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흰사슴》이 호수가에 나타나군 한다는 소리를 들은 송양은 이마살을 찌프렸다. 이때까지 나타나지 않던 《흰사슴》이 어떻게 되여 갑자기 나타났는가? 어쩐지 불길한 징조처럼 들렸다.
도노의 말을 듣건대 주몽과 만나는 일도 뭔가 시원치 않다. 고구려가 사신사건의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고 받아들인것은 송양에게 좋은 소리가 못되였다. 차라리 고구려가 억지를 부리더라도 자기들에게 잘못이 없다고 우기는편이 송양의 마음을 더 편하게 해주었을것이다. 마리가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송양은 무엇인가 배반당한 느낌이였고 이겼다는 생각보다 졌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도노는 이번 마리와의 담판을 놓고 기고만장해서 떠들지만 송양에게는 모든게 미타했다. 이전에 시노를 몰래 고구려에 보낼 때도 그래, 이번에 주몽이 만나자고 할 때도 그래, 송양으로서는 뭐 별로 어려울게 없이 쉽게 될 일 같은데 왜 이렇게 삼거웃처럼 엉키는지 모를 일이였다.
이번 일에 도노만 신바람이 났다. 그는 주몽을 만나는 일은 서두를것이 아니라 쉬염쉬염 가면서 보는것이 현명하다고 기를 올렸다. 어쨌든 바빠하는건 고구려지 우리 비류가 아니라는것이다.
송양은 속이 타고 한심스러운 일이지만 뚝 부러지게 어쩔 궁리도 없었다. 고구려와 비류사이에 사신문제로 하여 불안스럽기 짝이 없는데다 행여나 주몽을 만나면 무슨 맑은 날을 볼것 같아 기다렸는데 그것도 장마철 구름처럼 지루해지고말았다. 게다가 비수일로 하여 궁정까지 뒤숭숭한 이때에 하필 《흰사슴》이 나타날건 뭐란 말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송양에게는 아무래도 불길하게 들리였다. 염병에 까마귀소리 같다. 송양의 그런 생각을 부채질한것은 바로 《흰사슴》이 송양의 지나간 일과 얽혀있기때문이다. 호수를 만들어 비류를 어떤 적이 쳐들어와도 끄떡없는 요새로 꾸리자, 이것은 젊은 시절 송양의 의지였다. 그때 송양을 도와나선 사람이 다름아닌 지금의 《흰사슴》 고아의 아버지였다. 고아의 아버지는 뛰여난 장공이였다.
두사람은 배짱이 맞았다. 두사람은 밤을 새우며 공사를 다그쳤다. 뭔가 뚜렷한 목적이 있고 그것을 이룩하려는 정열로 들끓던 그때는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지나간 일, 지금은 늙었다. 송양은 그 행복이 늘 그리웠다. 어쩔수없이 찾아드는 따뜻한 아래목에 대한 그리움, 평온과 안락은 늙은이들에게 자연스러운것이다. 송양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송양은 송양대로 보는것이 있었다. 송양은 자기의 늙음에 대해서 불만이였다. 몸은 늙었어도 속은 아직 새파란 젊은이였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이룰 어떤 일도 차례지지 않는다. 새장에 든 새는 바깥이 그리웠다. 그러나 영원히 나갈수 없다는 생각은 바깥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모든것을 증오스럽게 하였다. 더구나 《흰사슴》 고아는 송양에게 불명예스러운 흔적을 남겼다. 송양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저것 송양에게는 기분이 나빴다.
송양의 이 생각은 누구도 몰랐다.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게 쫓아버려라!》
그때 송양의 서리발돋친 어명에 누구보다 놀란것은 소나였다.
버들이 슬그머니 수리산으로 떠난 뒤 소나는 속이 조마조마했다. 아바마마가 버들의 행처를 물으면 어떻게 할것인가? 다행히 송양은 버들을 찾지 않았다. 하루를 넘긴 뒤 소나는 지나가는 말로 《흰사슴》 고아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그저 스쳐지나겠거니 했던 말이 아바마마의 분통을 다쳐놓을줄 어찌 알았으랴.
《아바마마! <흰사슴>은 자주 나타나는것도 아니고 또 쫓는다고 사라지지도 않나이다. 그리고 어디에 나타나겠는지도 모르고…》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송양은 언짢게 소나를 흘겼다. 그리고는 부위염을 불러 궁성 지키는 군사를 다 풀어서라도 다시는 《흰사슴》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라고 소리질렀다.
부위염으로서도 뜻밖이였다. 부위염은 《흰사슴》을 본적도 없었다. 게다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걸 놓고 궁성군사를 풀어놓는다는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부위염은 주저했다.
이때 도노의 성난 소리가 울렸다.
《부위염장군은 어명을 듣는거요, 아니면 거역하는거요? 왜 단마디로 어명을 받들지 않소?》
도노의 얼굴은 분노에 차있었다.
뜻밖이였다.
부위염은 물론 소나도 송양도 어리둥절했다.
《상명하복, 예로부터 웃사람에게 아래사람은 복종해야 하거늘, 더구나 한 나라 임금께서 내린 령인데 어쩌면 그리 불손할수 있는가?》
부위염은 찍소리도 못했다.
