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결 전 전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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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도의 번민은 뜻하지 않은 리승만의 호출이 있은 때로부터 더욱 커갔다.

(또 정시명의 체포가 늦어지는데 대한 추궁이겠지. 헌데…)

오성도는 경무대를 향해 차를 타고가면서도 자기의 상대역에 대한 생각에 줄곧 잠겨있었다. 이미 체포된 《흥국상회》성원들에 대한 심문기록들이 종합될수록 오성도는 그 미지의 인간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과 선망의 감정이 서서히 싹트고 나날이 커가고있다는것을 느끼고있었다. 실로 길지 않은 인생에 일찌기 없었던 야릇하고 기이한 일이였다. 적수에 대하여 사랑을 느끼다니, 이럴수 있느냐.

《흥국상회》성원들은 하나같이 정시명이나 정향에 대하여 입을 봉한다. 그중에서 김명호와 그의 처와 안지생, 최남수, 윤미향은 분명히 정향의 주변에서 움직인것이 사실같은데 아무리 때리고 위협하고 얼려도 그에게 털끝만치도 피해가 갈세라 절벽같이 버틴다. 치안국의 수사과장인 김창기는 고문현장에서 피를 토하고 숨지면서도 《이놈들아, 정향을 안다면 어쩔테냐. 내 열번 죽더라도 그분을 상하게 할것 같으냐?》하고 마지막말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헌데 그들은 자기들의 삶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에서는 한결같다.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하여 배심있게 자랑하며 자기들의 승리를 확신한다. 자기들은 매국으로 굴러가는 이 나라의 력사를 애국으로 돌려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것이라 선언한다. 한마디한마디를 주어모아 그들이 주장하는 애국이라는 탑을 세워놓고보니 우선은 그 규모가 거창하다. 그다음은 탑의 안팎이 눈부시다. 애국이라는 그 한마디로 그 빛에 이름을 달기에는 너무도 황홀하다. 그 빛을 막거나 꺼버릴수 있다더냐. 그들의 피와 땀과 지혜로 쌓아올린 그 성스러운 탑은 이미 이 나라 력사에 우뚝 솟아있으니 그 건립자들을 모살해버린다고 허물어낼수는 없다.

그는 《흥국상회》가 일떠세운 그 신성한 탑의 의미를 씹어볼수록 그 탑을 뿌리채 드러내기 위해 앞장에서 로심초사를 다하고있는 자신이 가련해졌다. 일생토록 가슴에 세워두고온 반공의 뿌리깊은 기둥이 서서히 흔들리고있는것을 자기도 스스로 인식하고있었다. 그는 자기의 심신을 압박하는 그 괴이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고집스럽게 반발하기도 하였다.

(아니다. 《흥국상회》와 공산주의, 정시명과 공산당은 별개의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변명일뿐이고 그들을 마주하면 가뭇없이 녹아내리고만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였다. 그것은 자기라는 인간의 파멸을 뜻하는 놀라운 일이였다. 인생의 뜻과 목표를 잃고 흔들리는 자신을 느낄수록 고독과 허무와 울적한 매연이 가슴에 서서히 쓸어들어 그를 괴롭혔다.

경무대의 응접실에서는 노불까지 리승만의 옆에 앉아 그 하마상통을 찡그리고 그를 표표한 눈길로 맞아주었다.

《임자, 말해보게. 정시명을 언제 나한테 잡아다 바치겠나?》

리승만은 비서의 안내로 문턱을 넘어선 오성도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노려보며 앉으라는 말도 없이 비린내나는 악청으로 고아대기 시작하였다.

《자네 일개 부장검사에게 군, 검, 경찰의 수사권을 안겨주었는데 어째서 정시명이라는 사람이 여전히 미국과 나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이 서울에서 활개치게 하고있는가?

노불씨, 이 사람에게 이야기하여주시오. 그 얘길 해야 이 사람이 정신들거요. 그리고 내가 왜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한명의 수배인물을 두고 안달복달인가 하는걸 알것 같애.》

리승만은 노불에게 말꼬리를 넘겨주었다. 노불이 하마상을 끄덕이고나서 책상우에 있는 얄팍한 문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 읽어보시오. 그다음에 이야기를 합시다.》

오성도는 그들이 서두르는 잡도리가 범상치 않아 문건을 받아 훑어보았다. 다 읽고났으나 오성도는 문건이 담고있는 내용이 인차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노불에게로 고개를 돌리는데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의 앞에 다가와 장대처럼 두다리를 버티고선다. 그는 불쑥 노랑털이 부수수한 주먹을 오성도의 눈앞에서 신경질적으로 내두르며 이새로 내뱉았다.

