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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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은 전라남북도를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연경이와 함께 신창균이 동행하였고 경무대에서 파견되여온 경호원 다섯명과 윤기중이 특별히 신변호위를 위해 붙여준 여러명의 청년들이 따라다녔다.

신당동집에 도착하니 일행을 앞질러다니는 우달수와 대문지기로 선발된 청년들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경무대에서 온 경호원들은 집의 대문가와 후면에 초소를 만들고 전화까지 가설하여놓고 경비업무를 담당하였다. 자원봉사자로 온 고려대학교의 청년들이 바깥대문과 중대문, 안대문을 각각 지키고있었다.

《선생님, 무사하십니까?》

자원봉사대청년들의 책임자인 고려대학교학생회 부회장청년이 동료들을 대표하여 조봉암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럼, 무사하구말구.》

조봉암이 이렇게 팔다리를 흔들어보이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런데 저 상민이가…》

그는 뒤에 서있던 한 애젊은 청년의 모자를 벗겼다.

거기에 붕대로 처맨 상처자리가 보였다.

연경이가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수원공설운동장에서 연설하시는데 돌멩이가 날아왔지요. 그걸 상민씨가 막았답니다.》

《히야, 상민이가 영웅이 됐군. 우리 영웅을 춰올리자!》

부회장청년이 소리치자 청년들이 달려들어 상민을 들어올렸다.

《아이고, 어지럽다. 내려놓으라구. 무슨 큰 무훈이라구 망신스럽게…》

상민이가 청년들의 손에 받들려 머리우로 둥둥 떠오르자 질겁해서 소리질렀다.

모두가 흐아흐아 즐겁게 웃었다.

청년들은 모두 고려대학교학생회에서 특별히 추천하여온 서민출신의 청년들이였다. 모두가 하나같이 공부도 잘하고 학생운동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경찰곤봉과 최루탄가스에 면역이 강해진 열혈의 청년들이다. 그중에는 태권도에 능한 청년들도 여럿이였다. 그들은 누구라 없이 조봉암을 희망의 빛으로 신봉하고있었다.

원체 청년학생들과 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대학교수진은 대체로 조봉암에게 큰 기대를 걸고 따르고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조연경이 학생회 역원으로 활약한바가 있는 고려대학교의 학생들은 선배의 아버지인 조봉암을 절대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번에 고려대학교학생회가 조봉암의 신변안전을 위해 자원봉사대를 발기하였을 때 수백명의 청년들이 저마끔 조봉암가까이로 오고싶어 앞을 다투어나섰다. 학생회간부들은 여러가지 까다로운 선발기준까지 정해놓고 엄격하게 인원을 선발하여 여기로 파견하였다.

그렇게 선발되여온 청년들이라 조봉암을 위함이라면 목숨도 기꺼이 바칠 마음으로 조봉암의 주변을 믿음직하게 지켰다.

그들이 한차례의 큰 싸움에서 승리한 군사들처럼 조봉암을 에워싸고 마당에 들어서는데 부회장이 연경에게로 다가왔다.

《누님, 나 좀 봐요.》

청년은 연경에게 하루사이에 들어온 편지들을 한묶음 넘겨주었다.

이런 편지들은 대체로 담너머에서 날아든다. 편지들중에는 조봉암을 지지하고 고무격려하는 심정이 실린것도 있고 조봉암과 그 가족들의 기를 죽이려고 갖은 악담과 협박을 늘어놓은것도 있다.

협박편지에는 짤막하게 이런 욕지거리들이 갈겨있다.

《죽산은 즉살하라!》

《공산당 조봉암, 너를 법의 이름으로 기어이 처단하겠다!

참전동지회 일동》

《이제 또 선거유세 나가면 산길에서 깜장콩알 세알씩 선사하겠다. 상이군인 ○○○》

《다시한번 유세때 리박사를 모욕하면 가족몰살 면치 못한다!》

연경이는 그런 편지들이 넘어올 때면 연신 코소리를 내면서 빡빡 찢어버리군 하였다.