《알겠소이다.》
다음날부터 궁성군사들이 호수가와 숲으로 떨쳐나섰다.
둘씩, 셋씩 무리를 지어 서로 소리쳐 들릴 거리만큼 떨어져 숲속의 여기저기 널려졌다. 《흰사슴》을 잡든가 쫓아라, 이것이 군사들에게 내려진 어명이였다. 그런데 군사들 열에 아홉이 《흰사슴》이 무언지 모르고있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상서롭지 못한 짐승인가부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좀 안다는 사람은 귀신이라고 장담했다. 차츰 《흰사슴》은 귀신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귀신을 쫓는다! 그것은 황당한 일이였다.
군사들이 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다 그렇겠거니 하고 여겼다. 그러다나니 벌써 이틀이 지나기 바쁘게 군사다운 기강이 풀어져 물렁팥죽이 되였다.
처음에 궁성사람들은 군사들이 훈련을 하고있는줄 알았다. 그러다가 하루이틀 지나자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군사들이 하는 꼴을 보고 서로 수군거렸다.
《뭘 하는거요, 도대체?》
《글쎄 무슨 죄인을 잡는다던지…》
《무슨 죄인이게?》
《알게 뭐요. 큰죄를 지은 사람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며칠씩 지키고있을리 있소?》
《사냥하느라고 그러지 않을가? 짐승몰이하는것 같은데… 무슨 새를 쫓는것 아닐가?》
《하긴 그렇기도 하구만. 가을날 새쫓는것 같기도 해.》
사흘째 되는 날 부위염이 소나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예요?》
소나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쌀쌀하게 물었다.
부위염은 제 발등만 내려다보고있다가 뚝하게 말했다.
《호수가로 나갔으면 하오이다, 공주님!》
《그럴 생각 없는데요, 부위염장군.》
부위염은 눈을 번쩍 떴다.
《공주님, 이건 놀음이 아니오이다. 그럴 생각도 없고 짬도 없소이다. 그러니 가주셔야겠소이다.》
부위염은 여느때와 달리 별스레 깍듯이 높임말을 쓰며 소나를 몰아댔다. 무엇때문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심상치 않다. 그는 아직 한번도 소나에게 이렇게 놀아댄적이 없었다.
《좋아요.》
소나는 속으로 코웃음치며 승낙했다.
부위염이 말을 타고 앞장서고 소나가 그의 뒤를 따랐다.
가는 길에서 내내 부위염은 입을 꾹 다물고있었다.
부위염은 소나가 어떻게 대해주든 그를 좋아했다. 어떤 구실을 대서라도 소나가 보고싶고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싶었다. 남들이 혀를 차는 그 변덕까지도 부위염 자기만이 품어줄수 있다고 여겼다. 부위염의 눈길, 마음은 온통 소나에게만 쏠려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소나에게 미친듯 쏠리던 마음이 떠졌다. 마리를 만난 뒤부터였다. 사나이가 처녀에 대한 사랑 하나에만 빠질수 없으며 뭔가 더 큰일을 위해 몸을 바쳐야 한다는 느낌이 부위염을 사로잡았다. 소나를 미워하거나 멀리하지는 않더라도 나라일에 마음을 돌리게 되였다. 일단 그렇게 마음을 돌리자 소나에게만 빠져있던 지난날이 철부지처럼 느껴졌다.
소나는 부위염의 뒤를 따라가며 이따금 그의 모습을 살폈다. 속이 언짢았다.
부위염이 찾아온것은 뜻밖이였다.
소나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버들을 생각하고있었다. 버들이 수리산으로 떠난지 벌써 사흘이 되였다. 소나는 버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것이라고 제쳐놓으면서도 그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런 때 부위염이 불쑥 찾아왔던것이다.
오라는 딸은 안 오고 외통눈이사위만 온다더니…
소나는 한숨을 내쉬였다.
소나는 자기를 미친듯 사랑하는 부위염에게 어느덧 버릇되여있었다. 그래서인지 부위염이 달라지리라고 언제 한번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부위염의 태도가 이전과 뭔가 달라졌다. 딱히 무엇이라고 할수없이 아리숭하긴 하지만 그건 분명하였다. 눈길, 몸가짐이 이전과는 달랐다.
소나는 속이 따끔해났다.
그럴수도 있는것이다.
그러자 당황해났다. 호수가로 나가자고 부위염은 간청하지 않았다. 그건 소나 자기를 때려모는듯 한 요구였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소나를 불쾌하게 하면서도 한편 은근히 기쁘게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 소나는 불안하였다.
《날더러 어찌라는거예요?》
소나는 말고삐를 당겼다.
부위염이 멈칫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보라는거요.》
《뭘 말이예요?》
《다 보라는거요. 호수도 숲도 군사도…》
《그게 뭐 어쨌다는거예요?》
소나는 짜증섞인 소리로 물었다.
부위염이 홱 돌아섰다. 그의 눈길이 번쩍이였다.
《뭐라고? 그게 소나공주가 하는 말이 맞소?》
《모르겠어요.》
부위염의 뺨이 울근불근거렸다.
