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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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로성팔이 온다는 예고도 없이 불쑥 조봉암의 집에 나타났다. 시국이 돌아가는 형편이며 남도의 귤농사작황이며 향방없이 이어가던 로성팔은 초간히 사이를 두었다가 불쑥 밑도 끝도 없이 조봉암의 혈압을 물었다.

《혈압? … 혈압이 높지요. 160에 100이라 하던가? 이따금 180으로도 오르는데 이젠 만성이 되여서 그런대로 넘어가지요.》

《죽산선생도 그 혈압때문에 고생하는군. 그런데 180소리가 나오고보면 위험수위지요. 미리미리 대책을 세우는게 좋시다.》

《원, 혈압걱정을 하고있을 형편이 되였습니까. 이제 당장은 <국회>선거를 치러야겠는데… 그게 끝나면 래후년도 지방선거가 있고 그걸 치르고나면 4대대통령선거전을 치러야 될거구…》

《그 일감이야 이젠 진보당의 체모를 갖추어놨는데 걱정할게 뭐 있어요? 뭐니뭐니해도 건강이 첫째입니다. 이제는 죽산선생도 로후관리에 특별히 관심을 돌려야 할 때지요. 일을 다하고 죽었다는 사람이 없지요. 병은 자래우면 안되지요. 그 고혈압이 일을 치기전에 이일저일 한 이태 접어두고 예순해 혹사해온 육체를 중보수하는 셈으로 한번 료양이라는걸 해보시오. 내가 소일거리로 하는 남해의 귤농장에 와서 나와 함께 지내지 않으시려오? 거기에 동래온천 못지 않은 온천도 있고 또 남해가의 맑은 공기와 따뜻한 볕이 죽산선생의 건강회복에 특효가 있음직합니다.》

《허, 그래요? 그러니 나더러 청파선생의 적막을 덜어줄 말동무 돼달라는건데… 허허허, 팔자에 없는 료양이라는걸 혁띠를 풀어놓고 늘어지게 한번 해볼가요?》

《좋지요. 꿀맛이라는게 그런게 아니겠소.

어떠시오? 따라다니던 서울미인이 드디여 문턱을 넘어섰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던데 인제는 안사람도 맞아들이고 늙마에 사는 재미도 보시우. 알겠소? 고목생화라 떡돌같은 아들을 보게 되겠는지…》

《허허허… 그런 생각도 과히 없는건 아니올시다. 정말 청파선생의 뜻을 좇아 마누라 업고 가 아들도 만들구 남해절경에 취해본다? 하하…》

조봉암이 로성팔의 속말이 따로 있는듯싶은 우스개에 맞장구치며 껄껄 웃자 로성팔이도 배허벅을 들썩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한참 웃고나서 로성팔이 정색하더니 조봉암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았다.

《죽산, 웃을 일이 아니요. 내 사실은 권고할게 있어 이렇게 급히 찾아들었소. 참말이지 한 이태 건강문제를 걸고 당업무에서 풀려나도록 해보오.》

《그러니 정계은퇴? … 청파가 또 누구 침을 맞고 온건 아닙니까?》

조봉암이 시죽이 웃으며 묻자 로성팔은 대뜸 성깔이 돋친듯 화를 냈다.

《내가 누구 침 맞구 돌아가는 시러베자식 같아보이오?》

그러나 이내 능청스럽게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기는 내가 좀 침을 맞기는 했지요. 어제 저녁에 리기붕이 고병직을 달고 예고없이 귤밭에 나타났겠지요. 그래서 여러 말이 오갔소.》

《하, 글쎄 연고가 있어 이렇게 천리길을 달려왔겠지요. 그 사람들이 왜 왔습디까? 혹 청파를 보수대통합에 주역으로 모시자는건 아닙니까?》

《빗맞혔소. 헌데 그 소리가 또 정 틀린 소리는 아니구… 문제는 뭘 겨냥해서 보수대통합을 하자는가 하는건데…》

로성팔은 때마침 연경이가 가지고 온 구기자차잔을 받아 목을 추기고나서 두 보수당의 상징인물들이 서울에서 남해가에까지 차를 굴려온 사연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리기붕과 고병직이 나타난 공식리유는 당면한 《국회》에 상정시킬 다음해 예산법안처리와 관련하여 《국회》의 다수를 이루고있는 민주당과 자유당 그리고 로성팔이 두령격으로 있는 무소속의원들의 사전협의를 하자는것이였다.

