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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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마감달인 12월도 반나마 흘러간 어느날 조봉암의 집으로 롤만이 전화를 걸어왔다. 천만뜻밖의 소식을 알려왔다. 미국무성의 소환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였다는것이다.

조봉암은 속이 철렁해왔다.

롤만은 남조선에 와있는 수만명의 미국사람들속에서 조봉암이 마음을 줄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서 어쩌면 미국과의 믿음직한 대화통로이기도 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조봉암을 성심성의로 도와주고 감싸주면서 조봉암에게로 날아드는 총탄을 적지 않게 막아주었다. 뿐더러 미국의 공식인물들앞에서 조봉암의 영상을 부드럽게 해줌으로써 그의 정치활동을 보장하는데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사실상 극단적인 반공체제에서 공산당경력자에 지금도 공산주의리념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경향성을 감추지 않고있는 조봉암이라는 인물이 정치권에서 활약하여왔다는것은 희한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력대 미국대사들과 미국무성의 정책립안자들은 조봉암이 농림부 장관이나 《국회》부의장으로 등용되고 《대통령》후보로 나설 때마다 언제나 의심과 불안스러운 눈길로 롤만의 분석평가자료를 요구하였고 읽고나서는 안도의 숨을 내쉬군 하였다.

이러한 롤만이 미국으로 떠나간다는것은 조봉암에게 있어서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어찌된 일이시오, 롤만박사?》

조봉암은 자못 놀랍고 실망해서 쓸쓸한 어조로 물었다.

《제가 고향을 떠나온지 열세해 됐으니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지요. 하지만 난 이 땅에 이제는 정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죽산선생님을 알게 되고 친구로 사귀게 된것을 내 인생의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롤만이 심상하게 대답하였지만 조봉암은 그의 얼굴에 비껴든 비감을 분명 보고있었다. 언제 떠나게 되는가고 하니 크리스마스날까지 워싱톤에 도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다음날 저녁 조봉암은 사위와 연경이를 보내여 롤만을 청해오게 하였다.

대문밖에서 롤만을 맞이한 조봉암은 송별의 식탁을 알뜰하게 준비해놓은 응접실로 곧장 안내하였다.

응접실의 문앞에서는 효경이와 류선녀가 나란히 서서 롤만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좌석에 끼우지 않으려다가 효경이가 그냥 잡아끌고 나중에는 조봉암까지 권해서 이 자리에 서게 된 류선녀였다.

류선녀도 롤만과 초면이 아니였다. 전날 이 집 문턱을 종종 조심스럽게 넘을 때 롤만과 여러번 마주쳐 통성도 하고 안면을 익힌바 있었던것이다.

롤만도 리화녀자대학교의 교수인 류선녀가 조봉암에게 련정을 품고있으며 조봉암이 그냥 피하고있다는 정도로 그들의 관계를 알고있었다.

롤만은 효경의 인사를 반갑게 받으며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춰주고나서 류선녀와 마주서자 희색이 만면하여졌다.

그는 류선녀의 손을 감싸잡더니 은근한 어조로 류다르게 인사를 하였다.

《이제야 우리 죽산선생님이 외짝기러기라는 말을 듣지 않게 됐군요. 제가 알건대도 이제는 여러해가 지났지요? 이 나라 고사에 격강이 천리라 강 하나 사이가 천리라는 말이 있습지요? 두분이 끝내 강을 넘어 천리를 메워버렸군요. 두분의 해후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어찌되여 10년지기인 저에게도 두분의 경사를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롤만은 진정이 뚝뚝 흐르는 덕담을 이제는 조선사람 못지 않게 조선말로 구수하게 번지였다.

그런데 축하의 인사를 받은 류선녀는 금시 소녀처럼 두볼이 무르익은 앵두빛갈이 되여 응접실로 달려나갔고 조봉암은 호탕하게 웃기만 하였다.

롤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손을 쳐들어보이자 조봉암이 껄껄 웃으며 롱조로 설명하였다.

《명석한 롤만박사도 빗나갈 때도 있구려. 롤만선생도 잘 알면서… 내가 지금 제 생각이나 하고있을 때요? 그리고 나야 이미 한물 건너간 초로인생이 아니요.》

《에… 또 그런 말씀, 그건 봉건입니다. 돌아간분이야 돌아간분이고… 그게 또 언제적 일입니까, 스무해도 썩 지났지요? 조선사람의 정조관념은 훌륭하기는 하지만 너무 보수적이고 완고한데가 있습니다.》

《역시 롤만은 미국식이요. 철저한 실존과 실리…》

《사랑이라는 세계를 그렇게 평하시는건 시대의 문명개화에 대한 도전이지요.》

《허허, 그리고 또 내 처지에… 그건 안될 일이지요.》

《예, 저도 알지요. 민중세상 만들기 전에는 부인을 맞아들이지 않겠다는… 난 그것도 불만입지요.

선생님보다 썩 년하인 주제에 이런 말씀드리기에는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떠나가는 몸이니 한마디 하겠습니다. 서양에서는 안해를 가리켜 내조자나 반려자라고도 부릅니다. 안해란 주인을 도와주는 첫째가는 동무라는 뜻이지요. 안해보다 더 충직한 벗이 어데 있겠습니까?!》

《허허… 롤만박사의 조언을 내 새겨두리다.》

조봉암은 호걸답게 껄껄 웃으며 롤만의 팔을 잡고 응접실 문을 열었다.

푸짐한 음식상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서울의 전통적인 음식과 함께 서양의 색다른 음식도 구색에 맞게 잘 차려진 음식상이였다. 조봉암은 새삼스럽게 롤만이 방금전에 꺼내놓은 말의미를 되씹어보며 씨무룩이 웃었다.

류선녀가 이 집에 들어선지 한해가 되여온다. 늘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언제나 손님으로 북적거리는 집안살림살이를 맡아안고 콩당콩당 뛰여다니는 효경이에게 늘 미안한 생각이였는데 류선녀가 그 절반몫을 맡아주니 우선 한결 마음이 놓인다. 도움이라면 이게 큰 도움이다.

점점 류선녀는 이 집의 주부로서의 위치를 서서히 굳혀가고있다. 그리고 조봉암의 가까이에로 자기의 발언권과 체취를 소리없이 넓혀오고있다.

