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타지 않는 불
제 3 장
《대동아전쟁》의 무참한 종말은 하루아침에 모든것을 발칵 뒤엎어놓았다.
이제까지 전쟁이란 오직 《번영》을 선사해주는것으로 여기며 승리에만 도취되여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패전은 가혹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가져다주었다.
150만의 청장년들이 태평양상의 크고작은 섬과 바다, 광활한 아시아대륙의 하늘과 땅에서 주검이 되여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못하는 운명에 처했다. 목숨을 간신히 부지하고 살아돌아온, 팔다리를 잃은 《상이군인》들이 처량한 몰골로 도시와 농촌의 길가를 방황하였다. 오륙이 성한 귀환병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대로 거의가 폭격에 의해 집과 부모처자를 잃은 신세로 전락되였다.
《성전》이 낳은 60여만의 젊은 미망인들이 이국의 무주고혼이 되여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넋을 부르며 통곡하였다.
세상이 온통 아우성천지였고 뒤죽박죽이였다. 강도, 살인, 폭행, 자살, 강간, 매음 등 온갖 범죄와 악덕이 성행하였으며 기아와 질병이 범람했고 별의별 주의주장들이 횡행하였다.
아득한 옛날로부터 세기와 세기를 거쳐 끊임없는 전란속을 헤쳐온 나라였으나 이토록 패덕과 란륜이 사회전반을 휩쓸어보기는 유사이래 처음이였다.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가 아즈기비행장에 도착한데 이어 도꾜만에 정박해있는 미전함 《미즈리》호 갑판에서는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진행되였으며 그뒤로 미군의 본토상륙이 시작되였다.
그러자 도시의 거리거리는 이 승리자의 이방인들로 주인이 일시에 바뀌여졌으며 한편 수많은 녀인들이 그들 점령군의 수욕의 제물로 섬겨졌다.
동방의 소위 《선진국》으로 자처하던 이 나라는 급기야 도덕과 륜리를 상실한 사회로 변하여 갈수록 타락과 퇴페의 색조가 짙어갔다.
그런 속에서도 량심을 지닌 지성세대들은 자기 조국이 처한 엄혹한 현실을 우려하며 그 난국을 타개할 길을 모색하였다.
그들, 야스이 가오루와 구로다 겐, 하시모또 스스무도 그런 축에 속한다고 할수 있었다.
세 사람은 유년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내 남다른 친교를 맺고있는사이였다. 그러나 사람마다 지능, 정서, 의지, 취미 등 지니고있는 개성이 각이하듯 전공과 추구하는 세계가 달라서 간혹 서로 맞다들면 론쟁마당을 벌려놓고 열을 올리기가 일쑤였다.
어느날 야스이 가오루는 구로다 겐의 영전을 축하하는 만찬회에 초청을 받고 그의 집에 들렸다. 마침 하시모또 스스무도 와있었다.
구로다 겐은 귀족계렬의 자녀들이 많은 유명짜한 대학의 정치학 강좌 주임교수의 발령을 받았던것이다.
전후에 들어 이렇게 세 사람이 자리를 같이하게 된것은 처음이였다.
천황의 목갈린 방송연설이 있은 그 《치욕의 날》 (패망의 8.15를 그렇게들 불렀다.)로부터 날은 퍼그나 흘러 어느덧 이듬해의 초여름을 맞이하고있었다.
나라가 망하고 기아와 빈궁이 휩쓰는 험악한 시국이였으나 워낙 부유한 가정인데다 생활을 합리적으로 누릴줄 아는 구로다는 암시장의 양주며 희귀한 음식으로 친구를 대접하는데 린색하지 않았다.
평소에 야스이 가오루는 술을 즐겨하지 않았으나 그날은 친구들의 권에 못이겨 약간 들었다. 그러나 애주가들인 구로다와 하시모또는 자주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취기가 어지간히 돌자 이야기판은 차츰 깊은 곬을 파헤쳐가며 여러갈래로 가지를 쳐갔다.
《〈포츠담선언〉에는 군수재벌의 징벌이 엄연히 규정되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극동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것은 도죠를 비롯한 38명의 군벌이였네. 〈죽음의 상인〉들인 재벌은 단 한명도 처형되지 않고 다 무죄석방되지 않았나. 과연 이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고있는가?》
하시모또는 이렇게 좌중에 의문을 던져놓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몸집이 우람하고 장골인 그는 체통과 어울리게 목소리 또한 걸걸한 바스음이였다.
하시모또는 워낙 기지있는 해학과 예리한 필치로 신문의 론단을 장식해온 진취성있는 언론인인지라 시세의 동향과 변화에 남달리 민감했다.
패전후 반년나마밖에 안되였으나 그간 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포츠담선언》에 따라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전범자들의 처형, 군수산업과 재벌의 해체, 치안유지법의 페지, 정치범의 석방, 민주주의적시책 등 이러루한 사변들이 련달아 벌어졌었다.
그러나 하시모또가 방금 말했듯이 군수재벌들만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전원 무죄로 판결되였다는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야스이와 구로다도 이미 알고있는 문제였다.
실상 력대로 침략전쟁을 촉발시키는데 주동적역할을 한것이 제국관료군벌과 결탁한 재벌들이다. 헌데 그 진짜 전범자들이 처형의 대상에서 면제되였으므로 그들의 의혹을 크게 불러일으키지 않을수 없었다.
《비록 재벌은 처단 안되였지만 그들에게 〈추방령〉의 벌칙이 가해지지 않았나. 그리고 미쯔이, 미쯔비시, 스미또모와 같은 구재벌의 통칭과 상표, 간판의 사용금지령 등 일련의 제재조치가 취해졌고… 그것을 그들에 대한 형벌로서 대치시키려는게 아닐가?》
하시모또가 던진 의문에 구로다 겐은 자기 견해를 이렇게 비쳤다.
술기운이 오른 그의 넙적한 얼굴은 불그레했다.
그의 말에 하시모또는 한층 의혹을 숨기지 못하였다.
《하다면 〈전범 1급〉으로 처형되는것은 군벌들뿐이란말인가? 그들만이 교수대와 감옥으로 가고 재벌은 그런 제재로 죄가를 무마하다니… 아무래도 납득되지 않는 처사야. 필연코 여기엔 무슨 검은 계략이 있는것 같애.》
하시모또는 언론인다운 통찰력으로 그 내막을 파헤치려는듯 선선히 물러나지 않았다.
