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핵시험장이며 착취대상인
마셜제도와 나우루
오세안주는 오스트랄리아대륙과 태평양의 중부와 남서부에 널려있는 섬들을 포괄하는 대주이다. 죠지 오웰의 소설에서는 오세안주를 가상국가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오세안주를 지리학적이 아니라 민족학상으로 구분하여 3개의 지역으로 구분한다.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로 구분한다.
미크로네시아지역에는 섬나라들인 마셜제도와 나우루를 비롯하여 벨라우, 키리바티, 미크로네시아련방국들이 있다. 이 글에서 마셜제도와 나우루 2개 나라에 대하여 살펴본다.
마셜제도는 화산에 의하여 바다수면에 가라앉은 산호섬들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마셜제도는 31개의 산호섬들이 국토의 주요한 부분이며 그외에 약 1 225개의 크고작은 유인도와 무인도섬들이 마셜제도해역 75만㎢의 광활한 해양안에 흩어져있다.
마셜제도는 하와이주에서 남서방향으로 3 200㎞ 떨어져있고 괌섬으로부터는 남동쪽으로 2 100㎞ 떨어져있다. 사람이 살수 있는 땅의 면적은 181㎢에 지나지 않으며 미국의 워싱톤 DC정도 되는 땅에 인구 6만 8 000여명이 살고있다.
마셜제도의 간추린 력사
B.C. 5000년경부터 동남아시아에서 사람들이 이동하여 마셜제도에서 살고있었다. B.C. 30년-A.D. 50년경의 력사적기록에 의하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지방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긴 커누를 제작하여 항해하는 기술을 가지고있었다.
마셜제도의 고대력사에 대하여 통일된 력사적기록이 남겨진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광대한 해양지역으로 흩어져있는 크고작은 많은 섬들은 각 섬마다 독자적으로 추장들이 수천년동안 지배하여왔다는것이다. 그들은 여러 섬들에서 제각기 혈통과 씨족의 집단을 형성하고 살아왔다.
1494년에 들어서 처음으로 마셜제도에 접근한 유럽인은 에스빠냐의 해양탐험가였다. 에스빠냐탐험가는 이른바 협상을 맺고 명목상 마셜제도의 소유자가 됐다. 하지만 그때 당시 에스빠냐는 무역을 진행함에 있어서 주로 남아메리카지역을 중요시하였기때문에 마셜제도를 크게 관심하지 않았다.
그후 1525년에 이르러 에스빠냐의 Sala de Alonso가 마셜제도를 에스빠냐의 식민지로 확정하였다. 1526년에 에스빠냐의 함선 Santa de Victoria호가 상륙했고 1529년에 계속하여 에스빠냐의 함선 Florida호의 선장 Saavedra가 마셜제도에 상륙했다.
그는 3, 4개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섬에 살고있는 원주민들과 접촉하여 친밀한 교제를 하면서 선물을 교환했을뿐만아니라 그 섬들의 이름을 작명하기도 했다.
1530년에 에스빠냐의 함선 Florida호의 선장인 Saavedra가 작명한 섬들의 이름은 분명히 Ujelang섬, Eniwetok섬 그리고 Bikini섬들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이러한 비키니섬과 에니웨토크섬에서 후날에 미국이 핵시험을 67번이나 했다는 사실이다.
에스빠냐의 남태평양탐험가들과 침략자들이 그때 당시 남아메리카의 뻬루와 그 주변지역들과 식민지교역을 하고있었는데 마셜제도는 그들이 남아메리카와 교역을 하는 통로교차점으로 활용되고있었다.
그후부터 약 200년동안 마셜제도는 에스빠냐의 식민지통치하에 있었지만 특별한 력사적자료가 알려진것은 별로 없다.
2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에 1788년에 영국인 John Marshall이 이곳에 출현했는데 이때부터 이 지역의 군도를 《마셜제도》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였고 아마 그때부터 영국이 마셜제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것으로 여겨진다.
1788년-1878년에 이르는 90년기간에 마셜제도에서 짜리로씨야와 프랑스가 식민지리권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국이 막대한 영향력으로 마셜제도를 단독으로 지배하고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국제사회는 마셜제도에 대한 주권은 에스빠냐에 있다고 인정하고 에스빠냐에 손을 들어주었다.
