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주통일시대의 려명
3) 민족의 대단결을 위하여
위대한 도량과 포옹력으로
민족적위업인 조국통일위업의 성패는 그것을 이끄는 령도자의 정치지도력에 의하여 좌우된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은 누구도 따를수 없는 걸출한 령도력과 고결한 풍모를 지니시고 자주통일의 려명을 안아오신 조국통일의 구성이시다.
민족적량심을 지니고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조국통일의 길에서 함께 손잡고 나가야한다는것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드팀없는 신조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과거에는 비록 잘못된 길을 걸었어도 과오를 뉘우치고 통일위업에 이바지하려는 사람들은 과거불문의 원칙에서 관용으로 대하시며 민족적단합과 조국통일의 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김정일장군님의 넓은 도량과 포옹력에 이끌려 남조선과 해외의 수많은 인사들과 단체들이 그이를 따르고 조국통일성업에 이바지하게 되였다.
그속에는 남조선의 현대그룹 명예회장인 정주영과 그 일가도 있다.
정주영명예회장은 남조선의 현대그룹창업자로서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1995년 세계 10대의 억만장자중 9번째 순위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1996년 10월에 조사한 아시아의 대자본가 6명의 첫번째 순위를 차지한 대재벌이였다.
그는 남조선에서 그 누구의 덕으로 기업번영을 이룬것이 아니라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황소기질로 자수성가》한 민족자본가였다.
현대그룹은 미국이나 일본제자동차기관을 쓰지 않고 자체로 개발한 기관을 썼으며 이에 대하여 정주영명예회장은 남의것을 쓰는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고 말하군 하였다.
정주영명예회장이 평양에 와서 김정일장군님의 접견을 받고 나간 직후 미국대통령 클린톤과 미행정부의 대북정책조정관 페리로부터 면담요청이 제기된적이 있었는데 그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게로 그들의 요청을 거절해버리였다.
민족적자존심과 근면성, 바로 여기에 그의 체질적인 특성이 있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한생을 자본의 축적과 기업의 확대, 개인의 치부를 위한데 바쳐온 과거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 이바지하려는 그의 애국심을 소중히 여기시고 그가 판문점을 통해 공화국을 방문할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였다.
하여 정주영명예회장과 그일행은 1998년 한해에만도 세차례나 판문점을 거쳐 공화국을 방문하였다.
1차방문기간 정주영명예회장과 그일행은 평양시와 지방의 여러곳을 참관하고 금강산지구를 유람하였다. 그리고 고향인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를 찾아 친척들과 감격적인 상봉도 하였다. 또한 민족경제협력련합회와 남조선 현대그룹이 금강산관광사업을 비롯하여 여러 경제분야에서 협력할데 대한 합의서를 평양에서 채택하였다.
1998년 10월말 정주영명예회장은 또다시 평양을 방문하였다.
김정일장군님을 잠간만이라도 만나뵙고싶은 일생일대의 소망을 기어이 풀려는것이 그의 방문목적이였다.
그 절절한 소망을 헤아려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토록 바쁘신 속에서도 시간을 내시여 10월 30일 정주영명예회장을 만나주시였다.
그의 숙소를 찾아주신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정주영명예회장에게 다문 몇분간만이라도 나를 만나야겠다면서 내가 있는 곳이라면 어데건 찾아가겠다고 한다는 보고를 받고 고령에 있는분이 찾아오게 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가서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현지지도도중에 올라오다나니 이렇게 밤이 늦어서 만나게 되여 미안하다고 인자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접견석상에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북과 남, 해외의 공동의 관심사로 되고있는 금강산관광개발문제를 비롯하여 정주영명예회장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 풀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잘되고 잘살게 하자는 사람들과는 그 누구와도 언제나 손잡고 나갈것입니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날 헤여지기에 앞서 우리가 만난것을 기념하여 사진이나 찍자고 말씀하시였다.
