠겨 음악세계에 젖어있다가 곡이 끝나자 또다시 쏘파에 마주하고 앉았다.
《선생님, 행복한 저녁을 마련하여주어 고맙습니다. 주석님의 말씀을 듣고나니 자주의 길만이 우리가 가야 할 오직 하나의 도표라는 결심이 더욱 굳건해지는군요.》
사도미는 자기를 언제나 따뜻이 이끌어주는 스승에 대한 고마움이 이밤따라 더더욱 새로와 이렇게 진정을 터놓고나서 불쑥 떠오른 한가지 생각을 더 말했다.
《주석님의 록음연설을 다음 연구회날에 모든 학자들에게 들려줍시다.》
《나도 그 생각을 했소. 그날까지 미룰것 없이 래일 당장이라도 조직합시다. 모두 얼마나 기뻐하겠소.》
야스이는 항상 뜻을 같이 해주는 사도미를 미더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꾸하다가 한결 활기찬 어조로 심중의 소리를 말하였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김일성주석님과 같으신 탁월한 사상리론가께서 계신다는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며 영광입니까!… 그 사람중심사상이 꽃펴나고있는 조선에 우리 한번 가서 보고 옵시다.》
야스이 가오루의 음성은 희열과 소망이 한데 어려 절절하게 울려나왔다.
참으로 야스이의 마음은 조선으로 못견디게 쏠리고있었다. 그렇듯 걸출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단 한번만이라도 뵙고싶었고 주체사상이 구현되고있는 조선의 현실을 직접 보고싶은 마음이 불붙듯 했다.
사도미 또한 야스이와 똑같은 심정이였다.
경모와 그리움에 넘쳐있는 스승의 승화된 감정은 그의 마음을 부쩍 동하게 하였다.
《공화국을 방문할 그런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날을 위해 우리 회원들모두가 노력하도록 합시다.》
사도미는 이렇게 적극 호응해나섰다.
이때로부터 야스이는 회원들과 함께 그날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먼저 총련중앙을 찾아가 연구회원들의 의향을 전했다.
야스이는 절차상 외무성에도 걸음을 놓았다.
외무성의 한 관리는 그의 요구를 매우 아리숭한 태도로 대하였다.
《교수님도 아시겠지만 북조선에로의 려행은 정부에서 신중히 검토한 토대하에서만 승인합니다.
헌데 학자님들이 무얼 하러 그 나라에 가십니까?》
《우리는 사회과학자가 아니요. 그래서 주체의 나라가 어떤 사회인가 가서 직접 보고 오자는것입니다.》
그것은 진담이였다.
저작을 통하여 리론적으로만 알게 된 철리, 그것이 실제적으로 생활에 어떻게 구현되여있는지 직접 체험하지 못한이상 그 새 리념은 그에게 있어서 아직은 확고부동한것으로 될수 없었다.
영생의 진리로 간직할 하나의 신념이 어찌 탁상세계에서 쉽사리 이루어질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모든 념원과 감정과 생활을 한껏 꽃피워주는 《주체》라는 그 위대한 거목이 과연 그 나라에 솟아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무성한 숲을 이루고 얼마나 지심깊이 뿌리를 박고있는지 야스이 가오루는 자기 눈으로 투시하고 가늠해보지 않는 한 완전무결한 진리로 받아안을수 없었다.
1972년 봄,
그날 도꾜국제비행장에는 조선방문의 길에 오르는 일본학자일행을 바래우기 위해 숱한 사람들이 나와있었다. 그 일행은 평양에서 열리는 전국사회과학자대회에 초청을 받고 떠나는 사람들로서 거의가 현직대학교수들이였다.
당년 예순다섯살의 법학박사 야스이 가오루교수가 단장의 위임을 지니고 학자대표단을 이끌고있었다.
배웅나온 사람속에는 젊은 제자들도 있었으나 태반이 학계와 사회계의 이름난 인사들이였다.
출발시간까지는 얼마간의 여유가 있어 그 한때나마 모두가 항공역사안의 소요와 번잡을 피해 따스한 봄볕이 흐르는 로대에서 보냈다.
바깥이라고 노상 조용한것은 아니였다. 하루 수십의 려객기가 날아가고 날아드는 공항이여서 폭음소리, 확성기소리가 그칠사이 없이 울려퍼졌다. 허지만 공기만은 대기오염이 심한 시가지에 비해 한결 맑았다.
원래 작별의 마당이란 숙연해지기 일쑤이나 지금 그들을 둘러싸고있는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였다.
그중에도 야스이 가오루의 모습은 류달랐다.
그는 화창한 봄날의 정기에 몸도 마음도 함뿍 젖어있는듯 전에 볼수 없던 밝은 얼굴로 배웅나온 사람들과 담소하고있었다. 외출할 때면 의례히 즐겨 쓰고다니던 검정베레모(채양없이 동글납작하게 만든 모자)가 이번 려행길에는 그의 머리우에 얹혀있지 않았다.
허울이 큰 대머리에 백발이 성성한 로교수의 모습을 사람들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그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난것을 두고 저마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였다.
과연 그 변화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제나름의 추측과 판단으로 상상하고있었으나 이 시각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것은 로교수의 안해 다즈꼬였다.
