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편   빛나는 길

 

제 5 장

자연에 절기가 있듯이 사람의 한생에도 그 행적의 구획이 있는 모양이였다.

그러나 계절의 변화는 순환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지지만 인간생활이란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는것이 아니였다.

그것이 다 사람나름이겠지만 한번 길을 헛갈린탓으로 평생을 암중모색 방황하다 속절없이 시들어버리는 경우도 왕왕히 있었다. 허지만 그런 인생철학은 현세에 와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고도로 발전된 과학문명시대에 사는 인간이란 스스로 축적한 지성과 판단의 힘으로 갈 길을 선택하고 전진한다. 물론 그것이 순탄하지 않고 간고한 로정을 거쳐서야만 비로소 마련되는 경우도 있지만… 야스이 가오루가 바로 그러했다. 높은 지성의 힘으로 간난신고를 이겨내고 마침내 진리의 빛나는 언덕에 닿을수 있었던것이다.

하기에 가을이 오면 락엽이 지는 자연의 도태현상과는 달리 인생황혼의 쇠잔이란 모르고 그는 언제나 젊음을 잃지 않고 갈수록 혈기에 넘쳐있는것이였다.

도꾜에 돌아온 야스이 가오루는 정녕 혈기찬 장년의 몸이나 된듯 려행의 피로도 모르고 련일 래방자들과 접촉하는 한편 동료들을 찾아 바쁜 걸음을 놓아나가며 하루하루를 매우 긴장하게 보냈다.

그날도 그의 응접실에는 밤이 깊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지금 그 방에는 야스이를 둘러싸고 사도미 아즈시교수와 하시모또 스스무론설주간이 벌써 초저녁부터 자리를 같이하고있었다.

하시모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조과련》에 망라되여 그 핵심성원으로 활동하고있는데 그간 그의 신상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하시모또는 올봄에 방조기자단의 명의로 공화국을 다녀왔다. 당시의 견문기를 그는 자기 신문에 여러 회에 걸쳐 실어 구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었다.

《맑은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의 열흘》이라는 제목의 그 탐방기사의 머리글에서 《기자는 보고 확인하고 느낀 모든것을 현실적으로 진실하게 쓰고 재현하여야 한다.》라고 쓴것처럼 그의 평소의 《육안으로 보는 사상》이 그야말로 상당히 은을 낸 모양이였다.

《특색있는 정치, 자애에 넘친 정치라…》

김일성주석의 접견을 받은 이야기를 방금 야스이로부터 장시간 청취하고난 하시모또가 감탄어린 어조로 문득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이제까지 긴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야스이의 회견담을 열심히 듣던 그 자세를 비로소 허물고 조용히 쏘파에 등을 기대는 하시모또의 얼굴은 커다란 감동에 젖어 벌거우리하였다.

사도미교수는 두눈을 지그시 감고 잠자코 있었다. 평상시 흥분에 잠길 때면 그 감정을 깊이 음미하듯 그는 침묵을 지키기가 일쑤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고개를 수굿하고 묵묵히 방안을 거닐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과 좌석을 같이했던 그날이 친근한 벗들과 자리를 한 이밤에는 한층 감회깊이 되살아올라 그는 마음의 설레임을 진정할 길이 없어 가만히 앉아있을수 없었던것이다.

숨소리조차 죽은듯 한 방안에는 한동안 숭엄한 기운만이 흘러넘쳤다.

이윽고 아까의 독백의 연장인듯 하시모또가 먼저 누구에게라 없이 말을 떼였다.

《내 전에 조선방문시 매우 어려운 정치문제가 그 나라에서는 가장 빛나게 해결되여있는것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해했었는데 야스이군의 말을 듣고서야 특색있는 정치, 자애에 넘친 정치란것이 어떤것인가를 대체로 알게 된것 같소.》

《저는 이미 그 점에 대하여 어지간히 인식을 하고있었지만 오늘 한층 깊이 깨닫게 되였습니다.》

사도미가 침묵에서 깨여나 머리를 들고 하시모또의 의사에 응대하며 하는 소리였다. 그는 일단 말문을 열자 학자다운 언변으로 돌아와 그 론거를 제나름의 견해로 피력하며 심화시켜나갔다.

김일성주석께서 사람은 자주성을 가진 사회적존재라고 가르쳐주심으로써 사회관계속에서 가장 발전한 존재로서의 사고하고 활동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본질적특징이 규정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사람의 로동을 놓고보아도 알수 있다고 봅니다. 선생들도 아시는바와 같이 로동은 적극적인 존재인 사람이 자연을 맹목적으로가 아니라 목적의식적으로 길들이고 개조하는 위력한 수단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얼마전에 나온 쯔루시마 사쯔레이교수의 저술 〈농업을 중심으로 본 조선사회주의건설의 현 실태〉에서도 잘 론증되여있지만 바로 그 나라의 정치의 위대성은 사람이 모든것의 주인이며 모든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철학원리가 백방으로 구현된 결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의 의식을 최상으로 계발시킨 정치, 그게 아닙니까.》

사도미는 자기가 터득한 문제들에 대한 좌중의 의향을 타진하려는듯 잠시 입을 다물고 담배를 붙여물었다.

야스이와 하시모또는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전적인 공감을 표시했다.

사도미는 얼마전 《로동의 진가》라는 제명의 부피 큰 학술론문을 집필하였었다. 그 론문의 골자는 그자신이 김일성주석의 로작을 연구하고 조선방문에서 보고듣고 체험한데 기초하고있는것이였다.

그는 대학의 교단에서 이미 학생들에게 《로동의 진가》에 대하여 강의한바도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것이 중점적으로 이야기되였다.

《만일 사람에게 자주성이 없다면 동물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은 주위환경에 완전히 얽매여있으며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때에는 사멸하고 말기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자연을 길들이고 주위환경을 자기에게 리롭게 개조할 능력을 가지고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인간로동의 력사, 인간활동의 력사는 자연과 주위환경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부단한 투쟁의 력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의 생산활동력사는 자주의식이 자라나는 력사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야스이는 사도미의 그 저술을 누구보다 먼저 읽고있었다. 그것을 접하고 제일 기뻐한것도 그자신이였다. 한 제자의 괄목한 발전에 놀라왔고 한편 믿음직한 동행자를 가지게 된것이 못내 만족했던것이다. 지금 이 좌석에서도 그는 얼마나 높은 경지에 서서 모든 리치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분석하고있는가.

언제보나 드팀이 없는 론리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것이다.

야스이는 그 제자에 대한 신뢰감이 날이 갈수록 한층 두터워지는것을 새삼스레 가슴후더이 느끼면서 쏘파에 와앉으며 뇌였다.

《옳은 말이요. 사도미교수가 지적한것처럼 김일성주석님의 사람중심사상이 낳은 정치요.

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금번 방문에서 그것을 더욱 강하게 느꼈소. 그 나라에서는 마치 연풍호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가 열두삼천리벌을 적시듯이 주석님의 자애에 넘친 정치가 온 나라 전체 인민을 적시고 그이의 따사로운 품속에 안기고있는것이였소.》

《바로 그게요. 사람을 가장 아끼는 정치, 그 〈연풍호의 생명수〉가 그 나라의 참모습이라 생각되오. 하기에 인민들이 자기 수령을 어버이로 칭송하며 따르고 높이 받들었기에 세기적인 변혁과 기적을 이룩할수 있었고 사회주의모범의 나라를 일떠세울수 있지 않았겠소.》

하시모또는 언론인다운 론조로 이렇게 자기 견해를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야스이가 그의 고조된 기분에 말려든듯 저으기 억양이 높은 어조로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 평양에서 조선인민군협주단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그 공연가운데 녀성합창으로 부르는 〈수령님 밤이 퍽 깊었습니다〉라는 노래를 듣고 가슴이 마냥 후더워지는 깊은 감동을 받았소.

인민을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고계시는 수령님께서 다문 얼마간이라도 푹 쉬여주시기를 바라는 인민들의 간절한 념원이 그 노래에 얼마나 절절하게 담겨져있었는지…

당신들도 일치하게 공감하고있는것처럼 김일성주석을 자애로운 어버이로 열렬히 흠모하고있는 조선인민의 심정을 그때 나는 진심으로 리해하게 되였소.

더우기 그분을 직접 만나뵈왔을 때 그 노래의 감정이 한층 뜨겁게 안겨와 주석님앞에서 격정에 못이겨 그만 눈물이 앞을 가리우는것을 어쩔수 없었다오.》

그날의 감동이 되살아오르는듯 야스이 가오루의 희멀쑥한 얼굴엔 삽시간 홍조가 비꼈다.

…밤도 어지간히 깊어졌다. 그러나 세 사람은 시간의 흐름같은것은 안중에도 없는듯 갈수록 이야기판을 크게 벌려나갔다.

어느덧 손님들도 돌아가고 자정도 훨씬 지났건만 야스이는 서재로 건너가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그토록 활기에 넘쳐있는 그의 몸에 은연중 무서운 병마가 침습하고있는것을 그자신이 어찌 상상이나 할수 있었으랴.

