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선동해와 관련한 옛 시들과 전설
동해는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아득한 고대시기부터 개척되고 창조적활동의 대상으로 되여왔다.
조선사람들은 동해바다를 개척하는 과정에 조선동해와 관련된 수많은 전설들과 옛이야기, 글과 시들을 남기였으며 이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대대손손 전해져내려오고있다.
우리는 조선동해를 배경으로 하여 벌어진 선조들의 반침략투쟁, 개척과 정복, 창조적활동과정에 창작되고 널리 퍼지였으며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문화유산들을 통하여서도 조선동해가 우리 민족이 가장 이른시기에 명명하고 수천년동안 불러온 고유한 바다이름이라는것을 찾아볼수 있다.
아래에서는 우리 민족이 전해오는 조선동해와 관련된 전설들과 이름있는 학자, 문학가들이 동해를 대상으로 창작한 대표적인 옛 시들을 소개한다.
1) 조선동해에 깃든 전설과 사화
토끼와 거부기이야기
이 이야기는 우리 선조들이 조선동해를 적극적으로 개척리용하는 과정에 고구려에서 널리 퍼져 오늘까지도 전해져오고있는 전설이다.
옛날에 동해를 지배하던 룡왕의 딸이 갑자기 영문모를 가슴앓이병에 걸리였다. 의원들을 널리 불러 보이였으나 병은 차도가 없었고 오히려 점점 심해져 딸은 의식을 잃고 헛소리를 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중 신하들이 의술이 신비에 도달하여 죽을고비에 든 사람도 살려낸다는 의원을 데리고 왔다.
그 의원은 딸의 맥을 이리저리 짚어보더니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이 병에는 바다에 있는 백가지 약이 무효입니다. 오직 온갖 진귀한 약초를 먹으며 자란 토끼간을 먹어야 차도가 있을줄로 아옵니다.》
그러나 어느 신하도 토끼간을 구하려고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어찌 그렇지 않았으랴. 토끼간을 얻으려면 바다를 떠나 륙지에 올라야 하는데 바다에서 사는 자기들이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
룡왕이 군주를 위한 충신이 하나도 없다고 고성을 질렀지만 모두가 함구무언이였다.
이때 약삭바른 거부기가 나서며 룡왕에게 말하였다.
《그 소임을 저에게 맡겨주소이다. 그러면 어김없이 토끼간을 구해가지고 오겠소이다.》
룡왕은 거부기를 기특히 바라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과시 그대는 진짜충신이로다. 어서 떠나 꼭 토끼간을 얻어가지고 오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에게 후한 상을 주도록 할것이다.》
바다에서 나와 륙지에 오른 거부기는 얼마후 골짜기를 따라 깡충깡충 뛰여오는 토끼를 만났다.
《아유, 이렇게 만날줄이야. 자네 어디로 급히 뛰여가나.》
낯선 거부기앞이였지만 매우 놀라있던 토끼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기 여우가 나타났길래.》
그러자 거부기는 다짜고짜 토끼에게 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면서 유혹하였다.
《바다가운데 섬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는 샘이 맑고 돌이 깨끗하고 깊은 숲과 맛좋은 과실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가 닥치지 않고 사나운 새, 짐승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곳이네. 자네가 만일 그곳에 가면 편안하게 살면서 근심이 없을것이네.》
항상 하늘과 땅에서 돌아치는 맹수들의 위협을 받고있던 토끼인지라 거부기의 달콤한 말에 선뜻 응하였다.
토끼를 자기의 잔등에 태우고 한창 동해를 헤염쳐가던 거부기는 이제는 토끼도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을 터놓았다.
《지금 룡왕의 딸이 병에 걸리였는데 토끼간이 명약이라고 하네. 그래서 이렇게 자네를 데리고 가니 리해해주기를 바라네.》
이 말을 들은 토끼는 깜짝 놀라며 거부기에게 다그쳐 말하였다.
《그 말을 왜 진작 하지 않았나. 나는 신령의 자손이라 오장을 꺼내여 씻어서 넣을수 있네. 요즘 속이 약간 불편하길래 잠시 간과 염통을 꺼내여 씻어가지고 신령스러운 바위돌밑에 두었다네. 간은 지금 나에게 없으니 돌아가서 간을 가지고 오는것이 좋겠네. 그렇게 하면 너는 약을 구할수 있고 나는 간이 없더라도 살수 있으니 피차간에 좋은 일이 아니냐-》
토끼의 말이 그럴듯한지라 거부기는 돌아서서 륙지에 다시 올랐다.
륙지에 발을 내려놓은 토끼는 돌아서서 거부기에게 이렇게 꾸짖었다.
《어리석다! 이 거북아, 어찌 간이 없이 사는 놈이 있겠느냐-》
그리고는 닁큼 풀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동해의 룡궁으로 돌아갈수 없게 된 거부기는 바다기슭을 감돌며 숨어서 살게 되였고 룡왕의 딸은 저세상으로 가게 되였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고구려시기 동해라는 명칭이 널리 불리워왔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조선동해와 관련하여 퍼진 이 전설은 이후 정치, 군사 등 여러 면에서 림기응변의 계책으로 리용되여왔다고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이야기
조선사람들은 매우 이른시기부터 조선동해를 건너 일본땅에 적극 진출하여 선진문명을 적극 보급하였다. 이 과정에 조선동해를 개척리용하고 일본의 문명발전에 이바지한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남기였는데 연오랑과 세오녀이야기도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 이야기는 고려시기 《국존》이라는 높은 승직에 있었던 일연이 서술한 《삼국유사》에 씌여져있다.