연경이는 아버지가 가끔 들려준 정치가로서의 지론을 명심하고있다.

《도전세력이 없는 정치가란 허구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도전세력을 불허하는것부터 독재의 발상이다.

어느 시대의 그 어떤 정치가에게도 반드시 도전이 있기마련이다. 도전을 극복하고 도전세력과의 모순을 활용하는것이 정치가의 슬기이며 생존방식이다. 그렇다고 정치가란 도전세력을 무서워해서는 안된다. 도전세력의 비위를 맞추어 정치를 펴는것은 더욱 위험한 처세이며 자기기만이다.》

연경이 편지들을 대수롭지 않게 건성건성 넘기자 옆에서 처녀의 거동을 지켜보던 부회장이 자기가 쥐고있는 두통의 편지를 내밀었다.

《누님, 거 뭐 대체 그러루하니 그 다음 편지들은 봐줄게 없어요. 이 편지는 급히 대책을 세워야 할가봐요.》

한통의 편지봉투에는 《강》이라는 글자가 한문으로 크게 써있었다.

편지를 읽어가던 연경의 입가에 방긋 꽃같은 미소가 피여올랐다.

《아저씨가?! …》

편지를 보내온 강치부란 사람은 연경이가 어릴적부터 아저씨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였다.

《죽산형님께 드리나이다.

오늘 저녁 7시경에 우리 집사람이 찾아가니 연경이나 사위를 효녀다방에 내보내주십시오. 한번 찾아간즉 초소의 경호원들이 어찌나 말째게 구는지 명함조차 들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내가 자꾸 가면 안될것 같아 처를 보냅니다.

아무쪼록 귀체만강하시여 선거에서 이기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강.》

《우리 아저씨야요. 좋은 사람이예요.》

연경은 옆에서 자기를 지켜보는 청년에게 설명하고나서 다른 편지를 들고 겉봉을 훑었다.

거기에도 이름은 없었다. 다만 누런 룡 한마리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그림이 그려져있을뿐이다.

연경은 발신인의 정체를 대뜸 짐작하고 봉투를 막 구겨쥐였다.

《아, 읽어보세요. 최형은 저도 알아요. 읽어보시라는데두요.》

청년은 돌멩이에 감겨 날아드는 편지들을 일일이 다 검토하여 본지라 연경이가 무슨 사연에서인지 편지를 무시해버리자 아연해서 이렇게 각근하게 권했다.

연경은 며칠동안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무척 바쁘고 긴장한 일들을 겪어온지라 그사이 최금룡을 잊고 지내였다.

그런데 최금룡이 보내온 편지를 받아드니 속에서 두방망이질이 시작되고 왈칵 더운것이 목뒤에서 넘어왔다.

그래서 그 아릿한 감정을 썩둑 베여던지고싶어 일부러 편지를 구겨쥐고말았는데 청년이 다심하게 권하니 보고싶은 호기심이 부쩍 동하였다.

절교를 선언해놓기는 했어도 그리워지는 정은 그렇게 썩둑 잘라던질수는 없었던 처녀였다.

뛰여가듯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눈에 익은 활달한 글발들이 춤을 추며 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연경, 오늘 저녁 8시에 버티고개마루에서 기다리겠소. 꼭 만나야 해. 시간을 잊지 마오. 정각 8시!》

연경이는 의아해졌다. 이 청년이 어떻게 최금룡의 편지라는것을 넘겨짚을가?

