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가을날의 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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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하늘은 먹장같다. 그 시커먼 구름장으로 일시에 시뻘겋게 단 총창같은 번개불이 솟구쳐올랐다. 그것은 이제 벌어질 무시무시한 천지재변을 예고하듯 시커먼 하늘을 번쩍 토막내고는 구름장속에 자취를 감춘다. 이어 서울바닥을 통채로 뒤흔드는듯한 굉음이 터졌다.
《꽝―꽈르릉―》
리조 500년력사가 묻혀있는 도시가 두터운 구름장들에 짓눌린채 요란한 뢰성에 깜짝 놀라 움씰움씰거린다. 우뢰가 불러온듯 일진광풍이 휘몰아왔다. 후려때리는 폭풍에 한강의 버들숲도 화들짝 놀라 가지를 부러뜨리며 와실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꺾어질듯 한쪽으로 쏠린 나무들에서 황이 든 잎사귀들을 사정없이 훑어내자 그속에 깃을 내렸던 한무리의 새들이 기겁을 한듯 하늘로 날아올라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난다. 거리에 나딩굴던 허접스레한것들이 순식간에 하늘에 떠올라 이리저리 불안스럽게 날아다닌다. 또다시 눈부신 불살이 꺼매진 하늘중천을 찢으며 희끗거린다. 하늘을 바스러뜨릴것 같은 뢰성이 바로 머리우에서 터졌다. 그것은 시커먼 갑옷을 떨쳐입은 천군만마가 하늘에서 한바탕 격전을 치르며 울부짖는 비명소리처럼 앙칼지고 야단스럽다.
《꽝― 꽝― 꽈르릉》
엄청난 지각변동을 예고하는듯싶은 그 요란한 뢰성에 쫓기여 행인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아직도 초가을의 땡볕을 쫓느라고 가벼운 차림을 하고다니던 시민들은 빛을 잃은 시커먼 하늘을 무시로 쪼각을 내는 번개와 뿔뿔이 흩어져 격전을 치르고있는 하늘의 고함소리에 전률한듯 벌써 우산을 펴들거나 처마밑에 기여들어 이제 대지를 함부로 두드려댈 억수를 기다리기도 한다.
《에, 가을하늘에 무슨 날벼락이야. 하늘이 지독도 하군. 그저 통채로 무너져내릴것 같군.》
방금 탑동공원입구에 차를 세운 김아성은 하늘땅을 진동하는 굉음과 쉴새없이 펑끗거리는 번개를 불안하게 쳐다보며 눈을 빨다가 그에 도전하듯 큰소리로 투덜거리였다.
그는 자동차조향간을 잡은채 차창을 열고 공원안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후두둑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콩알만큼이나 굵은 알갱이다.
《한바탕 쏟아놓으려나… 허참, 하필이면 요런 때…》
비를 피할만한 곳이 눈에 띄우지 않자 괜히 역증을 내며 다시금 투덜거리였다. 경무대경찰서 경찰관인 김아성은 륙군본부 타자수인 순애의 긴급상면요구를 받고 그가 정해놓은 장소에 나왔던것이다.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니 1분전 여섯시다. 순애가 이리로 오느라고 바싹 달아오른 서울바닥을 함부로 두드려대는 비에 흠뻑 젖을가봐 근심이 컸다.
1분이 지나자 공원입구로 연분홍색의 반소매적삼에 옥양목바지를 받쳐입은 순애가 빨간 머리수건을 머리우에 펴들고 비방울을 막으며 종종걸음으로 들어섰다.
(저렇다니깐, 맹꽁이… 어디서 비를 긋고 올 노릇이지.)
김아성은 마음이 급해나서 차문을 열다말고 경적부터 몇번 울리였다. 그리고는 꼬리가 붙지 않았는가 방금 순애가 걸어오던 쪽을 살펴보고 다른 기미가 없는것을 확인하자 다시 처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경적소리에 주춤거리던 처녀의 갸름한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순애는 수건을 감아쥐고 이쪽으로 뛰여왔다.
