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1
진보당 중앙의 결성을 선언하는 시각이 왔다.
서울시립극장은 남조선전역에서 선발되여온 853명의 대표들과 방청객들, 래빈들로 립추의 여지가 없었다.
오후 다섯시.
조봉암이 진보당추진위원회의 중진인물들을 거느리고 주석단에 나왔다.
주석단에 나온 사람들속에는 미국대사관의 정치참사의 긴장된 얼굴도 보였고 일본사회당에서 파견되여온 축하손님도 있었다.
원래는 롤만도 주석단손님으로 되여있었는데 본인이 여러가지를 고려하여 사양하고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래빈석으로 초청장을 바꾸어놓게 하였다.
참가자들의 우렁찬 박수에 받들려 첫 순서로 연탁에 나선것은 진보당추진위원회 상무위원인 시인 박지수였다.
박지수는 30대 중반의 혈기넘치는 사나이였다. 근래에 현실참가를 주장하며 진보적인 남조선시문단을 화려하게 채색하고있는 시대성이 강한 시인이였다.
시인은 앞으로 드리운 긴 머리칼을 멋스럽게 뒤로 제끼고 갈린 목소리로 담담하게 시를 읊었다.
피땀 흘리고 가신
선렬들의 영령에
알뜰히 다듬어새긴 반만년 배달의 정서를
땀으로 지키며 이어온 겨레의 홰불
…
새푸른 조국의 하늘아래
아하! 어린 양떼마냥
마구 짓밟히고 쓰러져간 백성이
갈바를 몰라 헤매고
흉흉한 민심들이 가득찬
찢기운 이 강토를
흘러내리는 검은 회오리바람을 뚫고
마침내 구원의 손길 뻗쳤으니
불뿜는 선렬들의 유지를 받들어
찬란히 솟아오르는
새로운 우리들의 태양
조봉암은 박지수의 무척 격앙된 시를 지금 저으기 긴장속에 듣고있었다.
박지수가 써온 시를 두번이나 뜯어고치게 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급진적인 경향을 그대로 담아 너무 직선적이고 혁명적인 언사가 많아 단통 《보안법》의 칼날을 맞게 되여있었다.
지어는 《빛나는 저 북녘에서 메아리쳐오는 변혁의 종소리 삼각산에 부딪쳐 이제 배달의 얼은 만방에 찬란하려니》 하고 씌여져있어 조봉암을 아연하게 해놓았다.
그래 조봉암은 로씨야의 작가 고리끼가 지은 《해연의 노래》를 그에게 외워보였다. 모스크바에서 외워두었던 시였다. 그가 읊은 시를 놓고 주변사람들도 그렇게 흐르는게 옳겠다고 합의가 되여 두번이나 다시 고쳤다.
이렇게 다시 들어보니 무엇인가 굳건하고 전투적인것이 뿌잇한 안개발에 가리워진것 같아 마음이 놓이였다.
시가 절정을 향하여 고조되여가고있었다.
담담하게 시작되던 목소리가 드디여 분화구를 찾아 끓어오르고있었다.
…
오, 진보세력의 굳건한 전위는
이 겨레와 온 누리
번영할 터전을 닦으며
자유평등과 우애로 얽혀
세계의 기발을 높이 들고
바라고 그리던
락원의 광장을 향하여
보무도 우렁차게
나아가리니
…
조봉암은 부지불식간에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수 없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날을 위하여 달려온 길고도 간고했던 세월의 해와 달이 감회깊게 흘러갔다.
조봉암이 새로운 당건설을 모색한것은 박헌영과 미군방첩대의 모략에 의하여 남조선공산당에서 출당철직되여 쫓겨나온 그때부터였다.
그때 조봉암은 처음에는 분명 혁명궤도에서 탈선된것이 분명한 박헌영을 견제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로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독자적인 당을 조직할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남조선공산당과 병행으로 되는 부대를 따로 뭇는다면 남조선혁명력량의 분렬약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자각으로부터 뒤로 물러섰다.
이때로부터 제3의 세력, 제3의 정치의 길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진보적인 민족주의세력을 단일한 틀거리안에 묶어세울 방략을 모색하였다.
그가 《국회》에 진출하여 부의장으로 되고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한것도, 그뒤로 두차례의 《대통령선거》전에 출마한것도 오직 정당건설을 위한 지지세력을 묶어세우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남조선에서 좌익세력이 합법적공간을 잃게 되고 자취를 감추고말자 조봉암의 포섭대상은 로동자, 농민, 지식인층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여왔다.
