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도노는 이런 때가 제일 기뻤다. 이런 때라면 그의 마음도 한량없이 너그러워지고 아량도 생겼다. 그런즉 사람이란 천성적으로 악하게 되여먹지 않았다는걸가? 그건 잘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쨌든 좋았다. 젖달라고 보채는 아이, 장가들지 못해 몸살나 하는 사나이, 배가 고파 먹을것을 찾는 사람… 이들에게 줄것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뭐니뭐니해도 그들에게 던져줄수 있는 먹을것을 손에 쥐고있을 때가 제일 흐뭇하다. 손에 먹을걸 쥐고 흔들면 흔드는대로 따르는 사람을 보는 재미란…
비류군사를 통솔할 권한을 준다는 바람에 귀가 버룩해진 동부대가를 바라볼 때마다 도노는 사람의 한계를 느끼군 하였다. 그렇다고 동부대가를 어리석은 놈이라고 비웃을수는 없다. 다 큰 아이는 잘 다루어야지 잘못 다루면 오히려 화가 미칠수 있다.
《내가 몇번 말했소? 조급해말라고…》 하고 도노는 짐짓 안타깝다는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조급해서 그러는줄 아시오이까?》
《그럼 뭐요?》
《도노대부님을 이렇게 가까이 알게 되면 될수록 이 몸이 근질거려서 하는 소리오이다. 뭔가 한번 큰일해서 도노님의 믿음에 보답하고저 하는 마음이랄지… 그런거웨다.》
도노는 한바탕 껄껄 웃었다.
《좋소, 좋소. 내 동부대가의 그 갸륵한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 너무 걱정말고 기다리시오.》
《도대체 언제쯤이나…》
《인차 된다고 하지 않소? 그보다 난 동부대가가 자기의 군사들을 더 잘 훈련시켜야 한다고 보오.》
《우리 군사는 념려마시오이다.》
《동부의 군사가 세다는건 알고있소. 하지만 말이요? 이제 이 비류의 군사들을 순추대가가 통솔하는 경우 뭐니뭐니해도 그 권위라는게 있어야 하지 않겠소? 비류의 군사들가운데서 순추대가의 동부군사들이 다른 부의 군사들을 쥐락펴락할수 있어야만 동부대가가 당당히 비류군사를 통솔해도 누가 감히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거란 말이요, 안 그렇소?》
《그야 그렇지요.》
《그러니 짬이 있으면 동부군사들을 달구어서 모두 범으로 만들어야 한단 말이요. 난다긴다 하는 범으로 말이요.》
《그건 걱정마시오이다. 그러지 않아도 요새 바지에 오좀싸게 군사들을 닥달질하고있소이다.》
《그거 아주 잘하는 일이요. 순추대가는 역시 하나 하면 열, 백을 내다보며 척척 해제끼니 손잡고 일해볼만 하단 말이요. 하하…》
동부대가는 두손을 썩썩 비비며 좋아하였다.
두사람이 서로 비비고 쓸며 좋아하는데 도노의 몸종이 비슬비슬 다가와 주인의 귀가에 손나발을 하고 뭐라고 수군거렸다.
도노의 얼굴이 갑자기 새파래지기 시작하였다. 동부대가는 무슨 일인가 하여 도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시오, 대부님?》
《아무것도 아니요.》
도노는 서둘러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온다간다 없이 길차비를 서둘렀다.
순추대가는 꼬리 흔들다가 채인 격이 되여 서둘러 문가로 다가가는 도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노가 무슨 일인지 돌아섰다.
《참, 대가!》
《왜 그러시오?》
도노는 말꼭지를 떼놓고도 눈을 깜박이고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순추가 다시 물었다.
《사실 내 오늘 동부군사들이 훈련하는것까지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있구려. 뭐니뭐니해도 군사들 훈련을 잘 시켜야겠소. 알겠소?》
《알겠소.》
도노는 미타한 눈으로 순추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것 보오, 대가가 바라던 일이 생각보다 빨리 올수도 있소. 무슨 말인지 알겠소?》
《알겠소이다.》 하고 동부대가는 멋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도노는 다시 돌아섰다. 그는 몸종에게 눈을 돌렸다.
