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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의 눈은 강물우에서 뛰노는 해빛처럼 반짝거렸다.
재사는 처녀의 그 눈빛을 좋아하였다. 그 눈빛을 보기만 하면 어째서인지 가슴이 울렁거리고 마음이 들뜨군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재사는 슬그머니 눈길을 내려뜨렸다. 땀에 젖은 처녀의 촉촉한 이마며 그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함박꽃망울같은 입술이 재사의 눈길에 담겨져 길섶에 내렸다.
《저… 비류 가셨던 마리대주부님이 돌아오셨나이까?》 하고 처녀는 입술을 감빨며 물었다.
재사는 머뭇거리다가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처녀가 무엇때문에 그걸 묻는지 그리고 그걸 묻는 처녀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 기대와 기쁨에 차있는지 재사는 잘 안다.
그럴수록 마음은 산을 등에 진듯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졌다.
고구려사신으로 비류에 갔던 오빠를 애타게 기다리는 처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준단 말인가.
재사는 마리에게서 고구려사신들이 전멸당하던 소리를 듣는 순간 속이 덜컥 내려앉는듯 했다. 누구보다 먼저 처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녀의 오빠 추마는 재사의 어릴적 친구였다. 그는 재사가 내밀어주어 고구려사신으로 비류에 가게 되였다. 물론 추마자신이 재사에게 졸라 그렇게 되였지만 재사도 친구를 부추기였다. 재사는 추마를 내세우고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억울한 죽음으로 끝날줄 어찌 알았으랴.
《고구려사신이 얼마나 멋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저 오빠가 집에 있기만 했으면 좋겠네. 오빠를 보기만 하면 난 먹지 않고도 살수 있을것 같아.》 하던 처녀의 말이 재사의 고막을 울렸다.
재사와 추마는 그때 사내들의 멋을 모르는 처녀를 웃어주었다.
《얘, 아리야! 너같은 녀자들, 간나이들이 사내들을 품에 꼭 껴안고 놔주지 않으려고 별의별 오그랑수를 다 쓰지만 그건 헛된짓이야. 사내들은 날 때부터 저 하늘로 날아갈 생각을 한단말이야.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너 이제 서방될 사내를 만나 물어봐라. 그럼 알게 될게다. 하하!》
추마는 턱으로 재사를 가리키며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오빠는 그저… 누가 시집가겠다 했나이까? 난 늙어 죽을 때까지 오빠와 함께 살겠나이다.》
《저런, 누가 너더러 시집가랬니? 서방될 사내를 만나보랬지.》
아리는 익은 꽈리처럼 얼굴이 빨갛게 되여 곱게 눈을 흘겼다.
아리는 순진하고 마음이 고운 처녀다. 그에게 이 세상 모든 기쁨은 하나밖에 없는 오빠이다. 그런 아리에게 다시 돌아올수 없는 오빠에 대해 어떻게 말해준단 말인가.
재사는 무너지듯 한숨을 내쉬였다.
《아리, 집으로 돌아가.》
처녀는 의아한 눈으로 재사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이까?》
《집에 가서 이야기해주지.》
재사는 아리를 힐끔 보고나서 말고삐를 잡고 터벌터벌 걸음을 옮겼다.
처녀의 낯빛이 금시 굳어졌다. 그는 이상한 기미를 챈 사슴처럼 재사의 뒤를 지켜보다가 다시 행여나 하여 재사가 오던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얼마쯤 걷던 재사가 돌아섰다.
《아리! 어서 집으로 가자는데!》 하고 재사가 소리쳤다.
처녀는 할수없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재사를 좇아왔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해주사이다.》
아리가 겁에 질린 사슴눈으로 재사에게 물었다.
재사는 아무말없이 걷기만 했다.
재사가 추마와 아리를 알게 된건 열두어살때였다. 그때 추마는 재사의 몸종으로 있었다. 말이 몸종이지 그들은 좁쌀친구였다.
어느날 재사는 울담너머에서 낯선 계집애를 보았다.
《넌 누구냐?》
재사의 물음에 계집애는 잔뜩 겁에 질려 어물거렸다.
《난, 난… 우리 오빠…》
《오빠? 오빠가 누군데?》
《우리 오빠…》
어린 재사는 얼버무리는 계집애를 지꿎게 바라보았다.
이때 뒤에서 추마의 목소리가 났다.
《아리야! 네가 어떻게?》
재사는 추마를 돌아보았다.
《네 동생이냐?》
《그래.》
재사는 싱긋 웃었다.
《아리야, 어떻게 왔니?》
추마가 다시 물었다.
《오빠가 보고싶어서… 오빠! 왜 집에 안 오나?》
《어서 집으로 가!》
추마는 눈을 내리깔며 서름하게 말했다.
추마는 자기가 남의 종이라는걸 어린 동생에게 이야기해줄수 없었다.
재사가 추마와 아리를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추마! 우리 너의 동생과 함께 놀자꾸나.》
추마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 어머니가 걱정해.》
《그럼, 너의 집에 가서 놀자!》
《그래도 될가?》
《되지 않구.》
아이들은 깡충깡충 추마의 집으로 갔다.
그들은 큰 배나무밑에서 재미나게 놀았다. 재사의 집에서 어른들이 욕을 하긴 했지만 아이들의 놀이는 자주 있었다.
그후 추마의 어머니가 앓다가 돌아갔다. 두 오누이는 고아가 되였다. 추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추마는 어린 동생을 돌보며 살아갔다. 재사는 추마가 보고싶을 때마다 그에게 가군 하였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그들은 처녀총각이 되였지만 재사는 여전히 그들 오누이를 잊지 않고 찾아갔다.
재사는 그들 오누이가 좋았다. 아리는 더했다. 재사는 아리에게 슬그머니 무엇인가 좋은 일을 자꾸자꾸 해주고싶어 안달아했다. 그런 재사에게는 추마가 부러웠다. 아리는 오빠인 추마밖에 몰랐다. 어찌다 추마가 앓아누우면 아리는 큰일나서 돌아쳤다. 아리가 밤을 꼬박 새우며 추마의 이마에 찬물찜질을 하는것을 보며 재사는 자기도 추마처럼 앓아보았으면 할적도 있었다.
《아리는 오빠가 그렇게 좋은가?》
재사의 물음에 아리는 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때 그 눈빛, 그 표정을 재사는 영원히 잊을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을 받고싶어한다. 사랑은 인간에게 삶 그자체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는 사랑을 받는가, 못 받는가에 달려있다고 재사는 생각했다. 더우기 처음으로 사랑에 눈뜨는 나이에 이른 재사에게 아리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아리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모든것 지어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치고싶었다.
그런데 이제 재사는 아리에게…
아리가 자기의 목숨과 같이 여기는 오빠, 그 추마가 죽었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차라리 혀를 물어끊는것이 편할것이다. 추마를 고구려사신으로 주몽과 마리에게 내세운것이 후회되였다. 추마가 아무리 졸라도 모르는척 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괴롭지 않을것 아닌가.
재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문득 아리가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재사는 우뚝 멈춰섰다.
《말씀해주소이다. 오라버님이 돌아오셨나이까?》
재사는 얼굴을 찡그리고 아리를 바라보았다.
《어서 말씀해주소이다.》
재사는 고개를 틀었다.
《아리! 추마는, 추마는…》
아리는 훅- 숨을 들이키며 두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처녀는 밑둥잘린 나무처럼 주저앉았다.
재사는 아리를 부둥켜안았다.
《아리! 이러지 말아, 아리.》
처녀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