우선 조봉암의 옷차림새가 류선녀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고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리고 헐벗으며 어렵게 살아온지라 딸들에겐 류행에 따르는 옷들을 갖추라고 권고하면서도 자신은 단벌옷을 아껴입는것으로 족하였다.

류선녀는 대범하고 검박한 그의 품성은 존중하면서도 그의 사회적지위와 인격, 계절과 류행, 장소와 상대인물들에게 어울리도록 차림새를 주장하고 그렇게 다듬어준다.

조봉암은 그게 처음에는 번거롭고 어색하였으나 점차 싫지 않게 느껴졌다.

지난 시기 딸들이 자기의 옷차림을 놓고 다심하게 마음을 쓸것 같으면 《됐다, 이 아버지 너희들이 그런다고 안팎이 달라질것 같으냐.》 하며 단벌 겨울옷과 여름옷을 해져서 버릴 때까지 입고 다니던 그가 오늘은 류선녀가 구색을 맞추어주는 옷들을 군소리없이 받아들고 흡족해서 입고 다닌다.

류선녀가 들어선이래 조봉암의 밥상도 달라졌다.

조봉암은 식성도 텁텁하기 그지없었다.

보리와 좁쌀과 입쌀을 섞은 잡곡밥에 토장국 한사발이면 만족해하였다. 그런데 류선녀는 조봉암의 식성에는 관계없이 자기가 료리하는 음식만을 대접하게 하였다.

60대의 장정들의 영양관리와 의학상견지에서 조봉암의 체질과 몸무게, 정신 및 육체적활동을 정확히 타산하여 료리한 건강음식이였다. 죽산선생은 구미에 맞든 맞지 않든 자기가 대접하는 음식을 들어야 한다는것이다.

류선녀가 들어온이래로 이 집의 차문화도 바뀌였다.

이전에는 강냉이차와 보리차를 위주로 하면서 생기는대로 록차도 끓이고 홍차도 끓여서 조봉암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대접하군 했다. 류선녀는 충청남도 청양군에 가서 직접 구해온 청양구기자차로 고정시켰다.

술도 색갈이 있고 단맛과 향기가 센 주정도가 높은 국화술대신 청양구기자술로 바뀌였다.

구기자차나 구기자술은 몸을 가볍게 하고 기력을 왕성하게 하며 다리와 허리의 힘을 강하게 하고 세포의 로화를 억제하는, 인생의 단풍계절에 들어선 남성들에게 가장 효험이 있는 차와 술이였다.

류선녀는 조봉암이 지방에 나갈 때도 연경이와 함께 따라다니면서 그의 식사는 꼭꼭 자기 손으로 보장하군 하였다.

조봉암은 처음에는 류선녀가 료리한 음식들이 입에 붙지 않았으나 점차 그에 습관되였다. 그리고 확실히 여러날 밤을 패도 눈앞이 흐려지지 않고 대중장소에 자주 나가 연설을 하여도 숨이 차던 현상이 슬그머니 사라진것을 느끼였다. 류선녀의 식사료법에 역시 배운 사람이 다르다고 속으로는 깊이 탄복하며 고마워지군 하였다.

류선녀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특히 외국인들과도 자주 상종하는 조봉암의 영상관리에도 자심하게 마음을 썼다.

류선녀는 리발을 할 때에는 꼭 어느 구에 있는 어느 리발소의 누구에게 모셔가라고 김봉무에게 당부하였다.

이렇게 조봉암의 생활에 깊이 관여하여 가정학교수다운 지성에 자기의 애틋한 정까지 합쳐 고스란히 부어주면서도 류선녀는 찾기 전에는 절대로 그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집안에서는 류선녀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류선녀는 말없이 자기의 지성을 조봉암에게 바치는것으로만 만족해하였고 조봉암이 그 지성을 달게 받아주는것만으로도 감사해하였다.

일찌기 눈을 감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를 어머니이상으로 모시고저 온갖 효성을 다 바쳐오는 효경이도 이제는 아버지앞에서 마음속으로는 제일 가까운 자리를 슬그머니 류선녀에게 양보하고있다.

새 어머니를 모셔오자고, 그것이 딸들의 효도라고 왼심을 써온 그들이였으나 처음에는 이 집안에 가을메뚜기처럼 뛰여들어온 류선녀가 아버지를 소리없이 차지하자 자기는 어쩔수없이 비켜나야 하는 서글픈 소외감에 야릇한 질투까지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효경이는 류선녀의 섬세한 진정이 아버지에게 힘이 되고 빛이 되고 복이 되는것을 체험하면서 녀인의 다심하고도 아릿다운 일거일동에 취해들었다.

실상 아버지에 대한 딸의 지성은 어디까지나 의무와 자각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녀인의 사랑은 헌신이다.

자기의 심혼을 다 퍼내고 자기의 육체를 깡그리 불태우고서도 늘 모자라 하는 그 사랑에는 한계가 없으며 사심이 없다. 그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헌신이다.

어머니 김이옥이 바로 그런 녀인이였다.

조봉암도 지금 자기 몸에 소리없이 스며드는 봄볕같은것을 감득하고있었다. 그 볕은 뿌리칠수도 없고 막아낼수도 없는 따스한 열과 빛으로 오랜 세월이 꽁꽁 얼구어놓은 이성의 담을 야금야금 녹이고 꺼졌던 재무지에 조심스럽게 불을 지피고있었다.

조봉암은 한없이 다감하고 깊고 줄기찬 녀인의 사랑의 세계에 때없이 빨려드는것을 의식할 때면 때로는 자신의 그러한 변화에 놀라기도 하고 의심쩍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래전에 숨이 꺼진 안해를 생각하며 죄스러워지기도 하였다.

류선녀는 여러해동안 일편단심으로 사모해온 사나이의 마음속에 서서히 굼닐고있는 눈녹이를 녀인의 미묘한 사랑의 감각으로 헤아려보고있었다.

그 녀자는 이따금 자기의 성의를 반갑게 받아주는 조봉암을 볼 때면 진작 오래전에 이 신당동의 대문안에 들어서서 조봉암의 생활을 다듬질하여드려야 했을것이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괜스레 여러해 속을 썩이고 바재이면서 아까운 세월만 놓쳤다고 후회되는바도 크다.