도수높은 안경앞에 부딪치는 해빛탓인지 훤칠한 이마아래로 선이 날카롭고 약간 쳐들린 코마루와 두터운 입술이며가 유난히 두드러져보이는 야스이 가오루의 얼굴에는 평온한 기색이 력력히 어려있었다.
남편의 이런 모습을 다즈꼬는 아까부터 조용히 지켜보고있었다.
젊은 시절 미인으로 알려졌던 다즈꼬는 오십나이도 퍽 지났으나 살갗이 희고 반드러운 얼굴과 눈매가 단아했는데 그 해맑고 쌍까풀진 큰 눈이 오늘따라 한층 빛나고 아름다와보였다.
야스이 가오루가 이 공항을 거쳐 해외로 래왕한수가 이제는 퍼그나 된다.
다즈꼬는 그런 남편을 매번 이렇게 나와서 바래였으며 또한 어김없이 맞아들이군 했었다. 그처럼 빈번히 헤여지고 만나는 나날속에서 세월이 흘러 검고 함함했던 부인의 머리는 어느덧 빛이 바래지기 시작했으나 그는 남편이 오늘과 같이 밝은 모습으로 려로에 나서는것을 본적이란 일찌기 한번도 없었다.
남다른 감회에 젖어 눈을 슴벅이던 다즈꼬는 누군가가 갑자기 말을 건네오는 서슬에 생각에서 깨여나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아주머니, 야스이군이 오늘은 무척 젊어보이는군요.》
언제 나타났는지 우람찬 체통에 진회색코트를 입은 하시모또 스스무가 옆에서 빙그레 웃음짓고있었다.
《그래-요?》
다즈꼬는 처녀처럼 낯을 살짝 붉히며 중얼거렸으나 남편을 그토록 여겨보는 하시모또의 말이 싫지 않았다.
《여하튼 기쁜 일입니다.》
하시모또는 부인에게 뜻있는 한마디를 남겨놓고 야스이 가오루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바쁜 몸에 일부러 나오다니…》하고 야스이는 뇌이며 하시모또를 반겨맞았다.
《허, 무슨 소릴 그렇게…소망이 이루어져 장도에 오르는 자네를 어찌 내가 무심할수 있나 말이요, 하하…》
하시모또는 호탕하게 웃으며 친구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진정 그는 야스이 가오루의 금번 려행을 축복해마지 않았다. 오늘과 같은 날이 오기를 얼마나 바라며 기다리던 친구였던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하시모또여서 당사자 못지 않게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워낙 성미가 다감하여 평소에 롱담도 곧잘하는 하시모또였다. 허나 정작 정치적색채를 띤 대화마당에서는 그 성미가 일변하여 한마디의 말에도 신중성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큰 산업신문의 론설주간이라는 직업상의 타성에서 오는것인지 어쨌든 좀 괴벽한데도 없지 않아 있었다.
걸걸한 목청으로 한담하던 하시모또는 갑자기 억양을 낮추며 말머리를 돌렸다.
《가거들랑 부디 많은것을 보고 알고와서 나에게도 그 나라의 형편을 들려주길 바라네.》
《아무렴, 그래야지.》
야스이는 선선히 응대했다. 방금 하시모또가 부탁한 일들은 곧 그자신이 이번 걸음에 크게 의의를 부여하고있는터였다. 그만치 남달리 큰 기대와 감정을 품고 떠나는 길이였다.
그 나라를 보다 깊고 새로운 눈으로 보고 알고싶었다. 새 세계를 발견한 탐구자가 그러하듯 일단 거기에 온넋이 젖어들게 되면서부터 조선에 쏠리는 마음이 불길처럼 자라오르기 시작하였다. 어서 한시빨리 가보고싶은 나라였었다.
그랬던것이 그 숙망이 오늘에야 드디여 이루어지게 되였던것이다.
그렇듯 동경해마지 않던 고장이 바야흐로 눈앞에 펼쳐질것을 생각하니 야스이는 동심같은 흥분에서 한시도 벗어나질 못했다.
《평양은 지금 꽃이 한창 만발하겠지?》
《…》
즐거운 명상에 잠겨 혼자소리처럼 외우는 야스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하시모또는 비행장너머 멀리 시가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벗꽃도 시들어가는, 온갖 소음과 매연에 휘말려있는 도시의 상공이 음산하고 쓸쓸하게 안겨왔다.
평양을 일러 《공원속의 도시》라고 소개했던 조선을 다녀온 한 기자의 글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시모또는 그 기사가 그닥 믿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유명하다고 자랑하는 도시들을 죄다 돌아보고 그 실상을 알고있는 그로서는 이 지구상에 그런 도시가 존재한다는것이 의심스러웠다. 하물며 오랜 기간 일제의 락후한 식민지로 있다가 해방을 맞은지 불과 몇해 안되여 큰 전쟁까지 겪어 온통 파괴되고 페허로 되였다는 평양이 아니였던가. 물론 그후 많이 건설하였다고는 하지만 설마 그 고장이 《공원속의 도시》로 일약 변모되였다는것은 아무래도 좀 지나친 표현일것이다.
원래 탐방기자란 독자들의 렵기적인 기분같은것을 사기 위해 그런 과장도 더러 한다.
하시모또에게는 오랜 직업적타성에서 생겨난것인지 《육안으로 보는 사상》이라고 할수 있는 그런것이 깊이 뿌리내리고있었다. 무엇이건 자기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했다.