신라의 아달라왕때에 동해가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다정하게 살고있었다.
남편인 연오랑은 마름을 비롯한 바다풀을 뜯거나 물고기를 잡았고 안해인 세오녀는 생초비단을 짜면서 살았다.
연오랑은 체구가 크고 인물도 잘난데다가 총명하고 세상리치에도 밝았다.
그는 밤이면 손발을 재게 놀리며 생초비단을 부지런히 짜는 세오녀를 도와 같이 일하며 재미나는 이야기와 노래로 밤을 보내군 하였다.
당시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은 가늘면서도 섬세하고 색갈도 정갈하고 이채로와 보는 사람마다 사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살던 지방은 물론 신라전국에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어느날 밤 그들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요즘 근오기 지방포구에서 동해를 따라 왜땅(일본땅)에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곳에는 아직 미개척지가 많고 원주민들도 우리 사람들의 논농사와 금속도구를 만드는 기술을 부러워하면서 배우고있다누만. 그래서 우리 사람들을 신령스러운 하늘에서 내려온것으로 여기면서 <아마>(하늘)손님이라고 존대하고있다우. 그래서 나도 기회를 보아서 한번 다녀올 생각을 하고있으니 그런줄 아오.》
연오랑의 말이였다.
그러자 세오녀는 깜짝 놀라며 애원하듯 말하였다.
《가면 같이 가고 혼자서는 못 가요. 이때까지 시집와서 혼자 산적이 없는데 어떻게 한시인들 떨어져산단 말이예요.》
연오랑은 눈물이 글썽해진 안해의 손을 잡고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날씨가 따뜻한 어느날 여느때와 같이 바다가에 나가 신발을 벗어놓고 크게 자란 미역을 뜯던 연오랑은 왜땅으로 당장 떠나는 배를 보게 되였다.
호기심이 부쩍 동한 연오랑은 세오녀와 한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배에 무작정 올랐다. 배에 올라서야 세오녀의 말이 생각났으나 연오랑은 빨리 갔다가 인차 돌아서리라고 마음먹었다.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세오녀는 다음날 아침 바다가로 나갔다.
어느 한곳에서 남편의 신발을 발견한 세오녀는 혹시 잘못되지나 않았을가 하여 마음이 철렁하였다. 그러나 며칠후 한 로인을 통하여 남편과 모색이 비슷한 사람이 왜땅으로 건너갔다는것을 전해듣게 되였다.
그는 남편이 고깝게 생각되였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한번 약속을 어기지 않고 자기를 극진히 대해주던 남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수 없었다.
밤낮없이 멀리 떠난 랑군님을 생각하며 생초비단을 짜던 세오녀에게 드디여 손꼽아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연오랑을 태운 배는 신라를 떠나 조선동해를 가로질러가다가 일본의 서북해안가인 이즈모(일본 시마네현 동북부 해안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를 본 일본사람들이 《과연 <아마>에서 온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고 하며 왕으로 추대하였다.
소국왕이 된 연오랑은 정사를 보면서 날이 갈수록 두고 온 세오녀생각이 간절해 그를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냈던것이다.
자초지종을 전해듣고난 세오녀는 곧 길차비를 하고 동해의 배길을 따라 이즈모지방에 가서 남편을 만날수 있었다.
세오녀는 그곳에서 왕비로 되였지만 저녁이면 언제나 고향에서처럼 생초비단짜는 일을 하면서 그 기술을 원주민들에게 배워주었다. 세오녀의 생초비단은 이후 그곳은 물론 주변지역들에까지 널리 알려져 일본의 보물이 되였다.
연오랑과 세오녀이야기는 조선동해가 일찍부터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개척되고 창조적활동의 활무대로 되여왔으며 또 동해의 배길이 우리 민족의 발전된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해상통로로 되여왔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나무사자에 항복한 우산국
조선사람들은 매우 이른시기부터 조선동해를 개척리용하였으며 그 과정에 동해바다에 우뚝 솟은 섬들인 울릉도와 독도를 기본령역으로 하는 우산국을 세웠다.
이 우산국이 신라의 령역으로 편입된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지증왕이 신라의 20대왕으로 임명된지 열세번째 해인 512년 하슬라주 군주로 이사부가 임명되였다.
이미전부터 우산국을 신라에 병합할 생각을 가지고있던 지증왕은 계교에 능한 사람으로 알려진 이사부를 하슬라주 군주로 임명함으로써 그 목적을 성사시키려고 하였다.
이사부로 말하면 신라왕족의 한사람으로서 이미 가야를 신라에 병합하는데서 공로를 세워 이름을 떨친 장수였다.
그는 변경에서 말놀이를 자주 벌리군 하여 처음 긴장해있던 가야사람들의 긴장을 늦추어놓은 다음 말놀이를 하는척 하다가 불의에 기병을 일으키는 책략을 씀으로써 가야국을 단숨에 정복하였던것이다.
하슬라주 군주로 된 그는 우산국병합을 위해 역시 기발한 계책을 꾸몄다.