그는 자기의 가슴에 가물거리는 사랑의 아지랑이에 취하여 미구에 사랑의 열매가 무르익게 될것이라고 굳이 믿고있었으며 그 사랑의 꽃나무에 아낌없이 자기의 심혼을 묻고 정을 뿌리며 소리없이 가꾸고있었다.

그것은 그 녀자만이 느끼고 향유하고있는 소리없는 행복이고 기쁨이였다.

이날 롤만은 평소의 절제와 정중한 례의에서 벗어나 많이 마시고 많이 먹었다.

자기의 식성에 맞게 상에 오른 갖가지 음식들도 좋았지만 이 집 식솔들이 무랍없이 반겨주고 고여주는 성의가 그를 감동시키고 허리띠를 풀어놓게 했던것이다.

이따금 노래도 불렀다. 롤만이 《노들강변》을 흥취나게 불러 절찬을 받았고 연경은 프랑스의 혁명가요인 《마르쌔이애즈》를 절절하게 불러 롤만이 더운 눈물을 흐르게 하였다.

송별연이 끝나자 두사람은 연경이가 부어주는 구기자차 한잔을 천천히 마시고나서 서재로 자리를 옮기였다.

권하는 술을 다 받아마신데다가 이게 조봉암과의 마지막자리라는 쓸쓸한 감정으로 하여 롤만의 얼굴은 벌깃하게 상혈되고 여느때없이 인차 격해지군 하였다.

하기는 프랑스사람들이 원래 감성적이고 감정의 교차가 빠르다고 하는데 지금껏 외교관과 지성인이라는 무게에 깔려있던 그러한 기질이 술기운을 얻어 되살아났는지도 모른다.

《죽산선생님, 사실상 나의 귀국이 국무성의 소환에 의한것인줄 아십니까?》

롤만은 자리에 앉기 바쁘게 조봉암의 한손을 끌어당겨 두손으로 덮어잡으며 물었다.

《그럼? … 어째서 갑자기 떠나가는거요?》

《축출됐지요. 리승만과 미군방첩대의 모략으로 추방되여가는것입니다.》

《뭐라구? 추방됐다구?!》

조봉암은 깜짝 놀랐다.

그가 알기에는 롤만은 미국무성을 업고있다. 미국무성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그를 후원하고있다. 그리고 그의 실력이나 남조선에 와있은 년조로 보나 남조선에 와있는 미국인들속에서 견주어볼이가 별로 없는 관록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미군방첩대나 리승만일파가 저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미국무성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있는 롤만을 감히 건드릴수 있는가.

미국의 정치방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롤만은 지금까지 리승만을 미워하였다. 리승만의 빈축을 살수 있는 일들을 많이 한것도 사실이다.

롤만은 조봉암에 대한 평가문제에서 언제나 리승만이나 버드와는 상반되는 견해로써 그를 지지하였다. 여러번 치명적인 위기로부터 구원하여주었다.

조봉암뿐이 아니라 리승만의 정치적적수들중에서 여러명이 롤만의 개입으로 살아나기도 하였다.

반면에 롤만은 남조선통치권에서 리승만을 가장 치욕스러운 인간으로 평가하여왔다. 미국의 대조선정책관계자들로 하여금 리승만을 제거하는데로 정책선회를 하도록 유도하고 실지 여러차례의 강경한 움직임에로 부추겨왔다. 그는 이것을 남조선에서 미국의 리권을 지키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방책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리승만을 비호하는 행위에 대하여 신랄하게 공격하군 하였다.

리승만도 이에 대하여 알고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대사보다도 롤만을 더 무서워하였으며 어금이를 갈며 저주를 퍼붓기도 하고 기회가 생기면 적절하게 추파도 던지군 하여왔다.

리승만은 명절마다 비서를 시켜 후하게 희귀한 토산물을 보내오기도 하고 경무대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롤만은 아직 한번도 자기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경무대의 대문안에 들어선 일이 없었으며 그가 보내오는 토산물때문에 리승만에 대한 평가보고를 수정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의 사이에 조봉암과 버드가 서있으므로 해서 최근년간에 서로 소리없는 불화와 암투가 더 심화되여왔다.

《하, 죽산선생님도 기이한 생각이 드시는 모양이군요. 좀더 꼬집어 말한다면…》

롤만은 실눈을 해가지고 조봉암을 능청스럽게 쳐다보았다.

《뭐, 저한테 미안해할것은 없습니다. 나의 추방은 죽산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된 조봉암반대세력의 합작놀음입니다.》

롤만은 조봉암이 내미는 차잔을 받아 한모금 마시고는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내게서 시작되였다구? … 그러니 이 조봉암과 진보당존재와 관련한 롤만선생의 량심적인 주장이 문제가 되였다는거요?》

《이를테면…》

롤만은 자기가 소환명령을 받기까지 치르게 된 모해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다.

올해 여름부터 한 미모의 중년녀인이 접근하여왔다. 서울의 어느 호텔에서 일하는 녀성이였다. 미국영주권을 희망한다는것이였다. 그것을 위하여 우선 동양계의 이주민들이 밀집되여있는 로스안젤스에 다녀오도록 입국사증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영주권관계는 령사부에서 맡아본다.

녀인이 제출한 증빙문건을 연구하여보니 여러가지로 문제점들이 있었다. 우선 서울에는 그가 아직 리혼도 하지 않은 남편이 살고있었다. 미국에 영주할수 있는 담보사항도 갖추어지지 않고있었다. 미국에 영주하자면 미국에 배우자가 있거나 가족이 있어 초청장을 받아야 한다. 그게 없다면 과학계에서나 문학예술분야에서 뛰여난 실력과 실적이 있어야 한다. 그것마저 없다면 120만딸라이상의 저축금을 가지고있어야 한다. 여러번 문건을 기각시켜 돌려보냈는데 그 녀자가 그냥 집요하게 다가들었다.

어느날 하도 조르기에 그가 일하는 호텔에 가서 그 녀자가 차려준 식탁에 앉게 되였다.

어찌된 영문에선지 식탁에서 잠에 취해버리고말았다. 다음날 호텔방에서 깨여나고보니 그의 옆자리에는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그 녀인이 잠들어있었고 자기의 몰골도 망측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이것이 자기를 나꾸어보려는 그 어떤 함정이 아닐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앞서서 서둘러 옷을 걷어입고 령사부로 돌아갔다.