《어서!》
김아성은 서둘러 뒤문을 열어주며 손을 내밀었다.
순애는 김아성의 정겨운 눈빛을 할끔 쳐다보고 그가 내미는 손을 잡으며 물었다.
《오래 되였나요? 하마트면 홈빡 젖을번 했네.》
순애는 깨끗한 자동차안에 흙묻은 발을 올려놓기가 미안해서 그즈음 류행이던 굽이 높은 구두를 콩콩 몇번 땅에 그루를 박고서야 차에 올랐다.
《아니, 나도 방금전에… 이걸 쓰고있으라구.》
김아성은 처녀가 미안해하지 않게 도리질을 해보이면서 알싸한 향수내가 풍기는 웃옷을 벗었다. 그러면서도 솜씨있게 그려놓은 반달눈섭아래에서, 기쁨이 찰랑이는 애인의 예쁜 눈매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순애는 그러루한 보살핌에 습관이 된듯 아성이 내미는 경찰옷을 선뜻 받아 어깨에 걸치고나서는 방긋 웃었다.
쫙― 비가 쏟아진다.
두사람은 한동안 차창밖으로 퍼붓는 비줄기를 내다보다가 서로 마주보며 웃음을 지었다.
요행 저 폭우를 면한것이 순애 당사자보다 아성이 더 기쁘다.
《하마트면…》 아성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제야 처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순애를 곱다고 하기보다 매력있다고 하는것은 살짝 내불린 입술아래에 곱게 패여져내린 턱이다. 끝이 밭으면서도 탄력있게 휘여내린 턱은 고운 눈매와 곧추선 코마루와 어울려 어디라없이 뭇사람들의 눈길을 쉽사리 끈다.
이 몇해사이에 순애는 무척 달라졌다. 가냘퍼보이기만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가늘고 애리애리하던 목대도 실팍해지고 늘쌍 아래로 떨어지던 눈길도, 고개도 버젓이 바로섰다. 핼쑥한 두볼에 살이 올라 희미하던 보조개가 오목 패이고 팽팽히 부풀어오른 가슴팍이 처녀의 한창시절을 소리없이 뽐내고있었다.
달라진것은 용모만이 아니였다. 누구와 마주서면 수집음이 앞서서 뺨부터 감빛이 되던 처녀가 성격이 활발해지고 말수도 무척 늘고 다듬어졌다. 천성인가싶던 수심도 말끔히 가셔지고 오히려 웃음이 헤플사 해졌다. 《흥국상회》의 사람들은 너나없이 순애가 제 모양새를 의젓하게 바꾸었다고 혀를 찬다. 아성이만은 안팎으로 달라지고 성장하는 애인의 모습을 눈앞에 보면서도 너무 익숙되여 별다른 감촉을 느끼지 못할뿐이였다.
순애는 몸이 훈훈해진듯 아성의 웃옷을 벗어 앞좌석에 놓더니 가슴팍에서 돌돌 만 미농지를 꺼내여 그에게 넘겨주었다.
아성은 그것을 받아 안주머니에 간수하고 이내 발동을 걸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약간 들뜬 어조로 쾌활하게 소리쳤다.
《아서원에 가야지.》
아서원 2층 5호실은 그들이 즐겨찾는 단골이다. 김아성과 순애는 늘 이렇게 만나면 그곳에 들린다. 에스키모에 생과자를 씹거나 아서원의 간판음식인 우동 한그릇 청해놓고 락화생을 까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여지군 한다.
아서원 녀주인도 그들의 사이를 알고있으므로 이 사랑스러운 한쌍이 애정에 겨워 팔을 끼고 문턱을 넘어서면 각별히 맞아주군 한다.
녀주인은 정을 다해 사모하여온 려운형이 피살된 후로 이따금 정시명이 나타날 때면 눈물이 글썽해서 맞이하였고 정시명의 그림자처럼 뒤따라 들어서는 김아성도 남다른 정으로 받아들이였다.
김아성이 다시 웃옷을 받아입고 막 떠나려 할 때 순애가 그의 팔소매를 잡았다.