그해 11월, 야스이 가오루는 열번째로 진행되는 도꾜에서의 주체사상과학토론 전국집회에서 《불멸의 주체사상에 대한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연구를 깊이하여 그 위대한 진리를 력사의 창조자인 인민대중속에 널리 보급하자》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고음에 가까운, 창창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매번 그러했듯이 청중들의 가슴마다에 삶의 보람과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헌데 그토록 혈기왕성하던 로학자가 새해의 정월중순에 이르러 갑자기 중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복부에 일어나기 시작한 상서롭지 않은 증세가 건강을 위협하고있다는것을 그자신은 은근히 낌새차리고있었다. 그러나 인간해방의 길을 찾아낸 희열과 그 길로 사람들을 인도할 오직 그 한마음으로 낮과 밤을 보내는 그에게 있어 자기 신체의 이상한 징후같은것은 전혀 관심하지 않았었다.

헌데 그 병마가 이렇게 빨리 육신을 쓰러뜨리다니…

주체사상국제연구소의 창립을 앞두고 많은 일을 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병원의 침상에 눕게 된 야스이 가오루의 가슴은 안타까움으로 하여 마구 타들었다.

그러나 그가 몽롱한 의식속에서 그것을 깨닫기 시작한것은 시간이 퍽 흐른뒤였다.

병원으로 실려올 때 야스이는 혼수상태에 놓여있어 아무것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였던것이다.

무언가 날카로운것이 눈두덩을 몹시 자극하는것을 악몽속에 느끼며 야스이 가오루는 무겁게 눈을 떴다. 형광등의 찌르는듯 한 불빛이 이지러진 동공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얀 천정, 은은히 풍겨오는 소독약냄새… 그것을 감각한 순간에야 로학자는 여기가 병원이라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을가?… 참 모를 일이다. 그래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였나말이야.)

죽은듯이 누운채 그는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애써 진정시키며 생각해보았다.

조직위원회사무실에서 창립대회 기본보고문을 쓰려고 책상머리에 앉아있었던것만 어렴풋이 떠오를뿐 그후의 일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모양이다.…

차츰 시야가 틔우면서 병실안의 륜곽이 뚜렷해졌다.

《여보, 좀 어떠세요? 정신이 드세요?》

안해 다즈꼬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제일먼저 주위의 무거운 공기를 흔들어 깨우며 울렸다. 다음으로 사도미 아즈시와 한 젊은이의 근심어린 얼굴이 정적속에서 열심히 자기를 지켜보고있는것이 알렸다. 젊은이는 《자주의 회》회원이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조용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누구에게라 없이 간신히 입을 열어 신음하듯 뜨직뜨직 외웠다.

《걱정마오. … 별일… 없을거요.…》

《선생님, 힘을 잃지 마십시오.》

《마음을 든든히 가지십시오. 뒤일은 우리가 해나갈테니 아무 념려마시고 치료를 잘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의 간절한 당부에 야스이 가오루는 다소 원기를 얻은듯 베개우에서 머리를 들고 몸을 일으키려고 안깐힘을 썼다.

그러는 남편을 다즈꼬가 얼른 두손으로 부축하였다. 로학자는 간신히 몸을 가누고 일어나앉더니 움푹 패여들어간 두눈을 슴벅이며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것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심한 동통에 낯을 일그러뜨리며 침상에 쓰러졌다.

담당주치의가 급히 달려와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런 다음 주위의 사람들에게 선고하듯 말했다.

《당분간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이제부터 며칠동안 환자와의 면회를 일체 삼가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엄엄하게 일러놓고난 의사는 다즈꼬부인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사모님만은 주인을 지켜 병실에 남으셔야 하겠습니다. 그외 다른분들은 곧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의사의 명령에 따를수밖에 없었다. 사도미 아즈시와 젊은이는 부득이 로학자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들은 다즈꼬부인에게 몇가지 부탁을 남겨놓고 환자를 다시한번 돌아본 다음 무거운 걸음으로 병실을 나갔다.

야스이 가오루는 처음 중한 간장병으로 진단되였으나 그후 여러가지 의학적검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확진된것은 단순한 간염이 아니라 외과적처치와 수술을 요하는 난치의 병이라는것이 판명되였다.

그것이 현대의학에서도 어쩔수 없는 가장 악성적인 취장암이였다는것을 본인은 물론 그의 안해가 알게 된것은 썩 후날에 가서였는데 병원당국으로서는 그들의 타격적인 마음의 부담을 고려하여 얼마간은 비밀에 붙였던것이였다.

허나 구태여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야스이 가오루는 자기가 다시는 건강이 회복될수 없는 몸이라는것을 이미 예감하고있었다. 돌려세울수 없는 이 엄연한 처지에서 로학자는 난생처음으로 《죽음》이라는 숙명적인것을 체험하였다.

그 옛날, 사도미 아즈시도 겪어본 일이였다.

《옥쇄》의 전투명령을 받고 공중비행의 기체안에서 그는 《생명의 영원성》을 주장한 스피노자와 에피크로스의 말이 생각되였노라고 했었다.

야스이는 그 악몽과 같은 시절의 일이 떠오르자 쓰거운 감정과 함께 인생무상에 대하여 새삼스러운 정회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 철인들의 설유는 어쨌던 그는 제나름의 《고집》으로써 추호도 락심하지 않았다. 다만 목전에 박두하고있는 중대사를 치르지 못한채 병상의 몸이 된것이 못내 한스러울뿐이였다. 그러나 《최후》의 시각까지는 아직 시공간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육체적고통을 덜어주는 유일한 《명약》이 되여 주었다.

그 마지막시각까지 못다한 일을 기어이 다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이 모든 아픔을 초월하여 그를 한없이 고무하며 힘을 안겨주었다.

야스이 가오루가 병원의 침대에 누운지도 어느덧 한주일이 되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혹한의 삭풍이 창문에 부딪치며 휘몰아쳤다. 정월달도 저무는, 추위가 한창 고비에 이른 때였다. 그러나 병실안은 훈훈했다.

야스이 가오루는 회오리바람에 창문이 달그랑거리는 소리를 듣고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방금 꿈속에서 깨여났다. 지금도 귀전에는 《주체사상이여! 전세계에 뿌리를 내리라!》하고 국제토론회의 연단에서 대양주의 한 대표가 소리높이 웨치던 목청이 쟁쟁히 울리고 있었다. 그 격조높은 호소는 곧 야스이 가오루가 신념으로, 사명으로 언제나 깊이 간주하고있는것이였다.

야스이는 그 소리에 힘을 얻기나한듯 움씰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그러는 남편의 곁으로 안해가 다가섰다. 순간 다즈꼬는 당황했다. 여느때와는 달리 남편의 모습이 심상치 않게 여겨져서였다. 입원한 이래 이때까지 그가 이전의 꿋꿋한 기상으로 되돌아와 본적이란 한번도 없었다. 헌데 지금 남편은 마치나 오랜 궂잠에서 문득 깨여난듯 전에 없이 얼굴에 생기가 피여나있었다.

련 며칠을 꼬박 침상에 못박혀있던 남편이였다.

어쩌다 간혹 병세가 즘즛하여 몸을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도 이어 밀려드는 동통에 퍼더버리기가 일쑤였었다. 그랬던 그가 놀라웁게도 뻐젓이 일어나앉았으므로 다즈꼬는 기쁜속에서도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가만 누워계세요. 그러다 또…》

다즈꼬는 남편을 부축하며 걱정부터 앞세웠다.

그러나 야스이 가오루는 의연히 자세를 허물지 않고 꿋꿋했다.

《아니, 이젠 좀 일을 할수 있을것 같소.》

《일이라뇨?! 무슨 그런 생각을… 원 당신도 참…》

다즈꼬는 기가 찼다. 그간 포도탕과 약만으로 근근히 연명하며 변변히 음식을 입에 댈수 없던 쇠약한 몸으로 무슨 일을 할수 있단 말인가. 허나 일단 마음먹으면 좀체로 물러나지 않는 그의 성미를 너무나 잘 아는터여서 더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다즈꼬는 한숨을 쉬며 조용히 물었다.

《그럼 뭘 좀 잡수셔야죠?》

《음, 그렇게 합시다.》

그는 순순히 응해나섰다. 안해가 차려주는 음식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통 구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의 낟알 한알한알을 음미하듯 입안에서 굴리며 어느덧 무슨 골똘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의 뇌수가 활동하는 한 그는 한시도 사색을 멈추는 법을 몰랐다. 그것은 이 로학자가 학문의 세계에 몸을 담그기 시작한이래 중단하지 않고 지속되여오는것으로써 그의 생존방식의 한 수단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그 사색이 한때나마 침체상태에 놓여있던것이 새삼스럽게 돌이켜지자 그는 자기의 나약한 육신이 원망스럽게 생각되였으며 한편 화가 나기도 했다.

《여보, 쓸것을 좀 갖다주오.》

야스이 가오루는 수저를 놓으며 안해더러 일렀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약효과의 탓인가?… 오늘은 기분이 멀쩡하다니까…》

시름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는 안해를 생각해서 일부러 하는 소리였다.

《그래요, 참말 다행이군요. 그렇다고 절대로 무리는 하지 마세요. 제발 부탁해요.》

다즈꼬부인은 《절대》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며 간절히 당부하고나서 종이와 펜을 남편의 손에 쥐여주었다.

로학자는 펜을 들다가 문득 안해를 돌아보며 부탁했다.

《조직위원회사무소와 련락을 취해야 할 일이 있는데 병원측에 얘기해서 이 방에다 전화기를 놓도록 해주오.》

그 말에 다즈꼬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문을 열고 병실을 나갔다.