며칠동안 그 녀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러내는 사람도 없었다. 저으기 어수선한 속에서 지내는데 일은 기어이 터지고야말았다.

다울링이 어느날 전화로 즉시 자기 방에 오라고 성난 어조로 이르고는 전화를 끊어버리였다.

다울링은 그가 자기앞에 와서 앉자 인차 책상서랍에서 여러장의 사진을 꺼내여 내밀었다. 사진들에는 롤만과 그 녀자가 섞인 어지러운 잠자리가 찍혀져있었다.

롤만은 머리끝까지 더운 피가 솟구쳐올랐다. 앞뒤전말이 순간에 짐작되였다. 이것은 분명히 특무기관이 저지른 모략이다. 한 인간을 죄를 씌우고 그를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파멸시키려고 할 때면 흔히 모략기관들이 이따위 미인계로 추행을 만들어내는것이다.

《이건 모략이요! 인신모독이요! 비렬한 놈! 더러운 자식!》

롤만은 대뜸 눈앞에 모략과 간계로 일생을 어지럽혀오는 버드대좌의 하마같은 상통부터 떠올라 불을 토하듯 줄욕을 채찍처럼 갈기였다.

롤만은 온몸의 기운이 발밑으로 쭉 빠져나가는것을 느끼며 자기의 머리를 두손으로 부둥켜잡고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롤만! 네가 함정에 빠졌구나! 열두해의 복무를 이렇게 비참하게 끝내다니! … 어휴-》

다울링은 매사에 그리도 자신만만하고 의연하던 인간이 단 한번의 타격에 완전히 넋이 빠지고 일조에 잦아내리는 처참한 모습에 다소 쥐눈곱만 한 동정이라도 생겨난듯 입을 쩝쩝 다시다가 랭정하게 설명하였다.

《현지수사기관은 우리 대사관에 항의각서를 보내여왔습니다. 당신이 자기의 외교적직권을 람용하여 자기네 사람을 이렇게 유린하였으므로 법적 및 도덕적책임을 져야 한다는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이 서울의 언론에 새여나가지 않도록 해줄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대신 그것을 담보로 우리측에서도 응당한 대책을 취하겠다는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추방인가요?》

롤만은 인차 랭정을 회복하고 침착하게 물었다.

《아니… 나는 외교동료로서 그리고 10여년동안 이곳에서 자기 사명을 비교적 근면하고 유감없이 수행한 당신의 공로와 인격을 고려하여 본인의 요구에 따르는 국무성의 소환이라는 명분을 세우려고 합니다.》

《흠, 당신의 그 선의에 감사를 드립니다. 헌데 당신은 종주국의 최고감독관으로서 현지의 한 기관이 미국의 공무원을 감히 대상으로 벌린 이 너절한 날조극을 파헤치고 관계자들과 관계기관을 응징할 필요는 느끼지 않습니까? 이것은… 분명 나에 대한 도발이고 모략입니다. 이와 함께 미국을 상대로 한 도발입니다. 정치적인 간계입니다. 나는 그 함정에 빠졌을뿐입니다. 그 함정은 보다 큰 힘에 의하여 생겨났을겁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롤만은 사태의 본질과 전후사연을 이미 짐작한지라 리성을 되찾고 여유작작하게 자신을 옹호하고 주장을 세웠다.

이 사건에는 반드시 자기의 존재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미국의 특수기관의 마수가 뻗쳐있을것이다.

어찌 보면 이 여우같은 놈팽이도 관여하였을지 모른다.

리승만이 제아무리 심술궂고 밸통이 드센 두상이라 하지만 감히 미국인을 건드릴수 있는 엄두는 내지도 못할것이다.

그러나 다울링은 애초에 사리가 정연한 롤만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롤만의 예리한 눈초리를 싸늘하게 대하며 얼음같이 차디찬 어조로 대답하였다.

《당신의 흥분이 리해됩니다. 심심한 동정과 유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대사의 직권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당신과 미국의 명예를 어지럽히는 추문이며 명예롭게 빠져나가기 어려운 추문입니다.

내가 만약 해당 기관을 문초한다고 합시다. 벌써 그자체부터 언론에 새여나가 새라새로운 바람새가 되여 밟아끄면 될 불씨를 부채질하게 될것입니다. 파헤쳐놓아야 당신이나 미국의 도덕적영상이 흐려질뿐입니다.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그 이상으로 도와줄수는 없습니다.》

《좋습니다. 아마 다울링대사도 내가 서울땅에 있는것이 불편스럽겠지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울링이 롤만이 던진 창에 발꿈치를 찔리운듯 화닥닥 놀라 어성을 높였다.

롤만은 그의 거동을 예리하게 쏘아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분명 버드가 꾸민 모략입니다. 그가 아니라면 도대체 현지의 어느 기관이 감히 미국인을 건드려볼 엄두나 내겠습

니까.》

《롤만씨! 당신은 론리가 정연하며 명석하고 무게있는 정치분석가로, 학자로 신뢰를 받고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부정한다면 근거를 내놓으시오! 바로 이와 같은 물질적증빙자료를 내놓으시오. 여기서 빠져나갈수 있는 자료를 말이요.》

다울링은 사진장들을 흔들며 짐짓 엄하게 롤만의 말을 일축하였다. 그는 역시 신경줄이 소힘줄같이 질겨먹은 외교관이였다.

롤만은 은근히 마음 한구석으로 다울링에게 한가닥의 기대라도 걸어보았던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벌어진 흉계가 더욱 명백하게 실감이 갔다. 자기에게 가해진 명예훼손과 추방놀음은 바로 버드와 리승만일파로부터 시작되고 다울링까지 끼여든 흥정의 산물이 틀림없다. 아니, 다울링은 끼여든 정도가 아니라 흉계의 장본인일것이다. 제놈의 행동이 구속을 받게 되자 서슴없이 버드를 내세워 모략을 꾸며냈을것이다.

그는 사태에 대한 분석이 명백해지자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직서를 써던지고 대사의 방을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후 다울링이 찾아서 가니 국무성의 소환지시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

롤만은 이러한 흑막의 비화를 숨김없이 말해주고는 자못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조봉암을 지켜보았다.