정주영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헌이 김정일장군님을 가운데 모시고 아버지와 자기가 옆에 서서 찍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굳이 사양하시면서 나이많은 정주영선생이 가운데 서야 한다고 하시며 그의 손을 꼭 잡으시고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그 광경은 출신경력과 재산, 주의주장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적단합으로 민족공동의 번영과 조국통일의 앞길을 열어가시려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한없이 넓은 도량과 포옹력을 그대로 펼쳐놓은 력사적화폭이였다.
김정일장군님을 바래워드린 그들일행은 받아안은 감격과 충격이 너무 커서 잠들수 없었다.
《내가 오늘 김정일장군님의 접견을 받았다!》
정주영명예회장은 수행원들 방에 들어서면서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며 흥분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과시 장군이야. 김정일장군님은 대담하시고 시원시원하시고 통이 크시다. 장군님을 만나뵙고나니 정말 이제 통일은 다된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김정일장군님의 위인상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방면으로 들어 알고있었고 몇차례의 평양방문으로 공화국의 현실을 통한 간접적인 인식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정작 만나뵙고나니 김정일장군님처럼 경륜과 도량이 크시고 덕망과 인품이 출중하신분은 고금동서에 없었다.
정주영명예회장이 각별한 관심과 기대를 가진것은 김일성주석께서 서거하신 이후 김정일장군님께서 제시하신 조국통일에 관한 방략들이였다.
한것은 고향을 북에 둔 사람으로서 통일문제에 범상할수 없는 처지에다가 여든을 넘어선 인생이라는 일종의 조바심도 있었고 보다 중요하게는 세계에 손꼽히는 재벌로서 조국통일에 응당한 기여를 하고 생을 떳떳이 마쳐야 한다는 량심적인 자각에서였다.
바로 그러한무렵에 남조선의 집권상층이나 여당과 야당인사들, 대자본가, 군장성들도 민족공동의 리익을 귀중히 여기고 나라의 통일을 바란다면 그들과 민족대단결의 기치밑에 단합할것이라고 천명하신 김정일장군님의 로작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자》를 접한 그는 크게 흥분하였다.
나의 이 기업이나 우리 가문의 영달만을 위해 존재가치를 가진다면 나에게 무슨 애국이 있고 애족이 있으며 조선사람으로서의 량심이 있단 말인가. 민족의 통일과 번영에 이바지하는 기업, 애국애족에 헌신하는 기업가가 되자.
그는 자신의 결심을 하루빨리 김정일장군님께 아뢰고싶었다.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으로서 그이앞에서 아들에게 애국애족하는 기업의 계주봉을 넘겨주고싶었던것이였다.
그 소원을 이룬 감격이 너무도 커서 평소에 다른 사람의 말을 거의나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의 의사도 아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달하던 정주영명예회장에게 김정일장군님을 만나뵈온 자리에서 그이께 가슴속 간절한 소원도 거침없이 아뢰고 그이의 말씀을 죄다 알아듣는 생리적인 기적이 일어난것이다.
정주영명예회장은 김정일장군님의 접견을 받고 서울에 나가 평양방문소감을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내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장군이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어도 장군다운 장군은 김정일장군이 처음이다.》라고 말하여 남조선인민들을 크게 감동시키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취해주신 조치에 의하여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일군들과 현대그룹사이에 금강산관광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진행되였으며 여기에서 금강산관광사업을 추진하기로 토의하고 그와 관련한 합의서가 채택되였다. 그리하여 분렬사상 처음으로 금강산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관광의 길이 열리게 되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1999년 10월 1일에도 공화국을 방문한 정주영부자를 만나주시고 민족의 단합과 통일에 이바지한 북남경제협력의 개척자로서의 현대그룹의 지위를 더욱 높여주시였다.
정주영명예회장과 그 일가, 현대그룹에 대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은정과 믿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대를 이어 변함없이 이어졌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광폭정치의 해빛은 남조선언론인들을 비롯한 각계층 인사들에게도 따사롭게 비치였다.
진실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려는 립장에 선 사람이라면 남조선언론계의 누구와도 서로 힘을 합쳐나갈 용의가 있다는것, 그러한 언론인들과는 서로 대화하고 접촉하며 쌍무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나갈것이라는것이 김정일장군님의 뜻이였다.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귀중히 여기시는 김정일장군님의 이러한 숭고한 도량과 포옹력에 의하여 남조선의 많은 언론인들이 공화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이들은 방문기간 만경대와 백두산지구 항일혁명전적지, 국제친선전람관, 김일성종합대학, 인민대학습당,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비롯하여 평양과 지방의 여러곳에 대한 참관과 취재를 하였다.
