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3

 

저녁상을 물리고난 연경은 거두매는 언니에게 다 맡기고 재빨리 거울앞에 가서 화장을 연하게 다시 하였다.

그리고 옷장안에서 하늘빛치마저고리와 연한 보라빛봄외투를 꺼내입고 목에는 연분홍진달래꽃을 수놓은 노란 꽃수건을 둘렀다.

연경이 중대문을 여는데 대문을 지키고있던 부회장청년이 처녀의 멋진 모습에 눈이 커지기부터 하였다.

《왜요?》

부회장청년이 놀라는것이 이상스러워 연경이의 시원스러운 두눈이 올롱해졌다.

《저… 그렇게 차려입으니 너무너무 멋있네요.》

청년이 놀라워할만 하였다. 봄계절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한 처녀는 어둠속에 떠오른 보름달처럼 눈부시도록 황홀하였다.

인물 곱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는 연경이지만 어느 옷을 입든지 다 몸에 어울리고 청신한 멋이 풍긴다.

몸매가 미끈하고 웃몸이 풍만해서 거기에 수수한 양복이나 치마저고리를 걸치고 나서도 비싸고 희귀한 옷가지를 휘감고 멋부리기경쟁을 하는 서울마님들조차 눈길을 세운다.

그런데 분주히 뛰여다니느라고 그닥 류행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옷차림에 주의를 덜 돌리군 하는 연경이라 이따금 옆사람들의 지청구를 듣는다.

조봉암이마저 계절을 헛갈린 옷차림을 하고 나서는 연경에게 핀잔을 주군 한다.

《얘, 곱게 차리고 다니는건 녀성의 미덕이고 례절이다. 헌데 네 옷주제가 그게 뭐냐?》

그러면 연경이는 코살을 한번 찡긋해보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내 옷주제가 어째서요? 깨끗하구 단정하면 그만이지. 속빈건 아랑곳않구 쓸데없이 겉멋에만 신경쓰는건 부르죠아취미라구요. 이건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예요? 난 그 말씀이 그른데 없다고 봐요.

난 류행병에 걸려 하루에도 두세번씩 옷 갈아입구 남자들에게 꼬리치는걸 보면 한대 줴박구싶더라. 그럴 시간이 있으면 책 한권이라도 더 읽겠다.》

그러면 조봉암은 머리를 흔들면서 롱절반 진담절반으로 응수하군 한다.

《어이구, 이젠 내까지 막 걸구드는구나.

얘, 류행을 앞지르는건 무익한 정력의 소모이지만 류행과 담쌓고 사는것두 좋은게 못된다.

그런데 네 말중에서 책을 한권이라도 더 읽겠다는 말은 참 듣기 좋구나. 그래, 책을 떠나선 아무 일도 할수 없구말구. 책이 많은 나라, 책을 많이 읽는 민족이 세상을 앞질러가기마련이야. 거창한 혁명도 사실은 책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사상도 인격도 의지도 수양도 책에서 시작되구 다듬어진다고 말할수 있지.》

언제나 그러하듯 조봉암은 우줄우줄 커가는 딸의 마음의 키를 북돋아주고 인격을 완성시켜주는데 필요한 이러루한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말끝에 조봉암은 오똑 솟은 딸의 코마루를 튕겨주며 껄껄거렸다.

《하여간 우리 연경이 현대풍의 멋쟁이총각 붙잡기는 글렀다.》

연경이는 응석을 부리듯 눈을 곱게 빨며 자신있게 대답하군 했다.

《두고보세요. 아버지 눈이 휘딱해질 멋쟁이가 들어오는걸.》

결국 그런 멋스러운 남자가 제발로 찾아들었다.

그런데 최금룡도 연경이가 언제나 류행에 뒤떨어진 옷차림으로 지내는걸 보고는 질색이였다. 명망높은 조봉암의 딸이며 서기인 연경이 옷차림을 소홀히 하면 아버지를 망신시킨다는것이다. 그러면서 작년 이맘때는 억지로 백화점에 끌고 가서 바로 지금 몸에 걸친 치마저고리에 봄외투며 꽃수건을 사서 안겨주었다.

