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안개서린 도표
제 2 장
《원수협》이 처한 난국의 타개책이 마련될수 있을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야스이 가오루는 오스트리아와 인디아 등 세계 여러 나라의 국제회의들에 참석하였으나 거기서도 별로 신통한 방도를 얻지 못한채 귀국했었다.
그 조직의 통일발전을 바라는 민중들을 생각할 때 야스이는 안타까움을 금할길 없었다. 지어 조선청년인 최학성마저 자기 조국에 돌아감에 앞서 편지에 무어라 적어보내왔던가.…
어느덧 그는 침식도 잊다싶이하며 서재속에 파묻히는 몸이 되였다. 이미 습득한 선행고전리론과 사상을 반영한 책자들과 문헌들을 서가에서 들추어내여 다시 읽는데 달라붙었던것이다.
갈수록 책상과 방바닥에는 수많은 서적들이 쌓이고 널렸다.
야스이 가오루가 추구해온 인간해방의 길, 그것은 민중의 힘이 자유로이 발양되고 인간의 존엄과 권리가 백방으로 보장될수 있는 평화롭고 광명한 사회를 이 땅우에 마련하리라는것이였다.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첫 사업으로서 《반전, 반핵, 평화》 투쟁을 벌려왔었다. 우선 전쟁이 없는 《밝은 사회》를 이룩하고 그 터전우에 점차 진보와 번영을 안아오리라는 결심을 품고 대중운동과 사회활동을 전개해왔던것이다.
헌데 오늘날에 와서 보니 그 무엇도 실현하지 못한채 좌절만을 가져왔다.
그러나 야스이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속에서 헤여나려고 숱한 고전들을 탐독하며 부단히 사색을 심화시켜나갔다.
그는 혹시 스쳐버린 문제들이 있지 않는가 하는 위구심이 일어 이미 여러차례나 읽고 터득해온, 책갈피마다에 붉은 밑줄이 수없이 그어져있는 맑스, 엥겔스의 《자본론》, 《고타강령비판》, 레닌의 《국가와 혁명》 그리고 모택동의 《모순론》, 《실천론》 등을 이 책장, 저 서가에서 들추어내여 읽고 또 읽어보았다.
그런 나날이 흘러갔다.
이러한 모색과정에 그는 스스로 자신을 두고 많은것을 신중히 생각하게 되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였다. 그러나 맑스 - 레닌주의학설의 신봉자였다. 일찌기 학생시절부터 《진리앞에 허심하고 순종하라》는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오랜기간 연구터득해온 맑스 - 레닌주의를 현시대의 움직일수 없는 진리로 간주해왔었다. 그리하여 그 진리를 자로 하여 학문상이나 사회활동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분석판단하고 행동하였다. 이를테면 유물변증법에 기초하여 사물과 현상을 투시하면서 학술연구도 하였고 원수폭금지를 위한 대중운동도 조직해왔던것이다.
항용 대중의 힘이란 맹목적이거나 자연발생적으로 장성하고 폭발하는것이 아니였다. 그 힘의 원동력은 민중의 지향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분석에 의해서만 생겨나고 자라는것이였다.
이와 같이 변증법적립장에 서서 사고하고 행동하였기에 그는 일본에서의 국민운동을 전진시킬수 있었고 원수폭반대서명운동에서 일정한 성과를 이룩할수 있었다. 헌데 오늘에 와서 이런 사태에 부딪치게 되였다.
순수 《반전, 반핵, 평화》 투쟁만으로는 그길을 개척할수 없단말인가?…
야스이 가오루의 번민과 의혹은 날이 갈수록 더하여갔다. 숱한 책자들을 들추며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였으나 직면한 난관을 타개할 방책은 그 어떤 선행리론이나 고전에도 밝혀져있지 않았다.
그런 어느날이였다. 사도미 아즈시가 불쑥 그의 서재에 나타났다.
방안의 여기저기에 책자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는것을 일별하고난 사도미는 스승의 전에없이 수척하고 암울해진 모습을 무거이 바라보며 조용히 안락의자에 앉았다. 언제 와봐도 정결하고 밝은 공기가 충만되여있던 서재였다. 헌데 지금 그 모든 절제가 흐트러져있다. 책상과 방바닥에 마구 덧쌓이고 펼쳐진채로 있는 책자들만으로도 사도미는 이 서재의 주인이 이제껏 어떤 사색의 세계에서 허덕이고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수 있었다.
사도미 역시 원수협앞에 봉착한 난관을 두고 심뇌하다가 종시 아무런 출로도 찾아내지 못한채 스승을 방문한터였다.
《선생님, 무슨 방책이라도 섰습니까?》
사도미는 무엇에 저어하듯 조심스레 입을 떼였다.
야스이는 그의 출현이 반가우면서도 의연히 어두운 표정을 지울수 없어 침묵으로 대하였다. 사도미의 물음은 그의 심사를 한층 옥죄이게만 했다.
스승의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아차린듯 사도미는 안타까운 어조로 뇌였다.
《저도 맑스와 레닌의 저서며 민중운동에 대한 고전들을 수많이 뒤져보았습니다만 별로 시사해주는 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전후에 도꾜대학을 졸업한 사도미는 현재 요꼬하마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었으나 야스이와 함께 줄창 반전, 반핵, 평화투쟁광장에 서왔었다. 그는 재학기간 학생조직의 지도성원으로서 군국주의부활을 반대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제국의 침략전쟁으로 사회의 물질적부가 군벌과 재벌들에 의해 닥치는대로 략탈, 탕진될 때 민중들은 어떤 처지에 있었는가.