이렇게 하기를 꼭 10년을 채워온다.
이날을 위하여 참으로 얼마나 괴로운 낮과 밤을 하루처럼 이어왔으며 흘린 땀, 흘린 피는 얼마이더냐.
하기에 오늘을 기하여 흘러간 나날과 뿌려진 피의 방울방울을 읊조리는 랑송자의 격정에 넘치는 목소리는 그의 가슴에 봄비처럼 젖어들고있었다.
…
이제 권고하거니
인민의 대렬이여
거룩한 선렬의 영령이여
마음편히 쉬시라
고이고이 잠드시라
이어 우렁찬 환호속에 취주악대가 회의장에 입장하여 진보당의 리상과 기상을 내외에 과시하는 당가의 전주로 우렁차게 장내를 흔들어놓았다.
조봉암도 대표들과 그리고 대체로 지지자들인 대회방청객들과 함께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합쳤다.
자유는 우리의 생명
평화는 우리의 리상
이 땅에 구현하여서
력사를 창조하리
조국의 새날에 이름하여
혁신의 새 기발 높이 들어
오, 희망과 사랑의 거름되리
이윽고 림시집행부가 선거되고 조봉암이 대회의장자격으로 개회사를 하기 위하여 연단에 나섰다.
장내에 우렁찬 환호와 박수가 터져올랐다.
대표들은 자기들의 존경하는 당수를 향하여 두손을 흔들며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조봉암은 장내가 가라앉을 때까지 연단에 서서 감격을 금치 못하며 대표들을 둘러보았다.
대표들의 얼굴마다에 깊은 감회가 어려있고 창창한 래일에 대한 신심과 락관이 빛발치고있다. 혁신의 당을 무어내고 그 대표자가 되여 력사의 한페지를 새겨가는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있다.
조봉암은 대표들을 향해 자리에 앉으라고 손을 흔들어보이였다.
이윽고 참가자들의 자리가 정돈되자 여러번 지우고 쓰고 다시 지우고 다듬어온 개회사의 원고를 연탁우에 펴놓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눈앞이 갑자기 흐릿해지다가 종이장에 있는 글들이 아물거리여 도무지 읽을수가 없었다.
주체할수 없는 흥분과 가슴이 터질것 같은 격정으로 조봉암은 끝내 글자들을 가려보지 못하자 대표들을 향하여 고개를 들었다.
별같은 눈동자들이 일시에 가까이에 마주쳐온다.
피와 땀을 다 바쳐 모아들인 나의 귀중한 동지들!
얻어맞아 터지고 쓰러지고 가족들까지 빼앗기고 생활터전까지 날리면서도 오늘의 이 시각을 향하여 매진하여온 미더운 동지들!
순간 그의 입이 벙끗 열리더니 원고지에는 없었고 이제까지는 10년세월 한번도 입에 올리지 못하였던 부름말이 저절로 튀여나왔다.
《동지들! 여러 동지들!》
그의 개회사원고에는 《여러분!》으로 시작되여있었다.
이렇게 부르니 마음은 한량없이 흐뭇하다.
10년간 묵어온 체증이 일시에 쑥 내려간듯 속이 후련하기 그지없다.
이 부름말이야말로 10년세월 소원했고 그래서 열과 정을 다 바쳐 가꾸어온 소중한 보물처럼 느껴졌다.
조봉암의 속깊은 심중을 읽었는지 아니면 조봉암이 불러놓은 그 부름말이 마음과 마음들에 뜨거운 소용돌이를 일으켰는지 또 폭풍같은 박수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조봉암은 열띤 어조로 개회사를 시작하였다.
《나는 이런 공개석상에서 이렇게 동지라고 불러본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지난 10년간은 부르고싶어도 부를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 여러 동지들을 다른 말로 부르고싶지 않습니다.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우리가 1인독재를 배격하여 10년세월을 넘었지만 우리끼리 모여서도 동지라고 불러보지 못하였습니다.
동지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들끼리만 통하는 호칭 같아서 번지기조차 무섭기도 했지만 더구나 우리모두가 하나의 뜻으로 뭉쳤다고 말할수 없었기때문이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부릅니다.