그러나 서울의 권력층과 정치권의 간판인물이고 《실세》라고 자처하는 인물들이 로성팔의 문턱을 넘어선 기본리유는 다른것이였다. 협의가 끝날무렵이 되자 리기붕이 조끼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고는 성글어진 반백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지나가는 소리로 슬그머니 조봉암과 진보당의 운명과 관련한 화제를 띄워놓았다.

《리박사가 골이 났소. 다음번 선거에서 미상불 <국회>는 조봉암의 패에 뺏긴다는거요. 그게 문제긴 문제요.》

《그래서? <국회>를 떼우고나면 의장님도 단상에서 물러나게 되는게 아니시오?》

고병직이 이미 서울에서 듣고온 소리였고 그것때문에 천리길을 들추는 승용차에서 반나절 고생스럽게 달려왔으나 로성팔이 들으라고 짐짓 능청을 떨며 말구멍을 넓혀주었다.

《리박사가 결심을 내린것 같소.》

《어떻게?》

《조봉암을 아예 매장해버리라는거요. 김창룡이 살아있을 때도 독을 쓰며 그랬는데 이번에는 그예 일을 칠 화상이였소. 조봉암을 없애버리면 진보당도 자연분해된다는거요.》

《거야 그렇구말구. 헌데 그 사람을 그렇게 제껴넘길 수를 찾아내기 쉬울가?》

고병직이 뒤집어진 입술을 벌리고 꾸민 웃음을 지어보이였다.

《거야 뭐, 만들어내기탓이지. 언제는 딱히 혐의가 있어 숱한 사건들을 만들어냈소.》

해묵은 구렁이들이 시치미를 떼고 부르고 쓰며 리승만의 흉계를 가지고 엄포를 놓자 옆에서 듣기만 하던 로성팔이 건드러지게 웃어넘겼다.

《허허, 죽산의 목에 올가미를 걸어보겠다고? 어림도 없소. 부르도그같던 창룡이도 손이 떨려 감히 해내지 못한 지랄을 그 선비같은 정제관이따위가 해낸다오? 참새한테 굴레를 씌울지언정 죽산의 목에는 썩은 새끼줄도 걸지 못할거요. 고대표, 어떻소? 당신네가 원체 죽산에게 덤벼들었다가 쓴맛을 톡톡히 본 일이 있었지요?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라 했더라?! 허허…》

로성팔이 다시 능글능글 웃으며 빈정거렸다.

고병직이 그 소리에 벌레라도 씹은듯 금시 유들유들한 상통이 오만상이 되고 리기붕이 메마른 상통으로 낄낄거렸다.

고병직이 오만상을 한데는 까닭이 있었다.

로성팔은 조봉암의 농림부 장관시절에 고병직과 탁준의가 공모하여 그를 물어메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로서의 경력을 운운하면서 국가공금을 개인주택구입에 횡취하였다는 사건을 날조했던 일을 꼬집어든것이였다.

리기붕도 그 시절에 조봉암과의 첫 대결에서 여지없이 참패를 당하고 법정에서 벌금판결을 당하던 고병직과 탁준의의 꾀죄죄하던 몰골이 떠올라 히물히물 웃었다.

그러나 고병직은 로성팔의 비양스러운 지청구에는 아랑곳없이 열을 올렸다. 늘어진 볼살이나 옷이 터질듯 부풀어오른 몸집처럼 비위살도 두터운 고병직이라 로성팔의 그 정도의 비양에는 끄떡없다.

《내 그때 그놈의 주리를 틀어놔야 할 노릇이였어. 늦었지, 늦었구말구.》

《의장님이 한번 나서서 내무를 휘동하여보시구려.》

로성팔이 두 놈팽이의 진속을 캐보고싶어 리기붕의 엉치를 쑤셔놓았다.

《흥, 벌써 일은 시작되였지요. 리박사가 임자에게도 량해각서를 띄워보는게 좋다고 하시였소.》

리기붕이 얄팍한 입가에 삵의 웃음을 살살 피워올리고 대꾸하였다.

고병직이 더욱 승기가 나서 심술사납게 독기를 뿜어댔다.