그들은 자유와 생존권을 무참히 짓밟히고 기아와 빈궁 속에서 헤매였으며 한편 수많은 청장년들이 침략정책의 희생물로 되였다.
그 암흑시대를 뼈저리게 체험한 사도미는 군국주의재생을 좌절시키고 이 땅에 또다시 피어린 재난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야스이의 뒤를 따라 그와 손잡고 줄기찬 투쟁의 길을 걸어왔던것이다.
실상 사도미의 정신생활에서는 그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그가 은사 야스이의 사회운동에 공감하며 그 길에 합세하게 된것은 그자신이 일찍부터 지녀왔던 반전사상과 전쟁에서 겪은 피어린 체험이 크게 작용하였던것이다.
사도미는 군대복무시 동료들에게 반전사상을 주입시키지 못하고 자기만이 량심을 지켜 저항해온데 대하여 커다란 자책을 느끼게 되였다. 자신의 한몸만을 더럽히지 않고 보존하려는 이러한 자세는 전시하의 일본지식인들이 흔히 취해온것으로서 그것은 개인위주의 생존방식이였다. 그것으로 하여 그들은 군국주의침략정책에 반기를 들고 용감히 나서지 못함으로써 무모한 희생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하기에 《벗꽃처럼 피고 지라》는 제국의 선동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던가.
사도미는 바로 그것을 통절히 깨달았기에 야스이의 영향하에서 맑스주의신봉자가 되였으며 민중운동의 한 지도성원으로 성장할수 있었던것이다.…
스승의 침묵에 사도미도 말려든듯 잠자코 있었다.
서재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공기만이 흘렀다.
잠시후였다. 야스이는 문득 몸을 뒤채며 나직이 말했다.
《나도 그렇소. 아직은 어디서도 그 타개책을 얻지 못하고있소.》
그의 음성은 저으기 침울히 울렸다.
사도미는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야스이를 주시하며 이제껏 심중에 오락가락하던 의혹을 마침내 터쳤다.
《저의 뒤넘스러운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가 신봉해온 사상들에 어딘가 미흡한 점이 있는것 같습니다.》
《뭐라고?…》
야스이는 혼자소리처럼 외우며 사도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도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가 아는것처럼 독점자본사회에서 인간의 모든 련대관계가 화페로 설립되여있지 않습니까. 화페가 사람의 가치와 행동을 규제하고 인간관계의 사상도덕적기초를 이루고있는 사회, 이런 환경속에서 민중운동을 어떻게 전개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맑스도 레닌도 그 진로를 안겨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로자간의 모순에 찬 지반에서는 민중의 항거가 필연적이라는것, 그 반발의식을 결속하여 투쟁하여야 한다는것을 론하였을따름입니다. 더우기는 그 리론들이란 자본주의발생 첫시기에 나온, 먼 년대의 사회상속에서 제시한것이 아닙니까. 헌데 제국주의렬강간의 경제적결탁으로 급격히 장성비대해진 현대자본주의하에서 그 선행리론이 과연 우리들의 사상적지향을 얼마만큼 선도할수 있겠는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도미는 자기 말이 매우 추상적임을 스스로 느끼면서도 구태여 그 론거를 더이상 전개하지 않고 스승의 의향을 묻는것으로 그쳤다.
야스이는 선뜻 그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가벼이 저으며 수긍하는 뜻을 보였다. 지금 그의 마음은 복잡하였다. 사도미의 질문에 자기의 뚜렷한 견해를 표명할수 없는것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그것은 사도미가 지니고있는 의혹이 이미부터 야스이자신도 품고있는것으로서 그것이 이제는 지울수 없는 하나의 도달점에 이르렀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종의 처절한 감정이였던것이다.
사실상 맑스나 엥겔스, 레닌이 살던 시대는 먼 과거로 되였다. 현 세기는 그들이 살던 시대에 비해 엄청난 변천을 가져왔다. 력사는 얼마나 멀리로 전진하여왔는가. 이토록 크게 변화된 현실을 기존지식이나 경험에만 매달려 분석판단하고 리론실천적문제들을 찾으려 한다는것은 협애하고 왜소한 태도인지 모른다. 방금 사도미도 옳게 지적했듯이 금권지배와 약육강식이 만연되여있는 세상에서는 화페에 의하여 사상도덕적기초가 형성되여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는 인간의 운명개척문제에 대하여 그들은 아무러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있지 않는가.
야스이는 비로소 자기가 이제까지 신봉해온 로동계급의 철학사상에 제한성이 있다는것을 확고히 깨닫게 되였다. 그 철학적원리들은 그것이 형성되던 시대의 제한성으로 하여 50년후, 100년후의 문제들을 예견할수도 없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해답을 줄수 없다는것이 지금에 와서는 명백하고 응당한 일로 여겨졌다.
이런 생각이 들자 야스이는 수십년 마음의 기둥으로 간직해온 과학적신념이 허물어지는듯 한 절망과 허탈감에 한층 사로잡히게 되였다.
움푹 패여들어간 두눈을 지그시 감은채 묵묵히 번뇌의 속박에서 헤여나지 못하고 모지름치는 스승의 정상을 사도미는 보기가 괴로왔다. 그는 더이상 지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움씰 자리에서 일어난 사도미는 간절한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선생님, 너무 기를 잃지 마십시오. 그러다 건강이라도 해치면… 저도 거듭 탐구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자기로 돌아온 야스이는 소리없는 걸음으로 서재를 나서는 사도미를 바래였다.