그는 우산국사람들이 섬사람들로서 미련하고 사나우므로 힘으로는 굴복시키기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나무사자를 만들어 기만술책을 씀으로써 우산국을 정복할 계책을 꾸미였다. 이것은 섬사람들이 륙지의 짐승들을 잘 모른다는 약점을 리용한것이기도 하였다.
이사부는 주안의 목수들을 총동원하여 보기에도 무섭고 끔찍하게 생긴 나무사자들을 수많이 만들게 하였다.
《군주의 머리가 잘못되지 않았나. 이 많은 나무사자를 만들어 어떻게 하겠다는건가-》
고역도 고역이거니와 나무사자를 수많이 만드는 일이 어이가 없는지라 목수들속에서는 뒤숭숭한 소문이 돌아갔다.
《이 일은 너희들이 알바가 아니니 시키는 일이나 부지런히 하여 제기일을 보장할지어다.》
그때마다 이사부는 다른 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엄한 추궁으로 꾹 눌러놓았다.
드디여 나무사자가 모두 만들어지자 이사부는 그것들을 여러척의 배에 가득 싣고 우산국정복의 길에 나섰다.
푸른 동해의 물결을 헤가르며 돛을 올린 여러척의 배가 순풍을 받아 살같이 내달리였다. 얼마 안 있어 뜨는 해빛에 불그레 물든 엷은 구름이 천천히 걷히자 보이지 않던 섬이 불쑥 자태를 드러냈다.
《우산국이다.》
배안에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섬이 점점 가까와지자 여기저기서 분주히 뛰여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섬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를 멈추게 한 이사부는 배머리에 나가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듣거라. 우리는 너희들을 병합하기 위하여 풍랑을 헤치며 신라에서 온 군사들이다.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들을 풀어놓아 너희들을 짓밟아죽이게 하겠다.》
그의 추상같은 호령소리에 우산국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배를 바라보니 보기에도 무섭고 끔찍하게 생긴 사자들이 병선마다에 가득차있었다.
우산국사람들속에서 술렁대며 마음의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간파한 이사부는 곧 배를 섬에 대게 하고 우산국왕의 항복을 받았다.
이때부터 조선동해의 한가운데있던 우산국은 신라에 속하게 되였다.
동해의 만파식적이야기
예로부터 조선동해와 관련하여 만파식적이라는 말이 전해오고있다.
만파식적은 동해의 거센 물결도 자게 한다는 신기한 저대라는 의미이다.
후기신라시기인 682년 4월 어느날이였다.
이날도 파진찬 박숙청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동해에 대한 해상관측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대줄기같은 소낙비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하였다.
부랴부랴 초막으로 달려와 비를 피하던 그는 동해바다 한가운데서 거대한 물체가 둥둥 떠다니는것을 보았다.
설마 하고 스쳐지난 그는 다음날에도 또다시 그것을 보게 되였다.
산같은 물체가 떠다닌다는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사흘째 이것을 목격한 박숙청은 드디여 국왕 신문왕에게 아뢰기로 결심하였다.
《대왕마마, 동해가운데있는 작은 산이 파도에 둥둥 떠다니고있사옵니다.》
이 말에 왕은 대번에 성을 내며 소리쳤다.
《산이 떠다니다니. 눈이 잘못되여도 분수가 있지. 그게 어디 될말이냐-》
《소인도 처음에는 하도 이상하여 제눈을 의심하였사옵니다. 그래서 보고 또 보았는데 바다 한가운데있는 작은 산이 파도가 노는대로 왔다갔다하는것이 분명하였사옵니다.》
왕은 이 이상한 현상을 가늠할수가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갈마든 신문왕은 생각다못해 관리 김춘질을 불러 점을 쳐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춘질은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선대임금(문무왕)이 항상 왜(일본)에 대하여 경계하고있던지라 지금 바다의 룡으로 변신하여 수호하고있는듯 하오이다. 만약 전하께서 해변으로 가신다면 크게 품을 들이지 않고도 값진 보물을 얻을수 있을것이옵니다.》
그제야 왕은 마음이 놓이는듯 매우 기뻐하며 당장 떠날 차비를 하라고 하였다. 동해기슭으로 행차한 왕은 아무리 그 산을 바라보아도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여 잘 알아보게 하였더니 산모양은 거북대가리처럼 생겼고 그우에 대나무로 만든 장대가 한개 있는데 낮에는 둘로 갈라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더라는것이였다.
이튿날부터는 갈라졌던 장대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온 천지가 캄캄한 속에서 순간도 그치지 않고 내리쏟던 비는 얼마후에야 멎고 바람이 잦아지면서 물결도 잔잔해졌다.
그제서야 왕은 배를 타고 그 산으로 들어갔다. 이때 룡이 마중 나와 왕에게 검정옥띠를 바치였다.
그동안 무슨 영문인지 통 알수가 없어 궁금해하던 왕은 급히 룡에게 다우쳐물었다.
《이 산이 바다에 떠다니고 장대가 합쳐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니 도대체 무슨 조화인고-》
룡은 반가운 기색을 하며 왕의 물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답하였다.
《이것은 사람에 비하면 두 손벽을 쳐야 소리나는것과 마찬가지옵니다. 이 대라는 물건도 마주 합한 후에야 소리나는것이오니 임금님께서 소리로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릴 좋은 징조이옵니다.