《정신을 차리시오, 본부장, 이건 당신네 사단장 방대광이 북과의 비밀교섭에 나서서 이북당국에 보낸 밀서요.》

《뭐라구요?… 우리 군사단장이요?!》

오성도가 소스라치듯 놀라서 반문하였다.

군대란 권력의 상징이다. 정치인은 정치의 향방에 대한 제나름의 선택권이 있지만 군대란 정치에 개입해서도 안되며 더구나 군인이 정치권의 동요에 따르는것은 엄금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런데 군의 고위인물인 사단장이 북과의 비밀교섭에 나섰다니?… 그것도 이남군부의 실력자라는 사람이…

《누가 벌려놓은 소동인가, 여기에 문제가 있소. 정시명, 그렇소. 바로 정시명이 그를 움직였단 말이요.》

《근거가 있는 소리입니까?》

《멍텅구리… 당신은 멍텅구리요.》

노불은 입가에 랭소를 지으며 모욕적인 언동을 서슴지 않았으나 오성도는 그전처럼 반발할만 한 배짱이 없어졌다. 일은 너무도 엄중하게 번져가고있는것이다. 그것이 자기의 공작부진과 련결되여있다는 사실앞에서 오성도는 발뺌을 할수 없었다. 기가 죽고 얼이 빠졌다.

《옳아. 다들 멍텅구리들이야. 파수군이라는 사람들이 떨떨하니 이렇게 국체가 흔들리지 않는가, 엉?》

리승만이 심사가 뒤틀린 어조로 뇌까리였다.

《사태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줄수 없습니까?》

노불은 서울검사의 록록치 않은 눈에서 파릿한 불찌가 날아오는것 같은 매서움을 느끼자 비웃는듯 한 표정을 짓고 거만하게 응수하였다.

《뭘 구체적으로 말해달라는거요? 이것이 전부요. 이 밀서가 향하고있는 방향과 목표점이 무섭지 않소? 38°선지역의 평화지대 선포, 북과의 군사회담 즉각 개최, 화평통일지향… 이게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당신은 두렵지 않은가? 이건 대통령과 미국의 <북벌>의지에 대한 로골적인 도전이고 배신이요. 이게 바로 당신의 수사본부의 무능력, 직무태만으로 검거가 늦어지고있는 정시명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말이요.

이건 평양에 잠복한 믿을만 한 소식통에서 통보해온거요. 물적증거는 바로 이 방대광의 밀서요. 그의 밀사는 그 사람들이 평양에 억류해놓고 평양수뇌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놓았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 당신의 어깨너머에서 벌어졌는지 이제는 리해가 가오? 한개 사단이 반변하면 그와 가깝던 다른 사단들도 그에 합세할수 있소. 보시오, <대통령>각하가 흥분하게 되지 않는가.

당신에게 밝힌 이 모든 자료가 극비사항이라는걸 밝혀두오. 한시간전에 바로 이 자리에서 방대광사단장자신이 이 모든 사실에 대하여 솔직하게 시인하였소.》

이 천추에 용납 못할 죄악을 저지른것은 박헌영일당이였다.

박헌영은 자기의 정보선을 통하여 방대과의 밀사가 38°선을 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해주로부터 미행하다가 사리원쪽에서 억류해놓고 그 정형을 노불에서 지급으로 통보하였던것이다. 박헌영일당이 밀사를 억류해놓은것은 방대광이 평양수뇌부에 손을 뻗치기 전에 거사의 비밀을 서울에 통고하여 방대광을 돌려세우기 위한 시간을 얻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노불의 말대로 한시간전에 방대광이 경무대에 불리워왔다. 방대광은 노불이 리승만앞에서 물적증거를 제시하고 따지고들자 더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을 시작해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자고 했다고 어정쩡하게 시인하여버렸다.