《뭐가 어떻게 됐다고? 다시 말해봐. 차근차근…》
《예, 저… 거무라는 사람이 임금님을 만난다고 하오이다.》
《거무? 귀가 잘못된게 아니야?》
《트… 틀림없소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뭘 하고 처박혀있기에 임금님을 함부로 만나도록 한단 말인가, 엉? 밥통같은것들! 내 승인이 없이는 그 누구도 임금님을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그만큼 말했는데 뭘 하고 자빠져있었나 말이야, 이 쳐죽일것들!》
《죽을죄를 지었소이다.》
《더 죽을죄가 어디 있어, 어디 있냐 말이야, 엉?》
《예, 옳소이다. 그런데… 그 부위염장군이…》
《뭐, 부위염? 부위염이 어쨌단거야?》
《부위염장군이 임금님께 말씀올려서 그렇게 됐소이다.》
《이런 쌍것들! 부위염이 너네 할애비야, 엉?》
도노는 말하면 할수록 약이 올라 못 견디였다.
그는 서둘러 궁성으로 갔다.
부위염은 거무의 말을 들으며 잠자코 있었다.
얼굴을 보아서는 도무지 속을 알수 없었다.
《바라는것이 무엇이오이까?》
이윽토록 입을 다물고있던 부위염이 물었다.
《임금을 만나게 해주시오.》
《그건 안되오이다.》
《왜?》
《저는 그럴 권한이 없소이다.》
《당신은 경군장이 아니요?》
《그래도 안되오이다. 정 임금님을 만나시려면 대부님에게 말씀드려보시오이다.》
《도노대부?》
《그렇소이다.》
거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걸가? 그만큼 알아듣게 말했는데… 내 말을 믿지 않는건가? 아니면 도노가 그렇게도 무서운가? 그렇다면 사람이 보기와는 다르군. 이런 사람에게는…
《당신은 그래서… 고구려사신으로 오던 마리를 습격했소? 아무 죄도 없는 마리를, 도노의 령이라고?》
거무의 말에 부위염은 흠칫 놀랐다.
그는 거무를 쏘아보았다.
두사람의 눈길이 번개불처럼 부딪쳤다.
부위염이 먼저 눈길을 비켰다.
《똑똑히 듣소, 부위염! 당신이 그렇게도 떠받드는 도노가 없어도 비류는 있을거고 백성도 있을거요. 하지만 나라가 없고 백성이 없다면 도노도 없을거요. 당신은 눈이 있어도 망울이 없는 사람이요. 그렇게 살다가는 언제고 무사치 못할거요.》
《그만하시오.》
《아니, 말해야겠소. 나는 비류의 임금과 백성, 소나공주와 당신까지도 살려내기 위해 말해야겠소. 송양임금을 만나게 해주시오.》
《임금께서는 만나주시지 않을것이오이다.》
《당신은 그저 옛날의 대부 거무가 송양임금을 만나겠단다고만 하시오.》
송양은 오래동안 거무를 바라보았다. 거무는 많이 달라졌다. 퍽 늙어보였다. 하지만 낯빛은 더 밝아보였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가?
《오래간만이요, 거무대부!》
《그간 편안하셨소이까, 전하!》
두사람은 웃으며 서로 바라보았다.
《난 대부가 한번도 나타나지 않길래 어디 멀리 갔는가 했지? 그래 그사이 어디 가있었소?》
《수리산에 있었소이다.》
《수리산, 우리 비류의 수리산?》
《그렇소이다.》
송양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피여올랐다.
거무는 구태여 자기가 버들을 살려주었으며 그를 키워주었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많이 변했소이다.》 하고 거무는 담담하게 말했다.
많이 변했다! 사람도 산천도 그리고 궁전도…
마치도 까마득히 흐른듯 하다.
《세월을 이기는 약이 없다질 않소?!》
《옳은 말씀이시오이다.》
두 늙은이, 거무와 송양.
그들이 임금과 대부로 있을 때는 지금처럼 부드러운 사이가 아니였다. 송양은 거무의 엄엄한 낯빛을 싫어하였고 거무는 송양의 고집스럽고 무엇인가 불만스러워하는 성격을 마음에 차하지 않았다. 그들은 늘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동안 떨어져있다 만난 그들은 판판 달라졌다.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불쑥 나타났소, 대부?》
《아뢸 말씀이 있어서 왔소이다.》
송양은 웃었다.