지금 바다의 큰 룡이 되여 나라를 지켜주고있는 선왕께서 소인을 시켜 이 대를 보내는것이오니 임금님이 이것으로 저대를 만들어 부시면 온갖 재난이 가셔질것이오이다.》
왕은 장대를 받아가지고 돌아와 곧 저대를 만들었다.
저대를 만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다건너 섬오랑캐들이 쳐들어왔다. 이때 해변가에서 갑자기 피리소리가 나서 적병은 모두 머리를 싸쥐고 물러갔다.
이때로부터 이 저대는 섬오랑캐들로부터 나라를 지켜주는 귀한 보물로, 동해를 다스리는 령험한 물건으로 신성시되여왔으며 섬오랑캐들은 저대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면서 감히 동해를 건너 우리 나라를 침략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동해의 자매섬전설
우리 나라 동해의 한가운데 울릉도와 독도가 있으며 독도는 다시 동도와 서도로 갈라져있다.
서로 뗄수 없이 나란히 마주하고있다고 하여 자매섬으로 불리우고있는 울릉도와 독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아득히 먼 옛날 조선동해의 바다가마을에서 세 자매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아버지는 일찍 어머니를 잃은 세 딸을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키우느라 언제 한번 쉴새없이 바다에 나가 물고기잡이를 하였고 또 딸들은 그들대로 아버지를 위하여 온갖 지성을 다하였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비록 풍족한 살림형편은 아니였지만 화목한 그들의 가정을 두고 누구나 부러워하였다.
이날도 아버지는 동해바다 멀리에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그곳을 찾아 배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밤이 지새도록 기다렸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바다가에 나가 뜬눈으로 며칠을 보내였건만 배를 타고 떠난 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의 소식은 전혀 알수 없었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처녀를 골라 룡궁으로 들여보내라는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게 되자 동해룡왕이 노하여 그들이 가는 배길에 거센 풍랑을 일으켜 바다속에 잠그어버렸다는것이였다.
언제부터 마을에서는 동해룡왕이 제일 이쁘고 바느질 잘하는 처녀를 선택하여 룡궁으로 들여보내라고 한다고 하면서 바다로 나가기 전에 처녀를 룡궁으로 보내여 제를 지내야 한다고들 하였다. 그런데 여느때도 일없었으니 이번에도 다른 일은 없을것이라고 범상히 여기다나니 끝내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것이였다.
이 말을 들은 세 자매의 맏이가 마을사람들앞에 선뜻 나섰다.
《제가 비록 루추하고 변변치 못하지만 룡궁으로 들어갈가 하오이다. 온 마을의 운명이 여기에 달려있다고 하니 무엇을 마다하오리까. 저승에 가신 아버님도 저의 이 일을 아시면 좋아하실것이오이다.》
《과시 갸륵하다. 그 마음이 어쩌면 생긴 그대로처럼 아름다울가.》
마을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맏이는 옷을 깨끗이 손질해 입고 두 동생을 마을사람들에게 부탁한 다음 룡궁으로 들어갔다.
룡궁으로 들어갔으나 맏이의 마음속에는 두고 온 두 동생과 정든 마을사람들에 대하여 언제나 잊어본적이 없었다.
룡왕은 맏이의 고운 마음씨와 깐진 일솜씨에 매우 흡족해하면서도 얼굴에 시름이 비껴있는것을 보고 물었다.
《무슨 걱정이 있느냐- 룡궁에서 진귀한 음식에 고운 옷을 입고 온갖 부귀를 누리는데 무엇이 부러우냐-》
《룡왕님의 은총은 고맙기 그지없소이다. 그러나 행복은 산해진미가 전부가 아닌줄로 아오이다. 우리 자매가 서로 떨어져있으니 그것이 늘 걱정이오이다.》
룡왕은 자매간의 정을 생각하는 그의 말에 감복하여 두 동생을 룡궁으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세 자매는 룡궁에서 화목하게 살았지만 변덕스러운 동해의 날바다우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고생하는 고향사람들의 생각으로 언제나 근심이 떠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버지도 동해에서 고기잡이하러 갔다가 돌아가셨는데 고향사람들이 또 그런 화를 입을수야 없지 않는가.
그들 세 자매는 고향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고싶었다. 결국 룡왕은 마을사람들을 생각하는 그들의 간청에 따라 그들에게 배길을 가르쳐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세 자매는 매일 동해바다우에서 고기잡이를 하러 가는 마을사람들의 배길을 밝혀주며 마을사람들과 정을 나누었다. 그런 그들이 언제인가부터 그대로 섬으로 굳어져 맏이는 울릉도로, 두 동생은 독도의 동도와 서도로 되였다고 한다.
조선동해의 절승에 반한 수로부인
조선동해는 아름답게 펼쳐진 황홀경으로 하여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으며 찾아온 사람들은 그 경치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군 하였다.
그들가운데는 후세에 가요 《헌화가》와 함께 유명해진 수로부인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8세기 중엽 미인이였던 수로부인은 높은 신분집안의 미남자 순정공과 가정을 이루었다. 얼마 지나서 남편이 강릉태수로 임명받고 함께 가게 되였다.
동해바다가의 어느 한곳에 이른 순정공과 수로부인은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푸르른 바다와 날아예는 흰 갈매기, 기기묘묘한 절벽에 쉬임없이 부딪쳐 은구슬을 뿌리는 파도…
그야말로 황홀경의 최고경지였다.
(내 이제껏 이렇게 아름다운 동해에 와볼 생각을 못하였던가.)
