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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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은 관악산을 넘을 때 마구 들추는 뻐스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이틀만에야 눈을 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와있나?》
연경은 천정을 멀거니 쳐다보며 중얼거리였다.
눈에 점적대와 포도당이 들어있는 유리병이 보이자 여기는 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놓고 돌멩이를 달아맨듯 무겁기만 한 눈시울을 다시 내리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며 전후사연을 련결하여보았다.
대전에서 아버지에게 총구가 겨누어지던 일이 생각났다. 괴한이 틀림없는 두세명의 젊은 놈들이 그 좌우에 살기를 뿜고있었다. 몸서리치는 순간이였다.
그 다음에는 자기가 무작정 아버지를 막아나서던 일이 생각나고 이어 뻐스에 올라 응급처치를 받고 관악산을 힘겹게 넘던 일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무사하셨을가? 그 무슨 잠행이라고 했던것 같은데…》
연경이가 이렇게 눈을 감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비몽사몽간에 머리맡에서 누구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의 목소리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정을 담아 부르는 소리, 반가움과 근심에 젖은 목소리…
그리웁던 목소리다.
누구일가? …
꿈에 이따금 나타나던 사내, 꿈속에서도 티각태각거리던 사내, 아무리 지워버리자고 해도 여적 지우지 못했고 지워지지도 않아 불쑥불쑥 뇌리에 감겨들던 사내…
사내의 목소리가 자못 정겹고 유정하다.
상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신선한 체취가 물씬 코를 찌르더니 촉촉한 입술이 살그머니 자기의 이마에 와닿는다.
그 달짝지근한 촉감에 연경은 금시 온몸이 녹신해들었다.
《연경이, 눈을 떠! 이젠 눈을 뜨라구, 크게! 애물이라니깐, 애물단지!》
연경이는 자기의 귀전에 노래처럼 스며드는 정다운 소리에 애써 눈시울을 밀어올렸다.
사내의 벙긋거리는 얼굴이 가득히 안겨왔다.
연경이의 얼굴에 미소가 피여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웃으니 꼭 망울을 금방 터친 목련 한송이 보는것 같구만. 더 활짝 웃어봐.》
사내의 정겨운 말에 목련송이같은 얼굴에 꽃같은 웃음이 함뿍 어리며 방안이 금시 환해졌다.
《하하하… 됐어. 그렇게 웃으니 얼마나 고와. 만나기만 하면 새파래서 달려들더니…》
최금룡이 이렇게 기분이 좋아 시시덕거리는데 반대로 처녀의 얼굴에 넘치던 웃음이 씻은듯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 순간 처녀의 마음속에 또 다른 연경이가 나타나 행복에 젖어든 연경이를 깔끔하게 다불렀다.
(멍청이! 웃어보이다니… 누구에게? … 처녀의 미소 아무때나 막 던져도 되는거야?!)
그러자 기쁨으로 반짝이던 그 눈에 분기가 서리발처럼 돋쳤다.
《왜 왔어요?》
《보고싶어서… 아니, 왜 왔냐구? 내가 누구게? 말해봐! 내가 누구지?》
최금룡이 이렇게 따지고 들긴 해도 약오른 기색은 별로 없다.
《누구긴 누구겠어요. 유다…》
《또또또… 신경 쓰면 침대에 곱으로 누워있어야 돼. 소원풀었어, 이틀동안 마음껏 들여다보았으니깐. 사랑의 허기증 실컷 봉창을 했나봐.》
《어떻게 알았어요?》
《연경이 아무리 숨어지내도 내 눈을 벗어나지 못해. 손오공이 만리대공을 단숨에 날아다녔어도 부처님 손안에 있었다는 소리 들어봤지?!》
《됐어요. 그만 돌아가요.》
《제발 성내지 마오. 성내면 몸에 나쁘대두. 웃는 얼굴 봤으니 이젠 됐어.》
《…》
연경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토라진 속을 너그러이 받아주는 사내앞에서 화를 낼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자기는 이 사내앞에서는 언제나 아이가 되고만다. 그리고 멍청이가 되고만다.