《아니 오늘은 안되겠어요. 장가가 저녁 여섯시에 타자실에서 대기하라고 했어요. 경무대에 긴급보고할 문건이 있다나봐요. 정일권이 도꾜에 갔다온 자료라나요.》
장가란 순애의 상관이고 정일권은 륙군참모차장이다.
순애가 빠른 말씨로 리유를 설명하자 아성은 시무룩하니 고개를 끄덕이였다.
일은 참 맹랑하게 됐다. 기다려지던 황금같은 시간을 놓쳐버리다니.
그는 여기로 오기 전에 례영이와 함께 정시명의 사업을 보장해주고 왔다. 애인과 만날 시간을 타산하여 한시간후에 다시 오기로 승인까지 받고 쏜살같이 달려왔던것이다.
《하는수 없지. 어데까지 갈가?》
김아성은 허우룩한 속을 달래이며 물었다.
《혜화동 로타리까지.》
자동차는 차체를 가볍게 떨다가 앞으로 씽하니 달리기 시작하였다. 또다시 하늘에서 시퍼런 섬광이 번쩍하고 우뢰가 우지끈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김이 빠진듯싶다. 번개도 우뢰도 소나기도 쫓기우듯 서쪽으로 밀려간다.
비발도 가늘어지고 구름장도 엷어지기 시작하였다.
김아성은 이따금 후사경으로 뒤좌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처녀의 얼굴을 슬금슬금 엿보군 하였다. 동그란 어깨를 옹송그리고 앉아 자동차의 등받이에만 시선을 박고있는데 무엇인가 시름이 어리고 그 무슨 고민거리에 골똘해있는것 같았다. 김아성은 토라진것 같은 처녀의 그런 꼴에 짜증이 나고 드리운 침묵에 갑갑해졌다.
《말 좀 하라구, 젠장. 오늘은 웬일이야?》
아성이 한마디 해서야 처녀는 《내가 뭐 어째서요? …》 하며 접혔던 눈길을 곧추세운다.
《그 얼굴이 꼭 바깥하늘 같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잖아?》
아성의 으름장이다.
《호호. 참…》
순애는 김아성이 뭘 좋아하는지 안다. 무릇 련인들사이에는 다들 그렇겠지만 김아성도 순애의 맑은 웃음과 명랑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부러 지어낸 웃음은 처녀에게서 이내 지워졌다.
(제기랄…)
처녀가 그냥 입을 오무린채 도사리고 앉아 틈새기를 보이지 않자 아성은 더욱 속이 클클해나서 입속으로 두덜거렸다. 그러나 더 역증을 내지는 않았다. 순애앞에서는 언제나 주접이 먼저 들군 하는 아성이였다. 하지만 클클해지는 속을 그냥 너누룩해보려니 만사가 안팎이 따로없이 시원스런 총각은 더구나 속이 요글요글해졌다. 여느때는 이쯤하면 순애가 제켠에서 미안스러워 애인의 데설궂은 속을 풀어주느라고 정을 찰찰 고이련만 오늘은 좀처럼 입을 열려고 안한다.
처녀는 혜화동 로타리가 가까와져서야 아성의 잔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튕기였다.
《이봐요. 차를 좀 세워요.》
《차를 세우기는 왜? 그 잘난 장가가 기다린다면서…》
김아성이 씩뚝거리였다.
《호호 참, 울뚝하긴, 기다리라지요. 어서 세워요. 나 할말이 있어.》
김아성은 그 소리에 차를 골목길로 꺾어들어가 세웠다. 그리고는 뒤좌석으로 옮겨가 순애와 나란히 앉았다.
김아성은 여느때없이 심중해진 순애의 손목을 두손으로 싸쥐고 수심이 어린 처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말해. 무슨 얘기야? 어째 오늘은 끈끈이할멈이 됐어?》
처녀는 잠시 도톰한 입술을 감빨다가 예쁘장한 눈매를 지으며 《이봐요. 우린 언제 결혼을 하게 되나요?》하고 물었다.