그래도 아직 궁성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지 않았단 말이지?
거무는 송양의 그 속을 읽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무슨 말이요, 대부?》
《전하, 고구려의 대주부 마리가 전하를 뵙자고 왔소이다.》
《마리? 무엇때문에?》
송양의 두눈섭이 마주 붙었다.
《고구려와 비류 두 임금이 만나는것때문이오이다.》
《그건 도노대부와 만나 이야기된게 아니요?》
《마리는 전하의 뜻을 바로 알자는것이오이다.》
《내 뜻은 도노가 다 말했다고 보는데…》 하고 송양은 짐짓 딴전을 피웠다.
거무는 정색해서 물었다.
《그렇게 보시오이까?》
《그렇소. 뭐가 잘못됐소?》
《말도 어 해 다르고 아 해 다르오이다. 남의 말을 듣고야 어찌 사람의 속을 다 알수 있겠소이까? 백번 듣는것보다 한번 보는것이 낫다고 마리를 만나보시는것이 어떠하오이까?》
《난 그를 만나보았소.》
《그때하고는 다르오이다.》
《고구려의 주몽이 날 시원치 않게 보는것 같은데 만나서 뭘 한다는거요? 서로 좋지 못한 사이인데 만나지 않는게 좋소.》
산 닭 주고 죽은 닭 바꾸기도 힘들다더니 송양은 엉치에 뿔난 못된 송아지인가, 아니면…
거무는 송양을 어지간히 알고있다. 한번 돌아서면 절벽강산이다.
《그래도 만나보시는것이 어떻소이까?》
《마리가 어디 있소?》
《지금 가까이 와있소이다.》
《거무가 데려왔소, 아니면 제발로 왔소?》
《저는 길잡이나 했소이다.》
《한심하다, 한심해. 비류가 어찌다가 이렇게 헌 울바자가 됐단 말인가?》
거무는 놀라운 눈으로 송양을 보았다. 행여나 했는데 말하는걸 보니 그게 아니였다.
끈을 좀 늦추어야겠다. 거무는 속이 탔다.
《전하, 도노는 어디 갔소이까?》
《가기는 어디 가겠소? 여기 있소. 아마 지금 동부에 갔을거요.》
《전하께서는 도노를 어떻게 보시오이까?》
《도노? 어, 좋은 사람이요. 싹싹하고 무슨 일이나 거침없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 우리 비류에 대부로 있어서 난 한결 편안해졌소.》
송양은 거짓말을 하고있었다. 그러나 거무앞에서 도노를 탓하고싶지는 않았다.
거무는 송양의 속을 뻔히 들여다보았다.
《혹시 딴 기미를 챈것은 없소이까?》
《딴 기미라니, 도노에게서?》
《터놓고 말씀드리면 도노대부는 전하에게도 비류에도 좋은 사람이 못되오이다.》
《그건 어떻게 하는 말이요?》
《그는 부여의 끄나불이오이다. 그는 비류에 해되는 일을 많이 저질렀소이다.》
송양은 빙긋이 웃었다. 거무의 말이 도노에 대한 질투로 들리였다.
《도노가 부여의 끄나불이다. … 그러면 나는 뭐요?》
송양의 물음에 거무는 낯을 찌프렸다. 송양은 거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지나간 일이 아직 잊혀지지 않아 그런가? 아니면 도노를 너무 믿어서인가?
《왜 대답이 없소, 거무대부?》
《전하! 저는 실없는 소리를 하지 않소이다. 그리고 시앗싸움따위는 싫어하오이다.》
《나도 실없는 소리를 하지 않소. 그래 거무! 우리 비류에 어떤 미련이 있는건 아니요?》
《저는 벼슬따위는 이미 잊은지 오랬소이다, 전하!》
《그렇게 말하는 늙은이들이 많지. 하지만 놓친 고기는 더 커보인다고 했소. 그렇지 않소?》
이래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거무는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송양을 만나려는 마리는 어찌하는가?
거무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독틈에도 용수가 있다 하지만 송양은 독이 아니라 나귀발통이다. 이런 사람과 기어코 만나겠다고 찾아온 마리가 불쌍하다.
《전하! 저는 돌아가겠소이다.》 하고 거무는 말했다.
