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력사의 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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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의 소회의실에서 벌어진 의원축하연회는 오후 여섯시경에야 끝나갔다.

주탁에는 리승만과 프란체스까 그리고 신성모와 이번에 신익회를 밀어내고 《국회》의장으로 된 리기붕이 자리잡고있었다.

리승만은 붕어눈처럼 두드러져나온 눈으로 이따금 연회장의 여기저기를 휘휘 둘러보며 취흥에 도도해진 측근심복들과 눈길을 맞추군 하였다. 리승만의 게슴츠레한 눈이 한바퀴 돌아갈 때마다 아첨으로 이골이 난 간신들이 그 눈길을 붙잡고 추파를 던지느라 신경을 쓴다.

서울시안의 이름난 남녀가수들의 축하노래도 끝났다.

연회가 파할무렵에 신성모가 리승만에게 뭐라고 귀속말을 하였다.

그러자 리승만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난 다른 일도 있고 해서 실례하겠습니다. 이번 선거가 우리에게 커다란 패배로 끝났지만 여기에 참석한분들은 모두가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피로를 다 가시고 돌아들 가시오. 그리고 래일부터는 한사람이 열을 당해낼 만만한 배심을 가지고 발이 닳도록 뛰여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취기가 거나해있던 장택상이 두번째탁에서 꿩다리를 뜯고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함지르듯 웨쳤다.

《여러분! 〈대통령〉의 만년장수를 위해 다시 건배!》

그러자 먹자판에서 흥을 돋구던 리승만의 심복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쳐들었다.

리승만은 그들에게 두손을 들어 몇번 흔들어주고는 방안을 울리는 요란한 박수에 떠밀려 뒤문으로 사라졌다.

리승만이 사라지자 상전의 눈밖에 날가봐 은근히 숨을 죽여가던 참가자들은 기다린듯 활기를 띠고 더욱 어지럽게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어느 탁에서는 저가락장단에 맞추어 권주가가 울리는가 하면 어느 탁에서는 한 놈팽이가 일어나 《여러분― 아, 여러분―》하고 연신 손세를 써가며 리승만을 찬미하는 시조를 엮어댔다. 거기에 가무에 출연했던 녀인들까지 어울려들어 술판이 어지러워져갔다.

리승만의 비서 신정섭이 정시명이 앉아있는 말석 연회탁에 총총히 다가왔다.

그는 정중하게 여쭈었다.

《리사선생, 〈대통령〉께서 찾으십니다.》

비서의 전갈에 같은 식탁에 앉아있던자들이 대통령의 개별초대를 받은 정시명을 부럽게 쳐다보았다.

정시명은 신정섭의 뒤를 따라 연회장을 천천히 가로질러갔다. 크게 결심을 다지고나선 길이지만 막상 이제 리승만과 마주친다고 생각하니 저으기 긴장되였다.

신정섭은 응접실의 문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정시명을 잠시 쳐다보았다. 중국의 서안시절부터 별다른 조직관계를 따로 가지지 않고서 정시명이 주는 일감이라면 쾌히 받아안고 등탈없이 수행하여온 그였다.

신정섭은 지금 정시명이 어떤 대결에 나섰는가를 똑똑히 알고있었다. 그래 눈길에는 불안의 빛이 력력하였다.

정시명이 그의 심정을 헤아려 고무해주듯 고개를 크게 끄덕여보였다.

신정섭은 머리를 설레설레 내젓다가 정시명을 남겨놓고 먼저 방에 들어갔다. 인차 돌아나오는데 낯색이 여간 무겁지 않다.

《선생님, 〈대통령〉의 기분이 요즈음 좋지 않습니다. 위기감에 싸여 매우 초조해하고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주의하여주십시오.》

신정섭은 감옥과 교수대에로 이어질수 있는 위험천만한 길에 오르는 존경하는 지인의 걸음을 막아서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당부하였다.

《신선생, 그동안 고마왔소.》

정시명은 신정섭이 그동안 사심없는 협조를 해온데 대하여 짤막하게 사의를 표하고나서 중절모를 벗어쥐고 문을 열었다.

리승만이 쏘파에 허리를 붙이고있다가 정시명의 정중한 인사에 손을 약간 들어 화답했다.