홀로 남게 되자 그의 심사는 갈수록 짙은 음영으로 덮이기만 하였다.
하다면 이제 현시대가 인류앞에 제기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한단말인가?
변천하는 시대의 사상을 반영하여 국제법학을 인간해방에 이바지하는 참다운 학문으로 완성해보자던것이 한갖 부질없는 꿈이였단 말인가?
야스이 가오루는 생각하면 할수록 사색이 혼돈되여 한층 자기자신을 걷잡을길 없었다.
그는 하루에도 몇번 심한 좌절감에 못이겨 몸부림치면서 책상에 머리를 박고 신음하였다.
(이 땅에 광명을 비쳐줄 해발을 어디서 찾아야 할것인가.
인간해방의 철리, 그것을 명철하게 밝혀주는 위인이 과연 세상에 없단말인가.…)
야스이 가오루는 생각하면 할수록 눈앞이 캄캄하고 안타까움만 더하였다.
더는 책자와 상대 안했으며 사색할 기력마저 잃고말았다.
야스이는 난생처음 인생의 허무함을 애달피 느끼며 주먹으로 가슴을 쥐여박다가는 쏘파에 쓰러진채 오래도록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군 하였다.
그런 암담한 나날이 덧없이 흘러가던 어느날이였다. 야스이는 불쑥 머리를 쳐드는 한 생각에 애써 자신을 수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제를 타도하고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이룩한 나라에 대한 기대가 불꽃처럼 삭막한 뇌리를 스쳤던것이였다. 거기에 가면 어떤 출로가 생길지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서재라는 좁은 울타리안, 《살창없는 감옥》속에 갇혀 심뇌의 속박에서 헤여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자신이 더없이 가련하게 여겨졌다.
그는 급기야 서재에서 튀여나와 안해를 찾았다.
《여보, 려행차비를 해주오! 내 외국에 좀 다녀오겠소.》
《아니, 갑자기 외국이라뇨?! 어디에 갔다오실려고요?》
다즈꼬부인은 어리둥절하며 성급히 물었다.
《…》
야스이 가오루는 웬일인지 대답을 피했다.
다즈꼬는 더 물어볼수 없었다. 번뇌를 다소나마 가시기 위해 려행이라도 하려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목적에서라면 구태여 다른 나라에까지 갈 필요가 있으랴. 국내의 명승지나 온천 같은데 가도 될 일인데…
그러나 그걸 따져물을 경황도 없이 남편의 분부대로 부랴부랴 려행준비를 갖추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풀길없는 심중의 의혹을 덜어보려고 바다건너 대륙을 넘어 먼 려행길에 올랐다.
도꾜를 떠난 그는 레닌의 조국, 쏘련으로 직행한후 크레믈리궁전을 찾아가 그 나라의 유력한 정치가와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헌데 그는 모스크바를 떠나 얄타의 별장에서 휴양중이라고 했다.
야스이는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헌데 초조한 속에서 며칠을 보내는데 그로부터 휴양지에서 만나자는 련락이 왔다. 야스이는 그가 특별히 마련해준 비행기로 쎄와스또뽈공항에 도착하여 거기서부터 얄타휴양지까지 흑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자동차로 갔다.
그는 일본의 저명한 사회활동가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격식을 차릴줄 모르는 소탈하고 평범한 품격의 사람이였다.
야스이는 그와는 두번째의 상면이였다. 처음 대한것은 그가 레닌국제평화상의 수여식에 참석했던 공식적인 자리에서였다. 그때는 서로 안면이나 익혔을 정도였고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휴양지라는 자유로운 환경속에서의 만남이였다.
그의 가식없고 친절한 환대에 야스이는 자기가 이곳에 찾아온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는 매우 언변이 좋았다. 그런데 그와의 담화과정에 야스이는 저으기 실망을 느끼게 되였다.
쏘련의 유력한 그 정치가도 물질중심의 선행고전리론에 매달리고 있을뿐 그 한계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야스이는 더이상 그와 마주하고앉아 이야기를 나누고싶지 않았다. 환멸만을 느꼈다. 그리하여 며칠 더 머물러있으면서 함께 휴양하자고 권고하는 그의 호의도 마다하고 떠나왔다.
그곳을 떠나오는 야스이는 쓰디쓴 약을 먹은듯 내내 속이 몹시 편치 않았다.
공연한 걸음을 놓았다는 후회만이 그를 괴롭혔다.
야스이는 고국으로 돌아오기 앞서 전에 이미 면식을 익힌 쏘련과학원의 한 원사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유물철학자로 세계적으로 명성높은 그 학자와 이야기를 나누고싶었던것이다. 그 학자야말로 자기가 모색하는 문제의 해답을 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는 자기 방에서 쾌히 야스이를 만나주었다. 그는 평소에 몹시 즐기는 담배를 연방 갈아피우며 한 법학자를 상대로 현시대의 변화발전을 어떤 시점에서 분석평가하는가 등의 문제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다분히 딱딱하고 론리적인 화제였으나 그는 흥미진진한 고담을 펼쳐가듯 해학과 유모아를 적당히 배합하며 능란한 품새로 담담하게 엮어나갔다. 이럴 때면 그에게서 학자다운 위엄이나 열정은 볼수 없고 한낱 평범한 풍채좋고 선량한 로인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구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야스이는 그의 말에서도 별로 소득이 될만 한것을 찾지 못했다. 그도 얄타에서 만났던 정치가와 같이 선행리론에 매달려 답습하고있었다.