《일은 그렇게 됐구만. 그러니 이것은 이 조봉암에게서 위력한 후견인을 제거한다는거지요?》

《무슨 내따위가 위력한 후견인까지 되겠습니까. 허지만 조봉암지지자제거라는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고 심각성이 있는것입니다.

지난해 대전에서 있은 선거선전때 반대파의 음모가 있을것이라는 통보를 받지 못했습니까?》

조봉암은 기억을 더듬었다.

《받았지요. 련이어 긴급통보를 받았습니다.》

《올해에도 지방당조직결성을 저지시키려는 음모들에 대해서는 사전에 통보받았습니까? … <쌍-프>작전비밀문건을요?》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자료들은 롤만선생이…》

《예, 너무 급히 전하고나서 은근히 걱정했는데 정확히 전달되였군요.》

《지금까지 난 그 정보제공자를 찾지 못해 죄스러웠는데 결국 롤만선생이였군요. <사모하는 민중의 벗>이라고만 자기 신분을 밝히군 하니 알 재간이 있더라구요.》

《<사모하는 민중의 벗>이라… 그럴듯 한 호칭입니다. 참 재미있고 기발하고 전투적인 사람들입니다. 난 동향료해라는 합법적인 공간을 리용하여 여러 계층의 인물들과 정상적으로 접촉하여왔습니다. 그들 역시 자기들의 리해관계로부터 나를 리용하고싶어 가까이 다가서는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들중에서 한두명은 선생님과 일정한 선을 유지하고있다는것을 감촉하고 이따금 요긴하다고 인정되는 자료들을 그들에게 흘려주군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언제나 신속하게, 책임적으로 선생님에게 전달하군 하였군요. 참, 그럴듯 합니다.》

《그게 누구들입니까?》

《허허, … 그 사람들이 죽산선생님에게까지도 자기 얼굴들을 감추고있는데 제가 함부로 그걸 벗기면 되겠습니까? 사실 나도 그 사람들이 어느 갈래인지 딱히는 모릅니다.》

《아하, 그렇군요. 좋습니다. 더 묻지 않겠습니다.》

조봉암은 롤만이 관계하여온 사람들의 신원을 지켜주려고 하자 더 캐여묻지 않았다. 역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다.

조봉암이 대범하게 넘어가자 롤만은 다행스러운듯 큰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죽산선생님, 난 그들과 몇번 접촉하면서 이 나라의 장래가 결코 어둡지 않다는 생각을 하군 했습니다.

조선사람들의 기질이 나는 퍽 마음에 듭니다. 지능계수도 썩 높습니다. 물론 리승만이를 내놓고 말입니다. 허허…

제가 할 이야기는 이제부터입니다.

나는 죽산선생님이 걱정스럽습니다. 선생님께서 이제는 진보당까지 굳건하게 해놓았으니 다음기의 대통령선거는 문제없고 민중세상을 만들어내리라는 선생님의 꿈도 실현될수 있게 되였습니다. 조선의 통일에도 희망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참 문제거리로 떠올랐습니다. 미국은 이것을 무서워하고있습니다. 죽산선생의 위세에 겁을 먹고있습니다. 그래서 다울링까지 그 망종같은 버드의 손을 들어주게 된것입니다.

나의 추방놀음은 어찌 보면 죽산선생님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려는 새로운 공세전의 서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 그래요? … 그게 옳을듯싶습니다.

그런데… 난 지금까지 한번도 미국에 주먹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지금까지 나를 밀어주지 않았습니까. 당신네가 나더러 영어공부까지 하게 한것은 뭐란 말이요?

물론 롤만선생이 나의 창구역을 훌륭하게 맡아주었기때문이지요.》

《예, 옳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은 죽산선생님을 보호하여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안하무인이여서 미국의 국제적체면도 크게 손상시키고있는 리승만을 견제하자면 도전자를 내세워 경종을 울려주어야 했기때문이였지요.

나는 변두리에서 미국이 이러한 립장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하였고 그를 지금껏 견지하도록 촉매적인 역을 맡아왔지요. 나는 이것이 미국의 국익의 견지에서도 필요한것이라고 확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리승만에 대한 견제로 한정되여있는것이였습니다.

문제는 선생님의 힘을 그네들이 이제야 비로소 옳게 본데 있습니다.

선생님은 진보당추진위원회라는 매우 연약한 날개를 가지고도 대공에 솟아올랐지요. 오늘에 와서는 그야말로 사람들을 하나의 기둥에 묶어세울수 있게 되였습니다.

미국은 죽산선생님과 진보당의 위력을 투시하게 되였습니다.

그 위력과 미래에 겁을 먹기 시작하였지요.

제 이제는 관복을 벗기운 야인으로서 있는 그대로 고백한다면 버드는 당신과 진보당에 대한 말살공작에서 매번 실패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수를 쓰려고 할것입니다.

그런데 나야말로 그대로 두고서는 저들의 흉계를 감행할수 없는 암적존재지요. 난 미군방첩대에 있는 정보국계통의 비밀요원들을 통하여 그놈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고있었습니다.

버드는 내가 죽산선생님에게 위험신호를 보낸것을 육감으로 짐작하고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니 결국 덫을 놓고 기다리다가 다울링과 모의하고 그쪽으로 나를 유인하여갔던것입니다.

저의 고백을 어지러운 추문에 대한 변명으로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롤만은 이렇게 사태의 추이와 본질에 대하여 선명하게 그려나가다가 론점이 자기에게로 돌아오자 열적은 미소를 지었다.

그 솔직하면서도 순박한 모습에 조봉암은 명치가 쓰려왔다.

그래서 롤만의 손목을 흔들며 위로하였다.

《우리가 한두해 사귄 사람들이요? 나는 언제나 롤만박사를 한전호가에 나선 전우로 신뢰하고 존중하여왔소.

더러운 놈들의 모함을 가지고 자신을 학대하지 마시오.