대학시절 도고하기로 소문났던 고려대 녀걸이 최금룡이라는 사내의 앞에 서기만 하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무서리철에 꽃잎 지듯 쉽사리 그 자존심이 잦아들고만다.
연경은 그럴 때마다 기가 죽어버리는 자신이 어이없고 자기의 혼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그 사내가 얄미워서 오똘거리며 뒤발질을 해보건만 다시 만나면 또 이 꼴이 되고만다.
문득 연경은 한달전 일이 생각났다.
《버티고개… 어떻게 된거예요? 마주볼 용기조차 없었는가부죠. 나타나지도 못할걸 왜 불렀죠?》
《누가, 누구더러 따져야 할 소리요? 8시까지라고 내가 강조했지?! 8시… 난 30분을 거기서 기다렸댔소. 더이상 지체할수 없었소. 나도 공적인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는걸 생각해줘야지.》
《좋아요. 저도 그때 피치 못할 일때문에 늦어졌어요. 미안해요. … 뭣때문에 찾았댔어요?》
《보고싶어서.》
《보고싶어서? … 그럼 내 하나 묻자요. 그때 신문은 어떻게 된건가요? 아버지가 싫어서 슬하를 떠났다구요?! 어쩌면 그럴수 있어요?!》
연경이 떠오른 생각을 더듬고나자 마음은 따스한 사랑의 마루에서 싸늘한 비애의 기슭으로 순식간에 굴러내렸다.
연경은 흐느끼듯 설분을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차츰 자신도 다잡을 겨를이 없이 숨소리가 커져갔다.
일간신문에 실렸던 최금룡의 글을 지금도 연경은 한자도 빠짐없이 외울수 있었다.
그것은 배신자의 선언이였다.
그것은 연경에게 가냘프게 남아있던 련인에 대한 미련마저 썩둑 잘라버리게 한 독설이였다.
신문에 실린 사내의 모습은 그가 꿈에도 생각할수 없었던 판판다른 모습이였다. 그래 이제는 결별을 선언한 사이라 해도 언제든지 한번 맞다들면 단단히 계산을 하리라고 윽별러왔다.
그런 최금룡이 지금은 정이 철철 넘치는 또 다른, 아니 예전의 살틀한 모습으로 나타난것이다. 엇바뀌는 두 모습앞에서 연경이는 착잡해졌다. 그 다음에는 경멸의 역기가 치밀어올랐다.
와우산숲속에서 결별의 선언을 할 때까지도 연경이는 배신자라고 떠들고 대들었으나 마음속으로는 그 무슨 절박한 리유가 있었을것이라고 자기 련인을 리해하고싶었다. 언제건 다시 돌아올것이라는 한가닥의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신문기사는 참으로 억울하고 서글픔이 앞서게 하였다.
최금룡은 심장이 움직이지 않는 일에는 절대로 자기를 적시는 사내가 아니다.
연경이 그때 맺힌 한을 싸늘하게 토설하자 최금룡은 할 말을 잊은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굳어져있었다. 고뇌가 실린 모습이였다.
그저 연경의 손목을 꽉 잡을뿐이였다.
속죄인가? 리해를 바라는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리해를 받을수 없다. 속죄는 더구나 통하지 않는 엄연한 배신이다.
연경이는 눈을 지꿎게 감은채 그냥 가슴에 서렸던 설음을 깡그리 내뿜었다.
《가요. 우리 집 식구들이 나타나기 전에… 내가 막 부끄러워요. 그렇게도 거기를 아껴주고 위해주고 너그럽게 리해하여주던 언니까지 뭐랬는지 알아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구 했어요.
어서 가요! 보기 싫어요!
정말 리해할수가 없어, 정말… 사내들이란 다 그런가요? 자신을 위함이라면 신의쯤은 헌신짝처럼 버려도 일없다는거죠?! 시시해요!
