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의 외딴섬 사모아에서 포착된 미국의 침략과 분렬정책

 

폴리네시아에는 사모아, 통가, 투발루를 비롯한 여러 독립국들이 있으며 그외에 9개의 지역에 속하는 많은 섬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사모아이다.

사모아는 조선반도 남단에 있는 제주도보다 약간 작은 고구마모양의 두개의 섬과 기타 작은 섬들로 이루어졌다. 사모아(Samoa)는 《모아가 있는 섬》이라는 어원에 의하여 유럽의 침략자들이 섬의 명칭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있다.

사모아력사의 기원에 대하여 B.C. 3000년경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과학적증거를 따른다면 사모아의 력사는 B.C. 2000년이후에 말라이반도와 동인디아, 필리핀, 타이완 등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 의하여 기원됐을수 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사모아인들은 사모아력사의 시조가 외부에서 이주해왔다는 주장을 극구 반대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사모아의 력사는 사모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하늘이 보낸 사람들이 창조했다고 믿고있다.

뿐만아니라 사모아인들은 그들나름대로 독특한 《천지창조의 전설》을 가지고 타갈로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에 사모아에서 사람들을 만들었다고 주장을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말하기를 《사모아는 하느님이 창조하셨다.》라고 주장한다. 현재도 사모아인들이 타갈로신의 창조전설을 주장하고있지만 현대과학적방법으로 혈통계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모아의 조상들은 선사시대때부터 피지와 통가섬원주민들사이의 혼혈에 의하여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사모아의 력사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설명을 부인할수는 없지만 나라와 민족에게 자기 고유의 독특한 전설이 있는것은 귀중하다. 하지만 그 나라, 그 민족의 전설이 아무리 독특하고 귀중하다 할지라도 그 전설에 근거하여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민족의 특권과 정치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세계적평화와 규범 그리고 력사적진보를 위한 실천투쟁속에서 《정의로운 투쟁의 전설적전통》을 마련해나갈 때만이 가능할수 있다.

 

사모아가 어떻게 동서로 분렬되였는가?

 

유럽의 침략자들이 사모아에 처음 출현하기 시작한 때는 17세기초 부터이다. 네데를란드인 로제휜이 1722년에 사모아섬에 탐험과 향료상업의 길을 연 최초의 유럽인이였다.

그뒤를 따라 프랑스인들이 사모아섬에 상륙하여 역시 탐험과 상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프랑스의 탐험가 12명이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그후 영국인들이 1830년대에 사모아에 상업과 선교라는 명분으로 상륙을 했다. 이때는 벌써 사모아가 유럽의 강대국들의 분주한 쇼핑몰 같은 곳이 되고있었다.

1830년대 후반에 영국 런던선교회소속 선교사 John Williams와 Charles Barf가 사모아에서 맹렬적인 선교로 교회를 세웠는데 이들은 주로 사모아원주민들의 토속종교를 박멸하는데 유명한 선교사들로 기록됐다. 1844년에 영국은 선교본부를 사모아에 설립했다.

1847년에 영국은 영국정부의 령사관을 개설했다.

1854년에 미국은 유럽의 침략세력에 대항하여 사모아에 미국정부의 령사관을 독자적으로 개설하여 미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1857년에 도이췰란드의 무역회사인 J.C. Godeffroy회사가 창설되여 성공적으로 무역을 확대하여 그 당시 남태평양전역에서 유일한 무역회사로 성장하고있었다. 1861년에 도이췰란드도 사모아에 령사관을 정식 개설했다.

그리하여 1847년-1861년까지 14년사이에 영국과 미국, 도이췰란드의 령사관들이 사모아에 나란히 경쟁적으로 개설됐다.

영국, 미국, 도이췰란드의 3파전이 맹렬하게 벌어지는 와중속에 사모아는 강대국들의 경쟁의 란무장으로 되고있었다. 이러한 서유럽강대국들의 침략과 경쟁의 장소가 되고있는 속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던가 사모아원주민들은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사모아원주민들은 시위와 폭력으로 3개국의 외세를 대항하여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원주민들의 투쟁은 강대국들의 힘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그런 속에 사모아원주민들의 투쟁은 8년만에 완전히 끝나고말았다. 1869년에 교활한 영국의 선교사 John Williams는 극비에 사모아의 왕을 비롯한 측근들과의 접촉을 진행하여 왕에게 왕권을 제한적으로 허락하는 조건하에서 종전을 성사시켰다.