《이걸 누가 보내왔다구요?》

《최금룡형이지요.》

《우리 집에 직접 왔다갔나요?》

《아니요. 경호원들이 들여놓나요?》

경호원들은 경호라는 구실을 내들고 진보당의 특정인물들과 자원봉사대청년들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대문안에 들여놓지 않는다. 윤기중과 경비질서를 협의할 때 제기되여 그대로 눌러졌는데 연경이도 그게 좋을듯싶어 그대로 해온다. 반대파들이 무리지어 집주변을 돌거나 담벽을 기여올라 집안에 대고 돌을 던지고 메가폰으로 악담질을 하던것이 제지되여 좋기는 한데 지지자들의 방문까지 몰밀어 차단해서 걷어치우라고 조봉암이 여러번 이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편지가 최금룡씨가 보내온것이라는것을 알았나요?》

《음, 그건… 아는 수가 있지요.》

청년은 히쭉 한번 웃고는 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연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들고 안대문을 열었다.

청년은 고려대학교학생회에서 행동대를 책임지고있다고 한다. 행동대에는 가장 진취적이며 선봉적인 학생들만이 들어가있다는것을 연경이는 잘 알고있었다.

조봉암의 방에서는 앞서 와있던 진보당 선거위원장인 서정후와 윤기중간사장이 조봉암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연경이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도로 밖으로 나와 경호에 동원된 젊은이들의 총화모임에 참가하였다.

총화모임이 제법 날이 서고 토론도 들을만 하다.

그들은 지방선전에서 자기들이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을 갈라내여 서로 칭찬도 해주고 따끔하게 비판도 한다.

상민이가 조봉암에게 날아드는 돌멩이를 이마로 받은것이 크게 평가되였다.

반면에 후면감시와 규찰을 담당했던 청년들이 집중비판을 받았다. 특히 수원농대학생회에서 동원시킨 학생규찰대를 그들에게만 방임하고 장악하지 못함으로써 수원공설운동장의 선거선전뒤끝에 혼잡한 정황이 조성되였으나 제때에 제압하지 못했다고 그들과의 사업을 맡은 청년이 호되게 추궁을 받았다.

모임에 참가한 신창균과 연경은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그들은 학생들의 높은 조직성과 전투성에 속으로 크게 놀라고 감심되였다. 하나같이 오달차고 쟁쟁하고 미래가 촉망되는 젊은 투사들이다.

청년들의 모임이 끝나자 신창균은 연경이와 같이 조봉암의 방으로 올라갔다.

조봉암의 방에서는 당의 중진들이 조성된 정세와 당면한 전술적인 문제를 론의하고있었다.

서정후가 다소 격한 어조로 열변을 토하고있었다.

《죽산! 고병직의 처사가 여전히 불손하기 그지없소. 오늘 내가 찾아가 한시간이나 대문앞에서 롱성을 하다가 만났소. 민주당이 립장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도 우달수후보의 사퇴를 다시 고려할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는데도 요지부동이였소.

난 일단 야당공조가 깨진 사발이 된 이상 우리도 민주당에 강하게 대응할것을 주장하오. 우리도 소리를 내야 하오. 우리 당이 약골이 아니라는걸 보여야 하오. 우달수부위원장의 후보사퇴를 시급히 철회합시다.》

윤기중도 여러차례 민주당사를 다녀오면서 한껏 쓴맛을 봤던지라 목소리를 합쳤다.

《저도 다를바 없습니다. 그놈들과는 절대로 타협할수 없는 적아라는것을 저는 이번에 깨닫고도 남았습니다.

그놈들은 지금 우리 당에 대한 공격도수를 점점 더 높여나가고있습니다. 공조는 고사하고 완전히 적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서위원장님의 제안대로 이제는 진보당도 자기의 목소리를 낸다는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이상 저자들의 짓거리에 눈감고있으면 사실말이지 당의 영상이 정말 약골로 선거자들에게 전달될수 있습니다.》

조봉암은 그들의 열기띤 주장을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그는 윤기중이 가져온 《동아일보》의 조간판을 다시 훑었다.

거기에는 이날 아침 리승만이 자기의 공보실을 통하여 발표한 담화문이 실려있었다.

《금년선거는 강력한 민주주의로선을 택하느냐, 공산주의에 굴복하는 유화통일협상로선을 택하느냐 하는 량자택일이다.