야스이는 두 친구의 대화에 시종 침묵으로 대하고있었다. 전범자로 말하면 그자신도 례외로 될수 없다고 노상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터이라 그들의 대화에 합세할 처지가 못되였다.
지금 그의 심사는 순평치 않았다. 법학자인 그로서는 마땅히 그런 문제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것이였다. 헌데 침묵으로만 대하고있는것이다.
얼마전에 야스이에게도 문부성당국으로부터 《공직추방령》이 내렸었다.
전시하에 물의를 일으켰던 그 저술이 역시 벌칙의 대상으로 되였던것이다.
야스이는 그 징계처분을 아무런 이의도 표명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전에 사도미의 앞에서도 말한것처럼 응당히 당해야 할 일로 여기며 이미부터 각오해왔었다.
헌데 도꾜제대 학부교수자격심사위원회가 학술연구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리유를 내걸고 그 《추방령》을 단호히 일축해버려 야스이는 교단에서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류임하게 되였다. 그렇지만 그의 량심은 한시도 자기자신을 허용하지 않고있었다.
야스이의 그런 심사를 알아차렸는지 구로다는 성급히 오동통한 몸집을 일으켜 술병을 들더니 빈잔에 따르며 말했다.
《됐소. 그런 문제는 맥아더사령부에 위임하고 다른 이야기나 하세.》
선뜻 거기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엄숙해진 좌중의 분위기가 못마땅한듯 구로다는 술잔을 들어 소리나게 쭉 들이키고나서 제 먼저 입을 열었다.
《따지고든다면 어느 하나 정상적인게 있나. 다 화만 돋구는 일뿐이지. 패전국이란 다 그런건데 이제 우리가 무엇을 발가내고 흑백을 가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구로다는 맥락이 닿지 않는 소리로 중언부언하다가 갑자기 왕청같은 방향에로 화제를 돌려세웠다.
《자네들도 아다싶이 플라톤은 인간생활이란 령혼이 지구상에 내려왔다가 다시 〈래세〉에로 돌아가기 위해 잠간 머물러있는 〈정류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헌데 우리가 사는 현존 사회란 쑈펭하우에르가 말했듯이 사람이 제아무리 자기의 슬기와 노력으로 항로를 개척해나갈수 있다치더라도 가면 갈수록 죽음이 앞에서 줄달음쳐오는 불행과 비극의 무대일따름이네. 보라구, 세상꼴이 어떻게 되여가나? 치부를 위해 서로 물어뜯고 쏘아갈기고 하다가 종당에는 원자탄이라는 대량살륙무기로 인류를 파멸에 몰아넣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나말이요.》
구로다는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종잡지 못할 소리를 한바탕 번져놓았다.
학창시절부터 기억력에 있어서 누구도 따를수 없을만치 두뇌가 비상했던 구로다는 영어나 도이췰란드어에 들면 어려운 방언이나 속어까지 터득하고있을뿐더러 동서고금의 철인, 성자의 명언같은것도 모르는게 없다싶이하였다.
《그렇듯 잠간 머물렀다 갈 세상이 이처럼 험악해서야 인생을 어떻게 한시인들 마음 편히 보내겠소?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전화의 페허우에 우리가 안녕을 누릴수 있는 〈정류소〉를 잘 마련하는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네. 이를테면 금후 일본이 어떤 체제의 국가를 세우는가 하는 문제일세. 자유민주주의인가, 공산주의인가? 과연 량자간에 어느것을 택해야 하는지 친구들, 말해보게나.》
구로다는 취기로 해서인지 평소의 진중성을 잃고 다변스러워졌다.
《미국에 일체 실권을 빼앗긴 판국에서 지금은 그것을 판단하기가 매우 묘연하네. 허나 이것만은 말할수 있지. 온 백성이 천황제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갈망하고있다는것을… 야스이군의 생각은 어떤가?》
구로다의 질문에 이렇게 응대하고난 하시모또는 옆의 야스이를 돌아보며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건네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잠간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글쎄 어떤 국가가 설지 그것은 두고봐야 할 일이지만 여하간에 파쑈군국이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게 하는것이 현재 우리앞에 나서고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네. 자유와 민주주의가 말살된 제국의 독재정치하에서 우리 겨레들이 얼마나 시달려왔나. 그 암흑의 지난날이 다시는 절대로 되풀이되여서는 안되네. 그리하여 인권과 복리가 백방으로 보장될수 있는 그런 사회를 건설하는것일세.》
야스이의 음성은 담담하게 울렸다. 그의 이 주장은 지난날 동료들속에서 지탄을 샀던 그 저술에도 적지 않게 반영되여있는것으로서 그가 변함없이 추구해온 세계였다.
그 말에 구로다가 비양조로 나왔다.
《나무랄데 없는 훌륭한 생각이네만 과연 그런 사회를 건설한다는것이 가능할가? 애당초 꿈같은 소리네. 수수천년 내려오면서도 이룰수 없던 유토피어나 무릉도원과 같이 한갖 리상향의 환영에 지나지 않아. 그렇다고 허무적으로만 대할수는 없지. 꿈이 현실로 되는 경우도 왕왕 있는 법이니까. 하하…》
구로다는 호탕하게 웃다말고 갑자기 술잔을 높이 들더니 한층 야유를 담아 큰소리로 부르짖듯 하였다.
《자, 친구들! 그 희한한 락원이 이 땅우에 태여나기를 기원하여 잔을 들자구!》
《그날의 도래와 함께 해방된 아시아를 축하하세!》
하시모또의 말이였다.
정녕 일본제국의 붕괴는 동방에 서광을 안겨주었으며 새 력사의 길을 열어놓았다.
《야스이, 오늘은 좀 들게나. 자네가 얼마나 바랐던 일들인가. 한때 물의를 일으켰던 그 저술도 사실은 동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것이 아니였나?》
하시모또는 야스이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야스이는 그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
국제법학자로서의 야스이가 취해온 지난날의 활동에 대하여 늘 경의를 품고있는 하시모또였다.
야스이는 지금 이 시각 해방과 독립의 환호로 들끓고있을 나라들의 정경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마음이 저절로 뜨거워올랐다.