때문에 영국은 90년동안이나 마셜제도에서 좌우충돌하며 주권행사를 해왔지만 하는수없이 마셜제도에서 물러나게 됐다. 영국의 어쩔수 없는 동의를 획득한 에스빠냐는 마셜제도에 대한 주권을 다시 회복하여 식민지종주국의 주권행사를 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 에스빠냐는 국내외적으로 국력이 점점 쇠퇴해지는것으로 하여 1885년에 도이췰란드에 마셜제도의 주권을 팔아버리고말았다.
한편 마셜제도의 민중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라 새로운 종주국인 도이췰란드의 식민지통치를 묵묵히 감수하였다.
마셜제도는 1914년 도이췰란드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까지 29년동안 도이췰란드의 식민지통치를 받았다.
도이췰란드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전하고있는 기회를 리용하여 일본은 남태평양제도에서 기회주의적인 승전국이 됐다. 도이췰란드가 마셜제도를 포기하고 떠나간 후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굶주린 짐승모양으로 이 지역에 점령군으로 등장하여 주둔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협상국편에 가담하여 남태평양에서 기록적인 전과를 과시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점령군이 되여 마셜제도에서 최악의 통치를 진행했다.
일본본토의 좁은 땅에서 인구과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은 1 000명의 일본인들을 마셜제도의 작은 섬들로 이주시켰다. 마셜제도의 작은 섬들은 외국인이 본토인보다 더 많은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일본인들이 섬의 다수가 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일본은 침략적통치로써 마셜제도의 사회적전통을 파괴하고 강압적으로 저들을 위한 사회제도를 구축하려 했다.
일본군정은 마셜제도에서 일본식교육방법으로 일본어와 일본문화교육을 전국적으로 강요했다. 뿐만아니라 마셜제도 작은 섬들에 일본군 공군기지를 건설하여 후날 제2차 세계대전때 중요한 요새로 사용하였다.
어쨌든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마셜제도에서 1919년 6월부터 1945년 8월까지 26년동안 식민지통치를 감행하여 마셜제도의 민중들에게 막대한 고통과 비극을 안겨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식민지통치
1941년 12월 일본이 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의 지배권을 위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미국간의 교전이 시작되였다.
그때 당시 마셜제도는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마셜제도의 섬들은 일본해군기지로 사용되고있었다. 1944년에 마셜제도는 미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일본의 해군기지들은 곧 파괴되고말았다. 마셜제도는 어느새 미군이 점령하여 미국의 통치지역으로 변화되고말았다.
1942년-1943년사이에 마셜제도는 치명적파괴를 당했으며 사람들은 부상과 식량난으로 최악의 곤경에 빠져있었다. 1944년 1월에는 마셜제도의 중요한 섬들은 거의 전부가 미군의 통치를 받게 되였다.
1943년-1944년에 일본군 5 100명중에서 절반이상의 군인들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은 민주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이 끝나므로 근 27년간 가혹한 식민지통치를 행한 일본인들은 마셜제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마셜제도는 또다시 유엔의 기발아래서 《남태평양 전시공동관리구역》에 예속되여 미국의 보호령이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됐다.
마셜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해방이 아니라 또다시 수십년간의 기나긴 세월동안 미국의 보호령과 식민지가 되고말았다.
1979년 5월에 비로소 처음으로 헌법이 제정되고 자치정부가 구성되였다. 독립국이라는 명칭하에서 《마셜제도공화국》이 됐다. 마셜제도공화국은 의회를 구성하고 선거를 실시하여 초대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일본인2세가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마타 카부아 초대대통령은 아버지가 일본인이고 어머니가 현지 원주민이였다.
마셜제도가 서방렬강들의 침략과 일본의 침략을 받은 비참한 력사를 년대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에스빠냐의 침략과 Todesilraseu조약, 1494년-1788년(294년간)
영국인 John Marshall 이후 영국의 침략, 1788년-1874년(86년간)
도이췰란드의 식민지통치, 1884년-1919년(35년간)
일본의 식민지통치, 1919년-1945년(26년간)
미국의 핵시험과 보호령, 1945년-1979년(34년간)
극히 단편적인 자료이기는 하지만 도이췰란드가 마셜제도에서 식민지통치를 시작한지 2년후인 1884년-1886년에 코프라(야자나무의 열매를 말린것)수출이 900t이였다는 기록이 있다.