그는 지울수 없는 공허한 심사에 사로잡힌채 보름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한 남편을 맞이한 다즈꼬는 놀랐다.
무거운 걸음으로 비행기에 오르던 전날의 모습보다 더 한층 어깨가 처져서 나타난 남편이였다.
외국에 나갔다가 무슨 몹쓸 열병에나 걸려온듯 남편은 방바닥에 엎드러져 모지름을 쳤다. 그러다가 문득 머리를 쳐들어 넋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다볼뿐 통 말도 안했다.
평소에 그렇게도 열정적이고 다정다감하던 남편이 갑자기 벙어리나 된듯 몇날 며칠을 가도 입을 여는 법도 모르고 허둥거리며 침묵만을 지켰다.
다즈꼬는 모진 심뇌를 겪는 남편을 무엇으로 덜어줄수도 위로할수도 없는 안타까움에 못이겨 하루에도 몇번 혼자 몰래 낯을 싸쥐고 어깨를 들먹이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더더욱 심한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야 기대할곳이 없어진 그는 캄캄한 어둠이 짙은 황막한 들판에서 갈길을 잃고 갈팡질팡 헤매는 나그네처럼 절망상태에서 헤여나지 못하였다.
(아- 이 광활한 세상에 내가 애타게 갈망하며 찾는 그 길을 열어줄 위인이 단 한사람도 없단 말인가?)
그는 번뇌에 몸부림치다 책상에 머리를 박고 오열했다. 그러다 불현듯 가슴에 마쳐오는것이 있어 얼굴을 들어 책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아릴수 없이 많고많은 책자속에서 루카복음서를 들추어내였다. 실로 오래동안 떨어져있던 기독교의 세계였다.
야스이는 그 복음서를 벌컥벌컥 펼쳐나가다가 한 글줄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애수 애달픔에 몸부림치면서 기도를 드리고드렸으나 지상에 흘러 떨어지는 눈물은 피방울이였어라.…》
이것을 외우며 그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였다. 그것이 마치 지금의 숯덩이같은 자기 마음을 말해주는듯 했던것이였다.
참으로 그 시절은 세월의 흐름도 계절의 변화도 몰랐다.
어느덧 가을도 지나 겨울이 왔다.
그해의 첫눈이 소리없이 내리던 아침이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불면증에 시달린 몽롱한 의식으로 안해가 차잔과 함께 그의 앞에 놓고간 조간신문을 무심히 들여다보다가 한 기사에 시선이 쏠렸다.
얼마전 북조선을 방문했던 한 탐방기자의 글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최학성이 귀국한 후부터 조선에 대하여 유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야스이였다. 그래서 그 기사에 유독 마음이 끌렸다.
야스이는 무거이 내려덮인 눈시울을 손으로 몇번 비비고나서 읽기 시작하였다.
그 기자는 자기 글에서 먼저 《빠리는 도시안에 공원이 있다. 그러나 평양은 공원안에 있는 도시였다》고 한 프랑스기자의 말을 인용하고나서 조선의 한 식물학자와 대담한것을 전하고있었다.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이 한창이던 어느날 김일성주석께서는 최고사령부로 식물학자들을 부르시였다. 그이께서는 초연내 풍기는 작전대앞에서 식물학자들에게 승리한 조국땅우에 아름답고 살기 좋고 산림자원이 풍부한 인민의 락원을 세워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한 연구방도를 하나하나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한편 신문의 대담기사는 이런 이야기도 전하고있었다.
…평양이 전쟁의 상처를 가시고 복구된지 얼마 안된 어느날 주석께서는 한 식물학자를 자기 저택에 부르시여 정원뜰에 데리고 가시였다.
넓은 뜰에는 여러 품종의 논벼를 비롯하여 과일나무, 약초 등이 재배되여있었다. 식물학자는 마치 농사시험장을 보는듯 하여 어리둥절하고있는데 주석께서는 한 수목을 가리키시며 이 나무를 삽목하여 늘여서 장차 나라안의 거리들과 산들에 옮겨심도록 가르치시였다.
그 수목은 수삼나무였다. 그것은 일본에서는 화석으로 발견되여 《화석의 나무》라고 일컬었는데 성장이 빠르고 굳고도 가벼운 락엽수였다.
그 수삼나무를 주석께서는 정원에 심어 몸소 가꾸어오셨다고 한다.…
기사는 이외에도 몇가지 이야기를 전하고있었으나 야스이 가오루의 눈에는 글줄이 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 가슴속에서 쿵 울리며 이름할수 없는 격정이 솟구치는것을 느꼈다. 경탄과 감동이라는 말로써는 그 감정을 도저히 표현할수 없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제를 괴수로 한 16개국 무력침공자들을 상대로 하는 엄혹한 전쟁상황속에서도 조국땅우에 아름답고 살기좋은 인민의 락원을 꾸리실 원대한 구상을 펼치시는 령도자!
나라일에 그처럼 바쁘신데도 몸소 정원에 나무를 심으시고 가꾸시여 손수 받으신 씨앗을 온 나라에 보내주시며 도시와 마을을 록음 우거지고 백화만발한 락원으로 꾸리도록 이끌어주시는 그러한 령도자가 세상에 있다는것을 야스이는 듣지도 알지도 못하였다. 동서고금의 력사가 아직까지 그런 사실을 전하고있지 못했다.
그 고결한 인간애와 민족애!
그것은 인민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 만백성의 지향과 소망을 가장 귀중히 여기는 위대한 인간, 위대한 정치가만이 품을수 있는것이다.