아버지 가슴을 제일 허벼놓은게 누군지 알아요? 》
연경의 말이 점차 신랄해졌다.
《…》
《대답해봐요. 누구일것 같애요?!》
《아, 거야…》
《리승만이라는거겠지요? 아니예요. 금룡씨, 금룡씨라구요!》
《연경이!》
연경이가 흐느껴울면서 금룡에게 잡힌 오른손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최금룡은 그냥 힘을 주어 처녀의 손목을 잡고있었다.
《제발 나를 좀 보오. …한번만이라도 눈을 떠줘.》
최금룡이 안타까이 애걸하였으나 처녀의 눈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나서 침대에서 내려섰다.
감겨있던 처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최금룡의 볼우에서 도글도글 굴러내린 한방울의 눈물이 처녀의 창백한 볼우에 떨어졌던것이다. 그것은 연경의 심장에 떨어진 불덩이였다.
《?!》
연경은 깜짝 놀랐다.
최금룡이 처녀에게 눈물을 보인게 멋적어 얼른 고개를 돌리고 재빨리 손부리로 눈굽을 닦아냈다.
최금룡이 떨구어버린 눈물 한방울이 순식간에 처녀의 속을 헝클어뜨렸다.
누가 말했던가. 눈물이란 심장의 속삭임이라고, 심장이 뿜어올린 웨침이라고…
그 눈물의 의미를 알고싶어 처녀의 심장은 예민하게 파들거렸다.
《난 가겠소!》
최금룡은 처녀의 손목을 놓아버리며 더이상 감상적인 정서에 자기를 맡길수 없다는듯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지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문가를 향해 걸어갔다.
처녀의 눈길이 그의 등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물아물거리던 사랑의 재더미에서 모닥불이 또다시 확 타올랐다.
《가요?》
그 소리에 발목을 잡힌 최금룡이 다시 돌아섰다. 물끄러미 연경을 바라보는 얼굴에 어설픈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지워졌다.
《그래, 가야 해! 치료 잘 받아. 나한테 성풀이하느라고 맥 뽑았는데 한잠 푹 자라구. 아버지를 잘 위로해드려.》
《위로? 뭘 위로한단 말이예요? 선거에선 우리가 이기겠는데…》
《룡꿈을 꾸지 말라구, 어쨌든 패했으니까.》
《오늘이 선거날이 아니예요? 개표도 안됐는데 그건 무슨 소리예요?! 난 기다리겠어요.》
《기다릴것 없소.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진다는 소리 못 들어봤소? 연경이 점적바늘 꽂아놓고 호강하기를 잘했지. 선거장마다 온통 아비규환이요. 나도 이젠 선거장에 가야 하오. 죽산선생님께 한표를 드려야지, 반대표를 말이요.》
《반대표? … 정말?》
《정말이요.》
《어째서요? 그 리유가 도대체 뭔가요?》
《리유? … 난 아직 탈가의 리유에 대한 연경의 질문에도 대답을 주지 않았지. 언젠가는 연경이가 그 대답을 듣게 될거요. 나의 대답, 우리의 대답을…》
최금룡은 원탁우에서 재깍거리는 시계를 흘끔 돌아보더니 무엇인가 더 말할듯말듯 바재이다가 방안에서 훌 나가버렸다.
연경의 눈길이 그가 밀고 나간 나들문에서 오래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쪽마루로 된 복도를 쿵쿵 울리는 사내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가? 속이 끓었다.
마침내 그 소리마저 사라지자 연경은 밀물처럼 가슴가득 차오르는 허전함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하불을 머리우로 당겨쓰고 흐느껴울기 시작하였다.
자기들사이에 놓여있는 심연은 너무 깊다. 너무 어둡다. 둘사이에 무엇인가 소통이 되지 않는 그런 불가사의한것이 가로막고있는것 같다. 그게 무엇일가? …
한참이나 설음의 눈물을 쏟았건만 속이 후련해지기는커녕 자꾸만 덧쌓이는 의문덩어리들때문에 명치끝이 그냥 무죽하다.