1886년 그때 당시 마셜제도에는 도이췰란드인 91명과 영국인 29명이 상주하면서 무역에 종사하고있었는데 영국과 도이췰란드가 마셜제도에서 막대한 착취를 행하고있었다는 력사적사실을 1884년-1886년에 코프라수출이 900t이였다는 자료 하나만을 가지고도 가히 짐작할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핵시험에 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랭전시대가 시작됐다. 랭전시대의 시작은 핵무기개발과 시험을 동반했으며 급속도로 동서분렬과 대결의 구도를 형성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한 원자폭탄은 이미 구시대의 산물이였으며 해마다 새로운 핵무기개발과 핵시험들이 경쟁적으로 계속되였다.
1998년에 발표된 그때 당시의 핵시험통계자료만 보아도 이를 잘알수 있다.
미국 1 030번, 로씨야 715번, 프랑스 197번, 영국 45번, 인디아 3번, 파키스탄 2번.
1996년 9월에 유엔군축위원회는 핵시험을 금지하는 협정안을 제출하여 유엔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미국의 다수당인 공화당은 유엔의 핵시험금지협정안에 대한 국회비준을 거부했다.
미국은 1945년부터 1988년까지 43년동안에 지상과 지하 그리고 수중핵시험을 포함하여 총 930회이상의 핵시험을 진행한 기록을 보유하고있다.
지면상제한으로 미국의 방대한 930회 핵시험에 대한 전체를 론증할수 없으므로 다만 마셜제도 비키니섬과 에니웨토크섬을 비롯하여 8개 섬에서 1946년 7월 1일부터 1958년까지 12년동안에 67번 핵시험을 진행한 참혹한 력사적현장에 대하여 극히 간략하게 살펴본다.
그에 대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ㄱ. 미국은 1954년 3월 1일에 비키니섬에서 핵시험을 했는데 그것은 《브라보》수소폭탄시험이였다. 이 《브라보》의 폭발력은 15Mt이였다. 1mile의 구덩이가 파졌으며 3mile이나 되는 큰 불덩어리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 《브라보》수소폭탄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폭탄의 1 000배에 해당하는 강력한 폭발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비키니섬의 주민들이 3일전에 피난하여 다른 섬으로 강제이동을 하기는 했지만 일부 주민들이 핵시험을 하는 당일에 아직도 그 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비키니섬에 그대로 남아있던 주민들이 심한 외상과 머리털이 빠지는 현상이 나타나고있는데도 미국의 핵시험담당자는 《화상은 없으며 주민들의 건강은 량호하다.》라고 거짓말을 하고있었다. 그들은 더이상의 말을 하려고 하면 군사기밀이라고 하여 일절 말을 하지 못하도록 위협했다는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은 비키니섬에서뿐만아니라 마셜제도의 8개 섬에서 67번이나 행한 핵시험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였다.
ㄴ. 마셜제도의 8개 섬에서 12년동안 67번 핵시험을 했는데 이 핵의 폭발력은 굉장한것이였다.
그러면 미국이 930번의 핵시험을 했는데 이 총체적인 핵폭탄의 폭발력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그것은 대략 174Mt이였다.
마셜제도에서 67번 진행한 핵시험의 폭발력은 미국전체 930번 핵시험과 비교할 때 14%정도에 불과한 소량의 핵시험이였다는것이다.
랭전시기 미국은 이와 같은 야만적인 핵시험을 자행하면서 세계최대의 강국이 된것을 전세계에 과시하고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기발을 앞세우고 전세계의 약소국들에게 《평화의 사도》라고 하는 위선을 선전하고있었다.
ㄷ. 핵폭탄의 방사능위험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마셜제도의 주민들은 핵시험후 1969년에 떠나온 고향집이 너무 그리워 모두 서둘러 귀가를 했다. 비키니섬을 비롯하여 8개의 섬사람들은 섬에 돌아와 부지런히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고 녀자들은 밭에서 채소를 심고 가꾸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미군부는 비키니섬에 아무 위험이 없다고 주장했다.