구로다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세계무대우에 흥망성쇠의 희비극이 연출되고있는 마당에서 이 나라에는 언제 가야 광명이 비끼겠는지? 군대도 없어지고 재벌도 사라지고… 이제 무엇으로 일본을 구원한단말인가? 생각할수록 울화만 치미네.》
구로다는 주먹으로 탁상을 내려치며 넉두리하였다.
모든것이 다 망해버렸다고 구로다가 그토록 개탄하고있으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전에 하시모또가 재벌의 《형벌》을 두고 《검은 계략》이라고 운운하며 심히 의혹을 표명했지만 실상 거기에는 《막후연극》이 있었던것이다.
그것이 연출된것은 이들 세 사람이 술좌석에서 한창 이야기판을 벌리고있던 바로 그 시각과 때를 같이하고있었다.
그때 궁성앞 호리바다에 자리잡고있는 미군총사령부건물로부터 옆으로 약간 들어간 옛 농림성청사 5층의 한 방에서는 맥아더사령부의 참모성원 몇이 모여앉아 밀담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한 장성은 말했다.
《우리는 일본경제를 실험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 소리에 맞장구치며 한 참모성원이 나섰다.
《일본군대의 해체와 처벌의 결과로 하여 무엇이 초래되였는가? 그것은 우리의 대공산전략적지반을 약화시키는 후과를 가져왔을 따름이다.》
여기에서 그중 자기 립장을 로골적으로 드러낸것은 미《대적첩보부》의 구레쉘대좌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수재벌들이 다 군국주의자라고 규정한 포츠담선언이나 그에 따르는 성명을 나는 받아들일수 없다. 우리들은 바야흐로 일본을 리용할 날이 있을것이다. 포츠담선언같은것은 지옥에나 가라!》
후일 그날의 모의에서 론한 문제를 두고 미국무성 고문 오웽랏지 모아교수는 자기의 저서 《아시아의 정세》에서 다음의 세가지 골자로 요약하여 설명하였다.
첫째, 일본이 그 지리상 위치로 보아 영국과 같이 《불침항공모함》으로 될수 있는 전략적가치.
둘째, 일본이 가지고있는 도이췰란드와 비등한 공업능력의 가치.
셋째, 《태여나자부터 주입된 전통적인 반공사상》으로 무장된 일본인이 《미국에 충성다할수 있는 새형의 식민지군대로 될수 있다》는 미국의 반공전쟁정책수행을 위한 인적자원으로서의 리용가치.
그 교수의 론거를 반증하듯 당시 미국무장관 에지슨은 언명하였다.
《일본은 아시아의 반공보루로서의 그 힘을 다시금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후일 조선전쟁의 발발은 미국의 대일정책을 웅변적으로 과시하는 마당으로 되였다.
그 전쟁은 일본으로 하여금 일약 미국의 공격기지, 보급기지로 전환하는 조약대로 되였으며 또한 일본의 재 군비와 군사기지화를 촉진시키는 계기로 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일본의 값싼 기술과 로동력을 닥치는대로 략취할수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여 후날 미극동군 수리과장 모오스는 말하였다.
《땅크 한대의 수명이 평균 4개월인데도 조선전선에서는 출전하자마자 파손되여 돌아오군 했다.
이것을 미국에서 수리하자면 2 300딸라가 들지만 일본에서는 불과 700딸라 정도면 충분했다. 우리는 일본에서 카빙총을 만들었지만 그 생산비도 미륙군성이 믿지 않을만큼 매우 눅거리였다.
어쨌든 미국에 비해 우리는 일본에서 불과 이십분의 일의 비용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이렇듯 《군국부활론》과 《재벌보존론》은 이미 그때로부터 미국에 의하여 제창되여왔으며 은밀히 그 실현이 추진되여왔던것이다.
조선전쟁은 이러한 사실을 백일하에 로출시키는 계기로 되였을 따름이였다.
패전직후의 혼란된 상황하에서 자기 조국, 일본의 앞날을 예견하기 어렵던 그들 세 사람, 야스이의 친구들이 그 《검은 계략》의 진면모를 비로소 알게 된것은 그날부터 세월이 퍽 지나간뒤였다.…
그날 야스이 가오루가 구로다 겐의 집을 나왔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워져있었다.
전차에서 내려 자기 집이 있는 스기나미쪽을 향해 가는 야스이의 걸음은 무거웠다.
오가는 행인도 뜸한 야심이였으나 료정들이 늘어서있는 번화가는 미군병종들로 흥청거렸다. 그들 점령군은 술에 취한 혀꼬부라진 소리로 희희락락거리며 창녀들을 옆에 끼고 제 세상인양 거리를 돌아치고있었다.
이방인들의 음란과 쾌락의 유흥터로 변한 거리를 바라보며 길을 걸어가는 야스이는 내내 모독당한 감정이였다.
예로부터 순결과 정숙을 미덕으로 삼아온 이 나라 녀인들이였다. 헌데 그 모든것을 짓밟힌 그들이 오늘은 륜락가에 버림받은 인생으로 되였다. 모름지기 저 녀인들은 전쟁으로 하여 남편을 잃은 비애와 막막한 삶에 절망하던 나머지 피눈물을 삼키며 오욕의 길에 몸을 던지게 되였으리라.
유린당한 생활, 그 녀인들의 가혹한 처지를 생각할 때 야스이는 불덩어리같은것이 가슴속을 마구 치미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는 이 거리에서 한시바삐 벗어나려고 성난듯 걸음을 다우쳐 소로길로 접어들었다.
선술집앞을 지나가는데 컥컥 막힌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술은 눈물이냐 탄식이런가
아, 세상을 저주하는 울부짖음이더냐
…
비탄에 젖은 그 가락은 야스이의 심사를 한층 울적하게 하였다. 어디서나 보는것, 듣는것이 다 한많은 세상에 대한 몸부림이였다.
아까 구로다 겐은 옛 철인의 말을 빌어 인생이란 행복한 《래세》로 가는 과도적존재라고 하였다. 야스이는 허무와 체념만을 고취하는 그따위 궤변을 애당초 귀에 담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참을수 없는 우롱이다. 제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숨가쁘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사회악을 증오하며 항거해나서고있다.
이러한 인간의 참모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이밤 야스이 가오루의 생각은 류달리 깊어만 졌다. 그는 걸음을 빨리 놓아나갔다.