최금룡은 봄가을에 집회장으로 갈 때나 산보할 때면 꼭 그 옷을 입어야 더없이 즐거워하며 함께 길에 나서군 하였다.

연경이는 별생각이 없이 그 옷들을 입고 나섰는데 부회장청년의 소리에 얼굴이 새빨개서 홱 돌아섰다.

(누구한테 잘 보일려구, 흥!)

그는 침실에 들어서자 그 옷들을 재빨리 벗어 되는대로 침대우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입고 다니던 철지난 겨울옷을 벽걸이에서 벗겨입고 꽃수건대신 색갈이 좀 바랜 곤색뜨개수건을 목에 감았다.

대문가에서 어슬렁거리던 청년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연경이가 의아스러워 머리를 젓다가 슬금슬금 따라섰다.

《들어가요. 나 혼자 갔다와요.》

연경이가 그를 떼여놓느라고 일부러 쌀쌀하게 말했다.

조봉암은 물론 식구들까지 대문을 나설 때에는 반드시 청년들이 동행하게 되여있었다. 신창균이 이에 대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처음에는 경호원도 한명씩 따라다니는것으로 되였는데 여러모로 불편해서 청년들만 따라다닌다.

그게 진보당선거위원회가 세워놓은 경호체계의 한 조항이기는 하지만 연경이는 그것이 귀찮아서 매번 이렇게 토달거려도 본다.

그럴 때면 신창균은 가족들을 따로 모아놓고 반대파들의 책동에 걸려들면 하여튼 필요없는 일에 힘을 소모하게 된다고 하면서 가족들은 일체 낮이나 밤이나 개별적으로 대문밖으로 나가지 말며 나갈 때는 무조건 동행자가 있어야 한다고 엄하게 타이르군 하였다.

부회장청년은 연경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접수실에 대고 소리쳤다.

《어, 김명진! 이리 나와.》

그러자 고수머리인 청년이 접수실에서 뛰여나왔다.

《중대문을 지켜. 순찰을 할 때는 반드시 바깥대문을 안으로 잠그는걸 잊지 말아.》

《알고있소.》

《헛눈 팔지 말아. 멍청해있다가는 괜히 이마에 혹 붙인다.》

《헝… 패장은 어델 가?》

자원봉사대청년들은 자기들의 부회장을 보고 《패장》이라는 은어로 부르군 한다.

《누님이 날더러 달맞이 함께 하재. … 깡뚱이가 돼달라나.》

《깡뚱이》란 근래에 서울의 청년들속에서 련애하는 남자친구를 비하하여 부르는 류행어이다.

《피, 자식… 어서 가봐.》

청년들이 대문가 열댓발자국옆에 설치한 초소막에서 서성거리는 경호원들을 의식하여 일부러 익살스럽게 주고받는 롱이다. 그 소리에 경호원들도 벌쭉거리고 연경이도 픽 웃고말았다.

처녀총각은 큰 도로에 나서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말 다정한 련인들처럼 걸어갔다.

그러나 사실 연경이는 이제 만나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며 야릇한 긴장을 느끼면서 걸음을 다그쳤고 부회장청년은 오가는 바람새도 놓칠세라 주변의 동정을 바늘끝처럼 신경이 예리해서 살피였다.

효녀다방은 연경이집에서 빠른 걸음으로 20분정도 걸어가면 되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연경이가 다방으로 들어가자 청년은 다방안과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고 마당에 서있는 정자나무밑으로 갔다. 나무로 만들어놓은 긴걸상에 앉아 주변을 살피였다.

다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두세명의 손님들이 저마끔 원탁 하나씩 차지하고 강냉이군빵에 차 한잔씩 놓고 앉아있었다.

차라 해야 보리나 강냉이를 닦아 더운물에 우려낸것이였다.

근래에 서울에 흔해빠진것이 다방인데다가 거기서 내는 차나 음식이 저질이여서 손님들이 많을리 만무하다.

《차 한잔! 빨리빨리요.》

령남에서 올라온듯싶은 20대의 접대부처녀가 파리채로 파리를 잡고있다가 연경이가 들어서자 주문도 하기 전에 령남의 투박한 사투리로 차부터 내라고 주방에 대고 소리지른다. 일단 문턱을 넘어섰으니 싫든좋든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요령있는 봉사이다.