그는 그 기사의 진실여부를 직접 확인하리라 속으로 은근히 별러왔으나 아직은 그길에 흔연히 나설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있어 야스이에게 그런 부탁도 하게 되였던것이다.
이토록 우유부단한 자신을 생각할 때 하시모또는 매사에 과감하고 결단성있는 야스이에 대하여 부러움과 함께 늘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확성기에서 베이징행려객기의 출발시간이 다가옴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고있을 때였다.
화려한 두대의 뻐스가 로대앞에 미끄러지듯 달려와 멎더니 문이 열리면서 람홍색공화국기발을 손에 든 사람들이 줄지어내렸다. 다채로운 조선옷차림을 한 녀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기발을 흔들며 역사를 향해 활기있게 걸어간다.
야스이 가오루는 그들이 총련계 사람들이라는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들속에 어디선가 본듯싶은 사람도 더러 있는것 같았다.
《야스이박사님!》
누군가 찾는 소리에 야스이는 고개를 들어 살폈다. 무사시노의 조선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허민우가 급히 다가오고있었다.
야스이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허선생이 어인 일이요?》
《조국에 가는 길입니다.》
허민우의 목소리는 자못 자랑스럽게 울렸다.
《평양으로?…》
《녜, 조국에서 열리는 사회과학자대회에 참가하려고요.》
《아, 그렇소! 나도 바로 그 대회에 가는 길이요.》
야스이는 무등 기뻤다. 뜻밖에도 허민우와 동행하게 된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허민우자신도 그와 못지 않게 환성을 지르며 몹시 반가와하였다. 평소에 존경해마지 않던 교수와 더불어 같은 용무로 한 목적지를 향해 려행하게 된것이 그를 매우 즐겁게 하였던것이다.
허민우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즈꼬부인을 발견하고 얼른 그에게로 돌아서서 인사했다.
《사모님도 나오셨군요.》
《허선생님이 함께 가신다니 마음이 놓여요.》
다즈꼬는 얼굴 가득 미소를 피우며 말하다가 간절한 어조로 당부했다.
《우리 주인은 조선이 초행길인데 아무쪼록 부탁해요.》
《사모님, 조금도 걱정마십시오. 제가 선생님을 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마와요.》
다즈꼬는 언제보나 친근하게 느껴지는 허민우를 맑고 큰눈을 빛내며 정다웁게 바라보았다.
허민우가 여러차례 조선에 다녀왔다는것을 다즈꼬는 이미 남편을 통해 알고있었다. 그러므로 생소한곳으로 가는 남편에게 허민우의 도움이 이모저모로 크리라는 기대가 저절로 우러났던것이다.
허민우는 금번 열리는 과학자대회에 야스이교수가 참석하게 된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옛 스승과 함께 동행하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한터이라 그도 역시 이들부부 못지 않게 기뻤다.
오랜 교육자이며 사회활동가로서 신망높은 야스이 가오루교수를 수많은 학생들이 따르고 존경했는데 허민우도 그런 학생중의 한사람이였었다.
일찌기 실천을 동반하지 않는 리론을 《상아탑의 잠꼬대》로 지탄해 나선 야스이교수는 교단에 서는 한편 민중을 위한 사회사업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하고있었다. 그것이 교수가 사람들로부터 신망과 존경을 사게 되는 까닭으로 되는지 모른다.
허민우는 총련이 결성된 이듬해에 호세이대학을 졸업했는데 지나간 학창시절 학우들과 함께 가끔 야스이교수의 저택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 과정에 자연히 스승의 가족들과도 사귀게 되였었다. 그후에도 변함없는 접촉이 지속되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어떤 힘이 그들 사제간의 관계를 더욱 접근시키는지 갈수록 서로 따뜻한 정으로 맺어져가고있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주위의 동료교수들에게 허민우를 소개했다. 모두가 동행하게 되는 허민우를 친절히 대해주었다.
어느덧 출발시간이 박두하였다.
조선은 바다를 건느면 지척의 거리이건만 아직은 일본과는 국교가 맺어있지 않아서 부득이 다른 나라를 거쳐 가지 않으면 안될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환송나온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야스이일행이 먼저 세관출입통과구를 나오기 시작했다.
《부디 뜻있는 걸음이 되길 빌어요.》
다즈꼬부인이 간절한 어조로 남편을 향해 말했다.
《성공을 바라네!》
《교수님, 건강히 다녀오십시오!》
하시모또며 제자들이 손저어 흔들며 야스이를 따뜻이 바래였다.
야스이교수는 그들에게 미소를 보내며 활주로를 향해 걸어갔다.
학자일행이 비행기의 승강대를 밟으며 올라가는데 돌연 노래소리가 울려왔다.
야스이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나온 출입구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발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일본어가 아닌 조선말이였다.
아까 두대의 뻐스에 분승하여온 총련계 사람들의 환송소리였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드넓은 비행장을 울리며 메아리치고있었다.
그 정경을 바라보는 야스이 가오루의 가슴이 부지중 설레이기 시작하였다.
크나큰 긍지와 자랑의 웨침인듯 발돋움하며 환호하는 그 열광적인 사람들의 모습에서 로교수는 줄곧 시선을 뗄수 없었다. 마치나도 벌써 평양에 당도한듯 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야스이 가오루는 뜨거운것이 온몸에 휘감겨드는것을 느끼며 그 노래소리에 떠받들리우듯 승강대를 밟고 기체안으로 들어갔다.