1972년에 미국핵위원회는 발표하기를 《비키니섬으로 주민들이 돌아가는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주민들이 돌아가는것을 강압적으로 저지하지는 않는다.》라고 매우 어정쩡하고 일종의 책임회피적인 발표를 하고있었다.
미국이 핵시험을 진행한 섬들에서 방사능로출로 인하여 사망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당시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던 류학생인 제토 안제이는 고향섬으로 돌아왔다.
제토 안제이는 치과의사가 되여 고향섬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와보니 섬사람들이 모두다 핵방사능로출로 죽음에 이르고있는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또 제토 안제이는 핵방사능에 대하여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있는 미국에 대하여 분노했다.
《미국은 굉장히 큰 나라인데 왜 자기네 나라땅에서 핵시험을 하지 않는가? 그것은 방사능이 사람에게 위험하기때문이 아닌가?》
제토 안제이는 1975년에 미국 워싱톤을 방문하여 국회의사당에서 정치인들에게 마셜제도의 비참한 모습을 낱낱이 전달했다. 그는 또 로비스트들과 법률전문가들을 만나 눈물의 연설로 호소를 했다.
제토 안제이의 공로로 인하여 미국의 핵위원회는 행동을 시작하였다.
핵위원회는 《마셜제도핵방사능 오염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했다. 미국정부는 핵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를 받고도 4년동안 비밀로 붙이면서 비공개문서로 보관하고있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4년후인 1982년에야 비로소 핵위원회의 보고를 공개했다. 미국정부도 상황이 급해지는것을 느끼고 마셜제도에 대하여 보상문제를 론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욱 기막힌 사실은 마셜제도의 대통령과 의회가 그때까지 취하고있던 태도이다. 마셜제도의 대통령과 장관들과 의회의 의원들은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하고 오직 미국의 눈치만 살피고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보상문제에 대해서는 더 말할수 없는 형편이였다.
ㄹ. 마셜제도에서 미국의 핵시험으로 인한 질병발생이 공개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것은 1966년부터이며 미국의 의사들이 이 사실을 립증했다.
미국의회는 1966년에 비로소 처음으로 호의적지원금 95만US$를 마셜제도의 피해자들에게 지불할것을 결의했다. 호의적지원금이란 무슨 말인가?
1973년에 이르러서 핵시험을 행한 8개 섬뿐만아니라 린근에 있는 여러 섬들에까지 방사능오염으로 인한 사망자들이 대량으로 속출하고있었다. 미국의 핵위원회는 마셜제도의 토양과 바다의 고기잡이까지도 방사능로출로 위험성이 있다고 추가로 발표했다.
핵시험후 20년이 지나 1975년에 마셜제도정부는 최초로 미국정부를 향하여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출했다.
1976년에 미국의회는 섬의 방사능오염제거비용으로 2 000만US$를 승인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피해보상을 하는 문제는 아직 아무 말이 없었다.
1977년 5월에 미국은 700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방사능오염지역에서 오염제거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그리고 7월에는 마셜제도의 핵시험피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100만US$지불을 의회가 승인했다. 23년만에 처음이였다.
1978년에 미국은 비키니섬의 주민 139명을 비키니섬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섬으로 이주하여 새 곳에 정착하도록 강요하고 그 비용으로 600만US$를 책정했다.
미국의 강요로 이주를 당한 비키니섬사람들은 1981년에 미국정부에 소송을 제기하여 보상금 4억 5 000만US$를 요구했다. 미국정부는 비키니섬사람들의 소송을 즉각 거부하면서 타협안으로 200만~900만US$정도의 보상을 1980년대말에 가서 그때 고려하겠다고 회피적인 답변을 했다.
뿐만아니라 마셜제도전체의 피해보상을 위하여 《변호사국제계획》(Attornys for Atomic Testing Litigation Project)은 미국정부에게 400만US$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와 같은 소송들이 계속 제기되여 미국은 큰 곤경에 빠지게 됐다.
ㅁ. 미국은 마셜제도보상책임을 피할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마셜제도사람들의 요구뿐만아니라 세계적여론도 피할수 없다고 타산하게 됐다.