야스이 가오루는 베개를 책상삼아 그 우에다 원고지를 펼쳐놓고 이미부터 착상해온 글을 한자한자 메꾸어나갔다.

《주체사상을 따라배우자!》

그는 시대와 인류 앞에 고하고싶은 이 심장의 웨침을 그대로 제목으로 앉히고 국제기구의 력사적인 창립대회가 열릴 그날을 눈앞에 그려보며 써내려갔다.

《존경하는 조직위원회 위원들!

친근한 동지들과 벗들!

우리모두가 오래동안 바라고 기다리던 주체사상국제연구소창립대회는 드디여 오늘 그 막을 올리게 되였습니다.》

정작 이렇게 서두를 떼여놓고보니 은근히 념려되던바와는 달리 의외에도 펜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글을 낳아주었다.

그는 먼저 주체사상이 창시된 경위와 그 사상리론적내용 및 생활력을 개괄한 다음 새로 창립될 국제연구소의 사명과 목적, 그 의의 등을 단숨에 서술해나가다가 그만 펜대를 멈추더니 별안간 원고지우에 얼굴을 묻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돌연히 일어난 환부위의 동통과 때를 같이하여 현훈증이 병발하면서 또다시 의식을 잃게 하였던것이다.

이때 병실에 들어선 다즈꼬는 남편이 중태에 처해있는것을 보고 황급히 의사를 찾아 뛰쳐나갔다. 급히 달려온 주치의와 간호원은 서둘러 응급처치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환자는 아무것도 모르는듯 그의 입에서는 가는 신음소리만 새여나왔다.

로학자의 파랗게 질린 수척한 얼굴에는 콩알같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내돋아있었다.

그렇게 쓰러진채 그는 옹근하루 혼수상태에서 깨여나지 못했다.

야스이 가오루가 병상의 몸이 된지도 어느덧 두달이란 나날이 흘러 바야흐로 봄이 다가오고있었다.

계절의 변화가 그의 병세에 영향을 주었는지 요즘에 와서 로학자는 퍼그나 기력이 되살아났다. 아직은 바깥출입을 하리만치 자유로이 운신할수 있는 형편은 아니였으나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로나마 외부와 련계를 취할수 있게 되였다.

주체사상국제연구소의 창립대회날도 이제 불과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긴요한 시기에 건강이 다소나마 호전된것이 그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

병원측에서도 외출은 허용하지 않았으나 면회인들과의 접촉만은 승인했다.

사도미 아즈시와 하시모또가 자주 다녀갔다.

그들은 조직위원회 위원장인 야스이 가오루에게 창립대회준비와 관련한 지시를 접하기도 하고 그 진척정형을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원고며 문건들을 검토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문병객들의 출입도 자연히 빈번하게 되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일찌기 학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었다. 게다가 그는 사회적으로 국제법학회 간사장 겸 리사, 일본국제정치학회 리사, 국가학회 회원, 국제법학회 명예회원 등을 력임하고있는터여서 찾아오는 문병객도 태반이 학자와 정치인들이였다.

하루는 구로다 겐이 예고없이 불쑥 병실에 나타났다. 야스이 가오루가 창립대회의 보고문의 마감을 한창 집필하고있을 때였다. 실내에는 남편의 원고를 정리하는 다즈꼬만이 있었다.

구로다 겐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뭇 놀라운 기색부터 지었다.

《자네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였나? 그리도 강철같던 사람이 병고에 시달리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민중을 위하여 그렇게도 헌신하던 투사가 말일세.》

야스이 가오루의 침상곁으로 다가선 구로다 겐은 동정과 련민에 젖은 저으기 측은한 어조로 말하며 허리를 굽혀 환자의 여윈 손목을 한동안 조심스레 어루쓰다듬었다.

그러는 상대를 야스이 가오루는 말없이 쓸쓸한 미소로 대면했다.

이윽고 구로다 겐은 머리를 들더니 다즈꼬부인을 향해 돌아섰다.

《아주머니, 그간 마음고생인들 오죽 많았겠습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소위 친구라는 자가 이렇게 뒤늦게야 찾아왔으니 인사불성이올시다. 관대를 바랍니다.…》

전에없이 자신을 낮추며 침중하게 나오는 구로다 겐의 거동에 다즈꼬는 공연히 낯을 붉히며 잠시 어쩔바를 모르고 서성거리다가 그에게 의자를 권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아니, 별 말씀을 다하시네. 저이를 생각하여 이렇게 찾아주신것만도 고마와요.》

다즈꼬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려고 얼른 자리를 떴다.

구로다 겐은 여전히 사려깊은 표정으로 야스이 가오루를 마주하며 의자에 앉았다.

《이제 오다 병원측에 들려 물어보니 차도가 있다고 하던데 그래 좀 어떤가?》

《공연히 걱정을 끼쳐 안됐네. 보다싶이 이젠 이렇게 몸을 가늠할수 있게 되였네.》

야스이 가오루의 서느러운 눈길이 소탁에 널려있는 원고지에 쏠려있었다.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네. 기쁘오.》

그제서야 구로다 겐의 넙적한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는 소탁우 원고에 주의가 미치자 갑자기 말을 바꾸어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자네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병마에 사생이 희롱당하는 그런 때조차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다니까. 그러니 어떻게 병구완인들 제대로 되겠소. 쯔쯔…》

구로다 겐은 저절로 관심이 쏠려 원고지를 집어들고 훑어보게 되였다.

《주체사상의 불패의 기치는 우리의 광활하고 보람찬 앞길을 밝혀주고있으며 이 길을 따라 나아가고있는 우리들에게 용기와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고있습니다. 이 기발을 튼튼히 틀어쥐고나아가는 인민들에게는 언제나 승리와 영광이 있을것입니다.

우리모두 주체사상이 가리키는 자주의 길을 따라 인류의 휘황한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야스이 가오루자신이 창립대회연단에서 할 그가 방금전에 써낸 기본보고문의 마감부분의 한구절이였다.

구로다 겐은 그 원고를 한동안 손에서 놓지 못했다.

자주의 길, 휘황한 미래… 그는 혼자속으로 외우고있었다. 야스이 가오루가 한생을 바쳐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인간해방의 길이 무엇이였던가를 이제는 똑똑히 알수 있을것 같았다.

무릇 사람이란 운명이 경각에 닿았을 때 참모습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까지는 자기 정체를 숨기며 살아왔단 말인가.

구로다 겐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도 모를 의혹이 일면서 별안간 사색이 혼돈되였다.

그는 손에 들었던 원고를 슬며시 소탁우에 놓았다. 그리고 병실로 들어오던때보다 한층 진중한 기색으로 돌아가더니 굵고 탁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번져나갔다.

《내 오늘 새삼스럽지만 자네에게 용서를 빌겠네. 과거에 좌도 우도 아닌, 색이 불투명한 인간이라고 하며 자네를 모해해온 사실을 말일세. 이게 다 나의 인식부족에서 오는 경거망동이 아니고 무어겠나. 로년에 와서야 비로소 심심히 참회하게 되는 이자를 너그러이 리해해주길 바라네.》

이렇게 장황설을 늘이고난 구로다 겐의 얼굴에는 자책의 빛이 짙게 어려있었다. 그렇다고 그자신이 야스이 가오루의 지향에 동조하거나 방금 본 원고의 글에 감화된것은 결코 아니였다. 지난날 그를 무당성적인 모호한 인간으로 치부해온 자신의 근시안적인 판단을 스스로 타매하는데서 생긴 일종의 뉘우침에 불과한것이였다. 그러한 사고방식에 한때나마 잡혀있었다는것은 한생을 정치학을 전공해온 학자에게 있어 확실히 치명적인 약점이라 할수 있었다.

일전에 하시모또 스스무가 평하던것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되였다. 십중팔구 운명을 돌려세울수 없는 그 무서운 《암》으로 하여 모름지기 림종의 시각이 박두함을 예감할 처절한 속에서도 야스이 가오루는 어떻게 처신하고있는가.

그는 어떤 역경도 고통도 밀어버리며 자기가 택한 길을 한시도 멈추지 않고 굳건히 나가고있는것이다.

《자네야말로 불사신이네! 병상의 몸이면서도 의연히 투지만만한것만 봐도 말일세. 어쨌든 탄복하오!》

구로다 겐은 병실안이라는것도 잊은듯 연방 어성을 높여 말했다.

이제까지 침묵으로 대하던 야스이 가오루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무 그러지 마오. 당신이 오늘은 별로 수다를 부리며 입담이 많아졌구만. 무슨 죄를 졌다고 용서요, 뭐요 하면서까지…》

《수다를 부린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도 알지만 난 원래가 허세나 공담을 모르는 사람이야.》

《아니, 그런 뜻에서 한것이 아닐세. 내가 마치나 당장 염라국에라도 입문하는것처럼 자네가 소란을 피우니까 해본 소리지. 허허…》

야스이 가오루는 오래간만에 소리내여 웃었다. 웃음으로나마 지금의 복잡한 심사를 다소 덜어버리고싶었다. 구로다 겐의 말 한마디한마디가 그에게는 어쩐지 순수한 기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다.

구로다 겐은 그의 웃음을 어줍은 미소로 대하며 별안간 딴 사람처럼 변한듯 저으기 억양을 낮추며 말했다.

