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오이의 가슴이 느닷없이 쿵쿵 뛰였다.
끝내 오고야말았구나. 그런데 왜 눈을 들수 없는가?
코갖신이 다가왔다.
하루 화근은 식전 술이요, 일년 화근은 발에 끼는 갖신이요, 평생 고생은 못된 녀편네라. 누가 한 소리던가? 협보? 아니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오른걸가? 오이는 속으로 웃었다.
《숯 팔건가요?》
부드러운 녀인의 목소리였다. 귀에 익은 그 물음에 죄여들던 오이의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아득히 먼 옛날에 들은듯 한, 그러면서도 기쁨이 부풀어나는 목소리였다.
《예.》 하고 오이는 대답했다.
《좋은건가?》
《참숯이오이다.》
오이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류화의 소리없이 웃는 얼굴이 안겨왔다. 오이는 어쩐지 눈물이 쏟아지려 하였다.
류화는 한동안 오이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내가 사겠소.》 하고 류화는 돌아섰다.
오이는 서둘러 숯섬을 지고 일어나 류화의 뒤를 따랐다.
오이는 고개를 수굿하고 걸으면서도 먼발치에서 자기쪽을 바라보고있는 소라의 모습을 눈에 새기였다.
그 처녀는 다른 일이 없는가 살피고있었다.
고맙다, 소라야!
소라가 아니라면 오이는 아직도 류화를 만나지 못했을것이다. 오이가 소라더러 끼여들지 말라고 하였지만 처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다마를 추연에게 보냈다. 류화를 스스럼없이 만날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고 보았다. 과연 추연이 움직일것인가? 추연은 류화에게 갔다.
그리하여 일년에 두서너번 밖으로 나오는 류화가 오이를 만나러 온것이다.
마침내 류화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오이의 아래우를 다시 훑어보았다.
《오이야! 내 아들아!》
류화가 팔을 벌렸다.
《어머님!》
오이는 무릎을 꿇었다.
류화는 오이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이게 얼마만이냐?》
류화의 감은 눈에서 비가 흘렀다.
두사람은 오래도록 얼싸안고있었다.
《그간 앓지들 않았나? 다들 무사하고?》
《예, 우리야 뭐, 어머님이 그간 얼마나 힘드셨겠소이까?》
《집에 있는 사람들이야 고생한들 뭐 그리 큰거겠나? 뜻을 품고나선 자네들이 힘들지… 오가는 소리들을 동냥해서 듣긴 하지만 어디 만나보는것만 한가? 속만 태웠지.》
오이는 주몽과 자기들이 부여를 떠나던 때부터 시작하여 고구려를 세운 일과 지금 하고있는 일을 두루 이야기하였다. 지나간 일은 감회가 새로운 법이다. 하루하루 살아갈 때는 그것이 뒤날 어떤 감정이 들겠는지 미처 모른다. 오이는 자기들이 살아오고 자기들이 걸어온 길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놀라웠다. 아마도 류화의 감탄, 놀람, 흥분, 기쁨, 자랑이 얼싸안고 북돋아줬기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래간만에 만난 두사람은 알고싶은것도 많고 하고싶은 말도 많았다. 그걸 다 풀고 다 듣자면 긴긴해도 모자랄것이였다.
오이가 들은 말가운데서 제일 놀라운것은 례을나가 살아있 으며 그가 아기를 낳았다는것, 그것도 아들을 낳았다는것이였다.
그것은 처음 듣는 말이였다.
주몽과 오이네들은 이때까지 례을나가 잘못된것으로 알고있었다. 그것은 슬픈 일이여서 다른 일은 알아보려고 하여도 그 말만은 피하여왔었다.
《을나가 살아있단 말이오이까? 그가 아들을… 그러니 주몽형에게 아들이 있단 말씀이오이까?》
오이는 벌떡 일어나 껑충 뛰였다. 그는 제일보다 더 기뻐하였다.
그를 바라보는 류화의 눈굽은 젖어들었다. 추연의 일이 그의 가슴을 허비여놓았다.
《자네는 왜 추연의 일은 묻지 않나?》
추연에게 들어 알고있으면서 류화는 물었다.