(선거장으로 간댔지?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
또다시 최금룡에 대한 분노로 온몸이 달아올랐다. 왜 아버지를 반대하겠다는걸가? 어째서? … 그럴수 있느냐? 도무지 종잡을수 없다. 왜 내게는 정을 주면서도 아버지로부턴 한사코 멀어지려고 할가?! 대답이란 또 뭘가? 나의 대답, 우리의 대답이란건 또 뭐고…
그가 남기고 간 알쏭달쏭한 말들을 되새겨보며 그 의미를 캐보기도 했으나 종시 찾아낼수가 없었다.
오늘이 바로 선거일이라는 사실에 연경의 머리속은 더없이 복잡해졌다.
최금룡의 말대로 전역이 아수라장으로 되여갔다. 사람들은 지금 선거가 아니라 전쟁을 치르고있었다.
아우성소리, 총소리…
리승만이 일으키고 미국이 부채질하는 백색테로에 강산이 떨고 하늘이 울부짖고있었다.
도시와 농촌, 산간벽지에까지 경찰들의 곤봉에 얻어맞은 선거자들의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고 선거자들이 흘리는 피가 도랑물처럼 흘렀다.
선거절차도 형식도 다 사라졌다. 법도 질서도 인간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승만패당의 짓거리에는 체면이나 량심이라는것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아예 리장, 동장들이 주민들의 도장을 다 모아가지고 혼자 선거장에 들어가 자기 관할지역의 주민수만큼 선거표를 받아서는 도장을 꾹꾹 눌러 투표함에 넣어버렸다.
조봉암지지률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지역에서는 100장의 조봉암지지표의 앞뒤에 리승만의 지지표를 각각 한장씩 덧놓아 묶어가지고 리승만지지표로 통계를 잡았다. 이것은 사실상 민중을 상대로 한 리승만일파의 대협잡이며 강도행위였다.
선거참관인으로는 자유당족속들뿐이였다. 민주당참관인들도 경찰의 방망이가 무서워 일찌감치 선거장에서 사라져버렸다.
자유당패거리들은 조봉암을 지지하여 투표한 주민들을 투표장에서 나오자바람으로 피투성이를 만들어놓고는 등에다가 북을 지우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북을 치며 끌고 다녔다.
참으로 세상을 경악시키는 일이였다.
하지만 권태구와 자유당이 갖은 음모와 술수를 다하였으나 선거위원회의 발표는 리승만을 아연하게 하였다.
선거자들의 절대적지지를 받는다고 호언장담하여온 리승만이 폭력의 전적인 후원속에서도 54%의 지지밖에 받지 못한것이다.
특히 리승만을 경악하게 한것은 전국의 여론을 이끌어가는 서울에서 3분의 1도 안되는 지지표를 받고 조봉암은 무려 40만표를 더 받았다는것이였다. 내외의 여론을 의식하여 서울에서만은 폭력을 너무 휘두르지 말고 개표도 공정하게 하는척 하라는 다울링의 지령을 접수하고 여유를 보였더니 그 꼴이 되고말았다.
《부통령》으로 리승만이 직접 천거한 자유당 대표이며 신익희를 대신하여 《국회》의장으로 들어앉은 리기붕도 진보당과 민주당의 공동후보인 장면에게 대패하여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그래 리승만은 개표발표를 하고나서 경무대로 한달음에 달려와 기고만장해서 드디여 각하께서 압승하였다고 너설거리는 권태구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네, 이놈! 권태구! 감히 내앞에 와서까지 압승이라 설레발을 쳐?! 네놈에겐 선거자들의 소리가 안 들려? 투표에선 보기 좋게 패하고 개표에선 억지다짐으로 겨우 이겼다는 소리…
돌아가서 보따리나 챙겨! 시골에 꺼져버려! 괜히 서울장안에서 어정거리다가 부정선거원흉으로 몰려 쇠고랑 차지 말고!》
리승만은 이미 약속했던 퇴직후의 거위알같은 자리와 모친생일잔치는 고사하고 선거부정혐의를 들씌워버릴 생각부터 로골적으로 드러냈다.