오로지 민중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시는 이러한 수령이시야말로 인류가 그토록 바라고 우러르는 참다운 인민의 수령이 아니겠는가.
야스이는 별안간 눈앞이 확 트이는것을 느꼈다. 이제까지 삭막하고 혼탁됐던 사고령역안에 무언가 이름할수 없는 크고 찬연한것이 급기야 자리를 틀면서 걷잡을수 없이 심장이 높뛰기 시작했다.
야스이는 크나큰 격정에 못이겨 서재안을 부지런히 걸었다. 전에 언젠가 다가끼 다께오가 들려준 이야기의 진정을 오늘에야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된듯싶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야스이의 뇌리에는 김일성주석이시야말로 이때까지 자신이 그처럼 안타까이 암중모색하며 찾아헤매던 인간해방의 길을 밝혀줄수 있는분이 아닐가 하는 기대가 뜨거이 갈마들었다.
크나큰 흥분을 안고 서재안을 거닐던 야스이는 우뚝 발길을 멈추더니 홱 몸을 돌렸다. 갑자기 무슨 큰일이나 생긴것처럼 조급히 방에서 뛰쳐나가며 큰소리로 안해를 찾았다.
다즈꼬는 간다서점가의 한 책방에 들려 남편이 부탁한 책을 사들고 자동차에 몸을 싣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야스이 가오루는 안해가 서재에 들어서는것도 모르는듯 두눈을 지그시 감은채 쏘파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다즈꼬는 잠들어있는듯 한 그를 깨우기가 저어해져 측은한 눈길로 남편을 내려다보며 한동안 묵묵히 서있었다.
남편은 근간에 머리가 더 하얗게 세여버린듯싶었다. 가뜩이나 희멀쑥한 얼굴은 한결 창백하고 수척해졌는데 고뇌의 흔적인듯 훤칠한 이마에는 전에 없던 주름발이 뻗치였다. 게다가 오래동안 손을 대지 않아 수염마저 더부룩하여 마치나 딴사람인양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지난날 언제나 생활에 절제있고 단정했던 남편이였었다.
헌데 지금 세상사를 다 체념해버린듯 생기를 잃고 몽롱한 상태에 있는 그의 가엾은 정상은 다즈꼬로 하여금 저절로 목이 콱 메이게 하였다.
녀인은 격해지는 자신을 억제하며 가만히 남편을 불러봤다.
《여보, 책을 구해왔어요.》
야스이 가오루는 번쩍 눈을 떴다. 허리를 약간 앞으로 솟구며 안해가 내미는 책을 빼앗다싶이 받아드는 그의 두눈에는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얼마전에 유잔가꾸출판사가 발행한 《김일성전》이였다.
다즈꼬는 얼른 책상우에서 안경을 가져다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책표제를 한동안 응시하고나서 첫장을 펼쳤다.
김일성주석의 영상이 모셔져있었다.
이미 출판물을 통해 그분의 영상을 여러차례 대해온 그였지만 새로운 흠모의 정을 안고 경건히 우러렀다.
김일성주석의 비범한 혁명활동에 대하여 야스이 가오루는 오래전부터 여러 방면으로 전해듣고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분히 신문, 방송 등과 같은것을 통해 단편적으로 접한것이여서 상식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더우기 그이의 로작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읽거나 연구하지 못하고있는 형편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이미 일본에도 수많이 출판되여 광범히 애독되고있는 그이의 로작들을 읽고싶은 생각이 최근년간 더욱 자주 들었으나 이래저래 이제까지 그런 기회가 차례지지 않았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두손에 책을 받쳐든채 쏘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즈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보, 면도를 좀 하시지요.》
《면도…》
야스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천천히 책상앞으로 다가갔다. 안해의 시름에 잠긴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린듯 그는 의자에 앉으며 뒤돌아보았다.
《걱정마오.… 수염같은거야 아무때건 밀어내면 되지.》
그의 얼굴에 일부러 지은듯 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책에 온통 정신이 팔린듯 한 남편에게 방해될것 같아 다즈꼬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남편의 곁을 떠나갔다.
그날부터 밤마다 서재의 불빛은 꺼질줄을 몰랐다.
복술개 유리를 데리고 아침산보를 하는것을 하루도 번지지 않던 그 습관조차 잊은듯 야스이는 책상머리에서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다즈꼬는 서재밖 창가에 서서 파수병인양 독서에 열중하고있는 남편을 오래오래 지켜보군 하였다.
그런 나날이 한주일쯤 지난 섣달그믐을 며칠 앞둔 어느날이였다.
《내 좀 밖에 나갔다 오겠소.》
야스이 가오루는 서재마루로 나서며 안해에게 알렸다. 그간 외출하는 법을 몰랐던 남편이였다. 희한한 일이였다.
다즈꼬는 그의 외투와 베레모를 들고 현관으로 급히 나오며 물었다.
《갑자기 어딜 가실려고요?》
《서점들에 가보려고.》
《차를 부를가요?》
《아니, 일없소. 찬공기를 마시며 걸어가다가 타고가지.》
안해가 몸에 얹어주는 외투를 입으며 야스이 가오루는 맑은 목소리로 응대한다.
다즈꼬는 오랜만에 울린 그의 명랑한 음성을 듣고 새삼스럽게 남편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놀랐다. 언제 손을 댔는지 수염발이 깨끗이 자취를 감춘 남편의 얼굴은 멀쑥하고 눈에는 전에없이 어글어글한 광채가 비껴있지 않는가!
