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3

 

조봉암에 대한 버드와 정제관의 타격전이 인차 시작되였다.

처음에는 그쪽에서 날리는 직격탄이 진보당으로 날아들었다.

그 직격탄은 처음부터 너무도 야만적이고도 잔인하고 무자비한것이여서 진보당을 떠받든 잔뿌리들을 뭉청뭉청 잘라냈다.

경찰들은 매일같이 서울을 제외한 남조선전역에서 진보당 당원들에게 각종 터무니없는 죄명을 씌워 철창으로 끌어갔다.

동지날 하루만 하여도 3만여명의 당원들이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고 매를 맞았다. 폭력배들은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무시로 협박하고 랍치하고 살해까지 하였다.

진보당 당원이라면 가게방에조차 세금을 더 부과하게 하였다. 항의하면 문을 닫도록 음으로양으로 압력을 가하고 버티면 깡패들을 내몰아 들부셔놓았다.

병원도 진보당 당원들이 운영한다면 운영하지 못하도록 자금난, 설비난에 부대끼도록 공공연하게 책동하였다. 전기와 물공급까지 중단하여 끝내는 문을 닫게 하였다.

진보당 당원들의 아이들까지 학교에서 조무래기동료들의 무리매를 맞고 쫓겨나거나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겠노라고 울며불며 돌아갔다.

농민들은 땅을 떼우고 로동자들은 일터에서 까닭없이 쫓겨났다.

진보당원이라는 말이 그대로 범인이라는 말로 통하기 시작하였다.

당활동에 참여하자면 가족전체의 희생을 각오해야 하였다.

신문에는 매일같이 진보당의 강령과 당활동을 외곡하여 시비중상하는 글이 실리고 당원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탈당한다는 광고가 대문짝같이 크게 실리군 하였다.

어느 지구당이 자체해산을 선포했다거니, 어느 지구의 진보당위원장이 행방불명이 됐다거니 하는 보도도 련이어 실렸는데 물론 내무부에서 조작하여 날리는 거짓부리였다.

방송들에서도 하루에 두세시간은 진보당의 이른바 부정과 모순과 내분에 대하여 각본을 만들어가지고 야유조소하여 독자들의 분노를 격발시켰고 진보당이 깨지는것은 시간문제라고 부산을 피웠다.

점차 진보당에 대한 타격전은 진보당의 기본뿌리와 줄기에로 이행되였다.

공보실은 10년전에 미군정이 남조선공산당을 말살하기 위하여 내놓았던 《정당에 관한 규칙》이라는 문서장을 곰팡이 오른 궤짝에서 꺼내가지고 진보당의 활동보고, 사업전망보고, 재정관계보고, 간부명단보고, 당원확대관계보고, 일체 회합에 대한 보고를 매일 할것을 강요하였다. 이를 위반하면 정당해체를 선포할것이라고 을러멨다.

공보실의 발표문은 서울로부터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진보당조직들에 대한 간섭과 탄압에로 관권을 내모는 로골적인 지령이였다.

경찰들은 이 발표문을 턱에 걸고 도, 시, 군, 면, 리단위의 지방당조직들에 저들의 주재관까지 앉혀놓고 당조직을 감시하고 통제하였으며 당의 모든 활동을 장악하였다.

진보당 중앙은 즉각 강하게 반응하였다. 서울언론들에 진보당의 성명서가 일시에 배포되였다. 정당에 경찰주재관까지 들여앉히는것은 세계정당사에 전례없는 폭거라고 강력히 항의하고 당장 철수하라고 요구하였다.

정제관은 진보당에 틀고앉은 경찰주재관수를 두배로 늘구라고 지시하는것으로 진보당에 대답을 주었다.

조봉암은 모든 수단과 가능성을 다 동원하여 도전세력의 공개적인 음해책동을 정면돌파로 분쇄하기 위하여 경무대와 자유당, 내무부와 법정을 상대로 항의투쟁을 벌렸다. 그러나 진보당 중앙이 벌리는 투쟁은 어느것 하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조봉암이 리승만과의 면담을 수차례 요구하였으나 매번 거절당하였다. 미국대사와의 면담도 요구하였으나 그의 면담취지에 대하여 다울링은 내정간섭이 될수 있다는 리유로 끝내 응하지 않았다.