《자네가 가는 길에 대하여 나는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가리고싶지 않네. 전에도 말한바이지만 사람마다 제나름의 철학관이 있고 생활신조가 있기 마련인데 무엇때문에 그런 문제를 가지고 가타부타 론하겠는가?…》

야스이 가오루는 숙연한 자세로 유리창너머 먼 푸른 공간에 시선을 던지고있었다.

조용한 실내에는 구로다 겐의 목소리가 간단없이 울렸다.

《허나 오늘은 내가 여태 의문에 붙였던것을 솔직히 말하겠네. 병석에 있는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한다는게 지나친것 같소만 피차 인생말년의 고개에 올라선 처지로서 서로 심중의 의혹을 가셔내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네.》

야스이 가오루는 유리창너머에서 시선을 떼고 새삼스럽게 구로다 겐을 바라보았다.

무슨 의혹을 가셔내자고 이토록 사설을 펼치는것일가? 평소의 도고한 태도와는 달리 사뭇 온건하게 처신하며 하소하듯 하는 구로다 겐의 거동이 그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구로다 겐의 의혹이란 딴것이 아니였다.

《자네는 한생을 물질의 일차성을 주장하는 변증법적유물론을 따르고 숭상해오지 않았나? 헌데 어째서 인생의 조락기에 와서 하필 그와 상반되는 주체철학편으로 돌아서게 되였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소.》

《무얼, 돌아섰다고?》

야스이 가오루는 상대방을 주시했다.

구로다 겐은 담담한 어조로 계속했다.

《주체철학이란 사람위주의 철학이라고 하지 않소. 이를테면 의식의 총체인 인간을 위주로 하여 객관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한다는것인데 그자체가 일종의 관념론이 아니겠소. 그 주체사상을 연구보급할 국제기구를 도꾜에 설치하는 일에 자네가 앞장에 서있다니 내 어찌 놀라지 않겠소.》

《음…》

야스이 가오루는 랭소를 지었다.

주체철학에 대한 옳은 인식을 가지지 못한탓에 그런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볼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구로다 겐의 말을 그냥 스쳐지날수는 없었다. 그가 이런 론조를 벌린 진의도가 딴데 있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흔연히 말을 떼였다.

《당신은 주체철학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을 가지지 못했소. 주체철학이 사람위주의 철학인것은 사실이요. 그런데 주체철학이 사람위주의 철학이라는것은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 세계에 대한 관점과 립장을 밝힌 철학이라는것을 의미하오. 관념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단 말이요.》

야스이는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것을 늦추려는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했다.

《당신은 날더러 유물론으로부터 돌아섰다고 하는데 그건 천만부당한 억측일세. 나는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는 유물론자일세. 유물론자이기에 주체철학을 신봉하게 된것일세. 주체철학이야말로 자연과 사회는 사람이 지배하며 사람에 의하여 개조된다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밝힘으로써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 력사의 주인으로 등장한 우리 시대의 철학적과제를 빛나게 해결하였네.

구태여 더 론하고싶지 않지만 그래 당신이 그걸 분별 못해서 관념이냐, 유물이냐 하고 새삼스레 따지는것이 아닐거네. 하물며 정치학자인 자네가 말일세.》

야스이 가오루는 여기서 일단 말을 끊었다.

보수적이며 국수주의자인 구로다는 인민들이 견결히 반대배격하는 《일미안보조약》의 적극적인 지지자의 한사람이였다. 평화와 사회의 진보를 파괴하고 저애하는 그 조약을 한사코 배척하는 민중의 의사를 무시하는 그와 같은 인간에게 사람중심의 철학을 력설한다고 통할리 만무였다. 그러나 야스이 가오루는 말하지 않고는 못견디였다.

《사람이 자연과 사회를 변혁하고 물질의 부를 창조한다는것은 당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일이 아니겠나.

바로 주체철학은 그 만물의 창조자인 사람을 중심에 놓고 모든것을 정식화한 학설이란것을 다시금 강조하는바이네. 그러면 내가 왜 그 길에 들어서게 되였는가를 십분 리해하게 될거네.》

쇠약한 몸으로 긴 동안을 손님을 상대하여서인지 그는 신열을 느끼며 약봉지에 손을 뻗쳤다.

구로다 겐은 엉거주춤 일어나 탁상우에 있는 주전자를 들고 종발에 물을 따라 야스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 공연한 소리를 해서 환자의 신경을 건드렸나 보오. 미안하이. 어서 침상에 편히 누우라구.》

《일없네. 가끔 열이 나군 하지.》

야스이 가오루는 침대에 기대였다.

《여하간에 정한 길을 잘 가세. 자네가 가는 길에 영광만이 있기를 바라네. 부디 병치료를 잘하게. 하루속히 건강이 회복되기를 충심으로 비네.》

이런 말을 남겨놓고 구로다 겐은 조용한 걸음으로 병실을 떠나갔다.

야스이 가오루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말없이 그를 바래웠다.

병원의 현관문밖으로 나선 구로다 겐은 자동차에서 내리는 하시모또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것처럼 우뚝 서서 서로 한동안 얼굴을 바라보았다.

《야스이를 만나러 왔댔나?》

하시모또가 먼저 말을 건넸다.

구로다는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뇌였다.

《야스이가 참 안되였소. 그토록 찾던 길이 어슬막에야 가서 열렸는데 쓰러지다니…》

그 어떤 중압감에서 벗어나보려는듯 구로다의 입에서는 신음소리와 같은 장탄식이 새여나왔다.

《걱정말게. 굳은 뜻은 바위도 뚫는다지 않나. 그 사람은 이제 꼭 일어날걸세.》

구로다 겐은 엉거주춤 서서 하시모또의 뒤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제까지 야스이 가오루가 한 말에 하나도 반박할수 없었던 자신을 문득 깨달았다.

순간 알지 못할 쓰거운 패배감이 불쑥 머리를 쳐들면서 급기야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자신의 모순된 감정에 환멸을 느끼며 못박힌듯 굳어져버렸다.

(야스이는 진리앞에 얼마나 투철한 사람인가. 정말 바위도 뚫을수 있는 옹고집쟁이야. 그는 자기가 택한 길을 언제나 동요없이 굳건히 걸어나갔지. 누가 뭐라 하든간에…

헌데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지향과 목적을 향해 살다가 인생황혼에 도달했는가.

시세에 편승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생이란 도래할 래일의 력사의 흐름을 지각할수 없는 무맥한 존재란 말인가.…)

구로다 겐은 오늘의 지점에 서고보니 새삼스럽게 야릇한 허무감이 가슴을 허비면서 시야가 온통 흐리멍텅해졌다.

그는 한동안 망연히 서있다가 성난듯 발길을 떼였다. 저절로 어깨가 처졌다.

터벅터벅 병원마당밖으로 걸어나갔다. 어쩐지 썰렁한 기분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동쪽으로 면한 병실의 3층에서는 아침마다 해돋이를 맞이할수 있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몸이 허용되는 한 새벽이면 의례히 침상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서 우주의 준엄한 법칙이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군 하였다.

그날아침에도 미풍에 하늘하늘 춤추는 카텐을 선홍빛으로 물들이며 어김없이 해가 솟아올랐다.

봄기운이 완연히 서린 누리에 찬란한 빛살을 뿌리며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이 이 아침따라 그의 눈에는 유난히도 장엄하게 안겨와 몸도 마음도 경건한 정으로 휩싸이게 하였다.

어제 야스이 가오루는 칠십정년기를 맞이한 교수들이면 누구나가 할것없이 겪어야 할, 교단을 하직함에 앞서 진행하는 최종강의를 했었다.

그 마지막강의는 대학교수로서의 최후를 장식하는것으로서 오랜 교단생활의 총화라고도 할수 있는 매우 뜻깊은것이였다.

대학당국은 각별하고 두터운 조치로서 이 로교수의 최종강의를 법학부의 행사로 정해주었다.

외출을 엄격히 금지시켜오던 주치의사도 로교수를 생각하여 오전의 한때나마 그 강의에 출연하는것을 특별히 허가해주었다.

도꾜대학과 호세이대학에서의 장장 오십년가까운 교단생활이 오늘로서 그 종지부를 찍고 명예교수가 되는 마당에서 그의 감개는 실로 컸다.

야스이 가오루는 그간 병상에서 준비해온 《사회과학과 인간해방》이라는 기본제목에다 《나의 생과 학문의 자취를 돌이켜보며》라는 부제를 단 강의안을 들고 오래동안 떨어져있던 교단에 섰다.

장기간 병고에 시달려온 흔적이 력력한 백발의 로교수를 대하는 학생들은 너나없이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비록 고령의 몸이였으나 언제나 패기와 정력을 잃지 않고 완강한 기개를 보여주던 교수였다. 헌데 전날의 그 모습이 일변한 허약하고 쇠잔해진 스승의 정상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에는 한없는 련민의 정이 가득 어려있었다.

또한 오늘의 이 강의가 존경하는 스승의 마지막시간이라는것을 생각하며 석별의 애석함이 한껏 젖어들게도 하였다.

그날의 로교수의 강의는 학생들이 평소에 품어오던 이 스승의 품위를 더욱 커다란 감동으로 느끼게 하였다.

그래도 두눈의 정기만은 예나 변함없이 빛나는 야스이 가오루교수는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향해 마지막강의의 한대목을 이렇게 말했다.

