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부여궁성은 고구려와 수천리 떨어져있었다. 그런것만큼 고구려와 부여는 날씨도 서로 달랐다. 고구려에 비가 온다고 하여 부여에도 비가 오는것은 아니다. 때로는 고구려에 비가 올 때 부여는 쾌청한 날씨이다.
《꼬끼요!》
궁성의 어느 집에서인가 수닭이 호기있게 울어제끼자 이어 다른 수닭들도 맞받아 울어댔다.
이 아침 부여의 대소태자는 달콤한 잠에서 억지로 깨나야 하였다.
《뭐야, 이건? 시끄럽게…》
대소는 비단이불을 다시 끄당겼다.
《어서 일어나시오이다. 내전마마께서 부르시오이다.》
《뭐, 어머님께서?》
대소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진작 그렇게 말할게지, 젠장…》
기지개도 켤 사이없이 대소는 내전마마에게 달려갔다.
《중궁마마께 아침문안드리오이다.》
중궁마마는 오냐 하지 않았다.
대소는 별안간 가슴이 조였다. 아닐세라…
《간밤에 태자께서는 어디 가셨소?》
중궁마마의 따지는 물음이다.
《저, 궁전에…》
《궁전에? 그게 사실이시오?》
《아니, 저…》
중궁마마의 한숨이 밑에 엎드린 대소의 정수리에 닿는듯 하였다.
《왜 사실대로 말씀을 못하시오?》
간밤 대소는 해리와 함께 궁밖에 몰래 나가 북문부근에 있는 초연이라는 녀인의 집으로 갔다. 미복을 하고 찾아든 해리와 대소를 녀인은 반갑게 맞아들였다. 해리와는 이미 아는 사이지만 대소에게는 처음이였다. 그래서인지 그 녀자는 해리와만 말하려 했다. 해리가 자기의 친구이노라며 소개를 해서야 녀인은 대소와 마주서긴 하였지만 그래도 쉬이 받자 할 자세는 아니였다. 그것이 대소에게는 더 좋았다. 첫 보기 바쁘게 얼씨구나 달려드는 녀자라면 딱 질색이다. 그런 녀자는 태자인 대소에게 너무나 흔했다. 사내다운 사내란 기어코 숨는 진주를 자기의것으로 만들 때라야 진정한 쾌락을 볼수 있다고 부여의 태자인 대소는 자부하고있었다. 다른데서는 몰라도 녀자와의 관계에서는 한번 천하의 내노라 하는것들과 내기를 하여 황제로도 될수 있다고 큰소리 땅땅 치는 대소였다. 사람은 옛사람이 좋고 물건은 새 물건이 좋다 하는 말을 대소는 제나름대로 풀이하는데 그 말인즉 사람은 충신이 좋고 녀자는 새 녀자가 좋다는것이였다. 맨날 보는 녀자는 그가 왕후라도 싫고 흔하디흔한 궁녀라도 싫다는것이다. 이런 대소에게 초연은 싫지 않았다. 눈으로 사내의 기를 홀릴줄 알았고 몸짓으로 사내의 염통을 달굴줄 알았다. 색에 빠치는 사내에게 생굴도 생굴나름이다. 대소는 초연이라는 이 녀자가 어지간하게 남자를 다룬 생둥이가 아니라는것에 조금 실뚱했지만 벌써 녀자에게 빠져들고있었다. 권력과 재물에 몸파는 녀자는 아니다는 제나름의 위안이 늘 그러듯 척 드리웠다. 첫날밤이라 새우지는 않고 자정넘어 궁안으로 새여드는 대소의 속은 안타까웠다. 그렇게 궁안에 들어와 솔곳이 잠들었다가 불리여온 대소였다.
보아하니 내전마마는 간밤의 일을 얼추나마 아는듯 하다.
대소는 그저 죽었소 하고 무릎꿇고있었다.
《사내대장부가 열 계집 못 거느린다는 법없소. 임금이 삼천궁녀를 거느린다고 하여도 흠은 아니요. 하지만…》
중궁마마는 길게 숨을 내쉬였다.
《하지만 계집에만 맛들인 사내치고 집을 세운 사내없고 색에 미친 임금이 천하를 얻는걸 보지 못했소. 선왕의 업을 이어 받아야 할 태자께서 그래서야 쓰겠소? 자중하시여 보위를 튼튼히 하도록 하시오.》
《명심하겠소이다.》
동궁처소로 돌아온 대소는 그제야 무거운 숨을 내쉬였다. 그는 내전마마의 뜻을 받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지 않아도 대소는 태자로서 근심이 많았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것이다. 부왕이 정사를 보기때문에 태자는 장차 왕이 될 준비만 하면 되였다. 말하자면 책임감이 없었다. 책임감이란 묘한것이다. 잘하면 위엄이 생기지만 잘못하면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 한두번 무능력한건 아무리 왕이라도 있을수 있는것이지만 자주 반복되면 아예 권위를 잃게 된다. 부여는 아무리 왕이 최고권위자라고 하더라도 절대권력자는 아니였다. 나라에 특별한 재난이라든가 불상사가 생기면 제가평의회에서 토의하여 왕이라 하더라도 목이 잘릴수 있는것이다. 대소가 그걸 모를리 없었다. 아니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은근히 두려워한다. 대소는 태자로서 선왕 금와의 뒤를 이어 왕이 될것이다. 그런데 왕이 될 자격이란 선왕의 맏아들이라는 바로 그 한가지였다. 대소는 왕자로서 남달리 뛰여난데가 별로 없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고 뛰여난데가 정 없는것도 아니였다. 다만 불행하게도 대소가 태자로 있을 때 그리고 왕이 되려고 할 때 그보다 뛰여난 사람들이 많았다는데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소의 동생들가운데도 있었고 또 주몽과 같이 하찮게 보는 사람들가운데도 있었다. 이런 처지는 대소로 하여금 한시도 마음놓을수 없게 하였다. 대소가 색에 빠치는것은 천성적인것도 있지만 대개 이런 마음의 거리낌에서 벗어나고싶은 충동에 있었다. 누구나 남보다 못한건 싫어한다. 대소는 어떻게 하든 한번 본때를 보여 앞으로 왕으로서의 당당한 권위를 지니고싶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가 뚜렷하게 서지 않는것이 안타까웠다. 무당이 제 굿 못하고 소경이 제 죽을 날 모른다지 않는가. 물론 대소에게 그것을 조언하는 사람들이 없는건 아니다. 누구는 임금이란 위엄이 있어야 하니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이란 군사다, 따라서 왕이 위엄을 지니자면 군사를 키워야 한다고도 하였고 또 누구는 나라의 법을 칼날같이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신하는 백성이 잘 먹고 편안하게 하여야 하니 그를 위해 국부축적에 힘을 넣어야 한다고 하였다. 들을 때는 다 그럴듯한데 실지 하자고 하면 모든게 막막해보였다. 대소에게는 꾸준히 힘써 앞으로 나라가 튼튼하게 되는 일보다 당장 대소태자의 위력을 보여줄수 있는 그런 일이 필요하였다.
대소는 조회에 참가하면서도 속으로 꿍꿍 갑자르며 그 일에 골을 썩이고있었다.
조회를 끝내고 동궁처소에 들었는데 시종이 다가와 남들이 듣지 못하게 여쭈었다.
《도노의 밀사가 왔소이다.》
그 소리에 대소의 귀가 번쩍 틔였다.
《도노의 밀사? 어, 어서 들여보내라.》
대소는 그때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지 불현듯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한 웃음이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