조봉암은 파멸전야에서 휘청거리는 진보당조직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안깐힘을 다 짜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지방당조직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중앙의 간부들로 여러개의 편대를 무어가지고 지방순회길에 오르게 하였다.

서울에는 윤기중과 신창균이 떨어져 당사업전반을 장악하면서 내무부와 《국회》를 대상하는 항의투쟁을 강하게 벌려나가도록 하였다.

이 투쟁에는 신창균에게 직속되여있는 《국회》의원들과 기업가, 통치권의 관료들, 학계와 언론계인사들도 직접 혹은 간접으로 합세하였다.

로성팔도 서울에 틀고앉아 자기의 영향밑에 있는 무소속의 《국회》의원들을 거느리고 합세하였다.

조봉암도 서울을 떠났다.

우달수가 조봉암을 앞질러가면서 지방당조직들이 당수를 영접하도록 하고 조봉암이 사업할수 있는 사업조건들을 마련하군 하였다. 비록 몸은 체소하였으나 《국회》의원의 신분과 함께 명석한 두뇌와 쉬이 드놀지 않는 침착하고 무게있는 인품으로 지방의 우익적인 관리들과 경찰들과의 사업을 로숙하게 벌려 조봉암이 마음껏 활동할수 있도록 하였다.

조봉암은 전라남도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거슬러오르면서 지방당조직들과 당원들의 동요를 막고 당안에 새로운 활력을 부어주기 위하여 간부들과 당원들을 만나 실태를 료해하고 힘을 주고 신념을 안겨주느라고 최선을 다하였다.

가는 곳마다에서 행정권의 우두머리들과 경찰계의 책임자들을 앉혀놓고 진보당에 대한 비렬한 폭거를 놓고 호되게 책망하였다. 그 부당성을 사리정연하게 해설하기도 하고 정치적중립을 지킬데 대하여 절절하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리승만일파의 무지막지한 공세에 위축되여버린 지방당조직들은 더는 수습할수 없게 빛이 꺼져가고있었다.

조봉암은 폭압이 란무하는 사나운 난바다에서 조난을 당한채 빠른 속도로 침몰해가고있는 진보당을 보면서 수난많은 한생에서 두번째로 자기의 삶에 대하여, 자기가 벌려온 투쟁에 대하여 심각한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조봉암이 처음으로 자기 환멸에 사로잡혀 동요하고 고민하였던것은 해방후였다.

박헌영과 미군방첩대의 간계와 모략에 의하여 공산주의자로서의 존엄과 인격이 완전히 동지들과 지지자들의 면전에서 먹칠을 당하고 나중에는 혁명대오에서 추방되였을 때 조봉암은 자기가 20대의 젊은 시절에 들어섰던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와 거기에 몸바쳐 반생을 바쳐온 자기 삶을 부정하였고 미지의 투쟁의 길을 모색하여 새로운 삶의 궤도에 올랐다.

제3의 길을 찾아헤매인 정신적방황과 줄기찬 투쟁속에서 곧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심을 버렸으며 몸바쳐왔던 투쟁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다시 찾게 되였다.

이번에 마음속에 슬그머니 자리잡고 그를 괴롭히는 좌절감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심각하였고 풀 길이 묘연한 그러한것이였다. 그것은 총체적으로 자기가 10여년간 준비해왔고 드디여 승리의 종착점에 가까이 왔다고 자부한 투쟁에 대한 회의적인 고민이였다.

조봉암은 요즈음 최금룡이 이따금 퉁퉁 내뱉던 소리가 자주 생각났다. 최금룡은 진보당의 강령을 놓고 자주 의문부호를 달군 하였다. 자기가 《대통령》후보로 선거전에 참여하는데 대하여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표시하였다.

어린 사람의 의견이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따져묻지도 않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최금룡이 바로 진보당의 투쟁전술과 방략에 대하여 공감하지 않았던것이 명백하였다.