상통이 불량스러운 주먹패를 주변에서 내쫓으라고 하던 프란체스까의 푸념질이 생각났다.
새로 꾸려질 행정권에 자기를 류임시켜달라고 어거지를 부릴 심산으로 기세좋게 달려왔던 권태구는 꺼져버리라는 불호령이 떨어지자 창졸간에 해쓱하니 질려버렸다. 실컷 써먹고나선 툭 차버리군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기는 했으나 당해보기는 처음이다.
이제 깨달아야 때가 늦었다.
권태구가 이마가 주단에 닿도록 절을 하고 쫓겨갔으나 리승만은 그냥 꼭뒤까지 성이 치밀어올랐다. 그는 무릎이 시도록 불맞은 맹수처럼 주단우를 오락가락하였다.
조봉암이 서울선거자들의 반수를 넘는 지지표를 받고 이겼다는것에도 크게 놀랐지만 자기가 후계자로 내세운 리기붕이마저 장면에게 대패했다는것이 아무리 뒤집어 생각해야 믿어지지 않고 크게 불안해지는것이였다.
이번 선거에서 리기붕이 패했다면 다음번 선거에서는 무슨 수를 쓰든 자기가 조봉암에게 넘어질게 아닌가.
리승만이 자유당안에서 숱한 권력야망자들을 다 차던지고 리기붕을 밀어준데는 여러가지 리유가 있었다. 이렇든저렇든 리기붕은 해방전부터 리승만의 주변에서 꼬리쳐온 《충복》이다.
그리고 프란체스까가 속사정까지 숨기지 않는 유일한 손아래 친구인 박 마리아가 리기붕의 처다. 그 녀자가 간단치 않은 요물이다.
리승만은 박 마리아가 자기 녀편네를 사귀여놓고 그걸 턱에 걸고 서울의 집권층에서 치마바람을 일구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원래 리기붕의 처 박 마리아는 가난하기 그지없던 서울 빈민굴의 천민출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서울관청의 기생퇴물인 어미의 덕으로 몸매가 날씬하고 얼굴생김새가 귀여운데다가 명창솜씨에 총명한 두뇌까지 갖추고있어 사춘기시절부터 서울에 와있던 선교사의 눈에 들었다.
하느님과 미국에 녀자의 정절까지 송두리채 바친 이 계집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마저 버리고 선교사가 달아준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살아온다.
선교사의 후원으로 미국에 류학을 간 박 마리아는 대학시절 스물도 되기 전의 애된 나이에 25살이나 우인 리기붕을 만나 함께 살게 되였다.
리기붕이 리승만의 주위를 맴돌다가 왜정말기에 귀국하자 박 마리아도 서울에 와서 가게방을 차리고 근근히 연명을 하였다.
해방이 되여 서울에 들어온 리승만은 곁에 두고 손발처럼 부려먹을 심복을 물색하다가 리기붕과 박 마리아를 불러들였다. 그는 태종왕의 씨를 받았다는 케케묵은 족보까지 들추어가지고 추파를 던지며 이들을 곁에 두고 노복처럼 일을 시켜보았다. 자기가 태종왕의 맏이인 양녕대군의 후손이라면 리기붕은 둘째인 효녕대군의 후손이라는것이였다.
그런데 리승만에게는 리기붕보다는 박 마리아가 훨씬 쓸모가 있었다.
우선 박 마리아는 프란체스까가 서울에 들어오기 전에는 리승만의 침방을 지켜주는 고급한 정부노릇을 재기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프란체스까가 서울에 와서 모든것이 생소한 곳에서 말까지 통하지 않아 앙탈을 부릴 때 프란체스까의 안방친구로 돼주었다.
쩍하면 제네바로 돌아간다고 귀찮게 양양거리는 프란체스까를 진정시키는데 박 마리아가 해열제같은 역을 맡아주었다.