급기야 혈기가 되살아오른듯 한 남편의 밝은 모습을 보게 된 다즈꼬의 두눈에는 부지중 뜨거운것이 핑 돌았다.
야스이 가오루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바지가랭이에 묻어돌아가는 유리를 두팔로 담쑥 안아 품어준다.
그새 주인에게서 버림을 받고있던 짐승도 오랜만의 애무에 몹시 즐거운듯 꼬리를 대고 휘저으며 그의 가슴에 자꾸만 파고들었다.
《허, 유리가 바싹 안겨드는걸, 허허…》
야스이는 복슬개를 한손으로 어루쓰다듬어주며 유쾌히 소리내여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그동안 다즈꼬의 가슴속에 서리서리 엉켜있던 무거운 응어리를 한순간에 탁 사그라뜨리면서 그의 온몸이 격정에 휩싸이게 하였다.
남편에게서 얼마만에 피여난 웃음인가! 그것이 어떻게 갑자기 마련되였을가?…
다즈꼬는 희열에 사로잡힌채 얼없이 외출하는 남편을 바래였다.
바깥은 눈이 하얗게 덮였다. 청신한 기운이 온 누리에 차고넘쳐있는 대기속을 활기있게 걸어가는 남편의 뒤모습을 다즈꼬는 물기 어린 시선으로 오래도록 서서 바라보았다.
유리가 주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듯 야스이의 두리를 껑충껑충 감돌며 그냥 따라가고있다.
몸통이 복슬복슬한 부드러운 하얀털로 뒤덮여 귀엽고 탐스럽게 생긴 그 짐승을 온 가족이 아꼈는데 그중에도 가장인 야스이 가오루에게서 한층 사랑을 받는다. 야스이는 산책을 하거나 가까이의 외출시면 의례히 유리를 데리고 다녔다.
남편은 저녁때가 되여서야 돌아왔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그의 손에는 묵직한 보꾸레미가 들려있었다.
다즈꼬는 얼른 그의 손짐을 받아 서재로 가지고 들어갔다. 보꾸레미를 탁상우에 놓으며 물었다.
《뭐나요?》
《풀어보구려.》
야스이는 베레모를 벗으며 일렀다.
다즈꼬는 그것을 헤쳐보았다. 김일성주석의 여러 저서들이였다. 서점들에 간다더니 거기서 구입해 온 모양이였다. 그 저서들속에는 다즈꼬가 며칠전에 간다서점에서 가져왔던 《김일성전》도 몇권 있었다.
다즈꼬는 의아히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런 안해의 마음을 읽은듯 야스이는 나직이 뇌였다.
《이제 며칠이면 설날이 아니요. 그래서…》
《아-알겠어요.》
다즈꼬는 그제서야 짐작이 갔다. 그 저서를 새로이 여러권이나 사들고 온 남편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헤아려보았던것이다.
다즈꼬도 어서 보고싶은 책이였다. 남편이 다 본 후에 읽으리라 생각해왔었다. 그속에 얼마나 비할바없이 값지고 찬연한 진리가 아로새겨져있는가를 다즈꼬자신도 이제는 똑똑히 느낄수 있었다.
바로 그 새로운 진리에서 야스이 가오루는 잃었던 활기와 웃음을 다시 되찾은것이 아닌가.
그 생각이 머리를 들자 다즈꼬는 미지의 그 위대한 세계에 한시바삐 접하고싶은 욕망이 불같이 일었다. 그것이 그에게 차례진것은 먼 앞날이 아니였다.
설날이였다.
야스이 가오루의 저택응접실은 아침부터 명절기분에 싸여 흥성거리였다.
신생의 약동과 희망을 축복해주듯 새해 첫날의 찬란한 해빛이 유리창으로 비쳐들어 응접실은 유난히 밝고 아늑했다.
다즈꼬부인은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아까부터 부지런히 돌아가고있었다.
그 어느해보다 남편이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고있는 설날을 그는 뜻깊게 장식하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든것을 장만하였다.
이미 갖가지 음식을 갖춘 탁상두리에는 각양각색의 설빔차림을 한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의 꽃을 한창 피우고있었다.
손님들은 야스이 가오루의 제자들로서 그들은 스승에게 설인사를 하러 모여든것이였다.
화제는 숱한 가지를 치던 끝에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깊은 곬으로 흘러들어가고있었다.
《선생님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의 생존방식이란것은 시대가 발전하는데 따라 부단히 변화된다 그 말씀이지요? 이를테면 음악에서처럼 행복하게 살고싶다는것이 인간의 본성적요구라는 그런 추상적인 하나의 주제로 규정할것이 아니라 현존사회의 산 인간, 산 생활을 중심에 놓고 모든것을 분석판단하는것이 중요하다는건데…》
갸름한 얼굴에 유독 눈이 작아보이는 오십나이의 어느 한 대학의 심리학교수가 하는 소리였다.
방금전 사회적존재로서 사람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대하여 야스이 가오루가 약간 피력한것을 두고 하는 그 교수의 반응이였던것이다.
그의 말을 받아 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는 반나마 벗어진 대머리의 사람이 자기 의사를 통속적으로 나타냈다.