진보사상을 주장하는 우리 당의 강령을 접수하고 진보당의 기치를 들고 뭉쳐진 여러분들을 나의 동지, 우리의 동지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또다시 장내에서는 우렁찬 환호성이 드높이 울려퍼졌다.
대회장의 여기저기서 대표들이 일어나고 그들을 따라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먼저 선창을 뗐는지 《동지! 동지!》라는 열광적인 웨침이 크게 울리더니 모두가 손벽에 박자를 맞추며 힘차게 부르짖었다.
《동지! 동지! 동지!》
장내를 진감하는 그 소리에 모두의 심장은 하나로 고동치고 그 신성한 부름앞에서 끝없이 숭엄해지는것이였다.
조봉암은 대표들이 자리에 앉고 대회장에 정숙이 깃들자 흥분을 가라앉히였다. 그는 한결 차분한 어조로 나라에 조성된 정세를 분석하고 과업을 제시하였다.
《지금 세계는 크게 달라지고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여전히 보수세력이 기존정치주장과 절대권력에만 의존하여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발전을 가로막고있습니다.
우리 민족 지상과제인 남북통일문제에서도 적극성이 전혀 없으며 이미 낡은 시대의 류행어로만 쓰이던 황당한 구호만 제창하고있습니다.
민주주의란 말뿐이고 민중의 자유와 인권은 론할바가 못됩니다.
산업은 날로 위축되고 실업자가 도시를 휩쓸고 농민들은 지주와 지배세력의 수탈에 농토를 빼앗기고 남조선전역에는 못살겠다는 아우성만이 하늘을 찌르고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모든 보수정객들은 어떻게 하면 종신토록 권세를 잡고 리권을 놓치지 않겠는가 하는 하나의 목적에 집착되여 나라와 민중의 복리나 안녕은 안중에도 없이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어가고있습니다.
나라를 바로잡고 겨레를 살리는 유일한 길은 오직 진보적사상을 가진 혁신적인 대중정당을 조직하여 정권을 담당하며 정치와 사회의 전반에서 대변혁을 단행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수많은 동지들이 세월의 년륜을 감아오면서 피와 땀과 희생을 거듭하여 마침내 진보의 기발을 휘날리게 된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난해 12월 당추진위원회를 내오면서 진보당의 창립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차 3대<대통령선거>전에 돌입하였던 관계로 조직기구를 완비하지 못하였고 정당의 체모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선거후에는 또 야권통합놀음에 말려들어 당의 기틀을 세우기 위한 사업이 지연되였습니다.
드디여 오늘 우리는 간고한 투쟁과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진보당이라는 강력한 민중의 당을 온 세상에 과시하게 되였습니다.》
조봉암의 연설은 참가자들의 우렁찬 박수로써 자주 끊어지군 하였다.
조봉암은 자기가 개회사에서 흥분한탓으로 서두를 지나치게 길게 라렬하는듯싶어 서둘러 당앞에 제기된 과업들을 묶어서 간단간단히 렬거하고 이런 말로써 결속하였다.
《동지들! 우리는 혈맹의 동지들로 모여앉았습니다.
우리 진보당원들은 지금 가시밭길을 걷고있습니다.
우리 당의 존재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두려워하고 칼을 빼들고있는 무리가 우리 주변에서 때를 기다려 어슬렁거리고있다는것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걸어온 길도 험난하였지만 이제 걸어갈 길은 더욱 무수한 장애와 시련이 겹쳐드는 형극의 길입니다.
시대의 선각자들이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수난자들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흘린 피와 희생으로 새 사회, 새 제도가 이루어져왔습니다.
민중이 주인으로 되는 새세상을 기어이 이 땅에 펼쳐놓으려는 우리의 리상은 인류의 지향이며 동시에 우리 겨레의 뜻입니다.
우리는 진보당이야말로 근로대중의 전위이며 민중을 살리고 이끌수 있는 참다운 지도적력량이라는것을 확신성을 가지고 선언합니다.
우리 당원들은 살아서는 나라의 주인으로 당의 리상을 실천함으로써 근로민중의 벗으로 되는것이요, 죽어서도 자기의 고귀한 위업에 바친 피와 땀으로 력사의 수레바퀴를 밀고나감으로써 자기들의 이름을 천추만대에 빛내가는 시대의 선구자들입니다.