《…내 몸에 로쇠와 병의 그림자가 가차없이 파고들게 되면서부터 나는 지난날보다 더욱 억세게 자기 일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파란많던 생을 든든히 받들어준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남기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결심을 강하게 품게 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응당히 다하여야 할 도리이고 책임인것입니다.》

비단 육신만은 불가항력적인 힘에 시들었어도 유난히 독특하게 울리는, 변하지 않는 교수의 그 목소리에서 학생들은 그가 방금 말한 《뜻있는 일》이라는것이 무엇인가를 대번에 짐작할수 있었다. 정치와 법학을 전공하는 학도들이 그 교수의 사상적동향이나 현세기의 추이를 어찌 모를수 있으랴.…

야스이 가오루는 자기의 강의를 열심히 청강하던 제자들의 모습을 찬연한 해돋이의 빛발속에서 하나하나 그려보며 이윽토록 창가에 머물러있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전화기앞으로 다가가 국제전신국을 찾았다. 뻬루와 오스트리아를 각각 신청했다. 모름지기 며칠후에 열리게 될 주체사상국제연구소 창립대회에 헤나로 까르네로 체까와 한스 클레카츠키가 참가하리라는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날 행사의 만전을 위해서 그들과 련계를 취하고싶었던것이다.

그간 진척시켜온 대회준비가 이제는 거의 완료단계에 들어서고있다. 회의장, 래빈들의 숙소, 행사진행조직, 제반 문건들… 그 모든것이 다 유감없이 이루어진것 같았다. 하면서도 여러 나라 대표들이 참석할 국제회의라는것을 념두에 둘 때 이 대회를 주관할 책임을 지니고있는 조직위원장으로서는 아직도 어딘가에 빈틈이 있는것만 같이 여겨져 야스이 가오루는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신청한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며 그는 탁상머리에 앉아 한 잡지를 손에 들어 이미 한차례 읽고난 그 장을 더듬어 펼쳤다.

서유럽의 한 출판사가 발행한 그 잡지에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종합대학의 한스 클레카츠키교수가 최근 기자와 나눈 대담이 실려있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그 대담에서 한 클레카츠키의 말을 다시한번 읽어보았다.

《사실 큰 나라의 지도자라고 하여 반드시 세계적인 지도자로 불리우는것은 아닙니다. 세계적인 지도자라면 적어도 정치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세계인민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 운명개척방도를 밝혀줄수 있는 위인이여야 합니다.

바로 김일성주석과 김정일동지이시야말로 그런분이십니다.

김일성주석과 김정일동지와 같으신 세계적인 령도자는 내가 알기에는 서방에도 없었고 동방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것입니다.》

오스트리아사람다운 감정이 풍부하고 자제력이 강한 클레카츠키의 침착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야스이 가오루는 곁에서 듣는것만 같았다. 이를데없이 정당한 견해였다.

그는 전에 어느 국제회의에서 클레카츠키를 만났던 일이 문득 상기되였다.

그때 그는 《위대한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석과 김정일동지께서 우리 유럽에 주신 최상의 선물》이라고 격정에 넘쳐 말했는데 그날의 그 말이 대담을 읽노라니 한층 뜻깊고 웅건한 무게로 가슴에 파고들었다. 정녕 그렇다. 량심적인 지성은 그의 말에 모두 전적인 공감을 보낼것이다.

후일에 야스이 가오루의 뒤를 이어 주체사상국제연구소 리사장을 력임하게 된 한스 클레카츠키는 벌써 20대에 법학박사칭호를 받았고 총리관방실 법무부 고문, 오스트리아중앙재판소 고문을 거쳐 1966-1970년 기간에는 사법상으로 활동하였으며 인스부르크종합대학 공법 및 정치학연구소 소장으로서 현대정치학을 연구하는데 전념하고있다.

그가 추구하는 현대정치학은 바로 주체사상의 토양에 그 터전을 두고있는것이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자기와 신념을 같이하고있는 이런 훌륭한 동지를 수많이 가지고있는것이 매우 행복하였다. 하기에 그는 그들과 항상 밀접히 련계를 취하는것을 언제나 잊지 않았다.

유우꼬가 소리없이 꽃병을 들고 병실에 나타났다.

야스이 가오루는 불시에 풍겨오는 생신한 향기를 느끼며 문득 잡지에서 머리를 들었다.

딸이 탁상에 올려놓은 청도자기에는 분홍빛의 소담한 꽃들이 활짝 피여있었다.

《아니, 매화가 벌써 만발했구나!》

야스이는 두눈을 빛내며 정겨이 딸을 돌아보았다.

부친이 중환으로 입원했다는 련락을 받고 사흘전에 먼 혹가이도에서 부랴부랴 달려온 유우꼬였다.

화색이 피여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대하자 유우꼬는 저으기 기분이 맑아졌다.

어리광을 부리고싶었다.

《아빠, 노래 불러드릴가요?》

《무슨 노랠?》

《아빠가 좋아하시는 고추잠자리…》

《응, 어서 부르렴.》

응석을 부리듯 하며 부친의 곁에 바싹 다가붙은 유우꼬는 시내물의 잔잔한 흐름소리와 같은 청을 뽑기 시작했다.

붉은 노을 아기노을…

병석의 아버지를 한때나마 즐겁게 해드리려고 늘 왼심을 쓰는 유우꼬였다.

딸의 맑은 가락은 야스이 가오루로 하여금 지나간 청춘시절과 사회운동의 나날의 일들을 조용히 돌이켜보게 하면서 마음을 후덥게 하였다.

이 며칠어간 아들 노부아끼도 그의 병상곁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그 역시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하려고 어지간히 노력하였다. 현지에서 생태록음한 새들과 곤충의 고운 소리만을 따로 골라 일부러 편성한 카세트를 돌리며 앓는 부친을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에 접촉시키려고 마음을 쓰군 했다.

《부리 부리 베루루…》

갑자기 병실안에 새소리가 울렸다.

야스이 가오루와 유우꼬는 방울의 울림같은 청아한 소리에 똑같이 창문가에 매달려있는 조롱을 올려다보았다.

며칠전 노부아끼가 아버지를 위해 아오모리의 산골에서 로획하여 가져온 쇠류리새였다.

그 날새는 조롱속 장대에 올라앉아 새파란 날개를 파들거리며 연방 고운 청을 뽑는다.

《참, 아름다운 새야. 조롱속에 갇혔어도 주눅이 드는 법도 모르고 노래만 부른다니까.》

야스이는 아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중얼거렸다.

야스이 가오루는 자식들의 그 지성에 부드러운 미소로 대하며 힘을 얻군 하였다.

딸이 부르는 노래가 자장가가 된듯 야스이는 어느새 고요한 꿈나라에 가있었다.

유우꼬는 잠들고있는 아버지의 피기없이 파리한 모습을 이윽토록 지켜보았다. 저절로 눈에 물기가 핑 돌았다. 영원토록 혈기를 잃지 않고 건강하기만을 언제나 빌며 바랐던 유우꼬였다.

한스러웠다. 그처럼 정력적이고 랑만에 넘쳐있던, 세상에 둘도 없는 귀중한 아버지에게 모진 고통을 들씌운 병마가 그지없이 저주로왔다.

밖에 잠간 나갔던 어머니가 돌아오자 유우꼬는 아버지의 이불깃을 조심스레 여며주고나서 설음이 북받쳐 병실을 뛰쳐나갔다.

매화, 살구꽃이 만발한 4월의 대동강유보도… 야스이 가오루는 그 강가를 유쾌히 거닐다가 물새의 울음소리에 스르르 눈을 떴다. 꿈이였다.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갑자기 기분이 흐려졌다. 요즘 무시로 되풀이되는 감정변화였다.

야스이는 얼마전 다잡을수 없는 심사에 못이겨 자기 마음을 록음테프에 담아 경애하는 김일성주석님께 올렸었다.

주책없는 행동같아 저으기 망설이다가 용단끝에 취한 일이였으나 막상 올리고나니 심히 자책이 컸고 후회되였다. 그이께 심려를 끼쳐드린것만 같이 생각되였던것이다.

그 일로 하여 그는 요새 하루에도 몇번 이런 무거운 심경에 처하군 했던것이다.

《여보, 주석님께서 그걸 들으시면 어떻게 여기실것 같소?》

남편의 느닷없는 물음에 주전자의 약물을 종발에 따르던 다즈꼬는 손길을 멈추고 조용히 돌아섰다. 그는 그 질문의 의도를 대뜸 알아차렸던것이다. 남편은 어제도 똑같은 물음을 했었다.

다즈꼬의 심정도 범상치 않았다. 그러나 남편을 진정시켜야 했다.

다즈꼬는 약종발을 그의 앞에 놓으며 부드러운 목청으로 속삭이듯 말하였다.

《그분께서 너그러이 대해주시겠지요.》

《그러실가?… 아무래도 경솔하게 행동한것 같소.》

야스이 가오루는 다시금 자신을 책망하였다.

그가 록음테프에 담아 올린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 저는 자기의 생애에서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뵈올수 있은것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도 많이 만났고 또 사귀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음속으로 위대한 동지이라고 깊은 존경을 담아서 부른분은 오직 김일성주석님이 처음입니다.

참말로 주석님은 희세의 위인이시고 자애로운 스승이시며 위대한 동지이십니다.

오늘 이렇게 병고에 시달리는 몸이 되고보니 주석님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해집니다.

금시라도 달려가 안기고싶고 심중에 고인 회포를 터치고싶습니다.