《엉?! … 하하하… 아, 거야 뭐… 뭘 빤히 알면서도… 아니 그것때문이야? 하하.》
그 무슨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듯 하여 은근히 가슴이 조마조마하던 김아성은 순애의 입에서 왕청같은 소리가 나오는 바람에 입을 벌리고 소리내여 웃었다.
그들사이에는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철석같은 약조가 있었다. 통일된 후 가정을 뭇자는 약속이다. 이건 《흥국상회》앞에서 다진 그들의 언약이기도 하였다. 그 언약에 아성도 순애도 티끌만 한 불만이 없다. 그런데 뚱딴지같이 무슨 소리냐.
《웃지 말아요. 남은 속상해서 묻는건데…》
순애가 헤실거리는 총각의 베개통같이 굵은 허벅다리를 쿡 찌르며 곱게 쏘아붙인다.
《그래…》
김아성은 인차 웃음을 거두고 정색하였다. 고관대작들도 감때사납게 다루는 경무대경찰관의 권능이나 사내다운 김아성의 밸머리도 순애앞에서는 무색해지군 한다.
지난 이태동안 정을 나누면서 순애에게는 총각을 다루는 지혜가 생겼지만 김아성은 처녀를 다루는 비법을 아직도 익히지 못한것이다. 하기는 련인들이란 흔히 사귀기 전에는 총각쪽에서 주도권을 쥐고 우쭐거리지만 일단 한몸이라는 인식이 굳어진 다음에는 처녀쪽에서 서서히 발언권을 넓히면서 애정이라는 세계를 독점해버린다고 한다.
김아성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처녀의 상큼한 코마루를 손가락으로 콕 튕겨주고싶어 몸달아하면서도 저으기 근심스럽게 물었다.
《또 그 장가가 덤벼쳐?》
《그것도 그거지만…》
순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눈섭을 살풋이 내리우며 말끝을 여물구지 못하였다. 아성의 앞에서 시원스럽게 속을 털어놓지 못하는 연고가 있었다.
엊그저께 순애는 타자실 반장이며 장교타자수인 장억수와 또다시 싱갱이를 벌리였다.
몇해사이에 장억수는 소위로부터 대위로 계급장이 무거워졌다. 장억수는 올해 추석이나 보내고는 마련을 보자고 처녀를 구슬려댔다. 기다리기에 지쳤노라 애원하기도 하였다. 자기가 멀지 않아 국방장관실 부관으로 승진되여갈것 같노라고 뽐내면서 그때는 순애도 상류계의 마님으로 둔갑시킬수 있다고 달콤한 유혹의 미끼를 던지기도 하였다.
이전 같으면 그 지껄임이 망측하기도 하고 희롱당하는것이 분하기도 해서 한마디 곱지 않게 쏘아던졌을것이지만 순애는 그 솜씨있는 웃음을 띠우고 고개를 몇번 갸우뚱거렸을뿐이였다. 자기는 스물다섯되기 전에는 결혼할 생각을 하고싶지 않노라고 이태전부터 한본새로 대답해왔던것이다.
스물다섯되기까지면 통일이 될것이고 통일이 되면 이 지긋지긋한 《사랑놀이》도 끝장나리라는것이 순애나 아성의 타산이였다.
그래서 통일의 날을 기다리는 순애와 아성의 마음이 여느 사람들보다도 더 절박하고 눈물겨운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장억수가 던지는 그 다음소리가 청천벽력이였다.
《또 스물다섯이요? 그러니 아직도 이태를 기다리라는건데. 래년이면 전쟁이요, 전쟁! 전쟁판에 뉘 살아남겠는지 어찌 안단말이야.》
《또 〈북벌〉소린가요? 그 소리가 뭘 그렇게 새삼스러워서…》
순애는 픽 웃었다. 심심하면 입에 올리는 리승만의 《북벌》소리에 이남의 민심과 함께 순애도 면역이 생겼던것이다. 그런데 장억수의 눈빛이 더 진지해져서 한걸음 바투 붙는다.