다즈꼬는 어린 아들의 손목을 잡고 정원에 서서 지붕우를 올려다 보고있었다.
오월의 하늘은 맑고 청청했다. 그 푸른 하늘을 썰며 기세좋게 날으는듯 길다란 장대에 매달려 높이 떠올려있는 커다란 잉어풍선이 지붕우에서 헤염치고있었다. 그것이 바람을 받아 한층 팽팽하니 부풀면서 세차게 꼬리치며 펄럭거릴 때마다 아들 노부아끼는 작은 몸을 솟구며 순진한 즐거움에 찬 소리로 환성을 올리군 한다.
《야- 멋있다. 씽씽 날아라!》
좋아서 어쩔바를 몰라하는 그애의 기쁨에 넘친 모습을 바라보는 다즈꼬의 얼굴은 한껏 밝았다.
그는 두팔로 노부아끼를 담쑥 껴안고 높이 쳐들어주며 머리를 들었다.
여기저기 집집의 옥상우에 붉고 푸른 가지각색의 잉어풍선들이 수많이 띄워져있다.
오늘은 단오날이였다. 이날이면 사내아이를 둔 집에서는 잉어풍선을 마련하여 자기 집 지붕우에 띄우는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풍습으로 되여있다. 그것을 일러 《고이노보리》라 한다.
아찔한 절벽우에서 장쾌히 내리꼰지는 폭포의 물살을 헤치며 기운차게 거슬러오르는 용맹한 잉어처럼 사내자식이 담차고 억세게 자랄것을 바라는 어버이마음이 낳은 행사라고 한다.
그러나 그 관습마저도 전쟁중에는 사라졌었다.
전후에 들어 3년이 되는 올해에 와서야 사람들은 잉어풍선을 띄울 정신적여유나마 생긴듯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단오명절을 맞이할수 있었다.
생활의 모든 절제가 파괴되고 혼란과 무질서만이 지배하던 지난날의 엄혹한 시절에는 너나없이 그걸 따를 경황이 없었던것이다.
다즈꼬의 집이라고 남들과 다를바 없었다.
남편 야스이 가오루는 근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를 여러차례 다녀왔었다.
그 고장들을 찾아가 원자탄에 의한 피해정형을 낱낱이 조사하여 그 실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미국을 고발할 목적에서였다. 지구상에 다시는 그러한 참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던것이다.
미군점령하에서 그 진상을 파헤치고 단죄한다는것은 웬만한 용단이 없이는 취하지 못할 행동이였다. 그는 장차 그것으로 하여 생길 후과같은것은 조금도 념두에 두지 않는상싶었다.
국제법학자로서의 량심과 의무감이 남편으로 하여금 흔연히 그 어려운 일에 나서게 하였는지 모른다. 또 한편 과거의 《전쟁협력자》의 불미로운 명예를 다소나마 벗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것은 야스이 가오루가 전후에 독자적으로 결심하여 벌린 첫 사업이였다.
이제 필연코 어떤 박해가 있을 그 위험한 일에 착수한 남편의 신변이 우려되였으나 다즈꼬는 내색하지 않고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의로움을 위해서라면 전후불망 뛰여드는 남편의 사람됨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부인이였던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며칠전 구로다 겐교수가 야스이의 가정을 방문했었다. 다른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 처음 찾아온 구로다였다. 야스이가 위험한 일에 몸을 잠그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던것이다.
《나는 자네가 정치성을 띠는 원폭문제를 들고 나서는것이 매우 우려되네. 하물며 〈추방령〉이 가해졌던 처지로서 자기 립장도 좀 생각하여 자중해야지 그러다가 또 어떤 화를 입으려고 그러나? 친구로서 부탁하네만 제발 이제부터라도 거기서 손을 떼고 교육사업에 전념하길 바라네.》
구로다는 진지한 어조로 야스이를 설복하였다.
그러나 야스이는 그의 권고를 성근히 받아들이는 기색이 아니였다.
《나를 위해주는건 고맙네만 념려말게. 내가 알아서 결심대로 하겠네.》
《자넨 그 고집때문에 번번히 피해를 입으면서도 막무가내거든. 자승자박이라고 그러다 또다시 무슨 곤경을 겪으려고 극성인가?》
구로다는 상대가 의연히 완고하게 나오자 제사 답답한듯 두덜거리다가 이번엔 어성을 바꾸어 말을 계속했다.
《자네도 알지 않나.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게 된것은 쏘련의 대일전쟁을 미리 저지시키기 위한 전략적행동이였다는것을… 이를테면 일본의 공산적색화의 방비책으로 말일세. 만약 쏘련이 이 땅에 진주했다면 사정이 어떻게 될번 하였나? 물론 우리가 당한 희생이 막급하지만 어쩌겠소. 그 대가로 공산화를 면했으므로 관대하게 대할수밖에…》
《됐네!…》하고 구로다의 사설을 밀막으며 야스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난듯 말했다.
《그런 명분으로 인간살륙행위를 묵인한다면 장차 인류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나? 당치 않은 소리를 말게.》
두 사람의 이 어설픈 대화를 다즈꼬부인은 차반을 들고 응접실에 들어갔다가 죄다 들었다.
그날 구로다가 그토록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일단 품은 결심을 추호도 철회하지 않았다. 대학의 교단에 서는 한편 추진하는 일이여서 그간 남편에게는 하루의 휴식조차 변변히 차례지지 않았다. 피폭지들을 탐방하여 조사한 자료의 정리 그리고 그에 기초한 법적문건의 집필 등으로 침식마저 잊을 때가 빈번했다.
이틀전에 남편은 또다시 히로시마로 려행을 떠났다. 국제재판소에 제소할 문건을 작성하다가 미흡한 점이 있어 걸음을 놓은것이였다.
그렇듯 동분서주하는 분망한 속에서도 야스이 가오루는 집을 떠나기 앞서 잉어풍선을 구해가지고와서 안해에게 부탁하고 갔다.