남조선당국의 반북선전의 돌격대, 나팔수가 되여 나쁜짓만 골라한 죄의식으로 하여 북에 가면 《통제》때문에 취재는커녕 숨도 크게 쉬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던 언론인들은 정반대로 김정일장군님의 각별한 관심속에서 체류기간 자기들의 소원을 성취할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하기에 그들은 김정일장군님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위대한분》, 《우리 민족이 낳은 신화적인분》이라고 하면서 존경과 흠모의 정을 아낌없이 표시하였다.
백두산과 금강산을 돌아본 남조선언론인들은 당시 남조선당국이 미군과 함께 군사훈련을 벌려놓은것으로 하여 초긴장상태가 조성되였지만 비행기까지 내여 자기들의 취재와 참관을 보살펴주신 김정일장군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였다.
남측 당국이 자기네 사람들을 평양에 보내놓고 북을 반대하는 합동군사연습을 벌려놓아 난처한 립장에 빠뜨렸지만 공화국에서는 군용비행장을 열어주고 특별비행기를 배려해 백두산, 금강산참관까지 보장해주었으니 과연 누가 아량이 있고 화해의사가 있는가를 세인들은 스스로 판결하였다.
그후 남조선신문, 잡지들에 실린 그들의 공화국방문인상기들은 공화국의 현실에 대한 실감있는 선전물이 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해외동포들도 한품에 안아 사랑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여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애족의 길에서 한몫하도록 걸음걸음 이끌어주시였다.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는데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1998년 9월에는 윤이상선생의 사망 3돐에 즈음하여 윤이상통일음악회를 가질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고 음악회가 북과 남의 예술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합과 통일에 이바지하는 뜻깊은 회합의 계기로 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그리하여 남조선의 통일문화재단 사무총장을 단장으로 하는 서울연주단이 1998년 11월초 평양에서 북과 남의 예술인들이 한데 어울려 윤이상통일음악회를 성황리에 진행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민족대단결총서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자》가 발표된 1998년에 진행된 이 음악회는 북과 남의 예술인들을 화합에로 추동하는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윤이상통일음악회에 참가하였던 남측 예술인들속에서는 《극장도 훌륭하고 노래도 훌륭하며 평양도 아름답고 사람들도 정이 든다.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은 역시 성인이시고 큰어른이시다. 지금 남쪽에서는 <김정일장군의 노래>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돌아가서 보고 듣고 느낀것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음악을 해도 통일음악을 하겠다.》는 격정의 목소리들이 울려나왔다.
음악회에 참가하였던 윤이상선생의 부인은 《남측의 예술인들은 모두 기뻐 어쩔줄 몰라한다. 통일이 다된것 같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참으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펼쳐오신 광폭정치는 만사람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는 숭고한 인간애의 정치이며 민족의 모든 계급, 계층을 나라와 민족의 공동위업을 위하여 굳게 묶어세우는 가장 폭넓은 애국애족의 정치였다.
그 위대한 정치, 민족을 한품에 안아 보살펴주며 통일성업에로 이끌어주는 김정일장군님의 위인상에 매혹되여 온 겨레가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위한 장엄한 대오에 발걸음을 맞추어나갔다.
범민족통일운동의 확대강화, 3자련대 실현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자면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가 조국통일의 기치밑에 하나로 굳게 결속되여 통일열풍을 세차게 일으켜야 한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를 조국통일의 기치밑에 하나로 굳게 결속시키기 위하여 범민족통일운동의 확대강화와 3자련대실현을 위한 사업에 각별한 힘을 넣으시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잃은 커다란 상실의 아픔속에서도 수령님의 생전의 념원을 반드시 실현하실 의지를 안으시고 1994년 8월 제5차 범민족대회를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하시였다.