《물론 행복이란 주제도 현대사회에서는 이러저러한 환경과 조건에 따라 변하고 정해져야만 하리라 봅니다. 사실상 현시대란 복잡하고 모순투성이여서 사람에 따라 행복의 뜻이나 생존방식이 여러 갈래로 해석되겠지요. 사람이란 우선 배불리 먹고봐야 한다, 그럼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남의것을 훔쳐먹는가, 육신을 놀려 그 대가로 먹는가, 협잡을 해서 먹는가 등등… 그 수단과 방법이 각이하단 말입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먹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면 그건 짐승과 뭘 다를게 있습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야스이선생님이 말씀하신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는 사람이다〉라는 인간중시사상이 온 사회를 지배할 때만이 이룩될수 있다는거겠지요?…》
그들은 자기 스승이 한 말의 뜻을 어렵지 않게 포착하고 제나름의 판단과 의사를 스스럼없이 토로하고있었으나 야스이 가오루가 은근히 시사한 본질을 미처 똑똑히 파악하지 못하고있는것 같았다.
아직은 주체철학에 접하지 못하고있는 그들로써는 응당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량심적이고 진보적인 지성의 소유자들이여서 모두가 건전하게 사고할줄은 알고있었다.
야스이 가오루도 자신이 새롭게 접하고 매혹된 사상에 대하여 욕심같아서는 제자들앞에서 보다 폭넓고 깊이있게 전개하고싶었으나 지금은 그도 초학도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한편 그것을 아직은 확고부동한 철의 신념으로 받아안지 못하고있어 상대가 충분히 납득하고 감수하리만치 사리정연하고 자신있게 론증할수 없었다.
그는 김일성주석의 로작들에 심취되여 탐독연구하면서 주체사상의 위대성과 진리성에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자적인 랭철한 지성과 판단력은 그 학설의 보편타당성을 인정하고 그 위력에 매혹되면서도 제자들을 반신반의의 감정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못했다. 과거 자신을 현혹케 한 사상들이 이제까지 얼마나 심장을 틀어잡고 놓아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랭정히 돌이켜볼 때 그 어느 한 사상도 미래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생활을 개척하고 고무해주는 인민대중의 강력한 무기로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자신이 직접 가서 돌아본 《선진국가》라 일컫는 나라들과 그 나라의 지도자들과 만나는 과정에 체험한 사실만으로도 심각하게 받아안은 교훈이였다.
하기에 야스이교수는 새로 접한 사상에 지금 온 정신력이 기울어지는 자신을 뜨거이 느끼면서도 이전처럼 제자들앞에 열렬한 언변으로 그 진리성을 설득력있게 피력하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하면서도 이들모두가 그 새 사조에 따르기를 바라는 심사만은 내내 간절했다. 그것이 스승으로서의 단순한 욕망만이 아니라 언제나 진리에 충실한 제자들임을 믿는 나머지였다.
전날 야스이자신이 서점에 가서 《김일성전》을 여러권이나 구입하게 된것도 그런 기대가 낳은것이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무슨 생각에 옴해있는 야스이를 바라보며 심리학교수가 느닷없이 물었다.
《헌데 선생님, 그사이 오래동안 외출도 안하시고 집안에 계셨다는데 무슨 새 저술이라도 하셨습니까?》
《새 저술? 허허…》
야스이는 가볍게 웃으며 중얼거리다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외웠다.
《그보다 더할나위없이 가치있는 일에 몸을 잠그고있었다 할가… 아무튼 그게 무엇인지 아직은 자신있게 말할수 없지만 이제 앞으로 차차 알게 될거요.》
무게있게 울리는 그 음조와 억양에서 좌중의 사람들은 어떤 숭고한 감정을 느끼며 눈들을 빛냈다. 스승의 신상에 분명 무슨 거대한 사변이 일어난것 같은 예감을 똑같이 느꼈던것이다.
야스이는 화제를 바꾸어 말하였다.
《당신들도 아다싶이 자고로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인간애호에 대한 사상이 전해왔소? 모든 종교가 그러했고 력대로 수다한 철인과 명사, 문인들이 박애와 인도주의를 고취하며 사람을 사랑할것을 설교해왔나말이요. 비근한 례로 한때 일본에 류포되여 사회에 큰 감화력을 안겼던 일만 놓고봐도 그렇지.…》
야스이는 여기서 잠간 말을 끊고 좌중을 한번 둘러본 다음 한층 진중한 어조로 뒤를 이었다.
《일찌기 명치개화기에 후꾸자와 유우기찌는 〈사람우에 사람이 있어서 안되며 사람밑에 사람이 있어서도 안된다〉는 그 유명한 〈인간평등론〉을 제창하였는데 당시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의의가 깊고 인도적인 대단한 사상이였나말이요. 관료통치배들의 횡포, 남존녀비의 악페, 온갖 불평등이 세상을 지배하던 그 시대에 무권리한 백성들의 처지가 어떠했소? 신분제도의 올가미에 매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마소와 같은 존재였으니말이요. 실상 오늘날에도 그 〈인간평등론〉이나 인간애호의 모든 철학들이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교훈과 영향을 주고있지만 그것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쳤지 그에 대한 혁신적방도나 사상은 그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지 않았소? 문제는 사람의 운명개척문제를 옳게 규정한 그런 철학이 있어야만 하는데… 헌데 나는 최근 인간의 완전해방을 천명한 위대한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였소.》
야스이는 교단에 서서 강의하듯 열정을 담아 이야기하였다.
깊은 사색의 일단을 풀어헤치는듯 한 로교수의 기품있는 언변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있던 몸은 체소하나 이마가 유난히 넓은 법조계의 한 변호사가 문득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것이 바로 주체사상에 대해서가 아닙니까? 나도 좀 본 일이 있는데…》
《그렇소. 인간을 가장 높은 경지에로, 광명한 세계에로 무한히 고무하고 추동하는 사람중심의 위대한 주체의 학설이요. 나자신 아직은 그 사상의 초입에 들어선 학도에 불과하여 오늘은 더이상 그 진리성을 과학적으로 론증할수 없는게 유감이요. 참 가만…》
야스이는 말하다 말고 문득 눈으로 누구인가를 찾았다.