롤만박사는 내가 속을 터놓을수 있는 유일한 미국동료요, 동지이지요. 난 언제나 롤만박사의 지원을 받을 때마다 해방후 인천해수욕장에서 함께 <인터나쇼날>을 부르던 일을 생각하군 하오.》

《예, 저도 그때 일을 종종 생각합니다. 우리는 참말로 인터나쇼날로 사귀고 인차 동료로 되였던것 같습니다.》

《옳소. 롤만선생은 지금도 <인터나쇼날>을 부르고있소. 인터나쇼날의 리상으로 우리의 민중사회건설을 변함없이 지지하고 도와왔소. 거세인 솜씨로 압박 부시고 제것을 찾자면 풀무를 불며 용감히 두드려라 쇠가 단김에…》

조봉암이 저으기 감회에 젖어 《인터나쇼날》노래의 가사를 몇구절 외우자 롤만이 열정적으로 프랑스말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두사람은 두주먹을 맞잡고 흔들며 장쾌하게 웃었다.

《내 어린시절에 로년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자장가처럼 들려주군 했답니다.》

《멋진 노래이지요. 당신네 조상들이 인류에게 참으로 훌륭한 노래를 선물해주었습니다.》

《난 다만 당신네의 위업을 도와주는것으로 그 노래를 남기고 묻힌 조상들의 의로운 혼백을 지켜주고싶었던것입니다. 사람이 평생에 무엇인가 뜻을 세우고 사는것이 얼마나 고결합니까. …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 아마 우리 처가 기다릴겁니다. 요즈음은 무척 불안해하고있습니다.

버드는 내가 지금 죽산선생님과 같이 앉아있는것도 알고있을겁니다. 뭐, 두렵지는 않습니다. 할 일을 하는거지요.

제가 꼭 하고싶은 말이 있습니다. 저는 죽산선생님의 거취문제에 대해 생각되는게 있어서 이렇게 조용한 기회를 갖고싶었습니다. … 선생님은 자기의 운명을 두고 무슨 예감이 없습니까?》

롤만의 심각한 물음에 조봉암은 신중해졌다.

《자기 운명에 대한 예감? … 하, 갑자기 그건…》

《솔직히 말씀하여주십시오.》

롤만이 진지한 어조로 부탁하였다.

《좀 떨떨해지는구만. 난 락관주의자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난 평생토록 이렇게 무수한 장애를 넘어왔소.》

《현실은 현실이지요.》

《옳소.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지요. 내 운명은 지난 시기에도 화려하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평탄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난 백병전이 벌어지고있는 싸움판에 선생님을 홀로 남기고 저만 살길을 찾아 도망가는것 같아 괴롭습니다. 매우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듭니다. 선생님, 우리는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여야 합니다.

우연에, 행운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는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구나 죽산선생님처럼 사명감이 큰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조봉암이라는 과녁은 이제는 크게 로출되여있고 그 과녁을 노리는 총구가 사면팔방에서 신호를 기다리고있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미국으로 떠납시다. 제가 요즈음 수십번 굴려온 생각입니다. 망명객으로서 얼마든지 고국의 운동을 지도할수 있습니다.

지난 력사를 돌이켜보면 세상의 방향각을 돌려세운 유명짜한 정객들이 망명지에서 국내의 정치운동을 지도한 사례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롤만선생!》

조봉암은 한무릎 바투 나앉으며 절절한 어조로 부르짖는 롤만의 제안에 우선 속이 달아오르고 눈부리가 찌르르해왔다.

《마지막까지 나에게 사심없는 정을 주어 정말 고맙소. 나는 롤만선생과 같은 지인을 둔것을 평생의 복으로 여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모스크바와 일본, 만주땅과 저 상해, 중경을 구름처럼 떠다니며 망명객의 피눈물을 많이도 흘려본 사람입니다. 나는 1939년에 감옥에서 풀려나오면서 죽어도 살아도 나의 조국땅에 발을 묻고 한생을 보내리라고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뜻에 머리가 숙어질뿐입니다.

죽산선생님, 지금 이 땅을 둘러보면 민주나 자유란 말은 잠꼬대나 같습니다. 선생님의 비극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정치의 불모지에서 기름진 열매를 따고저 애쓰는데 있지 않을가 감히 생각하게 됩니다.

선생님, 절대로 현실을 무시하지 말아주십시오. 모든 일에 주객관적요인이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가요?》

《아니, 롤만선생! 때를 기다리기만 해서야 변혁을 위해 나선 자세가 못되지요. 때가 오기를 바다건너 가서 기다리는것은 너무도 량심이 없는 일이지요.

척박하기 그지없는 토양이기에 그것을 비옥하게 가꾸어야 하지요. 근실한 땀을 바쳐야 하고 필요하다면 피와 생명도 던져야 하는거지요.

력사란 선각자들의 수난으로 수놓아지기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집권자들이란 항용 력사의 반동이 되여 시대를 떠미는 일체 세력의 적으로 되기때문입니다.

진리에 눈뜨고 정의에 주먹을 든 인간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아직도 노예시대라는 암흑기에서 헤매고있을것입니다.

꼼뮨용사들의 피가 빠리의 포도를 적시지 않았다면 의회제공화국이라는 프랑스의 오늘이 없을것입니다. 맑스나 레닌과 같은 선각자들이 없었다면 10월혁명이 없었을것이고 오늘의 사회주의성새들이 솟아오르지 못하였을겁니다.》

《죽산선생님은 모든걸 예견하고 각오하고계시는군요. 참 기막힌 현실입니다. 제가 스탠포드대학을 마친 후 무직건달로 방황하다가 에스빠냐전선으로 떠나간 아버지의 친구인 테일러의 서기가 되여 서울에 온지 10년도 지났습니다. 헌데 이 땅에 달라진것이란 없습니다.》

《아니, 많이 달라졌지요. 달라진게 없다면 리승만일파의 속물적근성입니다. 이게 문제지요. 대통령이란 민중의 존엄이고 영예의 상징이지요. 헌데 리승만은 안으로는 독재를 하고 밖으로는 사대를 하고있으니…》

《예, 옳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 북에 대하여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북이요? …》

《미국에 피난처를 찾기 싫다면 그쪽에 가서 얼마동안 피해있다가 돌아오시면 어떻습니까?》

《음…》

조봉암은 커다란 충격을 받아안았다.

그는 창문가로 다가가 바깥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맑고 끝간데 없이 창망한 밤하늘이 시원하게 열려있다.

달은 이제 헤염쳐가야 할 아득한 대공에 선듯 나서기가 서슴어지는듯 아직도 동천가에서 쉬고있는 모양이다.