리륙한 려객기는 분사식발동기의 은은한 소리를 울리며 창공높이 떠오르더니 차츰 항로를 정하고 기세좋게 날으기 시작하였다. 무시로 해빛이 반사되여 두터운 기창에 찬란한 무늬를 지어놓군 한다.
가벼이 진동하는 비행기의 동체밑은 하늘과 같은 망망한 바다가 동화속의 세계인양 간단없이 펼쳐졌다.
고르롭고 경쾌한 동음이 얼마간 지속되자 어느덧 려객들은 리륙시의 긴장에서 벗어나 점차 화기가 되살아오른듯싶었다. 사람들은 비끄러맸던 안전혁띠를 풀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몸을 편히 내맡기였다.
객실에는 아늑한 공기가 감돌았다.
푸른 제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안내양들이 상냥한 미소를 보내며 려객들에게 신문과 잡지들을 나누어준다. 그들은 한결같이 몸매가 날씬하고 젊고 아릿다왔다.
야스이 가오루는 아까부터 줄곧 기창밖을 묵묵히 바라보고있었다.
공항에서의 밝은 기색과는 달리 깊은 사색에 잠겨있는듯 그의 표정은 근엄해보였다.
지난날 이 하늘을 날으며 찾아갔던 각양각색의 이국풍경들을 머리속에 그려보는것인지…
뉴델리, 헬싱키, 윈, 모스크바, 빠리… 실로 그가 이제까지 밟아본 나라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 고장들에 단 한번도 관광이나 유람객으로 간적이란 없었다. 인류의 평화와 권익을 위한 뜻있는 연단에 설 목적으로 갔었다.
국제회의의 그 나날들의 일이 감회깊이 되살아나는지 지금 야스이는 주위사람들의 움직임같은것엔 전혀 관심밖인듯싶었다.
실상 지금 야스이 가오루는 이제 시야에 비껴들 지상의 한 메부리를 더듬느라 열심히 기창밖을 지켜보고있는중이였다.
《일본알프스》라 일컫는 산줄기들이 눈아래로 맥맥히 흐르며 스쳐지났다.
야스이는 목을 솟구고 시선을 모아 줄곧 조국의 산야를 바라보았다. 푸른 띠처럼 안겨오는 후지강의 흐름을 거슬러 다까이시산맥의 지형이 엇바뀌여 나타나더니 이어 거대한 하나의 산악이 보였다. 정수리에 하얀 백설을 이고 거연히 자태를 드러내고있는 메, 그것은 일본의 상징 후지산이였다.
3천 7백여m의 높이를 가지고 하늘중천에 우뚝 솟아있는 후지산, 오늘따라 그 기상이 한층 위엄있는 장관이였다.
평소에 야스이 가오루는 조국의 자연을 사랑했다. 그중에도 후지를 그중 소중히 여기고 품어온다. 하기에 그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외국려행에 오르거나 그길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그 산을 선참 시창너머로 찾게 되였다. 그러나 이 시각 그것을 바라보는 로학자의 정회는 이전과는 달랐다. 바야흐로 이 강산에 인간찬미의 노래가 울려퍼질 그날의 기대와 욕망으로 하여 그는 유별한 애정을 가지고 그 산을 관망하고있는것이였다. 그의 옆좌석에는 사도미 아즈시가 앉아있다.
사도미는 연한 담배연기를 뿜어올리며 안내양이 주고간 신문들을 뒤적거리고있다.
허민우의 일행, 재일조선사회과학자대표단은 그들의 앞뒤로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손님, 어서 커피를 받으세요.》
안내양의 공손한 목소리에 야스이 가오루는 비로소 기창에서 얼굴을 돌렸다.
그는 손에 쟁반을 받쳐들고 서있는 안내양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낸 다음 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커피잔을 받아들었다.
사도미교수도 읽던 신문을 놓고 차잔에 손을 뻗쳤다.
오십을 갓 넘긴 사도미는 위엄있는 몸가짐과 철색의 얼굴로 하여 체육인다운 인상을 주지만 영채어린 눈은 그가 심오한 사색을 하는 지식인임을 숨기지 못했다.
차를 두어모금 마시고난 사도미는 실한 몸을 등받이에 젖히며 머리를 들더니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야스이 가오루를 향해 《선생님!》하고 조심스레 입을 떼였다. 비행기에 오른 후 줄창 침묵만을 지키고있는 야스이와 나란히 앉아있으려니 그는 어지간히 답답해난 모양이였다.
사도미는 조용한 분위기에 저어하듯 나직한 소리로 뇌였다.
《오늘 이처럼 선생님과 같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려행길에 오르고보니 지난날이 새삼스럽게 돌이켜지는군요.》
《지난날이?…》
야스이 가오루는 테굵은 안경을 손으로 추슬러올리며 느닷없는 소리를 하는 사도미를 물끄러미 돌아다보았다. 다음 순간 사도미가 어느 과거를 두고 하는 소리인지 종잡을수 없음을 깨닫자 그는 공연히 당황해졌다.