그리하여 미국은 보상을 위한 소송면제를 근본적으로 봉쇄하고 정치적으로 미국이 유리한 조건에서 보상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미국이 고안해낸 해결방법을 자유련합협정(Compact of Free Association)이라고 부른다. 이 자유련합협정의 골자는 다음의 두가지가 기본이다.
1) 피해보상을 적절한 방법으로 제공해준다.
2) 피해보상을 위한 법정소송을 절대로 금지한다.
미국은 우후죽순처럼 계속 제기되고있는 피해보상소송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자유련합협정을 고안해냈던것이다.
어쨌든 미국은 마셜제도공화국에 4가지 조건을 제시하여 자유련합협정체결을 유도하여 보상문제를 해결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첫째, 마셜제도공화국을 유엔에 가입시켜준다.
둘째, 핵시험에 대한 피해보상을 적절히 제공한다.
셋째, 마셜제도공화국의 국민들에게 미국려권을 발행해준다.
넷째, 우의 세가지 조건의 대가로 미국은 계속하여 마셜제도에서 제한없이 군사기지를 확보하고 미국은 마셜제도의 국방을 책임진다.
마셜제도사람들은 순진한 마음으로 미국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1983년에 국민투표로 미국이 제시한 자유련합협정을 받아들이였다. 하지만 자유련합협정은 1983년에 통과시켜놓고 실제로 유효한 시기는 3년후인 1986년 1월부터라고 못을 박아놓음으로써 미국은 지연작전을 교묘히 사용하고있었다.
미국의 핵시험은 1945년에 시작됐는데 핵시험에 대한 피해보상은 41년이 지난 후인 1986년에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것이다.
그동안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였는데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방사능오염의 희생물이 된것이다.
자유련합협정에 의하여 1986년부터 마셜제도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미국의 보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1년에 1억 5 000만US$를 15년동안 제공한다. 1986년-2001년까지 총 2억 7 600만US$를 보상해준다.
2. Nuclear Claim Tribunal을 창설하여 1991년-2003년까지 12년동안 1년에 8 300만US$를 제공한다.
3. 우의 보상금을 《핵오염제거, 파괴된 시설재건, 도로와 공공건물건설 그리고 마셜제도사람들을 위한 구호》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미국은 이 협정을 헌신짝 버리듯 포기하고 다시 개정할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2004년에 자유련합협정을 들고나와 마셜제도공화국정권을 압박하여 비렬한 방법으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이 강요한 자유련합협정개정안에 의하면 미국에 불리한 조항들은 모두다 빼버리는 개정안이다. 그리고 마셜제도의 민중들에게 부담이 되고 불리한 조항들은 그대로 존속시키는 악의적인 개정안이다.
개정안의 한 조항을 보면 《마셜제도국민에게 미국려권을 발행해준다.》라는 조항이 엄연히 있다. 그런데 이 조항을 교묘하게 개정하여 《마셜제도국민들은 자국의 합법적인 려권을 소지한다.》라고 개정을 했다.
미국에게 유리한 조항들은 그대로 두고 미국에 불리한 조항들은 개정안이라는 명목으로 2004년에 모두다 제거했던것이다.
마셜제도공화국의 제4대대통령으로 2008년-2009년에 Litokwa Tomeing대통령이 집권을 했다. Tomeing은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반대하고 미국이 약속한 보상금지급협정을 지키지 않는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또 Tomeing대통령은 중국과의 외교를 강화하여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와 같은 Tomeing대통령을 미국은 좋아하지 않았다. Tomeing대통령은 미국의 미움을 받아 2008년 1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1년 10개월간 집권을 하고 퇴임당했다.
Tomeing대통령이 1년 10개월동안 집권을 하고 도중에 퇴임을 당한 리유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항의를 한 유일한 대통령이기때문이였다.
마셜제도는 1979년에 독립하였는데 현재 제5대대통령으로 쥬리랑 제디카이어대통령이 2009년 11월부터 집권하였다. 지금까지 본바와 같이 마셜제도의 력사는 인권과 평화를 부르짖는 미국식허울이 만들어낸 비참상의 표본이다.
그속에서나마 일본인들이 마셜제도의 초대대통령과 제2대대통령으로 장기집권까지 하였으니 미국의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리라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결국 미국의 하수인이 될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마셜제도의 War Games의 저자인 David Kattenburg의 글 몇구절을 소개한다.