과연 미제국주의가 틀고앉아있고 리승만일파가 나라의 파쑈화를 실현한 이 암흑천지, 철권사회에서 의회투쟁이라는것이 허용될수 있으며 더구나 의회투쟁을 통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실현될수 있겠는가? 권력쟁탈을 통한 조국의 통일과 민중사회건설이 가능하겠느냐? 최금룡의 불만은 바로 여기에 귀착되는것이다.

그때는 최금룡의 불만이 현실을 깊이 파악하지 못하고 리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젊은 피와 조급한 욕망의 분출이라고 너그럽게 리해하여주었다. 언젠가는 최금룡이 자기와 진보당에 대한 리해를 바로가지고 다시 자기 품으로 돌아올것이며 그러면 연경이와의 관계도 회복될것이라고 아량과 도량을 가지고 기다려주기로 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최금룡의 얼굴이 자주 떠오르면서 그의 불만에 대하여 음미하게 되는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무서운 일이였다. 그것은 오직 민중을 위한다는 하나의 리상속에 고난과 시련도 웃음으로 헤쳐온 자기 삶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였다.

정말 내가 허황한 망상으로 수천만 민중을 기만하여온것이 아닌가.

이 땅을 떠나간 천령배도 이런 불만을 삭여낼수 없기때문에 결국은 나를 떠난것이 아닐가.

천령배는 이제부턴 공산주의자라는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살고싶다고 하였다. 현실이라는 살벌한 벽에 부닥쳐 혁명적구호마저 뒤전에 감추어놓고 살아가는것이 고통스럽다고 하였다.

자기의 곁을 일찌기 떠나간 최기오도 근래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떠오르군 한다. 최기오는 이따금 자기앞에 나타나 표벌이로는 절대로 리승만을 제끼지 못한다고 력설하군 하였다.

정치무대에서 아예 물러날 때에도 박헌영일파에 대한 환멸과 함께 조봉암이 애써 찾아낸 3의 길의 승리가능성에 대한 동요를 감추지 않았다.

최금룡이나 천령배나 다소 색갈의 차이는 있더라도 나의 승리, 진보당의 승리에 대하여 극히 랭소적이였다.

사태는 지금 그들의 불만과 의심이 진실이며 마땅한것이라는 방향으로 흐르고있다.

그렇다면? …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10여년의 처절한 간고분투를 이어왔느냐?! 무엇을 위하여 제3의 길을 찾았으며 진보당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구태여 이 땅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한다는 자체가 가당한가? 망상일가? 망상이란 주관의 산물이다. 어리석음이 낳는 탈선은 패배를 면치 못한다.

사고가 이렇듯 괴롭게 고민으로 이어져갈 때면 조봉암의 심장은 후두두 급하게 뛰였고 리성은 가까스로 흥분을 자제하였다.

자신이 오랜 기간 고심하여 완성한 투쟁방략이 나라의 현실에 가장 접근되고 필요한 유일무이한 변혁의 전술이므로 자기의 신념을 지키고 자기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서도 도전세력의 타격전을 기어이 짓부셔야 하겠다고 강심을 다지군 하였다.

(동요말라, 죽산! 그대의 3의 길은 묘연한 길이 아니다. 리승만이 우리를 무서워하는것은 우리의 3의 길의 정당성을 확증할뿐이다!)

그는 시간을 쟁취하기 위하여 잠을 잊어버렸다. 그야말로 차안에서 눈을 붙이고 달리는 자동차안에서 간편한 음식으로 끼니를 굼때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숨어있던 지방당의 핵심들이 모여들었고 부서졌던 진보당현판들이 다시 나붙었다. 움츠러든 조직들이 활기를 되찾는것을 볼 때면 조봉암은 용기백배해졌다.

그런데 조봉암이 서해안의 지방들을 거슬러 충청북도에까지 이르렀을 때 《사모하는 민중의 벗》으로부터 날아온 한장의 투서가 또다시 심상치 않은 자료를 전하였다.

《내무부는 진보당에 대한 타격전을 마지막단계에서 벌리기로 함. 마지막단계의 과녁은 죽산선생님과 중앙간부들로 선택되였음.》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