《어서 오시오. 우리 국방장관이 당신에 대해서 말했소. 자, 이리 가까이 앉으시오.》

리승만은 말없이 묵례를 하는 상대의 금새를 타진하려는듯 그의 거동을 눈여겨 살피였다. 리승만은 코마루며 입귀며 턱주걱이 무쇠처럼 강하게 다져진듯 한 상대의 준수한 모습에 사뭇 끌리는바가 있어 눈빛이 부드러워지고 긴장이 풀렸다.

리승만은 사처에서 제놈의 목을 치겠다는 소리가 들려오는 때여서 방문객들에 대하여 무척 조심해온다.

정시명은 프란체스까가 리승만의 옆에 암고양이처럼 옹크리고 앉아 노랑눈알을 반들거리는게 얄미웠다.

요즈음 경무대안주인의 발언권이 상당히 높아지고있다는 이야기를 들은바가 있었다.

어느날 신정섭은 비서실의 한 친구가 쫓겨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씨라고 하는 친구가 프란체스까의 비위를 거슬린 탓으로 쫓겨났는데 그로 말하면 이미 하와이시절부터 리승만의 곁에서 경호원으로 복무하여온 리승만의 손때묻은 노복이였다.

박씨는 비서실에서 쫓겨난것이 억울하여 리승만을 찾아갔다. 리승만은 그의 말을 들으며 한참동안 천정만 멍하니 쳐다보다가 밑도 끝도 없이 《자네 결혼했나?》하고 물었다.

박씨가 결혼전이라고 하자 리승만이 한다는 소리가 《명담》이였다.

《자네도 결혼하면 알게 될거야. 저 사람은 내 마누라야. 저 사람말을 안들어주면 밤낮으로 나를 조르고 싸움하고 해서 내가 견딜수가 없어. 자네들이 받아줘야지. 내가 안팎으로 괴로워 견딜수가 있나.》

박씨는 리승만이 마누라 치마폭에 감겨사는 무골충인줄 이제야 알았노라고 이를 갈며 경무대를 떠나갔다고 한다.

프란체스까는 리승만이 경무대에 들어선 후로 남편의 건강에 과잉반응을 일으킨다는 리유로 반정부적인 신문은 일체 리승만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리승만의 기분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방문객도 철저하게 배제하도록 하였다. 그 리유는 《리승만은 〈대통령〉이기 전에 내 남편》이니 남편의 신변잡사는 마땅히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것이다.

가뜩이나 독선적인 리승만이 프란체스까까지 옆에서 치마바람을 일쿠며 돌아치는 바람에 국정의 출발점으로 되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여 어느 놈 하나 충언이나 직언을 하는자가 없었다.

이런 기억이 더듬어지니 정시명은 프란체스까가 붙어있는게 께름직하였다.

단독회견을 기대했는데 리승만이 제일 무서워하는 《보호자》가 붙어있으니 리승만의 행동반경이 줄어들고 의사소통이 구속을 받을것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어쩌는수가 없다. 이왕 부닥쳤으니 이제 돌아설수 없다. 그렇다고 프란체스까를 내쫓아달라고 요구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정시명은 쏘파에 단정히 앉아서 리승만내외를 바라보다가 먼저 정중하게 말을 뗐다.
《〈대통령〉께서 친히 저의 요청을 받아주시여 실로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도 국민의 한사람으로 각하의 정사에 관심이 큽니다.》

《허, 그래… 한데 자넨 어디 태생인가? 말씨를 보면 이북같은데…》

《예, 황해도에서 나서 자랐습니다.》

《하, 황해도? 황해도 어디기에?》

리승만은 종전까지의 경계의 빛을 풀고 흔연한 어조로 반색을 보이였다.