연경은 탁에 앉는수밖에 없었다.

《빵도 있어요. 맛있게 구웠답니다. 따끈따끈하고 파삭파삭해요. 아가씨, 가져올가요?》

연경은 차 한잔을 앞에 가져다놓고 서울의 나긋나긋한 말씨를 흉내내며 연지곤지를 멋없이 찍어바른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접대부에게 손을 내저어보였다.

손님들중에는 그가 찾는 녀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접대부가 가져다놓은 보리차를 입에 댔다뗐다하면서 편지를 보내온 강치부와 그의 처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강치부는 아버지가 해방전에 사귄 사람이다. 그들이 처음 알게 된것은 조봉암이 1930년대초에 공산당의 지도인물이라는 리유로 상해의 프랑스조계지에 있는 공원에서 왜놈들에게 체포되여 신의주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고있을 때였다.

어느날 조봉암은 죄수복을 입고 감옥안의 공장에서 걸레를 만들고있었다.

간수들이 금방 감옥에 들어온 죄수가 제놈들에게 곱지 않게 말대답질을 했다며 개패듯 때리기 시작하였다. 가만 놔두었다가는 숨이 아예 끊어질 판이였다.

이를 목격한 조봉암이 그리로 가서 간수들과 대거리를 하였다.

《왜 때리는거요? 감옥에서도 당신들을 위해 일해주고있는데 왜 형을 지고있는 사람을 함부로 치고 차고 행패질이요?!》

그때 조봉암은 신의주감옥에서 제일 거물급에 속하는 수인으로 인정받고있었다. 게다가 언행에 기품이 있고 준절한데다가 의협심이 두터워 수인들은 물론 감옥의 전옥까지도 은근히 두려워하고 존경하고있었다. 감옥에서는 그에게 수인들의 책임자라는 벼슬까지 주고 수인들과 풀기 어려운 문제가 나서면 그를 중개자로 내세우군 하였다.

새로 감옥살이를 시작한 수인에게 질을 들인다고 매타작을 안기던 간수들이 조봉암이 나서자 비실비실 피해갔다.

조봉암은 간수들이 물러가자 피투성이된 수인을 눕혀놓고 피자국을 닦아주었다.

그가 바로 강치부였다. 마을지주가 왜놈들을 등에 업고 악착스럽게 작인들의 피땀을 짜내고 매일처럼 함부로 행패질하는게 참을수 없어 낫을 들고 달려들었다고 한다. 이 《죄》때문에 살인미수범으로 몰려 종신징역형을 받고 신의주감옥으로 끌려왔다는것이였다.

조봉암은 강치부를 자기의 감방으로 옮기도록 하고 친동기처럼 성의껏 돌봐주었다.

나중에는 10년 징역으로 감형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조봉암은 해방이 되자 인천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강치부는 해방직후에는 인천에서 고기배를 한척 세내가지고 고기잡이로 근근히 살아갔다. 그러다 그의 고기잡이솜씨에 눈독을 들인 미군소속 첩보대의 경리과에서 일을 하면서부터 강치부의 처지는 달라졌다. 점차 첩보대의 경리자금을 마련한다는 조건으로 당시 극히 작은 규모에서 벌어지던 밀무역을 시작했는데 벌이가 괜찮았다.

그때부터 강치부는 조봉암의 집에 자주 들락날락하였다.

연경이는 북의 특산물을 무둑히 안고 문턱을 넘어서군 하는 강치부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소녀적부터 무랍없이 따랐다.

연경이가 세상물정에 눈이 트기 시작하면서 강치부에게 어째서 하필이면 간첩들을 대상한다는 미국사람들의 첩보부에서 일하느냐고 천진스럽게 물은적이 있었다.

그 소리에 강치부는 눈을 부릅뜨고 펄펄 뛰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소녀를 앉혀놓고 루루이 설명하였다.

《얘, 연경아! 철없는 소리라 해도 아저씨는 그 소리 정말 듣기 싫구나. 난 사상이요, 주의요 하는게 싫다. 알고도싶지 않다. 그래서 난 늬 아버지가 좋은 일 하고 훌륭한 뜻을 갖고 사는 분이여서 늬 아버지 죽으라면 죽을 사람이기는 해도 늬 아버지 하는 일에는 나서지 않는거다.