오이는 흠칫 놀랐지만 다시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니 례을나가 사내를 낳았단 말씀이지요? 이건 고구려가 흥할 징조이오이다. 하하!》
다른 사람이라면 류화의 가슴이 이다지도 아프지 않을것이다. 하다못해 체통이라도 작던지…
오이가 주몽을 따라나선 뒤 집안이 바람에 날려가버리고말았다. 어머니는 돌아가고 남은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오이에게 그래도 이 부여에 남은것이라고는 추연 하나뿐이였다. 그런데 그 추연마저…
《추연이가… 오이, 자네 왔다는 말을 하면서 울더군.》
《그만하시오이다.》
오이의 얼굴에 그늘이 비꼈다.
《추연이 그렇게 된건 그의탓이 아니네. 그의 오라비 해리 때문이네. 자네가 떠난 뒤 추연은 하루에도 열두번 자네를 찾아가겠다고 나섰네. 하지만 해리가 그를 막아섰어. 나중엔 군사를 풀어 집을 에워싸고 지켰지. 그러니 사내도 아닌 처녀가 별수있나? 해리는 그것도 모자라서 추연을 대소태자의 먼 친척벌 되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네. 가만히 듣자니 그 태자가 추연을 넘겨다보는게 싫어서 그랬다고 하지만 해리는 태자에게 잘 보이지 못해 몸살앓는 사람이니 할수 없는 일이지. 사나이는 싸워서 자기를 지키지만 녀자는 사나이들과 다르다는걸 알아야 하네. 몇번이나 죽는다는걸 살려놓았지.》
《차라리 죽었더라면 제 마음이 이렇게 아프지 않을것이오이다. 죽었다면 추연은 저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것이오나 산 추연은 영영 죽어버리고말았소이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게. 피치 못해 딴 길을 걸어간 사람 아닌가. 살아있으면 다시 걸을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바라던 삶을 살수 없는게 아니겠나? 난 추연이 자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기에 추연이 죽겠다는걸 말렸네. 죽기는 쉬워도 기를 쓰고 살아남아 바라던 삶을 이루는건 힘드네.》
《어머님! 저는 사나이오이다. 저는 앞으로 주몽형을 따라 뜻을 이룰 생각밖에 없소이다.》
《그래도 사람이…》
《참, 아기는 잘 자라오이까? 한번 보았으면… 이 오이에게도 조카가 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이다.》
류화는 웃고말았다. 동정과 야속함이 그리고 대견함과 행복이 어우러진 웃음이였다.
《벌차다네.》
《사내가 그래야지요.》
오이는 가슴속의 상처를 잊은듯 손바닥으로 입술을 훑으며 웃었다.
《어떻게든 틈을 내야지. 오이가 보겠다는데… 아이 어머니와 말해보겠네. 그러지 않아도 오이가 왔다니까 당장 아이를 안고 만나보겠다는걸 겨우 떼놓았네.》
《제발 비나이다, 어머님. 멀리서라도 좋으니 보게만 해주시오이다.》
《그래야지.》
류화는 웃고나서 오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안부나 전하려고 먼길을 오지 않았겠지?》
《사실은 사람을 만나러 왔소이다. 도끼턱이라고, 례나루스승님의 일을 도와주던 사람이오이다.》
《만났나?》
《못 만났소이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니 찾을 길이 없소이다. 그 사람을 만나 부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겠는데…》
《알겠네. 언제까지 있겠나?》
《너무 오래 있었소이다.》
《며칠만 더 기다리게!》
《알겠소이다.》
이틀이 지나 한사람이 오이를 찾아왔다. 그 사람은 뜻밖에도 그렇게 찾던 도끼턱이였다. 오이도 도끼턱도 이렇게 만날줄은 몰랐다. 모르면 곁에 두고도 천리밖에서 찾는거요, 알면 천리밖에 있어도 곁에 둔듯이 찾는다더니…
례나루가 죽은 뒤 그는 물밑에 가라앉은듯 드러나지 않았다. 누구 알 사람도 없거니와 그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모르고있었다. 그러던것을 오이가 도끼턱을 찾는다는 소리를 류화에게 들은 례을나가 그 사람을 떠올렸다. 을나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딱히 아는것은 아니였으나 이전에 할아버지인 례나루와 남모르게 만나는걸 한두번 보았기에 그 사람을 찾은것이였다.