박 마리아는 프란체스까와 자매간처럼 지내면서 점차 두번째 황후노릇을 하기 시작하였다.
박 마리아는 리승만의 국방장관으로, 서울시장으로, 지금은 《국회》의장에 자유당 대표로까지 된 자기 남편보다도 훨씬 권세가 있는 세도군으로 둔갑하여 통치권을 진흙덩이처럼 마음나는대로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난다긴다하는 장관들까지 박 마리아의 생일이나 설명절이면 부부동반으로 봉물짐을 무드기 지고 와서 그 녀자앞에 무릎을 꿇어야 자리지킴을 할수 있었다. 박 마리아의 눈밖에 날 때는 권력도 재물도 다 놓치기가 십상인것이다.
리승만도 이러루한 추문을 다 듣고있었으나 프란체스까가 앙큼하게 그 녀자를 싸고돌며 이불속송사를 해대니 늘 신경통으로 골골거리고 성미도 괴퍅스러워 정치인으로서는 고사하고 인간으로서도 보잘것없는 리기붕이였지만 차던질수가 없었다.
리승만이 여러모로 쓸모가 부족한 리기붕을 권력서렬에서 뒤쪽으로 옮겨놓는것을 프란체스까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고있다. 리승만은 프란체스까의 꼬드김으로 몇해전부터는 리기붕의 아들을 양자로 삼고 정식 호적에 올려놓기까지 하였다.
이러루한 리유로 하여 리승만은 벌써 전쟁전부터 리기붕을 자기 다음자리에 앉혀놓고 이번 선거에도 후계자로 내세웠던것이다.
《음…》
리승만은 쇠진한 몸을 끌고 주단우를 무겁게 거닐며 그냥 통탄해하였다.
《모두가 나를 배신했어. 이럴수가 있느냐?! 내가 그렇게 믿고 사랑하던 백성이 이 우남을 버리자고 잡도릴 했어. 내 사람을, 내 수족같은 사람을 떼쳐버리다니…》
리승만은 이렇게 시름겹게 주절거리였다.
리승만은 지금까지 미국만 등에 업고있으면 영원하고 절대적인것이라고 믿어왔던 권력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고있는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고있었다. 그 까닭이 도무지 뇌리에 잡히지 않았다.
(이게 어찌된 일일가? 정말 그럴수 있을가?)
리승만은 선거결과가 의심쩍기도 했고 생각할수록 분이 우쩍우쩍 솟아올랐다.
아마 누가 곁에서 리승만의 이 꼴을 보았으면 아연실색해졌을것이다.
리승만은 참으로 송장악취풍기는 로망든 자기에게 백성이 등을 이미 돌렸다는것을 모르고있었을가, 아니면 모르는척 했을가. 모르고있었다면 리승만이야말로 눈뜬 장님에 귀머거리요, 모르는척한다면 리승만이야말로 천하 사기군이다.
《하여간 이놈! 네놈이 모가지를 내놓아야 한다.》
리승만은 마침내 쏘파에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기진한듯 눈덕을 내리고있다가 코를 게접스럽게 풀떡거리며 꿈나락에 빠져들었다.
며칠후 서울의 일간신문들에는 내무부 장관 권태구가 선거과로를 풀려 동래온천으로 료양을 떠나던 길에 문경고개를 넘다가 자동차충돌사고로 죽었다는 부고가 일제히 실렸다.
리승만이 미군방첩대에 부탁하여 벌리게 한 살인이였다.
리승만은 어리석게도 그놈을 매장해버림으로써 이제 벌어질 선거후유증을 차단하려고 하였던것이다. 권태구는 리승만의 발밑을 통채로 흔들고 통치권의 지각변동을 일으킬만 한 초특급의 흑막 비밀들을 너무도 많이 알고있었던것이다.
그중에서 제일 걱정스러운게 있으니 그것은 신익희의 급사와 관련한 뒤말이다.