《왜 성이 났소? 허, 우리들 나이야 그만한 말쯤은 새길줄도 알아야지, 거무!》
《제가 전하에 대해서 잘못 안것 같소이다.》
《아마 그런가 보오. 하지만 이렇게 오래간만에 왔다가 불쑥 갈수야 없지. 쉬여서 가도록 하오.》
《고맙소이다. 하지만 저는 물러가겠소이다.》
《정 그렇다면 할수 없지. 이제 어디로 가겠소? 수리산에?》
《저는 고구려로 가려고 하오이다.》
송양이 펄쩍 놀랐다.
《고구려?》
송양은 눈을 치뜨며 거무를 쏘아보았다.
《고구려로 간다? 그야 자네 좋을대로… 난 오래전부터 거무를 우리 비류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으니까.》
송양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거무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건 좋을대로 보시오이다. 하지만… 부디 사람을 잘 가려보시오이다. 필부도 사람을 잘못 보면 제 몸을 망칠수 있다 했거늘 하물며 만을 거느리는 임금이 사람을 잘못 보면 어찌되겠소이까? 나라가 망하오이다.》
《어찌겠소? 그건 팔자요. 자고로 망하지 않는 사람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 없다고 했소.》
《하오나 망해도 어떻게 망하는가 하는것이 아니겠소이까?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대와 말씨름하면 내 기분은 늘 나빠지니 이게 어찌된 일일가? 그대의 잘못인지 아니면 내 잘못인지…》
《저는 아무런 미련도 없는 사람이오이다.》
《부디 자네의 그런 마음이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네.》
《전하!》
《그만하자구.》
거무가 나가려는데 도노가 들어왔다. 그는 찌를듯 한 눈으로 거무와 송양을 훑어보았다.
송양은 허거프게 웃었다.
도노의 눈길이 거무에게 닿았다.
거무는 도노의 눈길을 그대로 받았다.
도노는 거무의 눈길을 피하며 송양에게 물었다.
《손님이 오셨소이까, 전하?》
《따로 소개할건 없을테지. 서로 알고들 있으니까.》
도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거무를 보았다.
《거무대부님, 이거 오래간만이오이다.》
거무는 눈살을 쪼프리며 말없이 서있었다.
도노는 어색해졌다.
《제가 끼여들지 말아야 할데 들어온것 같소이다.》
도노는 돌아서려 하였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한창 도노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참이였소.》
《저에 대한 말이라고요? 그것 참 귀가 솔깃한데요. 그래 이 도노가 어떻게 말밥에 올랐소이까?》
《좋은 사람이라는거요.》 하고 송양이 차거운 얼굴로 말했다.
도노는 두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거무님, 혹시 저에게 무슨 좋지 못한 일이 있지 않소이까?》
《그건 자기가 더 잘 알겠는데, 도노대부!》
《그래요? 고맙소이다, 깨우쳐주셔서…》
《그건 나도 같소. 도노라는 사람을 더 잘 알게 돼서…》
두사람은 서로 말없이 쏘아보았다.
도노가 먼저 웃음을 흘리며 송양이 들으라는듯 빈정거렸다.
《사나이라면 제때에 물러설줄도 알아야 하지 않소이까? 거무님이 그렇게 대부자리가 탐나서 그러는줄 미처 몰랐소이다. 바라신다면 제가 물러날수도 있소이다.》
《하하하!》
거무는 메마른 웃음을 터쳤다.
도노와 송양은 어리둥절해졌다.
《세상은 다 한때요, 도노대부! 그걸 모르고 욕심에만 눈이 뒤집혀 아득바득하는 사람을 보는것처럼 가련한것은 없소.》
거무는 눈을 깝작거리는 도노를 남겨놓고 돌아서 휘적휘적 나갔다.
도노는 거무의 뒤를 늘메기눈으로 쏘아보다가 송양에게 돌아섰다.
《전하! 거무는 전하를 헐뜯고있소이다.》
송양의 낯빛은 어두웠다.
《도노대부! 내 듣기엔 바로 당신을 헐뜯고있는것 같은데?》
《어쨌든 가만 놔둘수 없소이다.》
《그만두오. 거무의 말에도 일리는 있으니까.》
《전하께서 그러하옵시면 좋소이다. 제가 처리하겠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