《아, 지금까지 불어댄 〈북벌〉나발은 리승만의 망녕든 잡소리지만 이건 진짜소리란 말이야.》
《흥, 그까짓 난 믿지 않아요. 우리 합숙 사감할아범까지 뭐라는지 알아요? 〈북벌이라… 달보고 짖는 개소리지.〉 호호…》
순애가 령감의 시늉을 내며 까르르 웃자 장억수는 우로 들릴사 한 눈꼬리를 젖히며 눈을 흘기였다.
《차차차… 좋아. 내 오늘 진해에서 리승만과 대만의 장개석총통이 회담한 자료를 보여주지. 혼자만 보고 래일 아침에 가져와.》
이렇게 되여 순애는 어제저녁에 장억수로부터 지난달 9일과 10일에 진해에서 벌린 리승만과 대만총통 장개석 비밀회담자료를 받아쥐게 되였고 오늘 아침 한통을 베껴가지고 김아성에게 비상상면신호를 보냈던것이다.
금방 아성에게 넘겨준것이 바로 그 자료였다. 거기에는 앞으로 쌍방 해군이 공동으로 남포와 원산을 공격한다, 그것을 발판으로 리승만군이 전조선을 점령하도록 한다, 인민군대를 소멸하거나 중국동북지방으로 축출한다는 등 무시무시한 내용이 주요골자로 되고있었다.
이를 위하여 당면하게는 남조선해군장교들과 하사관들을 대만에 데려다가 교육을 주며 장차 조선반도를 반쏘, 반공기지로 만들어 중국대륙에서의 공산세력에 대한 장개석의 소탕작전을 보장해준다는것이다. 문건에는 이러한 합의사항이 미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의 발기와 조종에 따라 제기되였으며 거사는 래년도 상반년안으로 진행할것이라고 찍어서 밝히기까지 하였다.
어제 장억수로부터 이 자료를 넘겨받은 후로 순애는 자꾸만 속이 떨려서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수가 없었다. 아직 전쟁이라는 대살륙전을 접해본 일은 없으나 이미 대구와 제주도, 려수의 인민항쟁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체험해본 순애였다. 전쟁이 이 나라의 운명뿐아니라 매 사람들과 매 가정의 운명에 어떤 파국적인 후과를 가져오는가 하는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수 있었다. 장억수가 설치는것이 우연이 아니였다.
뜻밖의 불길한 소식은 처녀의 고요하던 세계를 일격에 뒤집어놓았다. 지금과 같은 지겨운 생활을 몇해만 더 참아가느라면 통일이 올것이다, 그러면 아성과 가정을 뭇고 오붓하고 단란한 행복을 마음껏 누려가리라던 소박한 꿈이 일시에 기울거리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아성과의 사랑도 일조에 날아날지 모른다. 지난 세월에 삼각산의 다박솔이며 한강변의 유보도며 조용한 다방의 뒤자리에서 나누고 다진 그 수많은 언약과 꿈이 총탄 한발로 연기처럼 사라질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뒤끝에 지금껏 자신의 연한 심신을 애써 다잡아온 랭정과 비애의 차디찬 감정은 슬그머니 뒤전에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렇게도 고대하는 나라의 통일은 또 언제면 되려는건가.
차라리 아성과 당장 가정을 뭇고마는것이 좋지 않을가.
그는 장밤토록 자기와 김아성 그리고 장억수와의 관계를 놓고 여러모로 불안한 생각을 굴리였다.
당장은 장억수가 문제거리다.
근래에 와서 장억수의 뒤생활은 방탕하기 짝이 없었다. 매일같이 타자실의 수십명의 처녀들을 겨끔내기로 제방에 끌어들여 질펀한 자리를 펴는가 하면 제놈의 말을 듣지 않는 처녀들은 사정없이 타자실에서 쫓아냈다.
그놈이 타자실처녀들을 종년 다루듯 하면서도 순애만은 감히 내키는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리유는 다른 처녀들은 제놈의 성적쾌락을 만족시켜주는 노리개정도로 여기지만 순애의 미모에는 미칠듯이 취해있었기때문이였다.