다만 무수한 뭇별들만 휘영청 들린 검푸른 하늘을 비좁도록 꽉 채운채 순간도 졸지 않고 유난한 빛을 뿌리며 바글대고있다.

북쪽으로는 마치도 희벗한 넓은 물결마냥 은하수가 비껴가고 삼태성이 나란히 앉아 소곤소곤 정담을 속삭이는듯싶다.

불현듯 어데서 나타났는지 크지 않은 구름장이 아기별들의 신비로운 노래가락을 다 싣고가는듯 은하의 물결을 따라 북쪽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너무도 거침없이, 너무도 태연스럽게 북쪽하늘에 들어서는 구름에 하염없는 눈길을 보내던 조봉암은 부지중 길게 한숨을 내그었다.

그 하늘밑에 그리움의 땅이 있다. 힘겨울수록 그리워지고 자꾸만 가보고싶어지는 곳이다.

동방일각에 무릉도원을 만들고저 령수로부터 민중모두가 뜻과 힘을 합치고 정을 나누며 한식솔로 살아가는 땅, 그래서 여기 남녘에는 희망과 미래를 주며 신념을 북돋아주는 땅…

아, 저 땅마저 없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고 래일이 있으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망할것이냐. 우리에게 믿고 의지할 곳이 있다는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복인가. …

롤만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조봉암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봉암이 홀리운듯 바라보는 은하수가 뻗어간 북쪽의 하늘로 눈길을 모았다.

《기차로 간다면 반나절 길이지요. 아니, 한두시간이면 넘어서는 길이지요. 떠난다면 산이 높아 넘지 못하겠습니까, 강이 깊어 건느지 못하겠습니까? 그까짓 철조망이 가로막는다고 갈길을 못 가겠습니까? 가보고싶소. 정말 가고싶소!》

조봉암은 통탄해하였다.

《그렇다면 뭐이 문제될게 있습니까?》

《음… 솔직한 말로 나도 이따금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난 정말 그쪽에 가고싶습니다. 더두 말고 한달만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서울일판을 벗어나서 북의 하늘밑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자유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고싶습니다.

내가 인식착오로 한때 북과 덧난게 있었지요. 나쁜 놈들때문에 빚어진 일이긴 하지만 내게도 문제가 있었지요.

난 북에서 단독선거반대를 열창할 때 나름으로 범의 굴에 가야 범을 잡는다며 이른바 3의 길을 찾아 장관노릇도 하고 <국회>에 들어가 부의장노릇도 했지요. 허나 그건 과거입니다.

난 자기의 행동과 민족헌신의 리념을 가지고 과거를 속죄하였고 그네들도 조봉암이 인터나쇼날의 리념에 충실하려고 애쓴다는것을 알고있을것입니다. 물론 나는 량심적으로 말한다면 해방직후부터 공산주의자들의 대오에서 물러섰고 아직도 그 순결한 대오에 발을 들이밀지 못하였습니다.

롤만선생, 선생도 일전에 북녘땅의 령수에 대하여 말한바 있지요?》

《예, 그건 저의 진심으로 되는 례찬이였습니다. 그분의 사상과 리념, 인격과 덕망… 그분의 정치리상을 구현하고있는 북의 사회주의…

현 단계에서 그것은 인류의 리상으로 되고있다고 난 자신있게 말할수 있습니다. 전대미문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페허만이 남았던 평양은 100년이 걸려도 다시 일떠서지 못하리라는 우리의 예측을 보기 좋게 후려갈겼습니다. 전쟁이 끝난지 고작해야 서너해가 지났는데 북은 벌써 재더미를 털고 빈궁과 락후로부터 해방되였으며 자기식의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사회의 리상적인 모델을 완성하여가고있습니다. 참 거대한 기적이지요.

이것은 북 령수의 사상과 령도의 비범성을 보여주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나는 이미 <북조선의 정치, 경제, 제도의 특징과 전망>이라는 론문에서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였습니다. 나의 론문이 워싱톤정계와 학계에서도 꽤 읽히고있다고 합니다.

북에 대한 정확한 실태보고를 위해서 시작된 연구를 통하여 난 고백합니다만 그분의 숭배자로 되였습니다.

난 소통이 되는 워싱톤의 모사들과 조선문제를 론할 때면 앞날이 없고 부패한 리승만과 놀지 말고 세계적인 거인으로 떠오르고있는 북의 령수와 미래의 정치구도를 짜보라고 권고하기도 합니다.

철들지 못한 애들을 데리고 놀기는 쉽고 재미도 나지만 친구로 사귈수는 없다고 박아주기도 합니다.

우리 집에 가면 그분의 로작들이 서가에 다 있습니다.》

《아하- 롤만선생은 여러가지로 행복합니다.

무릇 인간이 위대한 사상과 고결한 덕망을 따르는것은 아름다운것이지요. 그리고 자기를 매혹시키는 스승을 마음속에 모시고사는것은 행복이지요.

우리 민족이 세상의 공인을 받는 희세의 영걸을 모시게 된것은 정말로 하늘이 준 복이랍니다.

난 남 다 잠든 한밤중에야 레시바를 끼고 이불속에서 북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사람들과 마음속의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나의 속죄를 받아달라고, 어지러운 과거를 백지화하여달라고 빌기도 하지요. 그러면 그네들은 흔쾌히 손을 잡아주지요. …

아하, 우리 자식들에게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내심을 미국의 동료에게 고백하다니… 참, 우린 오늘에야 진짜 벗으로 된것 같군요.》

조봉암의 두눈에 환희가 넘쳐흐르고있었다.

《하하, … 난 원래 조봉암선생님을 자기의 활동에 필요한 대상인물로 리용하고싶어 사귀였는데 이렇게 훌륭한 스승으로 따르게 되였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난 미국에 돌아가도 이 땅을 잊지 않고 이 땅의 훌륭한 주인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겠습니다. 헌데… 우리 이야기가 자꾸만 길어집니다. 시작점으로 돌아갑시다.

그렇다면 몇해라도 료양삼아 북에 넘어가 때를 기다려보십시오. 불원간에 반대파들의 칼부림이 있으리라는것은 피할 길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저와 함께 미국으로 가시지 않겠다면 38도선을 넘으십시오. 그것도 한달, 아니 한주일안으로 말입니다. 더 지체하면 모든걸 잃게 됩니다. 다시 권하건대 우연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롤만이 다시금 조봉암의 팔을 잡고 안타깝게 흔들었다.