리승만은 눈알이 새빨개가지고 유다같은놈이요, 국체를 송두리채 흔들어놓을 역모를 했소 등 마구 험한 소리를 들부어댔다. 그리고 즉석에서 그를 38°선에서의 패배를 책임져야 한다는 죄명으로 예편시킨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밀사파견문제는 일체 불문에 붙인다는 약속을 하였다. 생각같아서는 광복이래 자기와 턱없이 맞서온 방대광을 《보안법》에 걸어 목을 치고싶었지만 그 후과가 두려웠다. 그의 배경세력이 들고일어날수도 있고 또 이 사건을 떠들어봐야 군부의 동요에 부채질하는것으로 되지 《대통령》이 리득을 볼건 아무것도 없다고 노불이 한길되게 펄펄 뛰는 리승만을 가까스로 눌러놓았던것이다.

방대광은 뒤통수에 가해진 너무도 뜻밖의 타격에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있다가 이발을 으드득 갈며 떠나갔다.

방대광이 모종의 보복을 준비할수 있다고 생각한 리승만은 방대광과 그의 친지들에 대한 주야감시를 조직할것을 군방첩대장에게 명령하였다. 그리고 방대광의 대리인을 그의 반대파인물들속에서 선발하여 이날중으로 급파할것을 국방장관에게 지시하였다.

오성도는 경무대에서 나오는 길로 방대광부터 찾아갔다. 수사본부에 부를가 하다가 그의 몸값에 맞는 례우를 차려야 될것 같았다. 북과의 접촉사건을 흑막속에 묻어두려는 리승만의 뜻을 접한지라 조용히 찾아갔다.

방대광은 홀로 방안에서 술병을 기울이고있다가 오성도를 보고 대뜸 밸머리가 동한듯 나직이 고함을 질렀다.

《왜 왔나? 체포냐?》

오성도는 방금 경무대에서 자초지종을 다 듣고 왔다는것을 넌지시 암시한 후 이렇게 부탁하였다.

《저는 방사단장님을 아끼시는 <대통령>각하의 뜻에 감복되였습니다. 한가지 부탁드리렵니다. 정시명을 댁에 조용히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건 왜? 체포에 협력해달라는건가?》

《적당히 생각하십시오. 아무쪼록 사단장님도 <대통령>의 은총에 보답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체포에 협력해주시면…》

《그 사람을 다치지 말아. 그 사람은 김장군의 대표야!》

방대광은 기름탈박을 쓴듯 매끄럽게 반들거리는 오성도의 이마에 날카롭게 눈길을 박으며 주먹으로 연신 허공을 내리찍었다.

《사단장님, <한국>의 안보가 걸려있는 특별사항입니다. 이미 사단장님도 정시명에 대한 특별수배령을 받으셨겠지요? 협조를 부탁합니다. 저는 <한국>의 파수군이 아닙니까.》

《이봐, 리승만의 파수군노릇 똑똑히 해. 그리고 혀바닥롱간은 그만두어.》

《사단장님…》

《왜 성가시게 굴어. 날더러 네놈들의 밀정노릇 해달라는거야? 이 방대광은 평생에 양지에서 칼을 뽑아들었지 음지에서 남의 뒤통수 찌르는 비렬한짓은 해본적이 없어. 이 방대광을 무슨 꼴로 만들자는거야?》

방대광은 울화가 치밀어올라 장검의 칼잡에 손을 얹은 오른손을 부들부들 떨며 방이 떠나갈듯 소리질렀다.

어찌된 영문인지 오성도는 협조부탁에 무섭게 분노하여 그가 삿대질하는, 이제는 퇴역장성에 불과한 이 사람이 밉거나 야속하지 않았다. 정시명이라는 인간의 진가를 옳게 리해하는 방대광의 분노가 오히려 돋보이고 그 인간을 옹호해나서는 그 배짱이 무사다와보였다.