《마셜제도에 주둔하고있는 미군기지의 화려한 Country Club에서 불과 12분 배길가까이 있는 엘바섬에는 핵시험의 희생자들이 다른 섬들에서부터 몰려와 몇십년째 함께 살고있다. …
그들에게는 물도 부족하고 전기도 물론 없고 학교와 병원도 없으며 먹을것도 늘 부족하여 굶주리며 겨우 살아가고있다. …
미국에 핵시험보상금 5억 7 000만US$를 요청했다는 소리는 요란한데 이곳 엘바섬의 희생자들에게는 왜 어찌하여 아무 상관이 없을가?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것이 있다. 지난 반세기동안 마셜제도가 핵시험보상금을 미국으로부터 그 얼마를 받았는지는 잘 알수 없지만 마셜제도가 받은 그 보상금의 몇십배를 미국이 이스라엘에게 해마다 제공해주고있다는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나우루의 간추린 력사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나우루공화국은 면적이 24㎢로서 여의도섬의 2. 5배 되며 인구는 1만 3 000명정도이다. 남태평양상에서도 눈에 잘 띄우지 않는 나우루공화국은 오스트랄리아주에서 비행기로 7시간 거리에 있다.
나우루섬에는 3 000년전부터 동남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살고있었는데 이들은 12부족들이 함께 모여 원시적으로 평화롭게 살고있었다. 그들은 물고기와 풍성한 열매, 과일로 자급자족하면서 싸움을 모르고 평온한 생활을 유지하고있었다.
18세기말에 유럽인으로서 나우루섬에 처음 상륙한 사람은 영국인 죤 페안(John Fearn)이였다. 죤 페안은 고래잡이와 무역을 하는 큰 배의 선장이였는데 나우루섬에 상륙하여 아름다운 섬의 자연풍경과 섬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락천적삶의 모습에 감동되여 섬의 이름을 《기쁨의 섬》(Pleasant Island)이라고 작명을 했다고 한다.
그후로부터 아름답고 평화로운 《기쁨의 섬》을 향하여 영국에서부터 탐욕과 방탕의 물결이 사정없이 밀려왔다.
그때 당시 나우루섬근방으로 항해하던 배들은 주로 고래잡이배와 노예무역을 하는 배들이였다. 그런데 그 많은 배에서부터 탈출한 도망자들이 무작정으로 나우루섬에 마구 상륙하여 그곳은 도망군들의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고있었다.
술과 담배, 총과 포는 곧 나우루섬에서 대대손손 평화롭게 살던 12부족을 사분오렬로 갈라놓아 서로 싸우도록 만들어놓았다. 뿐만아니라 그때 유럽인들중에는 도이췰란드인들이 다소 있었는데 도이췰란드인들은 영국인들과의 경쟁을 위하여 도이췰란드정부에 요청하여 많은 무기를 이 섬에 들여왔다.
드디여 자그마한 땅인 나우루에서 내전이 발생하여 1878년부터 1888년까지 10년동안 원주민부족들사이에서 치렬한 전쟁이 계속됐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영국인과 도이췰란드인들이 뒤에서 부추긴 내전이였다.
이 10년간의 내전으로 인하여 그때 당시 1 400명이던 나우루의 총인구가 900명으로 감소됐다고 한다.
나우루의 내전은 10년후에 도이췰란드편의 승리로 끝났다. 도이췰란드는 1888년에 나우루섬을 마셜제도와 합병을 시켜놓고 식민지통치를 자행했다.
결국 영국은 나우루섬을 손에 넣은지 수십년만에 도이췰란드에게 빼앗기고말았던것이다.
나우루섬이 도이췰란드의 통치를 받기 이전에 영국의 그리스도교와 카톨릭교의 선교사들이 이 작은 섬에서 선교활동을 했다는 력사적기록이 있다. 그뿐만아니라 도이췰란드가 나우루에서 식민지통치를 시작하는 복잡한 력사적변동시에도 여전히 유럽의 선교사들은 나우루섬에 상주하고있었다는 사실은 선교사에 대한 솔직한 평가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 없다.
도이췰란드는 1888년에 나우루섬을 식민지로 삼았으며 26년동안 식민지통치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여 영국과 오스트랄리아의 련합군이 1914년에 나우루섬을 전격점령하였다.