아, 언제면 주석님을 다시 만나뵈올수 있겠는지. 언제면 주석님의 그 따뜻하고 명철하신 말씀을 다시 듣게 되겠는지 가슴은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로운 품에 또다시 안기고싶은 불같은 갈망에 가슴을 태우다 감히 취하게 된 소행이였었다. 앓으면 동심이 된다더니 오래도록 병상에 있다보니 오매불망 흠모해마지 않는 수령님에 대한 그리움이 한없이 끓어오르는것을 참을길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거운 마음은 부탁했던 오스트리아와 뻬루의 전화가 련결되는바람에 일시에 사라지고말았다. 그는 또다시 활기가 되살아났다.

동지간의 두터운 뉴대와 친근한 감정을 한동안 전류에 부쳐 서로 교환하며 야스이 가오루는 클레카츠키와 체까와의 통화를 즐겁게 하였다.

그는 잡지에 실린 대담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노라 하며 클레카츠키에게 자기의 소감을 전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과의 통화를 성과적으로 끝내고 그가 전화기앞에서 막 돌아섰을 때였다.

총련중앙상임위원회 한덕수의장이 이미 낯을 익힌 중년의 한 수행원과 함께 입원실로 들어왔다.

그들의 뜻밖의 래방에 야스이 가오루는 기쁜속에서도 어지간히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사이도 여러차례 병문안을 왔던 그들은 바로 엊그제 다녀간뒤였다.

《바쁘신 의장님이 이렇게 자주 찾아주시다니…》

야스이 가오루는 저으기 송구한 기색을 지으며 손님들 앞으로 다가섰다.

한덕수의장은 그의 두손을 꼭 모두어잡고 《야스이선생!》하고 한마디 부르고나서 잠시 있다가 석쉼하게 울리는 특유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음성이 전에없이 흥분에 떨려있었다.

《우리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선생이 앓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매우 걱정하시면서 귀중한 약재를 보내주시였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잘해서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기 바란다는 위문의 말씀을 전해오시였습니다.》

《아니, 주석님께서… 주석님께서 그런 말씀을… 그리고 약재까지…》

야스이 가오루는 급기야 심장이 멎는듯 한 충격에 한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았다.

옆에 서있던 다즈꼬가 얼른 그를 부축해나섰다. 그 녀인의 감격에 어려 붉게 타오른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볼을 적시고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좀체로 자제력을 잃은적이 없는 야스이 가오루였다. 헌데 이 시각 그는 종시 수령님께 심려를 끼쳐드렸다는 죄책감과 함께 그이의 다함없는 은덕에 대한 크낙한 감사의 정이 한데 어울린 격동으로 하여 머리를 떨군채 자신을 걷잡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야스이선생, 어서 받으십시오.》

한덕수의장의 젖은 음성이 울렸다.

그제서야 야스이 가오루는 자신을 가다듬고 머리를 들더니 안해더러 일렀다.

《여보, 내 옷을 좀 갖다주오. 넥타이두…》

그는 서둘러 환자복을 벗고 안해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넥타이까지 단정히 매고난 야스이 가오루는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떨리는 손을 어쩔수 없이 정중히 앞으로 내밀었다.

《주석님께서 보내주신 귀중한 선물을 이렇게 받아안고보니 그이께 걱정을 올린것이 더욱 죄스럽기만 합니다.…》

그는 그만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한덕수의장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그의 온몸은 더욱 뜨거움에 휩싸여갔다.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으로부터 일본에서 보내온 한 록음테프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야스이 가오루의 육성을 담은 테프였다.

그것을 청취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시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시였다.

지난해 가을에 만나셨을 때만해도 무탈해보이던 야스이 가오루였다. 그렇게도 열정이 끓고 정력이 넘쳐보였다. 《환갑》을 쇠자면 20년이 있어야 하고 《장년기》만 해도 10년이나 남아있다고 장담하던 그가 쓰러지다니.…

그이께서는 그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으시여 그가 언제 그렇게 되였는가, 무슨 병인가고 거듭 일군에게 물으시며 오래도록 무거운 안색에서 벗어나지 못하시였다. 인류의 자주위업을 위한 성스러운 길에서 친교를 맺으신 한 동지의 불행을 두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는 수령님이시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끝내 오열을 터치였다.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지함우에 얼굴을 묻은채 오래오래 어깨를 들먹이는 그의 가슴에 언젠가 그자신이 지은 시구절이 맥맥히 고동쳤다.

        여생이 얼마인지

        헤아려 무엇하랴

        내 할일

        정성껏 다하리라

        마음 다지노라

그것은 야스이 가오루가 최종강의에서 토로한 《뜻있는 일》의 보다 새롭고 견결한 심장의 목소리였다.

《로환무책》이라고 로년의 병은 손쓸 길이 없다고들 하지만 사랑의 힘앞에서는 그런 《론리》도 통 맥을 추지 못하는것 같았다.

그것이 기적이라고 하는지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귀한 약재를 사용하면서부터 야스이 가오루의 병세는 현저히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소생의 기쁨을 안고 병석에서도 그처럼 전심전력 기울여온 일들을 힘있게 밀고나갔다.

그날은 드디여 오고야말았다.

1978년 4월, 도꾜에서는 주체사상국제연구소 창립대회가 내외의 수많은 대표들이 참석한가운데 성대히 열리였다.

《주체》라고 새겨진 커다란 두 글자에 받들려 누리를 밝히며 타오르는 홰불이 형상된 둥그런 대형화판들이 대회장의 여기저기에 걸려있었다.

수많은 축전들이 전달되고 축하연설들이 있은 후 야스이 가오루가 병상에서 그토록 고심참담 사색을 거듭하며 집필한 《주체사상을 따라배우자》라는 제목의 기본보고를 하였다.

뒤이어 헤나로 까르네로 체까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토론들이 련달아 진행된 후 참가자들의 한결같은 의사를 반영한 주체사상국제연구소 창립선언과 규칙 등을 채택하였다.

창립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골자들이 렬거되여있었다.

…자주의 세찬 조류가 막을수 없는 힘으로 밀려오고있다. 세계 수많은 나라 인민들이 자기의 민족적존엄을 지켜 싸우고있으며 자주의 길을 따라 힘차게 전진하고있다. 이것은 력사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반세기전 맑은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타오른 주체의 홰불은 오늘 자주성을 지향하는 인민들이 살고있는 그 모든곳에서 료원의 불길처럼 타번지고있다.

주체의 이 휘황한 홰불은 이 위대한 사상을 따라배우려는 인민들의 한결같은 열망에 떠받들려 더욱더 세차게 타번질것이다.

…우리는 지금 주체사상의 위력과 정당성을 리론으로만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생동한 현실로 보고있다. 위대한 사상은 참으로 위대한 현실을 낳는다.

우리는 이것을 식민지반봉건사회로부터 그것도 3년간의 전쟁에 의하여 모든것이 파괴되였던 조건에서 매우 짧은 력사적기간에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강국으로 전변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생동한 현실에서 뚜렷이 찾아본다.

창립선언은 대체로 이상과 같은 대목들을 강조하고나서 그 끝을 이렇게 맺었다.

《주체사상을 따라배우려는 인민들의 높은 기대와 관심속에 주체사상국제연구소의 창립을 선언하는 이 뜻깊은 시각에 우리는 자주성을 옹호하는 세계의 진보적인민들과 우리의 친근한 벗들에게 주체사상을 더욱 깊이 연구학습하며 자주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인류의 휘황한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앞으로 나갈것을 열렬히 호소한다.

주체사상은 영생불멸할것이다!》

순간 폭풍같은 환호가 대회장을 뒤흔들어놓았다.

《위대한 주체사상 만세!》

야스이 가오루는 의장단상에서 벌떡 일어나 두손을 높이 들어 흔들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저 웨침, 저 환희는 력사밖에 밀려났던 사람들을 세계의 주인으로, 힘있는 존재로 내세워준 위인과 그의 사상에 대한 찬가이며 조선의 영광, 세계의 영광, 인간만세의 환호가 아닌가!)

그렇다. 인간만세, 그것은 인류를 진보와 행복의 절정에 올려세워준 세기의 령도자를 칭송하는 함성이였으며 온 세상에 울려퍼지는 자주의 메아리였다.

야스이의 두눈에서는 뜨거운것이 흘러내리고있었다.

대회장에 넘치는 열화같은 숨결, 선전화며 구호들 그리고 채택된 규칙과 선언 등… 그 모든것에는 《뜻있는 일》을 위하여 대륙과 대양을 넘나들며 부단히 헌신해온 야스이 가오루의 사색과 념원, 피어린 노력이 깃들어있었다.

그가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파괴위협하는 원수폭반대운동을 민중속에 들어가 조직전개한것은 1950년대였다. 도꾜의 한 구역 스기나미에서 지펴올린 서명운동의 그 불꽃은 온 지구상에 파급되여 9억에 달하는 서명을 받는 세계적인 광범한 운동으로 확산발전되였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크고 뚜렷하게 그 자취가 찍혀질 뜻깊은 오늘을 맞고보니 멀리로 흘러간 그 나날의 일들이 류달리 감회깊이 돌이켜졌다.

그 시절에 들었던 《반전, 반핵, 평화》의 구호와는 달리 《온 세계의 자주화를 실현하자!》라는 이 거대한 리념은 바로 자기자신의 성장발전을 웅변으로 말해주고있어 그는 한편 감개가 더없이 크고 새로왔다. 오늘을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벗들과 함께 온갖 지성을 바쳐온 지난날이 아름답게 회상되면서 그의 도수높은 안경알은 뿌연 안개발에 서리여 무시로 줄곧 번뜩이였다.