거저 제 오륙을 움직여 꽝꽝 일하고 일하는만큼 먹고 마음편하게 사는걸 바랄뿐이야.

난 고기도 잡고 북에도 이따금 다니면서 돈을 번다. 어찌겠니?! 먹고살자니 미국놈들의 꼴 보기 싫어도 그놈들 끼고 사지판에도 뛰여드는거다. 돈버는게 쉬운 일이냐? 내게 큰 밑천이 있니, 재간이 있니, 배운게 있니… 날 그렇게 알아다오.》

전쟁직후까지 남과 북의 일부 사람들사이에는 해상이나 륙로를 통하여 밀무역이 작은 규모에서 벌어지고있었다.

살아가기 힘든 남조선의 보따리장사군들이 생계를 잇기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륙상이나 바다의 통행금지구역을 넘나들었다.

남조선당국도 이 공간을 저들의 첩보공작에 리용하느라고 눈을 감고있는척 하였다.

강치부도 인천첩보대의 비호를 받으며 틈틈이 여기에 끼여들어 돈버는 재미를 보고있었던것이다.

강치부는 명절이나 휴식일이면 드문히 조봉암을 찾아온다. 올적마다 어려운 살림에 보태쓰라며 쌀과 고기도 가져오고 돈봉투도 들고 왔다. 간혹 형님이 건강해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이 온다며 귀한 개성인삼까지 구해 정하게 들고 오기도 하였다.

강치부가 오면 조봉암은 자기가 담근 국화술을 대접하면서 남북관계에 손상을 주는 일에는 절대로 삐쳐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틈나는껏 북의 실태에 대하여 캐묻군 하였다.

그때마다 연경은 아버지와 강치부가 환희에 넘치고 희망과 동경으로 행복해하는것을 보군 하였다.

지주가 없는 세상, 자본가가 없는 세상, 무료로 치료받고 무료로 공부하는 세상, 남녀가 평등하고 삐여지게 잘살고 못사는 사람 따로없이 골고루 먹고사는 세상…

들을수록 연경에게도 북은 별천지였고 신비한 꿈의 세계였다.

강치부가 말을 끝낼 때면 조봉암은 연경이더러 밖에 나가 말을 옮기는걸 주의하라고 신칙하면서도 감개무량해하였다.

《우리 반도의 땅에 겨레의 얼이 창창하고 민중이 주인된 세상이 있다는건 행운이요! 그 땅이 없다면 우리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캄캄하고 우리의 인생살이가 얼마나 허무하겠소?! 행운이야! 복이야!

아무리 우리 사는 세상이 암흑천지이고 세상 살아가는 꼴이 비참하더라도 리상을 주고 래일을 비쳐주는 내 조국땅의 한 부분이 있으니 얼마나 마음 든든한가. 우리도 그런 세상을 기어이 만들어야 돼. 어서빨리! 한시바삐!》

연경이는 어린시절에는 그 말의 참뜻을 몰랐다.

그저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는것으로 하여 그 기쁨을 가져오는 강치부가 제일 기다려지는 아저씨였다.

지금에 와서 연경이는 아버지가 환희에 넘쳐하던 그 말의 참의미가 리해된다. 아버지는 오로지 그 뜻으로 살고있으며 그 뜻을 지켜 싸우고있는것이다.

그 뜻은 이제는 연경의 뜻으로, 삶의 표대로 되였다. 아버지를 따라 자기도 그 뜻에 살고 그 뜻을 위해 평생을 바쳐야 한다.

그러니 지금 어른이 되여서도 연경이에게는 강치부가 소중한 아저씨였다.

《연경!》

문득 뒤에서 귀익은 녀인의 부름이 들렸다.

연경이는 생각에서 깨여나 고개를 돌렸다.

살갗이 맑고 복스럽게 생긴 녀인이 그를 바라보며 상긋이 웃고있다.

《아이, 인천아줌마!》

연경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달려갔다.

《이것 봐, 우리 연경이는 볼 때마다 너무너무 이뻐지는구나! 내가 다 시샘이 나.》

녀인은 얼굴에 넘치도록 웃음을 담았다.