수로부인은 지금껏 규방에만 있으면서 동해에 와보지 못한것이 한탄스러웠다. 그 아름다움에 취한듯이 있느라니 온갖 시름이 가뭇없이 사라지는것 같았다.
주변경치가 하도 좋아 순정공일행은 푸짐한 음식상을 차려놓고 취흥을 돋구기 시작하였다. 술이 둬서너순배 돌아가고났을 때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에 흥이 난 수로부인은 모두의 청에 기꺼이 응하여 노래를 불렀다.
이때 아찔한 절벽꼭대기에 방금 그 누가 가져다 꽂아놓은듯 한 무더기의 진달래꽃이 활짝 피여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너무나도 희한하고 아름다운 꽃모습에 가슴을 울렁이던 수로부인은 진달래꽃송이들을 한껏 안아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의 심정을 알아차린 주위사람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천길낭떠러지처럼 아득히 올려다보이는 기암절벽우로는 올라갈념을 하지 못하였다.
바로 그때 새끼밴 암소를 몰고 그들의 옆을 지나가던 웬 늙은이가 자기가 그 진달래를 꺾어보겠다고 하였다. 그 소리에 모두들 《아니, 로인장이 지금 제정신이요- 저 절벽을 오르다가 아차 실수하는 날이면 어쩔려구 그러시오.》 하며 그를 만류하였다.
그러자 로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렇게 아름다운 부인의 간절한 부탁인데 어찌 그만두겠소. 내 저 진달래를 꺾어오리니 새끼밴 암소나 잘 봐주시오.》
그리고는 가파로운 절벽을 톺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생활의 세파속에 굳어지고 억세여진 로인의 손아귀에 마침내 아름다운 진달래가지가 꺾이였을 때 사람들은 모두 환성을 올리였다.
로인은 조용히 부인곁으로 다가와 아름답게 핀 진달래꽃을 내밀며 아무말없이 다음과 같은 노래 한곡조를 불러주었다.
붉은 바위가에서
손에 잡은 어미소놓고
나를 부끄러워 아니하면
꽃을 꺾어드리오이다
이 노래가 바로 후에 널리 알려진 《헌화가》이다.
가요의 창작경위는 수로부인과 결부되여있으나 이 노래는 그후 근로하는 인민들속에서 애창되여 청춘남녀들속에서 사랑의 노래로 널리 불리워졌다.
《헌화가》와 수로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동해가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것을 깊은 애착심을 가지고 사랑해온 우리 인민들의 사상감정을 잘 보여주고있다.
동해의 명태이야기
명천읍에서 칠보산쪽으로 가는 중간쯤에 보촌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자리잡은 마을변두리에는 태씨성을 가진 근면한 농부가 살고있었다.
네댓마지기 논밭에 명줄을 걸고 살아가는 가난한 살림에서도 태서방량주에게 락이 있다면 성례후 열두해만에 본 아들이 탈없이 잘 자라는것이였다.
그 아들이 삶의 전부이런듯 량주는 지는해 뜨는해 모르고 밭에 나가 일하고 베틀이 닳도록 천을 짜도 힘든줄 몰랐다.
그런데 그렇게 끔찍이 키워오던 아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량주는 집의 대들보가 내려앉아도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것이다.
그들은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제야 멍에를 올려놓기 시작한 소를 팔아 의원을 청해 보였다.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벌려놓는다, 점쟁이의 점괘대로 부정풀이를 한다 하였지만 병세는 점점 더해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태서방의 신세를 많이 지고있던 마을의 숯구이총각이 찾아왔는데 앓는 아들을 위해 한뽐이나 되는 산삼 세뿌리를 내놓는것이였다. 이 산삼을 먹고 태서방의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대신 숯구이총각이 산삼을 캐느라고 맞다들린 범과의 싸움의 후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 눕게 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서방은 안절부절 못하며 뛰여다니다가 산중의 맹수한테 죽을 곤경을 당하여 얼이 나가거나 앓는 사람에게는 바다에서 나는것들이 약인데 물고기를 비롯한 해산물 아흔아홉가지를 먹이면 특효가 있다는 의원의 말을 듣게 되였다.
마을의 로인들도 그것이 좋은 명약이라고 동의하자 태서방은 자기 아들을 살려준 은인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주저없이 바다가로 나갔다.
농사밖에 해본 경험이 없지만 해칠보의 해변가마을인 보촌이라는 곳에 자리를 옮기고 쪽배와 그물, 낚시, 작살 같은것을 마련하였다. 처음에는 굴과 섭, 대합, 전복을 따고 그 다음에는 차츰 바다에 익숙하여지고 노를 다룰수 있게 되자 기슭에 쪽배를 띄우고 문어, 게, 새우, 성게, 갈미, 해삼을 건지기도 하였다.
마침내 태서방은 착실한 어부가 되여 여름내내 바다가에 살면서 멸치, 이면수, 고등어, 낙지 등을 잡았고 한편 강을 따라 알낳이를 하러 오르는 숭어, 송어도 잡아내였다. 또한 겨울에는 겨울대로 청어, 도루메기, 가재미, 외치 등을 잡아들이였다. 이리하여 두가지 물고기만 잡으면 아흔아홉가지를 모두 채우게 되였다.