우리는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똑같은 마음으로 특히 우리 당과 우리 동지들을 사랑하고 아껴야 하겠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집행부의 이름으로 이번 대회에서 혹은 대회가 끝난 후에도 개별당간부들의 오유에 대하여서는 직위의 상하에 관계없이 당수에 이르기까지 타협함이 없이 비판하고 당의 강화발전을 위한 건설적인 의견들을 많이 내놓아줄것을 부탁하면서 이것으로 저의 개회사를 마치고저 합니다.》
조봉암이 또다시 대회장을 진감하는 환호에 묻혀 자리에 가서 앉자 윤기중이 다음은 축사가 있겠다고 하면서 첫 순서로 로성팔의 이름을 불렀다.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대표들의 표정이 이름을 헛갈리지 않았는가 하는 기색들이 력력하였다.
몸이 가늘고 얼굴이 바싹 여윈 로성팔이 래빈석에서 뚜벅뚜벅 무겁게 연탁에 나와 긴 허리를 굽석하였으나 박수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집행부에서 조봉암과 몇사람만이 박수를 치다가 청중이 따르지 않자 그것마저 이내 사라졌다.
조봉암은 대회참가자들의 심리가 리해는 되였지만 축사를 하려고 나선 로성팔에게 미안쩍은 생각도 들었다.
로성팔이 자기의 어지러운 과거를 두고 여러번 자기앞에서 속죄의 빛을 보여왔던지라 이 고비를 헌걸차게 넘겨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대회참가자들에게는 지금까지도 로성팔이라고 하면 리승만과 미국의 현지감독관들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사냥개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있었다. 사람은 자기 인생의 얼룩점을 지워버리는것도 쉽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망막에 새겨진 자기의 초상을 바꾸도록 하는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로성팔은 참가자들의 랭랭한 반응에 처음에는 얼떠름해있었다. 다음순간 모닥불을 들쓴것 같은 얼굴을 도고하게 쳐들고 장내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축사로 나선 래빈에 대한 인사가 이거야 하는 송곳같은 반발의식이였다. 그는 애써 용기를 가다듬고 축사를 시작하였다.
《여러분! 나는 무소속의 인사들이 대표로 떠밀어주어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나서기는 했으나 실상 방금 목격한바와 같이 여러분들의 박수를 받을만 한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저도 그걸 알기에 마땅한 대접을 받고있는것이니 여러분의 랭대가 노엽지는 않습니다.》
로성팔의 솔직하고도 실망과 익살이 묘하게 어울린 소리에 장내에 얼음같던 랭기는 어눌해지고 엷은 웃음이 한고패 가볍게 스쳐갔다.
《다들 알고계시겠지만 내가 지난 기간 서울경찰청장노릇도 해보았고 총리노릇도 하면서 리승만의 번견이 되여 여러분에게 죄송스러운 일을 오죽이나 많이 했나요. 그러한즉 축사로 나선 인간이 여러분의 박수를 못 받았다고 과히 섭섭치 않단 소리웨다.》
로성팔의 소리가 점차 진지해지고 장내도 숨소리 하나 없이 물뿌린듯 잠잠해졌다.
저 작자가 왜 저따위 횡설수설을 이 감격스러운 자리에서 꺼내놓는지 어이없어하면서도 호기심이 어린 표정들이였다.
정말 네가 지금까지 굳게 둘러친 어지러운 운명의 담장을 허물었을가 하는 기색들이다.
조봉암도 로성팔이 축사로 적어온 원고는 덮어두고 딴전을 피우는 바람에 저 사람이 이 후더운 자리에 찬서리를 치게 되지 않을가 자못 걱정이 되였다.
하지만 로성팔은 여전히 자기를 보는 뭇사람들의 눈길이 어떻건 내 아랑곳할바가 아니라는듯 한 배심이다.
로성팔은 정치의 복덕방에서 찌들려온 인간답게 비위살 두텁게 다소 늘어진 어조로 그냥 신변잡사를 엮어나갔다.
《여러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합니다만 나는 몇달전 감히 진보당에 들어오겠다고 죽산선생을 찾아갔더랬습니다.
하, 내 비서라는 사람이 이 청파가 칠갑도 맞기 전에 로망이 들었다고 내 발목을 잡는거예요. 하지만 난 군소리말고 따라나서라고 윽박질렀지요.
그럼 내가 왜 리승만의 턱밑에서 떨어지는 고물이나 얻어먹으며 지낼노릇이지 늙마에 리승만이 죽어라고 미워하는 진보당의 우산밑으로 제발로 기여들려고 했는가?