《평산이올시다.》

《성함이 뭐라고 했더라?》

《정향이라 합니다.》

《하, 옳아. 그쪽에 정씨들이 많이 모여살지. 그래 춘부장은 어떻게 부르시오?》

《정치겸이라 합니다.》

《정치겸?… 정치겸… 가만, 거 듣던 이름이다. 춘부장이 평산의병대에서…》

《예, 우리 부친이 평산의병대 대장으로 있었습니다.》

《하, 그렇군. 그 유명한 의병대 정치겸대장의 자제분이시군. 어, 훌륭해 훌륭해. 정치겸씨야 평산골의 간판인물이지. 평산골에 가본지도 참말로 까마득해. 이제 또 언제면 가볼려는지. 무정한 세월일세.》

리승만은 몇해전에 정시명을 만난적이 있었지만 까맣게 잊고있었다. 더구나 리승만은 마주앉은 상대가 이번에 방대광을 돌려세워 자기의 지반을 일격에 허물어버릴번 했던 정시명이라는데 대해서는 상상도 할수 없었다.

리승만은 동향인이라는것으로 하여 친밀감이 부쩍 동하였다.

(그러니 내 발부리에 와서 한자리 달라는 수작인가.)

은연중 회심의 미소가 서서히 피여났다. 큰자리 줄법도 하다. 비범한 기질이 첫눈에 띄우는 이 동향인을 장차 측근에 기용하면 여러모로 안성맞춤일것 같다. 충복이라 불러왔던 인물들을 여러가지 결점을 꼬집어 자꾸만 쫓아보내고나니 정적들만 늘어나고 지금은 곁에 두고 국사를 론해볼만 한 인물이 없다. 그래 군부에 의거하고 정보정치에 의거하는수밖에 없는데 총쏘기나 알고 명령집행이 체질화된 인간들에게 포로되고보니 안전에 대한 념려가 덜어지기는 하지만 내세우는 정책이 깊이가 없어 무쵸까지도 리승만의 정사는 아이들 유희라고 저들의 국무성에 송사질한다고 한다.

리승만은 방문객의 금새를 더 봐가지고 수하에 두리라고 속구구를 하였다.

《그래 이야기해보게. 중대문제를 통보할것이 있다고 했다는데…》

《예. 각하의 신변문제와 금후 거취와 관련한 문제입니다.》

《신변문제?!》

리승만은 그 소리에 눈부터 휘둥그래져가지고 말꼬리를 높였다. 《대통령》감투를 쓴지 아직 이태도 되지 않았는데 목을 따겠다고 돌아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요즈음은 꿈자리가 찜찜한게 불길한 조짐이다. 방대광이요, 리범석이요 하는 적수들의 이름을 내건 사건들이 꼬리를 잇달아 일어나더니 또 어느 놈이 목을 치려 경무대의 대문을 넘어서겠다는건가.

근래에도 경무대 현관밑을 지나간 하수도에서 암살을 노린 폭탄장치물이 발견되여 경무대경찰서가 법석 끓었다.

《저에게 무기명편지가 왔습니다. 자기의 집단이 경무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있는데 필요한 무기구입을 위해 자금을 지원해달라는것이였습니다.》

《무엇이?… 어떤 놈이?… 그래서?…》 리승만이 화들짝 놀라 엉뎅이를 들썩거리며 입술을 푸드드 떨었다.

《저는 그가 지정한 장소에 거사의 리유에 대하여 묻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회답편지가 왔는데 력사가 굼벵이처럼 너무 굼뜨게 흐른다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암살은 후계자의 출현을 앞당길뿐이라고 대답해주고 거사를 지원할수 없으며 나아가서는 그만두는게 좋겠다는 충고를 보내주었습니다.》

《어휴… 그거 참 잘했네. 잘했어. 정선생, 과시 애국지사의 후손다워!…》

리승만은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내 어제 저녁에 은빛룡이 구름을 거느리고 경무대에 훨훨 날아드는 꿈을 꾸었는데 당신같은 귀인이 나타날 꿈이였구려, 고맙네, 우리 국민이 다 정선생처럼 〈대통령〉을 봐주어야 할텐데.》

리승만은 두사람의 대화가 좋게 풀려나가는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덩달아 기쁨에 젖어있으면서도 딱히 영문을 몰라 새파란 눈을 껌벅거리는 프란체스까에게 오고가는 이야기들을 추려 영어로 설명하였다.

그러자 찾아온 손님을 경계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흘겨보던 프란체스까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시명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영어와 조선말을 뒤섞어 《정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대통령〉의 안전은 〈한국〉의 안전입니다. 제가 당신을 도울 일이 무엇이겠습니까?》하고 자못 곰상스레 인사를 차렸다.