《좋소. 그럼 어디 호수를 다 돌아보시오이다, 공주님!》 하며 부위염은 소나를 앞에 세웠다.
소나는 숲과 호수가에 있는 군사들을 보았다.
말이 군사지 그들은 군사가 아니였다. 창과 검을 제대로 갖추고있는 군사는 몇이 안되였다. 웃옷을 벗고있는 사람도 있고 숲의 풀판에 드러누워 자는 사람도 있었으며 히히덕거리며 씨름을 하는 패도 있었다.
《그래 이게 궁성을 지키는 군사요?》
부위염이 물었다.
《궁성수비군사를 통솔하는 장수가 누군데 날 보고 그걸 물어요?》
소나가 비웃음치며 되물었다.
부위염은 눈을 찌프렸다.
《옳소. 내가 군사를 거느렸소. 그러니 나에게 책임이 있소. 하지만 우린 지금 눈을 싸매고 헛막대기질하고있단 말이요. 허무맹랑한짓을! 그것도 며칠째…》
소나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그러니 장군은 어명이 잘못되였다는거예요?》
부위염은 찌프린 낯으로 소나를 보다가 한숨을 토했다.
《그렇소.》
《뜻밖인데요? 장군이 어쩌면 그럴수 있어요?》
《공주! 깊이 생각해주길 바라오.》
《글쎄, 어명이 다 옳다는건 아니예요. 하지만 아무리 어명이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군사라면 마땅히 죽음으로 지켜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장군은?》
《공주! 난 변명하지 않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것도 아니요. 하지만 이번 일만은 그저 스쳐지날수 없소. 부탁이요. 임금께 아뢰여서 <흰사슴> 쫓는 일을 거두어주길 바라오. 이건 공주만이 바로잡을수 있소.》
소나는 부위염의 얼굴에서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읽었다. 그도 아바마마의 어명이 옳은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바마마가 너무 성을 내는 바람에 잠간 물러서지 않을수 없었다. 그뒤로는 버들의 일이 터질가봐 속을 재고있었다. 군사들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미처 몰랐다.
소나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있는데 말을 탄 군사가 달려왔다.
그는 부위염을 보자 말에서 뛰여내렸다.
《도노대부께서 부르시오이다.》
《어디서?》
《저기-》
부위염은 군사가 가리키는 호수건너쪽을 보았다.
《무슨 일이야?》
《대부께서 돌아보시다가 호수에서 미역감는 군사들을 보시였소이다. 지금 막 야단이시오이다. 장군을 당장 찾아오라고…》
《제기랄!》
부위염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부위염은 말을 몰아 도노에게로 갔다.
소나는 한동안 서있다가 천천히 그뒤를 따랐다.
물가에는 벌거벗은 세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서있었다.
그들은 우들우들 떨고있었다.
그들을 쏘아보는 도노의 작은 눈에는 독기가 어려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벌거벗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세사람은 뻥뻥해서 서로 마주보았다.
《저…》
《누구냐?》
도노가 새되게 소리쳤다.
《우린…》
《군사가 맞냐?》
《그렇소이다. 우린…》
《군사라면 뭣때문에 여기들 있지?》
《그건 <흰사슴>을 잡으려고… 아니, 쫓으려고…》
《누구의 령이지?》
《부위염장군의…》
《뭣이?》
《아니, 저… 임금님의 령…》
《임금님의 령이라면 어떻게 받들어야 한다?》
《그건…》
《설사 목에 칼이 들어오고 불에 타죽는 한이 있어도 임금님의 령이라면 그걸 지켜 죽는것이 군사다. 군사가 어명을 놓고 흐지부지하면 어떻게 하는지 모르느냐?》
《잘못했소이다, 대부나리!》
도노는 안타까운듯 머리를 저으며 한숨을 쉬였다.
《나는 너희들이 불쌍하다. 너희들의 잘못이 이 대부의 령을 어긴것이라면 얼마든지 용서할수 있다. 그러나 안된다. 아무리 대부라고 해도 일단 어명을 어긴 죄는 지나칠수 없다. 그 누구든!》
세사람은 무릎을 꿇었다.
《대부님! 죽을죄를 지었소이다. 제발 용서해주시오이다.》
《안돼!》
도노는 손을 저었다.
《저놈들의 목을 쳐라!》
부위염이 말에서 내려 도노앞에 한무릎을 꿇었다.
《대부님! 군사들에게는 잘못이 없소이다. 저를 처벌해주시오이다.》
《장군을?》
《그렇소이다.》
《그래 장군이 저 군사들을 대신해서 목을 내놓을테요?》
《어떤 벌이든 받겠소이다.》
도노는 싸늘하게 비웃었다.
《어명을 소홀히 한 죄! 누구든 용서받지 못할게요. 장군이 받을 처벌은 따로 있소. 장군! 눈먼 인정으로 부하들을 대하려 하지 마시오!》
도노는 부위염에게서 돌아섰다. 그리고는 수하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저 세놈의 목을 쳐 어명이 엄함을 알려라!》
소나는 먼발치에서 입술을 깨물며 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