한마디로 진보당이 선거전에서 내놓은 구호가 한생을 극우보수정객으로 오염될대로 오염된 내 머리빡을 불이 번쩍나게 후려친것입니다.
이자 방금 죽산선생이 개회사에서 자랑스럽게 선언한것처럼 진보당은 수탈없는 경제,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사회, 모두가 자유롭고 맘편히 사는 세상을 세우겠다고 합니다.
이건 지주패당의 리익만을 위한다는 민주당이나 특권세력의 리해관계나 지켜주는 자유당과는 완전히 구별이 되며 완전히 훌륭하고 완전히 공명정대한 구호입니다. 틀림없어요!
그래서 조봉암당수가 선거에 나서서 <갈지 못하면 살수 없다! 혁신만이 살길이다!>고 소리높이 웨친겁니다.
난 그 구호에 가슴이 뭉클했고 한생을 잘못 살았다는것을 뼈저리게 반성했지요. 그리고 그 구호 하나만 가지고도 덕지덕지 오염된 때국을 말짱 씻어버리고 죽산만세를 부르며 조후보에게 선거표를 넌떡 바쳤던겁니다.》
그러자 저으기 긴장되여있던 장내에 보뚝물 쏟아지듯 짜그르르 박수소리가 쏟아져나왔다.
그제야 로성팔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호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은 구슬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대회장을 향하여 허리를 굽석거렸다.
《내 축사가 길어진다고 흉보지 마시고 또 한소리 들어봐주시오. 지금 관청이요, 언론이요 모두 <북진>, <북진> 하고 귀아프게 짖어대고 북진통일소리를 해야 애국자라고 개올리고있는 판인데 진보당은 용감하게도 <아니다! 평화통일이다!> 하고 나섰습니다. 얼마나 멋지고 쾌남장부들다운 배짱이요?!
한때는 미국사람들을 등에 업고 <호령 한마디로 천하를 움직인다.>고 희떱게 호언장담하던 이 청파도 생각은 뻔하면서 목건사를 할래기 엄두도 내지 못했던 구호요. 왜서인가? 북진통일에 위압당해 얼이 빠져있었기때문이지요. 두뇌가 없는 인간, 사고가 없는 부하를 귀애하는 리승만의 눈총이 무서웠기때문이였지요. 나도 맨 처음 평화통일이라는 진보당의 구호를 들었을 때 온몸이 오싹해왔습니다. 당장 란리가 일어날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죽산과 여기 모인 여러분들의 결사의 의지였습니다.
지금 일부에서는 당신들이 추켜든 구호들을 걸고 <친북>이요, <련공>이요 시비중상하면서 금시 나라기강이 흔들리우는것처럼 엄살을 떨고있는데… 난 찬성입니다. 대환영이요! 단언컨대 통일을 반대하는 놈들은 천추만대에 용서 못할 역적도배입니다.
그런데 통일을 어떻게 해야 되노? 진보당의 주장대로 평화적으로 해야 합니다. 절대로 동족끼리 싸워서는 안되오. 지난 전쟁이 그걸 보여주지 않았소. 3년간의 전쟁으로 해서 우리 민족이 당한 고통과 불행과 비극은 아마도 백년이 지나도 씻어버릴수 없을겁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렬강들도 유엔의 감시밑에 총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소. 제네바에서는 북과 남이 마주앉아 회담까지 하고있는 판인데 아직도 북진통일이라니 쓸개빠진 망발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까지 나도 그렇구 백성들도 그렇구 평화가 좋다고 마음속으로는 백번천번 옳다고 하면서도 집권세력이 휘두르는 북진방망이에 얻어맞을가봐 입다물고 끙끙 앓아만 온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용감하게도 평화통일이다 하고 소리쳤으니 정말 시원스러운 장거입니다. 골받이라면 날 따를 놈이 서울장안에 없노라고 했는데 이거야말로 풍운아 조봉암당수만이 결행할수 있는 장거이고 죽산의 기질을 그대로 닮은 진보당만이 할수 있는 집권의 장벽에 대한 대담무쌍한 골받이입니다.