원래 제5차 범민족대회에 대한 구체적합의는 1994년 5월에 있은 제2차 조국통일범민족련합(범민련) 공동의장단회의에서 이루어진것이였다. 공동의장단회의에서는 제5차 범민족대회를 민족공동의 대축전으로 빛내이기 위하여 기본대회를 범민련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의 주관밑에 서울에서 하면서도 평양과 도꾜에서도 각기 대회를 진행하며 서로 대표단을 교환, 파견하기로 합의하였었다.
그런데 그해 7월 뜻밖에 대국상을 당하게 되자 범민련 북측본부와 관계부문 일군들은 이런 때 어떻게 범민족대회와 같은 행사를 벌려놓겠는가고 하면서 8. 15범민족대회를 그만두는것이 마땅한 도리로 된다는데로 의견을 모으고 제5차 범민족대회를 그만둘데 대하여 범민련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와 해외공동사무국에 통지하려고 하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1994년 8월 4일과 5일 해당 부문의 일군에게 범민족대회를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이번에 진행하는 8. 15범민족대회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이후 처음으로 진행하는 범민족대회인것만큼 수령님의 전민족대단결사상을 받들어 조국통일운동을 힘있게 전진시켜나간다는것을 과시하도록 특색있게 크게 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제5차 범민족대회는 예정대로 진행되게 되였다.
북과 해외측에서는 일정대로 평양과 도꾜에 대표들을 파견하였지만 김영삼일당의 악랄한 탄압과 방해책동으로 하여 북측대표단의 서울파견과 남측대표단의 북행길은 차단되였다.
그리하여 평양에서는 북과 해외측 대표들이 참가한 대회가 열리고 서울에서는 당국의 방해책동으로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성원들에 대한 체포구속소동과 그에 항거하는 범민련측의 단식롱성투쟁이 벌어지는 첨예한 정세속에서 간고하게 진행되였다.
일본 도꾜에서도 제5차 범민족대회가 성과적으로 진행되였다.
그후 범민족대회는 모두 이와 류사한 정황에서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여왔다.
내외의 반통일세력의 악랄한 도전속에서도 중단없이 진행된 범민족대회들과 북과 남, 해외의 각계층 인사들과 단체들의 접촉과 래왕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대화와 협상이 진행되는 속에 북과 남, 해외의 3자련대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은 1990년대말에 이르러 더욱 세차게 벌어졌다.
당시 조선반도에는 어느 시각에 전쟁이 터질지 모를 긴장한 정세가 조성되고있었다. 미국은 침략적인 《5027작전계획》을 공개하고 북의 이른바 《지하핵시설의혹》과 《미싸일문제》, 《생화학무기문제》 등을 들고나와 정세를 고의적으로 긴장시켰으며 여기에 일본과 남조선의 호전계층들이 합세하여 《응징》이요, 《대비태세확립》이요, 《선제공격》이요 하면서 전쟁준비를 로골적으로 다그쳤다. 이러한 정세속에서도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선군령도로 굳건히 다져진 강력한 군력과 일심단결의 힘에 토대하여 겨레의 거족적인 통일운동을 추동하기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령도하시였다.
김정일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공화국에서는 1999년을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로 정하고 민족대단결의 기치밑에 조국통일의 새 국면을 열어나가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통일애국력량의 3자련대련합을 보다 높은 단계에서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1999년 3월초에 중국의 베이징에서 진행된 조선직업총동맹대표단과 남조선의 전국민주로동조합총련맹(민주로총) 대표들사이에 북과 남의 로동자축구대회개최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접촉과 그후 활동, 1999년 6월 중국의 룡정에서 진행된 문익환목사회고모임, 3월과 5월에 중국의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7차 범민련 공동의장단회의와 제9차 범청학련 공동의장단회의 등 여러 갈래의 회담과 회의, 접촉들은 통일애국세력의 3자련대련합실현에 적극 기여하였다. 북과 남, 해외의 이러한 3자련대련합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99통일대축전 10차범민족대회를 통하여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되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1999년의 새해정초부터 제10차 범민족대회가 북과 남, 해외 3자련대의 대회로 되도록 그 방향과 내용, 형식과 방법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그에 따라 행사의 명칭이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10차범민족대회(략칭 범민족통일대축전)》로 정해짐으로써 범민련 남측본부뿐아니라 전국련합, 민주로총과 같은 범민련밖의 단체대표들도 이 대회에 참가할수 있게 되였다.