도이췰란드는 나우루섬에서 식민지통치를 26년동안 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인 1914년에 패전국이 되여 초라한 모습으로 나우루섬에서 쫓겨났다.
1919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종식된 후 영국과 오스트랄리아 그리고 뉴질랜드 3국은 전격적으로 BPC를 만장일치로 창설했다고 한다.
이 BPC의 창설로 인하여 나우루섬의 력사는 이른바 《나우루의 비극의 력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우루섬의 비극의 력사에 대하여 《혁명의 세계사》의 저자인 박남일은 이렇게 표현했다.
《지상락원 나우루공화국… 지옥이 되기까지》
지상락원 나우루공화국이 지옥으로 몰락한 과정에 대하여 지면상 제한으로 대략 간추려서 살펴본다.
ㄱ. 나우루섬 지표면전체에 고품질 린광석이 무진장 덮여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서유럽의 야만인들은 무섭게 나우루섬에서 린광석쟁탈전을 벌리고있었다. 나우루섬에서 도이췰란드를 몰아내고 영국, 오스트랄리아, 뉴질랜드가 성급하게 BPC를 창설한 리유도 바로 린광석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땅을 파기만 하면 나오는 고품질의 린광석에는 핵의 원료인 우라니움과 고급비료의 원료가 포함되여있었으므로 파내기만 하면 곧 막대한 돈이 되였다. 그것만으로도 나우루섬은 세계에서 쿠웨이트 다음가는 부국이 될수 있었다.
이때 BPC에게 불행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이 시작되자 도이췰란드가 다시 나우루섬에 돌아왔으며 이번에는 1942년 8월에 일본까지 합세하여 나우루섬을 완전히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인 1945년 나우루섬에서 떠나가고말았다.
하지만 전쟁으로 나우루섬은 완전히 파괴되였으며 일본군에게 징용으로 끌려갔던 원주민 1 200명중에서 겨우 737명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1946년에 이들을 모두 합한 나우루섬의 총인구는 1 369명뿐이였다.
1947년에 유엔의 기발을 들고 BPC는 또다시 나우루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이 BPC를 앞세워놓고 나우루섬을 유엔의 보호령으로 만들어놓았다.
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던가? 유엔의 보호령이 되여 BPC에게 귀중한 자원인 막대한 량의 린광석을 빼앗기고있다는 사실은 나우루섬사람들이 늦게라도 알게 되여 분개케 하였다.
교활한 영국은 시대적변천의 흐름을 강압적으로 막을수 없음을 인식하고 나우루섬의 린광석을 보다 교묘하게 략탈하기 위하여 차선책을 고안해냈다.
그 차선책은 무엇인가?
1968년에 영국은 나우루섬을 나우루공화국, 독립국으로 승인하는 조건으로 영국의 련방국으로 묶어놓고 Hammer Deroburt를 초대대통령으로 내세웠다.
독립후에 영국 엘리자베스2세녀왕은 나우루를 방문하여 뉴대를 견고히 했다.
Deroburt 초대대통령은 오스트랄리아에서 서양식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 친오스트랄리아와 친영국적정치로선의 선구자가 됐다. Deroburt는 대통령이 되는 조건으로 나우루의 린광석채굴권을 영국과 오스트랄리아에게 몽땅 팔아넘겼다.
채굴권을 외국에 팔아넘긴 값이 얼마인가? 오스트랄리아는 250만US$를 20년동안 지불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영국과 뉴질랜드는 또 별도로 거액의 돈을 약속하였다.
뿐만아니라 지난 100여년동안 린광석을 채굴한데 대한 손해배상금도 약속을 받았다.
나우루섬의 보물인 린광석의 채굴권을 몽땅 외국에 팔아넘김으로써 나우루섬은 갑자기 거대한 돈을 얻게 됐다. 굶주렸던 나우루민중들은 오랜 가뭄끝에 단비를 맞은것처럼 벼락부자가 된 기쁨으로 어쩔줄을 몰랐다.
1880년대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린광석을 빼앗겼을뿐만아니라 정치적으로 짓밟힌 한세기만에 드디여 독립이 됐고 땅에 덮여있는 린광석이 황금덩어리라는것도 알게 됐다.