사도미 아즈시는 야스이가 삼십년나마 상대해오는 제자였다. 허나 두사람이 살아온 지난 년대가 다난했던것처럼 그들의 생활경위는 복잡하고 순탄치 않아서 어느 편에서도 함부로 과거사를 입밖에 내는것을 삼가해왔었다.
이시각 야스이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보니…》하고 운운한 사도미의 방금 외운 말에서 그가 《태평양전쟁시기》의 그 악몽같은 세월을 더듬어보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부지중 머리를 불쑥 들었던것이다.
과거를 망각한 사람이란 력사를 상실한 인간이라고 하지만 야스이는 인생의 중대한 전환을 모색하며 떠난 이 행로에서 구태여 그 파란많던 시절을 회상하고싶지 않았다.
그런데 사도미는 말문만 떼여놓고 한동안이 지나도록 잠잠했다.
이미 멀리로 흘러간 그 옛일을 상기하지 말기를 은근히 바랐던 야스이는 그의 침묵이 다행이라고 여겨지면서도 마음이 개운치 않아 돌아보았는데 사도미는 입을 꾹 다물고 묵념하듯 두눈을 감고있었다.
이때 허민우가 소리없이 야스이의 곁에 나타났다. 허민우는 잠든듯 한 사도미를 일별하고나서 저으기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박사님, 혹 이 책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무슨 책인데요?》
야스이는 허민우가 내미는 책자를 받아 표제를 살펴보았다. 일문판 《조선편람》이였다.
야스이는 전에 그것을 서점에서 구입해다 본 일이 있었다. 조선으로 려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여 주로 편찬되여있었다. 그러나 야스이는 그 책을 가지고 일부러 찾아와 권고하는 상대방의 호의도 고마왔지만 한편 그 나라로 가는 길에 대하게 된 도서여서 다시한번 보고싶은 생각이 들어 쾌히 받아들었다.
《고맙소. 잘 보겠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다소 도움이 되실가 해서…》
《도움이 되고말고요.》
야스이는 거듭 사의를 표했다.
허민우가 사라진뒤에도 사도미는 잠잠했다.
사도미의 조용한 모습을 한번 돌아보고나서 야스이는 《조선편람》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하였다.
전에도 느낀바지만 책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첫장부터 호감을 가지고 대하게 한다.
현대북부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상은 물론 력사와 지리, 민속과 고적, 명승지들에 이르기까지 공화국의 모습을 여러 방면으로 폭넓게 소개하고있는데 서술 또한 통속적이여서 누구나가 쉬이 터득할수 있는 훌륭한 도서였다.
헌데 이상했다. 무슨 책이건 손에 일단 쥐기만 하면 일체 잡념이 가시여지고 독서에 열중하는것이 평상시의 야스이였으나 웬일인지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미 한번 읽어서가 아니였다. 자꾸만 사색이 헛갈리면서 책속에 정신을 묻을수가 없었다. 방금전에 사도미가 의미심장하게 뇌였던 그 말마디들이 집요히 뇌리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아서일가?…
이제는 그것이 퍼그나 먼 옛일로 되여버린 그 년대를 야스이는 근래에 와서 별로 회상한 일이 없었다. 무시로 변하는 시대의 격류속을 헤염쳐온 그에게는 과거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조차 차례지지 않았었다. 오늘과 래일을 위해 사는것만으로도 항상 시간이 모자랐다.
그러나 아픈 추억은 지워버릴수 없는 깊은 상처처럼 쉽사리 사라지지도 꺼져버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아니, 그것은 망각속에 묻어버릴수 없는 아픔이며 상처였다.
비행기의 은은한 동음이 한층 그 옛 환영들을 불러일으키는듯 야스이 가오루는 밀려드는 추억의 흐름속에서 도저히 헤여나올수 없었다.…
쌍발분사식 젯트려객기는 베이징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항로를 따라 곧추 비행하고있었으나 하늘우의 좌석에 앉아 둥둥 떠가는 사람들의 사색과 회상은 제나름의 세계를 자유로이 날아가고있었다.
야스이 가오루가 자기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먼 과거속에 묻혀있을 때 사도미 아즈시는 그와는 전혀 상반된 현실의 약동하는 생활속에 잠겨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것은 불가분리적인 력사의 련쇄과정이기는 하나 사도미는 될수록 오늘의 위치에서 자신을 찾고 즐길줄 아는 현실주의자였다.
하기에 그는 지금 자기로 하여 겪은 나날과 그 년대의 쓰라린 회억속에서 헤여나지 못하고있는 스승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할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야스이의 상상은 공연한것이였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보니…》운운하며 사도미가 화제를 꺼낸것은 그렇듯 멀리로 사라져간 세월을 두고 한 소리가 아니라 바로 두해전에 있었던 일에 불과하였다.
야스이가 그것을 깨닫게 된것은 려객기가 목적지에 도착할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선생님, 이제 앞으로 한시간이면 닿겠군요.》
사도미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야스이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와 고개를 들어 피로가 실린듯 한 무거운 시선을 기창밖으로 돌렸다.
해빛찬연한 대기권에 빙원같은 구름발들이 한가로이 떠돌고있었다. 여태 악몽속을 헤매여온 야스이에게는 기체밑으로 흐르는 천태만상의 변화가 신비스럽게만 느껴졌다.