이리하여 축전사상 처음으로 남조선의 기본통일운동단체들인 범민련 남측본부와 전국련합, 《한총련》대표들 그리고 민주로총대표와 민주로총 로동자통일축구선수단도 참가하게 되였으며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10차범민족대회를 계기로 남조선통일운동단체들의 단합도 이루어지게 되였다.
1999년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평양에서는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10차범민족대회가 성대히 개최되였다.
여기에는 남측대표 43명, 해외동포대표 350명을 포함하여 북, 남, 해외의 70여개 정당, 사회단체대표 2 500명이 참가하였다.
축전에서는 김정일장군님의 조국통일사상연구토론회, 금수산기념궁전(당시)광장에서의 통일결의대회가 개막전 행사로 진행된데 이어 성대한 개막행사,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착공식, 3자련합대회와 예술축전, 북남로동자축구경기 등 다채로운 정치, 문화, 예술, 체육행사들이 진행되였다.
8월 15일 판문점에서 진행된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3자련합대회에서 연설자들은 민족분렬의 수난을 가시고 통일조국을 일떠세우는것은 우리 세대에 맡겨진 성스러운 민족적임무라고 하면서 이번 대회를 계기로 3자련대와 련합을 더욱 강화하고 통일의 새시대를 향하여 전진해나가자고 호소하였다.
이어 판문점 통일각에서 진행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99범민족회의에서는 조국통일3대헌장을 범민련의 기본정치로선으로 재확인하고 그것을 철저히 관철해나가며 북과 남, 해외의 애국의 3자련대로 미, 일, 남조선의 침략과 매국의 3자공조를 저지파탄시킬데 대하여 강조하면서 통일애국력량의 련대련합을 강화하고 민족대단결로 조국통일의 강력한 주체적력량을 마련함으로써 가까운 년간에 삼천리강토우에 부강번영하는 련방제통일국가를 일떠세우기 위하여 힘차게 싸워나갈 결의들이 표명되였다.
축전은 거기에 참가한 북, 남, 해외조직단체대표들의 규모로 보나 토의확정한 문제의 성격과 중요성으로 보나 행사들의 정치사상적수준과 형식의 다양성으로 보나 반세기 통일운동사상 처음으로 되는 거족적인 대정치축전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1999년 8월 15일 일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이번 축전에서 어버이수령님의 유훈대로 범민련운동사상 처음으로 북과 남, 해외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음으로써 우리 시대에 와서 3자련대가 빛나게 실현되게 되였습니다.》
생전에 범민련통일운동에서 북과 남, 해외의 3자련대를 실현하시려고 그리도 마음쓰시던 김일성주석의 뜻을 이루고 조국통일운동의 돌파구가 열리게 된것이 너무도 기쁘시여 김정일장군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였다.
북과 남, 해외의 3자련대가 실현됨으로써 통일운동이 전민족적범위에서 더한층 조직화, 적극화되게 되였다. 이리하여 통일을 지향하는 애국세력과 반통일분렬세력사이의 력량관계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조국통일운동에 유리한 환경이 마련되게 되였다.
조국통일운동에서 북과 남, 해외 3자련대의 실현, 그것은 김일성주석의 조국통일유훈을 기어이 관철할 철석의 통일의지를 지니신 김정일장군님께서 조국통일3대헌장의 기치밑에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이끌어오신 탁월한 령도의 결과였다.
그 령도에 의하여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민족의 통일운동사에 자랑차게 기록될 자주통일시대의 려명을 마중하는 력사의 기적을 창조하게 되였다.
선군으로 마련된 공화국의 불패의 위력에 미국이 굽어들어오고 조선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서유럽나라들의 평양행이 잦아지는 속에 분렬로선을 악랄하게 고취하던 남조선당국도 겨레의 드높은 통일열기를 외면할수 없어 어쩔수없이 조심스럽게 평양에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