(아, 《기관차》가 생겼다! 온 누리에 장엄한 동음을 울리며 시대의 한복판을 우렁차게 달려나갈 자주의 《기관차》가 드디여 태여났다!)

야스이는 희열에 넘쳤다. 종시 뜨거운것을 삼키지 못하고 후들거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은채 한동안 움직일줄 몰랐다.…

온 세상을 향하여 력사적인 탄생을 고한 주체사상국제연구소의 초대리사장으로 야스이 가오루가 선출되였다.

그는 자기앞에 부과된 중임을 유감없이 다할 새 결의로 가슴불태우며 기운찬 걸음걸이로 의장단상을 내렸다.

야스이 가오루는 아직은 비록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나 놀라운 힘으로 병마를 이겨내면서 일을 하였다.

갓 창립된 국제연구소의 일군들과 함께 사무국을 꾸리는 한편 국내외의 여러곳에 전화도 하고 전보문을 날리는 등 그는 병상에서 시달리던 사람같지 않게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어떤 힘이 부추겨주는지 그는 허약한 몸인데도 피로를 조금도 몰랐으며 자기가 하는 일에 항상 무한한 행복과 보람과 긍지만을 느꼈다.

허지만 사람이란 자기 의사나 욕망대로 제 육신을 자유자재로 보존해나갈수 없는 숙명적인 존재인지 모른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고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야스이 가오루는 그 모든 불가항력적인것을 초월하고있었으나 그도 역시 현대의학으로써도 물리칠수 없는 불치의 병마앞에서만은 어쩔수 없는 모양이였다.

1979년말, 야스이 가오루는 급기야 살점을 도려내는듯 한 모진 동통에 못이겨 또다시 쓰러졌다.

그간 즘즛했던 《암》증상이 재발했던것이였다.

병원에서는 당장 외과적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고 하였다.

로학자는 흔연히 수술대에 올랐다. 아직도 그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그것을 다하지 못한채 도저히 눈을 감을수 없었다.

대수술이였다. 무려 9시간에 걸쳐 진행되였다.

고령인데다 오랜 병환으로 앓았던 쇠약해진 육체였으나 그는 그 수술을 신음소리 한번 없이 감당해내였다. 그 완강한 인내력과 투지에 립회한 친지들은 물론 집도한 의사들이 저으기 경탄하였다.

그후 이틀만에야 그는 혼수상태에서 깨였다. 의식이 피여나자 저절로 눈이 틔였다. 그러나 시야가 온통 안개속에 묻힌듯 아무것도 똑똑히 식별할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한동안 죽은듯이 숨을 죽이고있다가 다시 떠보았다. 그제서야 흐릿한 망막속으로 안해의 수심에 찬 얼굴과 사도미와 하시모또의 모습이 비껴들었다.

그들모두가 한결같이 어떤 간절한 기대와 기원에 싸여 자기를 열심히 지켜보고있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기나긴 꿈의 세계에서 문득 현실로 돌아온듯 두눈을 번쩍 뜨고 그들에게 미소를 보내려고 입을 일그러뜨렸다.

《여보…》

《선생님!…》

이제껏 무거운 적막에 짓눌려있던 병실안에는 그의 소생을 기뻐하는 가벼운 환성이 울렸다.

그 환성에 떠받들려 금시 자리를 차고 일어나려는듯 환자는 옴지락거렸다.

그러는 남편에게 매여달리듯 다즈꼬는 황급히 그의 움직임을 진정시키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가만히 계세요. 아직은 운신할수 없어요. 수술하신 몸이란걸 아셔야 해요.》

그 녀인의 음성은 애원에 차있었다.

옆에서 하시모또가 절절하게 일렀다.

《참으로 용케 견디여내였소. 그 어려운 대수술을… 이젠 그 후과를 가셔내자면 인내성있게 안정하는거요. 명심하길 바라네.》

《선생님, 연구소의 일은 다 잘되여가고있습니다. 조금도 념려마십시오. 사무국성원들이 모두 합심해서 리사장님이 준 과업들을 손색없이 수행하고있습니다.》

평소에 오직 그 위업만을 생각하는 스승임을 잘 아는 사도미 아즈시는 이렇게 절절히 외우며 그를 안심시켰다.

야스이 가오루는 그들의 말에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대했다.…

의사와 간호원, 가족, 친지들의 지극한 정성속에서 환자는 차츰 기력을 어지간히 되살려낼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큰 수술을 치르고난 몸인지라 전에처럼 일어나 앉아있을수 있는 형편이 못되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침상에 묶이운 자신이 더없이 괴롭고 안타까왔다. 이제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는 이미 스스로 깨닫고있었다. 그럴수록 무엇인가 해야 하겠다는 욕망이 자꾸만 일었다.

자기를 낳아준 소중한 조국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수 있는것을 남기고싶었다. 그는 자신이 이제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야스이 가오루는 불쑥 안해에게 부탁했다.

《서재에 있는, 내가 최근 10년어간에 쓴 글들을 찾아서 가져다주오.》

《갑자기 그건 왜요?》

언제나 남편의 말에 순종해온 안해였으나 중병의 몸으로 그것을 요구하는것이 심상치 않게 여겨져 묻게 되였다.

《이제 알게 될거요.》

남편의 결연한 태도에서 다즈꼬는 어떤 뜻을 읽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다즈꼬는 서재를 뒤져 남편의 글이 실려있는 책과 신문, 잡지들을 골라서 병원으로 가져왔다.

야스이 가오루는 무시로 삭막해지는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번져보았다.

《위대한 주체사상은 싸우는 인민, 싸우는 혁명가, 싸우는 과학자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과 정열, 용기와 지혜를 안겨주는 원동력이다》, 《주체사상의 본질과 과학자의 임무》, 《주체의 나라 조선의 사회주의의 특징》등 100여건이나 되는 회의보고와 연설, 론설, 시, 방문기들은 70여년의 그의 짧지 않은 한생에서 가장 보람있고 의의깊은 마지막시절을 빛나게 장식한 삶과 투쟁의 기록들이였다.

이 글들에는 그가 맑스-레닌주의를 연구하면서 언제나 안타깝게 느껴온 문제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로작들을 연구하고 그이의 가르치심과 조선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는 과정을 통하여 주체사상의 진리성과 불패의 생활력을 인식한 사실들이 구체적인 자료에 기초하여 힘있는 필치로 론리정연하게 서술되여있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자기의 이 글들을 종합정리하여 책으로 출판할것을 결심하였다. 이제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이란 그것밖에는 없다고 생각되였던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인민은 물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더는 자기가 겪은, 《길을 찾아 헤매온 한생》과 같은 고충많던 로정을 밟지 않고 시대의 참된 진리가 가리키는 빛나는 도표를 따라 확신성있게 나아가도록 하고싶었다.

오랜 사색끝에 그는 책의 제명을 《조선혁명과 인간해방》이라고 달았다.

주체사상의 기치밑에 진행되는 조선혁명의 경험에서 인간해방의 참된 길을 찾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는 밀려드는 동통으로 신음하며 하루에도 몇차례 정신이 혼미해지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안해와 간호원은 그의 손에서 책자들을 앗아내고 응급치료를 하느라 정신없이 돌아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야스이 가오루는 아픔이 멎고 머리가 좀 맑아지기만 하면 다시 책장들을 번지며 글을 선별하는데 달라붙군 하였다.

이런 남편을 바라보는 다즈꼬의 가슴은 노상 북받쳐올랐다. 이미 남편의 의도를 알고있는 안해였었다.

그런 어느날 그는 난데없이 필기도구를 요구했다.

다즈꼬는 어리둥절해졌다. 침상에서 책을 보는것조차 힘겨워하는 그가 무엇을 쓰겠다고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는가.

《제가 대필해드리죠.》

《아니, 이것만은 내 손으로 써야 할것 같소. 어서 주오.》

《그러다 또 아픔이라도 도진다면 어쩔려구요.…》

다즈꼬는 어쩔바를 모르고 잠시 주저했다. 그러다 평소에 남편의 고집이 어떤것이였던가를 생각하자 더는 만류하지 못했다. 다즈꼬는 하는수 없이 그의 손에 연필을 쥐여주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천정을 향해 반듯이 누운채로 한손에 종이를 받쳐들고 곧 책의 머리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책은 1972년부터 1978년에 이르는동안 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과 일본의 수도 도꾜에서 진행된 회의들에서 한 보고, 연설, 축하의 말 그리고 신문, 잡지들에 발표한 론문들가운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되는것들을 골라서 년대순으로 묶은것이다.…》

전같으면 단숨에 내리쓸수 있는 글이였다. 허지만 이미 기력도 정신력도 쇠잔해진 야스이 가오루는 이 몇줄의 글을 쓰는데 옹근 며칠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서글퍼졌다. 하루에도 수십매의 원고쯤은 쉽사리 다루어온 손이였다.

그것을 평생 합친다면 수만페지도 더 남을것이다. 헌데 지난날의 그 정력이 어디로 다 사라지고 한장도 못되는 글을 쓰기 조차 이다지도 숨가쁘며 모지름을 써야 한단 말인가.

(아- 이게 어인 일인가.…)

그는 너무나도 엄청난 현실앞에서 통곡이라도 하고싶은 심정이였다.