《내 립장을 구태여 묻는다면 난 언제나 조봉암의 과녁이였고 반대로 저격수이기도 하였소. 이번에는 기어이 목을 쳐버리자고 하오. 권력의 검을 잡고있다는 자유당이란게 조봉암 하나 제끼지 못해 골골 앓음소리만 낸단 말이요. 늘 벼르기만 하다가 때린다는게 설때려놓으니깐 오히려 포악이 더 심해지는게 아니요. 빨리 마련을 봐야 하오. 우선 의장님의 권력야심이 그놈한테 도전받을수 있소.》

고병직은 리기붕의 여윈 상판을 마주보며 넌지시 고삐를 넘겨주었다. 이제 리승만이 물러서면 리기붕과 맞서기마련이다. 하지만 고병직은 리기붕따위는 자기의 적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잠재적인 최대의 정치적도전자는 조봉암이였다.

조봉암이만 제거하면 경무대로 가는 길은 시간문제이지 불원간에 거침없이 입궁할수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리승만의 손을 빌어 그를 영원히 매장시켜야 한다. 그래야 뒤날에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순조롭게 통치자로 군림할수 있다.

그래 고병직은 자기는 정면에서 비켜서가지고 리승만이 어서바삐 칼을 들어올리도록 리기붕을 암암리에 꼬드겨온다.

리기붕도 고병직의 엉큼한 궁리를 넘겨짚고있었으나 덤덤한 표정으로 받아넘겼다.

《그까짓, 난 무섭지 않소.》

네 목건사나 하라는 말이 입안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하, 배심은 좋구만. 헌데 리박사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생각하는데도?!》

《리박사는 리박사고… 난 옥좌엔 욕심이 없소.》

리기붕의 대답이 여전히 데퉁스럽다.

리기붕은 고병직처럼 비위살이 두텁지 못하다. 신경이 병적으로 예민하고 걸핏하면 짜증을 부리고 팩해오르기 잘하는 리기붕이지만 이번에는 용케 참아냈다. 리승만이 물러서면 다음번의 옥좌는 제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민주당의 측근들에게 한다는 고병직의 희떠운 공언을 심심치 않게 듣군 한다. 가소롭기 그지없다고 쓰거워하는 리기붕이다.

《하, 너무 그렇게 시치미를 떼지 마시오. 경무대 안방정사… 난 뭐 귀막고있는줄 아시오? 헌데… 거, 미국의 눈치부터 봐야 할겁니다.》

고병직이 다시 화제를 조봉암에게로 몰아가자 리기붕은 로성팔을 끌어들이고싶어 그를 마주보며 맞장구를 쳤다.

《거야 리박사가 해주겠지. 아마 이미 약조가 돼있는 눈치이기도 해요. 조봉암을 후원해오던 인천령사관의 롤만박사도 며칠전에 워싱톤으로 쫓겨간걸 보면 이제는 미국쪽에서도 타격에로 넘어갈것이 분명한것 같소. 그러니 그쪽에서 불집이 일어나면 괜한 시비를 캐지 말아달라는거요. 보조를 같이해줄걸 리박사도 바라고있소.》

고병직은 저들은 품 한자루 들이지 않고 리승만보다도 더 위험하고 강력한 잠재적인 적수를 꺼꾸러뜨리게 되는 일이여서 대바람에 두손 들어 찬성이였다.

《알겠습니다. 우리쪽을 념려할건 없수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미국식의 보수량당제를 만들어봅시다. 조봉암과 진보당을 완전제거하는 일이라면 우리를 믿어도 되오.》

로성팔이 고병직과 리기붕이 더러운 정치적흥정으로 조봉암이라는 거목을 쓸어눕힐 밀약을 하는것을 역겹게 듣고있다가 속이 뒤집어지는듯 한 분노와 아픔을 느끼며 넌지시 비집고들었다.

《우리 무소속도 입을 다물어달라는거요?》

《거야 물론.》

《보상은 어느 정도요?》

《보상? … 허허 언제부터 청파가 장사군이 됐소? 그래 조봉암 제끼는 일이 청파에게는 건너집 시앗싸움같이 보이오?》

《무슨 소리… 당신네가 불원천리 숨차게 달려온즉은 이 로성팔의 몸값계산을 바로하고 왔을게 아닌가? 자유당에서야 워낙 장사노릇 잘하지 않나. 리박사만세 한번 잘 부르면 검정고무신에 탁배기 한보시기값은 준다는데 조봉암 제끼는데 한몫 끼우라면서 수염 뻑 씻고 맨손 내밀텐가?!》

리기붕은 아직까지도 천연스럽게 퉁퉁 넘기는 로성팔의 엉너리가 진담인지 롱담인지 분간되지 않아 어리손을 치며 그 메마른 얼굴로 추파를 던져보았다.