그런데 그 두가지 물고기는 태서방이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마침 한생을 어부로 살아온 백발로인을 만나 물어보니 노데기가 빠졌다면서 저 멀리 날바다가운데 떠있는 알섬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태서방은 든든한 배를 타고 세찬 풍랑을 맞받아 끝내 알섬에 가서 노데기를 잡았으며 돌아오는 길에 이름모를 물고기떼를 만나 마지막 아흔아홉번째 물고기를 잡아오는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숯구이총각에게 노데기와 이름모를 아흔아홉번째 물고기까지 먹이니 그 숯구이총각의 병이 나아 자기 일을 할수 있게 되였다.
태서방의 아름다운 이 이야기는 널리 전해지고 명천읍 고을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고을원은 그들을 불러 상을 내리고 마지막 아흔아홉번째 물고기의 이름을 명천에 사는 태서방이 온갖 신고를 다해 잡은 물고기라고 하여 그 이름을 명천고을의 첫자 《명》자와 태서방의 성인 《태》를 따서 《명태》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기쁨에 넘친 태서방은 명태가 동해바다가 젊은이를 살려냈다는 뜻에서 숯구이총각의 이름을 《동태》라고 지어주었다고 한다.
명태와 동태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는 동해바다를 개척하고 보람찬 생활을 꾸려가면서 따뜻한 정과 진정한 의리를 꽃펴온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미풍량속에 대한 아름다운 찬가이다.
명약중의 명약
조선동해는 물개의 서식장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일찍부터 조선동해를 개척하고 활무대로 리용하여온 우리 인민들은 물개를 《가지》로 불러왔다.
동해의 명산 《가지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동해바다가의 어느 마을에 한 부부가 살고있었다.
그들은 하늘이 정해준 연분인지 부지런히 일하면서 화목하게 살았다.
그러나 해가 가고 달이 갈수록 그들에게는 한가지 근심이 있었다. 그것은 결혼한지 몇해가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던것이다.
그래서 능하다는 여러 의원을 찾아다니며 물어보니 남편의 양기가 약하다는것이였다. 이 말을 듣고 안해는 이름난 약초란 약초를 다 구하여 성의껏 대접하였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남편도 안해를 대하기 점직하여 어떤 때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 마을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고기잡으러 나갔던 남편이 웬 흉물스럽게 생긴 짐승을 여러 사람들과 맞들고 집에 들어섰다.
《여보, 이것을 어서 끓여주오. 모두 지쳤는데 오늘밤 우리 집에서 식사를 대접해야겠소.》
바다에 나간 남편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고있던 안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는 안해에게 남편은 동해바다 한가운데 나가면 물고기가 많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보니 이런 짐승이 섬우에 있어 잡아서 배에 실었는데 그만 오는 도중에 파도가 일어 죽다 살아왔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이것을 어부들은 먹지 않는 전통이 있다고 하였지만 자기가 가져왔다고 하였다.
《큰일날번 했군요. 내 인차 준비할게요.》
안해가 다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 짐승을 보니 모양은 소와 같이 생겼는데 눈은 붉고 대가리에는 뿔이 없었다. 안해는 처음 보는 짐승이지만 각을 떠서 가마에 안치고 식사준비를 하였다.
원래 인심이 후하였던 안해는 고생했을 마을사람들을 생각하며 듬뿍듬뿍 고기를 떠주다나니 남편에게 차례질 고기가 부족하였다. 더우기 몹시 시장하였던 마을사람들이 음식이 괜찮다고 칭찬하며 덧고기를 요구하는 바람에 남은것은 발족과 물개의 아래물건뿐이였다.
그래서 안해는 남편을 찾아 조용히 귀속말로 이야기하였다.
《미안해요. 고기가 부족하고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쟁기도 함께 끓였으니 할수 있으면 당신이 잡수세요.》
《별걸 다 그러누만. 난 일없으니 마을사람들에게나 많이 대접하도록 하오.》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물개의 쟁기가 들어있는 고기국을 달게 먹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가고 그들도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새벽이 되여 안해는 그 무엇이 자기의 아래도리를 자꾸 찌르는것을 감촉하며 깨여났다. 처음에는 바느질하다가 바늘을 잘못 거두지 않았나 하여 그것을 치우려고 하였는데 글쎄 남편의 물건이 아닌가. 이리저리 만져보아도 꿈이 아니므로 끝내 남편을 깨웠다.
이때부터 그들의 근심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신혼살림》이 다시 시작되였으며 얼마후에는 옥동자까지 생겼다.
알고보니 그들의 병을 치료해준 약은 물개의 아래물건이였다. 그러니 안해는 마을사람들을 친절히 대접하면서도 남편에게 제일 귀중한 보약을 대접한셈이였다.
이후로 이 부부는 《우리 가정의 병을 치료한 동해의 물개는 과시 명약중의 명약이다.》고 하였다.
오늘도 물개의 아래물건은 남자의 정력을 돋구는데 널리 리용되고있으며 그가운데서도 동해물개가 으뜸이라고 한다.
동해바다가사람들은 이 말을 한입두입 건너 전해듣고 물개의 서식처인 독도의 서도 북쪽에 나란히 있는 바위들을 물개의 옛 이름을 담아 《큰 가지바위》, 《작은 가지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동해는 우리 민족의 개척과 창조적활동의 활무대, 해외진출해상통로, 반침략항전의 바다로, 세상에 다시없을 아름다운 경치로 이름났을뿐아니라 부부의 화목을 도모해주는 진귀한 약재들이 무진장한것으로 하여 조선민족의 생존과 생활과 뗄수 없는 바다로 되여왔다.