그는 방대광의 집에서 나오자 수사본부에 가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대통령》의 명령을 집행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할가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처는 없고 북에서 달고내려온 국민학교 다니는 열살잡이 아들이 그림책을 뒤적이고있었다. 이 녀석이 머리가 총명하고 지능계수가 높은듯싶어 오성도는 여느 자식들보다도 특별히 애정을 기울여 보살펴왔다. 거목이 될건 애잎때부터 알아본다고 아이적모양새를 보면 그 아이의 래일이 어렵지 않게 짚이운다. 그애는 아버지가 습관처럼 부엌에 나가 술병에 까나리 한보시기를 갖고 들어오자 제법 술잔을 기져다놓는다. 그리고는 술 한잔을 따라준 후 맛갈스럽게 들이키는 아버지의 모양을 눈이 올롱해서 쳐다보고는 상옆에 무릎을 끓고앉아 그림책에 정신을 팔았다.

진종일 신경전을 벌리는것이 업인 오성도는 집에 들어오면 술로 밸을 적셔놓아야 지저분한 세계에서 잠시나마 피해서서 기분을 전환하고 잠자리에 편하게 들수 있었다.

사실 이 사회에서 검사일이란 사람들의 밑을 쑤시는 추한 일이다. 살아가면서 같은 값이면 밝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양새를 감상하며 밝게 웃으며 살지 못하고 어둡고 구린내나는 리면세계를 파헤치는 고달픈 일을 한생의 전부로 선택한것이 이따금은 크게 후회되기도 하였다. 사회의 어지러운 놈팽이들을 맡아 죄를 따지고 형벌을 씌울 때면 자신도 그 악하고 천스러운 일에 휘말려 인생이 덞어지고 속이 오염되는 메스꺼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자들이 걸려드는 경우는 다르다. 그들에게서 느끼는 충격은 매번 다르지만 공통되는것은 그들모두에게서 인간의 향기와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것이다. 그 향기로움속에서 리성의 목소리가 당당하게 울린다. 그들에게 오직 리념적원쑤라는 의미에서 보다 혹독한 형벌을 들씌울 때면 오성도는 법관의 고뇌를 다른 각도에서 괴롭게 절감하군 한다.

머리속에 감겨드는 고민과 충격과 모순적인 아픔을 가셔던지는데는 알콜보다 더 효능높은 안정제는 없다. 몇잔이 연거퍼 목구멍에 들부어지자 오성도는 정신이 몽롱해지고 사뭇 기분이 나서 능금알같이 발갛게 익은 아들의 볼을 찰싹찰싹 귀엽게 도닥여주었다. 녀편네나 있으면 이런 때 끼고 누우면 만사가 태평해지고 세상잡사에서 해방되여 단잠에 들수 있으련만

《엄마는 어데 있느냐?》

《장보러 갔어요.》

《그래?… 좋지.》

집안의 화목을 도모하자면 그 역시 품을 들여야 한다. 중요한것은 가정의 대소사에 관심을 가지는것이고 집안사람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는것이다. 오성도의 처나 아이들은 늘 그에 대하여 불만이다. 집안일에 너무 관심이 없고 집에 와서는 쇠통 입을 다물군 하니 재미가 적다는것이다.

(그래, 그래… 소귀신이 돼서야 사는 멋이 아니지.)

오성도는 녀편네의 푸념질이 떠올라 제 홀로 벙긋거리고는 알콜기분에 번거로운 상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입을 열었다.

《무슨 책이냐? 자꾸 보는건 좋지만 아무거나 봐서는 안된다.》

《명인전이야요. 재미있어요.》

《음, 명인전… 좋지, 너도 크면 명인이 돼야 한다. 암, 돼야 하구말구.》

《난 아버지처럼 검사가 될래.》

《뭐야?… 그래서는 안돼.》

오성도는 혀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아들에게 왜 검사가 돼서는 안되는가 하는 설명을 할가 하다가 그만두고 책을 돌려주며 훈계했다.

《얘, 이런 책을 재미로만 보는게 아니야. 명인들이라는건 이름이 유명하도록 큰 일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어떻게 명인이 되였는가, 명인이 되자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것을 찾아내서 배우고 그들처럼 살아가야 한다. 검사는 절대로 돼서는 안돼.》

《그런데 아버진 왜 하나요?》

《아버지?… 아버진 말이다, 하는수없이 배운 일거리다.》

오성도는 자기 아들에게는 인간들의 뒤를 쑤시는 치사스러운 일거리를 넘겨주고싶지 않아 이렇게 뚝 부러지게 반대부터 해두었다.