그러자 정시명은 류창한 영어로 대답하였다.

《프란체스까부인, 부인도 이 나라 국민을 잘 리해하여주십시오. 〈대통령〉이 장수하자면 국민을 위한 옳은 정사가 이루어지도록 부인께서도 〈대통령〉의 집무를 잘 보좌해드려야 할줄로 믿습니다.》

프란체스까는 정시명의 말뜻을 가려내느라고 새파란 눈을 데룩거리며 애교있게 고개를 까딱거리였다.

정시명이 의도했던대로 분위기는 더없이 화락해졌다.

《그래, 옳은 말일세. 정사가 바로되자면 모두가 대동단결해야 하는거여. 헌데 시국이 너무 어수선해. 돌아봐야 지사들은 사라지고…》

리승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시명에게로 어정어정 걸어와 그의 어깨를 자못 친근하게 두드려주며 장탄식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내 아까 〈국회〉의원들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국민이 몹시 우매하거든. 이번 선거에서 내 사람들을 겨우 서른명 〈국회〉에 밀어주었는데 그러면 〈대통령〉은 가뜩이나 소란스러운 서울정사를 어떻게 헤집고나가라는거냐.

정선생도 이 남〈한〉땅을 두루 살펴봐서 알겠지만 이 나라가 이만큼이라도 명줄을 근근히 이어가는건 미국이 우방국으로 우리의 국권을 지켜주고 기계를 굴려주고 국민을 먹여주기때문이요.

헌데 미국이 누굴 믿고 제 돈주머닐 털어 만리대양밖의 이 약소국에 선을 베풀어주는것이냐, 그래 이 우남(리승만의 호)이 저승길에 오르면 단돈 한푼 놓고도 〈국회〉가 통채로 들썩거리는 그 양인들이 이 나라에 손을 내밀것 같은가.

그건 또 그렇다치고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정선생도 정치현장의 수렁창을 발로 밟아봤겠지만 이남정치라는게 꼭 아비규환이야, 아마 이 리승만이 물러나면 서울정계라는건 산산쪼각으로 분해되여 공산당이 큰 품 들일것 없이 이남땅을 깔고앉을걸세. 그물이 천코라도 벼리가 으뜸이라 했거늘 그래 무장지졸 천만인들 〈한국〉을 버텨낼것 같은가?》

리승만은 제김에 격앙되여 《신변걱정》을 해준 《귀인》을 대상하여 일장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리승만은 입안이 마르는지 프란체스까가 따라주는 차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마디마디 역기가 오르게 하고 가소롭기짝이 없는 늙은 두상의 궤변에 정시명은 속이 뿌질뿌질 괴여올랐으나 참고 들어주는수밖에 없었다.

두상의 체질은 두해전보다 조금도 달라진게 없다. 그러나 이 황구렝이같은 늙다리를 주물러보자면 우선은 밸집까지 드러내놓게 해야 한다.

《그럼, 〈대통령〉께서는 〈한국〉이 맞다든 현 위기상황을 타개할 그 무슨 방략이 있습니까?》

《방략?… 하, 방략이야 이미 세상에 나가있지. 〈북벌〉로 공산주의를 타승하고 국경을 압록강으로 밀어올리면 만사가 태평스러워지고 이 우남을 바라보는 국민정서도 좋아질걸세.》

《〈북벌〉이라면 전쟁이 아닙니까? 지금 국민이 절박히 바라는건 평화롭고 통일된 하나의 강토인줄 압니다. 그리고 우리 이남이 무슨 힘으로 〈북벌〉을 하겠습니까?… 방대광이 38°선에서 불질을 하다가 서울까지 쫓겨나온 전례도 있지 않습니까.》

《아닐세. 힘이 있네. 우리의 힘은 미국일세. 미국이 있는데야 뭐가 겁날가, 공산주의를 박멸하지 못하면 우린 언제든지 편안치 못해.》

《그래도 이북당국자들이 광복이래 평화적인 협상을 통하여 나라를 통일하자고 계속 제안해오지 않습니까. 저간에 평화통일호소문을 가지고 온 북의 사절들을 억류한것때문에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것 같습니다.》

《국민감정?… 국민이란 곬을 따라 흐르는 물이요, 노젓는대로 떠가는 배와 같은것이라 그까짓 상관할게 없소.》

예까지 기고만장해서 허장성세를 부려오던 리승만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김구가 지난해에 소장파 의원들앞에서 했다는 말이 웬일인지 이 순간 뇌리에 피끗 떠올랐던것이다.