2) 조선동해를 노래한 옛 시와 가사들
관 동 별 곡
정 철
…
련꽃을 꽂았는듯 백옥을 묶었는듯
동해를 박차는듯 북극을 괴였는듯
높을시고 망고대 외롭고나 혈망봉
하늘에 치밀어 무슨 일을 사뢰는가
천만년 지나도록 굽힐줄 모르누나
…
모래길에 익은 말이 취한 신선 비껴싣고
바다를 곁에 두고 해당화숲 들어가니
갈매기야 날지 말아 네 벗인줄 어찌 알랴
금란굴 돌아들어 총석정 올라가니
백옥루 남은 기둥 다만 넷이 서있구나
…
진수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으로 남산에 대이고저
벼슬살이 기한있고 경치도 아름다와
그윽한 회포 많고 나그네수심 둘데 없다
신선배 띄워서 은하계로 향해볼가
신선을 찾아가 단혈에 머물가
동쪽을 못다 보아 망양정에 오르니
바다밖은 하늘이라 하늘밖은 무엇인고
가뜩이나 노한 고래 그 누가 놀래워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구나
《관동별곡》은 리조시기 문인 정철(1536-1593년)이 1580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내려가 관동지방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명승고적을 노래한 기행가사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것은 정철이 금강산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의 아름다움을 조선동해와 결부시켜 노래한것이다.
총석정의 해돋이
박지원
……
여기서 총석정까지는
겨우 십리 남짓한 거리
아득한 바다가로 달려가
해돋이구경을 하자
하늘과 물은 한데 맞붙고
해솟을 조짐도 안 보이는데
거센 물결이 기슭을 쳐
뢰성벽력이 이는듯 하구나
검은 바람이 세차게
바다를 몰고 달려들어
산들도 뿌리가 빠지고
일만 바위들 무너질듯
고래와 곤이 뒤넘기를 치다가
륙지로 뛰여나올듯
설레이는 바다가 하도 사나워
대붕새도 날아오를듯
…
바다우의 온갖 괴물
어디론지 도망치고
희화만 홀로 남아
수레를 모는구나
6만 4천년을
둥글게 떠온 저 해
오늘은 웬 일인지
네모가 난것 같다
만길 깊은 바다에서
저 해를 어이 끌어올렸나
하늘도 층계가 있어
밟고 올라가는듯 하구나
이 시는 실학자이며 관료였던 박지원(1737-1805년)이 관동8경의 하나인 통천지역의 해돋이를 조선동해와 결부하여 형상한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조선동해에 해돋이이전의 세찬 바다물결모습과 고래, 물고기, 새들의 다양한 형상, 솟아오르는 태양의 장엄한 모습을 신화에 나오는 신성한 동물과 하늘의 신과 결부시켜 재치있게 묘사하였다.
금 강 산
리 황
동해바다기슭에
아아한 뫼부리를
웅장한 그 모습
하늘중천 솟았더라
해와 달은 저마끔
지고 기울고
신선의 굴 여기저기
많기도 하다
…
우리 나라 그 어디나
명승지 많아
아름다운 절승경개
끝이 없어라
이 시는 리조시기 유명한 문인이였던 리황(1501-1570년)이 천하제일명산인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동해바다와 결부시켜 노래한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금강산의 아아한 산발들을 동해바다와 견주어 노래함으로써 명승지의 아름다운 절승경개를 한껏 부각시키였다.
금강산 구룡연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며
리 이
닭울녘 길을 떠나
산마루에 올라서니
날은 채 밝지 못해
만상이 희미하구나
잠간사이 붉은 불빛
하늘땅에 차넘치니
창파인가 안개인가
분간하기 어려워라
붉은 해 어느 사이
두어길 솟았는데
한송이 오색구름
일산처럼 피여나네
붉은 하늘 푸른 물결
서서히 갈라지네
일망무제 동해 큰물
내 이제 알았노라
해솟은 부상 양곡
이 시는 리조시기 관료이며 학자인 률곡 리이(1536-1584년)가 금강산의 구룡연에 올라 동해의 장쾌한 해돋이를 읊은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동해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의 모습과 그 앞에 펼쳐진 일망무제한 푸른 물결을 잘 형상하였다.
간성만경루
안 축
바다가의 푸른 돌을 쌓아서 만든 다락
일만경치 구름타고 한눈에 안겨드네
고기잡는 배 한척 어디로 향해가나
바람따라 둥실둥실 술잔같이 떠있고나
이 시는 고려시기 문인 안축(1282-1348년)이 남강원도 간성지방의 바다가에 서있는 간성의 만경루의 경치를 고기잡이배와 자연스럽게 결부하여 노래한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만경루에서 구름타고 안겨오는 동해의 아름다운 모습을 술잔으로 묘사한 바다에 뜬 배 한척과 결부시켜 훌륭히 묘사하고있다.