《여보, 랠모레면 단오날인데 올해는 이걸 띄워서 노부아끼를 즐겁게 해주오.》
다즈꼬는 남편의 그 당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평소에 과묵하고 조용한 남편이였다. 그런 성미가 근래에는 한층 짙어져 애당초 가정사따위에는 관심이 없는듯 했는데 그것이 그릇된 판단이였음을 다즈꼬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자식을 생각하는 그 일단만으로도 이전과 다름없이 다심한 남편임을 알수 있었다. 그동안 열중하던 사업이 진전을 보게 된데서 그는 얼마간 마음의 여유가 생긴것 같았다. 워낙 생활을 뜨겁게 대하고 사람을 귀중히 여기며 사랑해온 남편이였다.
하기에 자식들에게 쏠리는 그의 애정 또한 각별했는데 딸자식 유우꼬를 위해서도 아버지로서의 정성을 다할줄 알았다. 립춘과 더불어 맞이하게 되는 3월 3일날이면 사내아이들을 위한 《고이노보리》와는 달리 처녀애들의 행복을 축원하여 《히나마쯔리》라는 축제를 가지는것이 또한 전통적인 의식으로 되여있다.
그날이면 가정들에서는 복숭아꽃과 함께 형형색색의 수많은 인형을 여러 단의 당반우에 진렬해놓고 처녀애들을 기쁘게 해주며 하루를 즐긴다.
이런 장식품은 의례히 녀인들이 장만하는것으로 되여있으나 야스이 가오루는 그런 관례를 무시하고 인형을 만드는 안해의 일손을 기꺼이 도와나서군 하였다.
《엄마, 저것 봐, 잉어가 날아가!》
갑자기 웨치는 아들애의 고함소리에 다즈꼬는 생각에서 깨여나 하늘을 우러러 올려다보았다.
어느 집의 잉어풍선인지 장대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속을 이리저리 헤매고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매달았던 줄이 끊어진 모양이였다.
노부아끼는 그게 재미있는지 연방 손벽을 치며 웃는다.
그애의 티없이 밝은 웃음을 바라보는 다즈꼬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이가 아이의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마음 흐뭇해하실가.…)
다즈꼬는 남편이 이자리에 없는것이 저으기 아쉽게 생각되였다.
《노부아끼, 엄마와 함께 노랠 부를가?》
다즈꼬는 이렇게 말하며 아들애의 손목을 잡았다.
아들애는 아버지를 닮은 또렷한 눈매를 빤짝거리며 대번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응, 부르자. 엄마가 피아노 쳐주지?》
《그렇잖구!》
그 소리가 떨어지자 노부아끼는 깡충거리며 제먼저 뿌르르 집안으로 달아갔다.
다즈꼬는 응접실의 피아노앞에 앉았다.
노부아끼는 어머니의 곁에 오똑하니 서서 제법 노래를 부를 몸가짐을 취하고있었다.
《무슨 노래를 부르겠나요?》
그 물음에 그애는 선뜻 대답했다.
《도토리.》
《도토리란 뭐나요?》
《떡갈나무 열매.》
《우리 노부아끼가 참 용쿠나!》
얼마전에 배워준것을 어린것이 잊지 않고 죄다 외우고있는것이였다.
다즈꼬는 영특한 아들애의 작은 머리를 따뜻이 어루만져주고나서 천천히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맑고 깨끗한 동요의 선률이 부드러이 흘러나왔다. 그 음조에 맞추어 노부아끼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따라불렀다.
도토리 데굴데굴
도톨방울이 련못에 풍덩 빠져
야단이 났네
………
방울의 울림같은 그애의 노래소리가 온 집안을 더없이 밝은 빛으로 감싸며 울렸다.
아이의 깨끗한 음정에 자기 소리를 조용히 합치며 가벼이 손을 튕기면서 건반을 타는 그 녀인의 감흥은 오늘따라 류달리 컸다.
참으로 오랜만에 동요의 세계를 맛보는 다즈꼬였다. 그 노래는 그에게 멀리로 흘러간 지난날의 생활을 새삼스럽게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다즈꼬는 기후가 온화하고 자연의 정취 풍요한 관서지방에서 꿈많은 처녀시절을 보냈다.
정다운 모교의 언덕에 서면 검푸른 물결이 설레이는 무변대해가 아득한 수평선 멀리로 찬란히 펼쳐져있었다.
그 아름다운 기슭에서 그는 사랑을 싹틔우고 리상을 자래웠다.
청청한 바다와 수려한 향토의 모습처럼 다즈꼬는 언제나 발랄하고 우아했다.
그 무렵에 그는 야스이 가오루와 인연을 맺었다.
녀학교의 졸업식을 장식하는 음악회에서였다.
그날 다즈꼬는 피아노독주를 하였다. 도이췰란드의 작곡가 바하의 관현악조곡 제3번 아리야를 탔다.
음악회에는 녀학생들의 졸업식을 축하하여 모여든 학부형과 교사들이 참석해있었다. 그들속에 야스이 가오루가 래빈의 한사람으로 망라되여있었다.
당시 그 학교의 교사로 있던 하시모또 스스무가 그를 데리고 왔던것이다.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교단에 선지 불과 몇해 안되였던 청년 야스이는 고향인 오사까에 잠간 다니러 왔다가 친우 하시모또의 권유에 따르게 되였다. 음악을 남달리 사랑하는 친우를 위해 하시모또가 베푼 호의였다.
그날 야스이는 한 녀학생이 피아노로 타는 바하의 아리야를 듣고 적지 않게 감동되였다.
전문가에 비하면 그 처녀의 연주가 아직은 미숙하고 세련되지 못했으나 열정적이고 그 곡에서 이야기하려는 창작가의 의도만은 소박하게 형상되여있었다.
그것이 청년 야스이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던것이다.
음악은 인간의 기분, 이를테면 고민, 행복감, 기쁨, 슬픔, 수심 등 모든 섬세한 감정들을 표현할수 있을뿐만아니라 그의 사회적특성을 나타낼수 있으며 한편 인간을 다른 현상들과의 련관속에서, 주위의 현실과의 다양한 련계속에서 리해할수 있게 한다. 음악에서의 감정은 모든 외부적인것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직접적으로 사람의 상상력에 영향을 준다. 《…말이 모자라면 음악이 시작된다.》라고 랑만주의 시인 하이네도 말했듯이 바로 여기에 정서적영향력에서 문학이나 회화가 전달할수 없는, 언어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할수 있는 음악의 강력한 표현력이 있는것이 아닐가.
평소에 이러한 관점에서 야스이 가오루는 음악을 인식하고 사랑해왔다.