원주민과의 싸움을 잠재운 영국과 도이췰란드, 미국 3개 나라들은 사모아를 독점하기 위한 경쟁을 점점 더 심화시키고있었다. 영국은 자국의 령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밑에 자국의 군대를 사모아에 주둔시켰다.

1879년 1월에 도이췰란드는 독자적으로 사모아왕과 조약을 맺고 사모아의 주요한 항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협약을 획득했다.

한편 영국은 1879년 11월에 역시 독자적으로 사모아왕과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사모아의 여러 지역에서 사용하던 각 지역마다 소유한 기발들을 페기하고 영국이 제시하는 단일기발을 가지도록 설득시켜 성공했다. 이것은 영국이 사모아에 대한 주권을 단독으로 획득하려는 야심을 의미한다.

1870년-1880년에 영국과 도이췰란드 그리고 미국 세 나라는 사모아를 지배하기 위한 영향력경쟁을 줄곧 계속하고있었다.

하지만 특히 1898년에 이르러서는 영향력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소유권의 문제로 비약하여 사모아를 소유하기 위한 치렬한 경쟁의 양상이 전개되고있었다.

영국과 도이췰란드 그리고 미국이 저마다 군함을 사모아항구에 주둔시키고있는 험악한 상황하에서 1899년에 이른바 《Tripartite Convention of 1899》를 개최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영국과 미국 그리고 도이췰란드 세 나라가 사모아를 서로 나누어먹는 《분할정책 3자회의》였다.

《분할정책 3자회의》의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사모아를 둘로 분할하여 동편은 미령사모아로 확정됐다. 미령사모아는 그때부터 현재와 미래에도 미국이 존재하는 한 변함없이 계속 미국이 독차지하고있을것이다.

한편 사모아서편은 도이췰란드령 사모아가 됐다. 어찌하여 사모아의 서편은 도이췰란드령 사모아가 됐는가? 그 리유는 영국과 도이췰란드가 큰 도박을 했기때문이였다.

그때 당시 도이췰란드는 점령하고있던 통가섬과 솔로몬제도들을 영국에게 양도해주는 대가로 사모아서편의 사바이 큰 섬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의 끝남과 동시에 20년동안의 도이췰란드령 사모아는 종식되고말았다. 결과적으로 도이췰란드령 사모아는 뉴질랜드에게 넘어갔다.

도이췰란드령 사모아에서 해방된 서편 사모아섬은 또다시 뉴질랜드의 식민지가 되여 1919년부터 28년동안 뉴질랜드의 식민지통치를 받았다. 이러한 뒤바뀌는 식민지통치속에 헤매이던 서편 사모아는 1962년에 이르러 드디여 남태평양지역에서 첫 독립국이 되였다.

이와 같이 영국, 도이췰란드, 미국 세 나라의 치렬한 침략과 야욕의 결과로 인하여 형제처럼 나란히 잘 지내던 사모아섬의 력사는 동서로 분렬되여 되돌아올수 없는 영구분렬의 비극에 이르게 됐던것이다.

 

미령사모아에 대하여

 

미령사모아의 력사는 1899년부터 이렇게 시작됐던것이다. 1900년에 처음으로 미국성조기가 동편 사모아에 게양되여 미국의 령토가 된것을 확인했다. 미령사모아의 전체 면적은 199㎢이며 워싱톤 DC보다 약간 큰 정도다. 인구는 6만명정도이다. 미령사모아는 미국무성이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며 자체헌법이 있다. 미령사모아의 의회는 량원제이며 상원 18명의 임기는 4년이다. 하원 의원은 21명이고 임기는 2년이다.

미령사모아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미군에 입대한다. 그 리유는 경제빈곤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령사모아출신 군인들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참전하여 발생하는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가 인구수에 비례해보면 몹시 불균형적이다는것이다. 미령사모아출신 군인 20명이 사망했는데 미국본토의 군인 20명의 사망자수와 비교하면 엄청난 불균형의 문제가 제기되고있는 실정이다.

미국은 《아폴로》계획을 추진하면서 우주인들의 귀환지점으로 미령사모아에 있는 파고파고비행장을 리용했다. 미국은 미령사모아를 《아폴로》계획에 사용하는 모습을 전세계에 숨김없이 과시를 했다.