지금까지 장가는 순애가 곱게 놀아주다가 싱겁게 굴 때면 즉석에서 망신을 주군 하였으므로 처녀의 순결에 채워진 자물쇠에 감히 곁쇠질을 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있었다. 장억수는 처녀에 대한 미련과 이른바 《짝사랑》이 자칫하면 부서질수 있는 살얼음같은것이라고 인정하고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현상을 지탱해오고있는것이다. 하냥 새물거리는 순애의 아름다운 미소에는 위험수위에 접근하는 짓거리는 추호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속으로 영근 처녀의 매운 빛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데도 한도가 있다. 세월이 너무 길게 흘렀다.
더구나 전쟁이라는 소리에 장억수도 혼이 빠진 상이다. 장가가 더는 기다려주지 않을것이다. 이제는 그앞에서 자신을 지켜낼 여력이 다 연소되였다. 어차피 장억수는 더 무례하게 덤벼칠것이다. 이렇게 된바에는 아성과의 관계를 공개하고 끝을 보는것이 그 시시한 인간앞에서도 시원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밤늦도록 잠을 청하지 못했던 순애는 드디여 결심을 내렸다. 그래서 오늘 순애는 이 문제를 꺼내놓고 자기의 안타까움을 하소연하리라고 단단히 속을 도슬러가지고 접선장소에 나타났었다. 그러나 당자앞에서 정작 그것을 꺼내놓자니 인차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성이 이따금 들려주던 례영이네와 권혜숙의 사랑이야기가 떠올랐던것이다. 성스러운 통일애국위업에 바쳐진 그들의 순정은 들을 때마다 눈물을 짜게 하는 고결한 사랑의 찬가였다. 자기라는 좁고 범속한 세계가 아니라 사랑도 행복도 목숨까지도 조국의 운명과 미래를 위하여 바친 이 나라의 사랑스러운 청춘들이 엮어놓은 숭고한 헌신의 서사시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들의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순애의 마음도 숭엄해졌다.
(그들처럼 살리라, 그들처럼 사랑하고 갈망하고 투신하는 뜻높은 녀인이 되리라.) 골백번 다져왔다. 그 맹세가 있기에 애어린 처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장억수와의 《사랑놀이》도 지금껏 참고 끌어온것이다. 그 맹세가 있었기에 자기들의 결혼은 통일된 다음에 해야 한다는 김아성의 말을 선뜻 접수하고 거기에 습관되여왔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것이 동지들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일이라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다잡아왔다.
지금 순애는 그들의 모습부터 떠올랐다. 그래서 일견 풀어헤쳐놓으리라고 꿍져가져온 애끓는 하소연이 그 숭고한 모습들앞에서 봄눈처럼 녹아내려 다시 속깊이 눌러다지며 모대기는 마음을 감추려 하였다.
그러나 대상의 표정에 얼핏 스치는 자그마한 감정의 빛갈도 정확히 포착하고 추리하는데 습관되여온 김아성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처녀의 정다운 눈가에 비끼는 그늘이야…
그는 말끝을 흐리마리하는 순애를 그냥 놓아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 장가놈 말고도 다른 놈이 달라붙는다는거야?》
아성의 말투가 그도 어쩔수 없이 거칠어졌다.
《뭐야요?》
순애가 속눈섭을 치뜨더니 눈을 빨고는 방그레 웃어버린다. 총각이 우정 미욱을 부리는 소리라는걸 알기에 그쯤한 소리에는 끄떡없다.
《그럼 또 뭐야? 아이고 안타까와. 말해! … 당장에야 우리가 결혼할수 없다는건 잘 알지 않아.》
《왜 못한다는거야요?》
《하 이건… 지금 군대에 있는 우리 동지들이 다 숙청바람에 발이 묶이여있지 않나. 더구나 륙군참모부의 낌새를 아는데야 지금 당장 순애같은 자리를 어디서 구한단 말이야.》
《그건 알아요. 그런데…》
《그런데는 또 뭐야? 그걸 안다면서… 좋아, 말해보라구. 무슨 사정이 있다면야 회장선생님께 직접 말씀드릴수 있잖아.》
김아성이 나직한 소리로 몰아대는 바람에 순애는 장억수가 전에 없이 설친다는것과 방금전에 전한 자료의 내용에 대하여 터놓지 않을수 없었다.