《리박사가 청파에 대하여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안해하는 말씀을 하시군 하오. 아무튼 당신이야 달리될수야 없는 인물이지요. 올해 선거나 치른 다음에는 우리 당에 다시 들어와 실세자리를 넘겨받도록 하시오. 사실은 그래서 불원천리하고 내려왔소. 이건 뭐 내 소리가 아니요.》

리기붕이 은근히 리승만을 거들며 한수작 붙이였다. 로성팔은 흔해빠진 얼림수작에 코웃음으로 응수하였다.

속깊은 곳에서 울화가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그래도 백성을 위하여, 백성을 대표한다는 국가원수라고 자칭하면서 어떻게 민심을 크게 모은 한 정객을 놓고 이렇게 엄청난 강도짓을 공공연히 벌릴수 있느냐. 로성팔은 그냥 넘길수 없었다. 즉시에 불을 걸었다.

원체 노죽이 방치같다는 말을 듣기는 해도 수틀리면 생각을 꿍져두지 않고 말하고픈대로 깡그리 뱉아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였다.

《이보우, 당신네는 너무 모질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어떻게 적수공권의 야당지도자를 놓고 공공연한 모살을 백주에 운운하는거요? 이제는 우리 서울정치도 좀 깨끗해질 때가 되지 않았소?! 좀 어른스러워질 때가 되지 않았느냐 말이요.》

로성팔의 책망조의 반박에 리기붕과 고병직은 그의 반응이 상상밖이라는듯 눈들이 퀭하여졌다.

신경줄이 질겨빠진 고병직이 입가에 능글맞은 웃음을 물고 입침을 박았다.

《뭘 그러오? 정치라는거야 원체 그런게 아니겠소?! 깨끗하게 정치한다는게 무슨 소리요? 그게 공리공담이라는걸 청파가 모른단 말이요? 그러니 청파는 행정권의 요직을 력임하다가 깨끗한 손으로 물러났다는거요? 이거 참, 괜히 천리길을 왔다가 낯짝만 깎이지 않나?!》

《음-》

로성팔은 고병직의 가시돋힌 조롱에 더 할말을 못찾고 굳어졌다.

저지른 죄많은 과거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일순간 머리통이 빠개질듯 저려들었다.

돌이켜보면 그자신도 민중앞에 저지른 죄가 적지 않으며 지금도 늘 죄의식속에 살아간다.

그래서 《국회》선거때 선거구의 선거자들앞에 나설 때면 늘 용서부터 빈다. 그때는 해방열, 건국열에 들떠서 그렇게 하는것이 나라를 세우고 만백성을 지키는 멋으로 알아 제정신없이 마구 헤덤비였다고 토설한다.

하지만… 그 길이 애국도 아니요, 애민도 아니라는것을 절감하자 두서없이 그 더러운 권력의 복마전을 뛰쳐나와 권력의 도전자, 비평자로 무소속에 몸을 담은게 아닌가.

《우린 피차에 리박사와 한배를 타고 함께 노저어야 할 족속이요. 그래서 청파 믿고 찾아온거요.》

리기붕이 한술 더 뜨며 턱밑에 바싹 다가든다.

악취나는 패당과 콩팥칠팥해야 제 낯만 상할것 같다. 백해무익하고 퀴퀴하기 그지없는 뒤공론에 더는 귀를 벌려주기가 싫었다. 들어봐야 추악한 험담이요, 새겨봐야 역기가 치밀뿐이다.

속이 시커먼 패당과 어울려봐야 자기 속도 제 모르게 거무레하게 오염되기마련이다. 어서바삐 자리를 피하고싶었다.

《어험-》

로성팔은 긴 허리를 쭉 펴며 기침소리를 야단스럽게 뽑아올렸다.

그리고는 두사람을 착잡한 눈길로 번갈아 보다가 갑자기 눈을 지릅뜨고 추상같이 호령하였다.

《이보시오! 당신네들은 조봉암도 잘 모르고있지만 이 로성팔이도 잘 모르고있소!