북은 지난 4월 28일 평화통일방안을 내놓고 북으로 도망간 조소앙, 안재홍, 송호성 등이 방송에 나와서 우리더러 그에 응해나서라고 열심히 소리치고있다.

그런데 선거에 나선 야당측 선거강령에서 골자라고 할수 있는 통일문제를 보면 북의 주장과 꼭 같고같은 론조이니 이것은 참말로 괴이하기 그지없다.

지금 우리 선거를 겨냥하여 강력하게 무어 밀파된 간첩단들이 여기저기 출몰하고있다는 소리가 나돌고있을 때 북에 동조하는 세력에게 함부로 선거표를 던져주는 리적행위를 해서는 안될줄로 안다.》

조봉암은 리승만의 상통을 눈앞에 떠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무혈승리》를 하자고 꾀하던 놀음이 성사되지 못하니 이제는 막바지수까지 다 써먹는 판이다.

애당초 리승만이 미국의 조종밑에 만들어놓은 극우반공체제에서 골간을 이루는것은 북남간의 긴장과 적대의식이다.

리승만이 평화통일론을 그렇게도 무서워하고 북의 평화적접촉과 화해제의에 한사코 도리질을 하면서 오히려 《북진》나발만 더 요란스럽게 불어대는데는 타산이 있다. 남북간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산이 녹기 시작하면 통치권을 지켜낼수 없는것은 물론 미국의 식민지지배체제가 순식간에 허물어질수 있다는데 있다.

리승만은 《반공》과 《반북》이라는 쌍북을 치지 않는다면 제놈이 순간도 존재할수 없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정치의 독재화도, 총칼만능의 권력도 따라서 《반공》과 《반북》으로써만 유지되고있다.

오늘신문에 실린 리승만의 공포는 무시무시한 《빨갱이몰이》의 시작을 알리는 그놈의 지령과도 같은것이다.

조봉암은 드디여 리승만이 감추어두고있던 칼을 뽑아들었으며 선거전이 본격적인 싸움마당으로 변화될것이라는 생각으로 온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리승만은 전쟁전이나 전쟁후에 제놈의 권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 수습책으로 《빨갱이몰이》를 상투적인 수법으로 써먹어온다.

조봉암은 지난 시기 자신을 대중과 격페시키고 정치활동을 봉쇄하기 위하여 리승만이 집요하게 벌려온 더러운 모함들을 되새겨보았다.

어느때나 리승만은 조봉암의 진출을 막기 위해 테로와 모략을 악랄하게 벌려놓군 하였다. 세상여론은 리승만의 이러한 책동을 《조봉암고사작전》 혹은 《조봉암빨갱이몰이》라고 이름까지 지어 불러온다.

(비렬한 놈! 이번이라고 내가 넘어질것 같으냐? 우리 진보당이 밀리기만 할것 같으냐? 그따위 《빨갱이몰이》가 나를 선거에서 물러서게 할것 같으냐? 어림두 없다!)

조봉암은 속깊이 부르짖었다. 마음의 보짱을 더 굳건히 질러놓았다. 그리고나서 다시 여러 사람들의 흥분한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우달수가 자기의 립장을 침착하게 밝히였다.

《제가 부통령후보로 다시 나선다는것은 야당공조의 마지막 가능성마저 배척하는것으로 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말을 떼기 바쁘게 서정후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거기에 윤기중도 공감을 표시하고 신창균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민주당과의 결렬을 주장하는 저 사람들의 말이 옳을수도 있다. 감정적으로 볼 때 충분히 리해가 되고 마땅한 결과라고도 볼수 있다. 그러나… 다시한번 굴려보자. 우리는 선거일까지 자기가 세워놓은 원칙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가? 도덕적으로 볼 때, 우리 당의 리해관계에서 볼 때…

아니, 그런건 덮어두고 민중의 눈으로, 강화도사람들의 눈으로 살펴보자. 그 사람들의 도덕과 리해관계로부터 공과 사를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갈라내야 한다.)