김아성은 사실을 간추려 알려주는 순애의 작은 입에서 전쟁이라는 엄청난 소리가 연방 튀여나오자 대뜸 눈이 화등잔이 되였다.
《뭐야, 전쟁?! …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를…》
얼결에 어성이 높아졌다. 그 소리에 대답이기나 하듯 어둠이 서린 서쪽하늘가에서 또다시 시뻘건 칼날같은것이 번뜩인다. 둔중한 천둥소리가 멀리서 울려오는 군단포의 일제사격소리처럼 장엄하게 들려왔다.
김아성은 안주머니에 건사했던 미농지를 신경질적으로 꺼내 재빨리 눈더듬으로 훑었다. 한번 훑고는 눈을 부릅뜨고 다시 훑는다. 그리고는 고개를 번쩍든다. 한동안 얼나간 사람처럼 자동차의 천정을 우두커니 올려다보았다.
자료의 의미를 되씹어보는 그의 눈동자에 점차 열기가 번들거렸다. 김아성은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눈을 들어 번개가 마지막태질을 하며 으르렁거리는 서쪽하늘을 노려보았다. 두볼이 눈에 뜨이게 굳어졌다. 그는 틀어쥔 주먹으로 짓부셔버릴듯이 앞좌석의 등받이를 내리쳤다. 바짝 말라든 목에 건침을 삼키느라고 울대가 씰룩거리였다.
《늙다리가 정말 끝내 전쟁을 하자는거야?》
그의 뇌리에서 결혼이요, 장억수요 하는 걱정거리들은 그 벼락같이 번뜩거린 전쟁소리에 연소되여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다만 전쟁이라는 두 글자가 마치 광포한 괴물처럼 앞발을 쳐들고 덤벼드는것 같았다. 천지간을 뒤흔드는 그 벼락같은 소식이 모든 사고와 감정을 정지시켜버렸다.
그는 그렇게 한본새로 서쪽하늘만 응시하다가 이윽해서야 미농지를 다시 차곡차곡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는 시동을 걸었다.
《순애, 빨리 가보라구. 이건 정말 마른날의 벼락같은 소리구만. 미국놈들이 쫓겨간다고 해서 이제는 통일이 다 됐구나 했더니 이게 무슨 도깨비감투야. 방대광이 38°선에서 뼈대 꺾어진걸 제놈들이 모른단 말인가. 난 이 길로 회장님을 찾아가겠어. 그럼 잘 가.
늙다리! … 그 늑대같은 두상태기가 정말 미쳐났어! 그놈을 어떻게 한다?…》
김아성은 마음이 급해서 중얼중얼거리며 서둘러댔다.
순애는 순식간에 검붉게 타오르며 불뚝거리는 아성의 사나운 얼굴을 겁먹은 눈길로 지켜보다가 벼르고온 문제를 꼭지만 떼놓은채 《호》하고 짧은 한숨만 내쉬고는 차에서 내렸다.
자동차는 골목길에 고인 흙탕물을 성깔사납게 휘뿌리며 질풍같이 내달았다.
《이럴수 있는가? 이럴수 있는가?!》
김아성은 불끈거리는 속을 참을길 없어 줄곧 중얼거리였다.
《통일의 날을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려왔는데… 통일의 날이 눈앞에 다 온것 같았는데 전쟁이라니 이게 정말일가?》
김아성은 너무도 통분하여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솟아나 볼우로 도글도글 굴러내렸다. 그냥 전쟁이라는 소리가 귀바퀴에서 윙윙거린다.
《에잇, 미친 두상태기, 어디 보자, 네놈이 전쟁바람을 불어대게 가만히 내쳐둘것 같으냐.》
김아성은 밸이 치미는껏 가속답판을 밟으며 어스름이 깔린 거리를 만속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