도끼턱은 그 사람의 생김특징이 아니고 멋으로 붙인 별명도 아니였다. 그 사람의 턱에 큰 흉터가 있는데 그것은 젊었을 때 전쟁에 나가 얻은 상처자리였다. 그는 짧은 비파형단검을 가지고 도끼를 쓰는 적장과 싸워 적장을 찔러눕혔다. 그만큼 그는 날파람있었다. 하지만 그도 도끼에 설맞아 턱에 큰 상처자리를 얻었다. 하마트면 살아남지 못했을것이였다.
그는 이전 례나루의 제자인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도 자기를 잊지 않고 오이를 보내 찾는것을 기뻐하였다.
오이도 그를 찾아 한시름 놓았다.
도끼턱이 알고있는 부여조정의 정세, 딱히는 고구려에 대한 부여의 태도에서 이렇다하게 귀를 도사릴 일은 없었다. 부여의 임금 금와는 늙기도 하였거니와 고구려의 임금 주몽을 부여에 있을 때부터 잘 아는것으로 하여 특별히 두 나라사이를 긴장시키는걸 좋아하지 않았다. 고구려와 부여사이는 이전 구려와 부여때와 달라진것이 없었다. 주몽이 고구려의 임금이 된걸 놀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대소태자가 주몽이 고구려의 임금이 된걸 경계해야 하며 제때에 사신을 보내오지 않은걸 물어 되게 다불려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그건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도 그러던 일이라 별로 모가 서지 않았다. 부여로 볼 때에는 누구에게나 부여의 속국, 내지는 위성국처럼 되여있는 고구려보다 서쪽의 일이 더 근심이였다.
부여의 서쪽 더 정확히는 료하 건너편 세칭 중원이라고 하는 황하 중류의 남북지역에서는 전란이 한창이였다. 물론 그 전란은 어제오늘 터진것이 아니였다. 중원은 동주때부터 전란에 휩싸였다. 오늘은 이 나라가 저 나라를 먹고 또 래일은 저 나라가 이 나라를 먹었다. 이렇게 몇백년이 흘러오고있었다. 과연 중원이 합쳐지겠는가? 그것은 두고봐야 할 일이지만 부여로서는 이제 더 건너집 불구경만 하고있을수 없게 되였다. 중원이 쪼각나 서로 싸울 때는 불안하기는 해도 부여로서는 그래도 편안한 때였다. 그러나 만약 중원이 합쳐지면 주변나라들은 결코 편안할수만 없다. 차면 넘치는것이 세상리치이다. 손가락이 펴져있을 때는 몰라도 하나로 합쳐져 주먹이 되면 그것은 힘이요, 힘은 어디론가 뻗치기마련이다. 그 힘이 동쪽으로 오지 않는다고 누가 담보할수 있겠는가? 아니 그것은 지나간 력사의 필연이다. 땅이 좁아서도 아니고 무슨 구실이 있어서도 아니였다. 땅은 미처 다루지 못해 황무지가 될 정도로 넓었고 구실은 그때그때 얼마든지 달라질수 있었다. 무엇이 있고없고가 문제가 아니였다. 아홉푼을 가진자는 한푼을 더 채워서 열푼을 만들고싶고 아흔아홉푼을 가진자는 또 한푼을 더 가져 백푼을 만들고싶어한다.
부여의 똑똑한 사람들은 지나간 나날들을 더듬어보며 앞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불안해하였다. 하지만 부여는 너무나 오래동안 안일하게 살아왔다. 중원과 마찬가지로 박달임금의 나라도 쪼각나 오래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그뿐이였다. 누군가는 세상일이란 합쳐진지 오래면 갈라지기마련이요, 갈라진지 오래면 합쳐지기마련이라고 했다. 그럴듯한 말이다. 하지만 이 그럴듯한 말이 서쪽에서는 맞아도 동쪽에서는 맞지 않는데 그 안타까움이 있지 않을가? 그런데 아직 부여는 그대로 잠자고있는것이다. 아직도 잠이 모자라는가? 아니면 이렇게 끝없는 잠을 자다가 지리멸렬하고말것인가? 마땅히 태여날것이라면 어차피 고통과 류혈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된다. 설사 그렇게 되는것이 가슴 아프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사는 길이다. 닭알속의 병아리가 세상에 나오자면 부리로 껍질을 쪼아야 한다. 쫏되 깨여지게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생명을 가졌다 하더라도 곪아버리고 나중에는 죽어버리고만다.