그 녀학생의 피아노독주를 감상하면서 그것을 새삼스럽게 감득한 그는 옆에 앉아있는 하시모또를 돌아보며 은근히 속심을 털어놓았다.
《저 처녀가 괜찮아. 바하의 세계를 리해하고있는것 같소. 그만한 경지에 이르기도 쉽지 않는 일인데…》
《그럴테지. 역시 자네의 관찰력은 언제 보나 정확하거든. 교내에서 음악가로 불리우는 학생이라네. 그래 마음에 드나? 내 기꺼이 소개해주지.》
하시모또는 진정으로 말했다.
그날의 음악을 통한 뉴대감, 그것이 그들 청춘남녀의 관계를 남다른사이로 만들어준 계기가 되였다.…
그때로부터 다즈꼬는 다면적인 지성과 남아다운 정의감을 겸비한 그 청년을 처녀의 순결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열렬히 대하게 되였다.
그 황홀한 시절이 이제는 벌써 십여년전의 일로 되였다.
지금은 삼십을 갓 넘긴 두 남매의 어머니가 된 다즈꼬였다. 전란의 소용돌이속에서 흘려보낸 그 다난했던 세월은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비도 수많이 안겨주었었다. 그러나 그 녀인은 오늘도 예나 변함없이 용모나 자태가 한창 피여나는 처녀처럼 깨끗하고 아릿다왔다. 음악이 그로 하여금 항용 젊음을 잃지 않게 하는것인지 모른다.
다즈꼬는 하염없는 추억의 갈피들이 뇌리를 스치며 오락가락하는 속에서도 건반을 타는 손길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노부아끼는 또랑또랑 부르고 또 부른다.
미꾸라지 나와서 꼬마야 안녕
도톨아 나와 함께 손잡고 놀자…
시름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아이와 즐기던 그 한때가 지나고 노부아끼마저 밖에 놀러 나가버리자 집안에는 다즈꼬만이 홀로 남았다.
외롭게 방에 있자니 그는 은연중 남편이 기다려지는 심사가 오늘따라 한층 간절해졌다. 한편 뭔가 알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쳐들기도 한다.
다즈꼬는 뒤숭숭한 생각을 다잡지 못한채 마침내 집안에서 뛰쳐나오고말았다.
밖으로 나온 그 녀인은 망연히 서서 행길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가 갑자기 울려왔다.
그 부름에 펀뜻 정신이 든 다즈꼬는 얼른 고개를 돌려 살폈다. 소학교에 다니는 유우꼬가 등에 진 가방을 달싹거리며 달아오고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딸애였다. 그제서야 벌써 정오의 시각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단숨에 달려와 어머니품에 안긴 처녀애는 머루알같은 두눈을 반짝이며 지붕우로 머리를 쳐들어 바라본다.
《엄마, 우리 풍선이 제일이야! 노부쨩처럼 씩씩하네. 막 꼬리치며 나는것봐!》
딸애의 명랑한 목소리에 다즈꼬는 구김살졌던 마음이 다소 펴이는듯 했으나 의연히 불안감을 말끔히 가셔버릴수 없었다.
그는 유우꼬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면서도 남편이 돌아올 행길쪽을 자주 돌아보게 되였다. 주인이 히로시마로 떠난지 불과 며칠밖에 안되였건만 오랜 날자가 지나간듯 생각되였고 한편 그간 그의 신상에 무슨 상서롭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았을가 하는 우려를 놓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연한 걱정이였다. 보름후 야스이 가오루는 무사히 귀가했을뿐더러 그로부터 얼마간 그의 가정에는 평화롭고 례사로운 나날만이 흘렀다.
그렇다고 그동안 노상 무난했던것은 아니였다. 이태전 야스이 가오루에게 가해졌던 교직추방령이 엊그제 또다시 말썽을 일으켰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부터 상당한 기간이 경과했으므로 그것이 이제는 해소된것으로 여겨오던터였는데 갑자기 문부성당국이 해묵은 상처를 건드리며 재차 문제를 걸고들었던것이다.
허나 이번 역시 대학측에서는 완강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듭되는 이 처사앞에서도 야스이 가오루는 추호의 동요없이 일단 결심한 일을 더욱더 힘차게 추진해나갔으나 다즈꼬는 도저히 마음의 평온을 지탱할수 없었다. 언젠가 다시금 그것이 불집을 일쿨것 같아 조마조마해지기만 하였다.
초여름의 짙은 훈향이 풍겨오는 온화한 아침이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자기집 널마루에서 커다란 화분 하나를 정원의 마당가에 내다놓고 물을 주고있었다. 홀가분한 유까다(욕의)바람의 그의 몸에서는 청신한 기운이 느껴졌다.
은빛이 찬연한 흰 사기화분에는 아들애 노부아끼의 키만큼 자란 참대가 곧게 솟았는데 여러갈래로 가지를 친 줄기마다에는 삐죽삐죽한 이파리들이 푸르청청했다. 화분의 흙발을 헤집고 방금 머리를 내민듯 야들야들하고 연한 참대순 석대가 송곳처럼 솟아있는것이 또한 볼만 했다.
야스이는 평소에 정성을 기울여서 가꾸어온 식물이 이토록 싱싱하게 자라나고있는것을 오랜만에 대하게 된것이 무척 유쾌했다. 그는 흡족한 눈길로 한동안 탐스러운 참대순을 바라보다가 해살이 퍼진 눈부신 하늘로 머리를 들었다. 온 누리가 가없이 맑았다. 오후에 강의가 있어 한나절시간을 자연과 노닐수 있는 날, 그간 정력을 들여 작성한 원자탄의 죄행에 대한 고소장을 해당기관에 제출한 후여서 이 아침의 휴식의 한때가 그에게는 유별히 상쾌하고 즐거웠다. 이런 시각이란 금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것이다.
정원의 덕대와 바닥에 놓여있는 국화, 란초따위 화분들에 물을 주고 부삽, 전정가위로 한차례 깐깐스레 손질을 하고난 다음에야 야스이는 허리를 펴며 담배를 붙여물었다.
이때 대문밖에 자동차가 부르릉거리며 멎었다. 이어 잠시후 사람을 찾는 소리가 났다.