어지러운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구질구질한 수렁창에 다시금 몰아넣을 생각은 걷어치우시오! 그리고 정치적적수에 대한 린치는 력사에 오명을 남긴다는걸 명심하시오! 시대가 귀하게 여기는 인간을 교살하고 매장하는 행위는 리유여하 불문하고 역적죄에 해당하오.

당신들은 나에게서 그런 반인륜적범죄에 대한 동조를 기대하지 마시오! 봉황은 주려도 조는 쫏지 않는다고 하오. 내 비록 관직을 다 털어버리고 물러섰지만 봉황으로 살려고 하니 나더러 조를 쪼으라고 강박마오!》

로성팔의 뜻밖의 매운 선언에 화닥닥 놀란 리기붕과 고병직이 어리뻥뻥해졌다.

차고 온 술을 권하며 이말저말로 달래였으나 로성팔의 기상은 여전히 꿋꿋하기로 대쪽같았다. 몸도 얼굴도 비둔한 고병직에 비하면 반쪽도 안될 로성팔이였으나 그의 말에는 두사람의 근량을 단숨에 짓누르는 무게와 준절한것이 비껴있었다.

로성팔은 그냥 밸이 홍두깨같이 불끈 솟아올라 호되게 꾸짖었다.

《의장쪽에서는 지금 지난해 대통령선거에서 이겼다고 우쭐해졌는데 모두들 눈에 곰팽이가 낀것 같구려. 이겼다고 선인이 되고 패했다고 악인이 되는거야 아니지 않소. 숱한 사람들과 숱한 사변들이 승자와 패자라는 첨예한 대결과 모순속에 부딪치고 엇갈려 선과 악이라는 인간세계의 두 극단을 드러내놓았는데 잘 살펴보소.

정말 한심하오, 당신네들이! 섶던져 불끄겠는가? 정치하는 인간들이 글쎄 어떻게 제 좋은 소리만 하겠소만 그래도 량심이야 있어야 할게 아닌가?! 선과 악을 갈라보는 눈이야 있어야 한다 이거요. 돌아들 가시오! 대상하고싶지도 않소!》

로성팔의 불호령에 망짝같은 고병직의 엉덩이가 화들짝 했고 리기붕은 신경통이 발작한듯 입술을 푸들푸들 떨며 꺼내든 회중시계를 연신 들여다보기만 하였다.

잠시후에야 고병직이 애써 자기를 다잡고 늘어진 어조로 대꾸하였다.

《청파! 믿고 찾아온 사람들이 권하는 술도 한잔 받아주지 않고 이 무슨 랑설이오? 너무하지 않소?! 과시 놀랍군! 그래 임자만 성인군자라는거요?!》

《아니, 성인군자는커녕 악인에다가 천치였소.

늙마에 와서야 비로소 죽산을 귀감으로 삼고 선인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니 나도 죽산도 건드리지 마오! 도대체 당신들이 그 사람과 대적이나 되는 위인들이요?! 죄없는 사람 왜 목치겠다는거요. 그 사람에게 죽을죄가 있다면 어디 꼽아보오! 그래 그 사람 목 쳐버리면 당신네 뒤날은 무사할것 같소?! 남잡이가 제잡이라는 말 잘 건사해두기 바라오.》

로성팔이 여전히 바늘귀만 한 틈사구니도 보여주지 않자 하는수없이 리기붕이 채머리를 흔들며 먼저 일어나고 뒤따라 비지땀에 질벅해진 고병직이 벌레씹은 상통으로 코소리를 연방 내불며 무겁게 일어섰다.

그들을 돌려보낸 뒤 로성팔은 온밤 뒤치락거리였다. 조봉암에게 덮쳐드는 위험을 놓고 잠들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발목을 잠그어온 정치권의 추악한 악취가 역겹게 감겨들어 종시 자리에서 일어나앉고야말았다.

《더러운 놈들! 악귀같은 놈들!》

그는 연방 담배대를 갈아대며 리승만과 그 패거리들의 잔인한 몰골들을 눈앞에 세워놓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뙤창이 푸름푸름해지는 동틀무렵이 되자 운전수를 깨워 서울로 바삐 차를 몰아왔던것이다.