부여는 옛 박달임금의 나라에서 그래도 큰 나라다. 이런 나라가 자고있다. 아니 이제는 늙어서 죽을 때를 기다리고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도끼턱의 생각이였다.
그는 오이의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
주몽이 어떤 사람이고 고구려가 어떤 나라이며 앞으로 뭘 어떻게 하자는가 하는것이 그를 흥분케 하였다. 물론 나라를 세울 때는 누구나 옳은 일을 하려고 하며 포부도 크다. 그렇다고 하여 다 그렇게 되는것은 아니다. 뜻도 있고 힘도 있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권력이라는 그 묘한 그물에 걸려 처음의 기개와는 달리 빛없이 사라져버리고말았는가! 권력과 재부, 명예와 안락은 사람을 시험하는 수단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벗어나기 힘든 이 시험에서 과연 몇사람이 뽑히였던가! 그런 사람은 위인이요, 영웅이다. 위인과 영웅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주몽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과연 영웅인가? 우리 박달겨레가 살아나려면 영웅이 있어야 한다. 일신의 명예와 안락이 아니라 겨레의 영광을 위하여 한몸바치는 그런 사나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흩어진 겨레들과 겨레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일할 그런 사나이가 있어야 한다.
아- 주몽이 그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하지만 두고보아야 한다. 하되 강건너 불보듯 할수는 없다. 그를 도와주자, 고구려를 도와주자! 그래서 주몽이, 고구려가 겨레의 나라들을 하나로 묶어세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당신들을 도와주겠소. 무엇이 필요되오?》
도끼턱이 물었다.
《고구려는 먼저 불함산으로 가는 길을 열려고 하오이다. 그래서 불함산주위의 나라들부터 하나로 묶어세우자는것이오이다. 그러자면 부여 같은 나라가 방해하지 말아야 하오이다. 도와준다는건 다른것이 아니라 가능한껏 부여가 고구려의 일을 가로막아나서지 않게 금와임금님을 설복하며 작게는 부여의 의도를 제때에 알려주는것이오이다. 어른은 부여조정에서 일하니 그건 할수 있으리라 보오이다.》
《나더러 고구려의 세작이 돼달라는 소리로군? 하하.》
《마음에 없다면 그만두어도 되오이다.》
《해보는 소리요. 좋소, 내 힘껏 해보겠소.》
《고맙소이다.》
《고마울게 없소. 그런데 임금의 일은 다른게 없는데 태자쪽 일이 걸리오.》
《대소태자말이오이까?》
《그렇소.》
《나도 대소를 모르지 않소이다. 그런데 그가 무슨 일을 치겠소이까?》
도끼턱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대소는 큰일칠 위인이 못되오. 하지만 태자라는 자리는 무시할수 없소. 그러지 않아도 며칠전에 그러루한 일이 있었소. 태자하고 련결된 패거리들이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졌소. 대낮에 도적질도 서슴지 않고 하는 아주 못된 놈들인데 들리는 소문엔 태자의 령을 받고 갔다고 하오. 모두 난다긴다 하는 놈들이요.》
《짐작이 가오이다. 그래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오이까?》
《알아는 보겠소만 바로 그래서 걱정하는거요. 태자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때에 알수 없으니 말이요. 어떻게 안다고 해도 그땐 벌써 늦소.》
《그것들이 혹시 고구려로 간건 아닐가요?》
《딱히는 모르오. 아니, 고구려라고 하지는 않은것 같소. 거 뭐, 비류라던지…》
《알겠소이다.》
오이는 도끼턱과 앞으로의 일을 매듭짓고 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