야스이는 심상한 기색으로 대문을 열고 낯선 손을 맞았다. 연청색 춘추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사나이였다.
《야스이선생이시죠?》
《그렇습니다.》
《문부성에서 찾아서… 모시러 왔습니다.》
그는 상냥하게 말하며 가벼이 머리를 굽석해보이고나서 명함장을 내놓았다.
야스이는 덤덤한 표정으로 상대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문부성이 무슨 일로 날 찾습니까?》
《글쎄올시다. 그건 딱히… 선생과 급히 의논할 일이 생긴것 같습니다.》
야스이의 넓은 이마살이 찌프러졌다. 불길하다는 느낌부터 앞섰다. 당국이 끝내 자기를 교직에서 추방하려고 강경책을 발동하는것 같았다. 이미 제소한 그 《원폭고소장》이 당국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통제하에 있는만큼 그것을 트집잡아 한층 위압적으로 나올수도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가봅시다.》
야스이는 선선히 동의해나섰다.
안해가 어느새 무슨 기미를 알아차린듯 어두운 기색으로 나와있었다.
다즈꼬는 외출복을 갈아입는 남편을 도우며 시름겨운 소리로 물었다.
《무엇때문에 찾을가요?》
《별일 아니겠지.》
남편의 범상한 거동이 도리여 다즈꼬를 한층 심란하게 하였다.
야스이는 잠간 다녀오겠노라며 안해에게 한마디 말을 남기고 래방자와 함께 차에 올랐다.
그들이 탄 자동차가 멀리로 사라져갔으나 다즈꼬는 오래도록 못박힌듯 문가에서 떠나지 못하고있었다.
문부성은 도꾜의 복판이라고 일컫는 나가다쬬에 자리잡고있는데 그 일대는 국회의사당과 수상관저, 정당 본부들, 국회의원회관 등 정치기관들이 집중된곳이여서 복잡한 인상을 주지만 주변은 비교적 조용하였다.
얼마후 문부성에 도착한 야스이 가오루는 동행한 사나이의 안내로 현관의 직사각형계단을 올라 한 부장의 방에 안내되였다.
혈색좋은 얼굴의 부장이라는 사람이 작달막한 키를 의자에서 일으켜 야스이를 정중히 맞이하였다.
《일부러 불러들여 안되였습니다.》
부장은 50대나이로 보였다. 그는 매우 진중하고 겸손한 품새로 야스이와 자리를 마주하고 앉더니 담배를 권하고나서 난데없이 시국의 동향 등 이것저것을 느릿느릿 말했다.
부장의 이런 거동에서 야스이는 자기를 찾은 목적을 상대가 성급히 털어놓기 딱해한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야스이는 앞질러 직선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지 어서 말해주십시오.》
《아, 참 바쁘시겠는데… 이미 전에도 제기되였던 일입니다마는…》
부장은 이렇게 얼버무리며 야스이를 외면하더니 의연히 느린 억양으로 말을 번지기 시작했다.
《실은 〈공직추방〉건인데… 선생의 대학측에서 수차 건의해온바도 있고 하여 우리 문부당국으로서도 그 문제를 다시는 야기시키려 안했습니다. 헌데 상급에서 종시 허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 부득이 당사자인 선생을 직접 만나 량해를 구하려고 찾게 되였습니다.》
부장은 일단 말을 끊고 야스이를 돌아보았다.
야스이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이미 예감하였던 일이였으므로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도 알수 없는 미묘한 감정으로 하여 심사가 허전해질 따름이였다.
《관립대학이라 문제가 시끄러운가 봅니다. 그러나 실망할건 없습니다. 선생과 같이 우수한 법학자를 우리가 방관시할수 있겠습니까. 요구한다면 훌륭한 사립대학에 기꺼이 알선해주겠습니다.》
부장의 말에는 진정이 어려있었다. 야스이는 그가 처음부터 자기에게 내내 호의적이였다는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야스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어 감사합니다.》
《아니, 좀더 이야기나 하다 가지요.》
부장은 덩달아 일어서며 아쉬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는 방을 나가는 야스이를 바래우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선생이 〈원폭고소장〉을 냈다지요? 매우 뜻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점령군이 이 땅에 도사리고있는 한 행동에 신중성을 기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패전국민이 아닙니까. 그자들이 어떤 보복을 할지 모릅니다. 참작해주면 합니다.》
야스이는 눈살을 실룩거리며 부장을 주시했다.
어떻게 벌써 문부성이 그 사실을 알았을가? 하다면 여기로 떠나올 때 추측한대로 방금 자기에게 가해진 조치가 단순히 《전쟁협력자》라는것만이 아니라 그 고소장이 보다 문제시되였는지 모른다.
한순간에 이런 위구가 뇌리를 자극하였으나 야스이는 부장에게 그에 대하여 한마디 묻는 일도 없이 문부성청사를 나왔다. 모든것이 결정된 마당에서 그런것을 따지고 캔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자존심은 허용하지 않았다.
야스이는 그길로 곧장 대학을 찾아갔다.
무거운 발을 끌고 대학정문에 들어서던 그는 돌연 엄습한 현기증에 눈앞이 아찔해져 교정의 느티나무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였다.
한동안이 지나서 정신을 수습한 야스이교수는 피곤한 눈을 들어 오후의 해빛을 받아 파릇파릇한 색조가 유난스러운 담쟁이로 바람벽을 온통 단장하고있는 고색짙은 대학건물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모교이자 한편 근 스무해를 교단에 섰던 과학의 요새였다. 창창한 리상과 열정으로 불타던 학창시절의 꿈이 그 건물마다에 새겨져있으며 청춘들의 심장에 지혜와 정의의 씨앗을 심어가며 보람찬 탐구의 나날을 보낸 랑만이 나래치던 대학…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것과 헤여져야 한단말인가.
그는 말 못할 상실과 허탈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나온 생애의 한 시절의 넋이 깃들어있는 이 전당과 막상 하직할 생각을 하니 저절로 눈에 눈물이 괴여올랐다.
교정에서 휴식하던 한무리의 학생들이 교수의 심상치 않는 모습을 발견하고 달려오더니 그를 에워쌌다.
《선생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어디 편치 않으십니까? 선생님의 안색이…》
학생들의 물음에 야스이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으며 중얼거렸다.
《용서하오. 난 군들과 헤여지게 되였소.》
학생들은 저마다 어리벙벙하였다.