전번 선거에서 권태구네의 곤봉에 머리가 깨지면서도 진보당에 바쳐준 216만표는 사실 평화통일구호에 모아준 백성의 대바른 마음이올시다. 그러니 내가 진보당을 따라나선것이 우연이겠는가? 거짓이겠는가? 대표 여러분, 이제는 이 청파를 곱게 봐주시오.》
로성팔의 노죽스러운 부탁에 장내에는 흐아- 하는 선의가 담긴 폭소가 터지고 열렬한 박수소리가 뒤를 따랐다.
여기저기서 《청파!》, 《청파!》, 《청파!》 하는 련호가 파도처럼 일어번졌다.
어느 구석에서 《청파가 환생했소!》 하는 열띤 웨침이 울려나왔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그냥 장내에 물결쳤다.
《여러분! 우리 무소속인사들, 무당파인사들이 드리는 열렬한 축하의 인사를 다시 받아주십시오.》
로성팔은 대회장의 여기저기에 대고 굽석굽석 절을 하고나서 엄숙하게 축사를 결속하였다.
《여러분! 이 땅의 량심과 리성과 혼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 그걸 보고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모두가 소중하구 자랑스럽구 또, 부럽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더불어 배달민족의 기개를 내외에 과시한 진보당 중앙위원회의 결성에 다시금 축하를 드리면서 금후 진보당의 앞날이 창창하기를, 아름다운 무지개가 길이 비끼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연단에 오를 때와는 달리 로성팔은 만장의 우뢰같은 박수갈채에 묻혀 가벼운 걸음으로 길고 마른 허리를 쭉 펴고 연단을 내리여 래빈석으로 걸어갔다.
래빈석에 앉아있던 일부 자유당과 민주당의 인물들이 쓰거운 미소로 그를 맞아주었으나 로성팔은 의기양양해서 아직도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는 장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봉암도 로성팔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감사를 보내였다. 그가 이렇게 감명깊게 회의장의 분위기를 돋구어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것이다.
이어 일본의 여러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에서 보내온 서면축사가 전달되였다. 그뒤로는 자유당과 민주당에서도 연단에 나와서 짤막하게 축하연설을 하였다.
진보당 중앙위원회결성대회는 순조롭게 계획된 자기 일정대로 진행되였다.
원래 내무부에서는 중앙당결성대회부터 분쇄하기 위하여 신임내무부 장관 정제관의 주도밑에 여러모로 면밀한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있었다.
깡패집단을 대량적으로 투입하여 대표들의 숙소와 대회장에 쳐들어가 란투극을 벌려놓도록 계획하였다.
그리고 대표들을 랍치하여 대회기간에 서울밖에 붙잡아두며 대회장에 대한 전력공급과 편의봉사도 차단하도록 되여있었다.
그러나 예상밖으로 조봉암이 결성식을 앞두고 공개적인 선전공세를 광범하게 벌려놓고 내외의 명사들을 대회손님으로 폭넓게 받아들이게 되자 리승만과 내무부 장관 정제관은 조심스러워졌다.
다울링과 버드까지도 작전을 무조건 중지하라고 정제관에게 명령하였다.
하는수없이 정제관은 깡패집단을 대전쪽으로 쫓아보냈다. 계획되였던 일체 암해작전을 취소하는수밖에 없었다.
조봉암의 전술은 진보당의 위상을 내외에 과시하고 도전세력들의 방해책동을 분쇄하는데 매우 적절한 림기응변이였다.
진보당은 중앙당결성대회를 무난하게 그리고 성과적으로 치르었다.
중앙당결성대회장에서 보여준 진보당의 과감한 조직력과 위력은 그 도전세력들을 완전히 혼비백산하게 하였다.
버드의 조종밑에 벌어진 조봉암퇴진과 진보당해체를 전제로 하는 혁신대통합운동을 통하여 크게 위축되고 분렬되여가던 진보당이 중앙당결성대회를 계기로 다시금 서울의 정치권에 우뚝 솟아오르게 된것이다.
3일간에 걸치는 중앙당결성대회를 끝마치고 진보당 위원장으로 선거된 조봉암의 선창으로 대표들이 서로 얼싸안고 만세삼창을 웨칠 때 대회장을 움씰움씰거리는 그 장엄한 기상은 경무대의 기둥을 뿌리채 흔드는것만 같았다.
하기에 서울의 우익계신문들은 그 도도한 웨침은 《경무대를 짓누르는 좌익의 뢰성》이라고 비명을 올렸고 진보적인 신문들은 《암흑의 동토대를 들부시는 장쾌한 함성》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