이때 녀주인 다즈꼬가 묵직한 쟁반을 들고 응접실에 다시 나타났다. 그 녀인은 아까부터 새로 만든 음식들을 가지고 들락날락하고있었던터이라 좌중에서 벌어지고있는 화제들을 어지간히 다 듣고있었다.
다즈꼬는 쟁반의 음식들을 탁상우에 옮겨놓으며 거듭 권고하였다.
《얘기들만 하지 마시고 이젠 좀 들면서 하지요.》
《고맙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들기보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것이 더 소중하고 즐겁답니다.》
《그래요. 우리에겐 이런 귀한 기회가 쉽사리 차례지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예나 변함없이 언제나 깨끗하고 단아한 자태를 보존하고있는 다즈꼬부인의 용모를 바라보며 유쾌하게 한마디씩 하였다.
야스이 가오루가 안해를 향해 부탁했다.
《여보, 전번에 간수해둔 책을 얼른 좀 가져다주오.》
《네, 알겠어요.》
부인은 대뜸 알아차리고 얼른 서재에 가더니 남편이 부탁한것을 가지고왔다.
《김일성전》이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제자들에게 한권씩 책을 안겨주며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이 책을 꼭 읽기 바라오. 이 책을 읽느라면 내가 이제까지 말한 뜻이 무엇인지를 리해할수 있을거요.》
《아, 〈 김일성전〉이구만요!》
《벌써부터 구하려던 책인데… 매우 귀중한 책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참으로 뜻깊은 설날을 마련하여주신 선생님의 이 기대에…》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의 진정에 머리를 수그리며 책을 받아안았다.
《사도미교수가 이자리에 없는것이 좀 섭섭하구만.》
야스이가 혼자소리처럼 조용히 뇌였다.
변호사가 선뜻 응대해나섰다.
《그 사람이 영국에서 열리고있는 학술토론회에 갔다지요?》
《그렇소만… 설전으로 귀국한다고 했는데 일이 지체되는 모양이요. 나타나지 않는걸 보니…》
야스이의 얼굴에는 의연히 아쉬운 빛이 가시여지지 않았다. 이런날에 단 한번도 빠진 일이 없던 제자였다. 어느 제자보다 유별한 정으로 대하게 되는 그가 이 뜻깊은 좌석에 없는것이 야스이로서는 저으기 유감스럽게 생각되였던것이였다.
다즈꼬부인은 사제간에 오가는 정을 지켜보다 말고 주부의 체면을 잃지 않으려는듯 서둘러 포도주병에 먼저 손을 가져갔다.
《자, 이젠 술들을 드세요!》
심리학교수가 부인의 손에서 얼른 병을 앗아쥐더니 마개를 뽑아 유리잔마다에 술을 따랐다.
반나마 벗어진 대머리의 고등학교교장이 로교수부부의 손에 먼저 잔을 쥐여주고나서 허리를 펴더니 웅글은 목소리로 말했다.
《존경하는 은사와 사모님의 새해의 보다 큰 행복과 건강을 위하여 축배를 듭시다!》
빨간노을빛이 찰랑이는 술잔을 모두 들었을 때 체소한 몸집의 변호사가 엄숙히 한마디 첨가하였다.
《사람중심의 찬가가 울려퍼질 이 땅의 아름다운 래일을 위하여!》
서로 소리나게 유리고뿌를 맞찧었다.
순간 유리창으로 비쳐드는 해살이 그들모두의 얼굴과 잔마다에 찬연한 광택을 던지며 번쩍 어리였다.
한순배 돌았을 때 야스이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모두 마음껏 술을 듭시다. 나도 오늘은 좀 마셔야 하겠소.》
로학자의 그 소리에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던 스승이 그처럼 호담스럽게 나오는것이 놀라왔던것이다.
《아, 그래요!》
심리학교수가 술병을 손에 들더니 로학자의 잔에 찰찰 넘치도록 부었다.
야스이는 단숨에 들이켰다. 옆에서 남편의 그런 거동을 보던 다즈꼬가 기겁을 하며 만류해나섰다.
《여보, 어쩔려구 그러세요? 큰일나겠네.… 천천히 조금씩 하시지 않고…》
《큰일은 무슨… 어서들 드시오. 이런 날엔 얼마든지 당기는 법이요. 그래 기분탓이라 하지 않소. 허허…》
그새 취기가 올라 희멀쑥한 얼굴이 벌거우리해진 로학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모두에게 술을 권했다.
야스이는 마냥 즐거워 노래를 흥얼거리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술을 든다기보다 새 길을 찾아 떠나는 나그네가 새벽 감로수에 기운을 얻고 씩씩한 걸음으로 나갈 그런 기분으로 마시고 있소.》
정녕 주체철학에 접하고 심취된 야스이 가오루는 그 황홀한 세계에 몸도 마음도 푹 젖어있는듯싶었다.
다즈꼬는 오늘의 남편의 심정이 너무나 잘 리해되였다. 그 녀인은 뜨거운것을 삼키며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실내는 갈수록 화기가 넘쳐났다.
전축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장중하면서도 랑만에 넘친 선률이 사람들의 승화된 감정을 더더욱 불타오르게 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