전역이 선거혼잡통에 몸살을 앓던 판이라 쉽게 사라져버린듯 한 이 문제가 이제 정식으로 상정되리라는것은 뻔하다.
조사가 시작되면 어차피 모든 화살이 벌써부터 부정선거의 직접적인 담당자라는 지탄을 받고있는 권태구에게 집중될수밖에 없다.
권태구가 제가 알고있는 비리를 무덤속까지 끌어안고 갈수 있을가. 그건 누구도 장담할수 없다.
리승만이 늘 왼심을 써야 할 두통거리다.
권태구의 입이 벌어지면 모든 흑막이 일조에 벗겨진다. 그렇게 되면 그 흑막뒤에 옴두꺼비처럼 틀고앉아있는 미국과 자기의 검은 정체도 드러나기마련이다.
(배신자는 흔히 충신이라 자처하던 무리에서 나온다. 배신자와 충신은 독재가 부식해놓은 인간사회의 두 극단이다. 하지만 그 사이란 종이 한장 차이이다. 권태구같이 저돌적인 인간은 수틀리면 쉽게 그 종이장간격을 오락가락할 페물이다.)
리승만은 이렇게 생각하고있었다.
그러니 권태구의 죽음은 이미 선거전에 리승만에 의하여 선고가 내려진 일이였다.
달리는 될수 없는 노복의 운명이였다.
이날 신문에는 도경찰국장들의 이동도 발표되였다.
선거패배를 막아내지 못한 서울시경찰국장은 강원도산골로 쫓겨갔다. 이번 선거에서 부정협잡을 가장 심하게 조직한 강원도경찰국장이 한등급 더 높은 차관급인 서울시경찰국장으로 승진하였다.
경찰력량을 총동원하여 선거장을 관리한 전라남도경찰국장이 치안본부장으로 발탁되여 경찰총수가 되였다.
이것으로 리승만이 제놈의 죄악을 가리울수 있었던가.
리승만은 력사에 대하여 너무도 아둔한 독재자였다.
그는 제아무리 총칼의 힘을 빌어 흑막속에 묻어버린 일이라 해도 인간의 정의에 어긋날 때는 어느때든지 력사가 자기의 예리한 안목으로 재심판을 하게 된다는 인간세계의 계률을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탓으로 모르고있었다. 막강한 권력과 오묘한 통치력을 가진 지배자라고 해도 력사는 절대로 기만할수 없다. 력사를 위조할수 있다고 덤비는 인간이야말로 어리석은 폭군이다.
이때로부터 4년후 1960년 3월 15일에 강행된 또 한차례의 부정선거에서 권태구와 같은 악역을 맡았던 최인규는 리승만과 미국놈들이 사촉한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교수대에 오르기 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956년 5. 15선거에서 조봉암후보가 리승만을 적어도 200만표 앞섰다는것은 만인이 다 아는 주지의 사실이였다.
군에서도 70%가 조봉암을 지지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90%가 리승만을 지지한것으로 개표가 나왔다. 그런즉 조봉암후보가 투표에서 승리하고 개표에서 패배했다고 선언한것은 력사의 진실임이 분명하다.
나도 그때 충청도에서 개표정황을 감독했는데 등골이 오싹하였다. 이표저표 할것없이 모두 죽산표였던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그 당시 내무부 장관이였다면 조봉암후보가 당선했다고 그의 당선을 발표할수 있었겠는가? 천만이다.
독재의 칼날밑에서 제 목소리 낼수 있는 용기를 가진이가 서울정가에 조봉암말고 과연 누가 또 있었느냐… 이번 선거도 마찬가지다. 그러한즉 내 자리에 그 누가 올랐던지 교수대를 피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교통부 장관하던 나에게 갑자기 정제관이 차지하고있던 내무부 장관 임명장을 주면서 리승만이 <정제관은 손탁이 물러 안되겠어. 자네만 믿네.> 하고 어깨를 두드려줄 때 나는 벌써 생각했다. 이제는 이 최인규도 숨이 꺼질 때가 되였구나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