《참 아버지, 림꺽정을 아나?》

《알지, 황해도에서 살던 짐승잡는 사람이였다. 그때 말로는 백정이라 했다.》

《포도청이란 뭐나? 림꺽정이 포도청에 끌려갔다고 했어.》

《포도청… 포도청이란 죄인들을 잡아가는 곳이지.》

《그럼 아버지같은 일을 하는 곳이구나. 그래서 순돌이새끼 나보고 너의 아빤 포도대장이야 하구 놀려댔구나.》

《뭐 나더러 포도대장이래?… 어느 자식이?…》

철부지들이 던진 말이지만 무심결에 오성도는 골이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애녀석이 애비의 때없는 호령질에 꿈틀 놀라자 오성도는 제풀에 싱겁게 웃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버진 말이다. 포도대장은 아니다.》

《그럼 뭐나? 포도대장은 나빠.》

《그래, 그래… 하여튼 난 포도대장은 아니다.》

오성도는 아이의 질문에 대답이 궁해 이렇게 말해놓고는 조무래기와 더 얘기해볼 흥이 없어져서 웃방에 올라가서 침대에 네활개를 펴고 누웠다. 어쩐지 속이 메슥메슥해진다.

(림꺽정… 포도대장… 나, 오성도는?…)

아들녀석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다시 귀전에 울려 취기를 가셔버리였다.

(내가 포도대장이란 말이지. 순돌이새끼가 그랬다고?… 그 자식 애비가 적색인가?… 하긴 그 말도 그럴듯해. 난 지금 정시명을 잡아들이기 위해 만들어진 포도청의 우두머리이다.)

뜻하지 않게 그의 눈앞에 수염쟁이사나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데서 봐두었던가? 그렇지, 총리방에서였지. 가만…)

오성도는 쇠그물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자기를 힐끔 쳐다보던 그 서글서글한 눈, 숱진 눈섭아래 깊이 패인 눈확에서 예리하게 번쩍이던 눈동자, 채수염을 길게 드리웠어도 억세고 강렬한 매력으로 해서 자기의 눈길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던 맑은 얼굴… 뇌리를 강하게 때리는것이 있었다. 얼음덩이를 통채로 삼킨듯 서늘한것이 흉곽을 메운다.

(정시명! 바로 그가 정시명이다. 육감적인 느낌이다. 그날의 일이 지금도 수수께끼였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거기에 복잡한 조간이 있었던것 같다. 리범석의 돌발적인 무장인원 호출, 그 다음에는 련이어 돌발적으로 내려진 정향의 양딸에 대한 석방명령, 그러니 그날 정향이 례영이라는 양딸을 구원하기 위하여 직접 총리공관에 나타나 일종의 담판을 벌린것인가?

음, 그렇댔군!… 아니, 그뿐이 아니다. 방대광밀사의 북행과 때맞추어 공개된 리범석의 화평통일주장, 이것도 정시명의 입김을 쐬운 리범석의 동향변화가 아닐가? 한생토록 반공을 부르짖어온 방대광을 돌려세운 사람이 총리인들 움직일수 없겠는가. 아니, 그들은 평생숙적이라 했다. 리범석은 정향에 대한 암살작전만 해도 서너차례 벌려왔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그럴수 있을가?…)

그날 리범석의 사무실에서 봤던 수염쟁이가 정향, 나아가서 정시명이라는 육감을 버릴수가 없었다. 정시명이라는 인물을 가리우고있던 안개가 잦아들고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자 오성도는 그 인간의 비상한 담력과 재주에 대하여 더욱 탄복하게 되였다.

(확실히 정시명은 명인이다. 이 나라의 명인집에 오를만 한 품격과 실력을 겸비한 명인이다. 그렇다면… 뒤날에 그가 명인집에 오를 때 나는 그를 옥에 가두게 하고 림꺽정의 목을 친 포도대장같은 인물로 후손들에게 전해질게 아닌가.

하, 일은 그렇게 돼가겠군. 애녀석들이 신통한 말을 골라냈군.

겨레의 수난을 덜고저 고향땅을 버리고 서울에 와 목에다가 수백만금의 현상금까지 걸어놓고도 끄떡없이 미국것들과 맞서 실로 세상을 경악시킬만 한 일을 련이어 제껴온 정시명, 그는 분명 이 나라의 통일명인집에 전해질것이다.)