《아니 갑자기 헤여지다뇨?!…》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야스이는 안경을 벗어 묵묵히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흠친 다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해임되였소. 과거에 저지른 죄행으로 교단에서 추방당했소.…》
교수의 엄청난 말에 학생들은 너무도 놀라와서 그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전쟁중 교수의 한 저술이 학계에서 비평되였었다는것을 학생들은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에 와서까지 지탄의 대상으로 된다는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 더우기 그것으로 하여 신망높은 교수를 교단에서 밀어내다니… 그럴수 없다.
학생들속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그 뒤숭숭한 움직임을 남기고 야스이는 곧장 총장실로 향했다.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총장은 이미 문부성에서 통고를 받고있었다.
그는 이러한 교수해임문제는 엄연히 학부심사위원회가 다루게 되여있는것이 원칙인데 당국이 여기에 직접 손을 쓴데는 어떤 검은 힘이 개입한게 분명하다고 하면서 신성한 학원에 망탕 칼질을 한 권력을 규탄하며 분개하였다.
하면서도 그 《검은 힘》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것을 피했다.
총장의 방에서 나와 자기 연구실로 들어간 야스이는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있는 법학부장을 만났다.
《선생, 기를 잃지 마시오! 학문의 상상봉을 향해가는 도상에 이런저런 간난신고가 왜 없겠소. 하오만 참으로 유감천만이요. 우리가 그토록 끝까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강압적으로 생겨났으니 가슴아프오. 그러나 그 진실여부가 백일하에 드러날 날이 이제 있으리라 믿소. 그날을 위해서도 참고 꿋꿋이 이겨내기 바라오.》
환갑이 지난, 반백의 대머리를 한 법학부장은 이렇게 말하며 학부의 기둥교수인 그를 잃는것을 저으기 애석해하면서 따뜻한 고무를 아끼지 않았다.
야스이는 가슴이 미여지는듯 하였다. 학계와 법조계의 중진이며 날카로운 두뇌파인 법학부장은 야스이가 존경하는 은사중의 한사람이였다. 그의 손길아래서 대학생시절을 보내고 교수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있어 그 스승은 언제나 아득히 높이 바라보이는 존재였다. 이제 그와도 헤여져야 할것을 생각하니 야스이는 한순간 쓸쓸한 기분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부장선생님, 오래동안 저를 위해 사심없이 베풀어준 따뜻한 지도와 편달에 대하여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는 진정을 토로하며 은사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것을 보자 부장은 당황한 나머지 얼른 그의 어깨우에 두손을 얹으며 제지했다.
《무슨 소릴 하오?… 어쨌든 나도 군을 잊지 않을거요.》
여기서 잠간 지체했던 그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그간 선생이 품을 들여 진척해오던 원폭문제말이요. 이럴 때일수록 더 용감히 밀고나가야 하오.
우리 법학자들이 누구나가 마땅히 관심을 돌려야 할 중대한 사업이요. 앞으로 나도 적극 협력하겠소.》
《선생님의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참, 담당강좌의 학생들이 교실에서 선생을 기다리겠는데… 그들과 마지막으로 작별의 이야기라도 나누지 않겠소?》
떠나는 교수를 위해 부장이 일부러 마련한 자리였다.
야스이는 그 호의에 다시한번 뜨거움을 느끼며 부장을 따라 교실로 갔다.
야스이가 교실에 나타나자 학생들이 그의 앞으로 욱 하니 다가들었다. 때를 같이하여 한 학생이 격한 음성으로 물었다.
《선생님! 그게 사실입니까? 선생님이 해임됐다는것이…》
그 말에 교수는 쓸쓸한 미소로 자기를 둘러싸고있는 제자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이 젊은이들을 교실에 남겨두고 자기만이 떠나야 하는 가혹한 현실에 직면한 순간 그는 가슴이 무너지는듯 한 절망으로 별안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몸둘바를 모르고 창백한 얼굴로 서성거리는 그에게서는 좀체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자제력이 되살아난듯 비로소 교수는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사실이요.… 정말 죄송하오.…》
그 말이 떨어지자 학생들은 일제히 교수에게 매여달려 저마다 석별의 통탄과 함께 당국의 처사에 분노를 터뜨렸다.
부장이 나서서 수습해서야 교실의 혼란이 가까스로 진정되였다.
주위가 숙연해지자 야스이교수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작별의 말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나를 그처럼 믿고 사랑해주어 감사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갈려있었다.
《그러나 부끄럽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신뢰를 받을만 한 인간이 못됩니다.
금번 문부성이 취한 조치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능한 교수가 어떻게 교단에 설 자격이 있겠습니까. 바로 나의 부실한 학구적태도가 과거 사회와 민중 앞에 씻을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았던것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근엄한 표정으로 옴해있다가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뒤를 이었다.
《오늘 여러분과 헤여지는 이 자리를 빌어 내가 근년에 더욱 절감하고있는 심중의 소리를 전할가 합니다.
그것은 혁신적인 인생관을 확립하지 못한 학자의 학술연구란 〈타지 않는 불〉과 같이 사람들에게 매운 연기만 들씌우고 눈앞을 흐리게 하는 매우 유해로운것임을 통절히 체험한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탁은 여러분은 지난날의 나처럼 학문탐구를 순수 탁상세계에서만 추구하지 말고 력사의 필연적인 움직임과 밀접히 결부하여 터득해달라는것입니다. 우린 지성인이요. 행동하는 지성만이 타는 홰불이 되여 세상의 어둠을 밀어낼수 있을것입니다. 신생일본의 사회적진보를 위하여 부디 튼튼한 몸으로 공부들을 잘하길 바라오!…》
교수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그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야스이 가오루는 교단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들끓는 교실안을 바라보는 그의 두눈이 뻘겋게 달아있었다.
학생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그는 철같은 결심을 다지였다.
(이 청춘들과 겨레를 위하여 인간해방의 길을 찾아 용감히 나서리라!)
학생들과 헤여져 대학의 정문을 나서는 야스이교수의 머리에는 한 은사의 당부가 문득 떠올랐다.
《스승이 쌓은 학문의 전통에 따르려 하지 말고 자기스스로 선택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시오.》
오늘따라 그 말이 더욱 의미심장한 메아리로 그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