《언제 오셨나요?》

《이자, 방금…》

《차 한잔 더 줘요.》

연경은 녀인을 자기가 앉았던 탁으로 이끌었다.

인차 차 한잔을 다반에 받쳐든 접대부가 총총히 다가왔다.

연경이가 그가 가져온 보리차를 보고 이마살을 찌프렸다.

《뭘 더 좋은건 없나요?》

연경이는 불만스러워 물었다.

사실 서울의 다방들에는 전쟁전까지만 하여도 남조선의 이름난 차들이 다 들어오고있었다.

예로부터 유명가수들을 배출한 고장의 차라고 해서 삼보향으로 불리우는 보성록차가 제일 인기가 있었고 남자들에게 특별히 좋다고 하는 청양구기자차며 하동록차, 안동국화차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런데 전쟁이 터진 후로는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쓸어들면서 남도의 차밭도 다 경영손실로 황페화되였다. 그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대중다방들에서는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고작해야 보리차와 강냉이차가 대부분이다.

《글쎄, 강냉이군빵도 있지요. 그리고…》

《아유, 됐어… 사실은 서양커피보다 이게 좋은거지.》

녀인은 연경이 미안해하자 보리차잔을 입에 가져가며 즐겁게 웃었다.

《아줌마탓이예요. 하필이면 이런 다방으로 부를건 뭐람?! 그래도 뭐 효녀다방이야?》

연경이는 모처럼 찾아온 녀인에게 대접이 미안쩍어 그냥 토달거리였다.

《호호… 이런게 서민다방이 아냐?! 내가 커피점 마담인데 뭐 차대접받으러 왔겠어? 마음쓰지 말아요. 그래,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지? 바깥에 있는 총각은 연경의 친구 최금룡인가?》

녀인이 연경의 푸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화제를 돌렸다.

《아, 아니예요.》

연경이가 녀인의 묻는 소리에 귀밑이 발깃해지며 인차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모교 후배인데 자원봉사대로 와있어요. 아버지를 지켜준다나요. 아저씨생각을 했지요. 설날에 오셨다가 이제껏 소식이 없었거든요. 건강하세요?》

《그럼, 그 사람이야 참나무몽치처럼 단단한 사람이니깐.》

《지금도 북에 다녀오시군 하나요?》

《그게 언제적 일이라구. 벌써 이태전에 미군사령부가 일체 대북접촉을 차단하라고 포고를 떨구었는데. 지금은 고기잡이를 다녀. 하여간 돈을 벌어서 들여놓아야 하니깐…》

《아유, 아저씨도 고달프시겠어요. 이젠 년세도 있는데 몸을 돌보시라구 하세요.》

《어쩌겠나. 돈버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몸아껴서 되는 일 어데 있다구. 그래 아버지는 건강하셔? …우리 집 그 량반은 늘 연경이네 아버님걱정뿐이야.》

《괜찮아요. 어려움이 크지만 그럭저럭 밀고나가지요.》

《그래그래. 우리 집사람은 조봉암선생님이 정사를 펴는 세상에서 활개를 펴고 살아보는게 원이라고 입버릇처럼 외우군 하지.》

《고마워요. 그날이 오겠지요. 가까워오구있어요. 모두가 도와주고 힘을 주고있지 않나요. 아저씨도 아줌마도 아버님께 얼마나 큰 도움을 주고계세요.》

이렇게 말하는 연경의 마음은 강치부내외에 대한 고마움으로 후더워났다.

이들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하여서도 이번 선거를 잘 치러야 한다. 그래서 진보당을 든든하게 하고 천하무적의 힘을 키워 다음선거에서는 기어이 리승만을 몰아내고 민중세상도 만들고 통일도 하여야 한다.

연경의 례절바른 인사말에 녀인도 흔연히 대꾸하였다.

《연경이, 그런 말 말어. 아버님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어.

자, 이걸 받아줘. 지금이야말로 크게 도와야 할텐데 근래에는 고기잡이가 씨원치 않아 이것밖에 보내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하더라니까.