안변국도
안 축
여섯마리 자라타고 신선섬에 왔다가
구름파도 망망하여 돌아갈 길 막혔는가
물우에 뜬 궁전인양 외봉우리 우뚝 솟고
천개의 괴석들은 바다우의 기둥같네
날개없다 한탄하며 단념하던 이 몸으로
새털같은 목숨될가 떨면서 건너왔네
이끼덮인 물가돌에 가랑잎 휘뿌리며
기슭치는 바람안고 거루배 끌어올릴 때
노젓는 지친 백성 구슬땀을 흘리나니
남은 술과 고기로 빈촌사람 대접했네
만약에 동해물 여기다 끌어들여
묘한 경치 잠근다면 이 고생을 안할것을
이 시는 안축이 동해의 안변앞바다에 있는 국도라는 섬의 황홀한 자연경치를 보고 노래한것이다.
작가는 이 시에서 많은 자연괴석들이 궁전처럼 늘어선 섬의 생김새를 강조하면서 동해의 물을 여기에 끌어들인다면 으뜸일것이라고 노래하고있다.
락산사의 해돋이구경
최 립
옥같이 맑은 하늘
신새벽의 동해바다
창파만경이
불그레해오더니만
천백가지 괴물들이
불길을 내뿜는듯
떠밀어올렸네
황금수레바퀴
이 시는 16세기말-17세기초 문인 최립(1539-1612년)이 관동8경의 하나인 양양의 락산사에서 보는 장쾌한 해돋이를 읊은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이른새벽 락산사에서 본 동해의 해돋이에 푸른 바다의 만가지 풍경이 붉게 타오르는것을 수많은 괴물들이 뿜어내는 불길처럼 형상하여 시의 운치를 잘 살렸다.
어버이생각
신사임당
옛집은 천리밖
첩첩히 산이 가려
그리운 이 마음은
꿈결에나 가보네
한송정언덕에는
달돋아 물에 어리고
경포대앞에는
맑은 바람 불어오누나
모래우에 갈매기는
흩어졌다 모이고
강기슭 고기배도
오락가락하련마는
어느때나 다시
강릉 옛길 달려가
부모님 슬하에서
즐겁게 놀아볼가
이 시는 16세기 유명한 녀류시인 신사임당이 고향 강릉에 계시는 자기의 친아버지를 회고하면서 관동8경의 하나인 강릉의 경포대와 여기에 있었던 한송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것이다. 그는 동해가에 한폭의 그림같이 서있는 경포대와 한송정의 아름다움을 파도에 비낀 달모양과 불어오는 맑은 바람과 비유하면서 날아예는 갈매기와 오락가락 강기슭을 오가는 고기배와 련결시켜 잘 그려내였다.
강릉대관령
김극기
푸른 바다 동에 두고 대관령이 높이 솟아
만갈래 골짜기물 천봉우리 둘러쌌네
한줄기 험한 길이 큰 나무에 걸렸는데
업구렁이 사려있듯 몇겁이나 휘돌았노
기러기떼 지나기 전 가을서리 내리고
닭이 첫홰치는 곳에 새벽날이 밝아지네
…
이 시는 고려시기의 시인 김극기가 대관령의 장엄한 산봉우리 모습을 동해바다와 비교하여 읊은 기행시이다.
이 시에서 그는 천개의 봉우리와 만갈래의 골짜기를 안고 장엄하게 솟아있는 대관령을 천년묵은 구렁이와 동해바다우를 날으는 기러기떼에 비교하여 형상하였다.
삼척 죽서루
리 륙
서산에서 발을 걷고 홀로 다락에 기대니
온 강의 바람비가 서늘하기 가을같아
큰 고을이 만리밖의 동해가에 있으며
좋은 승지 천년이래 강의 상류 잡고있네
부귀는 관심할바 아니라고 알았으니
한가하게 객지시름 잠시 깨뜨려볼가
뉘라서 또 한정승과 같은 본을 따라서
이름내고 공을 세워 백구와 친할건가
이 시는 문인 리륙이 삼척의 죽서루가 동해가에 있다는것을 강조함으로써 관동8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것이다.
고래파도 이는 바다
성 현
동해바다 가물가물 끝가는 곳 없는데
우아래의 구름과 물 한가지 색이로다
고래파도 갈기날려 솟아올라 춤을 추고
온 허공에 반짝반짝 흰 눈꽃을 날리누나
옥다락 층다락의 신기루가 드날리고
신선섬의 세 봉우리 붓끝같이 출몰하네
세찬 바람 따라서 큰 파도를 깨뜨리며
날랜 돛배 만리 달려 해뜨는 곳 찾아가리
이 시는 리조 전기의 재능있는 음악가, 시,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성현(1439-1504년)이 지은 시 《평해 팔영》의 하나로서 관동8경의 하나인 평해의 월송정에서 보는 동해바다의 희한한 모습을 잘 형상하고있다. 그는 이 시에서 동해바다가 끝없고 구름색과 같으며 파도는 고래파도처럼 갈기날려 춤을 추는듯 하다고 노래하고있다.
녕 해
리 색
단양은 궁벽한 내 고향
경치가 동방에서 으뜸이라
공명은 말해서 무엇할가
집터가 좋아서 안락누린다데
우리 함께 관어대 올라서
동해의 뜨는 해를 마중하자
이 시는 고려말, 리조초의 학자인 리색(1328-1396년)이 바다가경치가 뛰여난 단양과 녕해의 장쾌한 모습을 짧은 내용속에 담은것이다. 이 시에서 우리 나라의 동해가의 경치가 동방에서 으뜸이라고 자랑하면서 그중에서 제일 멋들어진 동해의 해돋이를 마중하자고 격조높이 이야기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