《〈닉슨충격〉으로 정계를 떠들썩하게 하던 그때의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사도미의 느닷없는 물음에 야스이는 고개를 돌렸다.
유난히 향기롭게 안겨오는, 연한 담배연기를 내뿜는 사도미의 얼굴에는 느슨한 미소가 사물거리는데 그는 의연히 명상에 젖은 어조로 말했다.
《저는 조선과 잇닿은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그 시각부터 줄창 그날의 일들이 새삼스러운 감회속에 돌이켜지는군요.》
《?…》
야스이는 손으로 안경을 추슬러올리며 실눈을 지었다.
(아니, 그럼 이 사람이 그 일을 두고 한 소리였단말인가?…)
야스이는 스스로도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과거 사도미의 불우했던 운명이 비행기와 이어져있었기에 그가 분명 《대동아전쟁》시기를 회고하며 그런 말을 꺼낸줄로만 속단했는데 그건 전혀 딴판의 왕청같은 억측이였다.
지나친 선입감을 앞세운 자신이 저으기 민망스럽게 생각되였다.
그러나 야스이의 그런 면구스러운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어느덧 유쾌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사도미가 방금 말했듯이 야스이에게도 당시의 일들이 평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귀중한것으로 언제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있었다.
줄곧 그 나날의 감회속에 잠겨있는듯 사도미의 음성은 명랑하게 울렸다.
《그때 선생님이 야밤중에 전화로 저를 찾던것이 어제일같은데… 생각나십니까?》
《물론이지. 그 일을 어찌 잊겠소!》
야스이는 흥분이 되살아오르는 자신을 느꼈다.
사도미가 발설한 그 《닉슨충격》은 비단 두 학자에게만 커다란 충격을 안긴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당시 일본뿐만아니라 세계적인 판도에서 일찌기 없던 큰 파문을 일으킨 일대 정치적사변이였었다.
게다가 그 《사변》이 두 학자의 금번 려행과 밀접히 련관되여있는만큼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한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더우기 야스이 가오루의 경우 그것은 한층 강렬한것이였다.…
그들의 하많은 추억과 기대를 실은 비행기는 어느덧 베이징상공에 들어서고있었다.
도꾜제대시절부터 관념철학의 일인자로 명성을 떨쳐온 구로다 겐은 일찍부터 정계에 나설것을 꿈꾸어왔다. 정치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면 흔히 지닐수 있는 포부인지 모른다. 그러나 천황의 《무조건항복》연설을 소리없는 통곡속에서 청취한 후로 그의 성급한 야심이 다소 늦추어지게 되였다. 권력만능을 과시하던 어마어마한 전쟁내각의 거물급정객들이 하루아침에 전범자의 신세로 전락되여 심판대에 서는것을 보고 기가 움츠러들었던것이다. 허지만 일단 품었던 꿈을 버릴수는 없어 때를 기다리며 시세를 관망하면서 구로다는 아직까지 한낱 대학교수로 학문에만 전념하고있었다.
《자본론》원서도 사전을 몇번 들추지 않고서도 통독하리만치 외국어에 능통하고있는 구로다는 특히 영어에 들면 웬만한 방언도 모르는것이 없는터여서 미점령군이 상륙하자 한때 맥아더사령부의 통역원으로 전후의 첫 활동무대를 정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출중한 존재인지라 미군사령부의 고위급인물로부터 적지않게 존대를 받을수 있는 행운이 차례져 그 유력한 인맥을 통하여 쉽사리 정치가도에 발을 뻗칠수 있었으나 구로다는 웬일인지 애초의 포부와는 달리 그길에 들어서는것을 그리 서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오늘에 와서는 한 정당의 당당한 정치가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도 남았을것이다.
구로다 겐의 이러한 행적은 얼핏 보면 야스이 가오루가 걸은 길과 평행선을 이루고있는듯 했으나 실은 두사람의 길은 엄연히 갈래가 달랐다.
전후에 야스이가 민중속으로 들어갈 때 구로다는 미점령군속으로 들어갔다.
반전, 반핵, 평화의 광장에서 야스이가 민중과 어깨겯고 싸울 때 구로다는 《살창없는 감옥》에 들어박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이토록 두사람은 상반된 길을 가면서도 동창간이라는 학벌관계때문인지 아니면 피차 수재파에 속하는 재사로서의 체면이나 리성때문인지 아직까지는 호상 알륵도 별로 없이 그럭저럭 무난히 교제를 지탱하고있었다. 하긴 서로 반목질시할 아무런 리유도 없는것이였다. 저마다 자기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데 왜 그럴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그것이 외면상으로 드러나보이지 않을뿐 두사람의 관계는 미묘한 속에 놓여있었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구로다 겐은 무슨 감정의 소산으로 해서인지 내내 야스이 가오루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그를 자기 정치생활령역에서 한시도 떼여놓지 못하고 집요하게 추적하여왔었다.
구로다는 벌써 오래전부터 야스이와 손을 잡고 정계를 일대 풍미하여 말년에나마 한번 크게 이름을 떨치고싶은 욕망으로 늘 가슴을 불태워왔다.
그자신이 다년간 공들여 쌓아올린 정치적지반에다 야스이의 대중을 흡수하는 조직적수완이 동반만 되면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는 타산에서였던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뜻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갈수록 둘사이에는 소외현상만이 한층 커져갈따름이였다.