30만환이야. 돈쓸 일이 얼마나 많을가.》

녀인은 이렇게 속상해하며 등뒤에 놓고있던 천가방을 원탁우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많이… 고마워요.》

연경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넘겨받으며 목이 메여했다.

사실 선거위원회사업에서 제일 부족한게 돈이였다. 선전물 하나 제작하자 해도 돈이 필요하였다. 신문에 손바닥만 한 선전광고를 내자고 하여도 묵돈을 내야 한다. 선거날자가 다가오자 신문쟁이들은 광고료를 턱자없이 높여 돈을 옭아내고있다.

자금난때문에 진보당 중앙의 선거운동원들은 선거선전을 위해 지방에 나갈 때도 밥곽을 몇개씩 싸가지고 다녔다. 기차비는 물론이요, 행사장에서 쓰는 마이크사용료며 무대가설비도 다 자체로 부담해야 한다.

조봉암의 집에 와있는 자원봉사대도 쌀과 부식물을 다 집에서 날라오고있다.

대학기숙사에 와있는 학생들은 학생련합회에서 돈을 모아 보내주고있는 판이다.

그런데도 리승만은 자기는 2억도 부족하여 대기업들을 우려내고 외국의 차관까지 당겨쓰고있으면서도 다른 후보들에게는 100만환의 국가보조금이상은 쓰지 못한다고 을러메고있다.

물론 지금도 조봉암에게 자금을 슬그머니 찔러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개중에는 조봉암과 친교관계로 해서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조봉암의 승리를 진심으로 바라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혹 조봉암이 당선된 후에 챙겨안을 리권을 타산하여 약삭바르게 선심투자를 해오는 사람도 있다.

기업가들도 있고 신문사 사장들도 있고 자유당에서 중진으로 있는 사람들도 있다.

혹은 군부와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도 조봉암의 운전수 겸 비서인 김봉무에게 죽산선생의 승리를 바란다면서 돈봉투를 넘겨준다.

그러나 자금지원이 그전보다 썩 못해졌다.

평소에 조봉암의 활동을 자금으로 지원해주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최근에 들어와 리승만일파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조봉암의 주변을 감시하고있는것을 눈치채고 선거후에 벌어질 무지막지한 란리판을 예상하며 아예 돌아앉아버렸기때문이였다.

조봉암도 연경이도 늘 자금에 쪼들리는 선거운동원들과 지지자들에게 빚진 심정이였다.

《죽산선생님께 전하라고 하더구만. 백만환규모에서 융자를 받을수 있으면 먼저 당겨서 쓰라구. 선거가 끝나면 올해말까지 선생님이 쓰신만큼 변통해올리겠다고 해요.》

《아줌마,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이거면 이제 며칠은 견딜수 있어요. 아줌마네도 아직 집같은 집을 장만하지 못하구 살면서도 빈번히 이렇게 도와주시니 정말 죄송스러워요.》

연경이는 강치부내외의 마음이 고마워서 진심으로 다시 허리를 숙이며 사례하였다.

해방전에 처를 잃은 강치부가 이 녀인을 만나 새살림을 편것이 여러해가 되여온다.

줄창 떠돌이살이를 하는 강치부는 녀인과 금슬이 좋아 의좋게 지낸다고 한다.

강치부는 자기가 쓰고살던 집을 하나 남은 전처자식에게 넘겨주고 인천부두가에 있는 크지 않은 단칸방에서 처와 함께 살고있었다.

강치부가 원래 텁텁하게 살아온 사람이고 처도 그닥 집을 꾸리고 사는데 흥미가 없어 세해가 되였는데도 집세간도 변변히 갖추지 않고 살고있다.

그래도 강치부는 종신감옥귀신이 될번 했던 자기를 감형시켜 구원해준 조봉암을 평생의 은인으로 따르면서 돈이 생기는족족 조봉암에게 아낌없이 보내온다.

녀인도 남편의 평생의 은혜갚음을 리해하고 군소리 한마디 없이 남편의 뜻을 따른다.

《이젠 그만 헤여져야 할가봐. 돌아가요. 까마귀들의 눈을 조심해요.》

녀인을 바래주고난 연경은 가방을 들고 부회장청년을 찾았다.