헌데 그 몇자의 글마저 쓸수 없게 된 가혹한 불행이 생길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해의 2월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날, 야스이 가오루의 육신에는 돌연히 전신마비가 왔다.

이젠 손에 연필마저 쥘수 없게 되였다.

로학자는 안타깝고 초조하였다. 죽음이 금시 눈앞에 닥쳐든듯 하였다. 그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하던 일을 끝을 보지 못한채 눈을 감게 될것만 같아 마음이 옥죄여들었다.

야스이 가오루가 중태에 놓여있다는 급보에 접한 사도미 아즈시교수는 부랴부랴 대학을 떠나 자동차로 병원에 당도하였다.

비감에 싸여있을줄 알았던 병실안의 공기가 예상과는 달리 밝았다.

다즈꼬부인이 점적을 받고있는 환자의 곁에 예전이나 다름없는 정숙한 기품으로 붙어있었다.

사도미는 어지간히 안심되였다.

그는 말없이 부인에게 목례를 보내고나서 조용히 환자의 침상머리로 다가가 은사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야스이 가오루의 낯빛이 석고상처럼 하얀 일색을 띠였다. 전날에는 중환속에서도 언제나 가벼운 홍조가 가시지 않고 어려있던 얼굴이였다. 그 한줄기 생기마저 꺼져버린상싶은 스승의 변화앞에서 사도미는 저절로 목안이 미여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혼수상태에 놓인 로학자는 자기곁에 사랑하는 제자가 와있는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있었다.

환자가 현재 숨이 붙어있다는것을 점적의 투명한 유리관의 미세한 류동만이 알려준다.

약물의 액체방울이 미미한 흐름으로 스승의 가느다란 팔의 혈관속에 스며드는것을 응시하는 사도미의 심사는 오늘따라 유별한 정회에 젖어들었다.

은사의 한생, 그 행적이 사도미의 뇌리를 스치며 되살아올랐다.

비단결같은 학자적량심을 고집스레 지탱하여온 스승이였다. 진리에 투철하고 정의감이 강렬했기에 그가 걸어온 길은 비록 평탄하지 않았으나 마침내 값높은 삶의 종착점에 도달할수 있었던것이다.

누가 감히 한 인간의 갈길을 정해주며 누구인들 자기 앞날을 기약할수 있단 말인가.

사도미는 이제는 먼 과거사로 된, 인생의 마무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그날의 스승이 불현듯 돌이켜졌다.

예로부터 인간존재의 유한성문제를 둘러싸고 비관주의, 염세주의, 허무주의, 천박한 쾌락주의 등 별의별 삶의 조류들이 범람해왔다. 하기에 사람의 한생을 평하는데서 생의 총화를 중시하는 까닭도 다 그러한 인생관에서 나온것이였다. 그러나 그 모든것을 초월하여 오직 고결하게 살아온 야스이 가오루였다.

사도미는 이제까지 사람의 최후를 수다히 목격했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맞이해야 할 림종의 마당에 그 모습이 스승처럼 숭엄하고 깨끗하게 안겨오는 경우를 대하기는 처음이였다.

그것은 스승이 스스로 택한 신념의 도표를 집요히 추적하던 끝에 받아안게 된 진리의 해발이 그에게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찬연히 비껴있어서인지 모른다. 그는 가슴이 벅차올라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졌다.

스승의 한생이 이시각 한없는 격정속에서 온 심장을 마구 울렸던것이다.

《부리 부리 베루루…》

환자의 소생을 애타게 기다리듯 갑자기 조롱속의 쇠류리새가 병실안의 정적을 흔들어깨우며 울었다.

그 청아한 소리가 청각을 자극한듯 깊이 감겨있던 로학자의 두눈이 한순간 어렴풋이 열렸다.

《부리 부리 베루루…》

쇠류리새는 파란 날개를 떨며 연송 고운 청을 뽑는다.

어느덧 실내에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야스이 가오루는 시야가 틔자 또다시 엷은 미소와 함께 생기가 피여났다.

그는 자기를 열심히 지켜보는 사람들을 그윽한 눈매로 한동안 둘러보고나서 안해를 향해 《조선혁명과 인간해방》의 머리글을 미처 매듭짓지 못했던 원고를 가져오도록 일렀다. 그리고 사도미의 손을 어루더듬어 잡으며 말했다.

《내 부를테니… 마저 받아써주게.》

《녜, 그러지요.》

사도미는 선뜻 알아차리고 다즈꼬부인이 넘겨준 원고를 받아쥐고 쓸 태세를 취했다.

야스이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한마디한마디 천천히 불렀다.

《이 책은… 나의 삶의 기록으로 되는 동시에… 공화국의 동지들과 벗들, 일본의 우리 동지들과 벗들과의 련대성활동의 발자취로서… 나 개인의 활동을 초월한 기록이다.…》

사도미는 뜨거움을 삼키며 스승의 말을 받아 묵묵히 써내려갔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을 세상에… 남기려 한다. 도꾜 에이세이병원에서.》

머리글을 마친 야스이는 비로소 생전에 품었던 모든것을 다한 사람처럼 만시름을 놓으며 침상에 몸을 편히 맡기였다. 그리고 사도미에게 책을 부탁한다고 거듭 당부하였다.

《선생님, 조금도 념려마십시오. 책을 꼭 내겠습니다.》사도미는 격해지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조용히 대답했다.

야스이는 고맙다는 뜻으로 머리를 가벼이 흔들어보였다.

순간 로학자의 얼굴에는 사려깊고 서운한 빛이 어리였다.

벌써 일찍부터 조선을 알았더라면 조국을 위해, 민중을 위해 보다 많은 일을 할수 있지 않았을가.… 헌데 로년에 와서야 그 나라의 참모습을 알게 되였으니… 아-

이 시각 야스이는 그것이 참으로 통절히 가슴에 맺혔다. 이런 아쉬움은 근래에 내내 떠나지 않던것이였으나 다시 일어날상싶지 않는 병석의 몸이 된 오늘에 와서는 한층 더 간절하게 마음에 파고드는것이였다. 한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하여 더이상 상심하고싶지 않았다. 자기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길을 지금 사도미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힘찬 걸음으로 나가고있지 않는가! 그 믿음이 철석같이 솟구쳐올라 그를 위안하였던것이다.

그렇다, 그들앞에는 얼마나 휘황한 앞길이 활짝 열려져있는가!

야스이 가오루는 무겁던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탁 트이는것을 느끼자 어느덧 희열이 일면서 안해를 정겨이 돌아보며 부탁했다.

《여보, 내가 즐기는 그… 그 음악을 좀 들려주오.》

다즈꼬부인은 얼른 탁상곁으로 다가서더니 한 카세트를 골라 록음기에 꽂았다. 평소에 남편은 건강이 되살아날 때면 그 곡을 자주 감상하군 했었다. 그것은 최학성이가 스승의 조선방문을 기념하여 선사한것으로서 《조선아 너를 빛내리》였다.

미래에 대한 크나큰 희망과 확신을 짙은 서정과 랑만으로 구가하고있는 명곡이였다.

노래가 은은히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로학자는 림종에 처해있는 사람같지 않게 두눈을 감고 숙연한 자태로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얼마후 살며시 눈을 뜬 야스이 가오루는 자기의 한생을 충실히 받들어준 사랑하는 안해와 주체의 광망을 받아안고 그 빛발속에서 함께 숨을 쉬여온 사도미를 고요한 눈길로 돌아보며 심중의 소망을 띠염띠염 토로했다.

《아, 주석님이 그립소.… 그분의 사랑과 은덕에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지… 김정일동지를 만나뵙고싶었는데…》

그의 그 목소리는 차츰 고조되여가는 노래의 흐름속에서도 뚜렷한 여운을 끌며 오래도록 꺼질줄 몰랐다.

        위대한 수령님 높이 모시고

        주체의 한길로 억세게 나아가리

        사나운 풍랑도 폭풍도 헤쳐

        …

이때 병실로 하시모또 스스무와 그의 아들딸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 심취된 나머지 그들이 나타난것조차 알지 못하는상싶었다.

야스이 가오루는 깊은 상념속에 들어있었다.

인간만세의 환호가 울려퍼지던 주체사상국제연구소창립대회장의 열화속에 음악과 더불어 몸도 마음도 온통 잠겨있는것이였다. 그의 넋은 영원히 그 세계에서 떨어져 살수 없었다. 그는 자주의 길에서 깃을 편 시대의 불사조였다.

가족과 가까운 벗들이 곁에서 자기를 열심히 지켜보는것도 모르는듯 그는 장엄한 음악의 선률에 휘말려 사뭇 웅건한 기개로 상념에 잠겨 환희에 충만된 환상의 창공을 날으고있었다.

그의 그 숭고한 상념을 더한층 부추겨주듯 노래소리는 갈수록 찬연하고 랑만에 찬 음색으로 방안을 울리며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속속 스며들어갔다.

그날은 벗꽃이 망울을 터치기 시작한 1980년 3월초, 야스이 가오루가 일흔세번째로 맞이한 봄이였다.

유난히 화창하고 온화한 해볕이 병실의 유리창마다에서 거울처럼 반짝이는 그해의 그 봄은 사람들이 크나큰 존경심으로 이 로학자를 영원히 추모하게 되는 아름다운 계절이였다.

1993년. 우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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