저들끼리 열을 올리던 회의참가자들은 조봉암이 의연히 반응을 보이지 않자 머쓱해진듯 입을 다물고 조봉암의 눈치만 살폈다. 하기는 자기의 견해들을 깡그리 내놓았으니 더 말해볼것도 없는것이다.

한동안 그냥 묵묵히 사색을 더듬고있던 조봉암은 방안에 납덩이같은 분위기가 꽉 들어찬것을 의식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부터 활짝 열어놓았다.

때마침 효경이가 보리차를 끓여가지고 들어왔다.

《자, 한잔씩 마십시다. 너무 달아올라 이왕이면 시원한게 있었으면 좋았을걸.》

조봉암이 방안의 공기부터 가볍게 하고싶어 맏딸에게 롱조로 말하였다.

《그럼… 사과를 들여올가요?》

효경이가 아버지의 소리에 바빠맞아 돌아서려고 하는데 신창균이 텁텁하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됐다. 내겐 보리차가 제일이다. 인다오. 열은 열로써 눌러야지.》

《열이 나요? … 고뿔이나요?》

《그래 고뿔이다. 열이 안 나게 됐니?…》

《약을 가져올가요?》

《약? 무슨 약말이냐?》

신창균이 퉁퉁 대꾸하다가 말문이 막혀 입만 벌리고있는데 연경이가 먼저 키득거리고 이어 좌중에 웃음판이 터졌다.

서정후가 신창균을 돌아보며 핀잔하였다.

《에끼, 이 사람! 우리네 안사람을 그냥 얼치게 하는구만. 효경아, 걱정말아! 약은 이제 너의 아버지가 내놓을게다.》

진보당의 원로들은 누구나 효경이를 《우리네 안사람》이라고 정을 담아 불러준다.

효경이는 그만 얼굴이 새빨개서 웃고있는 사람들과 덤덤한 기색으로 차잔만 기울고있는 아버지를 번갈아 살펴보다가 연경에게로 구원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언니가 가져온 보리차를 좌중에 다 돌리고난 연경이가 생긋 웃으며 다가와 속삭이였다.

《일을 보세요. 중대문제가 생겼는데 아버지의 결론이 없어 기다리는중이예요.》

《그래?》

효경이는 그제야 알았다는듯 신창균에게 곱게 눈을 빨고는 방에서 나갔다.

효경이가 나간 다음에도 사람들은 차를 들면서 조봉암의 안색만 살피였다.

조봉암이 신문을 들고 말을 시작하였다.

《모두들 봐서 알겠지만 이건 반민주당공세로부터 반진보당에로 공격의 예봉을 돌릴데 대한 리승만의 공개적인 지령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벌어질 그 공세의 성격을 규정해주는 선언문이기도 합니다.

리승만은 또다시 <빨갱이몰이>작전을 펴나갈것입니다.

여기에 민주당 중앙의 극우익보수세력이 합세하고있습니다.

우리는 두개의 기본전선에서 가장 악랄한 협공을 받게 되였습니다.》

조봉암은 신문을 흔들며 이렇게 새롭게 조성된 정황부터 설명하였다.

사람들의 표정이 누구라 없이 착잡하게 굳어지는것이 알렸다.

조봉암은 말을 꺼내놓고도 자기가 그려놓은 정세가 주는 커다란 압박감을 다시 실감한듯 속이 답답하고 쓰려왔다. 조봉암은 애써 자기를 이겨내고싶어 숨을 한번 크게 내쉬였다.

《물론 우리는 지금까지 민주당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까지 리승만의 분렬리간책동과 민주당안의 일부 분자들의 배척놀음에 놀아나 민주당과의 협약을 맞받아 공개적으로 깨버려야 되겠는가?