그때까지 정자나무밑에 앉아있던 청년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이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우리 아저씨에게 전해주세요.》

자금관리는 김봉무가 하고있었다.

《이게 뭡니까? 꽤나 무겁군요.》

《자금이예요. 뜻있는분이 자금지원을 해주었어요.》

《그래요? … 참 고마운분이군요. 그런데 누님은? … 버티고개에 혼자 가실려구요?》

《내 걱정은 말아요.》

《안됩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일없어요. 저기 가서 뻐스를 타면 그쪽으로 곧바로 가요.》

버티고개는 신당동과 린접한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신당동집에 들렸다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한참 걸어가야만 했다.

옛날에는 수림이 울창하고 길이 좁고 무인지경이 되여 강도무리가 끓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쪽으로 큰 도로가 지나가고 집들도 들어서고 고개기슭까지는 전차도 다녀서 다니기가 편리해졌다.

집에 들렸다가 다시 전차를 타고 가면 8시까지 그곳에 도착할수가 없다.

그래 연경이는 자기는 여기서 전차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버티고개로 가고 부회장청년에게 돈을 들려 집으로 보내려고 했던것이다. 더구나 연경이는 여러달만에 최금룡을 만나게 된지라 홀로 가고싶었다.

부회장청년은 여전히 용수가 없다. 자기 임무에 성실한 청년이였다.

《함께 갑시다. 신부장선생님이 아시면 이 패장이 쫓겨납니다.》

《내가 잘 말씀올리겠어요. 그걸 들고 어데를 다니겠어요.》

《그게 문제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이런 문제를 놓고 양보할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우리 함께 집에 갔다가 거기서 택시를 잡아타고 갑시다.》

《8시까지 가야 해요.》

《서두르면 됩니다. 그렇게 합시다. 그곳이 서울에서도 잡놈들이 제일 성하는 곳이라 하는데 거길 야밤에 누님이 어떻게 혼자 간다고 해요. 절대로 그럴수는 없어요.》

아무리 사정을 해봐야 청년은 한치의 에누리도 없을것 같았다.

하기는 그렇게 교양을 받고 조직적인 수양을 쌓고있는 청년들이니 이런 문제에서는 절대로 타협이 없을것이다.

연경은 가늘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청년의 말대로 하는것이 옳은 처신이였다. 조직의 지시에 충실하려는 그 의지와 기개가 미더웠다. 그리고 그걸 달게 받아주어야 될것 같다.

그들은 밤길을 재촉하며 집으로 향하였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접수실에 있는 청년에게 맡겨두고는 이내 돌아섰다.

큰 도로의 정류소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버티고개에 도착하니 여덟시가 지났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분침이 30분을 넘어서고있었다.

연경은 최금룡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들은 고개마루에서 기다리다가 앞뒤로 헤여져가지고 고개의 앞과 뒤를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동쪽에서 늦보름달이 떠오르자 사위가 누릿한 달빛속에 잠겨들었다.

연경은 저 멀리로 바라보이는 서울시가지를 굽어보면서 시간을 보내느라고 일부러 이 버티고개에 깃든 옛말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 버티고개를 다른 이름으로는 벌아령이라고도 한다.

옛날 조상들이 이 서울땅을 만들어낼 때 서울의 진산으로 꼽히는 삼각산의 인수봉이 신통히도 어린애가 집에서 뛰쳐나가는 모양이여서 불길해하였다고 한다.

그래 론의끝에 어린애의 탈가를 막기 위하여 인수봉의 반대되는 서쪽에 떡고개를 두어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애를 꾀여 머무르게 하며 한편으로는 남쪽 이곳에 벌아령을 두어 아이가 기어이 뛰쳐나가면 때리겠다고 을러메서 그 아이가 못 나가도록 막자고 했다는것이다.

(참, 조상님들이 걱정도 많으셨지.)

연경이는 터무니없는 옛말을 떠올려놓고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9시가 가까워온다.

밤시간이라 길손들은 뜨음해졌다.

그러나 최금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연경은 불이 붙는 가슴을 달래이며 (혹시… 좀더…)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흥!》

마침내 연경은 발끈해졌다.

한시간도 기다려주지 않고 떠나간 사내가 얄미워졌다.