조봉암은 의연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철함앞으로 다가간 그는 문을 열고 거기서 자개함을 꺼냈다. 자개함속에서 강화섬사람들이 보내온 련판장을 조심히 들어내여 책상우에 정하게 펴놓았다.

조봉암은 롤만에게 갈린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을 주었다.

《이게 내 발목을 붙잡는다오.》

조봉암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롤만이 책상앞으로 다가와 명주필에 씌여진 글발을 소리내여 읽었다.

《강화섬은 죽산을 지지한다! 죽산은 다시 일어나 기어이 민중세상, 통일세상 만들어주소서!》

《그때 강화섬선거본부는 지역선거자의 9할이 리승만에게 지지표를 바쳤다고 발표했지요. 그게 분해서 그 사람들이 이걸 들고 나를 찾아왔던거요.

롤만선생, 그러니 이 불쌍하고 어질고 바라는 마음이 지극한 사람들은 어찌하고 내 혼자 편하자고 이 땅을 훌쩍 떠나갈수 있단 말이요?!》

《!》

롤만은 명주필에서 놀라움과 감동의 눈길을 떼지 못한채 한동안 아무말없이 서있었다.

롤만은 조봉암의 가슴속 괴로움이, 그 불같은 마음이 헤아려져 고개를 끄덕이였다.

《선생님께 한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저 합니다.

이곳 정치가들은 미국을 너무 믿지요.

감히 선생님께 충고를 드린다면 미국을 믿지 마십시오. 미국은 어느때나 자기의 국가적리익과 독점재벌들의 리해관계를 떠나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에 와서 미국의 리권을 위하여 충실하게 복무하여온 자신의 어제날에 대하여 랭정하게 재검토를 하고있습니다.

이 롤만은 어떤 인간인가? 미국이란 또 어떤 나라인가? 참으로 내가 자기의 두뇌와 피와 생명까지 바쳐도 후회가 없을 소중한 나라인가? 미국을 위해 복무한다는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

유감스럽게도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미국이 버릇처럼 외우는 <자유>요, <민주>요, <정의>요, <진리>요 하는것들은 저들의 리권을 지켜내기 위한 미사려구에 불과할뿐입니다. 절대로 현혹되지 마십시오.

지금 미군방첩대장 버드가 선생님과 진보당압살을 조종하고있는데 달랑한 계급장을 얹고 다니는 그놈 주제에 어방있는짓입니까?! 헌데 문제의 심각성은 지금 그놈이 백악관이나 미군부의 립장을 대표하고있다는데 있습니다.》

조봉암은 롤만의 솔직한 조언에 속이 화끈해왔다.

참으로 이 사람은 어려운 충고를 해주고있다. 그의 고민이 리해되였다. 측은해지기도 하였다.

허나 그의 앞날에 무엇인가 기대가 생기기도 하였다.

언제나 자기에 대한 자부심으로 당당하던 롤만이 결코 짧지 않은 십여년의 자신의 행적에 쓰디쓴 미소를 던지며 걸어온 길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음미하고 자기에게 경종을 울려주는것이 자못 감동적이면서도 이상야릇하게 느껴졌다.

조봉암은 그의 손목을 꽉 틀어잡았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속마음의 종심을 아직 다는 보지 못하나 그의 가식이 없으면서도 단순한 직언이 고맙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해서 미소를 지었다.

《롤만… 난 정말 당신이 마음에 드오. 정말 헤여지기 싫소. 한데 그 어렵게 준 충고에 수정을 가합시다. 미국이라 하지 말고 미제, 미제국주의라고 합시다.

나는 언제 한번 미제국주의를 믿어본적이 없소. 앞으로도 미제국주의에 대하여서는 티끌만치도 환상을 가지지 않을것이요. 오랑캐는 역시 오랑캐니깐.

량해하여주오. 난 롤만선생을 미제국주의에 포함시켜 생각한적은 없었소. …

우리의 싸움은 종당에 가서 미제국주의와의 승부전을 벌려놓는것으로, 이 땅에서 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미제를 몰아내는것으로 끝나게 될거요.

그러나… 이 조봉암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부터 시도해야 할 이 땅의 정치인이요. 미국의 눈짓 한번에도 모습을 바꿔야 하는, 미국의 속국이라는 현실을 무시할수 없는 미점령국의 백성이란 말이요. 미국의 비위를 거슬려놓아서는 아무것도 성취할수 없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식민지백성의 고뇌를 리해하여주기를 바라오.》

롤만은 조봉암의 대답의 참의미가 짚이우지 않아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였다.

대의를 위해 살아가는 투사의 진짜모습앞에 자기가 서있다는 생각으로 숙연하여졌다.

그러나 롤만은 이대로는 그냥 물러설수가 없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망명문제에로 말머리를 돌려보았다.

조봉암의 태도는 더욱 견결하였다.

《나는 이 땅에서 나의 민중과 더불어 살다가 죽겠소. 나도 사실은 시시각각으로 조여들고있는 올가미를 의식하고있소. 하지만 아직도 내 조국은 나를 필요로 하고있는것 같소.

롤만선생,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소!》

롤만은 일생을 조국에 바쳐왔고 이제 또 기약할수 없는 여생을 깡그리 겨레를 위해 불태우고저 하는 조봉암의 의지에 속이 달아올랐다. 그것이 부럽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니 태여날 때부터 조국이라는 개념이 혼미해있었다. 더구나 민족이나 겨레라는 인식은 모르고 살아왔다. 지금에 와서는 미국이라는 땅덩어리에 조국이라는 숭고한 의미를 달아주고싶지 않다. 자기 겨레, 자기 민족이라고 불러줄수 없다. 그러면 내 조국은 어데일가?!

참으로 자기를 바쳐 후회가 없을 그런 신성한것을 안고 사는 인간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고결한것인가. 이 인간의 지향과 넋은 얼마나 부러운것이냐! …

롤만은 지금도 조봉암의 앞에서 뜨거운 감동과 함께 바닥없는 고민의 심연에 휘말려들었다.

그들은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며 쓸쓸하게 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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