《이렇다우.》

로성팔이 말끝에 길게 한숨을 그어놓자 조봉암이 벙글써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나더러 정계를 버리고 귤밭에 인생을 묻어버리라는거지요?》

로성팔이 약간 골이 나서 그 말을 받았다.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시오. 고혈압병은 치료해야 되는거구 시국은 미친바람을 일으키고있으니 잠시잠간 좀 피해서라는거요!》

조봉암이 천리길을 달려온 로성팔의 성의를 두세마디로 뿌리칠수는 없어 생각에 잠겨있다가 침착하게 자기 생각을 내비치였다.

《리승만이 바로 청파선생이 이렇게 움직이고 이런 권고를 해줄것을 바라는게 아닐가요? 리기붕이나 고병직이 이걸 노리여 천리길을 갔던게 아닐가요?》

《참, 답답도 하시네. 아무렴 이 로성팔이 10년가까이 리승만의 턱밑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왔는데 그쯤한 생각도 못했겠소. 리승만이 지금 제일 두려워하는게 누군지 아오? 당신이요, 죽산이란 말이요. 이제 봄철에 나가면 총선이 아니요?! 리승만이 급해맞았소. 이번 총선은 리승만이 힘들거요. 당장 <국회>를 죽산에게 뺏기우고나면 제놈 사족이 꽁꽁 묶이웠다가 지경밖으로 들리워나갈 판인데 체면 귀한줄 알게 됐소?! 그러니 그놈이 별지랄 다하게 됐단 말이요. 리승만이 어떤 불한당인지 당신도 잘 알지 않소! 페일언하고 내 말을 따르도록 하시오.》

《청파선생, 정말 고맙습니다. 난 청파선생을 생각할 때면 인간이란 참으로 무궁하다는 생각을 하군 합니다. 청파선생이 이렇게 나와 우리 진보당을 진심으로 아껴주실줄 생각이나 할수 있었겠습니까.

인간이란 자기를 다듬어갈수록 참으로 아름다워진다는 생각이 지금 나를 후덥게 해줍니다.》

로성팔은 조봉암의 진정이 넘치는 찬사에 면구스러워져서 손을 내둘렀다.

《에에, 그런 말씀 거두시오. 청파의 환생은 죽산의 덕이요. 죽산의 모습, 죽산의 목소리, 죽산의 걸음새, 죽산의 덕망이 청파를 칠순나이에 비로소 깨도가 되도록 해준거라오.

이런 말은 접어둡시다. 지금 우리가 어디 감상에 젖어 서로 위로나 하고있을 계제가 되였소? 눈섭의 불부터 꺼야지.

어쩌겠소? 내 말대로 하시겠소? 그래 내 귤밭에 내려오시겠느냐 말이요?》

《청파선생!》

《오시겠소?》

《허허…》

《에 고집두, 하늘소 발통이라니… 어쩌자는거요, 도대체?!》

로성팔이 너무 안타까워 크게 노염을 쓰며 주먹으로 앞상을 내리쳤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장난하는거요?! 사지판에서 자기 목을 내대고 도박을 할 셈이요?》

《청파선생! 내 말도 좀 들어주시오. 내가 언제는 꽃밭길을 걸어왔습니까. 난 정말 3. 1봉기에 참가해서 일본놈들에게 끌려갔던 소시적부터 이날이때까지 단 하루도 편안하게 살아본적이 없었지요. 그래도 이렇게 신수가 펀펀해있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내 목을 겨누었으나 나는 살아났고 내 이젠 륙십에 이르렀습니다.

청파선생, 너무 걱정마십시오. 이 땅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민중이 잘사는 세상을 위하여, 내나라가 통일이 되여 세상을 굽어보며 잘사는 래일을 위하여 싸우다 간 렬사들이 그 얼마입니까.

그런데 그렇게도 바라마지 않던 진보당이 이제 방금 체모를 갖추어놓았는데 그 기수라는 사람이 제 한목숨 귀해서 달팽이처럼 숨어지낸단 말입니까?

청파선생, 난 그렇겐 못하겠습니다.

난 지금도 민중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늘땅에 사무친 민중의 원한을 듣습니다. 저 지리산과 한나산, 태백산의 높고낮은 메부리에서 나라의 통일과 좋은 세상을 위하여 피를 뿌리다가 한줌의 재가 되여 묻힌 렬사들의 령혼이 나를 찾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네들의 한을 외면한다면 무슨 진보당이고 조봉암이겠습니까?