생각이 예까지 이르자 밸을 휘저어오던 취기는 가신듯 사라졌다. 그대신 머리통이 뻐개지는듯 아파났다. 그 미지의 인물이 지금 오성도라는 인간이 한생토록 세워온 리념과 삶의 가치를 일조에 허물어버리고있다.

(파수군이라… 리승만이 말했지. 파수군이 떨떨해서 국체가 흔들린다고, 흥, 방대광도 나를 리승만의 파수군이라 빈정거렸지. 그래 그는 파수군노릇을 그만두었겠다.… 내가 왜 리승만의 파수군이 돼야 하는가. 리승만이 곧 《반공》이 될수 있는가. 《대통령》벙거지에 자만도취하여 그 자리 지키기 위해서 세월을 보내가는 인간… 내가 정말 썩어빠진 조정을 지켜 무고한 충신들과 의로운 지사들을 쳐죽인 포도대장에 불과한 리승만의 파수군이란 말인가. 허, 등식은 그렇게 성립이 되는군. 리승만의 파수군이라… 세상에 이런 고약스러운 일이라구야. 오성도, 네가 참말로 가련한 인생이구나. 리승만의 파수군이라…)

오성도는 무서운 전률을 느끼며 몸을 우스스 떨었다. 애초에 그에겐 마음속에 다듬어세운 리념이 없었다. 그 무슨 지향이든지 고결하다고 자기를 위안할만 한 삶의 목표가 있었던것도 아니였다. 자기들의 선친들이 대를 이어온 재부와 명예와 권력을 고스란히 넘겨받아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것이였다. 그래서 일본에 건너가 법을 배우고 신의주에 돌아와 법관이 되였다. 법관이 되여서야 비로소 자기는 《반공》이라는 《리념》을 세우고 그 《리념》을 지켜야 한다는 한생의 좌표를 세우게 되였다. 리념간의 모순과 대립이 극대화된 서울에 와서 공산주의냐 반공산주의냐 하는 더욱 엄격한 리념의 재판을 받게 되였고 여기서 반공의 세계만이 자기와 자기의 가정과 자기 계급을 품어줄수 있다는것을 더욱 투철하게 깨닫게 되였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정시명이라는 미지의 인간을 접하면서 비교적 정립되여있던 신조가 흔들리고 생활관이 혼란에 빠지게 되였다.

(통일이냐 반통일이냐, 이것은 리념과도 다른 갈래이다. 리념의 범주로써는 해석할수 없는 민족의 사활권과 관련되는 새로운 정의가 나와야 하는 개념이다. 정시명의 수하인물들이 주장하듯이 통일은 이 나라가 기록해온 력사이고 또 세워나가야 할 이 나라의 존재방식이다. 오늘은 외세때문에 국토가 량단되였지만 언젠가는 이 나라가 통일이 되고야말것이다. 통일된 력사가 오늘의 서울에서 벌어지고있는 한산하기 그지없는 당파싸움과 《리념》들의 각축전을 평가할 때 정시명이라는 인간은 분연히 력사의 정의인으로 우뚝 솟을것이다.

그러면 오성도, 너는 어떻게 전해질것이냐.)

대답을 고르기에도 겁이 났다.

(이미 애녀석이 락인을 찍어놓았다. 포도대장이라… 리승만조정의 파수군이라… 이건 정치가 아니라 인생에 관한 문제이다. 나 오성도가 그래서는 안될것이 아닌가. 몸을 담가온 어지러운 인간들의 란무속에서 솟아날 길이 없을가? 나는 풍요로운 생활의 세계에서 격리되여 살아왔어. 권력의 격페된 공간에서 대담하게 광명한 대공으로 솟아오를 용기가 없느냐.

하지만 솟아나면 이 오성도가 통일민족이 번성할 수려한 강산에서 몸을 의탁할 곳이 따로 있을가. 나같은 인간들을 품어줄 보금자리가 나설가. 숱한 공산주의자들의 피로 얼룩진 이 손을 어데 가서 깨끗이 씻어버릴수 있을가. 아, 정치의 제물이라는게 이렇게도 구차스러운것인가. 썩은 정치, 부패한 제도, 그것을 지켜선 파수군, 피도 열도 다 얼어붙은 랭혈인간, 오성도를 두고 후손들이 분렬패륜의 교형리라고 락인을 찍어놓게 되였으니 이 무슨 인생비극인가.)