구로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버그러져가는 간격을 좁혀 야스이를 끌어당길 심산에서 제3자의 도움을 받으려고 어느 하루 하시모또 스스무에게 미리 전화로 알려 신문사를 찾아갔다.
셋은 서로가 동창간이지만 하시모또는 그런중에도 야스이와는 각별한 사이라는것을 구로다는 잘 알고있었다.
큰 산업신문의 론설주간인 하시모또는 언제봐야 바쁜 몸이였다.
《자넨 늘 봐야 원고지와 싸움이로군. 그렇게 골을 혹사하다가 제명도 부지못할것 같네. 그럴바엔 이제부터라도 나와 함께 어느 정당의 정치고문으로 들어가서 여생을 편히 지내는게 어떤가?》
친구가 권하는 안락의자에 걸터앉으며 구로다는 관골이 두드러진 넙적한 얼굴에 롱기어린 기색으로 한바탕 늘어놓았다.
《정치고문이고 뭐건간에 소위 정치를 한다는 알량한 량반제씨들 덕으로 머리가 아프오. 자꾸만 불집을 일궈놓고 성화를 먹인다니까. 쯔쯔…》
하시모또는 로년기에 들어선 사람답지 않게 탁 트인 목청으로 두덜거리면서 구로다와 마주하고 장대한 몸을 의자에 붙였다.
《성화를 먹인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구로다는 눈살을 실룩거리며 상대를 주시했다.
속이 어지간히 답답한듯 하시모또는 담배를 붙여물고 한모금 길게 내뿜고나서 의연히 항변하듯 하였다.
《벌통 쑤시듯 민심을 마구 건드려놓고 세상을 온통 들썩하게 만들어논게 도대체 어떤 량반들인가? 그바람에 온 신문사가 련일 소란통일세.》
《난 또 무슨 소린가 했더니… 그런즉 정치가들이 당신네 져너리스터선생들의 돈벌이를 부쩍 시켜준셈이로군 그래, 하하…》
구로다는 이렇게 반죽좋게 되받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1970년대에 들어 일기 시작한 일본의 전국지역에서의 수백만 근로자들의 《공동투쟁》이 일년이 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있어 나라안이 일대 혼란상태에 처해있었다.
철도, 운수, 항만, 체신, 공장, 대학가 할것없이 어디나 부글부글 끓었다.
사또내각은 《제4차방위력정비5개년계획》을 세워 거기에 무려 5조 3천억엔의 군비예산을 들이밀기로 결정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일미간에 《오끼나와반환협정》비준서를 교환하고 소위 《의식》이라는것까지 거행하였다.
이와 같은 반동시책에 우익정당을 제외한 혁신계 당파와 로조단체들이 공동보조를 취하여 광범한 대중투쟁으로 대응해나선것이였다.
일미 《안전보장조약》의 페기, 일본에 있는 미군사기지의 철페, 오끼나와의 완전한 반환 등의 구호를 들고 일본력사상 최대규모의 전국통일투쟁행동이 치렬하게 련일 지속적으로 전개되고있는것이 현시국의 상황이였다.
실상 금번 투쟁은 오끼나와반환문제가 발화점으로 되였다.
력대로 이 섬은 심각한 사회적물의를 일으켜왔다.
오끼나와의 전신인 류꾸왕국은 15세기초에 건국된 독립왕국이였다. 그런데 일본 《천황》정권은 무력을 전혀 가지고있지 못한 이 작은 나라를 1879년에 전쟁을 하지 않고 압력을 가하는 방법으로 집어삼키고 오끼나와현이라고 이름지었다.
일본 《천황》은 패전후 전쟁책임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커지자 일본의 령토와 주권의 일부를 미국에게 넘겨주어 그 《보호》를 받으려고 1947년 9월 맥아더총사령부를 통하여 미국무성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서한을 전하였다.
《천황은 미국이 오끼나와를 비롯한 류꾸제도에 대한 군사점령을 장기간 계속할것을 바란다. 그 점령은 이 섬들에 대한 주권이 일본에 속하지만 미국에 장기간- 25년 내지 50년 또는 그이상에 걸쳐 대여하는 형식으로 실현될것이다.》
그것은 오끼나와를 미국에 팔아먹는 매국적인 서한이였다.
그후 1951년 9월에 체결된 쌘프랜씨스코강화조약에는 류꾸제도를 사실상 무기한으로 미국의 통치하에 둔다는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오끼나와는 일본에 있는 미군사기지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섬으로 완전히 전락되고말았다.
이를 반대하여 벌어지기 시작한 대중투쟁이 전국적인 범위로 확산되였던것이다.
지국들에서 이러한 실황을 통보해오는 전화가 련달아 걸려왔다. 그럴 때마다 하시모또론설주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여 두사람간의 대화는 자주 동강나기 일쑤였다.
정녕 벌통을 쑤셔놓은셈이였다.
《력사란 그런 격류속에서 전진하기마련이 아닌가. 바다에 만간조가 있듯이 이제 소요도 잦아질 날이 있겠지.》
구로다는 대수롭지 않다는투의 어조로 하시모또의 불만을 일축해버리며 의연히 범상한 태도로 나왔다.