나우루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을 필요가 없고 밭에 나가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게 됐다. 음식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하여 맛있는 통졸임들이 창고에 가득 채워져있고 햄, 햄버거, 콜라, 쏘세지 등으로 즐거운 생활에 익숙해졌다. 뿐만아니라 섬주위 전체 길이가 18㎞뿐인데도 오토바이와 자동차의 물결이 가득차게 되였다.
흘러넘치는 딸라로 외국에 투자하는 검은돈도 날마다 늘어났다. 외국에 투자한 부동산으로 더욱더 큰돈을 융자도 했으며 스위스를 본받아 남태평양의 검은돈을 보관해주는 은행도 개업했다. 수천억US$가 들락날락함으로 하여 자연히 나우루는 마피아와 세계 테로리스트들의 거래장소와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2001년에 9. 11뉴욕테로사건후에 미국은 테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나우루은행은 파산하고말았다. 나우루공화국의 초대대통령은 땅에 무진장 파묻혀있는 린광석을 담보로 잡고 대통령이 되였으며 또 국가의 운명인 린광석판매계약을 맺음으로써 집권을 시작했던것이다.
하지만 Deroburt 초대대통령은 1968년-1976년에 8년동안 집권하고 모든 책임을 후임자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사망했다. 그후 나우루는 혼탁한 정권들이 계속 등장하여 건국후부터 2011년까지 29명의 대통령들이 집권을 했는데 평균 1년 5개월동안 집권을 하는 단명의 대통령들로 교체되고있었다.
ㄷ. 그런데 나우루공화국의 사활이 달려있는 문제는 정치적불안에만 있는것이 결코 아니다.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무진장한것으로만 알고있던 린광석이 거의 바닥이 나고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사정없이 100여년간 파먹은 린광석이 이제는 나우루섬에서 거의 바닥이 나고있는것이 엄연한 사실로 드러났다.
오늘 나우루섬의 시급한 문제를 보는데 있어서 나우루섬에 린광석이 많고적음이 핵심이 아니다.
서유럽의 문명국이라고 자처하고있는 나라들의 물질적탐욕이 자연을 파괴할뿐만아니라 힘없고 순박한 민족들, 그들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운 삶을 제멋대로 파괴하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나는것은 우리의 조국 남녘에서 열띤 론쟁이 벌어지고있는 미국과의 FTA문제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미국이 마셜제도에서 핵시험보상을 회피하려고 작성한 이른바 Compact of Free Association과 FTA문건의 본질과 그 협의과정이 꼭같은가 하는 점이다.
수십페지에 라렬된 그렇게도 많은 조항들속에 담긴 조건들을 잘 살펴보면 마셜제도에는 불리하고 미국은 얼마든지 피해갈수 있는 부당한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있다. 전문가라도 쉽게 리해하기 곤난하게 만들어진 조약을 얼렁뚱땅식으로 통과시킨것이 바로 미국과 마셜제도공화국이 맺은 핵시험보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CFA조약인것이다.
미국은 CFA조약을 1983년에 마지못해 맺고 2004년에는 CFA개정안을 또다시 맺음으로써 끝에 가서는 마셜제도에서 그 무시무시한 핵시험을 67번이나 행하고도 이에 대한 보상문제를 룡두사미격으로 흐지부지 끝마치고말았다.
뿐만아니라 미국은 CFA협정을 악용하여 마셜제도에 미군기지를 확보하여 미군이 남태평양에 영구적으로 주둔을 할수 있는 법적조건을 만들어놓았다.
FTA의 《한국》-미국관계의 문제점과 CFA의 마셜제도-미국관계의 문제점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이다.
또한 《한국》에서 지금 《선관위디도스》문제로 인하여 떠들썩하고있는것은 별개가 아니라 그것은 나우루섬나라 대통령들이 눈앞의 탐욕과 리익을 위하여 미래를 팔아버린것처럼 《한국》의 《새누리당》이 눈앞의 권력욕을 위해 국가의 미래와 리익을 팔아먹는 행위와 꼭같다. 민주주의가 말살되면 《한국》의 력동성과 창조성은 끝난다. 별로 자원도 없는 《한국》이 력동성마저 잃는다면 끝장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