그는 자신에 대한 끝없는 환멸과 래일에 대한 공포의식으로 하여 미칠것만 같았다. 그는 드디여 정시명의 피만은 자기 손에 발려서는 안되겠다고 굳이 결심을 다졌다. 정시명을 모살해치운 력사의 죄인으로 전해지는것만은 무슨 수를 내든지 피하고싶었다.

더구나 그 사람은 김일성장군의 대표가 아닌가.

오성도는 자기가 찾아낸 이 리유를 놓고 크게 흥분하였다. 뒤날에 이남땅에 붉은기가 휘날린다고 하더라도 김장군의 대표를 살려주었다는 보증만 있다면 생명에 대한 담보쯤은 얼마든지 받을수 있을것이라고 단정하였다.

(한번 도박을 해보자. 공산권에 그만한 투자를 해두는것이 만약을 위해서 현명지책이다.…)

미래에 대한 공포, 그로부터 벗어나보려는 약빠른 타산적인 결심이 굳어지자 오성도는 즉시로 움직였다. 오성도는 기민하고 머리가 잘 도는 인간이였다. 그리고 마음속의 행동지령이 내리면 번개처럼 움직인다. 그는 마당의 수도가에 나가서 수도물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찬물을 머리에 끼얹었다. 그리고는 이내 자동차를 집으로 불렀다. 서대문감옥으로 곧추 달려가 김명호를 불러냈다. 김명호에게 제기된 상황과 자기의 결심을 간단히 설명하고는 경찰병원으로 보내여 석방시키도록 하였다.

그는 자기의 신호가 정시명에게 가닿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이것은 그가 세상에 나서 제 이름 석자를 가진 때로부터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겨레앞에 고인 《량심의 봉사》였다. (물론 그자체도 자신의 미래를 위한 보신책이기는 했지만.)

오성도는 김명호를 풀어놓고는 다시 집에 돌아와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였다. 그리고는 웃방에 올라가 안으로 문을 닫아걸고 자기가 이미 해놓은 일을 놓고 후회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밤새도록 끝없이 주절거리였다. 자기의 리념과 목적과 삶의 가치가 일조에 뿌리뽑혀져 거들거리기 시작한것이다. 자기가 해버린 일은 지금껏 복무하여온 세계에 대한 명백한 배신행위였다. 자기가 지켜온 리념에 대한 도전이였다.

(관직은 국가복무의 상징이다. 결국 제도에 도전하고 국가를 반역한것이다. 다름아닌 장차 《반공》리념의 선두주자가 될 포부를 키워온 이 오성도가 이럴수 있는가. 이건 모반이다. 국가역적만이 할수 있는 변절행위이다. 나와 정시명, 그것은 한쪽은 국가를 대표하여 심판을 내리는 쪽이며 한쪽은 반국가적행위로 심판을 받아야 할 쪽이다. 한쪽은 공산주의요 한쪽은 반공산주의다. 여기에 타협이 있을수 있는가. 나의 생의 목표란 무엇이냐. 법을 가지고 이 나라를 수호하는것이다. 그런데 그 법의 칼날을 여겨보니 녹이 쓸고말았다.…)

오성도의 사색은 점점 안개자욱한 미궁속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렸다. 아무리 머리통을 싸쥐고 생각을 짜내야 변명거리가 똑똑히 나서지 않는다.

(겁에 질렸는가? 배가 침몰되니 숨어있던 쥐새끼들이 달아나듯이 나도 바야흐로 숨이 져가는 《한국》이라는 괴물로부터 이제는 손을 떼자는건가. 그까짓 머리를 썩일게 없다. 분명한것은 난 그 인간에게 사형을 선고할데 대한 기소장에 나의 수표를 남길수 없다는것이다. 에잇, 될대로 되라지.)

오성도는 이렇게 이날의 마음속의 번민을 끝장내고는 안해가 기다리는 아래방으로 안식을 찾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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