하지만 미국이 미령사모아를 사용하여 남태평양전역을 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밀작전을 펴고있는 모습들은 절대로 눈에 띄우지않고 비밀로 진행되고있는것이다. 미국은 태평양전역에 정략과 전략적리익을 위하여 미령사모아를 파고파고비행장이상으로 유효하게 사용하고있다.

다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미국은 조선반도의 6.25전쟁때에도 미령사모아를 사용하려고 계획을 했던것이 폭로됐다.

 

《한국을 사모아군도로 옮겨라》

 

이 말은 1950년 12월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는 계획여하에 대하여 맥아더사령관과 트루맨대통령사이에 벌린 론의속에서 나온 말이다.

요점적으로 미국이 조선전쟁에서 패하는 경우 미군철수와 함께 남조선인들도 같이 철수해야 하며 32만 8 000명을 미령사모아로 옮겨 그곳에서 《뉴 코리아》를 만든다는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 민족의 삶을 칼질하는 망발인가?

그런데 그때 당시 워싱톤 막후에서 벌어진 모의에는 리승만《대통령》의 《한국정부》에게 의견을 묻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모든 결정은 《한국》의 계획없이 진행되였다고 한다.

리승만《정권》때나 오늘 리명박《정권》때나 다른 점이란 하나도 없다. 지금 리명박《대통령》은 미국의 강요에 굴복하여 매국적조약을 체결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국민의 뜻과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끌려가고있을뿐이다.

사모아의 제5대총리로 등장하여 현재 13년째 집권하고있는 말리엘레가오이총리는 친미보수주의우익정치인으로 유명하고 그의 정치행태는 부패정치로 락인찍힌지 오래됐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친서방정책과 배치되는 중국과 접근하고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들이는 좌향정치형태로 점차 전향하고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많은 의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하여 몇가지 해답을 시도해본다.

첫째, 사모아는 동서로 분렬되여 미령사모아와 독립국사모아로 대립되여있다. 그런데 미령사모아는 미국의 친자식으로 대우를 받고있다. 그런데 이에 비교하면 독립국사모아는 서자의 위치에서 서러움을 받으면서 마지못해서 친미적정권을 유지하고있는것으로 추측된다.

2009년 9월에 사모아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량편 사모아에서 많은 사망자와 난민이 발생했다. 독립국사모아에서 집을 잃은 3 000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말리엘레가오이총리는 지진으로 1억 4 725만US$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발표를 했다.

뉴질랜드와 이웃나라 수상들이 독립국사모아를 방문하여 의료와 구호를 약속했다. 하지만 미국은 미령사모아를 위해서는 복구비지원금을 보내왔지만 독립국사모아에 대해서는 랭담한 차별만 보일뿐이였다.

미국은 미령사모아에 장학제도를 설립하여 해마다 50명을 선정하여 장학금을 지불하고있다. 하지만 독립국사모아에는 그런 혜택이 전혀 없다.

이런 력사적사실로 인하여 친미독재자로 악명높은 말리엘레가오이총리이지만 이제는 정치적성향이 점차 친미로선에서부터 리탈하고있다고 해석된다.

둘째, 말리엘레가오이총리는 2009년 9월부터 자동차통행을 우측통행에서 좌측통행으로 변경하는 특별법을 사모아전국에 발표했다. 자동차의 통행을 갑자기 좌측통행으로 변경하는 돌출결정발표는 우선 미령사모아와 아무 협의없이 변경했기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의도적정책이라고 해석된다.

셋째, 말리엘레가오이총리는 또한 사모아의 날자변경선을 갑자기 변경한다고 돌출발표를 했다. 사모아는 1892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시간에 맞추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119년만에 날자변경선을 오스트랄리아와 뉴질랜드에 맞추어 세계에서 하루가 가장 먼저 시작되는 나라로 만든것이다.

왜 그랬는가?

말리엘레가오이총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교회에 가는 시간에 뉴질랜드사람들은 이미 월요일이 시작되고있으므로 우리는 손해를 보고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변명이다. 이것도 역시 미국 캘리포니아와의 련결을 끊어버리며 또한 미령사모아와도 날자와 시간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돌출행위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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