지난 시기 연경은 우정 약속한 시간을 늦잡아 만나자는 장소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금룡은 언제나 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주었고 변함없이 사내다운 아량과 사랑으로 맞아주었다.

《정말 미안해요. 바삐 온다는게 어디 전차가 와주어야지요. 시내통행이 체증이예요. 다음번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미리감치 달음박질해오죠.》

연경이 일부러 늦게 오고도 이렇게 맵시있게 변명할 때면 최금룡은 씨물씨물 웃으며 손가락으로 처녀의 상큼한 코마루를 사랑스럽게 퉁겨주군 하였다.

《요 장난꾸러기! 일부러 늦장을 부리며 시간을 보냈겠지.》

《아니, 내가 어디 그런 요술 아나 뭐?!》

《실컷 그래 봐! 그통에 영어회화 스무개는 착실히 복습했으니 별로 손해는 안 본셈이니까.》

《어마나! 이 연경의 얼굴 그려보라구 시간을 뚝 떼주었더니 내 생각은 전혀 않구 뭐라구요? 영어회화요?》

《그랬단 말이지? … 좋아, 그럼 내가 외운 영어회화가 어떤건지 한번 들어보라구.》

최금룡이 만담이나 하듯 혼자서 처녀총각이 나누는 련애담을 이쪽저쪽 흉내를 다 내며 주어섬기는 회화를 들으며 연경은 까르르 웃음발을 날렸다.

《에, 엉터리!》

둘은 오가는 행인들이 지켜보는 속에서도 이렇게 웃고 떠들군 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고작해야 30분을 넘겼는데 기다려주지 않고 달아빼고만것이다. 그것도 와우산에서 밸을 쓰고 헤여진지 여러달만에 한달음에 뛰여온 길인데…

연경이는 제김에 버쩍 결이 올라 최금룡에게 귀먼 욕을 퍼부었다.

《어쩌면 이럴수 있어요? 제일 어려운 시기에 아버지곁에서 달아빼더니 정말 한시간도 기다려주지 않는 매정한 인간이 돼버렸군요?! 이렇게 훌쩍 가버릴걸 찾긴 왜 찾구요?

연경이! 넌 정말 멍청이야. 그래 넌 아직도 그 사내 기다린다는거야?! 그 사내에게 아직도 정을 남겨두었다는거야?! 멍청이! 멍청이!》

연경이는 이렇게 입속으로 뇌이며 제김에 약이 올라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렸다.

깨여진 사랑, 이미 가버린 사랑이다.

확실히 최금룡에게서 내라는 녀자는 사라져버렸다.

헛된 미련은 버려!

연경이는 아직도 사그라져가는 재무지에서 애써 주어모은 아물거리던 사랑의 불티마저 창졸간에 스러지고 가슴에는 싸늘한 추억만이 남아버린것을 느끼였다.

자기도 걷잡을길 없이 섧디섧은 눈물이 괴로움의 엷은 막을 찢고 그냥 샘처럼 솟았다.

(그래, 그는 영원히 가버렸어. 사랑은 식어버렸다. 사라졌다.)

그 누구인가 귀전에 대고 이렇게 얄밉게 쏙닥질하는것만 같다.

길건너편에서 연경이를 살피고있던 청년이 그의 거동에서 상서롭지 않은 느낌을 받고 길을 건너 스적스적 걸어왔다.

《어떻게 된 일일가요?》

조심스럽게 건늬는 청년의 물음에 연경이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눈굽을 찍어냈다.

《글쎄요.》

《그러문요?》

《돌아가자요. 우리가 약속시간을 어겼으니깐요.》

《좀 더 기다려봅시다. 저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기다리는것도 미덕이라는 말이 있던데요.》

청년은 이렇게 떠나는것이 안심이 되지 않아 바재이였다.

《아니, 가자요.》

《왜 찾았을가요?》

《글쎄… 가자요.》

《뭘 예상되는게 없습니까? 무슨 일이 생겨서 늦게 올수도 있지 않습니까?》

청년은 그래도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연경의 아픈 속을 위로해주고싶어 왼심을 썼다.

《그 사람은 절대로 약속한 시간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예요. 가자요.》

연경이는 전차정류소를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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