김구는 수능재주 능복조라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지르기도 한다면서 백성을 숙보지 말아야 한다고 력설했다.

그 소리를 내무장관하던 윤치영으로부터 전해들었을 때 리승만은 속이 섬찍해지기부터 했었다.

정시명은 더는 미국놈의 턱찌끼로 살찌고 미국놈의 사환군노릇을 자랑하는 로구와 시비를 캐는것이 무익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늙은 역적은 권력을 위하여 낡은 제도를 고집하고 외세에 아부하면서도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다. 무너져가는 반통일통치체제를 미국의 힘에 의거하여 지켜보려고 버둥질을 하고있으며 전쟁이라는 민족적재난도 서슴없이 들씌우고저 한다.

(정치가의 존엄과 수치에 대한 티끌만 한 리성적판단도 상실한 역적… 애국렬사 리준은 리조말엽의 통치배들이 권력싸움에 환장이 되여있는 꼴을 개탄하면서 그것들을 망에다가 썩썩 갈아버렸으면 시원하겠다고 하였지.

정말 이 추한 놈들을 다 없애야 나라꼴이 제대로 될것이 아니냐.)

정시명은 속안에 홍두깨처럼 뻗쳐오르는 분격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는 응접탁우에서 재깍거리는 사발시계를 불안스럽게 바라보았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 할 소리는 다하고 일어서야 될게 아닌가. 권력욕에 분별을 잃고 사는 이 늙다리에게 이 땅의 량심과 리성을 깨닫게 해야 한다.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민족자주의 사상과 넓은 도량을 전해야 한다. 나에겐 시간이 없다.

정시명은 은근히 조바심을 느끼고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숨을 길게 내그었다.

이제는 외교는 걷어치우자. 이놈의 비위살이 얼마나 두꺼운지 보자.

그의 눈에서 두줄기의 빛발이 뻗쳤다. 터질듯 한 의분을 가까스로 자제하고 담담하게 공격을 시작하였다.

《〈대통령〉각하. 방금 하신 각하의 이야길 들으니 시 한수 떠오릅니다.

 

                                              내 소원 2천만과 함께

                                              나라 잇는 백성이 되고지고

                                              늘그막에 시골로 돌아가

                                              한가한 사람으로 지내련다》

 

《하, 그건…》

리승만은 때없이 나타난 《생명의 은인》이 자기의 변변치 못한 시구를 더듬는것이 너무도 희한해서 입을 넋잃은 놈처럼 헤―하고 벌리며 탄성을 질렀다.

그 이른바 시구란 리승만이 귀국할 때 비행장에 환영나온 기자들앞에서 자못 감개무량해서 읊조린것이였다. 뒤날에 리승만의 몸값을 올리는 선전에 널리 리용되여왔었다.

《각하,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께서 읊조린 이 시구의 참의미를 다시 풀이하고싶습니다.

각하의 소원이 2천만과 함께 나라 잇는 백성이 되는것이라 했거늘 참말로 고명한 뜻입니다.

오늘 우리 국민은 평화와 통일과 번영을 애타게 바라고있습니다. 이 소원이 말로써는 이루어질수 없다는 판단이 나섰기에 지금 이남국민이 경무대를 향하여 주먹을 들고 총을 내대고있습니다.

각하, 백성의 신음소리에 이제라도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거침없이 불을 토하듯 쏟아져나오는 절규에 게슴츠레히 감겨져있던 리승만의 눈에서 흰자위가 번뜩거렸다. 그놈은 오만상을 해가지고 상대의 근엄한 모습을 노려보기 시작하였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리승만은 그악스레 죄여드는 단죄의 그물에서 벗어나려는듯 몸을 부르르 떨다가 겁에 질린 소리로 물었다.