타자수가 두사람앞에 차잔을 갖다놓았다. 그러나 구로다는 차잔을 거들떠보지 않고 자리에서 움쭉 일어나더니 방금 걸려온 전화를 받고나서 돌아서는 하시모또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보, 이 복새판에서야 어디 한마디 이야기도 변변히 나누겠소? 어서 밖에 나가세. 점심때도 다되였는데…》
하시모또는 그가 이끄는대로 군말없이 응해나섰다.
구로다는 대기시켜놓았던 자동차에 하시모또와 함께 올라타면서 운전사에게 신쥬꾸의 한 료정으로 갈것을 지시했다.
신쥬꾸의 번화가를 벗어난 익측에 자리잡고있는 그 고급료정은 구로다가 평소에 단골로 출입하는곳인 모양이였다.
이미 련락이 있었는지 두사람이 차에서 내려서자 기다리고있었던듯 료정의 마담이며 여러명의 녀급들이 현관머리에 주런이 나와앉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들을 특별히 환대해 맞아들였다.
두 사람이 한방에 안내되여 자리를 정하고 앉자 음식이 인차 들어왔다. 산해진미로 없는것이 없었다.
접대부들이 그들에게 양주를 권했다.
술이 몇순배 돌아간 다음 구로다는 접대부들을 방에서 내보냈다.
하시모또는 가끔 뜻아니게 구로다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아온터이라 별다른 생각도 없이 덤덤하게 음식을 들었다.
《평양에 간 야스이에게서 무슨 소식이라도 있었나?》
구로다는 어지간히 거나해지자 한담 끝에 우연인듯 먼저 그것을 물었다. 신문사와 혹 무슨 련계가 있는가 해서였다.
《아니, 아직은 아무것도…》
하시모또는 심드렁히 응대하며 벌거우리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번 문질렀다.
《난 그 사람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하고 구로다는 혼자소리처럼 외우고나서 뒤를 달았다.
《로년에 무슨 망녕이 들어 하필 공산국가를 찾아다니며 분주탕을 피우는지?…》
《별걱정을 다하네. 망녕이랄게 있나. 다 뜻이 있어 걸음을 놓았겠지.》
구로다의 푸념에 하시모또는 대뜸 이렇게 반발하듯하였다.
《그러다 야스이가 수박물이 들가봐 념려되여 하는 소릴세. 가뜩이나 근간에 우익테로가 횡행하는판에 말이야.》
《수박이라고 다 속이 빨갛던가?… 그나간에 자넨 아직도 야스이를 잘 모르는것 같구만. 그래도 그와 함께 다년간 교편까지 잡아본 사람이…
내가 보건대 야스이는 어떤 주의주장에나 호락호락 말려들 그런 속물이 절대 아니야. 나도 전에 한때는 자네처럼 공연히 마음 쓴 일이 있었네만 그게 다 부질없는 노릇이였네.》
구로다가 어떤 의도로 야스이 가오루에 대하여 그처럼 관심을 품고있는지 하시모또는 알수 없었으나 방금 말한것처럼 그자신도 구로다와 같은 위구심을 품은 때가 없지 않아 있었다.
1958년 야스이 가오루는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공헌한것으로 하여 국제레닌평화상을 받았다. 그러자 사회여론이 분분하였다. 이제까지 순수 인도주의를 표방해온 야스이가 지도하는 원수협의 국민운동이 다분히 좌익 적색편으로 편중하여 따르게 되지 않을가 하는 우려에서였다.
하시모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론이나 관측은 얼마 안가서 일소되였다.
원수협은 그후에도 자기 조직의 주장을 조금도 변경하지 않고 여전히 《어떤 나라의 핵무기도 반대한다》는 구호를 들고나왔던것이다.
《하긴 그래. 야스이는 전에부터 언제나 색이 불투명한 사람이였지. 이쪽도 저쪽도 아닌…
허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다를것 같아. 주체사상학술조직을 뭇고 거기에 바싹 기울어지는 경향을 봐도말이야. 인생말년에나마 그 불투명에서 탈피하여 자기의 뚜렷한 정체를 나타내려고 하는게 아닐가?…》
구로다는 매우 신중한 어조로 이렇게 장황히 늘어놓다가 드디여 은근히 자기 속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야스이가 귀국하면 나도 얘기하겠지만 자네도 한번 잘 설득시켜주면 좋겠네. 이제 와서 그런 일에 나서지 말고 나와 함께 손을 잡고 신흥일본을 위한 사업에 여생을 바치도록 권고해주길 바라네. 한생을 길을 찾아 헤매다가 말겠나? 이젠 그만 하면 목표를 정할때도 됐지. 안그렇소?》
구로다는 일부러 지은듯 한 진지한 표정으로 하시모또를 바라보았다.
《글쎄…》 하고 하시모또는 시답잖은듯 중얼거리며 느릿느릿한 억양으로 말을 번졌다.
《그렇지만 그런걸 가지고 하등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것 같네. 야스이가 어떤 사람인가 한거야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그는 일단 자기가 택한 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가고야마는 옹고집쟁이네.
어쨌든 야스이가 돌아온 후 그의 마음을 떠보세나.》
하시모또 스스무는 더이상 론하고싶지 않아 여기서 말을 끊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그런 이야기를 했댔자 그것이 다 공담에 지나지 않을뿐이였다.
구로다 겐도 그걸 깨달았는지 더는 하시모또를 붙잡지 못하고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