청파선생, 그네들이 내가 귤밭에 안식처를 마련했다는것을 알면 나한테 저주를 보내기 전에 얼마나 크나큰 실망과 좌절을 느끼겠습니까? 나를 리해하여주십시오. 내가 그냥 민중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채찍질만 해주십시오. 민중의 기대를 저버린다면 나는 벌써 그때부턴 살아도 죽은 목숨이요, 죽산이 아니지요.

이번 선거에서 나를 지지하여나섰다가 경찰의 곤봉에 얻어맞아 피흘리고 목숨까지 잃은 사람들을 나는 열백번 죽어도 배신하지 못합니다. 그중에는 내 소꿉친구도 있답니다.》

《에, 죽산! 그냥 내 가슴을 찢어놓는구려.》

로성팔은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듯 한손으로 가슴팍을 눌러잡고 부르짖었다. 조봉암이 애원하듯 웨치는 그 열화같은 뜻이 드디여 그의 심장에도 불을 달아주었던것이다.

하지만 이 금쪽같은 인간을 지켜내야 할게 아닌가?!

로성팔은 안타깝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수가 없을가?! 의를 지켜 호호탕탕한 이 귀인을 어떻게 하면 저 망종같은 악한들의 폭행으로부터 막아줄수 있을가?!

《청파선생! 남도에서 예까지 천리길인데 이렇게 찾아주신 귀한 걸음을 내 페부에 새기겠습니다. 그 귀한 뜻을 새겨넣고 난 민중세상 만들어 평화통일 이루고 자유롭고 존엄높은 부강한 나라 세우는 성전을 맹세코 중도반단하지 않으렵니다. 이게 우리 민중과 더불어 청파선생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이 조봉암의 보답이고 결바른 삶이 아닐가 합니다. 다시한번 부탁합니다. 부디 끝까지 후회없는 바른 길로만 나를 채찍질 하여주시오, 청파선생!》

《죽산의 마음속엔 그저 민중, 민중만이 있구려! 그 마음속에 통일만이 꽉 차있구려! 눈앞에 와있다는 통일이 어째서 그냥 멀어지기만 하노?! 난 정말 죽산을 한번 만나고나면 속이 커진다오. 이 집의 지붕밑에는 어지러운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찌들지 않는 신성하고 고결한것만 꽉 차있단 말이요. 내 이따금 무슨 내놓을만 한 뜻도 없이, 얼도 없이 살아온 70평생을 돌아보면 내라는 인간만이 초라하게 서있을뿐일세. 평생을 이 청파의 따라지같은 목숨과 명예와 부귀영화만을 위해 누벼왔지. 내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이제라도 죽산의 수하에서 나라통일과 민중의 참세상 만드는 큰뜻을 세워놓고 살고픈데 돌아보면 누렇게 좀이 쓴 고목이요, 앞을 봐야 꺼지는 인생이라… 게다가 얼룩덜룩 오욕이 찍혀진 몸이라 죽산의 이름만 어지럽힐가봐 서슴어진다오.

죽산! 제발 몸성해 민중세상을 안아와주오. 나라의 통일 당겨와주오. 북과 손을 잡고 동방일각에 우뚝 솟아오르게 해주오. 난 다만 소원과 정을 가지고 죽산의 위업을 따르겠소. 민족부흥의 날을 기다리겠소.》

《청파선생!》

조봉암은 로성팔이 내민 후들거리는 두손을 부여잡았다.

조봉암은 어쩐지 속이 훈훈하여왔다. 의와 량심을 지키고저 천리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그의 정이 눈물나도록 고마왔다. 그리고 비틀어졌던 인생을 량심의 도마에 올려놓고 그냥 두드려대는 로성팔의 강마른 모습이 더없이 고결하게 비껴드는것이였다.

사람들의 운명이란 참으로 천태만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첫걸음을 잘 뗐으나 마지막 한걸음을 잘못 마무리한탓으로 세간의 지탄을 받는다. 넝마같은 인생을 누벼오다가 황혼기에 이르러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고 력사에 환생의 모습으로 전해지는 사람도 있다. 로성팔이 두번째 부류에 속한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일가. 그러고보면 인생을 바로 사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 힘든 일도 아닌것 같다.

두사람은 오래동안 마주잡은 손과 손을 풀지 않고 가슴속에서 쇠물처럼 사품치고있는 정을 말없이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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