《대통령각하, 몇해전에 당신을 방문한적이 있는 장개석국민당의 서안판사처 처장이였던 정향이올시다. 그리고 다시 소개해드린다면 하지적부터 미국사람들이 찾고있는 정시명입니다.》

《정시명?… 정시명이라니… 바로 그 정향이?!…》

리승만은 두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기억이 더듬어지자 완전히 얼이 빠져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화닥닥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프란체스까가 령감이 기절초풍해진 까닭을 딱히 모르면서도 불덩이같이 이글거리는 두눈과 무쇠로 빚어놓은듯 한 턱을 가진, 첫눈에도 범상치 않아보이는 사나이를 자못 신비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금껏 서울정치인들치고 이렇듯 리승만의 앞에 와서 제 소리 내면서 울분을 터뜨려 열변을 토하는 사나이를 본적이 없다. 리승만의 앞에서는 누구라없이 발라맞추느라 애쓰면서 리승만이 조금만 언짢아하여도 눈에 초점이 없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군 하기가 일쑤다. 그 꼴불견들을 고소하게 보아오면서 한국의 《황후》라는 말에 담겨진 오만과 위세를 한껏 누려오는 프란체스까였다.

한데 이 사람은 어찌된 일일가!

그러나 점차 프란체스까는 사나이의 눈에 적의와 분노가 서려있고 담담하고도 박력있게 엮어가는 이야기에서 리승만의 얼을 단번에 눌러버리는 마술과도 같은 힘과 재능과 위엄이 느껴지자 얇다란 눈까풀에 드리운 노란 속눈섭이 바르르 떨었다.

그는 리승만의 곁에 와서 나직한 영어로 물었다.

《저 사람은 무슨 얘기를 하는겁니까?》

《내 정사가 옳지 않다는거야.》

리승만이 입부리를 뭉툭하게 내밀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프란체스까의 파릿한 눈꼬리가 우로 들리더니 성난 고양이상이 되였다.

《저의 말을 저 사람에게 통역해주세요.》

정시명에게로 돌아서며 앙칼스레 쏘아붙이였다.

《이분의 신경을 너무 자극하지 말아요. 경무대안방에서는 정사에 대해서는 론할수 없어요. 아시겠습니까?》

정시명은 발끈거리는 이 서양계집의 신경질적인 어조에 아량있게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책망조로 훈계하였다.

《당신의 말을 통역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인, 당신은 그래서는 안될분입니다. 〈대통령〉의 24시간은 국사를 위한 시간입니다. 다시말하면 〈대통령〉의 시간에는 제몫이 따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정시명이 거침없는 영어로 점잖게 면박을 가하고는 그를 무시하듯 다시 리승만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프란체스까가 더욱 골이 올라 양양거리였다.

《난 저분의 안해입니다. 년세가 많은 〈대통령〉에게 해되는 말을 해서 좋은 일이 뭐입니까?》

《부인, 내 말투가 귀에 거슬리면 잠간 자리를 비워주지 않겠습니까? 난 지금 이 나라의 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습니다. 부인은 우리의 대화가 취중에 나누는 고담으로 들리는게 아닙니까? 년세가 많아 이런 말 듣기 싫으면 〈대통령〉자리를 파하게 하면 됩니다.》

《뭐라구요? 각하,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굽니까?》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정시명의 열변에 그 녀자의 방약무인의 눈초리에서는 악의의 불꽃이 팔팔 일었다.

《이 사람은 통일하자는 사람들의 두목이야.》

리승만이 입부리를 쑥 내밀고 심술궂게 대답하자 프란체스까는 겁에 질린 토끼모양으로 몸을 흠칫 떨더니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정시명은 리승만의 대답을 확인하고싶어하는 눈섭오리마다 앙심이 돋친 프란체스까의 눈길을 받자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흥!》

프란체스까는 정시명을 향하여 코방귀를 뀌더니 치마바람을 일쿠며 방에서 나가버렸다.

정시명은 경무대안방의 어지러운 뒤생활을 보여주는 단면적인 토막에 메스꺼움을 느끼였다. 돌아가는 말그대로 리승만의 역적체질은 저 녀자와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된것이 아닌가. 저게 도대체 이 나라 민중의 사활에 털끝만 한 관심이 있는 계집인가. 저런걸 경무대의 안방에 들여앉혀놓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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