그것은 도덕성의 견지에서 우리 당의 위신을 민주당의 수준으로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할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지지세력은 물론 야당공조를 원하는 재야세력과 민주당의 지지세력들도 실망시키게 할것입니다. 전술적인 견지에서 우리 당의 지지기반을 약화시키고 린접을 잃는것으로 됩니다.

우리는 단 한명이라도 민주당원들속에서 진보당에 대한 동정자, 지지자들을 찾아내야 하며 우리 당의 영상을 최대한 깨끗하고 진실하게, 민중의 리익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모습으로 부각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당은 선거를 하는 마지막순간까지 단합을 제창하고 단결의 구호를 들어야 하며 단합을 저애하는 사소한 언동도 피해야 합니다. 이것이 감정상으로 여러분은 물론 당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접수될수 없으며 일부에서는 역효과를 가져올수도 있다는것을 나도 압니다.

설사 그럴지라도 우리는 당의 훌륭한 미래를 위하여 오늘의 아픔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된 당의 참모습입니다.》

조봉암이 예까지 말했을 때 그때까지 머리를 짓수굿이 하고 벌겋게 상혈된 얼굴로 앉아있던 신창균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일제히 열렬하게 호응하여나섰다.

조봉암은 박수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최선을 다할것이지만 우리 당의 승리에 대하여서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

현재와 같은 독재적인 환경에서 리승만의 퇴진을 선거를 통하여 기대하는것은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가능한껏 결사의 투쟁으로 선거에 나서려고 하는가? 그것은 이미 고고성을 울린 진보당을 더욱 튼튼하게 세워놓기 위한 포석을 든든하게 마련해놓기 위해서입니다.

선거에서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연단을 통하여 우리 당의 주장을 민중에게 널리 선전하고 지지세력을 광범위하게 확보하자는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당에 환상은 가지지 말되 그자들의 배신적이며 사기적이고 반민중적인 행위를 만천하에 폭로규탄하기 위하여 계속 야당공조에 대한 신의를 실천적으로 보여줍시다. 그러니 야당공조에 대한 시비부터 버립시다.》

조봉암이 말을 끝내자 또다시 박수가 울려나왔다.

다만 서정후만은 아까부터 마지못해 손벽을 울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조봉암은 흰 무명바지저고리를 입고 단정하게 앉아있는 령감의 채수염이 흔들리는것이 자꾸 눈에 걸려들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령감의 불만을 너그럽게 리해하여주었다.

사실 조봉암이 야당공동후보로 나서자 서정후의 기세가 요새 충천하여졌다. 잘만 하면 조봉암이 이길수 있고 조봉암이 이기면 행정권의 수장자리는 떼놓은 당상이라는것이다. 늙마에 나라를 흔들어갈수 있는 중핵적인 세도자리를 눈앞에 둔 서정후는 젊은이들 못지 않게 정력에 넘쳐 선거활동을 밀고나가고있다.

하지만 민주당과의 공조를 놓고서는 이제는 기진하고말았다. 민주당패거리들에게 너무도 심한 괄세를 받은것이 그의 꽁한 성미에 쉽게 풀리지 않았던것이다. 평소에 고병직이나 탁준의따위는 눈꼽만치도 여기지 않던 그가 야당공조를 위하여 자존심을 누르고 갔다가 민주당의 대문앞에서 한시간 넘게 문전박대를 받고 돌아왔으니 노여울수밖에 없었다.

《위원장선생님께서 더 말씀하실게 없습니까?》

조봉암은 서정후에게로 눈길을 주다가 례의를 지켜 그를 내세웠다.

그러자 서정후는 다소 증이 나서 한마디 했을뿐이다.

《내 더 할 말이 뭐 있겠소. 당수의 말에 바늘 들어갈 자리나 있소? 사실말이지 당수의 립장은 거시안적이요.》

《하하, 참 선생님두…》

그 소리가 곱지 않고 매끄러웠으나 조봉암은 웃음으로 흔연히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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